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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돌아가는 이야기들을 보고 있노라면 참 불편한 것도 많고, 싸울 것도 많은 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안을 불편해하고 그 불편해하는 사람을 보며 왜 불편해하나 이해하지 못하여 불편해하고, 조용히 있지 못하고 불편하다고 표현하는 사람들을 보며 불편해하고 등등 끝도 없이 이 불편의 사슬은 연결되고 또 연결되어 간다.


참고로 이 글은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을 나름 정리한다고 한 것인데 상식과 편견이라는 주제 자체가 너무 모호하고 광범위하다 보니 정리가 잘 안 되어 글이 난삽한 점을 미리 밝힌다.


미국에 살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가 다양성(Diversity)이다. 그런데 이 단어를 대하는 문제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 다양성의 추구는 남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종종 어떤 의견은 ‘옳은 것'으로 돌변하여 반대를 허용하지 않는 ‘믿음'이 되어 버리고, ‘나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라는 의견은 의견으로서 존중되지 않고 종종 폭력적인 공격에 시달리기도 한다. 다양성을 추구하면서 무엇을 다양하다고 할지에 관한 논의는 내가 쓰고자 하는 내용과 다르기에 일단 넘기겠다. 그러나 그 문제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다양성을 추구하면서 가장 방해되는 요소를 꼽자면 편견(Bias) 일 것이다. 그런데 편견은 종종 상식과 구분하기 쉽지 않다. 어떤 상황에 대한 경험이 비슷한 상황에서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Thinking, Fast and Slow, 아주 좋은 책으로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런 경험이 쌓여서 그 사람의 행동 양식을 결정하는데, 집단의 대다수가 비슷한 행동 양식을 취하게 되면 그것을 상식적인 행동이라고 하지 않을까 한다. 물론 이도 어려운 이야기이긴 하다. ‘상식'이라는 단어도 ‘상식적인 행동'이라 할 때와 ‘시사 일반 상식'이라고 할 때 조금 다른 의미가 있으니 말이다. 복잡한 이야기는 일단 덮어두고, 또는 모르겠고. 그러고 보면 정말 상식과 편견 사이에 구분 점이 있긴 할까? 극단적인 경우를 생각하면, 즉, 유색인종 차별과 성차별 같은 것을 생각하면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극단에서 조금씩 이동하다 보면 그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이 분명히 존재하며, 이에 대해 불편해하려고 작정하면 아주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조금 다르게 이야기하여 더 어렵게 말하면, 시대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상식이 다르고, 시대에 따라 상식이 변해간다는 말은 어느 시점에 상식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고 그것이 커지고 커져서 다수의 의견이 바뀌어나가는 일은 인류 역사에 계속 반복되어 왔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면 그 반동이 아직 성공할지 못할지가 결정되지 않은 과도기 단계에서 반동을 관철하려는 사람과 억누르려는 사람 사이의 갈등은 당연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냥 서로 너그러이 다양성의 차원에서 모든 의견을 동등하게 취급하는 사회는 너무 이상적이다. 나는 그런 사회가 있으면 거기에 가서 살고 싶으나, 내가 사는 사회가 그렇게 될 거라는 희망은 솔직히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상식을 무엇이라고 정의하면 좋을까? 상호 협의 없이 사용 가능한 개념이라 하면 말이 될까? 그러니까 수학에서 공리와 같은 개념이라고 볼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는 ‘협의 없이 사용 가능한 개념'이 점점 사라지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이런 측면에서 현대사회는 역사에서 가장 큰 과도단계에 들어선 것으로 생각한다. 모든 경계가 무너지거나 도전받고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상대방이 그(he)라고 부르기를 원하는지 그녀(she)라고 부르기를 원하는지를 묻는 것부터 대화가 시작돼야 하는 시대를 향해가고 있다. 모든 운동(movement)에는 목적이 있을 텐데 목적이 무엇인지 모호한 경우가 요즘은 많은 것 같다. 그녀라고 부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그라고 부르면 불쾌할 것이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미리 확인하고 그녀라고 불러주면 좋긴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누가 나에게 그라고 부를까요 그녀라고 부를까요라고 묻는다면 기분이 나쁠 것 같다. 그러니까 그라고 부를지 그녀라고 부를지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라고 물은 다음 예라고 하면 그라고 호칭을 할까요 아니면 그녀라고 호칭을 할까요? 라고 물어야 하는 아주 복잡하고도 오묘한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해 놓고도 정말 오묘한 이야기이다. 상대방을 존중하기 위하여 그 사람이 불편해할 수도 있는 질문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확실한 기준점 즉, 상식이 있다면 이런 문제를 쉽게 넘길 수 있는데 모든 상식이 도전받고 있는 이 시대에는 기댈 기준점이 없다. 그러니 입이 있는 사람은 모두 소리치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모두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어떤 행동이건 어떤 말이건 간에 불편한 사람은 존재한다. 요즘같이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라는 말을 많이 했던 적이 없다. 단언컨대 내가 어렸을 때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라는 말을 자주 하지 않았다. 모두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이상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수많은 이상주의자가 있었고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다르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이제 그 ‘상식'이 되었고, 진리이자 이 시대 집단지성의 산물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불편해하는지 예를 들어보자. 소설가협회, "소설 쓰시네" 발언 추미애에 공개 사과 요구의 경우가 불편해하려고 작정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사안 자체가 코미디라고 생각하긴 하는데… 아 참 이렇게 말하면 코미디언협회에서 뭐라고 하려나? 보통 ‘소설 쓰시네'라는 표현은 누군가 너무 무리한 상상을 하는 경우 비아냥대는 방식으로 사용한다. 물론 가벼운 핀잔 정도로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추미애 장관과 의원 사이의 대화로 적절한 표현이었냐 아니냐는 내가 하고 싶은 말과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에 논하지 않겠다.


저런 요구를 하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어떤 부분에서 저렇게 집단행동을 해야만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것도 과거에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문제였는데 이젠 아니게 된 어떤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적어도 메시지의 측면에서 그들의 메시지는 설득력이 없다. 이런 주장이 합당하다고 한다면 모든 형태의 ‘비유'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소설도 무미건조해지겠지. 그러면 아무도 안보고 소설도 없어지겠지. 너무 극단적인 논리의 비약이긴 한데, 뭐 아예 말이 안 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Invention of Lying (2009)라는 영화는 제목이 보여주듯 거짓말에 관한 이야기인데, 작중 설정으로 소설이 없다. 그러니 이런 비유는 동서양을 막론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게 지금 개봉되었다면 소설가들이 또 성명을 발표하려나?) 물론 이런 생각조차도 내가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는 편견에 기인한 것일 수 있기에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그런데 동시에 이런 부분에까지 조심스러워져야 함에 약간 서글프기도 하다. 자유에 대한 추구가 나를 얽매이게 하고, 다양성의 추구가 모두를 획일화되게 하는 듯해서 걱정도 되고 서글프기도 하다.


불편의 문제에서 상식의 문제로 다시 돌아와 보자. 민주주의를 “다수의 소수에 대한 폭력"이라고 생각하는 내게 현대의 흐름은 그냥 소수만 인정하던 개념이 다수의 것이 되면서 권력이 이동되는 현상일 뿐이기는 하다. 다만 그 다수가 된 사람들이 자꾸 당위를 무기로 하여 공박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게 불편하다. 민주주의는 사회적 합의가 중요하지 (즉, 누가 다수냐)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가 중요하지는 않다. 옳고 그름은 절대성을 지니는 개념이고, 이것은 다수 소수의 문제와 별개이다. 다수의 동의로 옳고 그름이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개념을 ‘나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해' 정도로 표현해야지 ‘이것이 옳은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걸 따라'라고 하면 안 된다. 그렇게 표현하는 순간 아주 자연스럽게 나와 같지 않은 사람을 그르다고 규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LGBTQ parade가 있었는데 회사에서 같이 가자고 권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LGBT가 점점 확장되더니 이제는 LGBTTQQIAAP라고 한다. 어디까지 길어질지도 흥미로운 볼거리이다. 이렇게 길어지는 과정 역시 상식이 깨지고 더 깨어져 나가는 현상을 보여준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운동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성적 취향이나 자기 결정에 관계없는 공정한 권리와 기회가 주어져야 함에는 동의하지만, 그 운동이 추구하는 방향 즉, 개인의 제한 없는 성적 자기 결정권에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했고, 완전 미친놈 보는 듯한 눈빛을 답례로 받았다. 물론 민주주의는 다수의 소수에 대한 폭력이라고 믿는 나는 이런 대우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소수이니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하기는 하다. 그런데 그들이 그들의 생각을 존중받기를 원한다면 동의하지 않는 사람의 생각도 존중해줘야 하지 않나? 내가 너무 순진한 것일 수도 있다. 다만 과거 당위성에 근거한 공격으로 상처 받았던 이들이 당위로 반격을 하는 부분이 씁쓸하다.


나를 미친놈 보듯이 한 사람에게는 이렇게 답을 했었다. 민주주의는 사회적 합의가 중요하고 그 합의에 이르기 위해 개개인의 의견은 의견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 옳고 그름을 논하고 싶다면 누가 최종적으로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있겠는가.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투표가 그 방편이라고 대답하고 싶다면 그것은 다수결에 의한 결정일 뿐이고, 심지어 그것도 처음으로 돌아가서 모두의 의견이 존중받을 때나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말하겠다. 옳고 그름을 논하려면 왕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때에는 왕이 최종 결정을 해 줬으니 그런 방식이 가능했었다. 물론 미친놈 보듯 하는 눈초리의 변화는 없었다. 참고로 상대방은 나보다 거의 20살이나 어린 사람이었다. 그러니 상식의 간극은 더 컸을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고린도전서 10: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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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8. 4. 23. 12:48

나는 과연 선한 일을 할 수 있는가 Opinion2018. 4. 23. 12:48

내 아내는 나와 아주 다른 사람이다. 그래서 많이 힘들었고 그래서 많이 감사했으며, 여전히 갈등이 많고 여전히 감사할 거리가 많다.


우리는 둘 다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 믿음에서 도망쳐 본 일도 없다. 계속 그 '길' 위에 있었냐고 물어본다면,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적어도 둘 다 '믿는 사람처럼 보이는 상태'는 꾸준히 유지했었다. 더군다나 나름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기에 머리도 어느 정도는 차 있다 할 수 있다. 따라서 구원에 관하여, 그리고 신앙생활에 관하여 '그리 다르지 않은' 이해를 하고 있다. 그런데 차이도 있고, 그 약간의 차이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크게 두드러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사실 다른 큰 차이들을 이겨나가고 이제 그다음 차례로 떠오르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 둘의 대화에서 자주 거론되는 주제는 '신앙생활'이다. 그런데 이 주제의 이면에는 '구원'에 관한 이해의 불일치가 깔려있다. 지식과 고백의 측면에서 우리 둘은 같다. 그런데 적용에 있어서 '서로 다른 지점'이 존재한다.


그 많은 주제를 전부 다 다룰 수는 없고 오늘은 최근 아내가 한 다음의 말에 관해서 이야기해 보고 싶다.

나는 선을 행할 수 없는 존재이며, 내가하는 모든 일은 악해.

고백으로 보인다. 이런 부류의 절망 또는 고백은 아마 거의 모든 기독교인이 한 번쯤은 했었고, 지금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바울이 이 문제에 관하여 고백적인 글을 로마서 7:18에 남겼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로마서 7:18)

물론 "원함은 내게 있으나"라고 하여, 적어도 그가 선을 행하기 원한다고 함으로써 적어도 나나 내 아내와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나 결국 그도 사람이어서 결코 우리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로마서 7장 전체를 깊이 묵상해보기를 권한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나'를 서로 다른 두 부분으로 구분한다: 속사람과 겉 사람, 마음과 육신 (혼과 육신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나와, 죄의 법을 섬기는 나 등등.


그런데 위에 말한 바와 같이 바울이 이야기하기를 '나'는 선을 행하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로마서 7:19)


다른 곳에서 바울은 다시 한번 사람은 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한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로마서 3:10-12)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대상은 9절에 죄 아래에 있는 사람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로마서 7장의 표현대로 하면 '죄의 법을 섬기는 육신으로서는 의인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로마서 3:9)


여기까지 종합하면, 바울은 '나'를 두 부분, 즉, 속사람과 겉 사람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속사람은 성령의 원하는 바를 따르고 겉 사람은 육신의 원하는 바를 따르며 이 둘은 절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5:17)


그런데 천국은 거듭나야 갈 수 있다. 즉, 구원은 거듭남을 뜻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한복은 3:3-5)

그리고 우리는 거듭난 상태이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19-20)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은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이라 표현함으로는 '나'를 '육체'에서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결국 이 육체 또한 변화될 것이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고린도전서 15:53-54)

그러나 육체가 변화할 때까지 '나'는 여전히 육체 아래에 있고 그 육체는 죄에 속박되어 있다.

I am of flesh, sold into bondage to sin. (로마서 7:14, NASB)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나는 선을 행하지 못하는 존재인가? '나'를 육체로 규정한다면 그렇다. 육체인 나는 절대 선을 행할 수도 없고 선을 행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내 속사람, 즉, 성령에 속한 나는 선을 행하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내가 선한 일을 할 수 있는가.

육신을 죽여야 한다. 매일 매일 육신을 죽이고 성령이 인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육신만 죽이면 나의 속사람은 자연스럽게 성령의 원하는 바를 따라 살게 된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바울은 날마다 죽는 것을 자랑하였나 보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31)

그리고 다른 곳에서 바울은 자기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 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린도전서 9:27)

그런데 이런 모든 과정이 결코 쉬울 리가 없다. 어떻게 보자면 예수님의 도우심 없이 우리들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미션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아내의 위와 같은 고백은 사실 우리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는 것 또는 이미 해 주신 것을 의미 없게 할 수는 없고, 또한 그냥 절망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내가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내가 새 사람을 입어 하늘나라에 합당한 존재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바로 복음이다. 복음을 복음으로 믿는 한, 내 안에 선한 일을 이루실 예수님도 함께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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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3. 9. 7. 05:42

NASB MacArthur Study Bible Opinion2013. 9. 7. 05:42



NASB 번역은 번역 중에서 가장 어려운 번역으로 분류되는 성경임과 동시에 가장 직역에 가까운 성경으로 분류되는 성경이다. 아래의 도표에 보이는 바와 같이 NASB보다 Word for Word (직역)에 더 치우쳐 있는 성경은 Interlinear (행간 성경)밖에 없다.


ref: http://defendingcontending.com/2009/08/31/bible-translation-comparison-chart/


이미 다른 성경을 소개할 때에 밝힌 바와 같이 나는 직역 성경을 선호한다. 이유라면 내가 무식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헬라어를 읽을 줄 알아서 대본과 역본을 비교할 수 있는 실력이 되면 오히려 역자의 의견을 검토할 수 있는 의역 성경을 선호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정도 실력이 되지 않으므로 그냥 그대로 번역된 성경을 선호한다. 의견과 적힌 그대로의 사실 사이의 구분이 되지 않는 성경은 불편하다.


미국에서도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NASB 번역을 선호하거나 적어도 중요한 참고자료로 사용한다. 그리고 독해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번역을 사용하는 교회도 있다. (미국인이라고 영어 성경을 쉽게 읽을 거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도 한국말로 쓰여있으면 읽기야 하겠지만 전부 이해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같은 이유로 많은 미국인이 KJV나 NASB를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영어에 능통한 사람이 아니라서 기술적으로 이 번역의 좋은 점을 설명하지는 못하겠다. 직역 성경답게 NKJV와 더불어 일사일어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성경이라는 점을 말할 수 있고, 번역이 진중하므로 하나님의 명령을 명령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번역되어 있다는 점 정도밖에 말할 수 없음을 용서하기 바란다. 하나 더 말하자면 읽기가 쉽지 않다. 영어 문법에 맞추기보다 직역에 초점을 맞춰서 번역하다 보니 일반 영어문장을 읽기보다 어렵다.


주석은 매우 간단하다. 다른 주석들과 달리 MacArthur라는 개인이 주석하였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풍성한 주석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개인적으로는 많은 부분에서 이 사람의 주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읽다 보면 글로만 접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참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확신은 든다. 잠시 이 사람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면, 이 사람은 Grace Community Church (http://www.gracechurch.org/)에서 시무하고 있다. 내가 이 교회 근처에 살았었기 때문에 이 교회에 대한 소문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말씀 중심의 교회이고 성경공부를 중시하는 교회로서 젊은 그룹이 상당히 탄탄하고 이 교회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신앙생활을 이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나는 주석을 통해 이 목사가 말씀 중심의 목회를 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또한 말씀 중심이라면 그 교회가 분명 건강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런 건강한 목회를 하는 사람의 주석이라고 해서 뛰어난 주석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어차피 주석성경이 필요하다면 실질적인 목회를 그것도 건강한 목회를 하는 사람의 주석이 좋지 않을까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전문적인 주석도 풍성한 주석도 아니다. 그러나 딱 좋은 정도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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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먼저 한가지 짚고 넘어가자. 당신이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그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아니 대부분 기독교인이 종교인으로 머물 뿐, 진정으로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삶을 살고 있지도 않으며, 그런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시도하지도 않는다. 누구나 아는 내용인 듯하지만 동시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내용이기도 하다. 나는 교회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을 보아왔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또는 제자로 살기 위해 진지한 고민을 거듭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물론 입으로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말을 많이 한다. 왜냐하면, 많은 교회가 예수님의 제자를 표방하며, 많은 교육을 통해 그 '용어'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까 그들의 말 속에 예수님의 제자라는 표현이 많이 사용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의 삶에서 일반 교회 교인들의 그것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가르치는 사람들조차도 과연 예수님 제자의 의미를 알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경우가 많았다.


우리 삶의 목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됨이어야 한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방편 중의 하나일 뿐이다. 또 하나, '예수님의 제자'는 '되는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되는 것'인가? 나는 그렇게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나에게 남은 문제는 '제자다운 삶'을 사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노력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를 짧게 설명할 자신이 없다. 다만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을 해 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이 글에서 제자가 된다고 표현되는 부분은 그런 표현이 간단하여서 사용할 뿐이고 사실상 그렇게 됨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고 읽어주기를 부탁한다.


우선 문제를 제기해 보자.


근래 미국의 한 교회를 방문했다. 그 지역에서 가장 큰 교세를 가진 교회로 약 3천 명 가량이 출석하는 교회이다. 그런데 그날 설교가 정말 압권이었다. 철저하게 인간중심의 설교였다. 물론 그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대부분의 설교가 인간 중심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교세가 커졌다고 생각된다. 안타까운 이야기이지만 인간중심의 설교를 해야 현대 기독교인들은 편안해하고 좋아한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관한 이야기를 하면 지루해하고 딱딱하다고 느끼며, 심지어 어느 정도 믿음이 있다 하는 사람들조차도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런 설교를 꺼리기 일쑤다. 내가 잘 아는 한 목사는 그런 식으로 설교하면 교인들이 지루해하고 직접 와서 그렇게 설교하지 말라고 하는 교인들도 있다고 하였다. 하여간 어떻게 저렇게 한결같이 인간중심의 설교를 하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그 중 finale가 있었으니 다음의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로마서 8:37)

목사: 그렇습니다. (전형적인 설교용 관용어… 대체 뭐가 그렇다는 말인지 원) 우리는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청중: 아멘~


솔직히 이 부분에서 나는 예배 중에 손뼉까지 치며 감탄했다. 혹시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예측되는지 모르겠다. 나는 모든 사람이 여기까지 읽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한 번에 알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성경 구절에서 중요한 부분은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는 부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 즉, '예수님으로 말마암아'이다. 극단적으로 그리고 성경적 사실로 말해 우리가 이기고 지고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즉, '이긴다'에 대한 정의를 예수님께서 직접 하시지 않는 한, 당신이 생각하는 '이긴다'는 측면에서는 많은 경우에 성공적이지 않을 소지가 다분하다. 모든 (당신 입장에서의) 실패를 기도부족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아니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겠는가? 우리 측면에서 보자면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실패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그 실패가 고난의 형태로 나타나며, 이런 고난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훈련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시기 때문에 예수님 입장에서는 성공이다. 따라서 '넉넉히 이기느니라'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에 비하면 없어도 되는 구절이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라는 부분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교인들은 감격했고, 나는 놀라웠고. 참으로 놀랍다. 이 한 구절만으로 그 교회의 전반적인 설교스타일을 규정해도 아마 무리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설교스타일을 규정하는 데에도 큰 무리가 없다고 본다. 또한 이것이 한국교회 교인들의 수준을 말해준다. 성경의 인물에는 큰 관심을 보이나, 그 인물들을 조율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는 사실 별 관심이 없다. 아마 당신은 ’나는 아닌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우리는 대부분 ’성경 속 그 사람은 왜 그 순간 그렇게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데에 많은 열정을 쏟는다. 글을 쓰는 나 자신조차도 최근에 와서야 성경에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깨달았다. 항상 내게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가 ’왜 개떡 같은 다윗을 하나님은 사랑하셨는가?’ 이었다. 보면 볼수록 부족한 것 투성이의 다윗인데 말이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내가 그 다윗의 행동 패턴에서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는 패턴이 존재하리라고 나도 모르는 새에 가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알았다고 해도 그렇게 가정하지 않았다고 부정했을 거다.) 우린 모두 죄인인데 말이다. 죄의 경중이 어디 있나? 어차피 우리는 모두 사형수였는데…… 어쨌든 내가 다윗을 싫어하고 그의 행동에서 잘잘못을 따지는 모든 과정의 저변에 깔린 가정은 ’나는 나 스스로 의로워져 하나님이 칭찬하실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겠다'였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나의 시선은 그런 다윗을 참으신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지 않고 다윗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당신도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를 권한다. 당신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사랑의 하나님인지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의 ’알 수 없는 자격 기준'인지.


자 이 글을 통해 당신에게 도전하려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당신은 예수님을 당신의 주인으로, 왕으로, 구주로 믿는가? 아니면, 능력 많으신 분으로서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 드리면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램프의 요정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가?

다르게 표현하자면, 당신은 예수님의 은혜로 자녀가 되었으며 의롭다 칭하심을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이 경우 복의 유무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아니면 당신이 충분히 의로운 일을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을 칭찬하시며 복을 주신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이 두 질문은 서로 같은 선상에 있는 질문조차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 부분을 명확히 모르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이런 식으로 질문하게 되었다.


우리의 생각 속에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인가? '분'이기는 하는가? 혹시 그냥 '여의봉' 정도 아닌가? 어떤 특정 주문을 틀리지 않고 외우면 무엇이든 해 주는 여의봉 아닌가? 그래서 주문을 틀림없이 외우고 외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은 아닌가? 달리 말해 성경 속의 인물들을 통해 그들의 삶을 ’정확하게' 모사함으로써 그들이 받았던 ’복'을 나도 받기 위해 노력하는 중은 아닌가?


문제 제기는 이 정도로 하고, 기드온의 이야기를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해보겠다. 기드온의 인생은 어떻게 보면 밋밋하나, 이야깃거리는 많다. 그러나 다른 면으로 이야깃거리도 생각할 거리도 특별하게 있지 않음을 보이고자 한다.  기드온의 이야기는 사사기 6-8장에 걸쳐서 나온다. 성경의 인물 중에서는 상당히 자세히 기록된 편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그만큼 다룰 주제도 많다. 이 중 몇 가지만 추리면 다음과 같다.

  • 양털로 하나님을 시험함 (사 6:36-40)

  • 하나님께서 32,000명의 군인 중 31,700을 돌려보내고 300명만으로 전쟁을 치르게 하심 (사 7:1-9)
  • 하나님의 뜻을 재확인함 (사 7:10-15)
  • 에브라임과의 갈등 (사 8:1-3)
  • 주변 부족에게 인정받지 못하였고, 그것 때문에 그들에게 복수함 (사 8:4-21)
  • 에봇을 만듦 (사 8:27)

이 주제들을 전부 다 다룰 수는 없고 몇 가지만 다뤄 보도록 하자.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얼핏 극적인 기드온의 삶을 연구하고 그 연구를 통해 우리의 신앙을 발전시키기를 원했던 당신에게 그런 시도 자체가 비신앙적이며, 오히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그 간단한 진리가 무엇인지 전달하고자 한다.


먼저 나는 기드온이 양털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부분에 대하여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한 것이 아니라는 설교를 들은 일이 있다. 역시 상당히 유명한 교회의 유명 목사였다. 여러 권의 저서까지 있는 목사인데 인터넷서점에서 조엘 오스틴의 책과 묶여서 팔리는 책의 저자이다. 물론 대단하다는 뜻이 아니고 그런 목사란 뜻이다. 나와 성향이 비슷한 사람이라면 무슨 소리인지 알 것이다. 분명 본문은 기드온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왜 그런데 굳이 그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싶었을까? 왜냐하면, 기드온은 좋은 사람인데 좋은 사람이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4:12) 참으로 놀랍게도 많은 어른이 어린애들의 흑백논리를 인생의 사명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좋은 사람은 좋은 일만 한다는 유치한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성경을 보는 사람을 나는 거의 보지 못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해 보면, 나도 기드온처럼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시험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 주실 작정이면 이렇게 보여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이루어지나 이루어지지 않나 확인하고 싶은 사람의 마음을 배려(?)한 설교다. '죄의식 갖지 말고 자유롭게 하나님을 시험하세요. 보세요. 착한 기드온도 하나님을 시험했잖아요. 에이~ 기드온이 했으니까 하나님이 허락한 방법이고,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으니까 기드온이 한 시험은 시험이 아니에요. (엥?)' 뭐 이런 내용 아니겠는가?

자 정리하자. 나는 기드온이 하나님을 시험했는지에 대한 진위를 가리고 싶지 않다. 내가 짚고 넘어가고 싶은 사실은 기드온의 행동은 단순히 '사람'의 행동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착한 기드온이 했으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신 방법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래서도 안 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흔히 나오는 반론은 ’그럼 왜 적혀있나?’ 이다. 정말 모르는가? 나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드온을 통하여, 무엇이 됐든 간에 '당신은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수용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약한 사람에게 확신을 주시고자 참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려주고자 하셨다. 즉, 본문은 나에게 나의 하나님은 나의 약함을 외면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보듬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려주고 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기드온의 약점을 아셨다. 약하니 버리시는 하나님이 당신이 믿는 하나님인가? 그렇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부드럽게 관용과 수용으로 참으셨고 결국 기드온이 확신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심지어 하나님을 시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것을 통해 확신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 시험에 응해주셨다. 왜? 기드온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사건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사실이다.


그런데 기드온은 또 한 번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지 못한다. 아마 안절부절못했던 듯하다. 바로 300명만 가지고 전쟁을 해야 하는 그 날 저녁의 일이다. 사사기 7:10-15의 내용인데, 이번에는 하나님이 먼저 기드온의 상태를 아시고 도움을 주신다. 바로 적 진지에 가서 그들이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직접 들을 수 있게 해 주셨다. 자 그러면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 일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두렵고 때로는 불안합니다. 그럴 때에 기드온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께 확신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주십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조금 방향이 빗나가 있다. '나의 불안'을 종식하기 위해 '내가' 구하면 '하나님이' 마술 램프의 지니처럼 평안하게 해준다고 생각한다면 많이 잘못된 접근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녀에게 은혜로 평안을 주신다. 때로는 하나님 입장에서 괘씸하고 또는 틀린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에 비하면 그런 부분은 아무것도 아닐뿐더러 하나님은 그 사랑으로 우리를 도와주신다. 약간 미묘한 부분이 있음을 인정한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하나님을 생각하라'이다. 내가 주체가 되어 문제를 파악하고 구하고 등등을 할 때에 반응하는 마술 램프가 아니고 하나님은 미리 다 아시고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시는 분임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유치한 이야기를 하자면, 하나님은 로봇이 아니고 주체적으로 활동하시는 분이며, 심지어 그분은 전지전능하시다. 따라서 우리의 행동이 input이 되어 output을 내놓는 존재가 아니다. 제발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신다.


300명을 선택하는 과정을 보자. 하나님께서 혀로 핥는 사람과 무릎을 꿇고 마시는 사람 중에 혀로 핥는 사람 300만 가지고 전쟁하라고 하셨다. 이 부분을 가지고 ‘왜 그들을 택했는가?' 즉, 그 300명이 선택된 이유를 찾고 그러함으로 우리도 그 300명에 속하기 원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았고 이에 대한 설교도 상당히 많다. 당장 '기드온의 용사 300'으로 검색만 해 봐도 많은 설교를 찾을 수 있다. 대부분 '그들의 순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대승을 이끌었다.' 또는 '혀로 핥는 자가 무릎을 꿇는 자에 비해 하나님 앞에 옳은 이유'에 관한 설교들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당신은 그렇게 당신이 복 받을 만한 이유가 있기를 바라고 복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가? 나중에 이것만 가지고 글을 하나 더 쓸 생각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당신은 복을 받는 어떤 공식을 원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복을 받고 저렇게 하면 저주를 받고 하는 식의 깔끔한 공식을 원하는 당신을 당신 스스로 깨닫고 인정해야 한다. 그런 공식을 원하는 이유는 바로 그래야 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의를 자랑해야 한다. 흔히 자기 의를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데, 만약 당신이 복 받을 만해서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는다면 나의 의를 자랑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여하간 그냥 기술적으로 말해도 만약 혀로 핥는 자가 무릎을 꿇는 자에 비하여 장점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애초에 혀로 핥는 자를 데리고 전쟁을 하라고 하셨어야 하고 심지어 그들을 선택한 이유도 말씀해 주셨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나누라고 한 다음에야 이유도 말씀하시지 않은 채 한쪽을 택하셨다. 사람들이 흔히 성경이 어렵다고 하고 왜 하나님께서 깔끔하게 이유를 말씀해 주시지 않나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잘못된 질문을 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어떤 면에서 쉽고 모든 이유가 적혀 있다. 하나님은 우리하고 수수께끼 놀이를 하지 않으신다. '왜 물을 핥는 사람들만 데리고 가셨지?'라고 질문을 하니까 대답을 찾지 못하고 헛소리를 하게 된다. '왜 300명만 데리고 가셨지?'라고 질문하면 대답이 7:2절에 '스스로 자랑'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나온다. 이것으로 끝이다. 더 좋지 않은 질문은 ’선택된 300명은 하나님이 데려가실만한 어떤 조건을 충족했을까?’라는 질문이다. 당신은 어떻게든 그들이 나머지 31,700명보다 그들이 더 나은 이유를 찾고 싶을 것이다. 그래야 당신이 노력해서 300명 안에 들 수 있을 테니까. 이유가 없다면 당신은 갈 길을 잃은 나그네처럼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 빠질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하나님을 요구조건을 충족시켜드리면 그에 대한 반대급부를 제공해 주는 자판기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세하고도 정확한 사용 설명서를 원하고, 그 사용설명서가 바로 성경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유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 얼핏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그런 부분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당신이 잘못된 질문을 이용하여 성경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 다 같은 사람이다. 우리가 잘나서 사용하시고 못나서 사용하시지 않는 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 아니신 셈이 된다. 돌들로도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 수않 있는 분이 하나님이다. (마태복음 3:9) 당신이 특별히 잘나서 특별히 사용되기를 바라지 마라. 정말 지긋지긋한 기도문구 중의 하나가 ’특별한 종 누구누구를 특별하게 사용하시어’로 시작되는 기도이다. 누가 대체 하나님앞에 특별한 조건을 갖추어서 특별히 사용될 수 있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어떤 일을 맡길 지는 하나님이 결정하실 일이다.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우리가 아무 능력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작정하시면 특별하게 사용하실 수 있다. 어쨌든 하나님이 없어도 되는 의인이 요즘 세상에는 너무 많다. 또는 하나님을 한낱 램프의 지니 정도로 격하시키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다시 말해, 300명만 선택하신 이유는 전쟁은 하나님께서 하시고 우리는 지켜볼 뿐이라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그 300명이 전부 일당백이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에 적합한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다. 더구나 자세히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후 나머지 병력도 어떤 형태로는 사용된다. 자꾸 당신 입장에서 당신의 복 받을 수 있는 행동강령을 만들기 위해 성경을 보고 질문하지 마라. 그냥 하나님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보기를 권한다. 사람들의 행동과 모습에 관심을 가져봐야 그건 헛짓이다.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에 대한 관심과 사랑만 보면 되고 그래야만 한다. 성경의 주인공은 철저히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시다.


에봇에 대한 것은 다른 글로 넘기도록 하자. (2013/09/04 - [Bible Stories] - 왜 믿음은 대물림되지 않을까?)



의 예를 통해 내가 하고자 했던 말은 이것이다. 성경을 인간입장에서 보지 마라. 하나님을, 예수님을 여의봉으로, 부적으로 만들지 마라. 내가 이렇게 하면 저렇게 반응하시고 내가 저렇게 하면 이렇게 반응하시는 자판기 속의 하나님으로 만들지 말라는 말이다. 자꾸 복 받은 사람의 행동에서 복 받을만한 행동패턴을 찾으려고 하는데, 그런 접근은 완전히 잘못된 방식이다. 물론 그래야 속이 편해지는 당신에 대해 나는 이해한다. 나도 그런 인간이니까. 뭔가 확실하면 편하겠지, 불확실은 불안을 부르니까.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보며 ‘간음하면 저주받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간음한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당혹해하는 당신을 나는 이해한다. 그리고 ‘그건 아마 간음이 아닐 거야 그리고 그런 증거가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싶은 당신의 마음도 이해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거 뭐야 이상하잖아.'라는 생각이 절로 들면서 불안해지는 당신의 마음을 이해한다. 우리는 단단한 땅을 원하니까. 이리저리 모양을 바꾸는 땅은 원치 않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 맘이나 편하자고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믿는 것이다. 당신 발밑의 땅을 단단하게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 있으면 가장 단단한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을 받혀 줄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그리고 그 복은 하나님이 정하신다. 복 받을 만해서 복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로 하셨기 때문에 복을 받는 것이다. 이 관계를 이상하게 꼬지 말자. 당신은 하나님을 그리고 예수님을 당신의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가? 그럼 됐다. 그럼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고, 모든 복에 복으로 넘치게 주실 것이다.


앞 에서 말했다시피 기드온의 삶은 일면 극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야깃거리도 많아 보인다. 그러나 사실상 간단한 메시지가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사랑하셨고 모든 면에서 기드온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보이셨다. 이것으로 끝이다.


여기에서 글을 끝맺어야 하는 줄 알고 있지만, 노파심에서 한마디만 더 해 보도록 하겠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다윗이 바로 이런 관계를 정확히 알고 그에 대해 고백하는 부분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무엘하 7:2-3에서 다윗은 자신은 백향목 궁에 사는데 하나님은 장막에 사는 것이 마음이 쓰여서 나단 선지자에서 성전건축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이 부분이 참 재미있는데 아주 전형적인 열심 있는 집사 또는 장로와 목회자 간의 대화와 같다. 예를 들어 집사가 와서 ”제가 이번에 교회에 주차장을 봉헌했으면 합니다.” 목사가 화답하길 ”집사님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하나님께서 복에 복으로 갚으실 겁니다. 그 마음의 원함도 하나님께서 주셨을 거에요.” 이런 식의 대화인 셈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고 느닷없이 약속하기 시작하신다. 물론 역대상 22:8절에서는 그 이유를 말씀하신다. 따라서 다윗은 이유를 듣긴 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갑자기 약속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부분을 보면 재미있는 대구가 있다. 하나님의 집을 지어드리겠다는 다윗의 말에 대구를 이뤄서 하나님께서 사무엘하 7:11에서 당신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어 주시겠다고 하신다. 즉, 내가 이전에도 한 번 정도 언급했다시피 공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지 우리가 아니다. 가끔 크나큰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의 존재 이유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기 위함이라는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 않다. 여하간 이에 대한 다윗의 다음 고백을 보자.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주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있을 먼 장래의 일까지도 말씀하셨나이다 주 여호와여 이것이 사람의 법이니이다. 주 여호와는 주의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 그런즉 주 여호와여 이러므로 주는 위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신이 없음이니이다. (사무엘하 7:18-22)

다윗은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그 약속이 자기가 잘해서 또는 ”집 지어 드릴게요"라는 말이 기특해서가 아님을 알고 있다. 다윗은 철저하게 자기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있다. 다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시사 이 모든 것을 해 주심을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해 여러 번 ”사람이 무엇인관대"로 시작하는 고백을 하게 된다. (시 8:4, 144:3) 나는 종종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나?’ 하는, 마치 다윗이 복 받을 이유를 가지고 있어서 복을 받았다는 식의, 이제까지 내가 했던 말에 따르면 헛생각을 할 때가 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였고, 하나님의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으며 (베드로전서 4:8) 하나님의 사랑은 다함이 없다. (예레미야 애가 3:22)


물론 신앙의 선배들에게 배울 것이 있다면 배우자. 그것을 틀렸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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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2. 12. 1. 14:23

행복에 대하여 Opinion2012. 12. 1. 14:23

우리는 자주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직접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말이 내포하는 성경적 또는 신앙적 의미와 다르게 사용되거나 이해되는 경우를 종종 보아 왔다. 더구나 근래에 들어서 이 말 때문에 힘들어하거나 반대로 이 말을 사용하여 남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여럿 보게 되어 이에 대해 글을 써 보려고 한다.


먼저 질문으로 시작해 보자.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신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대답은 당연히 '그렇다'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원하지 않는다.'라 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대대적인 수정이 불가피하다. 사랑의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 나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 정도만 열거해도 이런 성품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원하신다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고난을 겪는 사람이 적지 않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삶에서 전혀 하나님의 향기는 나지 않은 채 외적으로 너무 풍족한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원한다는 논리 아래 전혀 정돈되지 않는 삶을 버젓이 사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는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다르게 말한다면 그들은 풍족한 자신들의 삶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증거라고 생각하며, 따라서 그들은 경건 생활을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논리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이 옳지 못하게 살아서 그렇게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기도 한다. 자기의로 똘똘 뭉쳐있는 그들을 우리는 '악인'이라 부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리고 그들을 보면서 악인의 형통함에 대해 개탄했던 성경의 인물들이 생각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원한다는 논리에 동의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가당착에 빠지기 일쑤다. 더구나 우리 마음 안에는 그들이 악하게 보여도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솔직한 속내가 자리하고 있다.


나는 이 글에서 그들이 '악인'임을 증명하려는 생각은 없다. 그건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문제이니까. 나는 이 글에서 이 문제에 대해 혹시라도 갈등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어느 정도 정돈된 의견을 들려주고 싶다. 또는 이런 문제로 고민을 겪는 사람을 보면서 위로를 해주고 싶어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이 글을 쓰려고 한다. (말을 점잖게 하려다 보니 뭔가 모호한 문제 제기가 되어 버렸다.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해 보겠다. 요즘 큰 교회는 부자를 우대한다. 이건 너무 명확해서 아니라 하기 민망하다. 그리고 그 부자들을 단순히 우대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부자들이 의로워서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는 논리를 은연중 인정해준다.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설교도 상당히 많다. 더군다나 그 부자들 자신도 자신들이 의로움의 결과로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께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사랑을 받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다 보니 그런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쉽게 던지는 말로 상처를 주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교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복음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관해 혼란스러워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논리, 즉, 의로워서 부자가 되었다는 논리를 깨부수지도 못하고, 실상 깨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소외된 그들조차 부자들의 '부자가 되는 방법'을 따라 해서 그들 역시 부자가 되고 싶은 소망이 마음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이 문제에 관해 명확한 설명을 찾기도 어렵고 찾으려는 노력도 현대교회 안에는 별로 없다.)


질문을 하나만 더 해보자. 그러면 행복이란 무엇인가? 아니 어떤 상태일 때에 그리고 어떻게 되면 우리는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기게 될까?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이라면 이에 대한 세련된 대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계획, 방법대로 살 때에 우리는 행복해 질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의 원하는 바와 하나님의 원하는 바가 상치가 된다면 어떻게 되는가? 과연 당신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관해 관심이 있기는 한가? 삶이 전혀 정돈되지 않고 아름답지 못하게 살면서 하나님이 자기의 행복을 원하신다고 하는 그 사람은 아마 자기가 원하는 바를 하나님도 원하신다고 굳게 믿고 살지도 모른다.


어렵게 돌아가지 말고 직접 이야기를 해 보자. 우리는 '내가 원하는 상태,' '편안한 상태,' '내가 즐거운 상태' 등등에 해당하는 상태에 있을 때 행복하다고 이야기한다. 행복에 대한 이런 접근법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이 접근법은 내가 내 삶을 계획하고 내가 내 삶의 주인임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경우 하나님은 그저 조력자일 뿐, 우리가 하나님을 그리고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은 그저 공허한 거짓 외침이 될 뿐이다. 내가 주 (Lord)라고 부른다면 그분이 내 삶의 주인이 됨이 너무 당연한데도 앞의 접근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경우 전적으로 그가 삶의 주인이 되어 버린다. 그들이 즐겨 인용하는 성경 구절들을 열거하며 하나하나 그렇게 적용하면 안 된다 말하고 싶으나,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고 믿겠다. (내가 왜 이렇게 이야기했는지에 관하여 부연설명을 해야겠다. 내 주변에 빨리 삶이 여유로워진 사람이 있다. 물론 오랜 시간 동안 고생을 했던 사람인데, 최근에 들어서 다방면에서 여유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어려웠을 때의 버릇을 여전히 고치지 못했다는 데에 있는데, 예를 들어 탈세를 절세라 우기기, 속여서 싼값에 호텔 이용하기를 똑똑하게 돈 아끼기라 우기기 등을 아직도 즐기고 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야 나는 하나님께서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신다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해 보고 싶은 거 다 해 볼 거야. 늙으면 못하지 않겠냐? 그러니까 너도 젊을 때에 해 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봐. 하나님이 이 좋은 세상에서 좋은 것을 누리라고 주셨는데 즐기지 않으면 되겠냐?" 뭐 즐기고 싶어도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논의는 이 사람 앞에서 사치일 뿐이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을 배우듯이 천국 소망을 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경기에 최선을 다하는 경주자로서 삶이 돼야 하는 이 세상을 '좋은 것을 즐기라고 주신 좋은 세상'이라 생각하는 것도 애교다. 어쨌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고,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그렇지 않다고 장담하겠느냐고 나는 질문하고 싶다.)


더구나 내가 원하는 삶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과 정반대이다. 다음의 말씀을 살펴보자.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7:21-25)

내 속사람이 원하는 대로 사는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상태이고, 그 상태가 바로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있는 상태이다. 즉, 내 육신이 원하는 상태는 내 마음이 원하는 상태와 싸워야만 하는 정 반대의 삶이다. 나를 잘 정돈하여, 즉, 경건 훈련을 통하여 내가 원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되도록 만들어보자? 이런 식의 논의는 교회 안에서 흔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아마 많은 사람이 그 진위에 대해 고민해 본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도 전혀 맞지 않는 헛소리이다. 성경은 우리가 그럴 수 없다고 강력하게 이야기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5:17)

내 육체의 소욕은 아무리 노력해도 성령의 소욕을 거스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 세상에 육신으로 선한 사람은 없다. 따라서 육신을 경건 훈련을 통하여 성령의 소욕을 따르게, 즉, 선하게 만들 방법은 애초에 없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로마서 3:10)

오죽하면 사도바울은 날마다 죽어야 했겠는가? 이 문제에 관하여 생각해 보았는가? 한번 죽었으면 되었지 왜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어야 했을까? 내 삶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바꾸는 작업은 경험이 쌓인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훈련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며 많이 배운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날마다 죽는 방법 외에는 없다. 이 정도로 어려운 작업이 바로 삶의 주인을 내려놓는 일이다. 따라서 행복의 의미를 내가 기준이 되어 정한다면 그 행복은 절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과 같을 수 없고 비슷할 수조차 없다. 오히려 완전 정 반대의 삶이 될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렇게도 날마다 죽고, 자신을 쳐 복종케 한다고 이야기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31)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린도전서 9:27)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변화되기 전의 육신은 절대 훈련되거나 길들여 지지 않는다. 아무리 모세여도,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어도 바울과 같이 매일같이 육신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일을 반복하지 않는다면 다시금 개가 그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이 반복되는 죄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해도 아직도 '그래도 노력하면 점점 변화되지 않나? 그걸 위해 경건 훈련을 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질문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어차피 문제될 것이 없다면 나도 그 말을 인정해 주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든 저렇게 생각하든 경건 훈련은 필요하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강력하게 말하는 이유는 그런 접근이 '자기의'에 빠지기 쉽게 하며, 결과적으로 완전 다른 길로 가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건 훈련은 영의 유익을 위한 것이지 육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행복의 정의를 내가 하는 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복을 원하신다는 명제는 거짓이 되어버린다. 행복의 정의를 내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맡긴다면 물론 그 명제는 참이 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반대말 격인 고난에 관하여도 한번 생각해보자. 역시 고난의 정의를 인간이 하면 인간이 정의한 행복과 반대말이 된다. 그러나 고난의 정의를 하나님께서 하신다면 하나님께서 정의한 행복과 동의어가 될 수도 있다. (항상 그렇다고는 못하겠다.)

고난에 관한 논의는 다양한 면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따라서 간단하게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과 '내가 원하는 삶'의 측면에서만 보자. 조금은 유치하지만, 효과적인 예가 하나 있어서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이 이야기는 아내가 내게 해 준 것인데, 아내는 또 그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그러니까 누가 최초 언급자인지는 모르겠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종종 다 낡은 딱지를 양손에 쥔 아들에게 멋진 로봇 장난감을 선물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같다. 아버지는 로봇 장난감이 훨씬 더 재미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아들은 낡은 딱지를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을 놓아야 받을 수 있는데 놓지 않으니 받을 수 없다." 약간 맞지 않는 부분도 있겠으나, 내가 말하고 싶은 의도는 다들 눈치챘으리라 믿는다. 하나님께서 내게 요구하시는 고난은 그 낡은 딱지를 내려놓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 고난의 뒤에는 로봇 장난감이 기다리고 있다. 유치하고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고난을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예라고 생각한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인 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진정한 행복에는 이를 수가 없다. 그래서 종종 하나님께서는 내 삶의 주인을 나에서 하나님께로 바꾸는 작업을 하신다. 그리고 정말 사랑하시는 사람이라면 '종종'이라는 단어를 '필요할 때마다 항상'이라고 바꿔야 한다. 그런 경우를 우리는 주위에서 보기도 하고 우리 삶에서 직접 경험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고난'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고난이 복'이라는 말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하였고, 그들이 말하는 '고난이 복'이라는 말이 바로 이 뜻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고난을 주께서 주시는 평안으로 이겨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주위에 누가 봐도 고난 중에 있는데 평안한 사람을 한둘 알고 있는 재수 좋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당신이 그 행운의 주인공이라면 그들에게 가서 행복하냐고 물어보라. 그들은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어려운 삶의 모습과 전혀 관계없이 행복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그들은 바로 다음날 무너질 가능성도 함께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사람이지만.


행복은 간단하게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행복이란 내 삶의 주인이 예수님인 상태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시기를 바라심에도 불구하고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정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일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난도 행복이다.


이렇게 보자면, 현대 교회 내에서 기득권층이 이야기하는 행복론과 고난론은 전부 틀렸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행복한 이유가 '하나님께서 (그들의 의로운 행동에 대한 보답으로) 그들이 행복하도록 도와주셨기 때문이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은 철저히 예수님은 조력자일 뿐이고, 삶의 주인은 그들 자신이다. 그러므로 틀렸고, 그런 인생은 행복할 수 없다. 모두 알다시피 우리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존재들이다. 그런 미약한 존재가 주인인 삶인데 어찌 행복할 수 있단 말인가? 일장춘몽처럼 찰나에 지나갈 행복'감'은 가능할지 모르나, 지속 가능한 궁극의 행복에는 절대 이를 수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하겠다.

  • 예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되셨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행복해 질 수 있다.
  • 육신으로는 절대 구원에 이를 수 없다.
  • 육신은 절대 선해지지 않는다.
  • 육신의 소욕은 항상 영의 소욕을 거스른다.
  • 내 육신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내가 원하는 것은 절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같을 수가 없다. 따라서 바울처럼 나를 죽이는 삶을 반복해야 한다.
  • 하나님은 도구나 조력자가 아니다.
  • 내가 사랑받을만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므로 사랑받는 것이다.
  • 복 받을 만한 의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고난은 삶의 주인을 바꾸는 과정을 말한다.

종종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기도했더니 어제까지 맛있던 술이 이제 맛이 없어요.' '담배가 저절로 끊겼어요.' '기도했더니 점점 내가 변해가고 예수님과 닮아가는 것 같아요. 이런 것이 바로 성화의 과정이고 신앙생활인가 봐요.' 이런 말은 가슴 아프지만 틀린 말이다. 나도 이렇게 믿고 싶다. 나도 변화되고 싶고, 어제 나를 괴롭혔던 주제가 내일은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반복되는 말이지만, 우리가 어떤 과정을 통해 육신을 길들일 수 있다면 (물론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셨다고 주장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와 당신의 목숨을 우리를 위해 주실 필요가 없었다. 그냥 우리 수명을 아주 길게 해 주시면 될 일이다. 또는 윤회하면 된다.[각주:1] 더군다나 나이 들어서 오히려 하나님께 책망받을 일을 많이 했던 다윗이나 노아 그리고 매일 죽지 않으면 신앙을 유지할 수 없었던 바울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것인가?


이런 말을 마치 경건 훈련의 목표인 양, 그리고 자신은 이미 그 정도 수준은 이룬 양 말하는 교회의 많은 멍청이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라. 우리 삶에서는 오직 예수만 드러나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 해 주신 일'을 간증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것만을 말하려고 하든지, 그것 외엔 할 말이 없다면 예수님을 '내 삶에 무언가 해 주시는 분'정도로만 생각하는 셈이 된다. 예수님은 내 삶의 주인이다. 조력자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나누어야 할 주제는 '하나님께서 내 삶에 해 주신 일'이 아니고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 더 나아가 '예수님의 우리를 위한 사랑'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무언가를 해 주셨다면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지 사랑받을만한 무언가가 있어서가 아님을 잊지 마라. 마지막으로 성경을 한군데만 더 인용하고 글을 맺겠다. 당신은 절대 여기에서 말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하며, 동시에 이런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도 마라.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디모데후서 3:1-5)


사족: 이 글의 초고는 12.11.30에 만들어졌었으나 완성은 13.09.12에 와서야 하였다. 그 사이에 내 생각이 많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생각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한 면이 있다. 사실 지금의 나로서는 행복에 대하여 옳지 못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다.

  1. 당신은 우연히 윤회라는 개념이 나왔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온 인류가 공유하고 있다. 정확히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구원방법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특별하지 않다. 지금 내가 이야기한 것과 같이, '내가 노력하여' 선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자연스레 도달하는 방식이 윤회일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들도 선해지려는 자신의 노력에 비해 느린 그들의 성장에 절망했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느낄 것인데, 심지어 자기들이 생각해 봐도 주어진 수명 내에서는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다면 자연스레 윤회를 상상하지 않을까? 그래서 불교가 생겨났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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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2. 9. 1. 13:39

동성애 문제에 관하여 Opinion2012. 9. 1. 13:39

먼저 한 가지를 밝혀 두고자 한다. 이 글은 '동성애에 관해 성경이 지지하는가? 반대하는가? 또는 중립적인 입장인가?'에 대해 다루는 글이 아니다. 성경은 명백히 동성애에 대하여 죄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그들에 대해 반대하는 데에 열심을 내는 것이 과연 옳은가?'의 문제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하나 더 노파심에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비교적' 동성애는 약한 죄다. 또는 세상에 더 흉악한 죄가 얼마나 많은데 동성애 이야기를 하느냐? 또는 기독교인들 너희는 얼마나 깨끗하길래 동성애에 대하여 그렇게 거품 물고 반대하느냐? 이런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다. 상대성의 논리를 이 글에서 다루고 싶은 마음은 없다. 물론 그에 대해서도 할 수 있는,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이 글에서는 그 문제를 다루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 나와 있는가?'에 따른 절대적인 명령을 이야기하려는 생각도 없고 죄의 상대성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생각도 없음을 먼저 확실히 짚고 넘어가겠다. 동성애 문제는 그렇게 다루지 않아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다.

미국에서는 동성애에 관련한 법안이 상정되면 그에 대해 찬반투표를 하는데 그것을 상당히 자주 한다. 그러니까 '동성애 합법 vs. 동성애 반대' 이런 식의 큰 법안에 대한 투표도 있겠지만 제3의 가족관계로서 남남 또는 여여 부부를 초등학교에서부터 가르칠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로도 투표한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어디에서 그렇게 꾸물꾸물 기어나오는지 기독교인들이 기어나와서 팻말들고 시위를 시작한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그 문제에 대해 사명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뜻밖에 많다. 개인의 신앙 문제나, 기도가 없고 말씀이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잘 되어 있어서인지 사명감에 고취된 사람 보기가 참으로 어려운데,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참 많다. 때때마다 투표 site를 여기저기 forwarding 하는 사람들부터 해서 Twitter나 Facebook에 그에 관해 성토하는 사람, 그리고 소그룹 모임에서 국민 걱정 위원회를 열어서 걱정하는 사람 등등 참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은 활동한다.

자! 당신이 동성애에 빠진 또는 자신을 동성애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만났다. 어떻게 할 것인가? 대부분은 그냥 지나가겠지만 적극 무엇을 해야 한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10초만 생각해 보고 대답해 보자. 아마 당신이 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이면 지지하는 말을 건넬 것이고,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면 용감한 경우 그건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고 할 것이다. 물론 이 글은 기독교인이 읽고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그럼 질문 하나 던지겠다. 당신의 이 세상에서의 사명은 무엇인가? 답을 여기에서 하고 싶지만, 꾹 참고 몇마디 더 해보자.

당신이 한국 사람이라 가정하겠다. 어떤 미국 사람이 와서 당신이 미국 법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 힐난한다고 하자. 그러면 당신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분명 당신은 그를 미친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세상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가? 아니면 세상의 법을 따르는가? 그 사람이 천국 시민이 되면 당연히 하나님의 법을 따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죄가 있을 것이고. 그러나 세상 사람이 세상의 법을 따르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 정도 되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눈치챘을 것이다. 당신이 동성애자를 만나서 해야 할 일은 그를 정죄하고 또는 '의로운 척하면서' 그의 죄를 일깨우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아니고 그를 전도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죄를 조명해 주실 것이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 대신 그를 정죄하고 심판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대체 그것을 마다하고 팻말들고 비난하는 것은 성경의 어디에서 배운 행동인가? 정신 차려야 한다. 아직도 '나는 보수적인 기독교인 = 보수적인 기독교인은 진정한 기독교인 = 진정한 기독교인은 세상에 대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사람 = 빛과 소금의 역할은 정죄하기'라고 생각하는 이상한 사람이 있다면 정신 좀 차리기를 간곡히 부탁한다.

내 소그룹 모임에서 한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다. 그에게는 동성애 친구가 하나 있는데 이번에 멀리에서 놀러 온다고 한다. 물론 그는 과거 같은 교회에 다니던 사람이고 지금은 다니고 있지 않는다고 한다. 무슨 이야기를 그에게 해 주어야 겠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의 대답은 이러했다. “정말 어쩔 수 없이 동성애자가 되었냐고 물어보십시오. 만약 그렇다면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고 하십시오. 만약 나아갈 수 없다면 다시 한번 '정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냐고 물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를 그렇게 만드셨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 그 모습 그대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중 누구도 깨끗해서, 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만해서 나가는 사람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정말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다면 그 모습 그대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은 그를 그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실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만약 도저히 나갈 수 없다면 그가 그 모습이 된 이유가 그렇게 태어나서가 아니고 죄성으로 인해 그렇게 되기를 스스로 선택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죄를 선포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선포 즉, 당신의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며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선포를 먼저 해야 합니다. 죄에 대한 선포는 그다음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성경이 명백하게 죄라고 하는 것을 죄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첫 번째 의무는 복음의 선포이지 죄의 선포가 아닙니다.” 나는 실로 이렇게 생각한다.

이 정도 되면 성경을 좀 아는 사람들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동성애에 관한 신랄한 경고에 대해서 의문을 표할 것이다. 그리고 죄에 대한 선포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해 나도 지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이 많지만, 다시 한번 말한다. 당신의 이 세상에서의 첫 번째 의무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계명을 무엇이라 말씀하셨으며,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당신에게 내리신 명령은 무엇인가? 우리 제발 헛짓은 그만두고 기본으로 돌아가자. 왜 세상이 악해졌으며, 왜 세상에 동성애자가 흘러넘치게 되었는가? 동성애자들의 주장을 100% 받아들여, 왜 현대에 와서 동성애자들이 자신 있게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할 수 있게 되었는가? 세상이 타락해서? 착각하지 마라. 세상이 타락할 때에 신자들은 거꾸로 성스러워진 예가 없다. 기독교인의 세상에서의 역할이 작아지고 있는가? 세상이 악해서? 바로 당신들이 악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선하고 당신도 선한데 세상만 악해진다고 생각하는가? 제발 제발 정신 차리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 반성해야 하고 회개해야 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해야 한다. 물론 당신도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돼야 하고.

마지막으로 몇 마디만 더 하겠다.

  • 교회 안에서 자행되는 죄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우리에 대해서 먼저 회개해야 한다. 내부적인 반성에는 약하고 외부적인 고발에만 능하다면 볼썽사납지 않겠는가? 나는 요즘 교회는 전혀 반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교회 돈을 횡령하는 장로는 버젓이 목에 힘주고 교회에 다닌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은 죄가 없는데도 죄인처럼 교회에서 고개를 들지 못한다. 당신의 교회가 그렇지 않다면 참으로 다행이다. 그러나 많은 교회가 횡령 거짓 모함 위선 음란 등등의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나님의 법까지 갈 것도 없이 세상의 법으로도 범법의 온상인 교회가 세상에 널려있다. 우리 그 똥이나 먼저 치우자.
  • 죄는 죄다. 죄를 사랑으로 감싸지 못하는 것도 죄지만 죄를 죄라 선포하지 못하는 것도 죄다. 글을 잘못 읽은 사람은 내가 동성애를 죄라고 선포하지 말라고 했다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 뜻이 아니다. 동성애자를 보면서 '괜찮아. 어쩔 수 있느냐? 좋아하는 것은 네 자유지.'라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엄청난 죄임을 알아야 한다. 단언컨대 그렇진 않다. 성경은 분명 그것을 죄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당신도 나도 죄에 파묻혀 살기는 마찬가지이고, 그럼에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뿐임을 잊지 마라. 당신의 물욕 나의 음란이 모두 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절망하고 하나님 앞에서 도망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무뎌져서 '너도 죄 없고 나도 죄 없어'라고 하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에 대한 회개와 너에 대한 죄의 선포가 끊겨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리 죄성과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나는 동성애도 그 정도 선상에 두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가지고 있는 '위선'의 죄에 비하면 내 개인적으로 동성애는 귀여운 죄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겉으로 확실히 드러나는 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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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이 글은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적었던 글에 대해 어투를 수정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삭제하는 등의 소소한 수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일단 그 관계나 상황의 어려운 정도는 매우 주관적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 다루지 않는다. 그런데 한가지 이야기하자면, 당신은 정말 어려운 상황이라고 생각되는 경우라도 사실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 경우가 백중 구십구는 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정도의 시험 또는 시련만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0:13)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기본부터 점검해 보자. 보통 교회를 다닌다고 한다. 그리고 예배를 본다고 한다. 그런데 교회는 다니는 곳이 아니며, 예배 역시 보는 것이 아니다. 성도가 모이는 곳이 교회이고, 나의 삶이 예배이다. 우리는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교회 공동체에 속하고 적어도 일주일의 하루를 성도 간의 교제에 할애한다. 바로 성도 간의 교제 자체가 '믿음 생활' 그 자체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사의 설교'가 중심인 형식적인 예배가 (ritual) 결코 예배의 중심이 될 수 없다. 같이 모여 찬양하고 같은 성경 구절로 나누고(설교) 소그룹 모임을 통해 교제하는 그 모든 활동을 통틀어서 예배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외의 활동은 엄밀히 말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예배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보통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형식적인 예배에 집중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오해가 '나의 행위'를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로 오해하게 하거나,또는 그것이 그렇게 이해되기를 바라게 한다. 내가 보아온 교회 내의 모든 문제는 바로 이런 부분에서 출발한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의미를 잘못 알고 있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높여 드리며 영광을 올린다.'라는 의미에서의 섬김이 옳은 섬김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의 의미의 섬김은 틀린 접근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시는 것일 뿐이다. , 주체는 하나님이고 나는 하나님 역사의 통로가 될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언가를 해 드릴 수도 없고 해 드릴 필요도 없다. '공급'의 의미로서의 섬김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 우리는 무익한 종일 뿐이다.

자 처음으로 돌아가서 '상황의 어려움'만 떼어서 말해 보자. 성경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보낸 그 자리에서 순종으로 예배의 단을 쌓으라.'라고 하실 것이다. 상황의 어려움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던 아브라함은 사라를 잃을 뻔했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이삭은 그랄 블레셋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하셨다. 야곱과 요셉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겠으나, 길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으므로 이 정도에서 마치겠다. 그러므로 상황의 어려움은 '일반적으로 신앙생활을 함에서' 피할 문제가 아니라 순종으로 받아야 할 문제일 경우가 많다. 물론 구체적인 상황은 스스로 판단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내용이 있다면, 당신이 그 자리에서 어려운 상황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돌파하기로 하든지 그것을 피하기로 하든지 그 결정과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이다. 이세벨을 피해 멀리멀리 달아났던 엘리야를 하나님께서 아기 돌보듯이 돌보았던 것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어처구니없는 선택을 한 우리 일지라도 하나님은 절대 버리지 않으신다.

다음으로 '관계'의 문제를 이야기해 보자. 관계에 문제가 있다 함은 '예배가 제대로 드려지지 않고 있다.'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싫은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 싫은 사람이 그냥 호불호를 떠나 나를 괴롭힌다면 문제가 된다. 그냥 무시할 수도 없고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히고 교회 가는 것이 괴롭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데 '주여 except 저놈'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면 일단 '나의 예배'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보통 관계의 문제는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라는 자세에서 출발한다. 즉, 앞에서 말한 섬김에 대한 오해가 가장 근저에 깔린 문제이다. 종으로서 군사로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신앙생활을 한다고 한다면, 실제로 관계의 문제가 크게 드러나기 힘들다. 당신과 당신을 괴롭히는 그 모두가 스스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고 그리고 그 섬김에 대하여 일종에 빚쟁이로서의 마음가짐을 갖기 때문에 문제가 시작된다. 말로는 섬긴다고 하고 마음으로는 '하나님 내가 이렇게까지 해 주었으니 보답 잘해 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저 인간은 인정하지 않네? 짜증 나는군.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빚을 많이 줬는지 모르는군. 알려줘야겠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정말 많다. 나는 모든 문제는 죄다 이 문제라고까지 하고 싶다. 따라서 먼저 당신의 정체성, 다시 말해 주제 파악을 먼저 하기를 권한다.


그런데 이런 죄성에 가까운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관계의 문제는 일어날 수 있다. 성경에 관계의 문제를 겪었던 수많은 사람이 나온다. 바울이 바나바와 싸웠고, 그 바울이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기도 했다. 요셉과 형제간의 갈등은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었고, 다윗과 요압의 갈등은 유치하게 끝났다. 이 외에도 수도 없는 관계의 문제들이 성경 곳곳에 적혀있다. 그럼 그것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교훈은 무엇이며,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서 주목할 또 다른 하나는 '항상' 관계의 문제는 ''라는 자아가 부각 되었을 때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물론 위의 '섬김'에 관한 문제도 본질상 같은 문제이긴 하다.) 동시에 참 재미있게도 그 관계의 문제까지도 하나님은 들어 사용하셨고, 자녀에게 좋은 것으로 보답하셨다. 바울과 바나바의 싸움은 하나님 나라의 더욱 빠른 확장을 가져왔고, (아마도) 베드로가 회개하게 하였을 것이며, 요셉이 애굽에서 미래를 준비하게 하기도 하였다. 다윗과 요압의 갈등은 아마 다윗이 타락하는 것을 어느 정도 조절하게 하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관계의 갈등도 선하다는 말인가? 전혀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관계의 갈등이 있다면, 내가 너무 나를 내세우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야 하며, 동시에 이것 또한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실 하나님으로 위로를 얻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관계의 갈등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관계의 문제로 교회를 옮기는 것은 개인적으로 좋지 않다고 본다. 옳지 않다고 썼다가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닌 경우 또는 옳고 그른 문제로 해석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서 좋지 않다고 바꾸었다. 그런 문제로 교회를 옮기게 되면 계속 옮겨 다녀야 한다. 무시할 것은 무시하고 좋은 관계를 취해야 한다.

내 이야기를 잠깐 해본다면, 나는 사람을 싫어한다. 그리고 상당히 비판적으로 사람을 본다. 특히 나는 내가 출석하는 교회 담임목사의 설교를 상당히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편이다. 교회의 교육 프로그램, 방향, 등등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교회에 다니는 이유는 그 담임목사가 자기반성을 하는 분이라는 것과 적어도 이 교회의 목사들은 교리상으로 바로 서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런 교회 찾기도 쉽지 않다. 물론 내가 다니는 교회에 생명과 회복만 있지 죽음과 저주에 대한 경고가 없어서 회개에 약하다는 부분을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어느 교회든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그 정도는 수용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지금 다니는 교회를 다닌다. 더구나 좋은 사람들이 있다. 존경하는 부목사님이 있고, 소그룹 모임과 양육모임 등에서 만나는 신앙의 동역자가 이 교회에 많이 있다. 걸쩍지근한 사람도 같잖은 사람도 짜증 나는 사람도 수없이 많으나, 그냥 무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정도는 옮길까 하는 생각도 한다. 왜냐하면, 내 신앙 스타일이 너무 편향되어 있어서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자 하는 생각 때문이다. 너무 지적으로 흐르는 나의 신앙을 조금 행동하는 신앙 쪽으로 당기고 싶어서 '은사 주의 교회 (charismatic church)'에 다녀볼까 하는 생각이 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천국 백성으로서의 훈련을 쌓아 간다고 할 때, 나에게 필요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다른 교단을 택해 보고 싶은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어려움' 때문은 아니다.

신앙생활의 중심에 예수님을 두고 생각하기를 바란다. 보통 관계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아주 활동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경우 한 가지를 꼭 염두에 둬야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행정적인 부담을 지라고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질서''필요' '편의'를 위해 사람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교회일'로 인해 부딪히는 관계가 당신을 힘들게 한다면 다 버리길 권한다. 그런다고 하나님께서 '야 너 왜 일 안 해'라고 하지 않으신다. 사도들이 일곱 집사를 세우고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고 했던 말씀을 곱씹어 보아야 한다. 신앙생활 중에 기도와 말씀을 제외하고 '꼭 해야 하는 일'이란 없다. 사람들의 말은 사뿐히 무시해야 할 때도 있다. 성경을 발로 읽는 사람들의 이른바 '장로의 유전'에 따른 도전에 일일이 대응할 필요는 없다. 예수님과 및 제자들이 수없이 장로의 유전에 대해 비판하였으나, 여전히 교회는 장로의 유전에 매여있다. 사람의 경험을 말씀 위에 두는 일이 많다. 나는 지금 소그룹 리더와 일대일 그리고 교리 교재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중 하나를 버리라고 하면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교재 만드는 일을 관둘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 이미 관둔 상태임.) 그 일은 내가 존경하는 목사님과 하는 것이고 좋아하는 집사님이 강권해서 시작한 일이며, 약간의 지적욕구를 채울 수도 있고 지적과시도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 신앙과 관계된 일은 아니다.


정답은 없다. 결국, 당신의 선택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통해 '옮기지 말라.'라고 권하고 싶다. 상황의 어려움도 관계의 어려움도 당신에게 주어졌다면 필요하니까 주어졌다고 생각하기를 권한다.


당신은 어떤 스타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왜 하는가? 무엇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가? 무엇이 강점인가? 하나에 치우치면 다른 하나는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둘 다 잘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너무 모든 것을 잘하기 위해 자신 채찍질하지 말아야 한다. 회개는 필요하나 자책은 필요 없다. 죄책으로부터의 자유를 예수님께서 주셨고, 우린 감사할 일만 남았다. 물론 그 감사는 정당한 회개를 동반하며, 회개를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너무 원론적으로 말하지 않았나 걱정이 된다. 나는 신앙생활이 줄타기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너무 어렵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라는 하나님 말씀이 야속할 때도 잦다.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다. 믿음의 길은 좁은 길이다. 절대 쉽지 않다. 우리 모두 바울처럼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길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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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2. 4. 28. 12:11

은사주의의 문제점과 대처방법 Opinion2012. 4. 28. 12:11

은사주의의 장단점에 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우선 은사주의 자체를 틀렸다고 할 수 없다. 은사주의도 분명 신앙의 한 형태이다. 크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단 하나로 규정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다른 종교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같은 신앙고백 아래에서 다양한 형태가 존재함은 인정해야 한다. 그러함에도  나는 은사주의가 불편하고 심지어는 감정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감정적이라고 한 이유는 지적으로 그것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하나님을 알라'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의 주된 주제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따로 관련 구절들을 언급하지 않겠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알 것인가. 그 방법은 수도 없이 많다. 모든 경건훈련이 결국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으며, 우리의 신앙생활 자체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그런 입장에서 은사주의는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한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가 없어야 하겠는데, 인간이라는 연약함과 은사주의가 만날 때에 부정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경우를 자주 보아 왔다.


은사주의란 무엇인가. 신학적인 논의는 이 글에서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간단히 말해 은사주의란 '성령의 은사를 추구함'이라 하겠다. 물론 우리가 은사주의라고 할 때엔 '심하게 추구함'이라는 의미를 함축하지만, 이 글에서는 단순하게 '성령의 은사를 추구함' 정도로 생각하자. 사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은사주의는 '지적'으로도 틀렸다. 왜냐하면, 은사란 Gift 즉, 선물이다. 이것은 추구해야 할 대상도 요구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다. 선물이란 주고 싶은 사람이 주고 싶은 때에, 주고 싶은 것을 주는 것이다. 내가 달라고 징징거려서 받는 것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선물이라고 하겠나. 그러나 우선 가능하다고 하자. 은사주의의 방법론을 통해서도 좋은 열매가 맺혀지기도 하고, 그들의 뜨거움이 부럽기도 하므로 틀렸다는 말은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 문제점만 살펴보고 문제를 완화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자. (고전 12:31의 사모하는 것과 달라고 떼쓰는 것은 분명 다르지만 그냥 비슷하다고 넘어가자. 이것을 제외하더라도 은사주의는 많은 문제점을 내포한다.)


은사주의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감각되는 경험에 치중한다. 그 자체로 문제가 있다. 그런 경험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고 사탄을 통해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각을 통한 경험은 많은 경우에 이성을 속이며, 진리와 관계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아주 올바른 집회에서조차도 감정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사탄도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감정의 움직임을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사탄의 간섭에 농락당하기 쉬워지므로 긴장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은사주의자들은 오히려 감정의 움직임을 하나님에 대한 체험으로 생각하여 거기에 목표를 두는 경우가 많고, 따라서 사탄에 농락당할 높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그러한 감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한낱 부적 정도로 치부해 버린다는 사실이다. 은사주의자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해 봐 하나님께서 만나주셔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이뤄주셔 (능력 있는 기도하는 방법).' 물론 그럴 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방법으로 만나 주실 때에만, 그 방법으로 말씀하실 때에만, 그 방법으로 이뤄 주시기로 작정하신 때에만 그렇게 될 수 있다. 즉, 우리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로 작정하셔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인격 없는 어떤 부적처럼 생각하여 그 부적이 효험있게 만드는 방법을 추구하는 경향을 나는 수도 없이 보아왔다. 그들은 입버릇처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하나님을 진정 인격체로 대우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만나는 데에 특별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틀렸다. 하나님을 만나는 특별한 방법은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며, 그 길을 걷는 것은 보혜사 성령의 도움으로 가능하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그 어떤 방법으로도 만날 수 있다. 다만 하나님께서 만나시고자 하실 때에 그것이 가능하다. 즉, 만남의 주체는 하나님이시지 결코 '내'가 될 수 없다. 이 부분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앞에서 그 길은 예수님이시며 성령님의 도움으로 걸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분명 그 길은 은사로도 걸을 수 있다. 은사란 바로 성령의 선물이고, 그 선물을 주는 이유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 공동체/개인의 신앙성장 등등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이유가 바로 은사주의를 틀렸다고 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성령께서 은사를 통해 나를 견인하기로 작정하셨을 때에 그 은사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될 뿐, '나는 이번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기로 작정했어. 같이 기도해줘. 나는 방언을 기필코 받아서 주의 살아 역사 하심을 체험할 거야.'라는 식의 접근은 주객이 전도된 이야기일 뿐이다.


다른 문제로, 어쩌면 이것이 더 큰 문제일 수도 있는데,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좋으신 하나님'으로만 본다. 물론 하나님은 선하시고 좋으신 분이다. 그런데 그분은 우리에게 징계하시기도 하시는 분이다. 선물만 주시는 산타클로스가 아니다. 회초리를 들고 훈련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이런 부분을 철저히 외면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죄책에 빠지게 하는 모든 것들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복되게 하십니다.' 틀린 부분이 조금도 없다. 그러나 이렇다손 치더라도 회개가 우리 삶에 빠질 수는 없다. 애통하는 마음과 죄책에 빠진 마음이 명백하고 쉽게 구분된다고 생각하는가? 적어도 나는 그것을 쉽게 구분하지 못한다. 다만 결국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통해 죄책까지도 회개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뿐이다. 그 죄책이 나를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시키고 가룟 유다처럼 자살로 이끈다면 그제야 그것이 사탄의 역사였다고 확신할 뿐이다. 우리의 제한된 식견으로 죄책과 애통하는 마음을 정확히 구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짧게 말해서 은사주의자들에게 회개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은 항상 더 받고 더 감동하기 위해 준비된 자세로 어떤 '방법'들을 시행한다. 모든 어려움을 불신앙의 문제로 치부하는 경향 또한 이 문제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실상은 감각적 체험에 불과한)이 있다면 우리 삶에 어려움이란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그리고 신앙생활의 어려움을 격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들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오히려 죄책에 빠지게 하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수준 낮은 신앙을 가진 자로 매도한다.


그리고 은사주의자들은 흔히 이 땅에서의 복된 삶을 추구한다. 그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에 '믿음 없는 자'로 간주하여 더 열심히 하라고 한다. 다른 글에서 이 문제를 별개로 다루고 싶은데, 나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어떤 사람을 이 땅에서도 복되게 쓰실 수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훈련장이 편하고 좋기만 할 것이라는 상상은 뭔가 이상하다. 훈련은 힘든 것이 당연하다. 어차피 우리는 천국에서 어마어마한 복을 누릴 텐데, 한순간에 불과한 우리 인생 중에 (시 90:4) 약간의 물질적 축복의 있고 없음이 그리 중요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이 어떤 것을 충족시키기만 하면 흔들어 넘치도록 복을 받을 것으로 생각한다. (눅 6:38) 어쨌든 그들은 눈에 보이는 삶을 믿음의 척도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딱 잘라서 말씀이다. 결국, 나를 변화시키는 통로는 말씀이다. 그리고 말씀은 가장 객관적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한 하나님을 알아나가는 방법이다. 우리는 보통 감각적인 체험을 체험으로 인지하는데, 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감각적인 체험보다 말씀을 통한 체험이 더 많았다. 이 부분은 표현하기가 참 어렵다. 그냥 깨달음이라고 할 수는 없다. 깨달음과 더불어 즉각적인 변화를 동반한다. 나는 내가 양육하는 사람들을 말씀을 보도록 강권하는 편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든 말씀을 읽기로 작정하고 읽기 시작한 사람에게는 예외 없이 변화가 있었다. 그 말씀이 은혜로웠던 것도 아니고 이해를 하면서 읽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말씀을 보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사람은 변화를 시작한다.


따라서 은사주의를 추구한다손 치더라도 그 체험을 말씀으로 재조명하는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 즉, 그러한 체험을 내 마음에 쌓을 때에 체험할 당시의 그 감각을 쌓지 말고 그 감각적인 체험을 말씀으로 재조명하여 말씀으로 쌓아 두어야 한다. 어려운 말이 될 수도 있는데, 우리의 경건 훈련은 결국 모두 말씀으로 재조명해야 한다. 말씀으로 재조명하는 과정이야말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는 과정이다. 감각적인 체험은 만난 그 존재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며, 그분의 의지에 의해 만났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 그런데 그 만남이 말씀으로 재조명되면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 허락된 만남이 되며, '그 체험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성경에 적혀있는 말씀을 통해 만나주시리라고 하셨던 약속의 확증'이 된다. 그것은 확실하며 또한 인격적인 만남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해서 살고 있다. 따라서 모든 경건 훈련은 하나님의 약속 속에서 재해석되어야 하며,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다시 한번 찬양하고 그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체험은 극적일 수도 있고, 지적일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떤 경우이든 간에 그것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으로서 흔들림 없이 나의 신앙의 바탕이 되려면 결국 그 체험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됨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확신이 그냥 자기확신에 불과하다면 앞에서 언급했던 은사주의의 문제점들을 내포하게 된다. 사탄의 인도함을 따라가기도 하며, 특별한 체험을 추구하게 되기도 하고, 신앙생활 중 겪을 수 있는 문제를 믿음이 없어서 생기는 문제로 매도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몰인격적인 부적정도로 치부하기도 하며, 눈에 보이는 복만 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확신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면 그때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은 물론 공동체에 유익이 되는 객관적인 신앙고백에 되며, 이런 고백은 말씀으로 재조명했을 때에 가능해진다. 나의 하나님과의 만남을 하나님이 증명해 주실 때에, 그 체험은 진정한 체험이 되고 능력 있는 체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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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2. 3. 29. 09:49

성경연구에 있어서 교리의 득과 실 Opinion2012. 3. 29. 09:49

교리는 분명히 중요하다. 신앙고백의 근간이 되기도 하며, 이단을 구분하기 위한 표지가 되기도 한다. 과거 성경이 귀하고 대다수 성도가 문맹이었을 당시에는 신앙의 기본이 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옳바른 교리를 세우고 배우며, 올바른 신조를 통해 신앙고백을 하는 일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교리에 너무 심취하는 것, 또는 성경보다 교리를 우선하는 경향은 경계해야 한다. 굳이 교의신학에서 성경신학으로 그리고 선교신학으로 변해가는 신학의 흐름을 언급하며 어려운 소리를 늘어놓지 않아도 그 이유는 분명하다.

성경이 더 중요하다라고 하면 일면 유치해 보인다. 너무 당연한 소리로 논리를 증명하려고 하는 행위는 일면 우물물에 독치기의 오류에 빠진 듯이 보인다. 그러나 나는 그 세련되지 못한 주장을 여기에서 할 수 밖에 없다.

교리만 확실히 알고 있으면 성경은 필요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만난 적이 없다. 왜냐하면 너무 극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교리가 도움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교리를 통해 성경을 이해 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미묘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둘다 맞는 이야기이긴 하다. 그러나 나는 후자, 즉, 교리를 통해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라는 주장에 오류가 있음을 이야기 하고 싶다. 교리로 시작한 사람이 성경으로 항상 가지는 않더라는 데에 그 오류가 있다. 성경으로 시작하여 교리의 도움을 받는 것은 상대적으로 그 교리가 그를 성경에서 멀어지게 하지 않는 반면, 교리로 시작하여 성경으로 확증하려는 시도는 종종 교리로 시작하여 교리로 끝나게 하기도 한다.

그러면 교리만 가지고는 신앙생활이 되지 않는가? 우리는 현대를 사니까 과거 성경이 귀했던,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은 무시하도록 하자. 그렇다면, 원전인 성경을 제쳐두고 그에 대한 해석본인 교리를 통해서'만' 신앙생활이 가능한 지에 대한 논의는 적어도 내 상식으로는 의미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한 하나님의 자취를 찾는 방법의 1차 매뉴얼에 집중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나는 사람의 가공이 한번이라도 더 들어간 매뉴얼은 믿지 못하겠다. 참고는 하겠지만, 그것을 이용해 길을 떠날 자신은 없다. 더구나 평생에 걸친 여정인데 말이다.

늦게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직분을 받고, 더구나 진지하게 신앙에 대해 접근하는 사람들 중에 지난한 성경을 통한 길찾기를 포기하고 교리를 통한 길찾기에 집중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아왔다. 물론 그들는 적어도 길을 찾기 원하는 진지한 신자였다. 성경을 통한 길고 긴 여정에 질려 지름길을 찾고자 하는 그들의 그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며, 나는 그 노력을 응원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시도의 위험성을 여기에서 짚지 않을 수 없다. 먼저 교리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논리'에 바탕을 둔다. 나의 신앙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를 틀렸다 할 수 없다. 그러나 논리는 기본적으로 인본주의적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논리로 당신을 계시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계시는 그 자체로 '진리'이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 당신은 인과율에서 벗어나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논리 위에 계신다.

그리고 그 어떤 교리도 성경 전체를 무리없이 설명하지는 못한다. 이 부분은 중요하면서도 미묘한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모순 없는 교리는 없다는 말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개혁교회의 전통을 따르는 사람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사상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래야 할 필요도 못 느끼겠다. 그저 전적타락과 무조건적 선택에 동의하고 예정론에 동의 할 뿐이다. 그렇다고 예지론에 반대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다만 성경이 주장하는 하나님을 예정론이 예지론보다 더 잘 설명한다고 생각 할 뿐이다. 다시 말해, 내가 보는 교리의 역사는 오류를 줄이기 위한 역사였을 뿐이지 오류를 없애기 위한 역사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논리로 설명되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를 말하면 너무 현학적인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나, 어쨌든 어떤 논리 체계도 완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수학적으로도 증명된 일이다. 즉, 겨우 인간도 논리로 설명이 되지 않는데 하물며 크신 하나님임에야 그것이 가능 할 리 없다.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에게서는 '나'가 드러나기 쉽고, '나'가 드러나는 사람은 무익하며 무력한 나를위해 값없이 당신을 드린 예수님의 은혜와 그로 인한 전적인 구원에 동의하기 쉽지 않다. 나에게 '구원받을 만한 것'이 있어서 구원받았다고 주장하는 솔직한 사람부터, 은혜로 구원받기는 했지만 그 이후로는 '구원받을 만한 상태'를 유지해야 다시 버림받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절대사랑을 폄하하는 사람까지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를 드러내기를 원한다. 내가 구원에 어떤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런 논리의 함정, 다시 말해 '나'의 존재의의가 드러나는 그 달콤한 유혹에 쉽게 빠지고 헤어나오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 왔다. 이런 경우들을 2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수백년 묵은 논쟁에 매몰되는 경우를 봤다. 매주 인터넷을 통해 논쟁거리를 준비해서 만날 때 마다 질문하는 부류에 해당하는데, 그들의 주장을 듣고 있노라면 대체 그런 논쟁이 우리 신앙에 뭔 소용이 있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이런 사람은 조금 나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수년째 같은 논쟁을 반복하기도 하는데, 이런 사람은 계속 공부하지도 않는다. 그냥 한 번 들은 논쟁거리를 자신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데에 반복적으로 사용 할 뿐이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당신 생각 다 맞으니 하나님의 아들답게 사는 데에나 집중하세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그들은 그런 논리로 나를 고민에 빠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나는 논리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믿는 것이기 때문에 논리상 문제가 있는 신앙고백이 그렇게 낯설지도 불편하지도 않다. 그리고 솔직히 아직까지는 그런 논리에 논리로도 밀려 본 일이 없다. 설령 불완전한 이해일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 즉, 하나님으로 시작한 '신앙고백'은 논리를 위한 논리에 밀릴 수 없다.

그리고 수백년묵은 논쟁은 그 자체가 '나는 믿음의 문제에요'라고 강변하는 것과 다름 없다. 결단이 필요한 문제일 뿐이다. 그런 문제에 답변하려고 정력을 소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만 논지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어떤 것을 선택할 지 결정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마저도 최소한으로 하기를 권한다.

다음 부류로, 앞에서 "교리만 확실히 알고 있으면 성경은 필요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만난 적이 없다"라고 했었는데 사실 그런 부류를 본 일이 있고, 내용을 "예수님과 구원(에 관한 교리)만 알고 있으면 성경은 필요없다"라고 바꾼다면, 이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은 상상외로 많다. 내 양육의 목표는 '성경 읽는 교인 만들기'이다. 그런데 나의 양육 역사는 참담한 실패의 연속이었다. 일시적으로 신약통독/성경통독에 성공하는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것이 습관화 되어 계속 읽기까지 성공한 예는 부끄럽게도 하나도 없다. 나는 왜 그게 안되는 지가 궁금했었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성경 읽는 것도 은사'라는 말도 한다. 거기에 동의한 적도 있다. 참담한 심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의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어떻게 아버지의 말씀을 읽어 듣는 것이 은사가 될 수 있나? 자기들의 읽지 않음에 대한 핑계로 '은사가 있는 사람만 읽는다'라 주장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이에 대한 해답을 그 다음 부류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서 찾았다. 그들은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부분과 논리적으로 설명 할 필요가 없는 부분으로 성경을 구분한다. (물론 이런 구분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 할 것이다. 그런데 역시 내용을 약간 바꾸면 '자기의 논리대로' 성경을 중요한 부분과 중요하지 않은 부분으로 나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런 사람은 많다. 그리고 그 중요한 부분은 예수와 그 분을 통한 구원 정도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외의 부분은 '중요하지 않다'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나면 그들 생각에 '나는 예수님은 아는데? 그러면 성경은 읽을 필요 없겠군 어차피 부차적인 문제들이니까'로 결론지어진다. 논쟁거리에 함몰되는 부류는 열심히 하려는데 열심이 잘못된 방향으로 발휘된 사람들이라면 이들은 아예 필요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이다. 즉, 이제껏 읽기 힘들어서 성경을 읽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던 사람들, 그래서 날 고민하게 만들었던 사람들, 심지어 내가 은사가 있어서 읽는다고 착각하게 했던 그 사람들이 실상은 읽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읽지 않는 부류였다.

이들은 어처구니 없게도 구원론 만큼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 질문하면 곧잘 대답도 한다. 그리고 심지어 겸손하기까지 하다. (반면 논쟁에 집중하는 부류들은 그렇게 겸손하지는 않다.) 그런데 성경은 읽지 않는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성경을 읽고 있나? 읽지 않는다면 왜 읽지 않는가? 읽을 필요가 절실한데도 읽지 않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바보다. 절실한 필요를 무시하고 있으니 바보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에겐 성경이 아직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은 거다.

두 부류 모두 하나님보다 내가, 성경보다 내 머리가 더 우선인 경우이다. 그리고 나는 교리 중심의 성경연구가 이런 함정을 어느 정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교리를 정립했던 사람들은 누구 하나 예외없이 성경을 줄줄이 꿰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성경을 통한 깨달음이 없이 올바른 교리를 만들거나 이해 할 수 있다고 꿈꾸지 않기를 바란다.

이 즈음해서 교리의 필요성도 짚어볼 필요가 있겠다. 교리는 앞에서도 말했다 시피 우리에게 있어서 일종의 경계석 역할을 한다. 우리가 모든 문제를 다 스스로 답해야 한다면 그건 너무 가혹하고 힘든 일이다. 중요한 것들 이외에는 남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그런 경우 내가 속한 교단에서 인정하는 교리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물론 그 교리의 진의를 파악하는 데에는 성경을 통한 도움이 필요하긴 하나 어쨌든 비교적 손쉽게 그리고 안전하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아주 미묘하게 사람을 괴롭히는 문제들이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있기 마련인데 그런 경우 교리가 많은 도움이 된다.

그리고 성경만을 이용해서 신앙훈련을 한 사람들은 어떤 개념을 간결하게 표현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도 그 경우에 해당하는데 뭔가 이야기 하려면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너무 많다. 그래서 말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교리의 도움을 받으면 간결하면서도 위험성이 적은 대답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너무 불성실하게 필요성을 짚었는데, 어쨌든 당신이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성경을 중심에 두고 교리도 무시하지 않기를 권한다. 가능하다면 교리 공부에 너무 집중하지 말기를 바란다. 교리 공부도 경건 훈련에 해당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거기에 그렇다고 답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성경을 통한 경건 훈련의 보조 수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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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12. 9. 15:43

NKJV Study Bible Opinion2011. 12. 9. 15:43

KJV가 너무 고어를 사용해서 읽기 쉽지 않은데 그 부분을 보완한 역본이 NKJV다. 물론 단순히 단어만 바꾼 것은 아니고 현대에 이르러 널리 이용되는 대본들을 참고해서 차이점도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KJV의 대본상의 약점이 어느 정도 해소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석은 감히 내가 가지고 있는 성경 중에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전문적이면서도 차분하고 중심을 잘 잡는 주석이다. 성경 전체를 흐르는 예수님의 흔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절대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절제미를 갖추고 있다.

※ 간단하게 성경 대본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하겠다. 모두가 알다시피 성경은 사람이 써서 사람 손에 의해 유지 보수 되어 오다가 사람 손으로 편집되어 사람 손으로 번역되었다. 원본 (원 저자가 썼던 그것)이 남아 있는 성경은 단 한 권도 없음을 주목해야 한다. 어차피 모두 사본이며, 그 정확성을 100% 보증 할 수 있는 사본은 현재 하나도 없는 상태이다. 그런 상태에서 어느 사본이, 어느 편집본이(신약의 경우) 좋다는 논쟁에 참여하고 싶은 생각도 그럴 실력도 안된다. 그런데 나는 어떤 사본이든 별 상관이 있겠나 하는 조금은 무책임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NKJV의 서문에 보면 Textus Receptus와 Alexandrian Text 그리고 Majority Text의 85%가 동일하다고 나온다.

In light of these facts, and also because the New King James Version is the fifth revision of a historic document translated from specific Greek texts, the editors decided to retain the traditional text in the body of the New Testament and to indicate major Critical and Majority Text variant readings in the footnotes. Although these variations are duly indicated in the footnotes of the present edition, it is most important to emphasize that fully eighty-five percent of the New Testament text is the same in the Textus Receptus, the Alexandrian Text, and the Majority Text. Preface of NKJV
뭐 어떤 의미에서 보면 15% 차이는 엄청난 차이이긴 하다. 그러나 또 어떻게 보면 그리 큰 차이가 아니기도 하다. 나는 구원에 필요한 정보는 충분히 전달이 되어 있다고 믿으며, 차이가 있어 봐야 중요치 않은 부분일 것이라고 믿는다. 여러 역본을 읽어봤지만 난 그들 사이에 큰 차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어떤 역본은 형이 예하고 아버지 말을 듣지 않고 동생은 아니오 하고 결국 아버지 뜻에 따랐는데 다른 역본은 그 형과 동생이 바뀌는 경우가 있었다. 그것을 큰 차이라고 볼 것인가? 크다면 큰데 난 그래서 뭐가 바뀌나 하는 생각이 들 뿐이다. 이러나 저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이 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개역개정 마태복음 21:28-31)

“But what do you think about this? A man with two sons told the older boy, ‘Son, go out and work in the vineyard today.’ The son answered, ‘No, I won’t go,’ but later he changed his mind and went anyway. Then the father told the other son, ‘You go,’ and he said, ‘Yes, sir, I will.’ But he didn’t go.
“Which of the two obeyed his father?” They replied, “The first.”Then Jesus explained his meaning: “I tell you the truth, corrupt tax collectors and prostitutes will get into the Kingdom of God before you do. (NLT)
웃기게도 이 구절을 가지고 형보다 나은 아우 없다는 속담이 틀렸다는 식으로 형(유대인)과 아우(이방인) 사이의 문제로 대입해서 푸는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하여간 단어에 집중한 성경 해석이 얼마나 위험하며 우스꽝 스러울 수 있는 지 여기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나는 이런 데에 힘을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여러 역본을 읽어 보자.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어차피 당신이 죽어라고 공부해도 (신학생 포함) 히브리어 헬라어 전문가 되기는 요원하며 불가능에 가깝다. 사전 펴 놓고 떠듬 떠듬 번역하면서 뭔가 발견했다고 흥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요즘 그런 목사들이 너무 많은데, 당신 같으면 옆에서 누가 영어사전 들고 떠듬 떠듬 번역하면서 '이거 번역 이상한데?'라고 하면 뭐라고 답하겠는가? 나 같으면 '니가 영어를 잘 못해서 그런건 아니고?'라고 되 물을 것 같다. 이 문제는 다음에 다시 다루도록 하겠다.

ESV 성경과 마찬가지로 직역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다른 역본들과 차이에 대해서는 center column에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즉, 70인 역에서는 어떻게 다르며, Majority Text에서는 어떻게 다르고, Latin Vulgate에는 어떻게 다르다 라는 식으로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가장 풍부한 성경 읽기가 가능하지 않나라는 생각도 든다. 이 이외에도 다양한 essay와 단어 해설등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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