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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돌아가는 이야기들을 보고 있노라면 참 불편한 것도 많고, 싸울 것도 많은 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안을 불편해하고 그 불편해하는 사람을 보며 왜 불편해하나 이해하지 못하여 불편해하고, 조용히 있지 못하고 불편하다고 표현하는 사람들을 보며 불편해하고 등등 끝도 없이 이 불편의 사슬은 연결되고 또 연결되어 간다.


참고로 이 글은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을 나름 정리한다고 한 것인데 상식과 편견이라는 주제 자체가 너무 모호하고 광범위하다 보니 정리가 잘 안 되어 글이 난삽한 점을 미리 밝힌다.


미국에 살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가 다양성(Diversity)이다. 그런데 이 단어를 대하는 문제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 다양성의 추구는 남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종종 어떤 의견은 ‘옳은 것'으로 돌변하여 반대를 허용하지 않는 ‘믿음'이 되어 버리고, ‘나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라는 의견은 의견으로서 존중되지 않고 종종 폭력적인 공격에 시달리기도 한다. 다양성을 추구하면서 무엇을 다양하다고 할지에 관한 논의는 내가 쓰고자 하는 내용과 다르기에 일단 넘기겠다. 그러나 그 문제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다양성을 추구하면서 가장 방해되는 요소를 꼽자면 편견(Bias) 일 것이다. 그런데 편견은 종종 상식과 구분하기 쉽지 않다. 어떤 상황에 대한 경험이 비슷한 상황에서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Thinking, Fast and Slow, 아주 좋은 책으로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런 경험이 쌓여서 그 사람의 행동 양식을 결정하는데, 집단의 대다수가 비슷한 행동 양식을 취하게 되면 그것을 상식적인 행동이라고 하지 않을까 한다. 물론 이도 어려운 이야기이긴 하다. ‘상식'이라는 단어도 ‘상식적인 행동'이라 할 때와 ‘시사 일반 상식'이라고 할 때 조금 다른 의미가 있으니 말이다. 복잡한 이야기는 일단 덮어두고, 또는 모르겠고. 그러고 보면 정말 상식과 편견 사이에 구분 점이 있긴 할까? 극단적인 경우를 생각하면, 즉, 유색인종 차별과 성차별 같은 것을 생각하면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극단에서 조금씩 이동하다 보면 그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이 분명히 존재하며, 이에 대해 불편해하려고 작정하면 아주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조금 다르게 이야기하여 더 어렵게 말하면, 시대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상식이 다르고, 시대에 따라 상식이 변해간다는 말은 어느 시점에 상식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고 그것이 커지고 커져서 다수의 의견이 바뀌어나가는 일은 인류 역사에 계속 반복되어 왔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면 그 반동이 아직 성공할지 못할지가 결정되지 않은 과도기 단계에서 반동을 관철하려는 사람과 억누르려는 사람 사이의 갈등은 당연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냥 서로 너그러이 다양성의 차원에서 모든 의견을 동등하게 취급하는 사회는 너무 이상적이다. 나는 그런 사회가 있으면 거기에 가서 살고 싶으나, 내가 사는 사회가 그렇게 될 거라는 희망은 솔직히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상식을 무엇이라고 정의하면 좋을까? 상호 협의 없이 사용 가능한 개념이라 하면 말이 될까? 그러니까 수학에서 공리와 같은 개념이라고 볼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는 ‘협의 없이 사용 가능한 개념'이 점점 사라지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이런 측면에서 현대사회는 역사에서 가장 큰 과도단계에 들어선 것으로 생각한다. 모든 경계가 무너지거나 도전받고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상대방이 그(he)라고 부르기를 원하는지 그녀(she)라고 부르기를 원하는지를 묻는 것부터 대화가 시작돼야 하는 시대를 향해가고 있다. 모든 운동(movement)에는 목적이 있을 텐데 목적이 무엇인지 모호한 경우가 요즘은 많은 것 같다. 그녀라고 부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그라고 부르면 불쾌할 것이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미리 확인하고 그녀라고 불러주면 좋긴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누가 나에게 그라고 부를까요 그녀라고 부를까요라고 묻는다면 기분이 나쁠 것 같다. 그러니까 그라고 부를지 그녀라고 부를지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라고 물은 다음 예라고 하면 그라고 호칭을 할까요 아니면 그녀라고 호칭을 할까요? 라고 물어야 하는 아주 복잡하고도 오묘한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해 놓고도 정말 오묘한 이야기이다. 상대방을 존중하기 위하여 그 사람이 불편해할 수도 있는 질문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확실한 기준점 즉, 상식이 있다면 이런 문제를 쉽게 넘길 수 있는데 모든 상식이 도전받고 있는 이 시대에는 기댈 기준점이 없다. 그러니 입이 있는 사람은 모두 소리치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모두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어떤 행동이건 어떤 말이건 간에 불편한 사람은 존재한다. 요즘같이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라는 말을 많이 했던 적이 없다. 단언컨대 내가 어렸을 때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라는 말을 자주 하지 않았다. 모두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이상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수많은 이상주의자가 있었고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다르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이제 그 ‘상식'이 되었고, 진리이자 이 시대 집단지성의 산물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불편해하는지 예를 들어보자. 소설가협회, "소설 쓰시네" 발언 추미애에 공개 사과 요구의 경우가 불편해하려고 작정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사안 자체가 코미디라고 생각하긴 하는데… 아 참 이렇게 말하면 코미디언협회에서 뭐라고 하려나? 보통 ‘소설 쓰시네'라는 표현은 누군가 너무 무리한 상상을 하는 경우 비아냥대는 방식으로 사용한다. 물론 가벼운 핀잔 정도로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추미애 장관과 의원 사이의 대화로 적절한 표현이었냐 아니냐는 내가 하고 싶은 말과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에 논하지 않겠다.


저런 요구를 하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어떤 부분에서 저렇게 집단행동을 해야만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것도 과거에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문제였는데 이젠 아니게 된 어떤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적어도 메시지의 측면에서 그들의 메시지는 설득력이 없다. 이런 주장이 합당하다고 한다면 모든 형태의 ‘비유'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소설도 무미건조해지겠지. 그러면 아무도 안보고 소설도 없어지겠지. 너무 극단적인 논리의 비약이긴 한데, 뭐 아예 말이 안 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Invention of Lying (2009)라는 영화는 제목이 보여주듯 거짓말에 관한 이야기인데, 작중 설정으로 소설이 없다. 그러니 이런 비유는 동서양을 막론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게 지금 개봉되었다면 소설가들이 또 성명을 발표하려나?) 물론 이런 생각조차도 내가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는 편견에 기인한 것일 수 있기에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그런데 동시에 이런 부분에까지 조심스러워져야 함에 약간 서글프기도 하다. 자유에 대한 추구가 나를 얽매이게 하고, 다양성의 추구가 모두를 획일화되게 하는 듯해서 걱정도 되고 서글프기도 하다.


불편의 문제에서 상식의 문제로 다시 돌아와 보자. 민주주의를 “다수의 소수에 대한 폭력"이라고 생각하는 내게 현대의 흐름은 그냥 소수만 인정하던 개념이 다수의 것이 되면서 권력이 이동되는 현상일 뿐이기는 하다. 다만 그 다수가 된 사람들이 자꾸 당위를 무기로 하여 공박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게 불편하다. 민주주의는 사회적 합의가 중요하지 (즉, 누가 다수냐)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가 중요하지는 않다. 옳고 그름은 절대성을 지니는 개념이고, 이것은 다수 소수의 문제와 별개이다. 다수의 동의로 옳고 그름이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개념을 ‘나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해' 정도로 표현해야지 ‘이것이 옳은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걸 따라'라고 하면 안 된다. 그렇게 표현하는 순간 아주 자연스럽게 나와 같지 않은 사람을 그르다고 규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LGBTQ parade가 있었는데 회사에서 같이 가자고 권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LGBT가 점점 확장되더니 이제는 LGBTTQQIAAP라고 한다. 어디까지 길어질지도 흥미로운 볼거리이다. 이렇게 길어지는 과정 역시 상식이 깨지고 더 깨어져 나가는 현상을 보여준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운동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성적 취향이나 자기 결정에 관계없는 공정한 권리와 기회가 주어져야 함에는 동의하지만, 그 운동이 추구하는 방향 즉, 개인의 제한 없는 성적 자기 결정권에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했고, 완전 미친놈 보는 듯한 눈빛을 답례로 받았다. 물론 민주주의는 다수의 소수에 대한 폭력이라고 믿는 나는 이런 대우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소수이니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하기는 하다. 그런데 그들이 그들의 생각을 존중받기를 원한다면 동의하지 않는 사람의 생각도 존중해줘야 하지 않나? 내가 너무 순진한 것일 수도 있다. 다만 과거 당위성에 근거한 공격으로 상처 받았던 이들이 당위로 반격을 하는 부분이 씁쓸하다.


나를 미친놈 보듯이 한 사람에게는 이렇게 답을 했었다. 민주주의는 사회적 합의가 중요하고 그 합의에 이르기 위해 개개인의 의견은 의견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 옳고 그름을 논하고 싶다면 누가 최종적으로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있겠는가.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투표가 그 방편이라고 대답하고 싶다면 그것은 다수결에 의한 결정일 뿐이고, 심지어 그것도 처음으로 돌아가서 모두의 의견이 존중받을 때나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말하겠다. 옳고 그름을 논하려면 왕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때에는 왕이 최종 결정을 해 줬으니 그런 방식이 가능했었다. 물론 미친놈 보듯 하는 눈초리의 변화는 없었다. 참고로 상대방은 나보다 거의 20살이나 어린 사람이었다. 그러니 상식의 간극은 더 컸을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고린도전서 10: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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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8. 4. 23. 12:48

나는 과연 선한 일을 할 수 있는가 Opinion2018. 4. 23. 12:48

내 아내는 나와 아주 다른 사람이다. 그래서 많이 힘들었고 그래서 많이 감사했으며, 여전히 갈등이 많고 여전히 감사할 거리가 많다.


우리는 둘 다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 믿음에서 도망쳐 본 일도 없다. 계속 그 '길' 위에 있었냐고 물어본다면,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적어도 둘 다 '믿는 사람처럼 보이는 상태'는 꾸준히 유지했었다. 더군다나 나름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기에 머리도 어느 정도는 차 있다 할 수 있다. 따라서 구원에 관하여, 그리고 신앙생활에 관하여 '그리 다르지 않은' 이해를 하고 있다. 그런데 차이도 있고, 그 약간의 차이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크게 두드러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사실 다른 큰 차이들을 이겨나가고 이제 그다음 차례로 떠오르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 둘의 대화에서 자주 거론되는 주제는 '신앙생활'이다. 그런데 이 주제의 이면에는 '구원'에 관한 이해의 불일치가 깔려있다. 지식과 고백의 측면에서 우리 둘은 같다. 그런데 적용에 있어서 '서로 다른 지점'이 존재한다.


그 많은 주제를 전부 다 다룰 수는 없고 오늘은 최근 아내가 한 다음의 말에 관해서 이야기해 보고 싶다.

나는 선을 행할 수 없는 존재이며, 내가하는 모든 일은 악해.

고백으로 보인다. 이런 부류의 절망 또는 고백은 아마 거의 모든 기독교인이 한 번쯤은 했었고, 지금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바울이 이 문제에 관하여 고백적인 글을 로마서 7:18에 남겼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로마서 7:18)

물론 "원함은 내게 있으나"라고 하여, 적어도 그가 선을 행하기 원한다고 함으로써 적어도 나나 내 아내와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나 결국 그도 사람이어서 결코 우리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로마서 7장 전체를 깊이 묵상해보기를 권한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나'를 서로 다른 두 부분으로 구분한다: 속사람과 겉 사람, 마음과 육신 (혼과 육신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나와, 죄의 법을 섬기는 나 등등.


그런데 위에 말한 바와 같이 바울이 이야기하기를 '나'는 선을 행하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로마서 7:19)


다른 곳에서 바울은 다시 한번 사람은 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한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로마서 3:10-12)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대상은 9절에 죄 아래에 있는 사람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로마서 7장의 표현대로 하면 '죄의 법을 섬기는 육신으로서는 의인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로마서 3:9)


여기까지 종합하면, 바울은 '나'를 두 부분, 즉, 속사람과 겉 사람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속사람은 성령의 원하는 바를 따르고 겉 사람은 육신의 원하는 바를 따르며 이 둘은 절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5:17)


그런데 천국은 거듭나야 갈 수 있다. 즉, 구원은 거듭남을 뜻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한복은 3:3-5)

그리고 우리는 거듭난 상태이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19-20)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은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이라 표현함으로는 '나'를 '육체'에서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결국 이 육체 또한 변화될 것이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고린도전서 15:53-54)

그러나 육체가 변화할 때까지 '나'는 여전히 육체 아래에 있고 그 육체는 죄에 속박되어 있다.

I am of flesh, sold into bondage to sin. (로마서 7:14, NASB)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나는 선을 행하지 못하는 존재인가? '나'를 육체로 규정한다면 그렇다. 육체인 나는 절대 선을 행할 수도 없고 선을 행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내 속사람, 즉, 성령에 속한 나는 선을 행하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내가 선한 일을 할 수 있는가.

육신을 죽여야 한다. 매일 매일 육신을 죽이고 성령이 인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육신만 죽이면 나의 속사람은 자연스럽게 성령의 원하는 바를 따라 살게 된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바울은 날마다 죽는 것을 자랑하였나 보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31)

그리고 다른 곳에서 바울은 자기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 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린도전서 9:27)

그런데 이런 모든 과정이 결코 쉬울 리가 없다. 어떻게 보자면 예수님의 도우심 없이 우리들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미션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아내의 위와 같은 고백은 사실 우리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는 것 또는 이미 해 주신 것을 의미 없게 할 수는 없고, 또한 그냥 절망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내가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내가 새 사람을 입어 하늘나라에 합당한 존재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바로 복음이다. 복음을 복음으로 믿는 한, 내 안에 선한 일을 이루실 예수님도 함께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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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3. 9. 7. 05:42

NASB MacArthur Study Bible Opinion2013. 9. 7. 05:42



NASB 번역은 번역 중에서 가장 어려운 번역으로 분류되는 성경임과 동시에 가장 직역에 가까운 성경으로 분류되는 성경이다. 아래의 도표에 보이는 바와 같이 NASB보다 Word for Word (직역)에 더 치우쳐 있는 성경은 Interlinear (행간 성경)밖에 없다.


ref: http://defendingcontending.com/2009/08/31/bible-translation-comparison-chart/


이미 다른 성경을 소개할 때에 밝힌 바와 같이 나는 직역 성경을 선호한다. 이유라면 내가 무식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헬라어를 읽을 줄 알아서 대본과 역본을 비교할 수 있는 실력이 되면 오히려 역자의 의견을 검토할 수 있는 의역 성경을 선호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정도 실력이 되지 않으므로 그냥 그대로 번역된 성경을 선호한다. 의견과 적힌 그대로의 사실 사이의 구분이 되지 않는 성경은 불편하다.


미국에서도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NASB 번역을 선호하거나 적어도 중요한 참고자료로 사용한다. 그리고 독해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번역을 사용하는 교회도 있다. (미국인이라고 영어 성경을 쉽게 읽을 거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도 한국말로 쓰여있으면 읽기야 하겠지만 전부 이해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같은 이유로 많은 미국인이 KJV나 NASB를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영어에 능통한 사람이 아니라서 기술적으로 이 번역의 좋은 점을 설명하지는 못하겠다. 직역 성경답게 NKJV와 더불어 일사일어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성경이라는 점을 말할 수 있고, 번역이 진중하므로 하나님의 명령을 명령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번역되어 있다는 점 정도밖에 말할 수 없음을 용서하기 바란다. 하나 더 말하자면 읽기가 쉽지 않다. 영어 문법에 맞추기보다 직역에 초점을 맞춰서 번역하다 보니 일반 영어문장을 읽기보다 어렵다.


주석은 매우 간단하다. 다른 주석들과 달리 MacArthur라는 개인이 주석하였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풍성한 주석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개인적으로는 많은 부분에서 이 사람의 주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읽다 보면 글로만 접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참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확신은 든다. 잠시 이 사람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면, 이 사람은 Grace Community Church (http://www.gracechurch.org/)에서 시무하고 있다. 내가 이 교회 근처에 살았었기 때문에 이 교회에 대한 소문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말씀 중심의 교회이고 성경공부를 중시하는 교회로서 젊은 그룹이 상당히 탄탄하고 이 교회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신앙생활을 이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나는 주석을 통해 이 목사가 말씀 중심의 목회를 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또한 말씀 중심이라면 그 교회가 분명 건강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런 건강한 목회를 하는 사람의 주석이라고 해서 뛰어난 주석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어차피 주석성경이 필요하다면 실질적인 목회를 그것도 건강한 목회를 하는 사람의 주석이 좋지 않을까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전문적인 주석도 풍성한 주석도 아니다. 그러나 딱 좋은 정도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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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3. 9. 5. 02:24

왜 믿음은 대물림되지 않을까? Bible Stories2013. 9. 5. 02:24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일 중의 하나가 '왜 신앙은 대물림되지 않는가?'였다. 물론 신앙은 개인적이므로, 아버지가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를 한다고 해서 그 교제관계를 아들에게 물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고, 따라서 신앙이 무슨 유산 물려주듯이 대물림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신앙적으로 본받을 부분이 많은 사람의 자식이 오히려 그렇지 않은 자식보다 더 개차반인 경우가 많기에 이런 질문을 해 보게 되었다.


일단 이 정도 시점에서 용어정리를 하고 가자.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믿음은 물건이 아니므로 원래 대물림되지 않는다. 따라서 아예 말을 바꿔야 한다. 왜 하나님 자녀의 삶을 또는 예수님 제자의 삶을 대대로 영위하지 못하는가? 왜 부모의 신앙인으로 사는 삶의 모습에서 자식들은 배우지 못할까? 간단하게 그 부모가 신앙인의 모습으로 제대로 살지 않아서라고 답하지 마라.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성경에서 부모와 자식이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산 예를 찾기는 매우 힘들다. 그래서 나는 아무리 대단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조차 (이 말도 사실 틀린 말이다. 대단한 믿음이라니... 그러나 뭐 다르게 표현해도 그 나름대로 틀린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냥 사용하도록 하자.) 그 신앙인의 모습을 노년까지 길게 지켜나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예를 들어, 노아는 신앙인으로서 충분히 잘 살았는데 노년에 가서 술 마시고 추태를 부리기 (창세기 9:21) 시작했으며, 아브라함도 노년에 가서 그두라를 (창세기 25:1) 첩으로 맞아 사는 등 별로 아름답지 못했고 등등. (그두라가 하갈이라는 전승은 접어두자.) 이런 식으로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런 모습 속에서 일찍 죽는 것이 복이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사사기에서 기드온에 대해 읽다가 어느 정도 그 이유에 대한 다른 방향에서의 힌트를 얻게 되었다. 먼저 본문을 보자.

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하는지라.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 기드온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요청할 일이 있으니 너희는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내게 줄지니라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마엘 사람들이므로 금 귀고리가 있었음이라.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가 즐거이 드리리이다 하고 겉옷을 펴고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그 가운데에 던지니, 기드온이 요청한 금 귀고리의 무게가 금 천칠백 세겔이요 그 외에 또 초승달 장식들과 패물과 미디안 왕들이 입었던 자색 의복과 또 그 외에 그들의 낙타 목에 둘렀던 사슬이 있었더라.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니라. (사사기 8:22-27)

기드온은 이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금을 달라고 하여 그것으로 에봇을 만들고, 온 이스라엘이 그 에봇을 음란하게 사용하여 결국 기드온 집의 올무가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먼저 하나의 가설을 제외하는 작업을 해보자. 기드온이 잘못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을까? 우선 기드온은 믿음의 가정에서 자란 듯하다. 기드온이 '여룹바알'로 불리게 된 과정에서 바알의 제단을 헐고 아세라 나무를 파괴하게 되는데, 이 문제 때문에 성읍 사람들이 몰려온다. 그리고 그들에게 기드온이 아닌 그의 아버지 요아스가 앞장서서 한마디를 하는데 다음과 같다.

요아스가 자기를 둘러선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 하니라. (사사기 6:31)

이로 보아, 요아스도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이었고, 바알과 아세라를 우상으로 인식하던 사람이었다. 따라서 기드온은 믿음의 가정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물론 당시의 상황상 말씀을 가까이 접하고 진리를 접할 기회는 많지 않았겠지만, 적어도 올바른 방향성은 가지고 있었으리라 보이며, 최선을 다해 진리를 찾으려 노력하던 사람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요아스와 기드온은 믿음의 모습을 공유했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특히 백성의 왕이되어 달라는 요청에 대하여 (물론 명확히 그렇게 나오지는 않았지만, 22절에서 대대로 다스려 달라는 요청은 바로 왕이 되어 달라는 요청과 다름이 없다.) 기드온은 그럴 수 없다고 답하면서 하나님께서 다스려야 한다는 뜻을 전달한다. 따라서 기드온은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기드온이 믿음이 없어서 에봇을 만들고 그것이 올무가 되었다는 식의 해석은 옳지 못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왜 그렇게 하였을까? 먼저 에봇이 무엇인지 짚고 넘어가자. 에봇은 제사장이 제사의식에서 입도록 고안된 옷으로서 모세가 하나님께 그 식양을 받아서 제작한 옷이다 (출애굽기 28장). 그런데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 에봇에 우림과 둠밈이 들어가 있는 판결 흉패를 착용하게 되어 있다. (출애굽기 28:30). 지금에 와서는 이 우림과 둠밈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방법이 없다. 그러나 느헤미야 7:65에서 족보에 이름이 기록되어있지 않은 레위인들에게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나타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고 한 것으로 보아, 우림과 둠밈이 어떤 사안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도구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림과 둠밈이 점괘를 알아보는 도구였을 거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 여기에서부터는 나의 상상력이 약간 들어간다. 나는 기드온이 에봇을 만들었다고 할 때에는 당연히 우림과 둠밈까지 만들었다고 본다. 겨우 옷이나 만들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더구나 금을 모아서 에봇을 만들었다면 당연히 판결흉패와 우림과 둠밈까지 만들었다고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기드온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도구를 만들고자 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그렇다고 확신한다.


그러면 기드온은 왜 하나님의 뜻을 아는 도구가 필요했을까? 그는 이미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경험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굳이 도구가 필요했을까? 나는 여기에서 왜 믿음의 삶이 대대로 이어지지 않는지에 대한 힌트를 발견했다.


기드온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경험했다. 그리고 그 교제를 통해 참 평안을 경험하고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이어질 생각은 무엇일까? 나는 그가 자식들에게도 같은 경험을 물려주고 싶어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개인적인 경험을 전달하면서, 그 모호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을 테고, 그것을 구체화하는 방법으로 에봇을 택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자녀들은 그 에봇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고 '음란하게 위했다.'라고 나온다. 즉,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면 그 에봇을 우상으로 섬겼다는 뜻이다.


이제 내 생각을 일반화시켜 보겠다. 어차피 의견이므로 동의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흔히 나의 신앙을 남에게 전달할 때 범하는 실수는 '신앙의 구체화'이다. 하나님은 광대하신데, 내가 경험한 하나님은 구체화한 하나님으로서 그 광대한 하나님의 부분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말하는 것이 틀린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가 경험한 수준에서는 옳다. 그런데 그것을 전달하면서 그리고 받아들이면서 오류가 발생할 여지가 크다. 우선 전달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마치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이 하나님의 전부인 양 전달할 수 있다. 많은 간증자에게서 발견되는 태도인데,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분입니다.'라고 딱 잘라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참 많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는 진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필요할 때에 기도하면 기가 막히게 들어주시는 분입니다.'라고 하면 그것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 하나님의 본질적인 특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결정에 의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철수는 사람입니다.'는 사실일 수 있으나, '철수는 햄을 좋아합니다.'는 틀릴 가능성이 아주 크다. 그냥 철수가 햄을 먹는 것을 보고 한 말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달하는 자의 하나님에 관한 규정이 그 자신에게 적용하기에는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라는 태도로 전달한다면 틀린 전달이다.

반대로 듣는 사람에게 있어서 전달되는 내용이 하나님에 대한 완벽한 정의라고 믿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많은 선교사의 간증 책을 보면, 어떤 돈이 필요한데 아슬아슬한 시간에 정확히 그 금액을 생기는 이야기가 생각외로 많다. 그러면서 '맞아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정확히 아시고 그것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절대 하나님의 방법이 내가 원하는 방법과 다를지도 모른다는 믿음 없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채워주셔.'라고 받아들이고 그렇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경우가 많다. 그 선교사가 처한 상황 고난 기다림 등등은 전부 무시하고 '필요한 돈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마음대로 일반화시켜 버리고 그렇게 해 주시기를 기대한다면, 그것 역시 틀린 접근이다.


이런 일이 부모와 자식 간에도 일어난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자녀에게 전달하는데, 부모 자녀의 특성상 위의 전달자가 범할 수 있는 실수를 범치 않더라도 받아들이는 자녀 입장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부모가 전달한 그대로 그려버릴 가능성이 크다. 그러다 보니 부모는 광대한 하나님을 통해 부분을 경험하는 복을 누렸는데, 자녀는 아예 출발을 부분으로부터 하다 보니 제약사항이 너무 크고, 그러다 보니 오히려 신앙 좋은 부모 밑의 자녀가 방황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발견하기가 너무 어렵다. 하늘을 자유로이 쳐다봐야 어느 정도 가능성이라도 있을 텐데, 우물 바닥에 앉아서 보이는 작은 하늘에서 무언가를 찾으려고 하니까 훨씬 어려운 길을 가게 된다. 그 자녀가 올바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하나님에 대한 구체화 된 이미지를 깨는 작업을 먼저 해야 하므로 오히려 아무 사전 지식 없이 전도 받아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에 비해 신앙성장이 더딘 경우가 많다. 모태 신자를 '못된 신자', '못해 신자'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한국교회에서 광범위한 문제가 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과거 엄청난 부흥을 경험했다. 전후 우리 부모들은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서 시작하여 일어났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신앙의 힘은 엄청났다. 그런데 현대 기독교는 내적으로 외적으로 그리고 신앙적으로 침체기에 빠져있다.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라는 말이 이처럼 잘 들어맞는 교회가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우리 부모가 죄다 잘못 믿어서? 기복신앙이어서? 가짜라서? 전부 맞는 말일 수도 있고 전부 틀린 말일 수도 있다. 하긴 우리 부모 세대와 이야기를 해 보면 기복적인 면이 상당히 강하고, 내가 여차저차 하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해 주셨다는 말을 많이 하긴 한다. 말로는 하나님이 해 주셨다고 하나, 듣다 보면 자기가 잘했다고 자랑하는 수준에서 머무는 경우를 참으로 많이 보아왔다. 그래서? 그럼 그들이 틀린 것인가?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나는 그 세대에 필요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나는 바르다고 이야기할 자신도 없고 틀렸다고 말할 자신도 없지만, 그 세대는 그냥 그랬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문제는 그 부흥기의 세대가 그 자녀 세대에게 '하나님은 이런 분이야.'라는 그림을 너무 많이 너무 구체적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은 특정 시대에 필요한 하나님의 부분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에 하나님의 아주 아주 작은 부분만 경험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그림을 자녀들에게 전달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응답받는 기도법', '이렇게 기도하니까 들어주셨어요.' 등등의 책이 엄청나게 많은 시대이다. (물론 나는 이런 책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검색도 해보지 않았으나, 장담한다. 이런 책 분명히 있다. 그리고 종류도 다양할 것이다.) 쓰는 사람들은 그들의 책이 신앙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결국 그것은 기드온의 에봇이 되어 올무가 될 뿐이다.


그리고 나는 이 부분을 다윗과 솔로몬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부모와 자식 간의 믿음의 모습이 이처럼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경우도 성경에 그렇게 많지 않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으나, 솔로몬은 왕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죄다 저지르고 (신명기 17:16-17, 열왕기상 10:26-27, 11:1) 급기야 하나님께서 '다윗의 얼굴을 봐서 참는다.'라는 말씀까지 하신다. (열왕기상 11:9-13) 솔로몬이 잘못한 부분을 전부 다루기는 분량상 불가능하고, 한 가지만 다루어보자.


솔로몬은 후궁이 700명이고 첩이 300명이었다. (열왕기상 11:3) 세금 문제, 우상숭배문제, 제판권 등등 잘못한 부분을 말하자면 끝이 없으나, 어떤 면에서 솔로몬의 잘못 중 많은 부분이 1,000명에 달하는 여자들과 연결되어있고, 적어도 죄의 원인상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 모든 것을 그의 아비인 다윗에게 배웠다고 생각한다. 솔로몬이 이렇게 많은 부인을 둔 이유는 당연히 주변국과의 혼인을 통해 왕국의 안정을 꾀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을 제일 처음 시도한 사람은 다윗이다. 다윗 역시 여러 여자와 결혼을 했는데, 그중에는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라는 이방 여인도 있다. 일견하여 보기에 이방 여인은 하나밖에 없는 듯이 보인다. 어쨌든 한명이든 100명이든 이방 나라 왕의 딸과 결혼하여 왕국의 안정을 꾀한 예를 만든 것은 확실하다.


자 그런데 문제는 솔로몬에게 인식되는 다윗에게 있다. 다윗이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께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불렸던 사람이다. 돌멩이 하나로 이름난 전사인 골리앗을 죽인 영웅이었다. 주변의 다윗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을지 보지 않고도 알만하다. 다윗이 솔로몬을 개인적으로 교육했었는지는 불명확하다. 물론 역대상 28장에 기록된 바를 통해 적어도 몇 번은 다윗이 솔로몬에게 성전 건축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하여 충고를 하긴 했었던 것 같지만, 아도니아가 칭왕을 감히 감행했던 것으로 보아, 다윗이 솔로몬의 입지를 확고히 다져주지 않았던 것은 확실하다. (열왕기상 1장) 다시 말해, 다윗이 솔로몬을 더 자주 보고 가르치고 하는 등의 개인적 교제를 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솔로몬은 어렸을 때부터 아비 다윗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었을 것이고, 대부분 좋은 이야기들이었을 것이다. "네 아버지 다윗은 대단한 사람이야. 하나님의 사람이지. 여호와께 사랑받는 사람이야." 이런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들었겠는가? 그렇다고 하면, 솔로몬 입장에서 다윗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했겠는가? 나는 추측하기를 모든 다윗의 행동이 하나님께 인정받은 행동이었다고 해석했을 가능성이 있다. 마치 현대 교인들이 '착한' 사람의 모든 행동이 '착하리라'고 생각하듯이 말이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했으니까, 다윗이 그렇게 했으니까 그것은 옳은 거야."라고 말하는 경우를 우리는 심심치 않게 만나며,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판단의 기준이 소위 그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사람들이 '비슷한 경우 어떻게 하였는가?'가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이미 앞의 글에서 말한 바와 같이 (2013/09/03 - [Opinion] - 착각하고 있는 많은 기독교인에게 고하여),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경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어떻게 사랑하셨는가가 중요하다.) 따라서 솔로몬은 아마 다윗의 행동에서 하나님을 규정하고 행동강령을 만들었으며, 그대로 따라 하려고, 또한 발전시키려고 노력하였을 수 있다. 그 결과 중의 하나가 1,000명에 달하는 여인들이었고, 나라의 안정을 위한 성읍건설이었으며, 화려한 성전과 그에 걸맞는 왕궁 건설 등등이었다고 생각한다.

즉, 이 경우 다윗이 솔로몬에게 구체화한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전달하지는 않았으나, 솔로몬이 알아서 '다윗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을 구체화 시켰다.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 '성경을 통해' 인간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을 통해 하나님을 또는 성경을 이해해서는 안된다.)

솔로몬의 통치는 성전건축으로부터 시작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을 찾으면서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정말 중요하고도 이 글을 통해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일이 일어난다.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으나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열왕기상 3:3-4)

본문은 솔로몬의 문제점에 대해서 분명하게 지적하기를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고 한다. 열왕기에서 산당을 훼파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왕이 반드시 거쳐 가는 행사였다. 즉, 하나님은 산당제사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솔로몬이 산당에서 제사하는 이유를 '여호와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더군다나 뒤에 기브온에서 일천 번제를 드리는데 그 이유로 기브온의 산당이 크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눈에 보이는 성스러워 보이고 웅장하고 대단한 어떤 것이 그에게 필요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 듯하다. 그러면 기브온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기브온 산당에는 모세가 만들었던 성막과 번제단이 있었다. (역대상 21:29) 그리고 다윗도 절대 이 성막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역대상 16:39에 보면 사독에게 기브온 산당을 맡기고 거기에서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그런데 솔로몬이 거기에서 제사를 드린 이유는 조금 세속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거기에서 제사를 드린 이유를 열왕기 기자가 규정하기를 '커서'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미 하나님의 법궤는 다윗이 다윗성에 가져다 놓은 상태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은 법궤 위 두 그룹의 날개 사이인 속죄소에 임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사실 법궤가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이라고 해석해도 무관하다 (구약의 입장에서, 우리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특정 장소에만 임한다고 믿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휘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아무 때나 들어오지 말라 그리하여 죽지 않도록 하라 이는 내가 구름 가운데에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레위기 16:2)

그런데도 솔로몬이 기브온으로 간 이유는 바로 그곳에 아버지 다윗보다 더 위대한 모세가 만든 성막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도 대단하지만 모세는 더 대단하므로 거기에서 제사를 드려야 제사빨이 더 좋을 거로 생각했을 수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솔로몬은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고, 여호와를 사랑하였으나, 다윗이 만들어 놓은, 모세가 만들어 놓은 구체화한 하나님의 틀 안에 갇혀 있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유형화된 것들에 기대어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시도하였다. 물론 초반에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찾아와 주셨지만, 솔로몬은 점점 더 하나님을 만나기 힘든 모양새로 변해갔을 거고, 그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는 점점 더 소원해 졌다고 생각된다.


결론을 말하자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확인하는 것 이상을 누군가의 고백 속에서 찾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구체화 시켜서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억지로 전달하려고 하는데, 오히려 그렇게 하지 말아야 전달이 된다. 하나님을 구체화 시켜 버리면 그걸 듣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험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괜히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때에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베드로전서 3:15)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듣는 사람의 태도가 더 중요하다. 말하는 사람의 태도를 먼저 말한 이유는 그들이 더 성숙한 사람이라는 가정 때문일 뿐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구체화 시키는 것이 옳지 못하다손 치더라도 우리가 인간인 한, 우리 입에서 나오는 모든 하나님에 대한 묘사는 구체화의 한 과정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이 하나도 필요 없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타인이 경험한 하나님을 공유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많은 위로를 받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글이든 말이든 심지어 성경도 하나님의 일부분만을 묘사할 뿐이다. 모든 부분을 입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변화되기 전의 인간은 갖고 있지 않다. 모든 정보는 부분적이다. 그렇다고 그 모든 부분을 없앨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음을 우린 모두 알고 있다. 우리는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 하나님 앞으로 오기 때문이다. (전도를 '미련한 것'이라고 규정하는 그 의미도 생각해볼 만 하며, 시사하는 바가 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린도전서 1:21)

따라서 듣는 사람의 태도가 사실은 더 중요하다. 불완전한 틀 속에 자신을 가두지 말아야 한다. 그 틀의 도움은 받되 그 틀 속에 갇히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안에서 하나님을 예수님을 발견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에게 위로는 하나님의 사랑, 그것 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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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먼저 한가지 짚고 넘어가자. 당신이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그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아니 대부분 기독교인이 종교인으로 머물 뿐, 진정으로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삶을 살고 있지도 않으며, 그런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시도하지도 않는다. 누구나 아는 내용인 듯하지만 동시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내용이기도 하다. 나는 교회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을 보아왔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또는 제자로 살기 위해 진지한 고민을 거듭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물론 입으로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말을 많이 한다. 왜냐하면, 많은 교회가 예수님의 제자를 표방하며, 많은 교육을 통해 그 '용어'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까 그들의 말 속에 예수님의 제자라는 표현이 많이 사용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의 삶에서 일반 교회 교인들의 그것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가르치는 사람들조차도 과연 예수님 제자의 의미를 알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경우가 많았다.


우리 삶의 목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됨이어야 한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방편 중의 하나일 뿐이다. 또 하나, '예수님의 제자'는 '되는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되는 것'인가? 나는 그렇게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나에게 남은 문제는 '제자다운 삶'을 사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노력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를 짧게 설명할 자신이 없다. 다만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을 해 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이 글에서 제자가 된다고 표현되는 부분은 그런 표현이 간단하여서 사용할 뿐이고 사실상 그렇게 됨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고 읽어주기를 부탁한다.


우선 문제를 제기해 보자.


근래 미국의 한 교회를 방문했다. 그 지역에서 가장 큰 교세를 가진 교회로 약 3천 명 가량이 출석하는 교회이다. 그런데 그날 설교가 정말 압권이었다. 철저하게 인간중심의 설교였다. 물론 그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대부분의 설교가 인간 중심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교세가 커졌다고 생각된다. 안타까운 이야기이지만 인간중심의 설교를 해야 현대 기독교인들은 편안해하고 좋아한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관한 이야기를 하면 지루해하고 딱딱하다고 느끼며, 심지어 어느 정도 믿음이 있다 하는 사람들조차도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런 설교를 꺼리기 일쑤다. 내가 잘 아는 한 목사는 그런 식으로 설교하면 교인들이 지루해하고 직접 와서 그렇게 설교하지 말라고 하는 교인들도 있다고 하였다. 하여간 어떻게 저렇게 한결같이 인간중심의 설교를 하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그 중 finale가 있었으니 다음의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로마서 8:37)

목사: 그렇습니다. (전형적인 설교용 관용어… 대체 뭐가 그렇다는 말인지 원) 우리는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청중: 아멘~


솔직히 이 부분에서 나는 예배 중에 손뼉까지 치며 감탄했다. 혹시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예측되는지 모르겠다. 나는 모든 사람이 여기까지 읽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한 번에 알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성경 구절에서 중요한 부분은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는 부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 즉, '예수님으로 말마암아'이다. 극단적으로 그리고 성경적 사실로 말해 우리가 이기고 지고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즉, '이긴다'에 대한 정의를 예수님께서 직접 하시지 않는 한, 당신이 생각하는 '이긴다'는 측면에서는 많은 경우에 성공적이지 않을 소지가 다분하다. 모든 (당신 입장에서의) 실패를 기도부족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아니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겠는가? 우리 측면에서 보자면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실패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그 실패가 고난의 형태로 나타나며, 이런 고난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훈련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시기 때문에 예수님 입장에서는 성공이다. 따라서 '넉넉히 이기느니라'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에 비하면 없어도 되는 구절이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라는 부분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교인들은 감격했고, 나는 놀라웠고. 참으로 놀랍다. 이 한 구절만으로 그 교회의 전반적인 설교스타일을 규정해도 아마 무리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설교스타일을 규정하는 데에도 큰 무리가 없다고 본다. 또한 이것이 한국교회 교인들의 수준을 말해준다. 성경의 인물에는 큰 관심을 보이나, 그 인물들을 조율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는 사실 별 관심이 없다. 아마 당신은 ’나는 아닌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우리는 대부분 ’성경 속 그 사람은 왜 그 순간 그렇게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데에 많은 열정을 쏟는다. 글을 쓰는 나 자신조차도 최근에 와서야 성경에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깨달았다. 항상 내게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가 ’왜 개떡 같은 다윗을 하나님은 사랑하셨는가?’ 이었다. 보면 볼수록 부족한 것 투성이의 다윗인데 말이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내가 그 다윗의 행동 패턴에서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는 패턴이 존재하리라고 나도 모르는 새에 가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알았다고 해도 그렇게 가정하지 않았다고 부정했을 거다.) 우린 모두 죄인인데 말이다. 죄의 경중이 어디 있나? 어차피 우리는 모두 사형수였는데…… 어쨌든 내가 다윗을 싫어하고 그의 행동에서 잘잘못을 따지는 모든 과정의 저변에 깔린 가정은 ’나는 나 스스로 의로워져 하나님이 칭찬하실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겠다'였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나의 시선은 그런 다윗을 참으신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지 않고 다윗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당신도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를 권한다. 당신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사랑의 하나님인지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의 ’알 수 없는 자격 기준'인지.


자 이 글을 통해 당신에게 도전하려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당신은 예수님을 당신의 주인으로, 왕으로, 구주로 믿는가? 아니면, 능력 많으신 분으로서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 드리면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램프의 요정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가?

다르게 표현하자면, 당신은 예수님의 은혜로 자녀가 되었으며 의롭다 칭하심을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이 경우 복의 유무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아니면 당신이 충분히 의로운 일을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을 칭찬하시며 복을 주신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이 두 질문은 서로 같은 선상에 있는 질문조차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 부분을 명확히 모르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이런 식으로 질문하게 되었다.


우리의 생각 속에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인가? '분'이기는 하는가? 혹시 그냥 '여의봉' 정도 아닌가? 어떤 특정 주문을 틀리지 않고 외우면 무엇이든 해 주는 여의봉 아닌가? 그래서 주문을 틀림없이 외우고 외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은 아닌가? 달리 말해 성경 속의 인물들을 통해 그들의 삶을 ’정확하게' 모사함으로써 그들이 받았던 ’복'을 나도 받기 위해 노력하는 중은 아닌가?


문제 제기는 이 정도로 하고, 기드온의 이야기를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해보겠다. 기드온의 인생은 어떻게 보면 밋밋하나, 이야깃거리는 많다. 그러나 다른 면으로 이야깃거리도 생각할 거리도 특별하게 있지 않음을 보이고자 한다.  기드온의 이야기는 사사기 6-8장에 걸쳐서 나온다. 성경의 인물 중에서는 상당히 자세히 기록된 편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그만큼 다룰 주제도 많다. 이 중 몇 가지만 추리면 다음과 같다.

  • 양털로 하나님을 시험함 (사 6:36-40)

  • 하나님께서 32,000명의 군인 중 31,700을 돌려보내고 300명만으로 전쟁을 치르게 하심 (사 7:1-9)
  • 하나님의 뜻을 재확인함 (사 7:10-15)
  • 에브라임과의 갈등 (사 8:1-3)
  • 주변 부족에게 인정받지 못하였고, 그것 때문에 그들에게 복수함 (사 8:4-21)
  • 에봇을 만듦 (사 8:27)

이 주제들을 전부 다 다룰 수는 없고 몇 가지만 다뤄 보도록 하자.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얼핏 극적인 기드온의 삶을 연구하고 그 연구를 통해 우리의 신앙을 발전시키기를 원했던 당신에게 그런 시도 자체가 비신앙적이며, 오히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그 간단한 진리가 무엇인지 전달하고자 한다.


먼저 나는 기드온이 양털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부분에 대하여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한 것이 아니라는 설교를 들은 일이 있다. 역시 상당히 유명한 교회의 유명 목사였다. 여러 권의 저서까지 있는 목사인데 인터넷서점에서 조엘 오스틴의 책과 묶여서 팔리는 책의 저자이다. 물론 대단하다는 뜻이 아니고 그런 목사란 뜻이다. 나와 성향이 비슷한 사람이라면 무슨 소리인지 알 것이다. 분명 본문은 기드온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왜 그런데 굳이 그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싶었을까? 왜냐하면, 기드온은 좋은 사람인데 좋은 사람이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4:12) 참으로 놀랍게도 많은 어른이 어린애들의 흑백논리를 인생의 사명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좋은 사람은 좋은 일만 한다는 유치한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성경을 보는 사람을 나는 거의 보지 못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해 보면, 나도 기드온처럼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시험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 주실 작정이면 이렇게 보여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이루어지나 이루어지지 않나 확인하고 싶은 사람의 마음을 배려(?)한 설교다. '죄의식 갖지 말고 자유롭게 하나님을 시험하세요. 보세요. 착한 기드온도 하나님을 시험했잖아요. 에이~ 기드온이 했으니까 하나님이 허락한 방법이고,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으니까 기드온이 한 시험은 시험이 아니에요. (엥?)' 뭐 이런 내용 아니겠는가?

자 정리하자. 나는 기드온이 하나님을 시험했는지에 대한 진위를 가리고 싶지 않다. 내가 짚고 넘어가고 싶은 사실은 기드온의 행동은 단순히 '사람'의 행동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착한 기드온이 했으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신 방법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래서도 안 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흔히 나오는 반론은 ’그럼 왜 적혀있나?’ 이다. 정말 모르는가? 나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드온을 통하여, 무엇이 됐든 간에 '당신은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수용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약한 사람에게 확신을 주시고자 참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려주고자 하셨다. 즉, 본문은 나에게 나의 하나님은 나의 약함을 외면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보듬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려주고 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기드온의 약점을 아셨다. 약하니 버리시는 하나님이 당신이 믿는 하나님인가? 그렇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부드럽게 관용과 수용으로 참으셨고 결국 기드온이 확신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심지어 하나님을 시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것을 통해 확신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 시험에 응해주셨다. 왜? 기드온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사건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사실이다.


그런데 기드온은 또 한 번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지 못한다. 아마 안절부절못했던 듯하다. 바로 300명만 가지고 전쟁을 해야 하는 그 날 저녁의 일이다. 사사기 7:10-15의 내용인데, 이번에는 하나님이 먼저 기드온의 상태를 아시고 도움을 주신다. 바로 적 진지에 가서 그들이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직접 들을 수 있게 해 주셨다. 자 그러면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 일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두렵고 때로는 불안합니다. 그럴 때에 기드온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께 확신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주십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조금 방향이 빗나가 있다. '나의 불안'을 종식하기 위해 '내가' 구하면 '하나님이' 마술 램프의 지니처럼 평안하게 해준다고 생각한다면 많이 잘못된 접근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녀에게 은혜로 평안을 주신다. 때로는 하나님 입장에서 괘씸하고 또는 틀린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에 비하면 그런 부분은 아무것도 아닐뿐더러 하나님은 그 사랑으로 우리를 도와주신다. 약간 미묘한 부분이 있음을 인정한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하나님을 생각하라'이다. 내가 주체가 되어 문제를 파악하고 구하고 등등을 할 때에 반응하는 마술 램프가 아니고 하나님은 미리 다 아시고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시는 분임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유치한 이야기를 하자면, 하나님은 로봇이 아니고 주체적으로 활동하시는 분이며, 심지어 그분은 전지전능하시다. 따라서 우리의 행동이 input이 되어 output을 내놓는 존재가 아니다. 제발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신다.


300명을 선택하는 과정을 보자. 하나님께서 혀로 핥는 사람과 무릎을 꿇고 마시는 사람 중에 혀로 핥는 사람 300만 가지고 전쟁하라고 하셨다. 이 부분을 가지고 ‘왜 그들을 택했는가?' 즉, 그 300명이 선택된 이유를 찾고 그러함으로 우리도 그 300명에 속하기 원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았고 이에 대한 설교도 상당히 많다. 당장 '기드온의 용사 300'으로 검색만 해 봐도 많은 설교를 찾을 수 있다. 대부분 '그들의 순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대승을 이끌었다.' 또는 '혀로 핥는 자가 무릎을 꿇는 자에 비해 하나님 앞에 옳은 이유'에 관한 설교들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당신은 그렇게 당신이 복 받을 만한 이유가 있기를 바라고 복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가? 나중에 이것만 가지고 글을 하나 더 쓸 생각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당신은 복을 받는 어떤 공식을 원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복을 받고 저렇게 하면 저주를 받고 하는 식의 깔끔한 공식을 원하는 당신을 당신 스스로 깨닫고 인정해야 한다. 그런 공식을 원하는 이유는 바로 그래야 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의를 자랑해야 한다. 흔히 자기 의를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데, 만약 당신이 복 받을 만해서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는다면 나의 의를 자랑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여하간 그냥 기술적으로 말해도 만약 혀로 핥는 자가 무릎을 꿇는 자에 비하여 장점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애초에 혀로 핥는 자를 데리고 전쟁을 하라고 하셨어야 하고 심지어 그들을 선택한 이유도 말씀해 주셨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나누라고 한 다음에야 이유도 말씀하시지 않은 채 한쪽을 택하셨다. 사람들이 흔히 성경이 어렵다고 하고 왜 하나님께서 깔끔하게 이유를 말씀해 주시지 않나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잘못된 질문을 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어떤 면에서 쉽고 모든 이유가 적혀 있다. 하나님은 우리하고 수수께끼 놀이를 하지 않으신다. '왜 물을 핥는 사람들만 데리고 가셨지?'라고 질문을 하니까 대답을 찾지 못하고 헛소리를 하게 된다. '왜 300명만 데리고 가셨지?'라고 질문하면 대답이 7:2절에 '스스로 자랑'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나온다. 이것으로 끝이다. 더 좋지 않은 질문은 ’선택된 300명은 하나님이 데려가실만한 어떤 조건을 충족했을까?’라는 질문이다. 당신은 어떻게든 그들이 나머지 31,700명보다 그들이 더 나은 이유를 찾고 싶을 것이다. 그래야 당신이 노력해서 300명 안에 들 수 있을 테니까. 이유가 없다면 당신은 갈 길을 잃은 나그네처럼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 빠질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하나님을 요구조건을 충족시켜드리면 그에 대한 반대급부를 제공해 주는 자판기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세하고도 정확한 사용 설명서를 원하고, 그 사용설명서가 바로 성경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유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 얼핏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그런 부분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당신이 잘못된 질문을 이용하여 성경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 다 같은 사람이다. 우리가 잘나서 사용하시고 못나서 사용하시지 않는 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 아니신 셈이 된다. 돌들로도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 수않 있는 분이 하나님이다. (마태복음 3:9) 당신이 특별히 잘나서 특별히 사용되기를 바라지 마라. 정말 지긋지긋한 기도문구 중의 하나가 ’특별한 종 누구누구를 특별하게 사용하시어’로 시작되는 기도이다. 누가 대체 하나님앞에 특별한 조건을 갖추어서 특별히 사용될 수 있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어떤 일을 맡길 지는 하나님이 결정하실 일이다.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우리가 아무 능력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작정하시면 특별하게 사용하실 수 있다. 어쨌든 하나님이 없어도 되는 의인이 요즘 세상에는 너무 많다. 또는 하나님을 한낱 램프의 지니 정도로 격하시키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다시 말해, 300명만 선택하신 이유는 전쟁은 하나님께서 하시고 우리는 지켜볼 뿐이라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그 300명이 전부 일당백이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에 적합한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다. 더구나 자세히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후 나머지 병력도 어떤 형태로는 사용된다. 자꾸 당신 입장에서 당신의 복 받을 수 있는 행동강령을 만들기 위해 성경을 보고 질문하지 마라. 그냥 하나님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보기를 권한다. 사람들의 행동과 모습에 관심을 가져봐야 그건 헛짓이다.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에 대한 관심과 사랑만 보면 되고 그래야만 한다. 성경의 주인공은 철저히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시다.


에봇에 대한 것은 다른 글로 넘기도록 하자. (2013/09/04 - [Bible Stories] - 왜 믿음은 대물림되지 않을까?)



의 예를 통해 내가 하고자 했던 말은 이것이다. 성경을 인간입장에서 보지 마라. 하나님을, 예수님을 여의봉으로, 부적으로 만들지 마라. 내가 이렇게 하면 저렇게 반응하시고 내가 저렇게 하면 이렇게 반응하시는 자판기 속의 하나님으로 만들지 말라는 말이다. 자꾸 복 받은 사람의 행동에서 복 받을만한 행동패턴을 찾으려고 하는데, 그런 접근은 완전히 잘못된 방식이다. 물론 그래야 속이 편해지는 당신에 대해 나는 이해한다. 나도 그런 인간이니까. 뭔가 확실하면 편하겠지, 불확실은 불안을 부르니까.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보며 ‘간음하면 저주받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간음한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당혹해하는 당신을 나는 이해한다. 그리고 ‘그건 아마 간음이 아닐 거야 그리고 그런 증거가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싶은 당신의 마음도 이해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거 뭐야 이상하잖아.'라는 생각이 절로 들면서 불안해지는 당신의 마음을 이해한다. 우리는 단단한 땅을 원하니까. 이리저리 모양을 바꾸는 땅은 원치 않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 맘이나 편하자고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믿는 것이다. 당신 발밑의 땅을 단단하게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 있으면 가장 단단한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을 받혀 줄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그리고 그 복은 하나님이 정하신다. 복 받을 만해서 복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로 하셨기 때문에 복을 받는 것이다. 이 관계를 이상하게 꼬지 말자. 당신은 하나님을 그리고 예수님을 당신의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가? 그럼 됐다. 그럼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고, 모든 복에 복으로 넘치게 주실 것이다.


앞 에서 말했다시피 기드온의 삶은 일면 극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야깃거리도 많아 보인다. 그러나 사실상 간단한 메시지가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사랑하셨고 모든 면에서 기드온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보이셨다. 이것으로 끝이다.


여기에서 글을 끝맺어야 하는 줄 알고 있지만, 노파심에서 한마디만 더 해 보도록 하겠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다윗이 바로 이런 관계를 정확히 알고 그에 대해 고백하는 부분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무엘하 7:2-3에서 다윗은 자신은 백향목 궁에 사는데 하나님은 장막에 사는 것이 마음이 쓰여서 나단 선지자에서 성전건축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이 부분이 참 재미있는데 아주 전형적인 열심 있는 집사 또는 장로와 목회자 간의 대화와 같다. 예를 들어 집사가 와서 ”제가 이번에 교회에 주차장을 봉헌했으면 합니다.” 목사가 화답하길 ”집사님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하나님께서 복에 복으로 갚으실 겁니다. 그 마음의 원함도 하나님께서 주셨을 거에요.” 이런 식의 대화인 셈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고 느닷없이 약속하기 시작하신다. 물론 역대상 22:8절에서는 그 이유를 말씀하신다. 따라서 다윗은 이유를 듣긴 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갑자기 약속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부분을 보면 재미있는 대구가 있다. 하나님의 집을 지어드리겠다는 다윗의 말에 대구를 이뤄서 하나님께서 사무엘하 7:11에서 당신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어 주시겠다고 하신다. 즉, 내가 이전에도 한 번 정도 언급했다시피 공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지 우리가 아니다. 가끔 크나큰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의 존재 이유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기 위함이라는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 않다. 여하간 이에 대한 다윗의 다음 고백을 보자.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주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있을 먼 장래의 일까지도 말씀하셨나이다 주 여호와여 이것이 사람의 법이니이다. 주 여호와는 주의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 그런즉 주 여호와여 이러므로 주는 위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신이 없음이니이다. (사무엘하 7:18-22)

다윗은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그 약속이 자기가 잘해서 또는 ”집 지어 드릴게요"라는 말이 기특해서가 아님을 알고 있다. 다윗은 철저하게 자기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있다. 다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시사 이 모든 것을 해 주심을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해 여러 번 ”사람이 무엇인관대"로 시작하는 고백을 하게 된다. (시 8:4, 144:3) 나는 종종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나?’ 하는, 마치 다윗이 복 받을 이유를 가지고 있어서 복을 받았다는 식의, 이제까지 내가 했던 말에 따르면 헛생각을 할 때가 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였고, 하나님의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으며 (베드로전서 4:8) 하나님의 사랑은 다함이 없다. (예레미야 애가 3:22)


물론 신앙의 선배들에게 배울 것이 있다면 배우자. 그것을 틀렸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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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3. 8. 6. 15:41

글을 못 쓰겠다. 카테고리 없음2013. 8. 6. 15:41

나는 계속 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변화하기를 바란다. 내가 여기에 적어놓은 글들에 붙어있는 이상한 댓글 만큼이나, 나의 글도 이상한 부분이 많다. 틀린 것도 있고, 동의할 수 없는 글들도 있다. 내가 적은 글에 내가 동의하지 못하다니... 그런데 그게 내 글이고 나의 삶의 목표이다. 그리고 고치지도 않을거다. 왜냐하면 이 블로그의 목적 자체가 나의 생각의 자취를 적기 위함이었으니까...


그런데 요즘은 정말 글이 써지지 않는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 생각을 정리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다 보니 한참 적고 마무리 짓지 못한 글도 많이 생겨 버렸다. 언젠가 그 글들이 정리되도 좋고 정리가 되지 않으면 안되도 좋다. 지금의 나는 그런 부분에서 헤깔리는 중이니까.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요 기간도 내게 의미가 있겠지라고 생각한다.


혹시 너무 오랬동안 쓰지 않아 혹시 블로그가 폐쇠가 되면 어쩌나 하고 짧은 글을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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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2. 12. 1. 14:23

행복에 대하여 Opinion2012. 12. 1. 14:23

우리는 자주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직접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말이 내포하는 성경적 또는 신앙적 의미와 다르게 사용되거나 이해되는 경우를 종종 보아 왔다. 더구나 근래에 들어서 이 말 때문에 힘들어하거나 반대로 이 말을 사용하여 남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여럿 보게 되어 이에 대해 글을 써 보려고 한다.


먼저 질문으로 시작해 보자.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신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대답은 당연히 '그렇다'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원하지 않는다.'라 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대대적인 수정이 불가피하다. 사랑의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 나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 정도만 열거해도 이런 성품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원하신다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고난을 겪는 사람이 적지 않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삶에서 전혀 하나님의 향기는 나지 않은 채 외적으로 너무 풍족한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원한다는 논리 아래 전혀 정돈되지 않는 삶을 버젓이 사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는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다르게 말한다면 그들은 풍족한 자신들의 삶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증거라고 생각하며, 따라서 그들은 경건 생활을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논리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이 옳지 못하게 살아서 그렇게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기도 한다. 자기의로 똘똘 뭉쳐있는 그들을 우리는 '악인'이라 부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리고 그들을 보면서 악인의 형통함에 대해 개탄했던 성경의 인물들이 생각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원한다는 논리에 동의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가당착에 빠지기 일쑤다. 더구나 우리 마음 안에는 그들이 악하게 보여도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솔직한 속내가 자리하고 있다.


나는 이 글에서 그들이 '악인'임을 증명하려는 생각은 없다. 그건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문제이니까. 나는 이 글에서 이 문제에 대해 혹시라도 갈등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어느 정도 정돈된 의견을 들려주고 싶다. 또는 이런 문제로 고민을 겪는 사람을 보면서 위로를 해주고 싶어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이 글을 쓰려고 한다. (말을 점잖게 하려다 보니 뭔가 모호한 문제 제기가 되어 버렸다.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해 보겠다. 요즘 큰 교회는 부자를 우대한다. 이건 너무 명확해서 아니라 하기 민망하다. 그리고 그 부자들을 단순히 우대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부자들이 의로워서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는 논리를 은연중 인정해준다.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설교도 상당히 많다. 더군다나 그 부자들 자신도 자신들이 의로움의 결과로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께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사랑을 받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다 보니 그런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쉽게 던지는 말로 상처를 주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교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복음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관해 혼란스러워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논리, 즉, 의로워서 부자가 되었다는 논리를 깨부수지도 못하고, 실상 깨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소외된 그들조차 부자들의 '부자가 되는 방법'을 따라 해서 그들 역시 부자가 되고 싶은 소망이 마음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이 문제에 관해 명확한 설명을 찾기도 어렵고 찾으려는 노력도 현대교회 안에는 별로 없다.)


질문을 하나만 더 해보자. 그러면 행복이란 무엇인가? 아니 어떤 상태일 때에 그리고 어떻게 되면 우리는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기게 될까?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이라면 이에 대한 세련된 대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계획, 방법대로 살 때에 우리는 행복해 질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의 원하는 바와 하나님의 원하는 바가 상치가 된다면 어떻게 되는가? 과연 당신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관해 관심이 있기는 한가? 삶이 전혀 정돈되지 않고 아름답지 못하게 살면서 하나님이 자기의 행복을 원하신다고 하는 그 사람은 아마 자기가 원하는 바를 하나님도 원하신다고 굳게 믿고 살지도 모른다.


어렵게 돌아가지 말고 직접 이야기를 해 보자. 우리는 '내가 원하는 상태,' '편안한 상태,' '내가 즐거운 상태' 등등에 해당하는 상태에 있을 때 행복하다고 이야기한다. 행복에 대한 이런 접근법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이 접근법은 내가 내 삶을 계획하고 내가 내 삶의 주인임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경우 하나님은 그저 조력자일 뿐, 우리가 하나님을 그리고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은 그저 공허한 거짓 외침이 될 뿐이다. 내가 주 (Lord)라고 부른다면 그분이 내 삶의 주인이 됨이 너무 당연한데도 앞의 접근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경우 전적으로 그가 삶의 주인이 되어 버린다. 그들이 즐겨 인용하는 성경 구절들을 열거하며 하나하나 그렇게 적용하면 안 된다 말하고 싶으나,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고 믿겠다. (내가 왜 이렇게 이야기했는지에 관하여 부연설명을 해야겠다. 내 주변에 빨리 삶이 여유로워진 사람이 있다. 물론 오랜 시간 동안 고생을 했던 사람인데, 최근에 들어서 다방면에서 여유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어려웠을 때의 버릇을 여전히 고치지 못했다는 데에 있는데, 예를 들어 탈세를 절세라 우기기, 속여서 싼값에 호텔 이용하기를 똑똑하게 돈 아끼기라 우기기 등을 아직도 즐기고 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야 나는 하나님께서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신다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해 보고 싶은 거 다 해 볼 거야. 늙으면 못하지 않겠냐? 그러니까 너도 젊을 때에 해 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봐. 하나님이 이 좋은 세상에서 좋은 것을 누리라고 주셨는데 즐기지 않으면 되겠냐?" 뭐 즐기고 싶어도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논의는 이 사람 앞에서 사치일 뿐이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을 배우듯이 천국 소망을 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경기에 최선을 다하는 경주자로서 삶이 돼야 하는 이 세상을 '좋은 것을 즐기라고 주신 좋은 세상'이라 생각하는 것도 애교다. 어쨌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고,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그렇지 않다고 장담하겠느냐고 나는 질문하고 싶다.)


더구나 내가 원하는 삶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과 정반대이다. 다음의 말씀을 살펴보자.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7:21-25)

내 속사람이 원하는 대로 사는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상태이고, 그 상태가 바로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있는 상태이다. 즉, 내 육신이 원하는 상태는 내 마음이 원하는 상태와 싸워야만 하는 정 반대의 삶이다. 나를 잘 정돈하여, 즉, 경건 훈련을 통하여 내가 원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되도록 만들어보자? 이런 식의 논의는 교회 안에서 흔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아마 많은 사람이 그 진위에 대해 고민해 본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도 전혀 맞지 않는 헛소리이다. 성경은 우리가 그럴 수 없다고 강력하게 이야기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5:17)

내 육체의 소욕은 아무리 노력해도 성령의 소욕을 거스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 세상에 육신으로 선한 사람은 없다. 따라서 육신을 경건 훈련을 통하여 성령의 소욕을 따르게, 즉, 선하게 만들 방법은 애초에 없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로마서 3:10)

오죽하면 사도바울은 날마다 죽어야 했겠는가? 이 문제에 관하여 생각해 보았는가? 한번 죽었으면 되었지 왜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어야 했을까? 내 삶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바꾸는 작업은 경험이 쌓인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훈련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며 많이 배운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날마다 죽는 방법 외에는 없다. 이 정도로 어려운 작업이 바로 삶의 주인을 내려놓는 일이다. 따라서 행복의 의미를 내가 기준이 되어 정한다면 그 행복은 절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과 같을 수 없고 비슷할 수조차 없다. 오히려 완전 정 반대의 삶이 될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렇게도 날마다 죽고, 자신을 쳐 복종케 한다고 이야기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31)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린도전서 9:27)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변화되기 전의 육신은 절대 훈련되거나 길들여 지지 않는다. 아무리 모세여도,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어도 바울과 같이 매일같이 육신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일을 반복하지 않는다면 다시금 개가 그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이 반복되는 죄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해도 아직도 '그래도 노력하면 점점 변화되지 않나? 그걸 위해 경건 훈련을 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질문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어차피 문제될 것이 없다면 나도 그 말을 인정해 주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든 저렇게 생각하든 경건 훈련은 필요하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강력하게 말하는 이유는 그런 접근이 '자기의'에 빠지기 쉽게 하며, 결과적으로 완전 다른 길로 가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건 훈련은 영의 유익을 위한 것이지 육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행복의 정의를 내가 하는 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복을 원하신다는 명제는 거짓이 되어버린다. 행복의 정의를 내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맡긴다면 물론 그 명제는 참이 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반대말 격인 고난에 관하여도 한번 생각해보자. 역시 고난의 정의를 인간이 하면 인간이 정의한 행복과 반대말이 된다. 그러나 고난의 정의를 하나님께서 하신다면 하나님께서 정의한 행복과 동의어가 될 수도 있다. (항상 그렇다고는 못하겠다.)

고난에 관한 논의는 다양한 면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따라서 간단하게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과 '내가 원하는 삶'의 측면에서만 보자. 조금은 유치하지만, 효과적인 예가 하나 있어서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이 이야기는 아내가 내게 해 준 것인데, 아내는 또 그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그러니까 누가 최초 언급자인지는 모르겠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종종 다 낡은 딱지를 양손에 쥔 아들에게 멋진 로봇 장난감을 선물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같다. 아버지는 로봇 장난감이 훨씬 더 재미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아들은 낡은 딱지를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을 놓아야 받을 수 있는데 놓지 않으니 받을 수 없다." 약간 맞지 않는 부분도 있겠으나, 내가 말하고 싶은 의도는 다들 눈치챘으리라 믿는다. 하나님께서 내게 요구하시는 고난은 그 낡은 딱지를 내려놓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 고난의 뒤에는 로봇 장난감이 기다리고 있다. 유치하고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고난을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예라고 생각한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인 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진정한 행복에는 이를 수가 없다. 그래서 종종 하나님께서는 내 삶의 주인을 나에서 하나님께로 바꾸는 작업을 하신다. 그리고 정말 사랑하시는 사람이라면 '종종'이라는 단어를 '필요할 때마다 항상'이라고 바꿔야 한다. 그런 경우를 우리는 주위에서 보기도 하고 우리 삶에서 직접 경험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고난'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고난이 복'이라는 말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하였고, 그들이 말하는 '고난이 복'이라는 말이 바로 이 뜻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고난을 주께서 주시는 평안으로 이겨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주위에 누가 봐도 고난 중에 있는데 평안한 사람을 한둘 알고 있는 재수 좋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당신이 그 행운의 주인공이라면 그들에게 가서 행복하냐고 물어보라. 그들은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어려운 삶의 모습과 전혀 관계없이 행복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그들은 바로 다음날 무너질 가능성도 함께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사람이지만.


행복은 간단하게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행복이란 내 삶의 주인이 예수님인 상태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시기를 바라심에도 불구하고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정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일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난도 행복이다.


이렇게 보자면, 현대 교회 내에서 기득권층이 이야기하는 행복론과 고난론은 전부 틀렸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행복한 이유가 '하나님께서 (그들의 의로운 행동에 대한 보답으로) 그들이 행복하도록 도와주셨기 때문이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은 철저히 예수님은 조력자일 뿐이고, 삶의 주인은 그들 자신이다. 그러므로 틀렸고, 그런 인생은 행복할 수 없다. 모두 알다시피 우리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존재들이다. 그런 미약한 존재가 주인인 삶인데 어찌 행복할 수 있단 말인가? 일장춘몽처럼 찰나에 지나갈 행복'감'은 가능할지 모르나, 지속 가능한 궁극의 행복에는 절대 이를 수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하겠다.

  • 예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되셨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행복해 질 수 있다.
  • 육신으로는 절대 구원에 이를 수 없다.
  • 육신은 절대 선해지지 않는다.
  • 육신의 소욕은 항상 영의 소욕을 거스른다.
  • 내 육신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내가 원하는 것은 절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같을 수가 없다. 따라서 바울처럼 나를 죽이는 삶을 반복해야 한다.
  • 하나님은 도구나 조력자가 아니다.
  • 내가 사랑받을만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므로 사랑받는 것이다.
  • 복 받을 만한 의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고난은 삶의 주인을 바꾸는 과정을 말한다.

종종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기도했더니 어제까지 맛있던 술이 이제 맛이 없어요.' '담배가 저절로 끊겼어요.' '기도했더니 점점 내가 변해가고 예수님과 닮아가는 것 같아요. 이런 것이 바로 성화의 과정이고 신앙생활인가 봐요.' 이런 말은 가슴 아프지만 틀린 말이다. 나도 이렇게 믿고 싶다. 나도 변화되고 싶고, 어제 나를 괴롭혔던 주제가 내일은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반복되는 말이지만, 우리가 어떤 과정을 통해 육신을 길들일 수 있다면 (물론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셨다고 주장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와 당신의 목숨을 우리를 위해 주실 필요가 없었다. 그냥 우리 수명을 아주 길게 해 주시면 될 일이다. 또는 윤회하면 된다.[각주:1] 더군다나 나이 들어서 오히려 하나님께 책망받을 일을 많이 했던 다윗이나 노아 그리고 매일 죽지 않으면 신앙을 유지할 수 없었던 바울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것인가?


이런 말을 마치 경건 훈련의 목표인 양, 그리고 자신은 이미 그 정도 수준은 이룬 양 말하는 교회의 많은 멍청이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라. 우리 삶에서는 오직 예수만 드러나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 해 주신 일'을 간증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것만을 말하려고 하든지, 그것 외엔 할 말이 없다면 예수님을 '내 삶에 무언가 해 주시는 분'정도로만 생각하는 셈이 된다. 예수님은 내 삶의 주인이다. 조력자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나누어야 할 주제는 '하나님께서 내 삶에 해 주신 일'이 아니고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 더 나아가 '예수님의 우리를 위한 사랑'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무언가를 해 주셨다면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지 사랑받을만한 무언가가 있어서가 아님을 잊지 마라. 마지막으로 성경을 한군데만 더 인용하고 글을 맺겠다. 당신은 절대 여기에서 말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하며, 동시에 이런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도 마라.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디모데후서 3:1-5)


사족: 이 글의 초고는 12.11.30에 만들어졌었으나 완성은 13.09.12에 와서야 하였다. 그 사이에 내 생각이 많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생각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한 면이 있다. 사실 지금의 나로서는 행복에 대하여 옳지 못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다.

  1. 당신은 우연히 윤회라는 개념이 나왔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온 인류가 공유하고 있다. 정확히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구원방법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특별하지 않다. 지금 내가 이야기한 것과 같이, '내가 노력하여' 선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자연스레 도달하는 방식이 윤회일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들도 선해지려는 자신의 노력에 비해 느린 그들의 성장에 절망했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느낄 것인데, 심지어 자기들이 생각해 봐도 주어진 수명 내에서는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다면 자연스레 윤회를 상상하지 않을까? 그래서 불교가 생겨났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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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2. 9. 1. 13:39

동성애 문제에 관하여 Opinion2012. 9. 1. 13:39

먼저 한 가지를 밝혀 두고자 한다. 이 글은 '동성애에 관해 성경이 지지하는가? 반대하는가? 또는 중립적인 입장인가?'에 대해 다루는 글이 아니다. 성경은 명백히 동성애에 대하여 죄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그들에 대해 반대하는 데에 열심을 내는 것이 과연 옳은가?'의 문제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하나 더 노파심에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비교적' 동성애는 약한 죄다. 또는 세상에 더 흉악한 죄가 얼마나 많은데 동성애 이야기를 하느냐? 또는 기독교인들 너희는 얼마나 깨끗하길래 동성애에 대하여 그렇게 거품 물고 반대하느냐? 이런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다. 상대성의 논리를 이 글에서 다루고 싶은 마음은 없다. 물론 그에 대해서도 할 수 있는,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이 글에서는 그 문제를 다루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 나와 있는가?'에 따른 절대적인 명령을 이야기하려는 생각도 없고 죄의 상대성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생각도 없음을 먼저 확실히 짚고 넘어가겠다. 동성애 문제는 그렇게 다루지 않아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다.

미국에서는 동성애에 관련한 법안이 상정되면 그에 대해 찬반투표를 하는데 그것을 상당히 자주 한다. 그러니까 '동성애 합법 vs. 동성애 반대' 이런 식의 큰 법안에 대한 투표도 있겠지만 제3의 가족관계로서 남남 또는 여여 부부를 초등학교에서부터 가르칠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로도 투표한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어디에서 그렇게 꾸물꾸물 기어나오는지 기독교인들이 기어나와서 팻말들고 시위를 시작한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그 문제에 대해 사명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뜻밖에 많다. 개인의 신앙 문제나, 기도가 없고 말씀이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잘 되어 있어서인지 사명감에 고취된 사람 보기가 참으로 어려운데,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참 많다. 때때마다 투표 site를 여기저기 forwarding 하는 사람들부터 해서 Twitter나 Facebook에 그에 관해 성토하는 사람, 그리고 소그룹 모임에서 국민 걱정 위원회를 열어서 걱정하는 사람 등등 참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은 활동한다.

자! 당신이 동성애에 빠진 또는 자신을 동성애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만났다. 어떻게 할 것인가? 대부분은 그냥 지나가겠지만 적극 무엇을 해야 한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10초만 생각해 보고 대답해 보자. 아마 당신이 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이면 지지하는 말을 건넬 것이고,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면 용감한 경우 그건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고 할 것이다. 물론 이 글은 기독교인이 읽고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그럼 질문 하나 던지겠다. 당신의 이 세상에서의 사명은 무엇인가? 답을 여기에서 하고 싶지만, 꾹 참고 몇마디 더 해보자.

당신이 한국 사람이라 가정하겠다. 어떤 미국 사람이 와서 당신이 미국 법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 힐난한다고 하자. 그러면 당신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분명 당신은 그를 미친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세상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가? 아니면 세상의 법을 따르는가? 그 사람이 천국 시민이 되면 당연히 하나님의 법을 따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죄가 있을 것이고. 그러나 세상 사람이 세상의 법을 따르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 정도 되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눈치챘을 것이다. 당신이 동성애자를 만나서 해야 할 일은 그를 정죄하고 또는 '의로운 척하면서' 그의 죄를 일깨우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아니고 그를 전도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죄를 조명해 주실 것이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 대신 그를 정죄하고 심판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대체 그것을 마다하고 팻말들고 비난하는 것은 성경의 어디에서 배운 행동인가? 정신 차려야 한다. 아직도 '나는 보수적인 기독교인 = 보수적인 기독교인은 진정한 기독교인 = 진정한 기독교인은 세상에 대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사람 = 빛과 소금의 역할은 정죄하기'라고 생각하는 이상한 사람이 있다면 정신 좀 차리기를 간곡히 부탁한다.

내 소그룹 모임에서 한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다. 그에게는 동성애 친구가 하나 있는데 이번에 멀리에서 놀러 온다고 한다. 물론 그는 과거 같은 교회에 다니던 사람이고 지금은 다니고 있지 않는다고 한다. 무슨 이야기를 그에게 해 주어야 겠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의 대답은 이러했다. “정말 어쩔 수 없이 동성애자가 되었냐고 물어보십시오. 만약 그렇다면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고 하십시오. 만약 나아갈 수 없다면 다시 한번 '정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냐고 물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를 그렇게 만드셨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 그 모습 그대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중 누구도 깨끗해서, 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만해서 나가는 사람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정말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다면 그 모습 그대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은 그를 그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실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만약 도저히 나갈 수 없다면 그가 그 모습이 된 이유가 그렇게 태어나서가 아니고 죄성으로 인해 그렇게 되기를 스스로 선택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죄를 선포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선포 즉, 당신의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며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선포를 먼저 해야 합니다. 죄에 대한 선포는 그다음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성경이 명백하게 죄라고 하는 것을 죄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첫 번째 의무는 복음의 선포이지 죄의 선포가 아닙니다.” 나는 실로 이렇게 생각한다.

이 정도 되면 성경을 좀 아는 사람들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동성애에 관한 신랄한 경고에 대해서 의문을 표할 것이다. 그리고 죄에 대한 선포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해 나도 지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이 많지만, 다시 한번 말한다. 당신의 이 세상에서의 첫 번째 의무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계명을 무엇이라 말씀하셨으며,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당신에게 내리신 명령은 무엇인가? 우리 제발 헛짓은 그만두고 기본으로 돌아가자. 왜 세상이 악해졌으며, 왜 세상에 동성애자가 흘러넘치게 되었는가? 동성애자들의 주장을 100% 받아들여, 왜 현대에 와서 동성애자들이 자신 있게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할 수 있게 되었는가? 세상이 타락해서? 착각하지 마라. 세상이 타락할 때에 신자들은 거꾸로 성스러워진 예가 없다. 기독교인의 세상에서의 역할이 작아지고 있는가? 세상이 악해서? 바로 당신들이 악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선하고 당신도 선한데 세상만 악해진다고 생각하는가? 제발 제발 정신 차리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 반성해야 하고 회개해야 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해야 한다. 물론 당신도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돼야 하고.

마지막으로 몇 마디만 더 하겠다.

  • 교회 안에서 자행되는 죄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우리에 대해서 먼저 회개해야 한다. 내부적인 반성에는 약하고 외부적인 고발에만 능하다면 볼썽사납지 않겠는가? 나는 요즘 교회는 전혀 반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교회 돈을 횡령하는 장로는 버젓이 목에 힘주고 교회에 다닌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은 죄가 없는데도 죄인처럼 교회에서 고개를 들지 못한다. 당신의 교회가 그렇지 않다면 참으로 다행이다. 그러나 많은 교회가 횡령 거짓 모함 위선 음란 등등의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나님의 법까지 갈 것도 없이 세상의 법으로도 범법의 온상인 교회가 세상에 널려있다. 우리 그 똥이나 먼저 치우자.
  • 죄는 죄다. 죄를 사랑으로 감싸지 못하는 것도 죄지만 죄를 죄라 선포하지 못하는 것도 죄다. 글을 잘못 읽은 사람은 내가 동성애를 죄라고 선포하지 말라고 했다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 뜻이 아니다. 동성애자를 보면서 '괜찮아. 어쩔 수 있느냐? 좋아하는 것은 네 자유지.'라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엄청난 죄임을 알아야 한다. 단언컨대 그렇진 않다. 성경은 분명 그것을 죄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당신도 나도 죄에 파묻혀 살기는 마찬가지이고, 그럼에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뿐임을 잊지 마라. 당신의 물욕 나의 음란이 모두 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절망하고 하나님 앞에서 도망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무뎌져서 '너도 죄 없고 나도 죄 없어'라고 하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에 대한 회개와 너에 대한 죄의 선포가 끊겨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리 죄성과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나는 동성애도 그 정도 선상에 두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가지고 있는 '위선'의 죄에 비하면 내 개인적으로 동성애는 귀여운 죄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겉으로 확실히 드러나는 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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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나를 오랫동안 괴롭혀온 주제가 있다. 나는 성경을 읽고 있고, 어떤 경우 남보다 성경에 대해 더 자세히 아는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성경을 읽는 이유는 성경 읽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깨달음이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더라는 사실이다. 솔직히 말해 나의 삶도 별로 변화시키지 못하였다. 왜 나의 깨달음에는 능력이 없을까... 이에 대해 정말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해 왔다. "네가 네 형제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야." "넌 진정으로 하나님을 주로 모시지 않고 있어. 그게 바로 이유야."라는 정답들은 나에게 별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에 내가 맡은 소그룹 멤버들이 반기를 드는 사건이 터졌다. 모임에서 성경공부만 하는 데에 대한 반감과 함께, 너무 강압적으로 가르치는 나의 태도가 어우러져 복잡한 그러나 어찌 보면 간단한 이유로 터진 사건이었다. 나는 속이 좁아서 상당히 짜증이 났었다. 그러면서도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부족한 부분과 문제점에 대해서 알려주시리라 믿고 계속 성경을 읽어 나갔다. 역시 약 2주 만에 해답을 얻게 되었다. 그 과정이 약간은 지루할 수 있으나, 여기에 그 전체 이야기를 적어볼까 한다. 원래 이 블로그가 누가 읽어주길 바란다기보다 내가 내 생각을 기록하는 목적을 하고 있으므로 블로그 본래의 목적에 합하는 글이긴 하다.


사건이 터진 그 주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겠다. 다음 말씀해석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누가복음 9:5)

나는 복음을 구걸하듯이 전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가진 귀한 것을 제발 받아달라고 사정하며 베풀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비단 비신자들에게만 적용되지 않고 신자들 사이에서도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실 위의 말씀은 제자들을 이스라엘 내에서 파송하시면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성도 간의 문제에 대한 문제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맞다.) 어떤 모임이든 모임에 부담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모임에 잘 참석도 하지 않고 그러면서 자기에게 관심을 두기를 바라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보통은 이런 사람들을 '약하다'라고 하며 어떻게든 모임에 참석시키려고 노력한다. 물론 그 노력하는 사람들은 형제애를 실천 중이다. 그러므로 옳으며 칭찬받아야 한다. 그러나 같은 '형제'로 불리면서 모임에 부담을 주는 그 행동을 하는 그 사람은 분명 죄성을 발휘하는 중이다. 그러므로 그 스스로는 자신에 대해 반성할 줄 알아야 하며, 어떤 경우에 단호한 조치가 필요할 수 있다. '약하여 돌봐야 하는 사람'에 해당하는 그 사람이 만약 '나는 지금 힘드니까 너희는 나를 돌봐야 해. 나에게 관심을 둬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난 상처받아버릴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런 과정을 통해 그 사람에게 회복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복음에 대해 '내가 교회에 다녀 주마. 내가 모임에 참석해 주마. 내가 말씀을 들어 주마'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오히려 모임에서 내치는 것이 그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14-15)

이 말씀에서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을 '왕따' 시키라고 바울이 말하고 있다. 이 역시 교회 안에서 벌어졌던 일이므로 위의 예수님의 말씀과 연관 지어서 생각하는 데에 큰 무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동시에 '형제같이 권면'하라고 한다. 무슨 뜻이겠는가? 바로 그 '제외함'이 그의 회복을 위함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복음을 복음으로 받지 않고 마치 크게 선심 써서 들어주는 양 대하는 사람은 사실 떨어버리는 것이 그를 위한 조치일 수 있다. 물론 방법상의 어려움과 지혜로운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넘어가자. 너무 어려운 문제이다.


이런 의도로 말을 했었는데, 모임 중에 한 사람이 그에 대해 발끈했다. 그 사람을 지목하여 말한 것도 아니고 내가 위에서 말한 내용과 그 사람이 밀접히 관계된 경우도 아니었는데 그 사람이 한동안 모임에 나오지 않다 보니 그 말씀해석이 마음에 걸렸나 보다. 더구나 나 외에 다른 사람들도 그 사람을 나오게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는데 내가 그렇게 말해 버리니 좀 민망했었나 보다. 그러다 보니 일대 다로 다소간 언쟁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그 말을 할 때에 그런 소란이 일어날 수 있으리라고 미리 알았다는 사실이고, 그냥 예상대로 그런 결과가 나왔을 뿐이다. 그러면 내가 지혜롭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야 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말씀이 그렇게 적혀있고, 내가 그렇게 깨달았다면 내 신앙 양심상 다르게 전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이 생각은 어느 정도 강력한 근거가 있다.


우리 소그룹 모임에서는 한 가정씩 돌아가며 QT 나눔을 하는 시간을 가진다. 마침 그날이 내 차례여서 준비했던 말씀이 예레미야서의 6~8장이었다. 물론 소란때문에 나누지 못하였다.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6:13-15)

당시 유다의 부패상이 1~6장에 걸쳐서 나오고 있다. 그리고 그 부패의 결과로 그들은 멸망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평강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럼 당신 주변은 어떤가? 그리고 당신은 어떤가? 멸망에 대해 선포하는 목회자를 좋아하는가? 더구나 당신은 잘못에 대해 넘어가지 않고 지적하는 편인가? 나는 감히 말하건대, 현대 교회에서는 회복의 말씀만 흘러나온다고 생각한다. 눈을 들어 주변을 돌아보면 불합리한 것 투성이인데, 회복과 평안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당시와 오늘은 비슷한 부분이 참으로 많다. 그다음으로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을 할지라도 그들이 너에게 순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네가 그들을 불러도 그들이 네게 대답하지 아니하리니,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는 민족이라 진실이 없어져 너희 입에서 끊어졌다 할지니라. (예레미야 7:27-28)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길, 네가 선포해봐야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도 말하라고 하신다. 나는 이 부분을 나에게 적용하고 싶었다. 듣든 듣지 않든 현재 내가 깨달은 말씀은 말씀 그대로 전해야 하는 것이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였다. 말씀이 또 이어진다.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즉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악을 뉘우쳐서 내가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 전쟁터로 향하여 달리는 말 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느냐 참으로 서기관의 거짓의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며 두려워 떨다가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 (예레미야 8:6-9)

가르치는 자는 정직을 말하지 않고,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모른다. 더구나 그 백성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지혜가 있고"라고 한다. 나는 이 말을 실제로 우리 교회 집사에게서 들은 일이 있다. 그 분이 말씀하시기를 "저는 구원받을만큼의 지식은 이미 알고 있는데 성경을 굳이 읽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라고 하였다. 실제로 많은 교인들이 자신들이 성경을 모르는 데에는 동의하나 구원받을 만큼은 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다 그렇지 않다를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현상 자체로 봐서는 이 구절에서 말하는 문제점이 현대교회의 문제점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정직을 말하기로 정직히 말하기로 작정하였고, 멤버들에게 여호와의 규례를 가르치기로 작정하고 모임에 참석했었다.


따라서 당연히 예상되는 반발을 무시하고 말을 하게 되었고, 반발이 일어났다. 물론 그 반발의 중심에는 나의 조심 없는 언행과 너무 힘든 성경공부 그리고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하는 데에 대한 불만 등이 복합되어 있으나, 표면적으로는 위의 이유로 반발이 일어났고, 그에 대해 상당히 오랜 시간 이야기를 하였다. 여하간 당일은 잘 마무리가 되는 듯싶었다. 나는 말을 좀 줄이기로 하였고, 멤버들의 상태를 조금 더 이해해주기로 하였으며, 멤버들은 성경공부 내용을 미리 조금이라도 생각해보고 오기로 하였다. 그래서, 바로 다음날 정도에 그 주에 할 성경공부 교재를 미리 편집하고 문제마다 약간씩 생각할 문제를 달아서 전해 주었다. 당시 생각할 문제를 달면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대부분이 예습해 오지 않을 것이며, 혹시 예습한다 하더라도 오기 직전 1분 또는 5분 전에 한번 읽어만 볼 것이다. 또는 차 안에서 잠깐 훑어보기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생각을 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그냥 읽기만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생각할 거리를 생각할 수 있도록 가이드를 해 주어야겠다. 이런 생각으로 적었던 생각할 문제들이 다시 멤버들에게 부담으로 비쳤었나 보다. 특히나 혹시 더 깊은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을 위해 팁을 몇 개 적었었는데 그것들을 죄다 공부해 오라는 것으로 오해하여 더 큰 소동이 내부적으로 있었던 것 같다. 급기야 그들이 내 아내를 불러서 그런 불만을 이야기하였고, 아내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그런 의도가 아니라고 변명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부분에서 내가 폭발하게 되었다. 나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 상관 없다. 그런데 아내를 불러서 했다. 더구나 아내가 사과와 변명을 하게 되었다. 이 부분이 나를 폭발하게 하였다. 정말 분노하였고 다 관두자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나의 분노는 분노고 나는 한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나의 분노의 중심에는 어떤 진리나 하나님의 명령 또는 성경이론이 있지 않고 나의 속 좁음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내 심정은 "내 속좁음이던 뭐던 간에 내가 이 사람들과 다시는 성경공부를 하지 않겠다."였다. 그러면서 계속 성경을 읽어 나갔다. 이런 때 항상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게 무언가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기대하고 성경을 읽게 되었다.


그런데 말씀을 통해서 나의 문제점을 보여주시지 않는 듯이 보였다. 다음의 말씀은 아내 사건이 터졌던 그날 아침에 읽었던 말씀이다.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에스겔 3:5-7)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불신자는 네 말을 들을지 몰라도 네 주변에 있는 성도들은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선포하라고 하신다.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에스겔 3:11)

그러면서 최종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이다.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니라. (에스겔 3:27하반)

내가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심지어 언급하지 않은 중간에는 그 유명한 파수꾼 비유와 겔3:26~27에는 징계의 방법으로 선지자의 입을 봉하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즉,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재앙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선포하지 않은 파수꾼에게 그 피 값을 찾을 것이라 말씀하신다. 나는 성경에 상대방이 듣기 쉽게 말하면 하나님 말씀이 더 잘 전해진다는 말씀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듣든지 아니 듣든지" 또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리라" 등등의 말씀이 많다는 것은 안다. 그리고 그 말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듣지 않고의 책임이 전하는 자에게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전하는 자는 전하는 방식이 어떻든 간에 전하는 책임만 하면 되고 그 말씀을 듣고 듣지 않고는 전적으로 듣는 사람 책임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내가 말씀을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면 나는 모두 잘했고 멤버들은 죄다 잘못했나? 그들은 들을 귀가 없었던 것이고, 나는 파수꾼의 역할을 잘해낸 것인가?


이즈음에서 나는 약간 헷갈리기 시작했다. 결코, 내가 잘한 부분이 없는데 말씀으로는 내가 잘못했다는 응답이 없다는 사실이 약간 곤혹스러웠다. 나는 하나님의 방법이 사람의 방법과 다르므로, 내 상식으로 잘잘못을 가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번의 사건에서 나의 속 좁음과 거만함 그리고 남을 배려치 않는 그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내 상식으로는 내가 잘못한 것이 분명하나, 성경이 그것이 잘못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나는 적어도 교회 내에서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좀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세상적으로는 잘못을 인정할 수 있으나, 교회에서는 할 수 없다는 말이 거꾸로 돼야 하는 것 아니냐고 도전하는 것이 가능해 보인다. 오히려 세상적으로는 떳떳하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해 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도전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에 대해 확고하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죄를 통해 잃었기 때문에 나의 본성의 소리는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세상의 기준으로 잘잘못을 결정할 수 있는 일도 교회에서는 그 기준을 사용하지 않으려 하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물론 가능한 한 세상일에 대해서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려고 노력하며,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과정이 바로 우리 삶 즉, 세상에서의 천국 백성이 되기 위한 훈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던 차에 아내가 또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돌아오더니 자기 마음이 편해졌다고 하면서 가장인 내 뜻을 따르기로 했다고 했다. 즉, 내가 다 관두겠다면 그 뜻에 따르겠다는 선언을 하였다. 그 말에서 사실 더 큰 불편함을 느꼈다. 물론 나는 우리 가정의 가장이기 때문에 어떤 결정에 관한 최우선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신앙의 결정에 관한 한 내가 결정하고, 나의 결정에 따르기로 이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나의 신앙결단에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고 나의 속 좁음에 해당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에게도 "이 문제는 가장 운운할 문제가 아니다. 당신은 이런 때 나에게 계속 잘못을 지적함으로써 나를 고치려고 노력해야지 당신의 결정에 따르겠어라고 말할 그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하였다. 여하간 고민이 깊어져만 갔었다.


그러다가 다니엘서 9장에서 해답을 얻었다. 먼저 다니엘서를 이야기하기 전에 근래 신선하게 다가왔던 말씀을 먼저 보자. 에스겔서 36:36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너희 사방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폐한 자리에 심은 줄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에스겔 36:36)

하나님의 의지를 상당히 강력하게 표현한 말씀이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말씀의 대미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그 회복을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겠다는 선언이다. 이 말씀의 후반부를 ESV로 읽으면 조금 더 생동감 있게 느낄 수 있다.

Then the nations that are left all around you shall know that I am the Lord; I have rebuilt the ruined places and replanted that which was desolate. I am the Lord; I have spoken, and I will do it. (ESV)

'I'로 시작하는 3개의 문장이 병렬되어 있다. "나는 여호와다. 내가 말하였다. 그리고 내가 이룰 것이다." 이 정도면 사실 우리가 끼어들 구석이 전혀 없다. 하나님께서 모두 알아서 하시겠다는 선언이다. 그런데 다음 장도 아니고 바로 다음 절에서 아주 의외의 말씀을 하신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Thus says the Lord God: This also I will let the house of Israel ask me to do for them: to increase their people like a flock. (에스겔 36:37)

당신이 이루실 것임을 그렇게 강력하게 말씀하시고 바로 이어서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필요하고 또 기도하게 하실 것임을 선포하신다. 물론 이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존재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역사에 우리의 참여를 기다리시며, 같이 영광 받기를 원하신다."라고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아주 신선했었다. 그리고 이 말씀이 뇌리에 남아 있었다.


이런 기억을 가지고 다니엘서 9장을 읽는데 정말 충격적이었다. 말씀은 이렇게 시작한다.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 해,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다니엘 9:1-2)

자 당신에게 이런 깨달음이 왔다.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이 조만간 해결될 것이며, 그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당시 다니엘은 대충 70년 중의 67년 정도가 지난 것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70년을 언제부터 언제까지로 볼 것인가는 이 글의 범위를 넘어간다. 다만 다니엘은 자신이 이주당한 때로부터 계산하여 다리오 왕 첫해까지 계산했을 때에 대충 67년 정도가 지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하간 70년이 거의 다 되어 간다고 믿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질문을 던지고 싶다. 당신은 이런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 무엇을 먼저 하겠는가?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주위 사람들에게 알릴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무엇을 알리겠느냐고 묻자 회복에 관해 이야기하고 위로하겠다고 대답하였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는 분명 주위 사람에게 알리는 일을 먼저 했을 것이다. 그리고 형제들을 위로하며 형제 사랑을 실천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니엘은 기도하였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다니엘 9:3)

심지어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기도하였다. 민감한 사람이라면 이후의 기도 내용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다니엘은 기도했는데 당신 같으면 어떤 기도를 하겠냐고 아내에게 또 물었다. 먼저 감사기도를 드리겠다고 한다. 그 이후에는 어떤 기도를 하겠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속히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어떤 근거로 속히 이루어 달라고 하겠느냐고 다시 물었다. 대답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 이루어 달라고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적어도 내 상식으로는 아내의 대답은 매우 상식적이며, 어떤 면에서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다니엘의 기도를 보자. 다니엘은 9:4~19까지 총 16절에 걸쳐서 기도하는데 4~15절 즉, 12절을 회개하는 데에 사용한다. 철저한 회개를 한다. 그리고 16~19절 즉, 4절을 사용하여 회복을 간구하는데 그 근거로 하나님의 약속을 인용하지 않는다.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다니엘 9:18-19)

다니엘은 철저히 자신은 낮추고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긍휼 그리고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이루어 달라고 그야말로 "간구"하고 있다.


나의 성향으로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일을 다니엘은 하고 있다. 나는 깨달음 이후에 기도를 하지 않을 것이고, 한다 해도 이루어 달라는 기도를 할 것이며, 그 기도의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이 될 것이다. 그런데 다니엘은 깨달음 이후 기도했으며, 그 기도를 회개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 이후 정말 겸손히 하나님께 간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나의 문제가 여기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시 ESV를 한번 인용해 보겠다.

Then I turned my face to the Lord God, seeking him by prayer and pleas for mercy with fasting and sackcloth and ashes. (다니엘 9:3)

우리말 성경에는 그 뜻이 약화하여 있는 "turned my face to the Lord God"이 나온다. 즉, 다니엘은 깨달음 이후에 그의 얼굴을 하나님께로 돌리고 기도를 시작한다. 그에 반해 나는 나의 얼굴을 내 소그룹 멤버에게 그리고 아내에게 돌린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다시 에스겔서의 내용으로 돌아가 보자.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하셨나? 당신께서 회복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자 다니엘이 나처럼 깨달음 이후에 주변 사람에게 회복을 선포하고 위로했다고 생각해 보자. 회복이 일어날 수 있을까? 아니다. 회복이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하나님께서 일하셔야 회복이 일어나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려면 나의 기도가 필요하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고 주변 사람에게 이야기만 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시지 않으시고 결국 진정한 회복은 일어날 수가 없다. 아내와 이야기하는 도중 불현듯 또 하나를 깨달았었다. 나는 그 순간까지도 기도하지 않고 그 내용을 아내에게 떠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런 인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내가 깨닫고 남들에게 알리는 것이 사명이고, 그것이 형제 사랑이라 생각하였지만 결국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는 통로를 막는 격밖에 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으므로 나와 관계된 사람들에게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불평불만이 나오게 된 것이다. 나는 방향도 틀렸고 회개가 없었으니 내용도 틀렸었다.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바랬으니 역사가 일어날 리가 없다. 나에게 필요한 기도는 "주여 나의 교만으로 주께서 주신 말씀으로 기도하기보다 주위 사람들에게 나의 깨달음을 알리는 데에만 주력하였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고,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감사함으로 기도하게 하옵시고, 애통함으로 겸손하게 하옵시고, 회개로 거듭나게 하여 주옵소서."였다. 그런데 나는 깨달음을 나를 변호하는 데에, 그리고 나를 정당화 하는 데에, 무엇보다 나를 자랑하는 데에 사용하여 왔다.


성경을 읽는다 하면서도 이런 간단한 진리조차 모르고 살아왔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떠들어도 전혀 변화하지 않는 소그룹멤버들을 보면서 무엇이 문제인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이유를 알았다. 물론 여전히 여러 가지 문제가 남아있다. 일단 나의 본성상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만 드러나고 하나님의 역사가 드러나도록 기도해야 하는데, 나는 여전히 내가 드러나기를 바란다. 그러다 보니 기도해야 하는 순간에 떠들고 있는 나를 자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이 사실을 이번에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셨으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앞으로는 같은 상황에서 나도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해 본다.


추가1: 내가 위에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기도를 약간 부정적으로 그렸는데 그에 대해 부연하고 싶다. 일단 그런 기도가 틀린 기도는 아니다. 철저히 자신을 죽이고 "저는 무익하나 주께서 약속하셨으므로 그 약속에 의지해 간구합니다."라는 기도는 좋은 기도의 본이다. 그런데 문제를 그런 기도의 본을 귀로 들어서 실천하는 사람이다. "약속에 근거해서 기도해봐. 그러면 이루어 주셔." 이런 말을 듣고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제가 먼저 나라와 의를 구했으니까 이제 돈 주세요."라고 기도한다면 이 기도는 무슨 기도가 되겠는가? 빚쟁이의 빚 독촉에 해당하는 기도가 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개인적인 깨달음과 낮아짐의 결과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기도는 옳다 하겠으나, 그냥 들어서 방법론으로서 그런 기도 형태를 택한 것이라면 그런 기도는 틀린 기도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신앙생활에서 방법론에 대한 모든 경험적인 내용은 틀린 내용이다. 우리는 어떤 목적을 향해 일을 해 나가는 과정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통한 천국 백성으로의 훈련을 쌓아가는 과정에 있다. 특별한 방법을 논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과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특히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그리고 그런 것은 사실 신앙도 아니다. 하나님으로 예수님으로 사는 것이 신앙이지 어떤 '방법'으로 사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추가2: 다니엘서 9:3에 보면 다니엘이 머리를 여호와께 향하고 간구를 시작하는데 그 마지막에 보면 "결심하고"라고 나와 있다. 즉, 다니엘의 회개는 저절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는 바로 그 때가 회개해야 할 때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과연 우리는 회개의 때의 회개를 하고 있는 지 돌아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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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2. 7. 29. 15:13

예수님의 인성에 대하여 Bible Stories2012. 7. 29. 15:13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단이 아닌 한 배우는 기본 교리 중의 하나가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100% 인간이심이다. 종종 예수님이 왜 100% 하나님이셔야 하는지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으며, 거기에 대한 답을 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왜 100% 사람이셔야 했는가에 대한 질문이 더 어려운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기회가 있을 때에 100% 신성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이 글은 내가 맡은 소그룹 모임을 위해 작성했던 글인데 그것을 약간만 손을 봐서 여기에 올려 본다. 당시 모임 중에 “예수님의 100% 인성이 부정된다면 그것이 나의 신앙에 일으킬 수 있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라고 질문을 던졌었다. 이 질문에 대해 생각을 해 본다면 공부를 많이 하지 않은 한 (심지어 많이 했다 해도) 아마 많은 사람이 개인의 신앙과 별 관계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또는 뭐 "모르겠는데?" 정도의 답을 얻었을 수도 있다. 그런 답도 틀렸다고 하기는 어렵다. 이 부분을 파고들어오는 이단에 대해 취약성을 보이기는 하겠지만 원래 이단은 싸울 존재가 아니고 피할 존재이기도 하고, 복잡한 내용을 물어보는 이단과 오래 이야기를 할 정도로 자신의 성격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별 필요없는 고민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생각을 해 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몇 가지 힌트 정도만 나눠볼까 한다. 이 글은 많이 축약한 내용이고, 아주 신중하게 적은 글도 아니다. 따라서 이 글로 신학적인 논쟁을 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그럴 정도로 잘 정돈된 글도 아니다.

부활
먼저 기본부터 살펴보자.


1. 우리는 죄인이다.


2. 그러므로 죽어야 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로마서 6:23)


3. 죽음은 영원 형벌을 뜻한다. 즉, 세상에서의 존재가 사라지는 일회적인 사건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반복되는 하나님 부재의 삶을 죽음이라 한다.


4. 그런데 우리 믿는 자 또는 선택받은 자 또는 구원받은 자는 예수님을 힘입어 부활할 수 있다.
Note: 부활에 대해 흔히 “우리는 죽지 않는다.”라고 오해한다. 결국에는 부활할 거니까 죽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도 무리는 없겠지만, 어쨌든 죽음의 과정은 거쳐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17)

그런데 다음의 말씀과 같이 우리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으로, 즉, '나'는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과정이 부활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 참고로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crucified → died → was buried → descended to the dead → rose again의 순서로 고백함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descended to the dead”를 해석하는 문제가 너무 논란거리가 되어서 생략했을 뿐, 교리적으로는 이 부분을 인정하고 있다. 세부적으로 조금씩 다른 목소리가 있을 뿐이다. 어쨌든 해석에 따라 예수님께서 지옥까지 내려갔다가 오셨다고 해도 별 무리가 없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더 맞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죽음의 상태에서 예수님의 신성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것이다.


5. 예수님을 힘입어 부활한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자. 예수님의 육신은 죽음과 부활을 과정을 전부 겪으셨다. 신학자들 간에 약간의 논란거리가 있지만, 부활은 예수님의 신성에 의지하여 일어났다. 즉, 예수님은 육체를 가지고 신성의 도움으로 죽음과 부활을 거치셨고, 그 '본'을 따라 예수님을 힘입어 우리도 부활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다.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디모데전서 1:16)

여기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모든 부활하는 사람의 첫 열매가 되셨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린도전서 15:20)

즉, 우리도 그와 비슷한 열매를 맺어야 하며, 열매를 맺는 과정은 예수님께서 겪은 과정과 유사 또는 같을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육체는 죄의 삯으로 죽게 되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도와 우리를 살리신다. 조금 더 세련되게 말하려 한다면, 바울의 갈2:20을 다시 인용해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즉, 나는 분명 죽게 되고 죽음의 고통도 겪게 된다. 물론 이 과정은 현세에 죄에 대한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면, 즉, 예수님을 나의 주로 믿는다면 나의 삶의 주인이 나에서 예수님으로 바뀐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힘으로 부활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의 상태가 된다.


6. 자 여기에서 예수님의 육체 부활을 부정해 보자. 즉, 100% 인간을 부정해 보자.


A.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한다면, 우리에게 죽음은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따라야 할 본이 없어지므로 부활과 그에 따른 영생이 불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죄로 인해 죽은 이후 힘입어 부활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B.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즉, 죄의 값이 사망이지 않다고 한다면, 공의의 하나님에 대한 증언인 구약 전체가 부정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구약 전체를 부정해 버리는 경우 예수님의 인성은 부정되나, 신으로서의 예수님을 믿는 데에는 별다른 무리가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에 구약을 더 복음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의 본질을 부정할 때에 가장 먼저 상처입는 부분이 신약이 아니고 구약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100% 인성에 대한 부정은 부활신앙에 대한 부정 또는 구약성경 전체에 대한 부정이 된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는 이단은 예수님을 “영체”라 말하기도 하면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을 부정한다. 그리고 구약의 하나님에 대해 공격하거나, 우리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구약을 해석한다.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에 더해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으신 이유를 성경적으로 하나 더 들 수 있는데 다음의 성경 구절과 관련된다.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히브리서 5:1-2)

대제사장은 성경에 나오는 기름 부음 받은 자 중 대표적인 경우인데 (기름 부음 받은 자 = 그리스도, 제사장, 왕, 선지자가 기름 부음을 받음), 바로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예표한다. 자, 대제사장은 인간이어야 한다고 이 구절이 주장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간이셔야 한다. 이는 다음에서 한 번 더 강조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브리서 4:15)

이 구절에서 강조하는 것은 우리와 같이 모든 죄의 유혹을 참고 이겨내신 예수님이시므로 우리의 죄 또한 동정하시며, 따라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고 계시되 죄는 없으셨다. 사실상 이 구절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성에 의지한 예수님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생각해 볼 때에는 불필요한 구절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예수님의 죄 없으심에 대해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은 인간 예수에 대해 묵상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머릿속에 있는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이신 예수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강력한 증언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이단은 '죄가 없는 존재'가 어떻게 사람일 수 있느냐고 하면서 이 구절을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는 데에 사용한다. 그러나 '죄가 없는 예수님'에 대한 증언은 신성 예수님의 측면에서 보면 불필요한 증언이고, 따라서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강한 증언이 된다. 인성이 없으시다면 죄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면 역시 우리의 구원이 불가능하다. 십자가의 도인 “사죄-칭의-새 생명”에서 '사죄'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바로 우리를 동정하시는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인성이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를 동정하지 않으실 것이고, 죄인 된 우리를 위해 죽어주실 이유도 없고, 우리를 복잡하게 다시 살리실 이유도 없다. 이처럼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의 구원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자, 위에서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 짧게 다루어 보았다. 이것을 하나하나 깊게 들어가자고 하면 너무 길어져서 이 정도로 짧게 끝내려 한다. 노파심에 한마디 하자면, 이 글은 누구를 가르치기 위해 쓴 글은 아니다. 맨 처음 왜 블로그를 시작했는지에 대한 글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내 개인적인 기록을 남긴다는 의미가 더 강하다. 그런데 이 글의 작성 방식은 내가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작성한 형태로 드러나기 때문에 부담스럽기도 하다. 가르칠 자격이 없는 사람이 가르칠 경우, 가르치면서도 가르치는 자가 되지 않을 방법이 있다면 좋겠는데, 나는 그 방법을 모르겠다. 사실 나는 내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 존재인지 아주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쓰레기가 되지 않게 발버둥치는 모습이 좀 강한 성격으로 드러나기도 하는데 기본적으로 선생될 자격은 커녕 인간 될 자격도 의심되는 사람이다. 누구도 인간인 한 성경을 '안다'라고 할 수 없다. 나는 내가 얼마나 병신같은 존재인지 알고 있다. 이 글도 '아는 사람'으로서 아는 지식을 적은 것이 아니고 '내 주제에 조금 깨달은 내용'을 나누는 수준이다. 그래서 내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으리라 보장할 수 없고, 틀린 부분이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냥 말한 인간의 수준을 고려해 가면서 걸러 읽어주기를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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