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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돌아가는 이야기들을 보고 있노라면 참 불편한 것도 많고, 싸울 것도 많은 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안을 불편해하고 그 불편해하는 사람을 보며 왜 불편해하나 이해하지 못하여 불편해하고, 조용히 있지 못하고 불편하다고 표현하는 사람들을 보며 불편해하고 등등 끝도 없이 이 불편의 사슬은 연결되고 또 연결되어 간다.


참고로 이 글은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을 나름 정리한다고 한 것인데 상식과 편견이라는 주제 자체가 너무 모호하고 광범위하다 보니 정리가 잘 안 되어 글이 난삽한 점을 미리 밝힌다.


미국에 살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가 다양성(Diversity)이다. 그런데 이 단어를 대하는 문제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 다양성의 추구는 남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종종 어떤 의견은 ‘옳은 것'으로 돌변하여 반대를 허용하지 않는 ‘믿음'이 되어 버리고, ‘나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라는 의견은 의견으로서 존중되지 않고 종종 폭력적인 공격에 시달리기도 한다. 다양성을 추구하면서 무엇을 다양하다고 할지에 관한 논의는 내가 쓰고자 하는 내용과 다르기에 일단 넘기겠다. 그러나 그 문제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다양성을 추구하면서 가장 방해되는 요소를 꼽자면 편견(Bias) 일 것이다. 그런데 편견은 종종 상식과 구분하기 쉽지 않다. 어떤 상황에 대한 경험이 비슷한 상황에서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Thinking, Fast and Slow, 아주 좋은 책으로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런 경험이 쌓여서 그 사람의 행동 양식을 결정하는데, 집단의 대다수가 비슷한 행동 양식을 취하게 되면 그것을 상식적인 행동이라고 하지 않을까 한다. 물론 이도 어려운 이야기이긴 하다. ‘상식'이라는 단어도 ‘상식적인 행동'이라 할 때와 ‘시사 일반 상식'이라고 할 때 조금 다른 의미가 있으니 말이다. 복잡한 이야기는 일단 덮어두고, 또는 모르겠고. 그러고 보면 정말 상식과 편견 사이에 구분 점이 있긴 할까? 극단적인 경우를 생각하면, 즉, 유색인종 차별과 성차별 같은 것을 생각하면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극단에서 조금씩 이동하다 보면 그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이 분명히 존재하며, 이에 대해 불편해하려고 작정하면 아주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조금 다르게 이야기하여 더 어렵게 말하면, 시대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상식이 다르고, 시대에 따라 상식이 변해간다는 말은 어느 시점에 상식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고 그것이 커지고 커져서 다수의 의견이 바뀌어나가는 일은 인류 역사에 계속 반복되어 왔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면 그 반동이 아직 성공할지 못할지가 결정되지 않은 과도기 단계에서 반동을 관철하려는 사람과 억누르려는 사람 사이의 갈등은 당연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냥 서로 너그러이 다양성의 차원에서 모든 의견을 동등하게 취급하는 사회는 너무 이상적이다. 나는 그런 사회가 있으면 거기에 가서 살고 싶으나, 내가 사는 사회가 그렇게 될 거라는 희망은 솔직히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상식을 무엇이라고 정의하면 좋을까? 상호 협의 없이 사용 가능한 개념이라 하면 말이 될까? 그러니까 수학에서 공리와 같은 개념이라고 볼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는 ‘협의 없이 사용 가능한 개념'이 점점 사라지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이런 측면에서 현대사회는 역사에서 가장 큰 과도단계에 들어선 것으로 생각한다. 모든 경계가 무너지거나 도전받고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상대방이 그(he)라고 부르기를 원하는지 그녀(she)라고 부르기를 원하는지를 묻는 것부터 대화가 시작돼야 하는 시대를 향해가고 있다. 모든 운동(movement)에는 목적이 있을 텐데 목적이 무엇인지 모호한 경우가 요즘은 많은 것 같다. 그녀라고 부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그라고 부르면 불쾌할 것이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미리 확인하고 그녀라고 불러주면 좋긴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누가 나에게 그라고 부를까요 그녀라고 부를까요라고 묻는다면 기분이 나쁠 것 같다. 그러니까 그라고 부를지 그녀라고 부를지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라고 물은 다음 예라고 하면 그라고 호칭을 할까요 아니면 그녀라고 호칭을 할까요? 라고 물어야 하는 아주 복잡하고도 오묘한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해 놓고도 정말 오묘한 이야기이다. 상대방을 존중하기 위하여 그 사람이 불편해할 수도 있는 질문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확실한 기준점 즉, 상식이 있다면 이런 문제를 쉽게 넘길 수 있는데 모든 상식이 도전받고 있는 이 시대에는 기댈 기준점이 없다. 그러니 입이 있는 사람은 모두 소리치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모두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어떤 행동이건 어떤 말이건 간에 불편한 사람은 존재한다. 요즘같이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라는 말을 많이 했던 적이 없다. 단언컨대 내가 어렸을 때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라는 말을 자주 하지 않았다. 모두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이상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수많은 이상주의자가 있었고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다르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이제 그 ‘상식'이 되었고, 진리이자 이 시대 집단지성의 산물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불편해하는지 예를 들어보자. 소설가협회, "소설 쓰시네" 발언 추미애에 공개 사과 요구의 경우가 불편해하려고 작정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사안 자체가 코미디라고 생각하긴 하는데… 아 참 이렇게 말하면 코미디언협회에서 뭐라고 하려나? 보통 ‘소설 쓰시네'라는 표현은 누군가 너무 무리한 상상을 하는 경우 비아냥대는 방식으로 사용한다. 물론 가벼운 핀잔 정도로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추미애 장관과 의원 사이의 대화로 적절한 표현이었냐 아니냐는 내가 하고 싶은 말과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에 논하지 않겠다.


저런 요구를 하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어떤 부분에서 저렇게 집단행동을 해야만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것도 과거에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문제였는데 이젠 아니게 된 어떤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적어도 메시지의 측면에서 그들의 메시지는 설득력이 없다. 이런 주장이 합당하다고 한다면 모든 형태의 ‘비유'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소설도 무미건조해지겠지. 그러면 아무도 안보고 소설도 없어지겠지. 너무 극단적인 논리의 비약이긴 한데, 뭐 아예 말이 안 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Invention of Lying (2009)라는 영화는 제목이 보여주듯 거짓말에 관한 이야기인데, 작중 설정으로 소설이 없다. 그러니 이런 비유는 동서양을 막론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게 지금 개봉되었다면 소설가들이 또 성명을 발표하려나?) 물론 이런 생각조차도 내가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는 편견에 기인한 것일 수 있기에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그런데 동시에 이런 부분에까지 조심스러워져야 함에 약간 서글프기도 하다. 자유에 대한 추구가 나를 얽매이게 하고, 다양성의 추구가 모두를 획일화되게 하는 듯해서 걱정도 되고 서글프기도 하다.


불편의 문제에서 상식의 문제로 다시 돌아와 보자. 민주주의를 “다수의 소수에 대한 폭력"이라고 생각하는 내게 현대의 흐름은 그냥 소수만 인정하던 개념이 다수의 것이 되면서 권력이 이동되는 현상일 뿐이기는 하다. 다만 그 다수가 된 사람들이 자꾸 당위를 무기로 하여 공박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게 불편하다. 민주주의는 사회적 합의가 중요하지 (즉, 누가 다수냐)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가 중요하지는 않다. 옳고 그름은 절대성을 지니는 개념이고, 이것은 다수 소수의 문제와 별개이다. 다수의 동의로 옳고 그름이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개념을 ‘나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해' 정도로 표현해야지 ‘이것이 옳은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걸 따라'라고 하면 안 된다. 그렇게 표현하는 순간 아주 자연스럽게 나와 같지 않은 사람을 그르다고 규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LGBTQ parade가 있었는데 회사에서 같이 가자고 권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LGBT가 점점 확장되더니 이제는 LGBTTQQIAAP라고 한다. 어디까지 길어질지도 흥미로운 볼거리이다. 이렇게 길어지는 과정 역시 상식이 깨지고 더 깨어져 나가는 현상을 보여준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운동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성적 취향이나 자기 결정에 관계없는 공정한 권리와 기회가 주어져야 함에는 동의하지만, 그 운동이 추구하는 방향 즉, 개인의 제한 없는 성적 자기 결정권에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했고, 완전 미친놈 보는 듯한 눈빛을 답례로 받았다. 물론 민주주의는 다수의 소수에 대한 폭력이라고 믿는 나는 이런 대우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소수이니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하기는 하다. 그런데 그들이 그들의 생각을 존중받기를 원한다면 동의하지 않는 사람의 생각도 존중해줘야 하지 않나? 내가 너무 순진한 것일 수도 있다. 다만 과거 당위성에 근거한 공격으로 상처 받았던 이들이 당위로 반격을 하는 부분이 씁쓸하다.


나를 미친놈 보듯이 한 사람에게는 이렇게 답을 했었다. 민주주의는 사회적 합의가 중요하고 그 합의에 이르기 위해 개개인의 의견은 의견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 옳고 그름을 논하고 싶다면 누가 최종적으로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있겠는가.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투표가 그 방편이라고 대답하고 싶다면 그것은 다수결에 의한 결정일 뿐이고, 심지어 그것도 처음으로 돌아가서 모두의 의견이 존중받을 때나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말하겠다. 옳고 그름을 논하려면 왕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때에는 왕이 최종 결정을 해 줬으니 그런 방식이 가능했었다. 물론 미친놈 보듯 하는 눈초리의 변화는 없었다. 참고로 상대방은 나보다 거의 20살이나 어린 사람이었다. 그러니 상식의 간극은 더 컸을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고린도전서 10: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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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