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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s or Essays'에 해당되는 글 5

  1. 2012.06.13 구약은 어려워
  2. 2011.10.19 믿음이란......
  3. 2011.02.26 성경연구
  4. 2011.02.19 믿음 그리고 성경
  5. 2011.02.05 하루
2012. 6. 13. 13:21

구약은 어려워 Novels or Essays2012. 6. 13. 13:21

보통 구약은 어렵다고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구약의 하나님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기독교인이 많다. 이에 대해서 오늘 살펴보았으면 한다.


어렵다는 그 말이 그저 말 그대로 어렵다는 뜻이기만 하다면 별로 할 말이 없다. 어렵다고 하는 사람에게 쉽다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 없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신약이 훨씬 더 어렵다고 말하겠지만, 누구나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은 다를 수 있으니 할 수 있는 말도 한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어렵다는 말을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작게는 구약의 위인을 (기독교인으로서 믿음의 선진을 위인으로 부를 수 없다고 공격할 수 있겠지만, 그냥 넘어가자.) 이해할 수 없다는 불평으로부터 크게는 구약의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위험한 발상까지 다양하다. 어찌 됐든 단순히 어렵다는 이야기이기보다는 '이해할 수 없다.' 또는 '이해 못 하겠다.'라는 이야기인 경우가 많고, 이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이 글에서는 구약이 어려운지 쉬운지에 대해서가 아니고, 구약의 필요성에 대해서 논해보되, '비 신학적'으로 논해보자. 신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구약의 필요성'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수 있다. 그냥 내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한 소회 정도로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


먼저 나는 구약이 정말 인간적이며, 그러므로 우리의 실생활에 쉽게 적용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에 반해 신약은 우리 인간 개인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와 닿지 않게' 다룬다. 이렇게 어렵게 꼬아서 이야기하는 이유는 분명 신약도 인간의 실질적인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정말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우리가 결혼해야 할 이유를 성욕에서 찾기도 하고 (고전 7:9) 음식에 관해 논하기도 하며 (고전 8), 더구나 예수님은 히브리서 기자가 표현하기를 우리 인간을 잘 이해하는 분이라고 하기도 했다. (4:15) , 신약 기자들은 인간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별로 와 닿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일까? 구약의 기자들과 달리 신약의 기자들은 대부분 순교했다. 그들은 목숨 걸고 신앙생활을 했으며, 흐트러짐이 없었다. 물론 베드로는 여전히 성격이 급했고, 남의 눈치를 살폈으며, 바울 역시 그 성격 어디 가지 않은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어쨌든 따라가기 어려운 신앙의 모습을 보였다. 더구나 정말 힘든 상황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자연스럽게 삶 중에 실천하고 살았다. 이런 면에서 나는 신약에 나타나는 개개인의 삶이 쉽사리 와 닿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그들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너무 높은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그에 반해 구약에 나타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노아의 술 문제, 아브라함과 이삭의 거짓말하는 문제, 겁쟁이 엘리야, 참으로 말 안 듣는 요나, 비겁하고 교활했던 야곱, 시기심에 불타올랐던 미리암의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정말 엄청나게 많은 성(sex) 관련 이야기들이 있다. 특히 성에 관해서는 그 범위가 실로 만만치 않다. 롯은 자기의 두 딸과의 사이에서 아들 둘을 두었고, 소돔 성은 동성애자들의 소굴이었으며, 유다는 창녀를 샀는데 알고 보니 며느리였고, 심지어 그 사이에서 아들까지 낳았고, 베냐민 땅에서 문제가 생기니까 바람나서 자신을 떠났던 첩을 그냥 내주는 레위 찌질이의 이야기, 그리고 그 베냐민 사람들은 그 여자를 밤새도록 윤간하여 결국은 죽게 만들고, 그 찌질이는 그 죽은 첩을 토막 내 이스라엘 사방에 보내었다 (19). 그 인물의 중요도로 볼 때에 이런 부정적인 이야기의 정점을 찍은 사람이 바로 다윗인데,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팽개치고 왕궁에서 퍼질러 자다가 저녁 즈음에 일어나 최측근의 아내인 밧세바를 취한다. 참고로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와 아비 엘리암 모두 다윗의 30인의 용사에 속하였고, 그의 조부 아히도벨은 다윗의 친우였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아비의 첩들과 벌건 대낮에 공개적으로 관계했으며 (삼하 16:22), 그의 또 다른 아들 솔로몬은 드디어 후궁 700에 첩 300을 둠으로써 모든 남자의 선망 대상이 되었다.

합법적이면서도 뭔가 개운치 않은 성도 많이 나온다. 아브라함은 모두의 기대와 달리 첩이 두 명이었고, 야곱도 두 명, 그리고 모세도 첩이 있었다 (12:1), 이스라엘 사사들과 왕들은 정말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첩이 많았고 자식도 많았다.


그런데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인간을 이해하는 데에는 구약이 도움된다. 신약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이상을 보여 준다고 하면, 구약은 정말 어쩔 수 없는 비참한 인간의 모습을 꾸밈없이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오늘의 못난 ''와 나를 짜증 나게 하는 ''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데에는 구약이 훨씬 효과적이며, 실질적으로도 나는 구약의 예를 들어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러함에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할 때에는 신약을 주로 인용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에, 온전하기 위해 그리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위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노력하는 우리로서 일면 이해하기 어려운 구약의 인물들이지만, 반대로 우리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추악함과 어쩔 수 없는 본성 등을 설명하는 데에는 구약만 한 것이 없다. 구약이 없었다면 아마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이중적이고 위선적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믿음으로 이런 인간이 겪고 있는 불완전성에서 자유로워지게 되는 이야기를 더 기대한다. 그런 면에서, 너무 약하고 너무 인간적인 구약의 인물들이 어떤 때에는 나를 너무 실망하게 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도 계속 미래에도 지금과 같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면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조금 더 무거운 주제이면서도 약간 신학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공의의 하나님에 대해 야속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더구나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대목에서는 거의 모든 기독교인이 고개를 내젓는다. 당신이 당신 자신을 스스로 그렇게 표현하셨으므로, 그분을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우리는 우리의 이성과 관계없이 그렇게 받아들여야 함에도, 실제로 그렇게 인정하기보다 의문시하고 심지어 외면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직간접적으로 거의 모든 이단이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멀리 가면 영지주의가 바로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름의 해석을 하다가 나온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이야기는 너무 신학적인 이야기라 일단 넘어가고 간단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당신이 믿는 것이 사상인지 도덕률인지 위안을 주는 덕담인지 아니며 절대자이신 하나님인지 알아야 하고 결단해야 하고 결정해야 한다. 당신이 믿는 대상이 하나님이고 그를 주로 섬기기로 했다면 사실 이런 고민은 애초에 말이 안 된다. 그분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구약을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불평하라. 그러나 성경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해하지 못하는 당신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 불평하고 회피할 문제가 아니다.


이단들에 대해 연구하다 보면 다음과 같은 조금은 역설적인 깨달음을 얻을 때가 있다. 이단들이 힘들어하는 것은 신약이 아니라 오히려 구약이며, 이단들이 부정하는 것이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래서 이단들의 주장이 바르다고 인정할 때 가장 먼저 부정되는 대상이 예수님과 신약이 아니고 성부 하나님과 구약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구약이 더 복음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의 믿음과 보다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너무 많이 말하는 것은 오히려 논지를 흐릴 가능성이 있으므로, 위의 두 가지 이유로 나는 구약이 우리에게 필요하며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어렵다고 말하고 있는 당신이 차마 하지 못한 말이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라면 다시 한번 구약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이 성경을 스스로 아직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설교에 노출되는 빈도로 볼 때에 (이해와는 별도로) 신약에 훨씬 더 익숙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감히 주장하고 싶다. 당신의 신앙에 직접 도움을 주고, 또 직접 연관된 말씀은 오히려 구약이다. 경중을 따질 수는 없으나, 약간 무책임하게 이야기하자면 구약은 더욱 실제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고, 신약은 땅의 실재가 아닌 하늘의 실재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둘 다 중요한데, 구약이 소외되고 있으므로 나는 구약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에서 주장함으로써 무게추를 구약 쪽으로 조금 밀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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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10. 19. 10:32

믿음이란...... Novels or Essays2011. 10. 19. 10:32

믿음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오랜 동안 하게 된다. 매년 나름의 테마를 가지게 되는데 (테마를 내가 만드는 경우보다 생기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올해는 '믿음'이다. 무엇이 믿음일까......
이 블로그를 시작 할 때만 해도 하고 싶은 말이 상당히 많았었다. 그런데 글을 쓰기가 너무 힘들다. 머리가 너무 복잡하다. 2011/10/18 - [분류 전체보기] - 구원에 대하여 2의 경우도 시작은 상당히 오래전에 하였으나, 결국 마감은 이제서야 했고, 그 나마도 그냥 지우고 싶은 것을 아까워서 올렸을 뿐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이다.

얼마전에 고낼료의 이야기를 읽으며 조금 울었다. 원래 질질 짜는 캐릭터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사람인데 고낼료의 이야기를 보면서 조금 짰다. 백부장이 피장이 시몬의 집에 거하는 어부 베드로를 초청하면서 다음날까지 기다리는데 집에 친척들과 친구들까지 다 모아놓고 기다린다. 그들이 과연 불만없이 기다렸을까?
'대체 누구 기다리는 겁니까?'
'베드로라고 하는 하나님의 메신저야.'
'뭐 하는 사람인데요 그리고 어디에서 온 대요?'
'어부인데 피장이 시몬의 집에 있대.'
'왜 그런 천한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 대충 상상이 가능한 대화이다. 이런 상황을 모두 견디며, 그러면서도 그 복된 자리에 친척들과 친구들을 동참 시키기 위해 사정도 많이 했으리라. 그런데 베드로가 들어오자 남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 이 부분에서 나는 눈물을 흘렸었고,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지만 지금 쓰면서도 뭉클함이 올라온다. 결국 그 집에 있는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했고, 베드로는 유대교로 개종하지 않은 이방인에게 세례를 베풀기에 이른다.

왜 눈물이 났을까... 바로 그 순수성이다. 말씀을 사모했고, 하나님을 사모했고...... 주위 상황을 고려하기에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베드로를 보면서 받은 그 감동을 주체하지 못했으리라. 어떤 사람은 이 부분을 보면서 고넬료가 잘 못 배워서 사람에게 절을 했다고 하기도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도 순수하여 감동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믿음이다.

이 고넬료의 이야기를 읽으면, 마치 하나님게서 '너는 언제 쯤 저런 순수한 신앙을 보일래?,' '얼마나 더 기다리면 모든 조건과 관계 없이 믿을래?'라고 물으시는 것 같다. 그리고 정말 몸서리치게 부럽다. 그 고넬료가 너무 부럽다. 수 십년 신앙생활을 했지만 난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성경을 읽느라고 읽었지만 이제서야 고넬료의 신앙이 이해되니 그냥 부끄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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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2. 26. 14:00

성경연구 Novels or Essays2011. 2. 26. 14:00

이 글에서는 내가 성경을 보면서 생각해 오던 성경 연구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이 문제에 대해 그렇게 깊이 있게 생각하고 정리한 것은 아니므로 전문적이지도 않고 내 생각이 내일 바뀌지 않으리라는 확신도 없다는 것을 서두에 미리 밝혀 둔다.

나는 먼저 성경을 반복적으로 읽는 것이 성경 연구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몇 번 읽었냐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성경을 한 두번 읽었다고 성경의 줄거리가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옳지 않다. 성경은 상당히 긴 편이고, 어려운 편이며,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부분만 가지고 어떤 진리를 찾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강해서나 참고서적등을 통해서 내가 직접 읽지 않고도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많다. 나 또한 그 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권하고 싶은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직접 읽으면서 얻는 깨달음의 깊이는 결코 참고서적을 통해 얻을 수 없다. 또한 참고 서적이 틀릴 수도 있다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가 유독 성경에 관해서는 상당히 중요하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른 분야는 전문가 집단이 있고, 그 전문가 집단의 전문성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방편이 상당히 많다. 예를 들어 전자공학의 경우 저자가 IEEE Fellow라고 하면 어느 정도 보장되는 전문성이 있을 것이다. 분야가 생물학이라면 세부 분야에 따라 Nature/Science 또는 PNAS, Genome Research 같은 논문집에 실린 논문들로 어느 정도 평가가 가능하다. 그리고 가장 쉬운 방법으로 어디에서 Ph.D.를 받았는지만 가지고도 어느 정도의 전문성은 보장된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 않다. 전문가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다. 내 전문 분야는 성경이 아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관한 이야기를 여기에 많이 쓰고 있고, 교회에서도 양육 프로그램을 인도하고 있다. 이런 특수성으로 인해서 성경 분야에는 전문가가 너무 넘쳐나며, 그들은 거의 모든 경우 자신의 이야기만 한다. 달리 말해 전문적인 글이 따라야 하는 일반적인 규칙을 (인용, 참고문헌 따위를 명시하는 것) 전혀 따르지 않는다. 따라서 참고서적을 그냥 믿기에는 위험성이 너무 많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도 당신에게는 위험한 글이 될 수도 있다. 더구나 우리는 '믿음'에 관한 문제의 일환으로서 성경 연구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는 '사실' 보다 믿음이 더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성경에 대해서는 '변하지 않는 주장'을 할 수 없다. 모든 연구에서 '나'는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나는 내일이라도 여기에 올렸던 모든 글이 죄다 틀렸다고 부끄러움 없이 이야기 할 수 있다.)
모두가 알다 시피, 성경은 한 부분만 꼬아도 이단이 될 수 있는 미묘한 부분이 상당히 많다. 따라서 나는 참고서적을 이용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스스로 읽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읽어 가면서 자신만의 성경을 보는 방법도 개발하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성경 연구는 매우 어렵고 권하기 힘든 일이 되어 버린다. 말이 좋아서 반복해서 읽으라고 쉽게 말하지, 사실상 일년일독도 쉽지 않다. 특히 일이 있는 사람인 경우 일년일독은 상당한 노력과 결심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그것을 10년을 해야 겨우 10독이 된다. 그냥 내 경험상 10독 정도 되니까 대충 윤곽정도 잡히는 느낌을 받았었다. 더구나 나처럼 주석서를 보면서 앞뒤로 확인해 가면서 읽으면, 하루에 1시간씩 읽어도 일년일독이 힘들 정도가 되니, 정말 성경 연구는 결코 쉽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읽기를 권하는 이유는 말씀으로 닦인 기반은 잘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을 많이 읽으면 진리를 더 잘 보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더 수준 높은 믿음을 가지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구원을 더 확실히 붙들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즉, 짧게 만난 예수님이 나의 인생 전부를 바꾸고 하나님을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일은 수도 없이 일어나며 부인 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꾸준한 성경 연구를 통한 깨달음과 앎은 그 깊이가 깊다고 말하고 싶다. 겉으로 드러나는 믿음의 행위는 비슷한 수준일 지라도 그 깊이가 얕은 경우 쉽게 넘어지거나 시험에 빠질 수 있지만 오랜 기간 성경 연구를 통해 내려진 깊은 뿌리는 그런 어려움 속에서 쉽게 넘어지지 않는 안정성을 보장해 준다.

어떤 경우 바울의 서신들을 보며 이 글을 쓰는 바울의 심정을 뼈저리게 느껴서 그것을 나누기 위해 이야기를 해 보면 이야기가 상당히 헛도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런 경우 대부분 상대방은 그것을 그냥 가르침으로, 사실로, 진리로 받아들이는 데 반해 나는 '인간 바울'이 당시 처한 환경에서 그런 내용을 글로 남기는 그 심정을 이야기 하는 데에서 오는 괴리가 그 원인이었다. 그러면 꼭 그런 것을 다 알아야 하느냐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절대 그렇지 않다. 그거 모른다고 구원 못 받는 것도 아니고 성경을 모르는 것도 아니며, 이해가 낮다고 할 수도 없다. 다만 누구는 아는데 나는 모르는 그룹에 속해 있을 따름이다. 그런 것을 조금씩 이해해 가면서 느껴지는 희열이 있으며, 성경 인물들의 나와 다를 바 없는 인간으로서의 고뇌 한계 등을 앎으로 인해 이해의 폭, 관용의 폭이 넓어지기도 한다.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나는 요즘 들어 더더욱 성경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더 힘들어 지는 것을 느낀다. 권하고 싶으나, 권하는 순간 너무도 높은 진입장벽을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는 문제 때문에 꺼려진다. 나 역시 요 근래 들어서야 성막에 관한 길고 지루한 출애굽기의 설명이 흥미로워지기 시작했으며, 이제 와서야 지루하게 반복되는 레위기의 제사 제도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고, 이 역시 나를 약간 좌절스럽게 만들었다. 대체 얼마나 읽었는데 이제서야 거기에서 작은 하나를 발견하는 것인지 안타깝고, 이런 지루하면서도 힘든 과정을 누구에게 권하기는 더욱 힘들 것 같아서 더 좌절스럽다. 나야 원래 두꺼운 책을 좋아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권하기가 애매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내가 더 읽으면 읽을 수록 더 그런 괴리가 커 지리라는 데에서 오는 허탈감 같은 것도 있다. (내가 결코 많이 읽었다는 것이 아니다. 난 꾸준히 읽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글을 시작 할 때에는 뭔가 더 그럴 듯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그냥 이 정도에서 그만 둬야겠다. 앞으로 내 생각이 더 건설적으로 정리되면 다시 고쳐 봐야겠다. 마지막으로 2011/02/28 - [분류 전체보기] - 참고서적: 주석성경과 그 외 서적들에 내가 참고하는 성경들을 정리해 두었으므로 참고해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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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2. 19. 08:42

믿음 그리고 성경 Novels or Essays2011. 2. 19. 08:42

성경을 왜 읽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직접적으로는 그 질문 때문에 쓰게 되었는데, 다른 이야기를 위해서도 일단 이 글이 필요 할 것 같아서 적는 이유도 있다.

나는 성경이 무오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오하다. 그러나 성경은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의 손으로 전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무오성을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다면 원본이 남아 있어야 한다. 물론 원본이 남아 있었다면 그것이 우상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오류 투성이인 성경을 가지고도 전쟁이 나기도 하는 세상인데 원본이 남아있다는 상상은 하기 조차도 무섭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본을 다 없애 버리고 사본만 남아 전해 지도록 했으며, 그 사본 들에는 어쩔 수 없는 오류가 개입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을 이야기 하자면 할 이야기가 참으로 많으나 너무 민감한 이야기이고 이 부분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강요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이 정도만 하도록 하겠다.

이 이외에도 입이 근질 거리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을 하면 정말 문제가 많을 것 같아서 꾹 참도록 하겠다.

그러면 오류가 있는 성경을 왜 읽느냐라고 정확히는 내 아내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목회자도 아니고 교회 관련 일을 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하루에 대충 1시간 가까이 성경을 보고 연구한다. 웃긴 이야기 일 지 모르겠는데, 난 두꺼운 책을 좋아한다. 읽어도 읽어도 끝이 나지 않는 책을 참 좋아한다. 물론 내가 그 내용의 가치를 인정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정말 재미있는 소설을 읽는데 금방 끝나면 안타깝지 않겠는가. 그런 심정이다. 그리고 난 성경이 참 재미있다. 재미있으니 되도록 길었으면 좋겠는데 성경은 충분히 길다. 그래서 좋아한다.
집에 여러 버젼의 성경이 있다. 그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보는 나에게 아내가 왜 읽냐고 묻는다. 더구나 성경에 나타난 오류들을 내가 설명해 주니 더더욱이 그렇게 틀린 글을 왜 읽냐고 묻는다. 물론 아내도 기독교인인데 성경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고 싶어하는 지극히 평범한 기독교인이다.

대답해 보겠다.
일단 성경은 믿어져서 보는 것이 아니고 믿기 때문에 보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을 성경을 통해서 알려 주시겠다고 직간접적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취를 찾기 위해서 읽는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어떤 이유로인해 성경이 다 소실되고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하... 사... 이니라'밖에 남지 않았다 치자. 난 그렇다면 겨우 그 5글자 만으로도 하나님께서 인류에서 하시고 싶은 말씀을 다 하실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게 나의 믿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 성경에 오류가 있건 없건 신경쓰지 않는다. 그리고 오류가 없기를 바라지도 않고 오류가 없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볼 뿐이다.

그리고 난 되도록 내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성경의 문자에 집중하지 않기를 권하고 가르치고 싶다.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에 집중해야지 맥 빠지게 문자에 얽매이고, 틀리지 않았을 거라고 믿고, 성경을 우상화 하다가 뭐 하나 걸리면 넘어져 버리는 약한 신앙을 갖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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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2. 5. 09:58

하루 Novels or Essays2011. 2. 5. 09:58

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나의 느즈막한 아침은 그리 상쾌하지 않게 시작했다. 언제부터 인지 또는 인지 모를 나의 늦은 아침은 이미 일상이 되어 버린 오래다. 어렸을 적에는 아침에 일어나면 기쁜 마음으로 일어나고 싶어서 기분 좋을 만한 상상을 하면서 일어나곤 했었으나, 이제는 마저도 시들하다.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늦은 아침을 즐기는 것도 아닌데 항상 늦는 것도 우습다면 우스운 일이다.

그저 무의미 하기만 어제와 비슷 거라고 거의 확신하는 새로울 없는 새로운 하루가 시작됐다. 가지 내가 확신하는 것은 분명 오늘 하루도 바쁘지 않게 그러나 매우 빠르게 지나가리라는 것과 밤에는 오늘을 곱씹으며 도대체 무엇을 했는지 머리를 쥐어짜 고민 하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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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