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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5. 02:24

왜 믿음은 대물림되지 않을까? Bible Stories2013. 9. 5. 02:24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일 중의 하나가 '왜 신앙은 대물림되지 않는가?'였다. 물론 신앙은 개인적이므로, 아버지가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를 한다고 해서 그 교제관계를 아들에게 물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고, 따라서 신앙이 무슨 유산 물려주듯이 대물림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신앙적으로 본받을 부분이 많은 사람의 자식이 오히려 그렇지 않은 자식보다 더 개차반인 경우가 많기에 이런 질문을 해 보게 되었다.


일단 이 정도 시점에서 용어정리를 하고 가자.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믿음은 물건이 아니므로 원래 대물림되지 않는다. 따라서 아예 말을 바꿔야 한다. 왜 하나님 자녀의 삶을 또는 예수님 제자의 삶을 대대로 영위하지 못하는가? 왜 부모의 신앙인으로 사는 삶의 모습에서 자식들은 배우지 못할까? 간단하게 그 부모가 신앙인의 모습으로 제대로 살지 않아서라고 답하지 마라.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성경에서 부모와 자식이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산 예를 찾기는 매우 힘들다. 그래서 나는 아무리 대단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조차 (이 말도 사실 틀린 말이다. 대단한 믿음이라니... 그러나 뭐 다르게 표현해도 그 나름대로 틀린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냥 사용하도록 하자.) 그 신앙인의 모습을 노년까지 길게 지켜나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예를 들어, 노아는 신앙인으로서 충분히 잘 살았는데 노년에 가서 술 마시고 추태를 부리기 (창세기 9:21) 시작했으며, 아브라함도 노년에 가서 그두라를 (창세기 25:1) 첩으로 맞아 사는 등 별로 아름답지 못했고 등등. (그두라가 하갈이라는 전승은 접어두자.) 이런 식으로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런 모습 속에서 일찍 죽는 것이 복이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사사기에서 기드온에 대해 읽다가 어느 정도 그 이유에 대한 다른 방향에서의 힌트를 얻게 되었다. 먼저 본문을 보자.

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하는지라.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 기드온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요청할 일이 있으니 너희는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내게 줄지니라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마엘 사람들이므로 금 귀고리가 있었음이라.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가 즐거이 드리리이다 하고 겉옷을 펴고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그 가운데에 던지니, 기드온이 요청한 금 귀고리의 무게가 금 천칠백 세겔이요 그 외에 또 초승달 장식들과 패물과 미디안 왕들이 입었던 자색 의복과 또 그 외에 그들의 낙타 목에 둘렀던 사슬이 있었더라.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니라. (사사기 8:22-27)

기드온은 이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금을 달라고 하여 그것으로 에봇을 만들고, 온 이스라엘이 그 에봇을 음란하게 사용하여 결국 기드온 집의 올무가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먼저 하나의 가설을 제외하는 작업을 해보자. 기드온이 잘못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을까? 우선 기드온은 믿음의 가정에서 자란 듯하다. 기드온이 '여룹바알'로 불리게 된 과정에서 바알의 제단을 헐고 아세라 나무를 파괴하게 되는데, 이 문제 때문에 성읍 사람들이 몰려온다. 그리고 그들에게 기드온이 아닌 그의 아버지 요아스가 앞장서서 한마디를 하는데 다음과 같다.

요아스가 자기를 둘러선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 하니라. (사사기 6:31)

이로 보아, 요아스도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이었고, 바알과 아세라를 우상으로 인식하던 사람이었다. 따라서 기드온은 믿음의 가정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물론 당시의 상황상 말씀을 가까이 접하고 진리를 접할 기회는 많지 않았겠지만, 적어도 올바른 방향성은 가지고 있었으리라 보이며, 최선을 다해 진리를 찾으려 노력하던 사람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요아스와 기드온은 믿음의 모습을 공유했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특히 백성의 왕이되어 달라는 요청에 대하여 (물론 명확히 그렇게 나오지는 않았지만, 22절에서 대대로 다스려 달라는 요청은 바로 왕이 되어 달라는 요청과 다름이 없다.) 기드온은 그럴 수 없다고 답하면서 하나님께서 다스려야 한다는 뜻을 전달한다. 따라서 기드온은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기드온이 믿음이 없어서 에봇을 만들고 그것이 올무가 되었다는 식의 해석은 옳지 못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왜 그렇게 하였을까? 먼저 에봇이 무엇인지 짚고 넘어가자. 에봇은 제사장이 제사의식에서 입도록 고안된 옷으로서 모세가 하나님께 그 식양을 받아서 제작한 옷이다 (출애굽기 28장). 그런데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 에봇에 우림과 둠밈이 들어가 있는 판결 흉패를 착용하게 되어 있다. (출애굽기 28:30). 지금에 와서는 이 우림과 둠밈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방법이 없다. 그러나 느헤미야 7:65에서 족보에 이름이 기록되어있지 않은 레위인들에게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나타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고 한 것으로 보아, 우림과 둠밈이 어떤 사안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도구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림과 둠밈이 점괘를 알아보는 도구였을 거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 여기에서부터는 나의 상상력이 약간 들어간다. 나는 기드온이 에봇을 만들었다고 할 때에는 당연히 우림과 둠밈까지 만들었다고 본다. 겨우 옷이나 만들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더구나 금을 모아서 에봇을 만들었다면 당연히 판결흉패와 우림과 둠밈까지 만들었다고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기드온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도구를 만들고자 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그렇다고 확신한다.


그러면 기드온은 왜 하나님의 뜻을 아는 도구가 필요했을까? 그는 이미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경험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굳이 도구가 필요했을까? 나는 여기에서 왜 믿음의 삶이 대대로 이어지지 않는지에 대한 힌트를 발견했다.


기드온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경험했다. 그리고 그 교제를 통해 참 평안을 경험하고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이어질 생각은 무엇일까? 나는 그가 자식들에게도 같은 경험을 물려주고 싶어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개인적인 경험을 전달하면서, 그 모호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을 테고, 그것을 구체화하는 방법으로 에봇을 택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자녀들은 그 에봇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고 '음란하게 위했다.'라고 나온다. 즉,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면 그 에봇을 우상으로 섬겼다는 뜻이다.


이제 내 생각을 일반화시켜 보겠다. 어차피 의견이므로 동의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흔히 나의 신앙을 남에게 전달할 때 범하는 실수는 '신앙의 구체화'이다. 하나님은 광대하신데, 내가 경험한 하나님은 구체화한 하나님으로서 그 광대한 하나님의 부분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말하는 것이 틀린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가 경험한 수준에서는 옳다. 그런데 그것을 전달하면서 그리고 받아들이면서 오류가 발생할 여지가 크다. 우선 전달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마치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이 하나님의 전부인 양 전달할 수 있다. 많은 간증자에게서 발견되는 태도인데,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분입니다.'라고 딱 잘라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참 많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는 진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필요할 때에 기도하면 기가 막히게 들어주시는 분입니다.'라고 하면 그것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 하나님의 본질적인 특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결정에 의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철수는 사람입니다.'는 사실일 수 있으나, '철수는 햄을 좋아합니다.'는 틀릴 가능성이 아주 크다. 그냥 철수가 햄을 먹는 것을 보고 한 말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달하는 자의 하나님에 관한 규정이 그 자신에게 적용하기에는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라는 태도로 전달한다면 틀린 전달이다.

반대로 듣는 사람에게 있어서 전달되는 내용이 하나님에 대한 완벽한 정의라고 믿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많은 선교사의 간증 책을 보면, 어떤 돈이 필요한데 아슬아슬한 시간에 정확히 그 금액을 생기는 이야기가 생각외로 많다. 그러면서 '맞아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정확히 아시고 그것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절대 하나님의 방법이 내가 원하는 방법과 다를지도 모른다는 믿음 없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채워주셔.'라고 받아들이고 그렇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경우가 많다. 그 선교사가 처한 상황 고난 기다림 등등은 전부 무시하고 '필요한 돈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마음대로 일반화시켜 버리고 그렇게 해 주시기를 기대한다면, 그것 역시 틀린 접근이다.


이런 일이 부모와 자식 간에도 일어난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자녀에게 전달하는데, 부모 자녀의 특성상 위의 전달자가 범할 수 있는 실수를 범치 않더라도 받아들이는 자녀 입장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부모가 전달한 그대로 그려버릴 가능성이 크다. 그러다 보니 부모는 광대한 하나님을 통해 부분을 경험하는 복을 누렸는데, 자녀는 아예 출발을 부분으로부터 하다 보니 제약사항이 너무 크고, 그러다 보니 오히려 신앙 좋은 부모 밑의 자녀가 방황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발견하기가 너무 어렵다. 하늘을 자유로이 쳐다봐야 어느 정도 가능성이라도 있을 텐데, 우물 바닥에 앉아서 보이는 작은 하늘에서 무언가를 찾으려고 하니까 훨씬 어려운 길을 가게 된다. 그 자녀가 올바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하나님에 대한 구체화 된 이미지를 깨는 작업을 먼저 해야 하므로 오히려 아무 사전 지식 없이 전도 받아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에 비해 신앙성장이 더딘 경우가 많다. 모태 신자를 '못된 신자', '못해 신자'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한국교회에서 광범위한 문제가 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과거 엄청난 부흥을 경험했다. 전후 우리 부모들은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서 시작하여 일어났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신앙의 힘은 엄청났다. 그런데 현대 기독교는 내적으로 외적으로 그리고 신앙적으로 침체기에 빠져있다.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라는 말이 이처럼 잘 들어맞는 교회가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우리 부모가 죄다 잘못 믿어서? 기복신앙이어서? 가짜라서? 전부 맞는 말일 수도 있고 전부 틀린 말일 수도 있다. 하긴 우리 부모 세대와 이야기를 해 보면 기복적인 면이 상당히 강하고, 내가 여차저차 하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해 주셨다는 말을 많이 하긴 한다. 말로는 하나님이 해 주셨다고 하나, 듣다 보면 자기가 잘했다고 자랑하는 수준에서 머무는 경우를 참으로 많이 보아왔다. 그래서? 그럼 그들이 틀린 것인가?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나는 그 세대에 필요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나는 바르다고 이야기할 자신도 없고 틀렸다고 말할 자신도 없지만, 그 세대는 그냥 그랬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문제는 그 부흥기의 세대가 그 자녀 세대에게 '하나님은 이런 분이야.'라는 그림을 너무 많이 너무 구체적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은 특정 시대에 필요한 하나님의 부분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에 하나님의 아주 아주 작은 부분만 경험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그림을 자녀들에게 전달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응답받는 기도법', '이렇게 기도하니까 들어주셨어요.' 등등의 책이 엄청나게 많은 시대이다. (물론 나는 이런 책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검색도 해보지 않았으나, 장담한다. 이런 책 분명히 있다. 그리고 종류도 다양할 것이다.) 쓰는 사람들은 그들의 책이 신앙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결국 그것은 기드온의 에봇이 되어 올무가 될 뿐이다.


그리고 나는 이 부분을 다윗과 솔로몬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부모와 자식 간의 믿음의 모습이 이처럼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경우도 성경에 그렇게 많지 않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으나, 솔로몬은 왕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죄다 저지르고 (신명기 17:16-17, 열왕기상 10:26-27, 11:1) 급기야 하나님께서 '다윗의 얼굴을 봐서 참는다.'라는 말씀까지 하신다. (열왕기상 11:9-13) 솔로몬이 잘못한 부분을 전부 다루기는 분량상 불가능하고, 한 가지만 다루어보자.


솔로몬은 후궁이 700명이고 첩이 300명이었다. (열왕기상 11:3) 세금 문제, 우상숭배문제, 제판권 등등 잘못한 부분을 말하자면 끝이 없으나, 어떤 면에서 솔로몬의 잘못 중 많은 부분이 1,000명에 달하는 여자들과 연결되어있고, 적어도 죄의 원인상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 모든 것을 그의 아비인 다윗에게 배웠다고 생각한다. 솔로몬이 이렇게 많은 부인을 둔 이유는 당연히 주변국과의 혼인을 통해 왕국의 안정을 꾀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을 제일 처음 시도한 사람은 다윗이다. 다윗 역시 여러 여자와 결혼을 했는데, 그중에는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라는 이방 여인도 있다. 일견하여 보기에 이방 여인은 하나밖에 없는 듯이 보인다. 어쨌든 한명이든 100명이든 이방 나라 왕의 딸과 결혼하여 왕국의 안정을 꾀한 예를 만든 것은 확실하다.


자 그런데 문제는 솔로몬에게 인식되는 다윗에게 있다. 다윗이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께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불렸던 사람이다. 돌멩이 하나로 이름난 전사인 골리앗을 죽인 영웅이었다. 주변의 다윗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을지 보지 않고도 알만하다. 다윗이 솔로몬을 개인적으로 교육했었는지는 불명확하다. 물론 역대상 28장에 기록된 바를 통해 적어도 몇 번은 다윗이 솔로몬에게 성전 건축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하여 충고를 하긴 했었던 것 같지만, 아도니아가 칭왕을 감히 감행했던 것으로 보아, 다윗이 솔로몬의 입지를 확고히 다져주지 않았던 것은 확실하다. (열왕기상 1장) 다시 말해, 다윗이 솔로몬을 더 자주 보고 가르치고 하는 등의 개인적 교제를 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솔로몬은 어렸을 때부터 아비 다윗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었을 것이고, 대부분 좋은 이야기들이었을 것이다. "네 아버지 다윗은 대단한 사람이야. 하나님의 사람이지. 여호와께 사랑받는 사람이야." 이런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들었겠는가? 그렇다고 하면, 솔로몬 입장에서 다윗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했겠는가? 나는 추측하기를 모든 다윗의 행동이 하나님께 인정받은 행동이었다고 해석했을 가능성이 있다. 마치 현대 교인들이 '착한' 사람의 모든 행동이 '착하리라'고 생각하듯이 말이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했으니까, 다윗이 그렇게 했으니까 그것은 옳은 거야."라고 말하는 경우를 우리는 심심치 않게 만나며,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판단의 기준이 소위 그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사람들이 '비슷한 경우 어떻게 하였는가?'가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이미 앞의 글에서 말한 바와 같이 (2013/09/03 - [Opinion] - 착각하고 있는 많은 기독교인에게 고하여),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경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어떻게 사랑하셨는가가 중요하다.) 따라서 솔로몬은 아마 다윗의 행동에서 하나님을 규정하고 행동강령을 만들었으며, 그대로 따라 하려고, 또한 발전시키려고 노력하였을 수 있다. 그 결과 중의 하나가 1,000명에 달하는 여인들이었고, 나라의 안정을 위한 성읍건설이었으며, 화려한 성전과 그에 걸맞는 왕궁 건설 등등이었다고 생각한다.

즉, 이 경우 다윗이 솔로몬에게 구체화한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전달하지는 않았으나, 솔로몬이 알아서 '다윗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을 구체화 시켰다.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 '성경을 통해' 인간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을 통해 하나님을 또는 성경을 이해해서는 안된다.)

솔로몬의 통치는 성전건축으로부터 시작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을 찾으면서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정말 중요하고도 이 글을 통해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일이 일어난다.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으나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열왕기상 3:3-4)

본문은 솔로몬의 문제점에 대해서 분명하게 지적하기를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고 한다. 열왕기에서 산당을 훼파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왕이 반드시 거쳐 가는 행사였다. 즉, 하나님은 산당제사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솔로몬이 산당에서 제사하는 이유를 '여호와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더군다나 뒤에 기브온에서 일천 번제를 드리는데 그 이유로 기브온의 산당이 크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눈에 보이는 성스러워 보이고 웅장하고 대단한 어떤 것이 그에게 필요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 듯하다. 그러면 기브온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기브온 산당에는 모세가 만들었던 성막과 번제단이 있었다. (역대상 21:29) 그리고 다윗도 절대 이 성막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역대상 16:39에 보면 사독에게 기브온 산당을 맡기고 거기에서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그런데 솔로몬이 거기에서 제사를 드린 이유는 조금 세속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거기에서 제사를 드린 이유를 열왕기 기자가 규정하기를 '커서'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미 하나님의 법궤는 다윗이 다윗성에 가져다 놓은 상태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은 법궤 위 두 그룹의 날개 사이인 속죄소에 임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사실 법궤가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이라고 해석해도 무관하다 (구약의 입장에서, 우리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특정 장소에만 임한다고 믿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휘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아무 때나 들어오지 말라 그리하여 죽지 않도록 하라 이는 내가 구름 가운데에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레위기 16:2)

그런데도 솔로몬이 기브온으로 간 이유는 바로 그곳에 아버지 다윗보다 더 위대한 모세가 만든 성막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도 대단하지만 모세는 더 대단하므로 거기에서 제사를 드려야 제사빨이 더 좋을 거로 생각했을 수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솔로몬은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고, 여호와를 사랑하였으나, 다윗이 만들어 놓은, 모세가 만들어 놓은 구체화한 하나님의 틀 안에 갇혀 있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유형화된 것들에 기대어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시도하였다. 물론 초반에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찾아와 주셨지만, 솔로몬은 점점 더 하나님을 만나기 힘든 모양새로 변해갔을 거고, 그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는 점점 더 소원해 졌다고 생각된다.


결론을 말하자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확인하는 것 이상을 누군가의 고백 속에서 찾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구체화 시켜서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억지로 전달하려고 하는데, 오히려 그렇게 하지 말아야 전달이 된다. 하나님을 구체화 시켜 버리면 그걸 듣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험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괜히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때에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베드로전서 3:15)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듣는 사람의 태도가 더 중요하다. 말하는 사람의 태도를 먼저 말한 이유는 그들이 더 성숙한 사람이라는 가정 때문일 뿐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구체화 시키는 것이 옳지 못하다손 치더라도 우리가 인간인 한, 우리 입에서 나오는 모든 하나님에 대한 묘사는 구체화의 한 과정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이 하나도 필요 없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타인이 경험한 하나님을 공유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많은 위로를 받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글이든 말이든 심지어 성경도 하나님의 일부분만을 묘사할 뿐이다. 모든 부분을 입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변화되기 전의 인간은 갖고 있지 않다. 모든 정보는 부분적이다. 그렇다고 그 모든 부분을 없앨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음을 우린 모두 알고 있다. 우리는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 하나님 앞으로 오기 때문이다. (전도를 '미련한 것'이라고 규정하는 그 의미도 생각해볼 만 하며, 시사하는 바가 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린도전서 1:21)

따라서 듣는 사람의 태도가 사실은 더 중요하다. 불완전한 틀 속에 자신을 가두지 말아야 한다. 그 틀의 도움은 받되 그 틀 속에 갇히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안에서 하나님을 예수님을 발견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에게 위로는 하나님의 사랑, 그것 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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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나를 오랫동안 괴롭혀온 주제가 있다. 나는 성경을 읽고 있고, 어떤 경우 남보다 성경에 대해 더 자세히 아는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성경을 읽는 이유는 성경 읽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깨달음이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더라는 사실이다. 솔직히 말해 나의 삶도 별로 변화시키지 못하였다. 왜 나의 깨달음에는 능력이 없을까... 이에 대해 정말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해 왔다. "네가 네 형제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야." "넌 진정으로 하나님을 주로 모시지 않고 있어. 그게 바로 이유야."라는 정답들은 나에게 별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에 내가 맡은 소그룹 멤버들이 반기를 드는 사건이 터졌다. 모임에서 성경공부만 하는 데에 대한 반감과 함께, 너무 강압적으로 가르치는 나의 태도가 어우러져 복잡한 그러나 어찌 보면 간단한 이유로 터진 사건이었다. 나는 속이 좁아서 상당히 짜증이 났었다. 그러면서도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부족한 부분과 문제점에 대해서 알려주시리라 믿고 계속 성경을 읽어 나갔다. 역시 약 2주 만에 해답을 얻게 되었다. 그 과정이 약간은 지루할 수 있으나, 여기에 그 전체 이야기를 적어볼까 한다. 원래 이 블로그가 누가 읽어주길 바란다기보다 내가 내 생각을 기록하는 목적을 하고 있으므로 블로그 본래의 목적에 합하는 글이긴 하다.


사건이 터진 그 주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겠다. 다음 말씀해석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누가복음 9:5)

나는 복음을 구걸하듯이 전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가진 귀한 것을 제발 받아달라고 사정하며 베풀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비단 비신자들에게만 적용되지 않고 신자들 사이에서도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실 위의 말씀은 제자들을 이스라엘 내에서 파송하시면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성도 간의 문제에 대한 문제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맞다.) 어떤 모임이든 모임에 부담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모임에 잘 참석도 하지 않고 그러면서 자기에게 관심을 두기를 바라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보통은 이런 사람들을 '약하다'라고 하며 어떻게든 모임에 참석시키려고 노력한다. 물론 그 노력하는 사람들은 형제애를 실천 중이다. 그러므로 옳으며 칭찬받아야 한다. 그러나 같은 '형제'로 불리면서 모임에 부담을 주는 그 행동을 하는 그 사람은 분명 죄성을 발휘하는 중이다. 그러므로 그 스스로는 자신에 대해 반성할 줄 알아야 하며, 어떤 경우에 단호한 조치가 필요할 수 있다. '약하여 돌봐야 하는 사람'에 해당하는 그 사람이 만약 '나는 지금 힘드니까 너희는 나를 돌봐야 해. 나에게 관심을 둬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난 상처받아버릴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런 과정을 통해 그 사람에게 회복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복음에 대해 '내가 교회에 다녀 주마. 내가 모임에 참석해 주마. 내가 말씀을 들어 주마'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오히려 모임에서 내치는 것이 그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14-15)

이 말씀에서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을 '왕따' 시키라고 바울이 말하고 있다. 이 역시 교회 안에서 벌어졌던 일이므로 위의 예수님의 말씀과 연관 지어서 생각하는 데에 큰 무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동시에 '형제같이 권면'하라고 한다. 무슨 뜻이겠는가? 바로 그 '제외함'이 그의 회복을 위함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복음을 복음으로 받지 않고 마치 크게 선심 써서 들어주는 양 대하는 사람은 사실 떨어버리는 것이 그를 위한 조치일 수 있다. 물론 방법상의 어려움과 지혜로운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넘어가자. 너무 어려운 문제이다.


이런 의도로 말을 했었는데, 모임 중에 한 사람이 그에 대해 발끈했다. 그 사람을 지목하여 말한 것도 아니고 내가 위에서 말한 내용과 그 사람이 밀접히 관계된 경우도 아니었는데 그 사람이 한동안 모임에 나오지 않다 보니 그 말씀해석이 마음에 걸렸나 보다. 더구나 나 외에 다른 사람들도 그 사람을 나오게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는데 내가 그렇게 말해 버리니 좀 민망했었나 보다. 그러다 보니 일대 다로 다소간 언쟁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그 말을 할 때에 그런 소란이 일어날 수 있으리라고 미리 알았다는 사실이고, 그냥 예상대로 그런 결과가 나왔을 뿐이다. 그러면 내가 지혜롭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야 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말씀이 그렇게 적혀있고, 내가 그렇게 깨달았다면 내 신앙 양심상 다르게 전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이 생각은 어느 정도 강력한 근거가 있다.


우리 소그룹 모임에서는 한 가정씩 돌아가며 QT 나눔을 하는 시간을 가진다. 마침 그날이 내 차례여서 준비했던 말씀이 예레미야서의 6~8장이었다. 물론 소란때문에 나누지 못하였다.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6:13-15)

당시 유다의 부패상이 1~6장에 걸쳐서 나오고 있다. 그리고 그 부패의 결과로 그들은 멸망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평강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럼 당신 주변은 어떤가? 그리고 당신은 어떤가? 멸망에 대해 선포하는 목회자를 좋아하는가? 더구나 당신은 잘못에 대해 넘어가지 않고 지적하는 편인가? 나는 감히 말하건대, 현대 교회에서는 회복의 말씀만 흘러나온다고 생각한다. 눈을 들어 주변을 돌아보면 불합리한 것 투성이인데, 회복과 평안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당시와 오늘은 비슷한 부분이 참으로 많다. 그다음으로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을 할지라도 그들이 너에게 순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네가 그들을 불러도 그들이 네게 대답하지 아니하리니,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는 민족이라 진실이 없어져 너희 입에서 끊어졌다 할지니라. (예레미야 7:27-28)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길, 네가 선포해봐야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도 말하라고 하신다. 나는 이 부분을 나에게 적용하고 싶었다. 듣든 듣지 않든 현재 내가 깨달은 말씀은 말씀 그대로 전해야 하는 것이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였다. 말씀이 또 이어진다.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즉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악을 뉘우쳐서 내가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 전쟁터로 향하여 달리는 말 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느냐 참으로 서기관의 거짓의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며 두려워 떨다가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 (예레미야 8:6-9)

가르치는 자는 정직을 말하지 않고,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모른다. 더구나 그 백성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지혜가 있고"라고 한다. 나는 이 말을 실제로 우리 교회 집사에게서 들은 일이 있다. 그 분이 말씀하시기를 "저는 구원받을만큼의 지식은 이미 알고 있는데 성경을 굳이 읽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라고 하였다. 실제로 많은 교인들이 자신들이 성경을 모르는 데에는 동의하나 구원받을 만큼은 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다 그렇지 않다를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현상 자체로 봐서는 이 구절에서 말하는 문제점이 현대교회의 문제점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정직을 말하기로 정직히 말하기로 작정하였고, 멤버들에게 여호와의 규례를 가르치기로 작정하고 모임에 참석했었다.


따라서 당연히 예상되는 반발을 무시하고 말을 하게 되었고, 반발이 일어났다. 물론 그 반발의 중심에는 나의 조심 없는 언행과 너무 힘든 성경공부 그리고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하는 데에 대한 불만 등이 복합되어 있으나, 표면적으로는 위의 이유로 반발이 일어났고, 그에 대해 상당히 오랜 시간 이야기를 하였다. 여하간 당일은 잘 마무리가 되는 듯싶었다. 나는 말을 좀 줄이기로 하였고, 멤버들의 상태를 조금 더 이해해주기로 하였으며, 멤버들은 성경공부 내용을 미리 조금이라도 생각해보고 오기로 하였다. 그래서, 바로 다음날 정도에 그 주에 할 성경공부 교재를 미리 편집하고 문제마다 약간씩 생각할 문제를 달아서 전해 주었다. 당시 생각할 문제를 달면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대부분이 예습해 오지 않을 것이며, 혹시 예습한다 하더라도 오기 직전 1분 또는 5분 전에 한번 읽어만 볼 것이다. 또는 차 안에서 잠깐 훑어보기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생각을 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그냥 읽기만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생각할 거리를 생각할 수 있도록 가이드를 해 주어야겠다. 이런 생각으로 적었던 생각할 문제들이 다시 멤버들에게 부담으로 비쳤었나 보다. 특히나 혹시 더 깊은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을 위해 팁을 몇 개 적었었는데 그것들을 죄다 공부해 오라는 것으로 오해하여 더 큰 소동이 내부적으로 있었던 것 같다. 급기야 그들이 내 아내를 불러서 그런 불만을 이야기하였고, 아내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그런 의도가 아니라고 변명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부분에서 내가 폭발하게 되었다. 나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 상관 없다. 그런데 아내를 불러서 했다. 더구나 아내가 사과와 변명을 하게 되었다. 이 부분이 나를 폭발하게 하였다. 정말 분노하였고 다 관두자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나의 분노는 분노고 나는 한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나의 분노의 중심에는 어떤 진리나 하나님의 명령 또는 성경이론이 있지 않고 나의 속 좁음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내 심정은 "내 속좁음이던 뭐던 간에 내가 이 사람들과 다시는 성경공부를 하지 않겠다."였다. 그러면서 계속 성경을 읽어 나갔다. 이런 때 항상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게 무언가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기대하고 성경을 읽게 되었다.


그런데 말씀을 통해서 나의 문제점을 보여주시지 않는 듯이 보였다. 다음의 말씀은 아내 사건이 터졌던 그날 아침에 읽었던 말씀이다.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에스겔 3:5-7)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불신자는 네 말을 들을지 몰라도 네 주변에 있는 성도들은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선포하라고 하신다.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에스겔 3:11)

그러면서 최종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이다.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니라. (에스겔 3:27하반)

내가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심지어 언급하지 않은 중간에는 그 유명한 파수꾼 비유와 겔3:26~27에는 징계의 방법으로 선지자의 입을 봉하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즉,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재앙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선포하지 않은 파수꾼에게 그 피 값을 찾을 것이라 말씀하신다. 나는 성경에 상대방이 듣기 쉽게 말하면 하나님 말씀이 더 잘 전해진다는 말씀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듣든지 아니 듣든지" 또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리라" 등등의 말씀이 많다는 것은 안다. 그리고 그 말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듣지 않고의 책임이 전하는 자에게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전하는 자는 전하는 방식이 어떻든 간에 전하는 책임만 하면 되고 그 말씀을 듣고 듣지 않고는 전적으로 듣는 사람 책임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내가 말씀을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면 나는 모두 잘했고 멤버들은 죄다 잘못했나? 그들은 들을 귀가 없었던 것이고, 나는 파수꾼의 역할을 잘해낸 것인가?


이즈음에서 나는 약간 헷갈리기 시작했다. 결코, 내가 잘한 부분이 없는데 말씀으로는 내가 잘못했다는 응답이 없다는 사실이 약간 곤혹스러웠다. 나는 하나님의 방법이 사람의 방법과 다르므로, 내 상식으로 잘잘못을 가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번의 사건에서 나의 속 좁음과 거만함 그리고 남을 배려치 않는 그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내 상식으로는 내가 잘못한 것이 분명하나, 성경이 그것이 잘못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나는 적어도 교회 내에서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좀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세상적으로는 잘못을 인정할 수 있으나, 교회에서는 할 수 없다는 말이 거꾸로 돼야 하는 것 아니냐고 도전하는 것이 가능해 보인다. 오히려 세상적으로는 떳떳하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해 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도전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에 대해 확고하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죄를 통해 잃었기 때문에 나의 본성의 소리는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세상의 기준으로 잘잘못을 결정할 수 있는 일도 교회에서는 그 기준을 사용하지 않으려 하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물론 가능한 한 세상일에 대해서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려고 노력하며,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과정이 바로 우리 삶 즉, 세상에서의 천국 백성이 되기 위한 훈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던 차에 아내가 또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돌아오더니 자기 마음이 편해졌다고 하면서 가장인 내 뜻을 따르기로 했다고 했다. 즉, 내가 다 관두겠다면 그 뜻에 따르겠다는 선언을 하였다. 그 말에서 사실 더 큰 불편함을 느꼈다. 물론 나는 우리 가정의 가장이기 때문에 어떤 결정에 관한 최우선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신앙의 결정에 관한 한 내가 결정하고, 나의 결정에 따르기로 이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나의 신앙결단에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고 나의 속 좁음에 해당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에게도 "이 문제는 가장 운운할 문제가 아니다. 당신은 이런 때 나에게 계속 잘못을 지적함으로써 나를 고치려고 노력해야지 당신의 결정에 따르겠어라고 말할 그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하였다. 여하간 고민이 깊어져만 갔었다.


그러다가 다니엘서 9장에서 해답을 얻었다. 먼저 다니엘서를 이야기하기 전에 근래 신선하게 다가왔던 말씀을 먼저 보자. 에스겔서 36:36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너희 사방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폐한 자리에 심은 줄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에스겔 36:36)

하나님의 의지를 상당히 강력하게 표현한 말씀이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말씀의 대미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그 회복을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겠다는 선언이다. 이 말씀의 후반부를 ESV로 읽으면 조금 더 생동감 있게 느낄 수 있다.

Then the nations that are left all around you shall know that I am the Lord; I have rebuilt the ruined places and replanted that which was desolate. I am the Lord; I have spoken, and I will do it. (ESV)

'I'로 시작하는 3개의 문장이 병렬되어 있다. "나는 여호와다. 내가 말하였다. 그리고 내가 이룰 것이다." 이 정도면 사실 우리가 끼어들 구석이 전혀 없다. 하나님께서 모두 알아서 하시겠다는 선언이다. 그런데 다음 장도 아니고 바로 다음 절에서 아주 의외의 말씀을 하신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Thus says the Lord God: This also I will let the house of Israel ask me to do for them: to increase their people like a flock. (에스겔 36:37)

당신이 이루실 것임을 그렇게 강력하게 말씀하시고 바로 이어서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필요하고 또 기도하게 하실 것임을 선포하신다. 물론 이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존재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역사에 우리의 참여를 기다리시며, 같이 영광 받기를 원하신다."라고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아주 신선했었다. 그리고 이 말씀이 뇌리에 남아 있었다.


이런 기억을 가지고 다니엘서 9장을 읽는데 정말 충격적이었다. 말씀은 이렇게 시작한다.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 해,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다니엘 9:1-2)

자 당신에게 이런 깨달음이 왔다.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이 조만간 해결될 것이며, 그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당시 다니엘은 대충 70년 중의 67년 정도가 지난 것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70년을 언제부터 언제까지로 볼 것인가는 이 글의 범위를 넘어간다. 다만 다니엘은 자신이 이주당한 때로부터 계산하여 다리오 왕 첫해까지 계산했을 때에 대충 67년 정도가 지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하간 70년이 거의 다 되어 간다고 믿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질문을 던지고 싶다. 당신은 이런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 무엇을 먼저 하겠는가?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주위 사람들에게 알릴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무엇을 알리겠느냐고 묻자 회복에 관해 이야기하고 위로하겠다고 대답하였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는 분명 주위 사람에게 알리는 일을 먼저 했을 것이다. 그리고 형제들을 위로하며 형제 사랑을 실천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니엘은 기도하였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다니엘 9:3)

심지어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기도하였다. 민감한 사람이라면 이후의 기도 내용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다니엘은 기도했는데 당신 같으면 어떤 기도를 하겠냐고 아내에게 또 물었다. 먼저 감사기도를 드리겠다고 한다. 그 이후에는 어떤 기도를 하겠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속히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어떤 근거로 속히 이루어 달라고 하겠느냐고 다시 물었다. 대답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 이루어 달라고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적어도 내 상식으로는 아내의 대답은 매우 상식적이며, 어떤 면에서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다니엘의 기도를 보자. 다니엘은 9:4~19까지 총 16절에 걸쳐서 기도하는데 4~15절 즉, 12절을 회개하는 데에 사용한다. 철저한 회개를 한다. 그리고 16~19절 즉, 4절을 사용하여 회복을 간구하는데 그 근거로 하나님의 약속을 인용하지 않는다.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다니엘 9:18-19)

다니엘은 철저히 자신은 낮추고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긍휼 그리고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이루어 달라고 그야말로 "간구"하고 있다.


나의 성향으로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일을 다니엘은 하고 있다. 나는 깨달음 이후에 기도를 하지 않을 것이고, 한다 해도 이루어 달라는 기도를 할 것이며, 그 기도의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이 될 것이다. 그런데 다니엘은 깨달음 이후 기도했으며, 그 기도를 회개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 이후 정말 겸손히 하나님께 간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나의 문제가 여기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시 ESV를 한번 인용해 보겠다.

Then I turned my face to the Lord God, seeking him by prayer and pleas for mercy with fasting and sackcloth and ashes. (다니엘 9:3)

우리말 성경에는 그 뜻이 약화하여 있는 "turned my face to the Lord God"이 나온다. 즉, 다니엘은 깨달음 이후에 그의 얼굴을 하나님께로 돌리고 기도를 시작한다. 그에 반해 나는 나의 얼굴을 내 소그룹 멤버에게 그리고 아내에게 돌린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다시 에스겔서의 내용으로 돌아가 보자.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하셨나? 당신께서 회복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자 다니엘이 나처럼 깨달음 이후에 주변 사람에게 회복을 선포하고 위로했다고 생각해 보자. 회복이 일어날 수 있을까? 아니다. 회복이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하나님께서 일하셔야 회복이 일어나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려면 나의 기도가 필요하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고 주변 사람에게 이야기만 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시지 않으시고 결국 진정한 회복은 일어날 수가 없다. 아내와 이야기하는 도중 불현듯 또 하나를 깨달았었다. 나는 그 순간까지도 기도하지 않고 그 내용을 아내에게 떠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런 인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내가 깨닫고 남들에게 알리는 것이 사명이고, 그것이 형제 사랑이라 생각하였지만 결국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는 통로를 막는 격밖에 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으므로 나와 관계된 사람들에게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불평불만이 나오게 된 것이다. 나는 방향도 틀렸고 회개가 없었으니 내용도 틀렸었다.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바랬으니 역사가 일어날 리가 없다. 나에게 필요한 기도는 "주여 나의 교만으로 주께서 주신 말씀으로 기도하기보다 주위 사람들에게 나의 깨달음을 알리는 데에만 주력하였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고,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감사함으로 기도하게 하옵시고, 애통함으로 겸손하게 하옵시고, 회개로 거듭나게 하여 주옵소서."였다. 그런데 나는 깨달음을 나를 변호하는 데에, 그리고 나를 정당화 하는 데에, 무엇보다 나를 자랑하는 데에 사용하여 왔다.


성경을 읽는다 하면서도 이런 간단한 진리조차 모르고 살아왔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떠들어도 전혀 변화하지 않는 소그룹멤버들을 보면서 무엇이 문제인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이유를 알았다. 물론 여전히 여러 가지 문제가 남아있다. 일단 나의 본성상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만 드러나고 하나님의 역사가 드러나도록 기도해야 하는데, 나는 여전히 내가 드러나기를 바란다. 그러다 보니 기도해야 하는 순간에 떠들고 있는 나를 자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이 사실을 이번에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셨으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앞으로는 같은 상황에서 나도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해 본다.


추가1: 내가 위에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기도를 약간 부정적으로 그렸는데 그에 대해 부연하고 싶다. 일단 그런 기도가 틀린 기도는 아니다. 철저히 자신을 죽이고 "저는 무익하나 주께서 약속하셨으므로 그 약속에 의지해 간구합니다."라는 기도는 좋은 기도의 본이다. 그런데 문제를 그런 기도의 본을 귀로 들어서 실천하는 사람이다. "약속에 근거해서 기도해봐. 그러면 이루어 주셔." 이런 말을 듣고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제가 먼저 나라와 의를 구했으니까 이제 돈 주세요."라고 기도한다면 이 기도는 무슨 기도가 되겠는가? 빚쟁이의 빚 독촉에 해당하는 기도가 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개인적인 깨달음과 낮아짐의 결과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기도는 옳다 하겠으나, 그냥 들어서 방법론으로서 그런 기도 형태를 택한 것이라면 그런 기도는 틀린 기도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신앙생활에서 방법론에 대한 모든 경험적인 내용은 틀린 내용이다. 우리는 어떤 목적을 향해 일을 해 나가는 과정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통한 천국 백성으로의 훈련을 쌓아가는 과정에 있다. 특별한 방법을 논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과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특히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그리고 그런 것은 사실 신앙도 아니다. 하나님으로 예수님으로 사는 것이 신앙이지 어떤 '방법'으로 사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추가2: 다니엘서 9:3에 보면 다니엘이 머리를 여호와께 향하고 간구를 시작하는데 그 마지막에 보면 "결심하고"라고 나와 있다. 즉, 다니엘의 회개는 저절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는 바로 그 때가 회개해야 할 때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과연 우리는 회개의 때의 회개를 하고 있는 지 돌아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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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2. 7. 29. 15:13

예수님의 인성에 대하여 Bible Stories2012. 7. 29. 15:13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단이 아닌 한 배우는 기본 교리 중의 하나가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100% 인간이심이다. 종종 예수님이 왜 100% 하나님이셔야 하는지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으며, 거기에 대한 답을 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왜 100% 사람이셔야 했는가에 대한 질문이 더 어려운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기회가 있을 때에 100% 신성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이 글은 내가 맡은 소그룹 모임을 위해 작성했던 글인데 그것을 약간만 손을 봐서 여기에 올려 본다. 당시 모임 중에 “예수님의 100% 인성이 부정된다면 그것이 나의 신앙에 일으킬 수 있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라고 질문을 던졌었다. 이 질문에 대해 생각을 해 본다면 공부를 많이 하지 않은 한 (심지어 많이 했다 해도) 아마 많은 사람이 개인의 신앙과 별 관계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또는 뭐 "모르겠는데?" 정도의 답을 얻었을 수도 있다. 그런 답도 틀렸다고 하기는 어렵다. 이 부분을 파고들어오는 이단에 대해 취약성을 보이기는 하겠지만 원래 이단은 싸울 존재가 아니고 피할 존재이기도 하고, 복잡한 내용을 물어보는 이단과 오래 이야기를 할 정도로 자신의 성격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별 필요없는 고민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생각을 해 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몇 가지 힌트 정도만 나눠볼까 한다. 이 글은 많이 축약한 내용이고, 아주 신중하게 적은 글도 아니다. 따라서 이 글로 신학적인 논쟁을 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그럴 정도로 잘 정돈된 글도 아니다.

부활
먼저 기본부터 살펴보자.


1. 우리는 죄인이다.


2. 그러므로 죽어야 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로마서 6:23)


3. 죽음은 영원 형벌을 뜻한다. 즉, 세상에서의 존재가 사라지는 일회적인 사건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반복되는 하나님 부재의 삶을 죽음이라 한다.


4. 그런데 우리 믿는 자 또는 선택받은 자 또는 구원받은 자는 예수님을 힘입어 부활할 수 있다.
Note: 부활에 대해 흔히 “우리는 죽지 않는다.”라고 오해한다. 결국에는 부활할 거니까 죽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도 무리는 없겠지만, 어쨌든 죽음의 과정은 거쳐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17)

그런데 다음의 말씀과 같이 우리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으로, 즉, '나'는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과정이 부활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 참고로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crucified → died → was buried → descended to the dead → rose again의 순서로 고백함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descended to the dead”를 해석하는 문제가 너무 논란거리가 되어서 생략했을 뿐, 교리적으로는 이 부분을 인정하고 있다. 세부적으로 조금씩 다른 목소리가 있을 뿐이다. 어쨌든 해석에 따라 예수님께서 지옥까지 내려갔다가 오셨다고 해도 별 무리가 없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더 맞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죽음의 상태에서 예수님의 신성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것이다.


5. 예수님을 힘입어 부활한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자. 예수님의 육신은 죽음과 부활을 과정을 전부 겪으셨다. 신학자들 간에 약간의 논란거리가 있지만, 부활은 예수님의 신성에 의지하여 일어났다. 즉, 예수님은 육체를 가지고 신성의 도움으로 죽음과 부활을 거치셨고, 그 '본'을 따라 예수님을 힘입어 우리도 부활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다.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디모데전서 1:16)

여기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모든 부활하는 사람의 첫 열매가 되셨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린도전서 15:20)

즉, 우리도 그와 비슷한 열매를 맺어야 하며, 열매를 맺는 과정은 예수님께서 겪은 과정과 유사 또는 같을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육체는 죄의 삯으로 죽게 되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도와 우리를 살리신다. 조금 더 세련되게 말하려 한다면, 바울의 갈2:20을 다시 인용해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즉, 나는 분명 죽게 되고 죽음의 고통도 겪게 된다. 물론 이 과정은 현세에 죄에 대한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면, 즉, 예수님을 나의 주로 믿는다면 나의 삶의 주인이 나에서 예수님으로 바뀐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힘으로 부활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의 상태가 된다.


6. 자 여기에서 예수님의 육체 부활을 부정해 보자. 즉, 100% 인간을 부정해 보자.


A.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한다면, 우리에게 죽음은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따라야 할 본이 없어지므로 부활과 그에 따른 영생이 불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죄로 인해 죽은 이후 힘입어 부활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B.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즉, 죄의 값이 사망이지 않다고 한다면, 공의의 하나님에 대한 증언인 구약 전체가 부정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구약 전체를 부정해 버리는 경우 예수님의 인성은 부정되나, 신으로서의 예수님을 믿는 데에는 별다른 무리가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에 구약을 더 복음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의 본질을 부정할 때에 가장 먼저 상처입는 부분이 신약이 아니고 구약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100% 인성에 대한 부정은 부활신앙에 대한 부정 또는 구약성경 전체에 대한 부정이 된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는 이단은 예수님을 “영체”라 말하기도 하면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을 부정한다. 그리고 구약의 하나님에 대해 공격하거나, 우리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구약을 해석한다.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에 더해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으신 이유를 성경적으로 하나 더 들 수 있는데 다음의 성경 구절과 관련된다.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히브리서 5:1-2)

대제사장은 성경에 나오는 기름 부음 받은 자 중 대표적인 경우인데 (기름 부음 받은 자 = 그리스도, 제사장, 왕, 선지자가 기름 부음을 받음), 바로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예표한다. 자, 대제사장은 인간이어야 한다고 이 구절이 주장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간이셔야 한다. 이는 다음에서 한 번 더 강조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브리서 4:15)

이 구절에서 강조하는 것은 우리와 같이 모든 죄의 유혹을 참고 이겨내신 예수님이시므로 우리의 죄 또한 동정하시며, 따라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고 계시되 죄는 없으셨다. 사실상 이 구절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성에 의지한 예수님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생각해 볼 때에는 불필요한 구절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예수님의 죄 없으심에 대해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은 인간 예수에 대해 묵상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머릿속에 있는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이신 예수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강력한 증언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이단은 '죄가 없는 존재'가 어떻게 사람일 수 있느냐고 하면서 이 구절을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는 데에 사용한다. 그러나 '죄가 없는 예수님'에 대한 증언은 신성 예수님의 측면에서 보면 불필요한 증언이고, 따라서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강한 증언이 된다. 인성이 없으시다면 죄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면 역시 우리의 구원이 불가능하다. 십자가의 도인 “사죄-칭의-새 생명”에서 '사죄'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바로 우리를 동정하시는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인성이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를 동정하지 않으실 것이고, 죄인 된 우리를 위해 죽어주실 이유도 없고, 우리를 복잡하게 다시 살리실 이유도 없다. 이처럼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의 구원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자, 위에서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 짧게 다루어 보았다. 이것을 하나하나 깊게 들어가자고 하면 너무 길어져서 이 정도로 짧게 끝내려 한다. 노파심에 한마디 하자면, 이 글은 누구를 가르치기 위해 쓴 글은 아니다. 맨 처음 왜 블로그를 시작했는지에 대한 글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내 개인적인 기록을 남긴다는 의미가 더 강하다. 그런데 이 글의 작성 방식은 내가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작성한 형태로 드러나기 때문에 부담스럽기도 하다. 가르칠 자격이 없는 사람이 가르칠 경우, 가르치면서도 가르치는 자가 되지 않을 방법이 있다면 좋겠는데, 나는 그 방법을 모르겠다. 사실 나는 내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 존재인지 아주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쓰레기가 되지 않게 발버둥치는 모습이 좀 강한 성격으로 드러나기도 하는데 기본적으로 선생될 자격은 커녕 인간 될 자격도 의심되는 사람이다. 누구도 인간인 한 성경을 '안다'라고 할 수 없다. 나는 내가 얼마나 병신같은 존재인지 알고 있다. 이 글도 '아는 사람'으로서 아는 지식을 적은 것이 아니고 '내 주제에 조금 깨달은 내용'을 나누는 수준이다. 그래서 내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으리라 보장할 수 없고, 틀린 부분이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냥 말한 인간의 수준을 고려해 가면서 걸러 읽어주기를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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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2. 5. 1. 11:04

나의 주 예수님 Bible Stories2012. 5. 1. 11:04

예수님은 나에게 있어서 누구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성경은 ‘나의 주가 되어야 한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나의 주’로 인정하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며 올바른 신앙고백이다. 그런데 현대 기독교인 중에 이 말의 참뜻을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잦다. (물론 나도 발버둥만 치고 있다.) 도마는 예수님을 주로 그리고 하나님으로 고백하였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한복음 20:28 )


그러면 예수님을 나의 주로 삼는 것을 성경은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요한은 포도나무와 그의 가지로 표현하고 있고, 바울은 머리와 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 요한복음 15:5)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에베소서 1:20-23)


따라서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겠다는 뜻은 그분의 뜻대로 살겠다는 뜻이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이 뜻이 과연 무엇일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바울의 고백과 성경의 묘사를 통해 볼 때에 나의 삶에 대한 주권을 예수님께 이양하고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삶이 바로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는 삶이라 생각된다. 당신은 과연 그렇게 살고 있나.


관점을 조금 바꿔서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는 삶은 어떻게 실현 가능한가에 대해 생각해보자. 궁극적으로 주를 사랑함으로 주와 하나가 되면 그것이 바로 주를 나의 주로 인정하는 삶이다. 그러나 나 같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비현실적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체가 머리의 뜻을 따르는 것은 머리를 사랑해서라기보다 머리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예수님을 나의 머리로 생각할 때에 예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머리로 삼는 삶이 아닐까 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함에 대해서 많은 곳에서 진술하고 있다. 개역개정판에 171번이나 반복되는 단어가 바로 경외함이다. 이는 ‘경외’라는 단어로 찾았을 때의 이야기이고 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yare’로 찾으면 훨씬 많은 곳에서 그 단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신약까지 더한다면 그 숫자는 또 훨씬 늘어나게 된다.


주의 깊게 성경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경외함은 성경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영역판에서 사용되는 경외의 해당하는 단어인 fear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함의에 비추어 볼 때 놀랍다. 심지어 하나님을 경외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동의어로 사용될 때도 있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 (신명기 5:29)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신명기 30:16)


위의 두 성경 구절을 보면 같은 내용에 대해서 한 곳에서는 경외를 (5:29) 다른 한 곳에서는 사랑을 (30:16)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볼 때에 하나님을 사랑함이 하나님을 경외함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발이 잘릴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하자. 그리고 오른손이 새끼 손가락 하나만 희생하면 발을 살릴 수 있다고 하자. 그러면 손의 입장에서 발을 사랑해서 새끼손가락을 희생하지는 않을지언정 머리의 명령을 순종함으로 발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가능하다. , 머리를 경외함으로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결국 발에 대한 손의 사랑 표현일 수 있다. 이렇게 보자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결국 하나님을 사랑함과 같다고 하겠다.


따라서 나는 예수님을 나의 주로 인정하는 삶은 예수님을 머리로 인정하는 삶이요, 그 삶은 예수님의 명령을 경외함으로 따르는 삶이라고 하고 싶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에, 당신은 예수님을 주로 삼고 살고 있는가. 나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점점 하나님을 무시하고 나의 도구 정도로 하나님을 끌어내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강대상에서 흘러나오는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를 향해 선포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들을 향해 그들의 마음을 만져주는 정도의 설교밖에 되지 않는 경우를 자주 본다. 차라리 성도들의 처지를 대변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는 설교라면 그나마 낫겠다 하겠으나, 그 안에 하나님은 화자로도 청자로도 존재하지 않고 그저 성도를 청자로 삼아 목사가 그들의 기분을 좋게 해 주는 정도의 설교만 있다는 생각을 금하지 못하겠다.


근래 십계명에 관한 설교를 들었다. 그 중 제4계명인 안식일에 관한 설교였는데, 목사님은 그 설교를 하기 싫었다는 말로 설교를 시작했었다. 이유는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이어서였는데, , 주일날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 성도가 많은 상태에서 그 설교를 하기가 껄끄러웠다는 말이었고, 심지어 어쩔 수 없이 주일날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로하여 주시고 자유로울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로 설교가 끝났다. 물론 나는 그 목사님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심정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러면 안 된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심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믿음으로 하여 다시 순종하는 삶이 반복되는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경건 훈련이요 신앙 훈련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핑계를 대면 안 된다. 물론 성경에서는 믿음이 약한 자 (경제적 약자로 상징된)에 대한 배려가 곳곳에 묻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명령을 변개할 수는 없다. 나는 말씀을 말씀 그대로 진정으로 선포한다면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위로가 필요한 자들을 직접 위로하시리라 믿는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말씀에 대한 선포일 뿐이다. 말씀에 내 의도가 들어갈 때에 말씀에서 능력이 사라지고 칼날이 무뎌져서 혼과 영과 육을 쪼개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말씀을 그대로 진정으로 전달한다면 말씀 그 자체가 스스로 일하기 시작하시리라 믿는다. (모두 알다시피 성경에서 말씀은 대체로 예수님을 뜻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브리서 4:12)


우리는 십자가 군병으로서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그리고 그렇게 명령에 순종할 때에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책임져 주신다. 아무리 내 상황이 그렇지 않더라도 명령에 의지하여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 나머지를 다 책임져 주시는 그 감격스러운 경험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되어야 한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후서 2:3-4)


주를 나의 주로 나의 머리로 삼는 삶이 절대 쉽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게 살 때에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이 해결됨을 또한 믿는다. 많은 경우 우리가 어렵다 힘들다 하는 문제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명령에 우선하여 내 자아를 인정해 달라고 하는 데에 그 핵심이 있는 경우가 많음을 본다. 미움 시기 질투 게으름 등등의 모든 문제는 그저 순종함으로 예외 없이 해결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아주 재미있는 성경 구절 하나만 살펴보고 이 글을 끝내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16-18)


적어도 내 입장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명령에 의지해서 할 수 있다. 하고 하지 않고는 차후 문제이고, 가능성의 관점에서만 말하자면 명령으로 가능할 법한 것들이다. 그런데 기뻐하라는 명령은 이상하다. 명령으로 기뻐하는 것이 가능하긴 한가? 그런데 성경은 가능하다고 하며, 그것을 명령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명령 범위는 우리의 상상보다 더 넓다. 좁게는 우리의 수족을 움직이는 문제로 시작하여 넓게는 감정의 문제까지 명령하신다. 명령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니 얼마나 다행인가. 당신이 순종하기만 하면 절대 될 것 같지 않던 문제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고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 그것이 주를 주로 삼는 사람이 누리는 복이며 기적이다. 그리고 그것을 명령으로 하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는 단순히 순종만 하면, 절대 될 것 같지 않은 감정의 문제 즉, 우울증 분노 시기 등등의 문제를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여 직접 해결해 주신다. 위의 딤후 2:3-4를 다시 한번 상고해 보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립보서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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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12. 10. 13:41

요셉과 애굽이주 Bible Stories2011. 12. 10. 13:41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자주 마주하게 되는 문제 중의 하나가 성경을 인물 중심으로 해석하는 문제이다. 물론, 인물 중심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고 인물을 벗어나서 해석하는 것이 쉬운 일도 아니긴 하다. 그러나 인물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 할 때에 나타날 수 있는 문제는 되도록 피해야 하는데,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즉, 인물 중심의 해석은 어떤 개인의 역할에만 집중하게 되고, 그의 전반적인 성취를 근거로 그의 삶 한 순간 한 순간을 전부 평가하는 문제가 있다. 심지어 주인공의 변방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주인공보다 못하게, 심지어 악하게 그려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라는 '믿음의 조상'을 부각시키기 위해 종종 롯은 악인으로 그려진다. (어떤 유명한 성경 강해서에서 직접 확인했던 내용이다.) 그런데 성경 상의 어떤 사람도 '사람'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였다고 생각한다. 즉, 그들의 삶에서 칭찬 받을 부분이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잘못한 부분도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런 면에서 모든 성경상의 인물들을 공정하게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 한 것은 잘 한 것으로 본받으려 노력하고 잘못 한 것은 잘못 한 것으로 경계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요셉과 애굽이주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다음의 말씀을 보면, 요셉은 애굽이주에 대해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창세기 45:9-11)
특히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애굽으로 보냈다고까지 말한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창세기 45:5-8)
보통은 이 성경 구절은 근거로 요셉을 높게 평가한다. 즉, 자신의 억울한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에 집중하여 고난을 감사로 승화시켰다는 논리이다. 크게 틀렸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요셉이 이에 대한 사명감이 있었느냐 하는 부분을 생각하면 재미 있는 부분을 발견 할 수 있다. 만약 그가 애굽이주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생각하였었다면 총독이 된 지 9년이 지나도록 가족들을 부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특히나 초반 7년은 풍년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여유도 있었고 창45:9-11에서 말 한 것과 같이 그럴 만한 지위와 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족들을 부르지 않았다. 형들에 대해서는 미워서 그랬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버지 야곱조차 외면 한 것은 으아한 부분이다. 이후 형제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을 괴롭히는데 (물론 당한 것에 비해 애교 수준의 괴롭힘이긴 하지만) 그것을 통해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다음의 성경구절을 보자.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창세기 41:51-52)
위의 성경 기록에서도 확인 할 수 있듯이 요셉은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으려고 노력하였다는 점에서 팔려온 사건은 그에게 큰 상처였다. 따라서 요셉이 애굽에 있었던 약 22년의[각주:1] 시간동안 요셉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애굽에 내려와 있는 상태라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 생각은 형제들을 만나고 나서야 갑자기 들었던 또는 깨달아졌던 생각일 뿐이다. 다음의 성경 구절을 보면 그가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애굽이주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었다는 사실이 조금 더 명확해 진다.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창세기 42:9)
형제들을 보고 나서야, 더 정확하게는 그들이 요셉에게 머리숙이는 것을 보고 나서야 요셉이 과거에 꿨던 꿈을 기억하게 된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창세기 37:6-7)
다시말해, 요셉은 애굽이주를 하나님의 명령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요셉이 알고 있던 것은 과거에 꾸웠던 꿈이 기근과 요셉의 애굽으로의 팔려가는 사건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 밖에 없다. 애굽이주는 그 꿈과도 별개의 문제이다. 여기에 더하여, 애굽이주에 대한 야곱의 반응은 사뭇 흥미로운데, 당시 야곱은 젊을 때 보다는 하나님과 더 가까이 교통하던 때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다음의 성경구절을 읽어 보자.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창세기 46:1-4)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간 것으로 보아 야곱은 분명 이주를 선택했다. 그런데 그에 대해 일말의 거리낌은 있었던 듯 하다. 하나님께서 이상 중에 나타나셔서 내려가도 된다는 허락과 동시에 안심시켜 주시는 장면이 그 증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려움을 피해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은 옳바른 선택이 분명 아니다. 이에 대한 증거는 너무 많아서 하나 하나 다 열거하는 것은 의미없고, 그 중 시점상 중요한 것들 몇 개만 살펴 보도록 하겠다. 일단 애굽 이주는 하나님의 축복에 기인한 사건은 아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중략)...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중략)...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중략)...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창세기 15:9-17)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자손과 영토에 대한 언약을 하시는데, 이 사건은 그 중 자손에 대한 언약 중간에 벌어지는 내용이다. 흐름을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그 새' 즉,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쪼개지 않고 둔다. 그리고 명백히 이 새들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고, 그것은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제물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시점과 아브라함이 제물을 드린 후에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신 시점간의 시간차도 흥미롭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제물을 준비하고 그것을 들짐승이 먹을까봐 전전 긍긍하는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긴 시간차로 인해 솔개를 쫓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중간에 잠까지 잔다 (하나님께서 재우신 것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아무리 봐도 그냥 잠든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해가 져서 어두울 때'가 되어서야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으신다. 물론 제물을 언제 준비 했는 지는 나오지 않지만 내용상 한참이 지나서야 받으신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쪼개지 않은 새는 피가 그 대로 들어 있는 셈이다. 제사를 드리고 난 음식은 보통 사람이 먹었다는 사실을 생각 할 때, 피 째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위배된다 (창 9:4). 물론 완전히 태워서 드리는 제사도 있었지만 이후 레위기를 봐도 제사 음식을 사람이 (제사장)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아직 제사 제도가 확립되기 전이기는 하지만, 피를 쏟지 않고 드린 제물은 그 자체로 제사 예법에 어긋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언한 사건이기는 하나 애굽이주는 어떻게 보더라도 축복 속의 사건은 아니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아브라함의 제사가 합당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형벌로서 내린 것이 애굽이주였다고 생각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어서 세상에 나옴으로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구원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기적같은 영광을 얻게 되었지만, 선악과를 먹고 세상으로 쫒겨 나오고 하는 일련의 과정이 결코 축복이라 부르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이다. 만약 그것이 축복이라면 하와는 최초의 축복의 통로이자 영웅이다.

더군다나 기근으로 인한 '애굽이주' 또는 '애굽이주계획'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합하는 생각이 아니라는 경험은 아브라함, 이삭 둘 모두 한다. 아브라함은 창 12:10-20에서 기근을 피해 애굽에 내려가고 그 과정에서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속임으로 '속이는 집안 내력'의 첫 문을 연다. 아마 하나님께 칭찬은 절대 받지 않았으리라. 이삭 때에도 동일한 사건이 일어난다.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창세기 26:1-2)
그랄 땅은 가나안 땅의 최남단 경계선 정도에 해당하는 땅으로, 이삭은 애굽을 향해 가고 있던 중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막으셨다.

'따라서 기근이 있으니 애굽으로 피신해서 목숨을 연명해 보자'라는 생각을 '믿음의 행위'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여기에 요셉의 행위에 대한 판단 기준이 있다 여겨진다. 아무리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라도 그것이 저주에 가까운 것이었다면 그것을 실행한 요셉의 그 행위를 옳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요셉이 하나님께 직접 명령을 받았다고 보기 어려운 상태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 애굽과 요셉의 지위가 주는 '세상의 안락함' 속에서 '고난'을 견디어 보자라는 생각은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 결코 하지 않아야 하는 행동 중의 하나임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고난을 감내하며 훈련 받아야 할 제자이다.

사실상 성경 속에서 요셉 삶을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라고 평가 할 만한 부분을 나는 찾지 못하겠다. 기껏해야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견딘 것과 바로의 꿈의 해석을 하나님께 의지해서 했다는 것 정도 밖에 없는 듯 하다. 어렸을 때엔 아버지의 과잉 보호 속에 건방지게 형들을, 심지어 부모까지도 무시하는 아들이었다. 형들이 그리고 요셉의 부모가 요셉에게 절하는 꿈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행위를 예언가적 행동으로 생각하여, 그러므로 선하다라고 덮어놓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가 듣더라도 기분 나쁜 말은 지혜롭게 해야 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입을 단속하는 것의 중요함에 대해 성경이 얼마나 자주,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는 지는 따로 설명 할 필요조차 없다. 다음의 성경구절을 통해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창세기 37:2-5)
17세면 클 만큼 컸는데도 고자질이나 하는 철부지 아들이었을 뿐이다. 물론 여기에는 야곱의 잘못이 더 크다고 할 수 있긴 하다. 뭐 그렇다고 요셉의 찌질함이 가려지지는 않을 것 같다. 결국 이런 갈등이 표면화 되어 애굽으로 팔려가게 된다. 그 이후 요셉은 '온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고 그들의 이름에 자신의 억울함과 상처를 투영시킨다. 하나님의 뜻은 므낫세보다 에브라임에게 있었는데 그것을 구분할 능력도 없었다 (야곱은 알았고, 이를 근거로 나는 야곱이 말년에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에 비해 이삭은 말년에 야곱과 에서 사이에서 에서를 선택한다.)
열매를 통하여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고, 성경은 많은 경우 열매를 기록하였다. 따라서 나는 그의 자손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역시 주의 깊게 살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분명 요셉은 곱절의 분깃을 받았으나, 그 두 지파의 이스라엘 내에서의 역할은 결코 덩치만큼 긍정적이지 않았다. 성경 전체를 통해 가장 불만이 많은 민족이 에브라임이다. 그 지파에서 배출 한 인물이라고 해 봐야 여호수아 하나 외에 또 누가 있는가. 항상 불평 불만이 많고 문제를 일으키는 지파가 바로 에브라임이었다. 받은 것에 비해 너무 보잘 것 없었던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한 번 짚어보고 싶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요셉을 평균 이상가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보는 데에도 나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애굽 이주 사건 하나만 떼어 내어 생각한다면 분명 옳은 행동은 아니었다고 본다. 우리는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에 요셉과 같이 행동해서는 안된다. 적어도 아브라함-이삭-야곱으로 내려오면서 반복적으로 확인했던 아주 명확했던 사실, 즉, 가나안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라는 그 명확한 사실 앞에서 고난 때문에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생각 그 자체가 불신앙이다.



물론 이후 요셉역시 하나님의 뜻을 더 정확히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방식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직접적인 계시였는 지 야곱으로부터의 교육이었는 지는 모르겠다. 요셉이 죽기 직전 형제들에게 자신을 가나안에 장사지내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에서 보였던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려 보내시리라는 확신을 볼 때에 애초 요셉이 가족들을 애굽으로 이주시킨 이유와 목적에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 가나안이었고 그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리라는 믿음을 확실히 보이고 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창세기 50:24-25)
그리고야곱이 죽고 난 이후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하던 형들을 위로하고 안심시키는 장면에서 요셉의 행동을 보면 그가 과거 겪었던 배신과 아픔에서 확실히 벗어났다는 사실도 확인 할 수 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창세기 50:19-21)


  1. 17세에 애굽으로 팔려서 30세에 바로를 만나 꿈을 해석하고 (창 41:46), 7년 풍년 2년 흉년 후에 형제들을 만났으므로 (30-17)+9=22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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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ToBeStable
2011. 10. 19. 10:13

구원에 대하여 2 Bible Stories2011. 10. 19. 10:13

오늘은 구원에 관한 조금은 골치아프면서 충분히 논란거리가 될 수 있을 만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어떤 사람들은 필자가 올렸던 2011/02/03 - [Bible Stories] - 구원에 대하여와 모순된다고 생각 할 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전혀 모순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모순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강요할 능력은 되지 않는다.

보통 장로교인들은 칼빈으로부터 시작한 그러나 그 후 약간씩 변형이 가해진 예정론을 배우고 믿으며 살고 있다. 물론 이 글을 통해 진부한 예정론에 대한 논의를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간과하고 있는 것이 설혹 있지는 않은가 살펴보고 싶을 뿐이다.

일단 예정론 하면 같이 떠 오르는 것이 예지론이 되겠다. 이에 관련한 심도 있는 글을 보고 싶다면 지금 당장 검색창에 '예정론' 이라고만 해도 수도 없이 많은 글이 검색 될 것이다. 나는 그런 글들과 대동소이한 글을 쓰고 싶지도 않고 경쟁하고 싶지도 않다. 그냥 우리가 흔히 하는 질문으로 부터 시작해 보자.
  • 내가 하나님에 의해 구원이 예정되어 있다면 이제 맘대로 살아도 될까? 어떻게 산다 할 지라도 하나님께서 한 번 구원하신 사람을 버릴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이건 사실 맞는 말이다. 비록 신약의 많은 서신들이 이런 생각 때문에 방탕했던 교인들을 질타하는 데에 많은 지면을 할애 했었다손 치더라도, 하나님의 절대 사랑과 절대 구원을 생각 한다면 한 번 구원 받은 사람이 그 구원에서 떨어져 나갈 리는 없다. 물론 독자 중에 야고보서의 많은 구절들과 요한 일서의 내용들 히브리서 바울 서신의 많은 구절이 떠오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실로 신약은 예정론을 지지하는 구절과 예지론을 지지하는 구절들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그 중 어느 한 쪽을 지지하면 성경의 거의 절반의 내용으로 공격이 가능하다.
  • 구원 받은 사람은 구원 받은 증거를 보이면서 살아야 한다.
이 역시 맞는 말인데 대체 그 증거가 무엇이겠느냐란 문제가 있겠다.

일단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예정론을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가정하고 글을 써 보겠다. 즉, 구원은 한 번 구원이고, 그 구원에 대해서 번복되는 일은 없으며, 그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 선택에 의한 것이다 정도를 받아들인다고 가정하겠다. (물론 나도 이렇게 성경을 보는 사람이다. 칼빈의 TULIP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으나, 그렇게 현학적인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야고보서 2:17-20)
이와 관련된 수도 없이 많은 구절들이 떠오르지만 그것들을 모두 훑어 보다가는 성경 전체를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이 구절만 보고 이야기 하자. 이 행함에 대한 강조 때문에 일찌기 종교개혁가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까지 했었다. 'James the Just'라고 불리웠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왜 이런 말을 했었던 것일까?

단도 직입적으로 말을 해 보겠다.
당신은 구원 받았는가? 아멘이라 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배웠었으니까. 그럼 그걸 당신은 어떻게 확신하나? 밑도 끝도 없이 확신하라고 하니 확신하나? 확신하라고 한다고 또는 확신하기로 했다고 확신이 되나? 그걸 확신이라고 부를 수 있나? 아니면 그냥 세뇌인가? 조금 위험한 접근이자 질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께서 우리 이름을 생명책이 한 번 기록하면 그것을 다시는 지울 방법이 없다. 어차피 우리는 악하고, 그렇다고 과거 적어도 어느 한 순간에 선하여 구원 받은 것이 아니기에 갑자기 어느 순간 깨끗하다고 생명책에 적어 주실 리도 만무 할 뿐 아니라, 어느 순간 악하여 졌다고 해도 이미 적혀 있는 이름을 지울 리도 없다. 어차피 그게 그거인 인간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을 누구 보다 잘 알고 계신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4:15-16)
그러면 행위는 무엇인가? 이 행위를 성령의 열매라고 바꾸고 싶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특히 다음 구절에 잘 정리되어 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22-23)
우리가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에 잘 붙어 있으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해 열매를 맺으시고 그 열매가 바로 성령의 열매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5)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를 통해 열매를 맺으시려면 가장 기본이 되는 가정은 내 안에 '의심'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야고보서 1: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마가복음 11: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마태복음 21:21)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마가복음 9:23)

자 나는 여기에 야고보서의 비밀이 예정론과 상통하면서 서로 보완 관계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믿음(의심없음) → 예수님이 나를 통해 열매 맺으심 → 그 열매를 보면서 내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됨 → 그 확신으로 의심을 없애고 믿음을 더욱 강건하게 함 → 예수님이 나를 통해 열매 맺으심 → ......" 이런 믿음의 사이클이 우리 인생에 반복되야 건강한 자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 입장에서는 절대 예정이고 예정하신 사람을 다시 버리는 일이 없다. 그런데 우리 입장에서는 내가 구원을 받았는 지 확인 할 방도가 없다. 하나님이 생명책을 열람하게 해 주시는 것도 아니고 참으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다 보면 의심이 생기고 의심하는 사람을 통해 예수님이 역사 하시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난 아멘으로 신앙고백을 했었으니까 일단 구원은 받을 거야. 뭐 이유도 모르겠고 확신도 없지만, 확신하면 된다고 했어.'라는 말도 안되는 논리를 가지고 있는 기독교인은 사실 상상 이상으로 많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그런 부류에 속해 있을 지도 모른다.

요한 일서에도 나오지만, 구원 받았다고 해서 의롭게 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선한 행실 (직접적으로는 형제를 사랑함)이 나의 구원 받았음에 대한 증거는 될 수 있다. 즉, 선한 행실이 구원의 충분조건이기는 하나 선한 행실의 구원의 필요조건은 되지 않는다는 말씀이고, 이 역시 야고보서의 내용과 통하는 내용이다. 즉,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서 '아멘'하는 순간 교회 공동체가 '당신은 구원받은 백성입니다.'라고 인정한다. 그 인정을 받아 들임으로 나에게 있는 일말의 의심을 거두어 내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 의심없는 믿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일하시고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열매를 보고 나의 구원을 확인받게 된다. 이것이 또 다른 열매의 원동력이 된다 (물론 나는 예수님께 붙어 있는 일만 하면 되지만).

교회를 수십년 다니면서도 붙들고 있는 것은 '난 구원 받았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정도만 말 할 수 있다면 정말 심각하게 스스로의 믿음을 점검해 봐야 한다. 우리는 죽어 봐야 어디에 갈 지 안다. 내가 천국간다고 확신한다 해서 지옥에 갈 사람이 천국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결국 당신을 통해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열매를 볼 수 있어야 그제서야 진실로 구원에 대한 확신을 할 수 있게 되며, 그 구원의 확신은 평생을 통하여 점검하고 점검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예수님께서 일하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영적 상태를 유지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삶은 온갖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으면서 가증스럽게도 천국에 가리라는 확신해 차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굳게 붙들고 있는 것이 예정론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확신하면 안된다. 그게 가능하다고 하면 바울과 야고보 요한 등등 신약 기자들이 그렇게 힘들여서 어려운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펌프에 마중물의 역할을 하는 것이 처음 믿을 때의 '아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마중물이라는 표현이 이단 종파에서 사용하는 표현이기는 한데, 나는 그냥 마중물의 의미 그대로 여기에서 사용하고 싶다.) 그 이후로는 스스로 솟아나는 물을 이용해서 물을 끌어올리게 된다. 그런데 아무리 마중물을 넣어도 그 밑에 샘이 없다면 물은 연속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마중물로 넣었던 물만 겨우 나왔는데 그것을 보고 구원 받았다고 믿고 방탕하게 산다면 정말 불행한 사람이다. 물론 그 중 구원 받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나는 여기에서 '확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 다만 당신이 구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그 정도의 신앙에만 머무른다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해 일하실 수 없으며, 결국 당신은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고 천국에 가게 될 것이다. 그게 인생의 목표라면 우리 모두 생명책을 열람하지 않은 상황에서 '당신 구원 받은 거 확실해?'라고 나는 묻고 싶다.

믿음의 길은 결코 쉽지 않다. 나를 통해 일하시는 예수님을 민감하게 인식 할 수 있어야 하며, 그 영적 민감함으로 알게되는 열매를 통해 내 믿음을 성장시키고 더욱 예수님이 일하시기에 좋은 영적 상태를 만들기 위해 순간 순간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 왜 바울이 우리의 삶을 경주에 비유하며, 전쟁터의 병사에 비유했는 지에 대한 묵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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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4. 17. 08:14

솔로몬 성전의 위치 Bible Stories2011. 4. 17. 08:14

솔로몬 성전은 출애굽 이후 480년,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지 4년에 모세가 만들었던 성막의 2배의 크기로 건설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약 7년만에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지 11년에 완공된다. 솔로몬 성전은 오르난의, Ornan, (또는 아라우나, Araunah) 타작마당에 건설되는데 이 오르난의 타작마당이 있었던 그곳의 성경상의 사건들을 살펴 보려고 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 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 (열왕기상 6:1)
다윗의 말년에 인구조사를 한다. 물론 인구조사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겠으나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았다. 자세히 나오지 않으니 이런 저런 해석이 가능하겠다. 개인적으로 '자신의' 업적을 객관적으로 평가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들을 자신의 성취로 보려는 그 매우 인간적인 그러나 패망의 선봉인 '교만'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고 본다. 여하간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게 되고 하나님이 천사를 명하여 재앙을 멈추게 하신 곳이 바로 오르난의 타작마당이다. 이후 다윗이 갓 선지자의 명에 따라 그 타작마당을 사서 거기에서 제사를 올려 드림으로 사건이 일단락되게 된다.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윗이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 (사무엘하 24:24)
여호와께서 천사를 명령하시매 그가 칼을 칼집에 꽂았더라. 이 때에 다윗이 여호와께서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서 응답하심을 보고 거기서 제사를 드렸으니, 옛적에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여호와의 성막과 번제단이 그 때에 기브온 산당에 있었으나, 다윗이 여호와의 천사의 칼을 두려워하여 감히 그 앞에 가서 하나님께 묻지 못하더라. 다윗이 이르되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이요 이는 이스라엘의 번제단이라 하였더라 (역대상 21:27-22:1)
바로 이 위치에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게 되는데, 이렇게 하라고 다윗이 명령을 했는지, 선지자가 그렇게 하라고 했는지 또는 솔로몬이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말씀을 받았는 지는 모르겠다. 다만 역대상 22:1의 말씀을 보아 다윗이 그 곳을 특별하게 여겼고 그에 대한 언질을 솔로몬에게 하지 않았나 싶다. 더군다나 역대상 22장에 보면 다윗이 생전에 성전에 대한 제반 준비를 상당히 해 놨었고, 성전 공사에 대해 방백들과 솔로몬에게 신신당부를 한다. 그리고 23장에서 여호와께서 성전의 설계도를 주셨다고 한다. 이로 볼 때에 성전의 위치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지정하여 주셨든지, 적어도 다윗이 솔로몬에게 지정해 주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하다.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이 모든 일의 설계를 그려 나에게 알려 주셨느니라 (역대상 23:19)
그런데 그 오르난의 타작 마당이 있던 곳이 바로 모리아 산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 산은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렸던 그 모리아 땅의 산이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역대하 3: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세기 22:2)
물론 어떤 사람은 두 곳이 다른 곳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내가 확인한 주석들에서는 전부 두 곳이 같은 곳을 뜻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현재는 거기에 이슬람 건축물 'the Dome of the Rock'이 있다. 사족을 달자면 이슬람 교도들은 마호메트가 거기에서 승천했다고 믿는다.

어떤 사람은 이 모리아 산이 바로 아람어로는 골고다 히브리어로는 갈보리인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고 하나, 내가 가지고 있는 사전에는 '그런 의견이 있다'라는 식으로도 언급이 되어있지 않다. 어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인지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으며 최근까지도 새로운 주장이 (a British general, Charles Gordon, in 1885) 계속 제기되고 있다.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를 사실인 양 이야기 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이다. 골고다가 모리아 산이라고 하는 주장은 정말 매력적이기 때문에 나도 정말 그러길 바라는 마음으로 여기 저기 찾아 봤으나 아무래도 확실한 근거는 없는 듯 하다.

이렇게 정리를 해 두고 보니 별 것 없다. 그래도 내가 쓴 글들은 전부 긴데 이건 짧으니 짧은 글도 있다는 의미를 주고 이만 끝내야겠다. 더 쓰려고 해도 더 쓸 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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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2. 19. 08:43

야곱의 후손: 성경은 무오한가 Bible Stories2011. 2. 19. 08:43

이것 저것 찾아 보다가 적어도 내가 보기에 참으로 쓸데 없는 논쟁을 하나 보게 되었다. 애굽에 내려 갈 때의 야곱의 후손에 관한 이야기이다. 논쟁은 몇 개의 성경 구절로부터 시작된다.
야곱과 함께 애굽에 들어간 자는 야곱의 며느리들 외에 육십육 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태어난 자이며, 애굽에서 요셉이 낳은 아들은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 명이었더라. (창세기 46:26-27)
요셉이 사람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사도행전 7:14)
여기에서 숫자 차이가 벌어진다. 그래서 어느 것이 맞냐는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를 통해 두가지를 이 글을 통해 하고 싶다. 일단 성경의 무오성에 관한 논쟁에 관해 짧게 내 생각을 말하고 싶고, 그 숫자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하고 싶다.

성경의 무오성에 관해
얼마전 기독일보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애굽 이주했던 야곱의 가족 수는 70명인가 75명인가? 이 글 중간에 이런 말이 있다.
그러면 성경 기록이 잘못이라는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성경은 거짓이 없고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다만 사도행전 7장에서 말하는 75명의 숫자는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니, 스데반 집사의 개인 설교 내용 중 잘못된 부분이 있을 뿐이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죄송하지만 좀 웃었다. 성경은 거짓이 없고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인데 거기에 적혀있는 스데반의 내용은 스데반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틀릴 수 있다니? 그게 틀렸다는 말이 아니면 뭐지? 성경이 죄다 사람 손으로 쓰였고, 바울 서신등은 설교에 가까운 내용인데 그러면 그것들은 다 틀릴 수 있다? 그래도 성경은 틀리지 않았다? 대체 뭔 소린 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결론은 창세기의 내용은 맞고 사도행전의 말은 틀리단다. 창세기도 모세가 적은 글인데 모세는 그래도 좀 더 믿을만 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단다.
더구나 그는 창세기의 기록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상당히 길게 적혀 있는 스데반의 설교 전반을 다 틀렸다고 주장하며 나름 증명까지 하는 노력을 보였다. 왜 그러지? 정말 나는 왜 그러는 지 이해가 안된다. 대체 왜 그러지? 물론 그 논증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난 정말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틀림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한 구절 살리려고 여러 구절 죽이는 것이 정말 이해가 안 될 뿐이다.
나는 왜 이렇게 성경의 무오성에 집착하는 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아니 물론 이유는 안다. 내가 밟고 있는 땅이 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두려워서 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기독교가 성경 위에 서 있다고 할 때 성경의 오류는 기독교 자체를 흔들 수 있다. 나는 왜 기독교를 반석(예수님)이 아닌 모래(성경)위에다가 세우려 노력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모래위에 지은 집을 가진 사람의 고충은 충분히 이해된다.

나는 성경이 무오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믿음에 문제가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나의 생각은 수고스럽더라도 2011/02/18 - [Opinion] - 믿음 그리고 성경를 참고해 주기를 부탁한다.

야곱의 후손 숫자에 대하여
자 본격적으로 숫자 이야기를 해 보자.
여러 글들을 살펴 보았다. 어떤 사람은 Gleason Archer라는 사람의 말까지 인용하면서 이야기 하고 전혀 관계 없는 맛소라사본 사해사본 칠십인역까지 언급하면서 이야기 하기도 한다. 내가 사본들에 대해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지 모르겠으나, 이 논의하고 사본은 별 관계가 없다는 것만 여기에서 밝혀 두기로 하자. 창세기는 몰라도 사도행전과는 관계없는 사본 들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글들은 목사들에 의해 적혀 있다. 하긴 목사 정도 되야 성경을 읽고 이런 내용을 파해치는 데 시간을 사용해도 아깝지 않을 것이긴 하다. 목사도 아닌데 이런 거나 적고 있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기는 하다. 다음 2가지 의견을 보자.

의견1 - 이집트로 내려간 사람은 야곱을 포함 67명, 요셉과 그의 두 아들 포함 70명, 야곱의 손자 53명
의견2 - 아들 12명, 딸 1명, 손자 51명, 손녀 1명, 증손자 4명 총 69명+야곱 = 70명 (여기에 '이는 착오가 없는 숫자입니다'라고 덧붙였다.)
많은 의견들이 있으나 어차피 사용할 수 있는 재료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거의 이 두 가지 의견과 대동소이하다. 두 의견 모두 70인이 되게 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가상하다.

나는 '이 사람들 덧셈이 안되나?'라는 생각을 했다. 정리해 보자.

야곱의 자식

손자

손녀

증손자

르우벤

4

 

 

시므온

7

 

 

레위

3

 

 

유다

3

 

2

잇사갈

4

 

 

스불론

3

 

 

디나

 

 

 

레아의 자손

7(1)+24(2)+2(3)=33

7

 

 

아셀

4

1

2

실바의 자손

2(1)+12(2)+2(3)=16

요셉

2

 

 

므낫세

10

 

 

라헬의 자손

2(1)+12(2)+0(3)=14

1

 

 

납달리

4

 

 

빌하의 자손

2(1)+5(2)+0(3)=7

총계

33+16+14+7=70 (야곱 포함 71)

손자: 24+11+12+5=52, 손녀: 1, 증손자: 4

따라서 70-3(요셉가족)=67


따라서 다음의 성경 구절은 틀렸다.
야곱과 함께 애굽에 들어간 자는 야곱의 며느리들 외에 육십육 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태어난 자이며 (창세기 46:26)
성경 구절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불경한 것이 아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틀린 것은 틀린 것이다. 아니면 이 중에 애굽에 함께 들어가지 않은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이 있으면 된다. 뭐 이 해석도 틀린 것은 아니라고 본다. 다만 성경을 통해 증명이 되지 않을 뿐이다. 아니면 이 중의 하나는 양자로 들였기 때문에 야곱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든지.

의견1의 손자(손녀포함) 53은 맞다. 거기에 야곱의 자식 13명을 합하면 이미 66이고 증손자 4명을 합하면 70명이다. 의견2는 덧셈을 못하는 것인지 손자가 51명이라고 한다. 여하간 이상하다. 왜 그러지? 정말 덧셈이 안되나? 덧셈이 안되면 계산기라도 좀 이용하지 대체 이런 엉뚱한 계산들은 왜 하는 지 모르겠다. 그런데 난 이 숫자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2011/02/16 - [Bible Stories] - 나이를 통해 본 야곱의 일생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말 저 사람들이 야곱이 애굽에 내려가는 시점에 있었느냐 하는 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이를 언급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으나 정확히 짚어 보지는 않은 것 같다. 좀 짚어 보면 70명이냐 71명이냐 75명이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오히려 추정 나이에 자식이 열명이나 있었던 베냐민은 아주 이상하며, 손자까지 있던 유다와 아셀이 정말 이상한 경우다. 심지어 유다는 손자를 며느리와 사이에서 보았으므로 보아스의 아들은 사실상 증손뻘이다. 이게 더 이상하지 않나?

여기에서 조금 성경 좀 읽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몇 마디만 하겠다. 어려운 말좀 하지 말았으면 한다. 맛소라사본 이야기는 왜 하나? 맛소라 사본이 뭘 뜻하는 지는 알고 하는 건가? 그런 이야기 하면 히브리어를 모르는 대부분의 신자들의 공격은 애초에 차단 가능하기 때문에 하는 건가? 성경에 나온 숫자들의 덧셈도 잘 못하면서 무슨 히브리어 사본까지 언급하나?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오히려 말도 안되는 설들이 진실이 되어 교회에 판치게 되는 것이다. 말은 쉽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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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2. 17. 08:45

나이를 통해 본 야곱의 일생 Bible Stories2011. 2. 17. 08:45

성경은 역사적인 순서대로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의 나열에 대해서만 모호한 것이 아니고 어떤 때는 아무리 봐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그 부분에 대해 덮고 넘어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믿기 때문에 성경을 보는 것이지 성경이 믿어져서 성경을 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확실하지 않다면 당신은 성경을 보기 보다는 믿음을 재확인 해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성경을 통해 믿음을 재정립하는 것도 가능하며, 가장 좋은 그리고 이상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야곱은 창세기에서 가장 자세히 다루어진 인물 중 하나이다. 그런데 나이를 역산하다 보면 참으로 재미있는 사실들을 몇 군데에서 발견 할 수 있다. 먼저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간 나이가 70세가 넘어서 이다. 즉, 라헬, 레아와의 애증의 러브 스토리가 완전 할아버지가 다 된 이후에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더구나 장자권을 에서에게 살 때가 40세가 되기 전이었으므로 (창세기 26:34에 나온 에서의 결혼 전에 장자권을 팔았다) 그 이후 약 30여년간 어머니 품 속에 있었다는 말도 된다. 알다시피 에서는 40세에 결혼을 해서 일종의 독립을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 (창세기 27:13)
리브가가 집 안 자기에게 있는 그의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가져다가 그의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창세기 27:15)
이 내용을 역으로 생각하면 리브가가 가지고 있지 않은 애서의 의복도 있는 것을 뜻하므로 에서는 독립을 해서 살았던 듯 하다. 그런데 이삭은 여전히 결혼도 하지 않고 그냥 집에 있었다. 더구나 리브가가 말하기를 '내 말만 따르고',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라고 하였던 것으로 봐서 별로 줏대도 없고 과단성도 책임감도 없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물론 너무 과한 해석이기는 하다. 그냥 이 부분은 재미로 봐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삭이 180세에 죽는데 그 때가 바로 애굽에 팔려갔던 요셉이 바로를 만나기 1년 전이다. 이삭이 죽고 나서 겨우 27년이 지나 야곱은 147세에 인생을 마감한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성경을 통해 알아 보도록 하자. 난 이런 식의 역산이 매우 흥미롭다. 읽는 사람도 같이 흥미를 느끼길 바랄 뿐이다.

먼저 명백한 것들을 정리해 보자.
사실-1. 이삭 - 40세에 리브가를 만남. (창세기 25:20)
사실-2. 이삭 - 60세에 에서와 야곱을 낳음 (둘은 쌍둥이였음.) → 이삭과 야곱의 나이차는 60년이고 이삭은 리브가를 만난 후 20년이 지나서야 자식을 봄. (창세기 25:26)
사실-3. 야곱 - 밧단 아람에 20년을 있었음 (레아를 위해 7년 라헬을 위해 7년 그리고 라반의 양들을 위해 6년) (창세기 31:41)
사실-4. 요셉 - 17세에 꿈을 꿈. (창세기 37:2)
사실-5. 이삭 - 180세에 사망 → 당시 야곱의 나이는 120세 (창세기 35:28-29)
사실-6. 요셉 - 30세에 바로를 만남. (창세기 41:46)
사실-7. 요셉 - 39세에 형제들을 다시 만남 ← 7년 풍년과 2년 흉년이 지난 후에 만났으므로 바로를 만났던 30세에 9년을 더하면 형제들을 다시 만난 나이가 된다. (창세기 45:6)
사실-8. 야곱 - 130세에 바로를 만남. (창세기 47:9) 따라서 요셉과 야곱은 91세 차이가 난다.
사실-9. 야곱 - 147세에 사망함. (창세기 47:28)
사실-10. 디나는 레아가 낳은 7자식 중에 7번째로 태어났다. (창세기 30:21)

다음으로 추론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사실들을 정리해 보겠다.
추론-1. 사실-4와 사실-6을 통해 요셉이 바로를 만나기 전까지 애굽에서 보낸 시간이 최대 13년임을 알 수 있다.
추론-2. 밧단 아람으로 간 지 7년이 지나고서야 레아, 라헬과 결혼하고 그 이후 자식을 낳기 시작함. (창세기 29:20,27)
추론-3. 요셉은 디나보다도 더 늦게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창 30:21-24) 따라서 레아가 연년생으로 자식 7을 낳았다고 가정 할 때에, 적어도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간 지 15년이 지나서야 요셉이 태어났다. 그런데 창31:25에서 요셉을 낳자 마자 야곱이 라반에게 떠나겠다고 통보하는 장면을 보며, 아마 이 시점이 레아와 라헬을 위한 의무기간인 14년이 끝나는 시점이 아니었겠느냐고 생각하여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간 지 14년이 지나면서 요셈이 태어났다고 보기도 한다. 31:27-28을 보면 직후라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럽기는 하나 그렇다고 의무가 끝나고 나서 일을 계속 했다고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이지도 않는다.
추론-4. 요셉을 낳은 후에 라반에게 고향 땅으로 돌아가기를 구함. (창 30:25) 요셉을 낳은 후 한 동안 양떼를 불려야 했으므로, 요셉은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간 지 늦어도 19년 이전에 태어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 할 듯 하다. 양들도 새끼를 베고 낳고 키우고 하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추론-3의 요셉의 태어난 시기하고도 물리는 문제인데, 즉, 요셉은 야곱이 밧단 아랍으로 간 지 14-19년 사이에 태어났다고 봐야 한다.
추론-5. 밧단 아람에서 돌아오는 도중 세겜에서 디나가 그 땅 추장 세겜에게 강간을 당한다. (창세기 34:1-2) 즉, 이 당시 디나는 강간을 당할 정도의 나이였다. 더구나 레위와 시므온이 복수를 한 것으로 보아 그들 역시 적어도 건장한 청년 정도의 나이는 됐었다고 봐야 한다. (창세기 34:25-26)
추론-6. 디나의 강간사건이 있은 후에 베냐민이 태어난다. (창세기 35:16-20) 베냐민은 야곱의 나이 92세에서 108세 사이에 태어난 것이 확실한데 (사실-4,8),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디나가 강간 당할 만한 나이를 14세로 보고 요셉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고 본다면 베냐민은 야곱의 나이 106세에서 108세 사이에 태어났을 것이라고 추정 할 수 있다.
추론-7. 추론-4에서 야곱이 말한 6년간 라반의 양떼를 지켰다는 것이 (사실-6) 요셉의 출생 이후인지 이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추론-3을 보면 레아가 7명의 자식을 낳은 후에 요셉이 태어났으므로 레아와 결혼 후 적어도 8년이 지난 시점에 요셉이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라반의 양떼를 위한 6년이 시작되기 전에 요셉을 낳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대로, 요셉이 라반의 양떼를 맡은 후에 점박이로 이루어진 양떼가 큰 떼를 이루기까지의 시간이 필요하므로 6년이 지난 다음 요셉을 낳은 것도 아니다. 결국 요셉은 그 6년의 중간 어느 시점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즉, 그 6년중 어느 기간은 품삯 없이 일하였고 남은 기간은 점박이를 갖기로 하고 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추론-8. 추론-3,4,7을 통해 볼 때에 르우벤은 요셉보다 최소 7살, 최대 12살이 많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밧단 아람에 간 지 8년만에 르우벤이 태어난 것은 거의 확실시 되기 때문이다.

위의 추론들을 통해서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야곱의 나이

 

비고

 

요셉의 나이

 

147

56

야곱 사망.

130

39

야곱이 바로를 만남. 때에 르우벤의 나이는 최소 46 최대 51세였다.

121

30

요셉이 바로를 만남.

120

29

이삭이 180세로 사망함.

108

17

요셉이 꿈을 .

106-108

15-17

베냐민이 태어남.

91

0

요셉이 태어남, 야곱이 밧단 아람에 적어도 15 최대 19년째이다.

 

이삭의 나이

 

72-76

132-136

야곱이 밧단 아람에 도착.

40

100

에서가 나이 40 결혼 .

<40

<100

에서에게 장자권을 취득함.


이제 문제되는 것들을 하나씩 살펴 보자. 먼저 야곱이 애굽으로 이주 할 때에 유다와 아셀은 손자가 있었다. 창세기 40:12절에 보면 베레스의 아들로 헤스론과 하물이 나오는데 이 베레스는 유다와 다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창세기 38:29) 즉, 베레스 자체가 이미 손자같은 아들이었으므로, 그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증손자뻘이라고 할 수 있다. 이삭도 60세에 야곱을 낳았고 야곱도 80세 정도에 르우벤을 낳은 것을 상기에 볼 때에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나이라고 하겠다. 당시 르우벤의 나이를 아무리 많게 잡아도 51세였다고 한다면 유다는 4째 아들이므로 아무리 많아도 48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셀의 레아의 네아들과 빌하의 두아들 다음 실바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니 나이를 아무리 많게 보아도 45세가 넘지 않았을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베냐민에서 나타난다. 유다가 요셉에게 베냐민에 대하여 말하며 사용한 단어가 '아이'이다. 어떤 성경에는 'lad'로 어떤 성경에는 'boy'로 번역되어 있는데 말 그대로 아이라는 뜻이다. (창 37:2에 근거하여 boy라면 late teen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For how shall I go up to my father, and the lad be not with me? lest peradventure I see the evil that shall come on my father. (창세기 44:34)
그런데 이주 당시 자손의 이름을 열거한 것을 보면 베냐민에게 이미 아들이 10명이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창세기 46:21) 위의 표를 근거로 야곱이 바로를 만날 당시의 베냐민의 나이를 추론하면 22세에서 24세 사이이다. 물론 많은 처가 있었다면 가능하긴 하겠으나, 별로 현실적이지 않다. 더구나 조상들의 결혼 형태와 비교하면 너무 빠르다.

불행히도 어거지로 숫자를 맞춰보려 해도 쉽지 않다. 이를테면 르우벤이 밧단 아람으로 간 지 8년째에 태어나지 않고 첫 해에 태어났다고 가정해 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7년이 지난 후 정식으로 결혼하고 애들을 낳기 시작한 것이 아니고 바로 결혼 생활을 시작하고 그에 대한 보상을 7년간 했다고 가정 할 수도 있다. 물론 성경에 드러난 내용은 그렇지 않다고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억지로 맞추려고 해 봐도 겨우 24세가 31세가 될 뿐이다. 그리고 유다는 겨우 55세에 증손자까지 봐야 한다.

애굽 종살이 430년(출애굽기 12:41) 광야생활 40년(신명기 8:4) 그리고 애굽에 들어 갈 때의 레위의 추정 나이 50세를 합한 약 520년 간 5대밖에 흐르지 않고 (레위-그핫-아므람-아론-엘르아살-비느하스, 출애굽기 6:16-25, 더구나 창 15:16에 사대만에 돌아오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 예언하고 있다), 애굽 종살이와 사사기 약 350년, 즉, 합해서 780년 기간 동안 겨우 10대밖에 흐르지 않은 것을 볼 때에 위의 계산은 물음표만 남기고 있다. (유다-베레스-헤스론-람-아미나답-나손-살몬-보아스-오벳-이새-다윗, 마태복음 1:1-6).

누구든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면 알려주기를 바란다. 물론 아주 속편하게 성경에 언급되는 사람들은 상징적인 사람들 뿐이므로, 거기에서 5대만 나와 있다고 해서 실제로 5대만 흐른 것은 아니라고 말 할 수도 있다. 즉, 그 사이 사이 더 있었을 거라는 말이다. (그렇게 해설하는 사람들도 많고, 나 또한 그리 틀렸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단 마태복음에서 딱 잘라 14대씩 맞춘 것을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기가 나는 불편하며, 누락된 것만 문제가 아니라 기간에 비해 너무 많은 것도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런 식의 속편한 해석은 타당하게 보이지 않는다.

다만 여기에서 몇 가지 가능한 (그러나 성경적으로는 틀리거나 또는 증명 불가능한) 가설을 몇 가지 이야기 해 보겠다.
  1.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갈 때의 르우벤의 나이가 50세 정도라는 것을 그대로 받아 들인다면, 유다나 아셀의 손자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으며, 베냐민도 10명이나 되는 아들을 두기는 힘들었다고 본다. 물론 아내가 10명이었다면 1년만에 10명의 아들을 낳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에 그렇다는 말이다.
    뭐 어차피 성경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받아들일 수도 있는 문제이나 아무래도 성경에 딱 잘라서 창세기 46:27에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 명이었더라"라고 나온 마당에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기는 쉽지 않은 문제이다.
    더구나 베레스가 태어난 과정을 보면 그 이야기는 애굽에 내려가서의 이야기라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에 분명 그 전에 있었던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유다가 적어도 손자 볼 나이는 되었었다고 보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나도 잘 모르겠다.
  2. 르우벤의 나이가 사실 많았다고 이야기 하자면, 야곱이 밧단 아람에 있었던 기간이 20년 보다 길어야 한다. 즉, 야곱이 밧단 아람에 들어간 시기가 70여세가 되어서가 아니고 한 50세 정도였다고 보고 들어가서 7년이 지난 후에 결혼 한 것이 아니고 결혼은 미리 했는데 그에 대한 의무를 뒤에 했다고 보면 르우벤의 나이를 한 70세 정도로 조정 가능해 지고 그러면 어거지로 약간이나마 맞출 수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너무 오류가 많아서 나 스스로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당장 뚜렷하게 나오는 요셉의 나이부터 문제가 되고 여하간 너무 말이 안된다.
  3. 야곱의 나이는 맞고 요셉의 나이는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편할 것 같다. 야곱이 바로를 만났을 때에 130세는 맞다고 하고 요셉이 39세가 아니었다고 본다면 조금 편해 진다. 즉, 요셉이 바로에서 7년 풍년 7년 흉년을 이야기 하는데 그 7년 풍년이 이야기 한 직후에 시작한 것이 아니고 한참 지나서 시작됐다고 보면 된다. 이를테면 20년 후에 시작했다고 보자. 그러면 요셉이 야곱을 만난 당시의 나이가 59세가 된다.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러브스토리를 만들 당시의 나이가 50대로 떨어지고 르우벤은 대충 70세 정도로 맞출 수 있다. 이야기가 부드러워지고 있다.
    그럼에도 남는 문제는 베냐민은? 아들이 10명이나 있는데 '아이'라고 한 부분은?
어차피 야곱이 애굽에 내려갈 당시의 후손 숫자는 성경에서 대표적인 논란 거리중의 하나이다. (2011/02/18 - [Bible Stories] - 야곱의 후손: 성경은 무오한가) 그 논란을 가만히 살펴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을 맞는 것으로 맞추기 위해 정말 눈물겨운 노력들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덧셈이 다들 안되는 것인지 아니면 성경을 안 읽고 남들이 하는 말을 가지고 재해석을 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어쨌든 그 숫자에는 문제가 있고 누가 틀렸건 틀렸다. 그러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성경의 저자가 하지 않고 넘어갔으나 이면에 자세히 이야기 하기에는 분량상 또는 어떤 이유상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고 인정 할 필요가 있다.

나중에 천국가면 하나님께 물어봐야겠다. 물론 그 옆에 모세 할아버지도 동석시킬 생각이다. 난 그냥 모세 할아버지가 떳떳하게 '뭐 그런 걸 그렇게 오래 생각했어?'라고 말하고 하나님이 '별거 아니잖아?'라고 말씀해 주실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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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2. 16. 12:36

십일조 Bible Stories2011. 2. 16. 12:36

어느 날 친구에게서 십일조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 친구는 천주교에 잠깐 다니다가 현재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있는 친구였는데, 질문의 요지는 천주교에서는 십일조를 내라고 하지 않는데 개신교에서는 십일조를 내라고 하는 이유에 관해서였다.

먼저 나에게 있어서 이에 대한 성경적 또는 논리적 대답을 떠나서 그 질문 자체에 대해 의문을 먼저 표하고 싶다. 점잖게 말해서 위와 같이 질문한 것일 뿐이고, 거칠게 말하자면 ‘천주교는 십일조를 내라고 강요를 하지 않고 쿨한데 왜 개신교는 찌질하게 돈 내라고 하느냐’ 일 것이다. 어느 교회도 십일조 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런 교회도 있겠지만 제발 어떤 논의를 함에 있어서 예외 사항은 말하지 말자. 항상 예외는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 예외는 어떤 것도 설명 해주지 않는다. 개신교에서 헌금의 종류를 주일헌금, 십일조, 건축헌금, 감사헌금 등등으로 나누어 놨을 뿐이다. 내기 싫으면 내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더욱 웃긴 것은 (나는 이 부분에서 웃긴다는 표현보다 더 나은 표현을 찾지 못하겠다) 그것을 가지고 문제 삼는 사람은 거의 다 교회 바깥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아주 이타적인 심정에서 거짓된 것을 구별 못하고 개신교의 사탕발림에 속아 넘어가서 허우적 거리고 있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함 일 수도 있으나, 그런 공격 (절대 논증 또는 비판이라고 보이지 않으므로)에서 배려 또는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불가능했었다.

이 글은 악의적으로 그냥 개신교의 모든 것이 싫은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알려준다든지 또는 그들의 공격에 대해 방어하기 위해 쓰는 글이 아니다. 성경적 근거를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쓰는 글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읽어주기를 바란다.

우선 나는 천주교인도 아니고 천주교를 공부해 본 일도 없으며, 가족 중에 천주교인이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들이 십일조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그들이 ‘십일조는 성경적이지 않으므로’ 십일조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문화도 바뀌고 생각도 바뀌고 필요도 바뀌면서 그들이 어떤 시점에 필요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따라서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되며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지만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십일조를 내지 않는다고 해서 ‘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했어’라고 말 하지는 않는다. (나도 그런 목회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으나, 제발 그런 이상한 사람의 말은 무시하자. 아무리 말라기서에 그런 내용이 나와 있다 하더라도 그 말씀을 정죄하는 데에 사용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본 뜻과는 멀어져 있다 할 수 있다.) 분명히 말해서 당신이 당신의 십일조 생활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 참고로 십일조와 삼십일조 -천주교신자들에게 고함을 읽어 보면 이 글을 쓴 천주교 신부도 십일조의 참된 의미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번 정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십일조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는 오히려 카톨릭 사전에 아주 자세하게 적혀 있다. 그 내용은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수입이나 생산물의 십분의 일을 교회의 유지와 확장을 위해 내놓는 것을 말한다. 종교적 목적을 위해 농산물 · 가축 · 전리품(戰利品), 기타 소유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은 고대에 다른 종교와 문화 속에서도 널리 행해지던 관습이었다. 구약성서 안에서의 십일조에 관한 언급은 서로 다른 때와 장소에서 행해진 다양한 관습을 반영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고(창세기 14:21), 야곱도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유의 십분의 일을 하느님께 드린다고 맹세하였다(창세기 28:22). 신명기 안에서 십일조는 땅과 그 소출의 주인인 하느님께 감사하는 헌물로(신명기 14:22-27), 레위인들을 부양하는 수단(민수기 18:21)으로 빈곤 구제를 위한 헌물(신명기 14:28-29)등으로 언급되어 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느님을 속이는 일이라 하였고 충성스럽게 십일조를 드리는 일은 축복받은 일이라 하였다(말라기 3:8-10). 결국 십일조는 인간의 모든 소유가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께 속한다는 확신의 표현이다. 십일조의 관습은 신약에서도 인용되어 있다(마태복음 23:23-24, 누가복음 18:12). 유대법과 신약의 해석을 따라 구(舊) 교회법은 신자들이 생산물과 수입의 십분의 일을 성직자들의 생활과 종교 업무를 위해 바쳐야한다고 규정하되 각 지방과 국가의 법과 관습에 따라 십일조를 결정할 것을 허용하였다. 가톨릭 교회에서 십일조는 신자 각자에게 임의로 주어져 있다. 많은 나라에서 교회의 유지는 십일조보다 자발적인 기부에 의존하고 있다. (가톨릭사전)
이 내용에서 언급 되듯이, 십일조는 상당히 긴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예수님 시대에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일조 자체에 대해 평가를 하신 일이 없다. 다만 카톨릭에서는 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십일조를 ‘관습’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난 이 부분에 대해 평가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관습으로 생각한다면 관습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십일조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었나 보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십일조는 인간의 모든 소유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속한다는 확신의 표현”이라는 데에 더 가치를 두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십일조 제도를 이어 오고 있는 것이다.

위의 사전에 나오지 않으나, 십일조에 대해 다른 곳에서도 언급 된 곳이 있는데, 바로 느헤미야서다. 바벨론 이주 후 하나님의 약속대로 70년만에 포로 귀환이 시작되어 수 차례로 나뉘어서 오랜 세월 동안 귀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느헤미야는 3차 포로귀환 시에 총독으로서 예루살렘으로 왔던 사람이다. 당시 총독으로 있었던 하나님의 사람 느헤미야로서 가장 시급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는 모세의 율법을 재정립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했었던 듯 하다. 일단 그의 목적이었던 성벽재건이 완성되고 난 후 제일 먼저 했던 것이 모세의 율법을 재정립하는 일이었으며, 그 중 하나가 십일조였다. 즉, 타락해서 심판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에서 시급하게 요구되는 것 중의 하나가 십일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필요에 의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 필요는 적어도 내 생각에는 지금도 상존하고 있다. 따라서 특별한 필요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십일조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 처음 익은 밀의 가루와 거제물과 각종 과목의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들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의 여러 방에 두고 또 우리 산물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였나니 이 레위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성읍에서 산물의 십일조를 받는 자임이며 (느헤미야 10:37)
더구나 성경에서는 삽십분의 일조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들은 일년에 한번 십일조를 드렸었는데, 신명기에 보면 3년에 한번씩 십일조를 한 번 더 내서 가난한 자들과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들) 고아 과부들을 도우라고 되어 있다.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명기 14:28-29)
따라서 십일조는 적어도 개신교에서 돈이나 벌자고 만들어 낸 제도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충분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바울의 말과 같이 즐거이 드려야 정말 하나님께 상달되는 헌물이 된다. 내 마음에 탐탁치 않고 꺼려진다면 내지 않는다고 뭐라고 할 사람은 없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린도후서 9:7)
당신 스스로 결정하여야 한다. 무엇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지 당신이 결정하여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십일조는 필요 없다라고 생각된다면 하지 않으면 된다. 그런데 내가 양육을 하면서 성경통독을 권유해 본 일이 있는데, 성경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십일조에 대한 필요를 느끼는 경우를 보았다. 나는 어렸을 때 부터 당연하다 생각하고 해 왔었기 때문에 결단을 통한 십일조의 과정을 처음 보는 셈 이었는데, 성경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십일조를 작정하는 것을 보았고, 그 작정하는 모습을 보면서 십일조 내기로 다짐하는 다른 사람도 보면서 십일조는 믿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외적 모습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의 믿음을 판단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경험으로 그렇게 말을 하고 싶을 뿐이고 반대되는 예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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