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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6. 13. 13:21

구약은 어려워 Novels or Essays2012. 6. 13. 13:21

보통 구약은 어렵다고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구약의 하나님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기독교인이 많다. 이에 대해서 오늘 살펴보았으면 한다.


어렵다는 그 말이 그저 말 그대로 어렵다는 뜻이기만 하다면 별로 할 말이 없다. 어렵다고 하는 사람에게 쉽다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 없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신약이 훨씬 더 어렵다고 말하겠지만, 누구나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은 다를 수 있으니 할 수 있는 말도 한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어렵다는 말을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작게는 구약의 위인을 (기독교인으로서 믿음의 선진을 위인으로 부를 수 없다고 공격할 수 있겠지만, 그냥 넘어가자.) 이해할 수 없다는 불평으로부터 크게는 구약의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위험한 발상까지 다양하다. 어찌 됐든 단순히 어렵다는 이야기이기보다는 '이해할 수 없다.' 또는 '이해 못 하겠다.'라는 이야기인 경우가 많고, 이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이 글에서는 구약이 어려운지 쉬운지에 대해서가 아니고, 구약의 필요성에 대해서 논해보되, '비 신학적'으로 논해보자. 신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구약의 필요성'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수 있다. 그냥 내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한 소회 정도로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


먼저 나는 구약이 정말 인간적이며, 그러므로 우리의 실생활에 쉽게 적용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에 반해 신약은 우리 인간 개인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와 닿지 않게' 다룬다. 이렇게 어렵게 꼬아서 이야기하는 이유는 분명 신약도 인간의 실질적인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정말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우리가 결혼해야 할 이유를 성욕에서 찾기도 하고 (고전 7:9) 음식에 관해 논하기도 하며 (고전 8), 더구나 예수님은 히브리서 기자가 표현하기를 우리 인간을 잘 이해하는 분이라고 하기도 했다. (4:15) , 신약 기자들은 인간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별로 와 닿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일까? 구약의 기자들과 달리 신약의 기자들은 대부분 순교했다. 그들은 목숨 걸고 신앙생활을 했으며, 흐트러짐이 없었다. 물론 베드로는 여전히 성격이 급했고, 남의 눈치를 살폈으며, 바울 역시 그 성격 어디 가지 않은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어쨌든 따라가기 어려운 신앙의 모습을 보였다. 더구나 정말 힘든 상황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자연스럽게 삶 중에 실천하고 살았다. 이런 면에서 나는 신약에 나타나는 개개인의 삶이 쉽사리 와 닿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그들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너무 높은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그에 반해 구약에 나타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노아의 술 문제, 아브라함과 이삭의 거짓말하는 문제, 겁쟁이 엘리야, 참으로 말 안 듣는 요나, 비겁하고 교활했던 야곱, 시기심에 불타올랐던 미리암의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정말 엄청나게 많은 성(sex) 관련 이야기들이 있다. 특히 성에 관해서는 그 범위가 실로 만만치 않다. 롯은 자기의 두 딸과의 사이에서 아들 둘을 두었고, 소돔 성은 동성애자들의 소굴이었으며, 유다는 창녀를 샀는데 알고 보니 며느리였고, 심지어 그 사이에서 아들까지 낳았고, 베냐민 땅에서 문제가 생기니까 바람나서 자신을 떠났던 첩을 그냥 내주는 레위 찌질이의 이야기, 그리고 그 베냐민 사람들은 그 여자를 밤새도록 윤간하여 결국은 죽게 만들고, 그 찌질이는 그 죽은 첩을 토막 내 이스라엘 사방에 보내었다 (19). 그 인물의 중요도로 볼 때에 이런 부정적인 이야기의 정점을 찍은 사람이 바로 다윗인데,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팽개치고 왕궁에서 퍼질러 자다가 저녁 즈음에 일어나 최측근의 아내인 밧세바를 취한다. 참고로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와 아비 엘리암 모두 다윗의 30인의 용사에 속하였고, 그의 조부 아히도벨은 다윗의 친우였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아비의 첩들과 벌건 대낮에 공개적으로 관계했으며 (삼하 16:22), 그의 또 다른 아들 솔로몬은 드디어 후궁 700에 첩 300을 둠으로써 모든 남자의 선망 대상이 되었다.

합법적이면서도 뭔가 개운치 않은 성도 많이 나온다. 아브라함은 모두의 기대와 달리 첩이 두 명이었고, 야곱도 두 명, 그리고 모세도 첩이 있었다 (12:1), 이스라엘 사사들과 왕들은 정말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첩이 많았고 자식도 많았다.


그런데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인간을 이해하는 데에는 구약이 도움된다. 신약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이상을 보여 준다고 하면, 구약은 정말 어쩔 수 없는 비참한 인간의 모습을 꾸밈없이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오늘의 못난 ''와 나를 짜증 나게 하는 ''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데에는 구약이 훨씬 효과적이며, 실질적으로도 나는 구약의 예를 들어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러함에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할 때에는 신약을 주로 인용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에, 온전하기 위해 그리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위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노력하는 우리로서 일면 이해하기 어려운 구약의 인물들이지만, 반대로 우리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추악함과 어쩔 수 없는 본성 등을 설명하는 데에는 구약만 한 것이 없다. 구약이 없었다면 아마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이중적이고 위선적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믿음으로 이런 인간이 겪고 있는 불완전성에서 자유로워지게 되는 이야기를 더 기대한다. 그런 면에서, 너무 약하고 너무 인간적인 구약의 인물들이 어떤 때에는 나를 너무 실망하게 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도 계속 미래에도 지금과 같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면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조금 더 무거운 주제이면서도 약간 신학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공의의 하나님에 대해 야속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더구나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대목에서는 거의 모든 기독교인이 고개를 내젓는다. 당신이 당신 자신을 스스로 그렇게 표현하셨으므로, 그분을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우리는 우리의 이성과 관계없이 그렇게 받아들여야 함에도, 실제로 그렇게 인정하기보다 의문시하고 심지어 외면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직간접적으로 거의 모든 이단이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멀리 가면 영지주의가 바로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름의 해석을 하다가 나온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이야기는 너무 신학적인 이야기라 일단 넘어가고 간단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당신이 믿는 것이 사상인지 도덕률인지 위안을 주는 덕담인지 아니며 절대자이신 하나님인지 알아야 하고 결단해야 하고 결정해야 한다. 당신이 믿는 대상이 하나님이고 그를 주로 섬기기로 했다면 사실 이런 고민은 애초에 말이 안 된다. 그분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구약을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불평하라. 그러나 성경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해하지 못하는 당신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 불평하고 회피할 문제가 아니다.


이단들에 대해 연구하다 보면 다음과 같은 조금은 역설적인 깨달음을 얻을 때가 있다. 이단들이 힘들어하는 것은 신약이 아니라 오히려 구약이며, 이단들이 부정하는 것이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래서 이단들의 주장이 바르다고 인정할 때 가장 먼저 부정되는 대상이 예수님과 신약이 아니고 성부 하나님과 구약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구약이 더 복음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의 믿음과 보다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너무 많이 말하는 것은 오히려 논지를 흐릴 가능성이 있으므로, 위의 두 가지 이유로 나는 구약이 우리에게 필요하며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어렵다고 말하고 있는 당신이 차마 하지 못한 말이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라면 다시 한번 구약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이 성경을 스스로 아직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설교에 노출되는 빈도로 볼 때에 (이해와는 별도로) 신약에 훨씬 더 익숙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감히 주장하고 싶다. 당신의 신앙에 직접 도움을 주고, 또 직접 연관된 말씀은 오히려 구약이다. 경중을 따질 수는 없으나, 약간 무책임하게 이야기하자면 구약은 더욱 실제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고, 신약은 땅의 실재가 아닌 하늘의 실재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둘 다 중요한데, 구약이 소외되고 있으므로 나는 구약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에서 주장함으로써 무게추를 구약 쪽으로 조금 밀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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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