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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한가지 짚고 넘어가자. 당신이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그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아니 대부분 기독교인이 종교인으로 머물 뿐, 진정으로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삶을 살고 있지도 않으며, 그런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시도하지도 않는다. 누구나 아는 내용인 듯하지만 동시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내용이기도 하다. 나는 교회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을 보아왔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또는 제자로 살기 위해 진지한 고민을 거듭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물론 입으로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말을 많이 한다. 왜냐하면, 많은 교회가 예수님의 제자를 표방하며, 많은 교육을 통해 그 '용어'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까 그들의 말 속에 예수님의 제자라는 표현이 많이 사용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의 삶에서 일반 교회 교인들의 그것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가르치는 사람들조차도 과연 예수님 제자의 의미를 알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경우가 많았다.


우리 삶의 목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됨이어야 한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방편 중의 하나일 뿐이다. 또 하나, '예수님의 제자'는 '되는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되는 것'인가? 나는 그렇게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나에게 남은 문제는 '제자다운 삶'을 사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노력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를 짧게 설명할 자신이 없다. 다만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을 해 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이 글에서 제자가 된다고 표현되는 부분은 그런 표현이 간단하여서 사용할 뿐이고 사실상 그렇게 됨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고 읽어주기를 부탁한다.


우선 문제를 제기해 보자.


근래 미국의 한 교회를 방문했다. 그 지역에서 가장 큰 교세를 가진 교회로 약 3천 명 가량이 출석하는 교회이다. 그런데 그날 설교가 정말 압권이었다. 철저하게 인간중심의 설교였다. 물론 그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대부분의 설교가 인간 중심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교세가 커졌다고 생각된다. 안타까운 이야기이지만 인간중심의 설교를 해야 현대 기독교인들은 편안해하고 좋아한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관한 이야기를 하면 지루해하고 딱딱하다고 느끼며, 심지어 어느 정도 믿음이 있다 하는 사람들조차도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런 설교를 꺼리기 일쑤다. 내가 잘 아는 한 목사는 그런 식으로 설교하면 교인들이 지루해하고 직접 와서 그렇게 설교하지 말라고 하는 교인들도 있다고 하였다. 하여간 어떻게 저렇게 한결같이 인간중심의 설교를 하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그 중 finale가 있었으니 다음의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로마서 8:37)

목사: 그렇습니다. (전형적인 설교용 관용어… 대체 뭐가 그렇다는 말인지 원) 우리는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청중: 아멘~


솔직히 이 부분에서 나는 예배 중에 손뼉까지 치며 감탄했다. 혹시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예측되는지 모르겠다. 나는 모든 사람이 여기까지 읽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한 번에 알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성경 구절에서 중요한 부분은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는 부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 즉, '예수님으로 말마암아'이다. 극단적으로 그리고 성경적 사실로 말해 우리가 이기고 지고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즉, '이긴다'에 대한 정의를 예수님께서 직접 하시지 않는 한, 당신이 생각하는 '이긴다'는 측면에서는 많은 경우에 성공적이지 않을 소지가 다분하다. 모든 (당신 입장에서의) 실패를 기도부족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아니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겠는가? 우리 측면에서 보자면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실패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그 실패가 고난의 형태로 나타나며, 이런 고난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훈련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시기 때문에 예수님 입장에서는 성공이다. 따라서 '넉넉히 이기느니라'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에 비하면 없어도 되는 구절이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라는 부분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교인들은 감격했고, 나는 놀라웠고. 참으로 놀랍다. 이 한 구절만으로 그 교회의 전반적인 설교스타일을 규정해도 아마 무리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설교스타일을 규정하는 데에도 큰 무리가 없다고 본다. 또한 이것이 한국교회 교인들의 수준을 말해준다. 성경의 인물에는 큰 관심을 보이나, 그 인물들을 조율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는 사실 별 관심이 없다. 아마 당신은 ’나는 아닌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우리는 대부분 ’성경 속 그 사람은 왜 그 순간 그렇게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데에 많은 열정을 쏟는다. 글을 쓰는 나 자신조차도 최근에 와서야 성경에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깨달았다. 항상 내게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가 ’왜 개떡 같은 다윗을 하나님은 사랑하셨는가?’ 이었다. 보면 볼수록 부족한 것 투성이의 다윗인데 말이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내가 그 다윗의 행동 패턴에서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는 패턴이 존재하리라고 나도 모르는 새에 가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알았다고 해도 그렇게 가정하지 않았다고 부정했을 거다.) 우린 모두 죄인인데 말이다. 죄의 경중이 어디 있나? 어차피 우리는 모두 사형수였는데…… 어쨌든 내가 다윗을 싫어하고 그의 행동에서 잘잘못을 따지는 모든 과정의 저변에 깔린 가정은 ’나는 나 스스로 의로워져 하나님이 칭찬하실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겠다'였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나의 시선은 그런 다윗을 참으신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지 않고 다윗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당신도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를 권한다. 당신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사랑의 하나님인지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의 ’알 수 없는 자격 기준'인지.


자 이 글을 통해 당신에게 도전하려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당신은 예수님을 당신의 주인으로, 왕으로, 구주로 믿는가? 아니면, 능력 많으신 분으로서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 드리면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램프의 요정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가?

다르게 표현하자면, 당신은 예수님의 은혜로 자녀가 되었으며 의롭다 칭하심을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이 경우 복의 유무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아니면 당신이 충분히 의로운 일을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을 칭찬하시며 복을 주신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이 두 질문은 서로 같은 선상에 있는 질문조차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 부분을 명확히 모르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이런 식으로 질문하게 되었다.


우리의 생각 속에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인가? '분'이기는 하는가? 혹시 그냥 '여의봉' 정도 아닌가? 어떤 특정 주문을 틀리지 않고 외우면 무엇이든 해 주는 여의봉 아닌가? 그래서 주문을 틀림없이 외우고 외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은 아닌가? 달리 말해 성경 속의 인물들을 통해 그들의 삶을 ’정확하게' 모사함으로써 그들이 받았던 ’복'을 나도 받기 위해 노력하는 중은 아닌가?


문제 제기는 이 정도로 하고, 기드온의 이야기를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해보겠다. 기드온의 인생은 어떻게 보면 밋밋하나, 이야깃거리는 많다. 그러나 다른 면으로 이야깃거리도 생각할 거리도 특별하게 있지 않음을 보이고자 한다.  기드온의 이야기는 사사기 6-8장에 걸쳐서 나온다. 성경의 인물 중에서는 상당히 자세히 기록된 편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그만큼 다룰 주제도 많다. 이 중 몇 가지만 추리면 다음과 같다.

  • 양털로 하나님을 시험함 (사 6:36-40)

  • 하나님께서 32,000명의 군인 중 31,700을 돌려보내고 300명만으로 전쟁을 치르게 하심 (사 7:1-9)
  • 하나님의 뜻을 재확인함 (사 7:10-15)
  • 에브라임과의 갈등 (사 8:1-3)
  • 주변 부족에게 인정받지 못하였고, 그것 때문에 그들에게 복수함 (사 8:4-21)
  • 에봇을 만듦 (사 8:27)

이 주제들을 전부 다 다룰 수는 없고 몇 가지만 다뤄 보도록 하자.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얼핏 극적인 기드온의 삶을 연구하고 그 연구를 통해 우리의 신앙을 발전시키기를 원했던 당신에게 그런 시도 자체가 비신앙적이며, 오히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그 간단한 진리가 무엇인지 전달하고자 한다.


먼저 나는 기드온이 양털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부분에 대하여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한 것이 아니라는 설교를 들은 일이 있다. 역시 상당히 유명한 교회의 유명 목사였다. 여러 권의 저서까지 있는 목사인데 인터넷서점에서 조엘 오스틴의 책과 묶여서 팔리는 책의 저자이다. 물론 대단하다는 뜻이 아니고 그런 목사란 뜻이다. 나와 성향이 비슷한 사람이라면 무슨 소리인지 알 것이다. 분명 본문은 기드온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왜 그런데 굳이 그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싶었을까? 왜냐하면, 기드온은 좋은 사람인데 좋은 사람이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4:12) 참으로 놀랍게도 많은 어른이 어린애들의 흑백논리를 인생의 사명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좋은 사람은 좋은 일만 한다는 유치한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성경을 보는 사람을 나는 거의 보지 못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해 보면, 나도 기드온처럼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시험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 주실 작정이면 이렇게 보여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이루어지나 이루어지지 않나 확인하고 싶은 사람의 마음을 배려(?)한 설교다. '죄의식 갖지 말고 자유롭게 하나님을 시험하세요. 보세요. 착한 기드온도 하나님을 시험했잖아요. 에이~ 기드온이 했으니까 하나님이 허락한 방법이고,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으니까 기드온이 한 시험은 시험이 아니에요. (엥?)' 뭐 이런 내용 아니겠는가?

자 정리하자. 나는 기드온이 하나님을 시험했는지에 대한 진위를 가리고 싶지 않다. 내가 짚고 넘어가고 싶은 사실은 기드온의 행동은 단순히 '사람'의 행동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착한 기드온이 했으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신 방법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래서도 안 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흔히 나오는 반론은 ’그럼 왜 적혀있나?’ 이다. 정말 모르는가? 나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드온을 통하여, 무엇이 됐든 간에 '당신은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수용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약한 사람에게 확신을 주시고자 참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려주고자 하셨다. 즉, 본문은 나에게 나의 하나님은 나의 약함을 외면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보듬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려주고 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기드온의 약점을 아셨다. 약하니 버리시는 하나님이 당신이 믿는 하나님인가? 그렇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부드럽게 관용과 수용으로 참으셨고 결국 기드온이 확신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심지어 하나님을 시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것을 통해 확신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 시험에 응해주셨다. 왜? 기드온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사건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사실이다.


그런데 기드온은 또 한 번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지 못한다. 아마 안절부절못했던 듯하다. 바로 300명만 가지고 전쟁을 해야 하는 그 날 저녁의 일이다. 사사기 7:10-15의 내용인데, 이번에는 하나님이 먼저 기드온의 상태를 아시고 도움을 주신다. 바로 적 진지에 가서 그들이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직접 들을 수 있게 해 주셨다. 자 그러면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 일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두렵고 때로는 불안합니다. 그럴 때에 기드온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께 확신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주십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조금 방향이 빗나가 있다. '나의 불안'을 종식하기 위해 '내가' 구하면 '하나님이' 마술 램프의 지니처럼 평안하게 해준다고 생각한다면 많이 잘못된 접근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녀에게 은혜로 평안을 주신다. 때로는 하나님 입장에서 괘씸하고 또는 틀린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에 비하면 그런 부분은 아무것도 아닐뿐더러 하나님은 그 사랑으로 우리를 도와주신다. 약간 미묘한 부분이 있음을 인정한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하나님을 생각하라'이다. 내가 주체가 되어 문제를 파악하고 구하고 등등을 할 때에 반응하는 마술 램프가 아니고 하나님은 미리 다 아시고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시는 분임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유치한 이야기를 하자면, 하나님은 로봇이 아니고 주체적으로 활동하시는 분이며, 심지어 그분은 전지전능하시다. 따라서 우리의 행동이 input이 되어 output을 내놓는 존재가 아니다. 제발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신다.


300명을 선택하는 과정을 보자. 하나님께서 혀로 핥는 사람과 무릎을 꿇고 마시는 사람 중에 혀로 핥는 사람 300만 가지고 전쟁하라고 하셨다. 이 부분을 가지고 ‘왜 그들을 택했는가?' 즉, 그 300명이 선택된 이유를 찾고 그러함으로 우리도 그 300명에 속하기 원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았고 이에 대한 설교도 상당히 많다. 당장 '기드온의 용사 300'으로 검색만 해 봐도 많은 설교를 찾을 수 있다. 대부분 '그들의 순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대승을 이끌었다.' 또는 '혀로 핥는 자가 무릎을 꿇는 자에 비해 하나님 앞에 옳은 이유'에 관한 설교들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당신은 그렇게 당신이 복 받을 만한 이유가 있기를 바라고 복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가? 나중에 이것만 가지고 글을 하나 더 쓸 생각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당신은 복을 받는 어떤 공식을 원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복을 받고 저렇게 하면 저주를 받고 하는 식의 깔끔한 공식을 원하는 당신을 당신 스스로 깨닫고 인정해야 한다. 그런 공식을 원하는 이유는 바로 그래야 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의를 자랑해야 한다. 흔히 자기 의를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데, 만약 당신이 복 받을 만해서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는다면 나의 의를 자랑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여하간 그냥 기술적으로 말해도 만약 혀로 핥는 자가 무릎을 꿇는 자에 비하여 장점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애초에 혀로 핥는 자를 데리고 전쟁을 하라고 하셨어야 하고 심지어 그들을 선택한 이유도 말씀해 주셨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나누라고 한 다음에야 이유도 말씀하시지 않은 채 한쪽을 택하셨다. 사람들이 흔히 성경이 어렵다고 하고 왜 하나님께서 깔끔하게 이유를 말씀해 주시지 않나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잘못된 질문을 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어떤 면에서 쉽고 모든 이유가 적혀 있다. 하나님은 우리하고 수수께끼 놀이를 하지 않으신다. '왜 물을 핥는 사람들만 데리고 가셨지?'라고 질문을 하니까 대답을 찾지 못하고 헛소리를 하게 된다. '왜 300명만 데리고 가셨지?'라고 질문하면 대답이 7:2절에 '스스로 자랑'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나온다. 이것으로 끝이다. 더 좋지 않은 질문은 ’선택된 300명은 하나님이 데려가실만한 어떤 조건을 충족했을까?’라는 질문이다. 당신은 어떻게든 그들이 나머지 31,700명보다 그들이 더 나은 이유를 찾고 싶을 것이다. 그래야 당신이 노력해서 300명 안에 들 수 있을 테니까. 이유가 없다면 당신은 갈 길을 잃은 나그네처럼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 빠질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하나님을 요구조건을 충족시켜드리면 그에 대한 반대급부를 제공해 주는 자판기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세하고도 정확한 사용 설명서를 원하고, 그 사용설명서가 바로 성경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유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 얼핏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그런 부분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당신이 잘못된 질문을 이용하여 성경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 다 같은 사람이다. 우리가 잘나서 사용하시고 못나서 사용하시지 않는 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 아니신 셈이 된다. 돌들로도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 수않 있는 분이 하나님이다. (마태복음 3:9) 당신이 특별히 잘나서 특별히 사용되기를 바라지 마라. 정말 지긋지긋한 기도문구 중의 하나가 ’특별한 종 누구누구를 특별하게 사용하시어’로 시작되는 기도이다. 누가 대체 하나님앞에 특별한 조건을 갖추어서 특별히 사용될 수 있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어떤 일을 맡길 지는 하나님이 결정하실 일이다.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우리가 아무 능력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작정하시면 특별하게 사용하실 수 있다. 어쨌든 하나님이 없어도 되는 의인이 요즘 세상에는 너무 많다. 또는 하나님을 한낱 램프의 지니 정도로 격하시키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다시 말해, 300명만 선택하신 이유는 전쟁은 하나님께서 하시고 우리는 지켜볼 뿐이라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그 300명이 전부 일당백이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에 적합한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다. 더구나 자세히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후 나머지 병력도 어떤 형태로는 사용된다. 자꾸 당신 입장에서 당신의 복 받을 수 있는 행동강령을 만들기 위해 성경을 보고 질문하지 마라. 그냥 하나님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보기를 권한다. 사람들의 행동과 모습에 관심을 가져봐야 그건 헛짓이다.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에 대한 관심과 사랑만 보면 되고 그래야만 한다. 성경의 주인공은 철저히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시다.


에봇에 대한 것은 다른 글로 넘기도록 하자. (2013/09/04 - [Bible Stories] - 왜 믿음은 대물림되지 않을까?)



의 예를 통해 내가 하고자 했던 말은 이것이다. 성경을 인간입장에서 보지 마라. 하나님을, 예수님을 여의봉으로, 부적으로 만들지 마라. 내가 이렇게 하면 저렇게 반응하시고 내가 저렇게 하면 이렇게 반응하시는 자판기 속의 하나님으로 만들지 말라는 말이다. 자꾸 복 받은 사람의 행동에서 복 받을만한 행동패턴을 찾으려고 하는데, 그런 접근은 완전히 잘못된 방식이다. 물론 그래야 속이 편해지는 당신에 대해 나는 이해한다. 나도 그런 인간이니까. 뭔가 확실하면 편하겠지, 불확실은 불안을 부르니까.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보며 ‘간음하면 저주받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간음한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당혹해하는 당신을 나는 이해한다. 그리고 ‘그건 아마 간음이 아닐 거야 그리고 그런 증거가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싶은 당신의 마음도 이해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거 뭐야 이상하잖아.'라는 생각이 절로 들면서 불안해지는 당신의 마음을 이해한다. 우리는 단단한 땅을 원하니까. 이리저리 모양을 바꾸는 땅은 원치 않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 맘이나 편하자고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믿는 것이다. 당신 발밑의 땅을 단단하게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 있으면 가장 단단한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을 받혀 줄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그리고 그 복은 하나님이 정하신다. 복 받을 만해서 복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로 하셨기 때문에 복을 받는 것이다. 이 관계를 이상하게 꼬지 말자. 당신은 하나님을 그리고 예수님을 당신의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가? 그럼 됐다. 그럼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고, 모든 복에 복으로 넘치게 주실 것이다.


앞 에서 말했다시피 기드온의 삶은 일면 극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야깃거리도 많아 보인다. 그러나 사실상 간단한 메시지가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사랑하셨고 모든 면에서 기드온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보이셨다. 이것으로 끝이다.


여기에서 글을 끝맺어야 하는 줄 알고 있지만, 노파심에서 한마디만 더 해 보도록 하겠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다윗이 바로 이런 관계를 정확히 알고 그에 대해 고백하는 부분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무엘하 7:2-3에서 다윗은 자신은 백향목 궁에 사는데 하나님은 장막에 사는 것이 마음이 쓰여서 나단 선지자에서 성전건축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이 부분이 참 재미있는데 아주 전형적인 열심 있는 집사 또는 장로와 목회자 간의 대화와 같다. 예를 들어 집사가 와서 ”제가 이번에 교회에 주차장을 봉헌했으면 합니다.” 목사가 화답하길 ”집사님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하나님께서 복에 복으로 갚으실 겁니다. 그 마음의 원함도 하나님께서 주셨을 거에요.” 이런 식의 대화인 셈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고 느닷없이 약속하기 시작하신다. 물론 역대상 22:8절에서는 그 이유를 말씀하신다. 따라서 다윗은 이유를 듣긴 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갑자기 약속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부분을 보면 재미있는 대구가 있다. 하나님의 집을 지어드리겠다는 다윗의 말에 대구를 이뤄서 하나님께서 사무엘하 7:11에서 당신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어 주시겠다고 하신다. 즉, 내가 이전에도 한 번 정도 언급했다시피 공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지 우리가 아니다. 가끔 크나큰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의 존재 이유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기 위함이라는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 않다. 여하간 이에 대한 다윗의 다음 고백을 보자.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주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있을 먼 장래의 일까지도 말씀하셨나이다 주 여호와여 이것이 사람의 법이니이다. 주 여호와는 주의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 그런즉 주 여호와여 이러므로 주는 위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신이 없음이니이다. (사무엘하 7:18-22)

다윗은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그 약속이 자기가 잘해서 또는 ”집 지어 드릴게요"라는 말이 기특해서가 아님을 알고 있다. 다윗은 철저하게 자기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있다. 다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시사 이 모든 것을 해 주심을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해 여러 번 ”사람이 무엇인관대"로 시작하는 고백을 하게 된다. (시 8:4, 144:3) 나는 종종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나?’ 하는, 마치 다윗이 복 받을 이유를 가지고 있어서 복을 받았다는 식의, 이제까지 내가 했던 말에 따르면 헛생각을 할 때가 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였고, 하나님의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으며 (베드로전서 4:8) 하나님의 사랑은 다함이 없다. (예레미야 애가 3:22)


물론 신앙의 선배들에게 배울 것이 있다면 배우자. 그것을 틀렸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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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