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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1. 14:23

행복에 대하여 Opinion2012. 12. 1. 14:23

우리는 자주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직접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말이 내포하는 성경적 또는 신앙적 의미와 다르게 사용되거나 이해되는 경우를 종종 보아 왔다. 더구나 근래에 들어서 이 말 때문에 힘들어하거나 반대로 이 말을 사용하여 남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여럿 보게 되어 이에 대해 글을 써 보려고 한다.


먼저 질문으로 시작해 보자.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신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대답은 당연히 '그렇다'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원하지 않는다.'라 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대대적인 수정이 불가피하다. 사랑의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 나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 정도만 열거해도 이런 성품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원하신다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고난을 겪는 사람이 적지 않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삶에서 전혀 하나님의 향기는 나지 않은 채 외적으로 너무 풍족한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원한다는 논리 아래 전혀 정돈되지 않는 삶을 버젓이 사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는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다르게 말한다면 그들은 풍족한 자신들의 삶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증거라고 생각하며, 따라서 그들은 경건 생활을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논리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이 옳지 못하게 살아서 그렇게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기도 한다. 자기의로 똘똘 뭉쳐있는 그들을 우리는 '악인'이라 부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리고 그들을 보면서 악인의 형통함에 대해 개탄했던 성경의 인물들이 생각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원한다는 논리에 동의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가당착에 빠지기 일쑤다. 더구나 우리 마음 안에는 그들이 악하게 보여도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솔직한 속내가 자리하고 있다.


나는 이 글에서 그들이 '악인'임을 증명하려는 생각은 없다. 그건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문제이니까. 나는 이 글에서 이 문제에 대해 혹시라도 갈등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어느 정도 정돈된 의견을 들려주고 싶다. 또는 이런 문제로 고민을 겪는 사람을 보면서 위로를 해주고 싶어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이 글을 쓰려고 한다. (말을 점잖게 하려다 보니 뭔가 모호한 문제 제기가 되어 버렸다.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해 보겠다. 요즘 큰 교회는 부자를 우대한다. 이건 너무 명확해서 아니라 하기 민망하다. 그리고 그 부자들을 단순히 우대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부자들이 의로워서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는 논리를 은연중 인정해준다.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설교도 상당히 많다. 더군다나 그 부자들 자신도 자신들이 의로움의 결과로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께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사랑을 받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다 보니 그런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쉽게 던지는 말로 상처를 주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교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복음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관해 혼란스러워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논리, 즉, 의로워서 부자가 되었다는 논리를 깨부수지도 못하고, 실상 깨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소외된 그들조차 부자들의 '부자가 되는 방법'을 따라 해서 그들 역시 부자가 되고 싶은 소망이 마음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이 문제에 관해 명확한 설명을 찾기도 어렵고 찾으려는 노력도 현대교회 안에는 별로 없다.)


질문을 하나만 더 해보자. 그러면 행복이란 무엇인가? 아니 어떤 상태일 때에 그리고 어떻게 되면 우리는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기게 될까?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이라면 이에 대한 세련된 대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계획, 방법대로 살 때에 우리는 행복해 질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의 원하는 바와 하나님의 원하는 바가 상치가 된다면 어떻게 되는가? 과연 당신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관해 관심이 있기는 한가? 삶이 전혀 정돈되지 않고 아름답지 못하게 살면서 하나님이 자기의 행복을 원하신다고 하는 그 사람은 아마 자기가 원하는 바를 하나님도 원하신다고 굳게 믿고 살지도 모른다.


어렵게 돌아가지 말고 직접 이야기를 해 보자. 우리는 '내가 원하는 상태,' '편안한 상태,' '내가 즐거운 상태' 등등에 해당하는 상태에 있을 때 행복하다고 이야기한다. 행복에 대한 이런 접근법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이 접근법은 내가 내 삶을 계획하고 내가 내 삶의 주인임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경우 하나님은 그저 조력자일 뿐, 우리가 하나님을 그리고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은 그저 공허한 거짓 외침이 될 뿐이다. 내가 주 (Lord)라고 부른다면 그분이 내 삶의 주인이 됨이 너무 당연한데도 앞의 접근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경우 전적으로 그가 삶의 주인이 되어 버린다. 그들이 즐겨 인용하는 성경 구절들을 열거하며 하나하나 그렇게 적용하면 안 된다 말하고 싶으나,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고 믿겠다. (내가 왜 이렇게 이야기했는지에 관하여 부연설명을 해야겠다. 내 주변에 빨리 삶이 여유로워진 사람이 있다. 물론 오랜 시간 동안 고생을 했던 사람인데, 최근에 들어서 다방면에서 여유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어려웠을 때의 버릇을 여전히 고치지 못했다는 데에 있는데, 예를 들어 탈세를 절세라 우기기, 속여서 싼값에 호텔 이용하기를 똑똑하게 돈 아끼기라 우기기 등을 아직도 즐기고 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야 나는 하나님께서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신다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해 보고 싶은 거 다 해 볼 거야. 늙으면 못하지 않겠냐? 그러니까 너도 젊을 때에 해 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봐. 하나님이 이 좋은 세상에서 좋은 것을 누리라고 주셨는데 즐기지 않으면 되겠냐?" 뭐 즐기고 싶어도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논의는 이 사람 앞에서 사치일 뿐이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을 배우듯이 천국 소망을 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경기에 최선을 다하는 경주자로서 삶이 돼야 하는 이 세상을 '좋은 것을 즐기라고 주신 좋은 세상'이라 생각하는 것도 애교다. 어쨌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고,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그렇지 않다고 장담하겠느냐고 나는 질문하고 싶다.)


더구나 내가 원하는 삶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과 정반대이다. 다음의 말씀을 살펴보자.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7:21-25)

내 속사람이 원하는 대로 사는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상태이고, 그 상태가 바로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있는 상태이다. 즉, 내 육신이 원하는 상태는 내 마음이 원하는 상태와 싸워야만 하는 정 반대의 삶이다. 나를 잘 정돈하여, 즉, 경건 훈련을 통하여 내가 원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되도록 만들어보자? 이런 식의 논의는 교회 안에서 흔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아마 많은 사람이 그 진위에 대해 고민해 본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도 전혀 맞지 않는 헛소리이다. 성경은 우리가 그럴 수 없다고 강력하게 이야기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5:17)

내 육체의 소욕은 아무리 노력해도 성령의 소욕을 거스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 세상에 육신으로 선한 사람은 없다. 따라서 육신을 경건 훈련을 통하여 성령의 소욕을 따르게, 즉, 선하게 만들 방법은 애초에 없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로마서 3:10)

오죽하면 사도바울은 날마다 죽어야 했겠는가? 이 문제에 관하여 생각해 보았는가? 한번 죽었으면 되었지 왜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어야 했을까? 내 삶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바꾸는 작업은 경험이 쌓인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훈련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며 많이 배운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날마다 죽는 방법 외에는 없다. 이 정도로 어려운 작업이 바로 삶의 주인을 내려놓는 일이다. 따라서 행복의 의미를 내가 기준이 되어 정한다면 그 행복은 절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과 같을 수 없고 비슷할 수조차 없다. 오히려 완전 정 반대의 삶이 될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렇게도 날마다 죽고, 자신을 쳐 복종케 한다고 이야기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31)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린도전서 9:27)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변화되기 전의 육신은 절대 훈련되거나 길들여 지지 않는다. 아무리 모세여도,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어도 바울과 같이 매일같이 육신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일을 반복하지 않는다면 다시금 개가 그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이 반복되는 죄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해도 아직도 '그래도 노력하면 점점 변화되지 않나? 그걸 위해 경건 훈련을 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질문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어차피 문제될 것이 없다면 나도 그 말을 인정해 주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든 저렇게 생각하든 경건 훈련은 필요하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강력하게 말하는 이유는 그런 접근이 '자기의'에 빠지기 쉽게 하며, 결과적으로 완전 다른 길로 가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건 훈련은 영의 유익을 위한 것이지 육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행복의 정의를 내가 하는 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복을 원하신다는 명제는 거짓이 되어버린다. 행복의 정의를 내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맡긴다면 물론 그 명제는 참이 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반대말 격인 고난에 관하여도 한번 생각해보자. 역시 고난의 정의를 인간이 하면 인간이 정의한 행복과 반대말이 된다. 그러나 고난의 정의를 하나님께서 하신다면 하나님께서 정의한 행복과 동의어가 될 수도 있다. (항상 그렇다고는 못하겠다.)

고난에 관한 논의는 다양한 면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따라서 간단하게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과 '내가 원하는 삶'의 측면에서만 보자. 조금은 유치하지만, 효과적인 예가 하나 있어서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이 이야기는 아내가 내게 해 준 것인데, 아내는 또 그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그러니까 누가 최초 언급자인지는 모르겠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종종 다 낡은 딱지를 양손에 쥔 아들에게 멋진 로봇 장난감을 선물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같다. 아버지는 로봇 장난감이 훨씬 더 재미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아들은 낡은 딱지를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을 놓아야 받을 수 있는데 놓지 않으니 받을 수 없다." 약간 맞지 않는 부분도 있겠으나, 내가 말하고 싶은 의도는 다들 눈치챘으리라 믿는다. 하나님께서 내게 요구하시는 고난은 그 낡은 딱지를 내려놓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 고난의 뒤에는 로봇 장난감이 기다리고 있다. 유치하고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고난을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예라고 생각한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인 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진정한 행복에는 이를 수가 없다. 그래서 종종 하나님께서는 내 삶의 주인을 나에서 하나님께로 바꾸는 작업을 하신다. 그리고 정말 사랑하시는 사람이라면 '종종'이라는 단어를 '필요할 때마다 항상'이라고 바꿔야 한다. 그런 경우를 우리는 주위에서 보기도 하고 우리 삶에서 직접 경험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고난'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고난이 복'이라는 말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하였고, 그들이 말하는 '고난이 복'이라는 말이 바로 이 뜻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고난을 주께서 주시는 평안으로 이겨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주위에 누가 봐도 고난 중에 있는데 평안한 사람을 한둘 알고 있는 재수 좋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당신이 그 행운의 주인공이라면 그들에게 가서 행복하냐고 물어보라. 그들은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어려운 삶의 모습과 전혀 관계없이 행복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그들은 바로 다음날 무너질 가능성도 함께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사람이지만.


행복은 간단하게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행복이란 내 삶의 주인이 예수님인 상태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시기를 바라심에도 불구하고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정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일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난도 행복이다.


이렇게 보자면, 현대 교회 내에서 기득권층이 이야기하는 행복론과 고난론은 전부 틀렸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행복한 이유가 '하나님께서 (그들의 의로운 행동에 대한 보답으로) 그들이 행복하도록 도와주셨기 때문이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은 철저히 예수님은 조력자일 뿐이고, 삶의 주인은 그들 자신이다. 그러므로 틀렸고, 그런 인생은 행복할 수 없다. 모두 알다시피 우리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존재들이다. 그런 미약한 존재가 주인인 삶인데 어찌 행복할 수 있단 말인가? 일장춘몽처럼 찰나에 지나갈 행복'감'은 가능할지 모르나, 지속 가능한 궁극의 행복에는 절대 이를 수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하겠다.

  • 예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되셨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행복해 질 수 있다.
  • 육신으로는 절대 구원에 이를 수 없다.
  • 육신은 절대 선해지지 않는다.
  • 육신의 소욕은 항상 영의 소욕을 거스른다.
  • 내 육신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내가 원하는 것은 절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같을 수가 없다. 따라서 바울처럼 나를 죽이는 삶을 반복해야 한다.
  • 하나님은 도구나 조력자가 아니다.
  • 내가 사랑받을만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므로 사랑받는 것이다.
  • 복 받을 만한 의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고난은 삶의 주인을 바꾸는 과정을 말한다.

종종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기도했더니 어제까지 맛있던 술이 이제 맛이 없어요.' '담배가 저절로 끊겼어요.' '기도했더니 점점 내가 변해가고 예수님과 닮아가는 것 같아요. 이런 것이 바로 성화의 과정이고 신앙생활인가 봐요.' 이런 말은 가슴 아프지만 틀린 말이다. 나도 이렇게 믿고 싶다. 나도 변화되고 싶고, 어제 나를 괴롭혔던 주제가 내일은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반복되는 말이지만, 우리가 어떤 과정을 통해 육신을 길들일 수 있다면 (물론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셨다고 주장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와 당신의 목숨을 우리를 위해 주실 필요가 없었다. 그냥 우리 수명을 아주 길게 해 주시면 될 일이다. 또는 윤회하면 된다.[각주:1] 더군다나 나이 들어서 오히려 하나님께 책망받을 일을 많이 했던 다윗이나 노아 그리고 매일 죽지 않으면 신앙을 유지할 수 없었던 바울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것인가?


이런 말을 마치 경건 훈련의 목표인 양, 그리고 자신은 이미 그 정도 수준은 이룬 양 말하는 교회의 많은 멍청이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라. 우리 삶에서는 오직 예수만 드러나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 해 주신 일'을 간증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것만을 말하려고 하든지, 그것 외엔 할 말이 없다면 예수님을 '내 삶에 무언가 해 주시는 분'정도로만 생각하는 셈이 된다. 예수님은 내 삶의 주인이다. 조력자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나누어야 할 주제는 '하나님께서 내 삶에 해 주신 일'이 아니고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 더 나아가 '예수님의 우리를 위한 사랑'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무언가를 해 주셨다면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지 사랑받을만한 무언가가 있어서가 아님을 잊지 마라. 마지막으로 성경을 한군데만 더 인용하고 글을 맺겠다. 당신은 절대 여기에서 말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하며, 동시에 이런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도 마라.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디모데후서 3:1-5)


사족: 이 글의 초고는 12.11.30에 만들어졌었으나 완성은 13.09.12에 와서야 하였다. 그 사이에 내 생각이 많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생각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한 면이 있다. 사실 지금의 나로서는 행복에 대하여 옳지 못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다.

  1. 당신은 우연히 윤회라는 개념이 나왔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온 인류가 공유하고 있다. 정확히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구원방법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특별하지 않다. 지금 내가 이야기한 것과 같이, '내가 노력하여' 선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자연스레 도달하는 방식이 윤회일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들도 선해지려는 자신의 노력에 비해 느린 그들의 성장에 절망했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느낄 것인데, 심지어 자기들이 생각해 봐도 주어진 수명 내에서는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다면 자연스레 윤회를 상상하지 않을까? 그래서 불교가 생겨났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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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