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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Stories'에 해당되는 글 2

  1. 2011.02.04 국민학교 시절
  2. 2011.02.04 ToBeStable이 블로그를 시작한 이유
2011. 2. 4. 13:58

국민학교 시절 My Stories2011. 2. 4. 13:58

물론 지금은 초등학교라고 부르고 또한 국민학교라는 말에 일제의 잔재가 묻어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왜인지 나는 초등학교라는 말이 불편하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중에는 이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당시 우리 집은 상당히 가난했었다. 4평 정도 되는 집에 할머니까지 5식구가 살았었는데 부엌에는 곤로와 아궁이 작은 찬장이 전부였으며, 두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기도 힘든 크기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집 바깥에 나무 판자로 얼기설기 만든 간이 창고가 있었는데 대략 1평 정도 되었던 것 같다. 거기에는 연탄과 잡다한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당연히 화장실은 없었고 화장실을 가려면 주인집에 가서 벨을 누르고 문을 열어 주면 그 집 마당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했었다. 나는 그런 과정이 귀찮았었다. 내 어렵풋한 기억과 나의 성격을 고려 했을 때에 창피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냥 귀찮았다. 그래서 어렸을 적 나는 변 참기의 달인이었다. 심심찮게 일변/일주 또는 일변/이주를 시행하고는 했었다.

내가 살던 집에서 나가서 대략 10~20 미터만 걸어 내려가면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 담장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대략 50~60미터만 가면 다니던 초등학교에 도착 할 수 있었다. 내가 살던 곳은 말이 서울이지 집이 산 자락에 붙어 있었다. 나가면 바로 산이었고 학교 반대방향으로 5미터만 가면 개울이 있었다. 머리 속에 그려보면 알겠지만 그냥 간단히 말해서 개울과 산에 붙어 있는 집이었다. 그렇다고 완전 산골 시골 집을 상상하면 안된다. 서울에서 충분히 기대 할 수 있을 만한 볼품 없는 민둥산에 소나무 몇 그루 박혀 있는 몹시도 '당시 서울 스러운' 산에 붙어 있는 집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충분히 낭만적이었다.


여름이면 집 앞에는 호박 넝쿨이 가득했고 깨밭 향내가 그윽 했으며 (이걸 이해 할 수 있으면 십중 팔구 깡촌 사람이다. 깨 밭에 흐르는 그 향기는 아는 사람만 안다.) 그 옆으로는 아주까리가 빼곡히 자라고 있었다. 여름, 비가 오는 때면 종종 그 아주까리 잎을 우산 삼아서 다니기도 했었다. 집 옆에 있었던 큰 아카시 나무는 때가 되면 꽃 송이를 주렁 주렁 매달고 벌들을 유혹 했었는데 엉뚱하게도 난 거기에 자주 유혹되곤 했었다. 나무 타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나로서는 몇 미터나 되는 나무를 한 번에 올라가서 그 꽃들을 따 먹었었다. 그러면서 벌레도 많이 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산에는 큰 나무는 적었던 대신 산딸기 나무가 참 많았다. 그리고 그 때 그 산에서 먹었던 산딸기 만큼 크고 실한 산딸기는 그 이후 깡촌에서도 구경 해보지 못했다.

집 앞 민둥산을 넘어가면 옹주묘가 하나 있었다. 그냥 나는 옹주묘라고만 알고 있다. 정확히 누구의 묘인지 들어 본 일이 없는 것 같다. 대략 내 걸음으로 한시간 정도 거리였는데 거기에 가면 약수터가 있었고 그 약수물이 모인 작은 물 웅덩이가 있었다. 그 웅덩이에는 물방개가 있어서 잡아서 놀았던 기억이 있다.

나의 일과 중의 하나가 개울 물을 막는 것이었는데, 당시 나는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 없이 튼튼한 댐을 만들었다. 물론 나만 만든 것이 아니고 아이들 모두의 기본 일과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만들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물을 완전히 막는 것은 쉽지 않다. 나는 그것을 완전히 그리고 나 정도의 아이가 밟고 건널 수 있을 만큼 튼튼하게 만들었는데, 큰 돌 작은 돌들을 이용해서 일단 골조를 만들고 삽으로 근처 야산의 흙을 퍼다가 물에 약간 적신 후 안쪽에 발라서 새는 물이 없게 만들었다. 하여간에 내가 제일 위에서 댐을 만들면 거의 물이 밑으로 흘러 내려가지 않았었다. 결국 댐은 아주머니 들에 의해서 무너졌는데, 우리 동네에서는 아주머니 들이 개울에서 빨래를 했었기 때문이다. 여기 까지 읽은 사람은 내가 아무리 사정해도 사극에서나 나오는 깡촌을 상상하겠지만, 정말 서울 스러운 그런 곳이었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해 본다.

놀랍게도 그 개울에는 가재가 살았다. 더 놀라운 것은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아무도 거기에 가재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었다.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 처럼 돌을 뒤집으니 나오는 그런 가재가 아니었다. 돌을 뒤집으니 나왔다라는 것이 성립할 만큼 큰 개울도 그렇게 수량이 많은 개울도 아니었다. 그냥 내가 어느 날 아무 생각없이 개울의 가장 자리를 깊이 파 본 일이 있었다. 그냥 파다 보니 찬 물이 흐르는 곳이 있었고, '여기 뭐가 있지? 가재 같은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심정으로 거의 당시 내 팔이 다 들어 갈 만큼 파니 어떤 놈이 내 손가락을 물었고, 당겨 보니 가재가 나왔을 뿐이다. 내가 그것을 발견한 이후, 하교 시간이 되면 애들이 가방은 산 자락에 던져 두고 빼곡히 개울 가에 앉아서 땅을 파는 진풍경이 펼쳐지곤 했었다.

잠자리
메뚜기, 따다다다 날아가는 따닥개비 소리
호박
빗물
개울
아주까리
산 기슭의 밭들
아카시나무
산딸기
개울 가의 아주머니들
겨울 처마 밑의 고드름

이런 모든 것들도 결국 세월 속에 하나씩 하나씩 없어져 갔다. 불행하게도 나는 이런 추억들을 안고 이사갔다가 나중에 돌아와서 차갑게 변한 것을 본 것이 아니고, 하나씩 없어져 가는 것을 내 눈으로 다 봤다. 우리 집이 가장 가난해서 그랬었는 지 모르겠지만 없어져 가는 자연과 함께 하나씩 모든 친구들이 떠나 가도록 우린 계속 거기 살았고, 그 과정을 나는 전부 기억한다.

내가 좋아했던 것이 없어진 자리에는 여지 없이 거대한 콘크리트가 들어 섰고, 그 콘크리트 안에는 부자가 살았다. 어느 순간 보니 우리 동네에서 제일 잘 살던 부자가 그냥 옛 동네 부자로 전락해 있었다. 아직도 굴삭기가 호박밭을 뒤엎을 때에 유난히 호박밭에 많았던 갈 곳 잃은 방아개비들의 날개짓이 머리 속에 강렬한 잔상으로 남아 있다. 맑은 물이 흐르던 개울에 검은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앞에는 산 옆에는 개울이었는데, 앞에도 수미터는 됨직한 콘크리트 벽, 그리고 옆에도 그런 콘크리트 벽이 있었다. 여전히 물은 흘렀는데, 그 콘크리트 벽에 있는 작은 구멍 들에서 물이 흘러 내렸었다. 그 구멍을 보며 그 안에는 무언가 살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왜 존재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 콘크리트 벽 안에 사는 사람은 절대 이용하지 않는 놀이터가 하나 생겼었다. 그 즈음에는 이미 내가 놀던 친구들은 다 떠난 상태였고, 나랑 내 동생만 거기에서 놀고는 했었다. 당시에는 재미 있었으니까 자주 갔었을 테지만, 이제 와서는 상당히 우울한 그림으로 기억속에 남아 있다. 글의 분위기상 추측 가능한 이유는 있겠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왜 그렇게 우울 하게만 기억 되는 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가며, 거기에 살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상대적'으로 빈민 층으로 바뀌어 갔고, 우리가 민둥산이라고 불렀던 곳에는 아파트 들이 즐비하게 늘어서며 '신 부유층'들이 살게 되었다. 밤이면 돗자리 깔고 하늘의 별을 셋던 곳에 아파트들이 가득 들어섰던 즈음 부터는 별 보는 일도 줄고, 노을도 왜인지 사라진 것 같았다. 그냥 서울 스러운 시골이 서울보다 더 서울 스러운 흉물스러운 콘크리트 덩어리로 변해 갔었다.

나는 이제 그 콘크리트에 살던 사람들도 부자는 아니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그 때 그 산을 조금만 사 놨었으면 대박 났었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나이도 먹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 동네는 나에게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상하게 가장 강렬한 기억중 하나가 비 오던 장면들이다. 그 동네에서 비만 오면 생겼던 빗물 길은 지금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친구들도 다 떠났고, 몇 몇을 제외하면 이름도 어렴풋 하기만 하지만, 나는 당시 그 동네에 살 수 있었다는 것을 감사한다. 가난 했지만 그 시절이 난 그리 나쁘지 않았다. 지금은 다 변했겠지만, 그래도 내 기억 속에는 그대로 남아 있으니 그걸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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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블로그를 통해 나와 소통하고자 한다.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 또한 기대되지만, 일단은 나와 소통하기를 원한다.

내 생각은 계속해서 변해왔다. 절대 변하지 않을 진리인 양 믿어왔고 주장해 왔던 것 조차도 어떤 경우 한 순간에 쉽게 변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한 때는 과연 나란 사람이 '의견'이란 것을 말 할 수 있을 지에 대해 의심하기 까지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 역시 자연스럽다고 말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 편, 바뀌어 가는 생각의 흐름 속에서 잊혀져 가는 내 과거와 현재의 나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내 과거가 불쌍하기도 하고 그렇게 나이먹어 가는 내가 서글퍼 지기도 했다. 그래서 글을 통해 앞으로 과거가 되어 버릴 현재의 나의 편린들을 남겨볼까 한다. 어차피 살아 숨쉬지 못 할 기억일 지라도 자취를 남겨 줌으로써 한 때 나에게 꽤나 중요했었던 것들에게 예를 표하려고 한다.

처음 시작하는 지금의 내 마음처럼 그럴 듯한 블로그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난 지금 상당히 설렌다.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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