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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ries'에 해당되는 글 37

  1. 2011.02.16 십일조
  2. 2011.02.15 이스마엘
  3. 2011.02.08 하나님 바라보기
  4. 2011.02.05 하루
  5. 2011.02.04 국민학교 시절
  6. 2011.02.04 구원에 대하여
  7. 2011.02.04 ToBeStable이 블로그를 시작한 이유
2011. 2. 16. 12:36

십일조 Bible Stories2011. 2. 16. 12:36

어느 날 친구에게서 십일조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 친구는 천주교에 잠깐 다니다가 현재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있는 친구였는데, 질문의 요지는 천주교에서는 십일조를 내라고 하지 않는데 개신교에서는 십일조를 내라고 하는 이유에 관해서였다.

먼저 나에게 있어서 이에 대한 성경적 또는 논리적 대답을 떠나서 그 질문 자체에 대해 의문을 먼저 표하고 싶다. 점잖게 말해서 위와 같이 질문한 것일 뿐이고, 거칠게 말하자면 ‘천주교는 십일조를 내라고 강요를 하지 않고 쿨한데 왜 개신교는 찌질하게 돈 내라고 하느냐’ 일 것이다. 어느 교회도 십일조 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런 교회도 있겠지만 제발 어떤 논의를 함에 있어서 예외 사항은 말하지 말자. 항상 예외는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 예외는 어떤 것도 설명 해주지 않는다. 개신교에서 헌금의 종류를 주일헌금, 십일조, 건축헌금, 감사헌금 등등으로 나누어 놨을 뿐이다. 내기 싫으면 내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더욱 웃긴 것은 (나는 이 부분에서 웃긴다는 표현보다 더 나은 표현을 찾지 못하겠다) 그것을 가지고 문제 삼는 사람은 거의 다 교회 바깥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아주 이타적인 심정에서 거짓된 것을 구별 못하고 개신교의 사탕발림에 속아 넘어가서 허우적 거리고 있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함 일 수도 있으나, 그런 공격 (절대 논증 또는 비판이라고 보이지 않으므로)에서 배려 또는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불가능했었다.

이 글은 악의적으로 그냥 개신교의 모든 것이 싫은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알려준다든지 또는 그들의 공격에 대해 방어하기 위해 쓰는 글이 아니다. 성경적 근거를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쓰는 글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읽어주기를 바란다.

우선 나는 천주교인도 아니고 천주교를 공부해 본 일도 없으며, 가족 중에 천주교인이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들이 십일조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그들이 ‘십일조는 성경적이지 않으므로’ 십일조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문화도 바뀌고 생각도 바뀌고 필요도 바뀌면서 그들이 어떤 시점에 필요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따라서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되며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지만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십일조를 내지 않는다고 해서 ‘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했어’라고 말 하지는 않는다. (나도 그런 목회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으나, 제발 그런 이상한 사람의 말은 무시하자. 아무리 말라기서에 그런 내용이 나와 있다 하더라도 그 말씀을 정죄하는 데에 사용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본 뜻과는 멀어져 있다 할 수 있다.) 분명히 말해서 당신이 당신의 십일조 생활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 참고로 십일조와 삼십일조 -천주교신자들에게 고함을 읽어 보면 이 글을 쓴 천주교 신부도 십일조의 참된 의미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번 정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십일조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는 오히려 카톨릭 사전에 아주 자세하게 적혀 있다. 그 내용은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수입이나 생산물의 십분의 일을 교회의 유지와 확장을 위해 내놓는 것을 말한다. 종교적 목적을 위해 농산물 · 가축 · 전리품(戰利品), 기타 소유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은 고대에 다른 종교와 문화 속에서도 널리 행해지던 관습이었다. 구약성서 안에서의 십일조에 관한 언급은 서로 다른 때와 장소에서 행해진 다양한 관습을 반영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고(창세기 14:21), 야곱도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유의 십분의 일을 하느님께 드린다고 맹세하였다(창세기 28:22). 신명기 안에서 십일조는 땅과 그 소출의 주인인 하느님께 감사하는 헌물로(신명기 14:22-27), 레위인들을 부양하는 수단(민수기 18:21)으로 빈곤 구제를 위한 헌물(신명기 14:28-29)등으로 언급되어 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느님을 속이는 일이라 하였고 충성스럽게 십일조를 드리는 일은 축복받은 일이라 하였다(말라기 3:8-10). 결국 십일조는 인간의 모든 소유가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께 속한다는 확신의 표현이다. 십일조의 관습은 신약에서도 인용되어 있다(마태복음 23:23-24, 누가복음 18:12). 유대법과 신약의 해석을 따라 구(舊) 교회법은 신자들이 생산물과 수입의 십분의 일을 성직자들의 생활과 종교 업무를 위해 바쳐야한다고 규정하되 각 지방과 국가의 법과 관습에 따라 십일조를 결정할 것을 허용하였다. 가톨릭 교회에서 십일조는 신자 각자에게 임의로 주어져 있다. 많은 나라에서 교회의 유지는 십일조보다 자발적인 기부에 의존하고 있다. (가톨릭사전)
이 내용에서 언급 되듯이, 십일조는 상당히 긴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예수님 시대에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일조 자체에 대해 평가를 하신 일이 없다. 다만 카톨릭에서는 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십일조를 ‘관습’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난 이 부분에 대해 평가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관습으로 생각한다면 관습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십일조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었나 보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십일조는 인간의 모든 소유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속한다는 확신의 표현”이라는 데에 더 가치를 두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십일조 제도를 이어 오고 있는 것이다.

위의 사전에 나오지 않으나, 십일조에 대해 다른 곳에서도 언급 된 곳이 있는데, 바로 느헤미야서다. 바벨론 이주 후 하나님의 약속대로 70년만에 포로 귀환이 시작되어 수 차례로 나뉘어서 오랜 세월 동안 귀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느헤미야는 3차 포로귀환 시에 총독으로서 예루살렘으로 왔던 사람이다. 당시 총독으로 있었던 하나님의 사람 느헤미야로서 가장 시급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는 모세의 율법을 재정립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했었던 듯 하다. 일단 그의 목적이었던 성벽재건이 완성되고 난 후 제일 먼저 했던 것이 모세의 율법을 재정립하는 일이었으며, 그 중 하나가 십일조였다. 즉, 타락해서 심판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에서 시급하게 요구되는 것 중의 하나가 십일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필요에 의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 필요는 적어도 내 생각에는 지금도 상존하고 있다. 따라서 특별한 필요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십일조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 처음 익은 밀의 가루와 거제물과 각종 과목의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들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의 여러 방에 두고 또 우리 산물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였나니 이 레위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성읍에서 산물의 십일조를 받는 자임이며 (느헤미야 10:37)
더구나 성경에서는 삽십분의 일조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들은 일년에 한번 십일조를 드렸었는데, 신명기에 보면 3년에 한번씩 십일조를 한 번 더 내서 가난한 자들과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들) 고아 과부들을 도우라고 되어 있다.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명기 14:28-29)
따라서 십일조는 적어도 개신교에서 돈이나 벌자고 만들어 낸 제도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충분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바울의 말과 같이 즐거이 드려야 정말 하나님께 상달되는 헌물이 된다. 내 마음에 탐탁치 않고 꺼려진다면 내지 않는다고 뭐라고 할 사람은 없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린도후서 9:7)
당신 스스로 결정하여야 한다. 무엇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지 당신이 결정하여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십일조는 필요 없다라고 생각된다면 하지 않으면 된다. 그런데 내가 양육을 하면서 성경통독을 권유해 본 일이 있는데, 성경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십일조에 대한 필요를 느끼는 경우를 보았다. 나는 어렸을 때 부터 당연하다 생각하고 해 왔었기 때문에 결단을 통한 십일조의 과정을 처음 보는 셈 이었는데, 성경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십일조를 작정하는 것을 보았고, 그 작정하는 모습을 보면서 십일조 내기로 다짐하는 다른 사람도 보면서 십일조는 믿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외적 모습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의 믿음을 판단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경험으로 그렇게 말을 하고 싶을 뿐이고 반대되는 예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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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ToBeStable
2011. 2. 15. 06:22

이스마엘 Bible Stories2011. 2. 15. 06:22

이스마엘은 '이스마엘 족속'이란 표현까지 다 해서 52번 성경에 등장한다. 다른 성경에는 44번이 나오는 등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봐서 번역상, 발음상의 차이가 약간은 있는 듯 하다.

이 글에서는 이스마엘의 생애에 대해 잠깐 살펴 보고자 한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실수에 의해 태어난 이삭의 경쟁자로서 하나님의 섭리에서 벗어난 사람으로 보통 생각되어 지고 있다. 그리고 사실이 그런 면도 있다. 그런데 이스마엘의 자손 중에서 성경에 자주 등장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힌 족속은 별로 없는 듯 하다. 예를 들어 롯의 자손인 모압 암몬 족속이나 에서의 자손인 에돔 그리고 아말렉 족속의 출현 빈도에 비하면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거의 나오지 않는다. 약간 나오는 내용이라고 해 봐야 상인집단으로 나오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자 그러면 이제 이스마엘의 생애에 대해 한번 살펴 보자. (물론 미디안 족속으로 표현되면서 이스라엘과의 다툼도 나오기는 하나, 여하간 이스라엘의 주적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두라를 통해 낳은 아들 중 하나인 미디안과는 어떻게 구별되는 지 또는 구별하지 않고 그냥 대충 이스마엘 족속이라고 불렀는 지는 모르겠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86세 되던 해에 태어났다. (창세기 16:16) 그리고 13세 되던 해에 (아브라함 99세) 할례를 받았다. 창세기 17:23-25에 묘사되는 최초의 할례에서 명시된 피 할례자 2명중의 한 명이 이스마엘이다. 내가 여기에서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스마엘이 그저 그렇게 조연 중의 한 명으로 성경에 나오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이스마엘은 중요 조연 중의 한 명이었고 성경 저자도 그의 비중을 결코 작게 축소시키지 않았다.

비록 이삭과 같이 하나님의 큰 언약의 줄기 속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이스마엘 역시 하나님의 언약 속에서 태어났다.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창세기 16:7-15)
그런데 이 배경에는 약간 안타까운 뒷 이야기가 있다. 바로 사라와 관계된 이야기 이다. 사라는 아이가 없었고,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그녀의 여종이었던 이집트인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첩으로 내어준다. 그리고 아기가 생기자 하갈이 사라를 무시하기 시작했고, 이에 격분한 사라가 아브라함의 묵인 하에 하갈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이에 견디지 못한 하갈이 도망을 치게 되는데 그 도망친 장소에서 이 언약을 받는다. 그리고 이 언약은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께서 알려주신다.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창세기 16:20)
즉, 하갈만 비밀리에 알고 있던 언약이 아니고 아브라함도 알고 있던 언약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마엘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이 다시 반복된다. 하갈이 언약을 다시 재 확인 받게 되는 과정이 매우 좋지 못했다. 아브라함이 100세 되던 해에, 그러니까 이스마엘의 14세 때에 드디어 사라가 약속의 아들 이삭을 낳게 된다. 그런데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린다는 이유로 사라가 이스마엘을 내어 쫓으라고 말한다.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창세기 21:8-10)
젖 뗀 직후의 이야기 이므로 이삭은 1~2세 정도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스마엘은 15~16세 정도의 청소년 정도의 나이이다. 적어도 내가 성경을 읽으면서 파악한 사라의 성격은 편협함이다. 이런 인간까지 들어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놀라울 뿐이다. 어쨌든 그래도 15~16년을 보아 온 정도 있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에게 내쫓기를 구한다. 이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은 여느 아버지와 다르지 않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The matter distressed Abraham greatly because it concerned his son. (창세기 21:11)
그도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런 식의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해 분명히 마음이 아팠을 것이고, 아브라함은 이스마엘과의 관계를 어느 정도 계속 유지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증거는 창세기의 다른 부분에 어느 정도 암시가 되고 있다. 그것을 글의 말미에 다루기로 하고, 다시 돌아오면,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사라의 말대로 하라고 하신다. (창세기 21:12) 이에 바로 다음 날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 보내게 되는데 이상하게도 아브라함이 별다른 뒤를 봐 주지 않고 거의 빈 몸으로 내쫓아 버린다. 그래서 길 중에 갈증과 주림으로 거의 죽게 되는데 그 과정은 실로 안타깝기 그지 없다. 하갈이 이렇게 절규한다. "내 도저히 내 아들의 죽음을 보지 못하겠다"라고, 그리고 화살 거리 정도로 떨어져서 망연자실 죽어가는 아들을 쳐다보고 있다.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창세기 21:16-20)
이에 하나님께서 다시 역사하시어 살려주심과 동시에 약속을 다시 재확인 해 주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마엘과 함께 하시었다고 성경기자는 적고 있다.

이 이후 잠깐 동안 이스마엘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라가 127세에 죽게 되는데 당시 이스마엘의 나이는 51세 정도 그리고 아브라함은 137세, 이삭은 37세 정도 되었을 것이다. 이후 아브라함은 그두라라는 첩을 맞이해서 6명의 아들을 더 두게 되는데 아브라함이 이들에게 재산을 약간 나누어 주고 이삭에게서 멀리 떠나 살도록 한다.

여기에서 부터 이스마엘이 재 등장 하게 되는데, 아브라함이 죽을 때에 이삭과 이스마엘이 같이 장례를 치루었다. 아브라함이 175세, 이삭 75세, 그리고 이스마엘 89세에 아브라함이 죽게 되는데, 이 장례를 이스마엘이 같이 치루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상당히 새로웠었다.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에게 버림받을 때가 15~16세, 즉 한창 사춘기 때였다. 그리고 사라의 행태로 보아 아마 쫓겨나기 전의 삶도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도 자신의 아비 아브라함이 죽자 장례를 함께 치루었다고 나온다. 이로 볼 때에 이스마엘과 아브라함의 관계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을 거라고 예측되며, 심지어 이삭과도 그리 나쁜 관계를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후 이삭의 아들 에서가 이스마엘의 딸 중 하나와 결혼한 것을 봐도 교류는 계속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또한 관계도 그리 나쁘지 않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어쨌든 이제 이스마엘의 이야기는 그가 137세에 죽음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그 이야기를 잠깐 보자.
이스마엘은 향년이 백삼십칠 세에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갔고
Altogether, Ishmael lived a hundred and thirty-seven years. He breathed his last and died, and he was gathered to his people. (창세기 25:17)
성경에 죽은 나이가 명시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으며, 더구나 죽어서 자기 백성에게도 돌아갔다는 표현이 사용되는 인물은 더 적다. 왕들과 초기 조상들 등등 의미있는 사람들에게만 사용된 표현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든 아니든 간에 적어도 창세기 기자에게 있어서 또한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스마엘은 민족의 조상으로 인정받고 있었을 거라고 감히 예측해 본다.

이로써 이스마엘에 대한 글을 마치려 한다. 이스마엘과 떼어 놓고 생각 할 수 없는 이삭의 유년시절도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것은 다음 글로 기로 하자. 나는 개인적으로 이삭과 이스마엘 모두 상처많은 유년 시절을 보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스마엘은 너무 안타까운 유소년기를 보내었다. 다만 아브라함은 정말 복 받은 사람이다. 이삭도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에게만큼은 효자였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상처많은 세월을 보내었음에도 아버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악감정이 없었나 보다. 그리고 이 글을 통해 이스마엘에 대한 근거없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생각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사람의 인생이란 것이 흑백으로 간단히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지는 않다. 약속안에 있으면서도 비열하고 그 바깥에 있으면서도 인간적인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으며, 성경은 그런 사람들을 기록함에 있어서 편향된 관점을 가지고 적지 않고 있다. 다만 그것을 읽는 우리가 마음대로 선입견을 가지고 읽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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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대하여  (0) 2011.02.04
:
Posted by ToBeStable
2011. 2. 8. 09:12

하나님 바라보기 Bible Stories2011. 2. 8. 09:12

더 정확한 제목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또는 주와 동행하는 삶이다. 그러나 일단은 하나님이 어디에 있는 지 볼 수 있는 것이 가장 기본으로 전제되야 하는 것 아니겠나 하는 생각에서 제목을 이렇게 정해 보았다. 믿음 생활을 제대로 해 보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제일 먼저 걸리는 문제가 바로 다음과 같을 것이다.

  •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무엇인가?
  •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이 무엇인가? 아니 정말 듣는 사람들이 있긴 있을까?
  • 그렇게 동행하는 사람은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듯이 변하는가?

정말 민감한 질문들이다. 모두가 같은 질문이면서도 아주 다른 질문이기도 하다. 더욱 묘한 것은 이 모든 질문에 대하여 부정적인 그리고 긍정적인 대답이 가능하며, 둘 중 어느 것도 완벽하게 정답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보는 시작과 상황에 따라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른 대답은 가능하겠지만 언제나 옳은 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먼저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성경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으로 처음 언급된 사람은 에녹이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세기 5:22)
에녹은 365년의 생애 중에 무려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 엘리야와 더불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성경에 언급된 유이한 사람 중의 한명이다. 그의 삶은 어떠했길래 그렇게 간단히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적힐 수 있었을까? 자세한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성경에 동행하는 삶이 무엇을 뜻하는 가에 대해서는 전반에 걸쳐서 너무 많이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다 훑을 수는 없고 다만 몇 가지 중요한 구절들을 언급해 보겠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4-5)
아주 직접적인 것 같으면서도 내 삶에 적용하려면 어려운 부분이 있다. 일단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과의 동행은 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받아 사는 것인데, 내가 지금 예수님께 붙어 있는 지는 열매로 구분이 될 것이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누가복음 6:44)
그리고 그 열매에 대하여 역시 여러 곳에 언급이 되어 있으나, 다음 구절이면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 할 것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22-23)
여기에 자신있게 저는 그런 열매를 삶 중에 맺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지 모르겠다. 그러면 나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못한 것이고, 예수님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아닌 것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나는 말하겠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 5:48)
그러나 결단과 함께 믿기로 작정한 사람에게 단번에 주어지는 구원으로 인해 (2011/02/03 - [Bible Stories] - 구원에 대하여)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또한 아버지로서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우리들이 행복하기를 바라신다는 나는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방향성이 온전한 방향, 그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지 그렇지 않을 때에 순식간에 아들에서 버려진 죄인으로 신분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사도들 역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사도행전 15:10)
물론 사안이 조금 다르긴 하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비슷한 말을 해 주고 싶다. "왜 불가능한 방식으로 당신의 신앙을 증명하려 하십니까? 당신의 평가 방식으로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사람이 세상에 과연 있겠습니까?" 우리는 조금 우리 자신에게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다시 돌아와서 그러나 어쨌든 '나는 현재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을 하려고 한다면 현재 내 삶에 성령의 열매가 맺혀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또는 맺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노력만으로도 실질적인 열매가 없어도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을 보시기 때문이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베드로전서 1:17)
자 이제 우리가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산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내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다면 당연히 포도나무에서 주는 양분으로 살아야 한다. 나의 목자가 주님이라고 고백한다면 목자가 지시하는 대로 가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목자의 목소리를 안다고 하셨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요한복음 10:3-5)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한복음 10:14-15)
즉, 우리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목소리임을 확신한다면 다른 목자의 소리에 도망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어디까지나 목소리가 들려야 이 이야기는 시작 될 수 있다. 내가 엄마의 목소리를 아무리 알면 뭐하겠나? 들려야 그 목소리를 따를 지 따르지 않을 지를 결정이라도 하게 될 것 아니겠는가? 더구나 목자가 옆에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다른 목자를 좇지 않겠지만, 목자는 어디 있는 지 모르겠는데 달콤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면 거기로 가게 되지 않겠는가? 결국 중요한 것은 목자의 음성을 듣기위해 목자가 적어도 어느 방향에 있는 지는 알아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이 문제가 나를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괴롭혀 왔었으며, 지금도 이 문제로 인해 고민하고 발버둥치고 있음을 고백한다. 나 나름대로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2011/02/03 - [Bible Stories] - 구원에 대하여에서 사용한 예에서 찾았었다. 우리와 다른 차원에 살고 계신 하나님을 보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이 있을 만한 방향을 열심히 처다보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2차원을 살고 있는 자에게 3차원의 높이라는 개념은 너무 어렵긴 하겠지만 그나마 그것이 가능해 지려면 성경을 통해 설교를 통해 상담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 볼 때에야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 나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이해를 못하고 있었다.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나 또한 하고 살았었지만 정작 나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었다. 이 역시 틀린 것은 아니나, 사랑이 하나님의 대부분이라서 공의는 하나님의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거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도 있었고 잘 못 이해하는 부분도 많았다. 이런 경우 설령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을 하려서 뚜렷하게 듣기 어려울 것이다.

과거 어떤 브라질 선교사님으로 부터 다음과 같은 설교를 들은 일이 있다. 너무 오래 된 일이고, 노트가 남아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 이야기는 어느 정도의 각색이 불가피했다. 당시는 지금으로 부터 약 10여년 전 이었기 때문에 아마 지금 보다 브라질 선교 현장은 더욱 열악했으리라 생각된다.

선교지에서 가장 힘든 일은 향수병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안테나를 설치하면 한국 방송이 잡히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장 전파사에 가서 철사를 사다가 원형 안테나를 만들어서 이리 저리 돌려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방향 어느 파장에서 한국노래가 들리지 않겠습니까? 결국 그 전파는 항상 곁에까지 도달해 있었던 것이고, 난 그저 다른 주파수 다른 방향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듣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무엇인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지도 모르고 주파수도 전혀 다른 곳에서 헤매다 보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할 뿐입니다.

이 설교를 들을 당시 나는 '설교 참 유치하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하나님에 대해 더 고민하고 하다 보니 이 말씀이 진리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들의 말 속에는 서로 형태는 다를 지언정 진리를 담고 있다는 것을 하나 깨달았고, 그 진리가 내가 이제와서 깨닫고 있는 어렴풋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세와 일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음성은 항상 우리 주위에 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
내가 그 음성을 어렵풋하게 나마 듣고 올바른 문을 열면 예수님께서 직접 내게 찾아 오시사 그로 더불어 먹게 될 것이다.

이 정도 되면 과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다는 것의 실재적인 형태가 무엇일 지 궁금해 질 수 있다. 나 역시 매우 궁금했었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이야기 하던 모세가 있었다. 심지어 그는 하나님의 뒷 모습을 보기까지 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신명기 34:1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출애굽기 33:20-23)
모세는 워낙 특별하니까 다른 사람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또는 하나님의 사자와 직접 대화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나온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항상 그러하지는 않았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렇게 직접적으로 헤깔릴 것 전혀 없이 하나님과 대화를 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 될 만한 곳이 역시 여러 군데 발견 된다. 다시 말하지만 모세는 조금 특별하다. 나중에 이에 대해서도 글을 쓸 수 있게되면 좋겠지만 모세는 하나님과 만나는 방식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출애굽기 33:11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와 친구와 이야기 하듯이 이야기 했다고 한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에게 대면하여 따지기도 하고 물어 볼 것이 있을 때에 회막에 마음대로 드나들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는 하나님을 만나러 성막에 들어가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어려운 일이었고 절차도 복잡했으나, 모세는 상당히 가볍게 하나님과 만나곤 했던 듯 하다.

다시 돌아와서 엘리야의 경우를 보자. 열왕기상 18장에서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바알 선지 450 그리고 아세라 선지 400명과 대결을 벌이고 대승을 거둔다. 그런데 이세벨이 자기를 죽이려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40일 거리에 있는 호렙산까지 도망하고 만다. 여기에서 인간의 나약함등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이 가능하겠으나, 나는 엘리야도 하나님과 그렇게 뚜렷이 소통하지는 못했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다음으로 예레미야를 보자. 바벨론이 통치자로 세운 그다랴가 이스마엘의 악한 계략에 의해 죽고 나니 남은 사람들은 그로 인해 다시 한 번 바벨론의 공격을 당할까하여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예레미야 41) 이 때문에 요하난을 중심으로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으러 온다. (예레미야 42) 그래서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질문을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은 그로 부터 10일 후에 온다.
십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 (예레미야 42:7)
어떻게 보면 기가막힌 일이다. 질문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분초가 떨리는 상황인데, 하나님은 10일이나 걸려서 말씀을 하신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은 우리와 다르다라는 주제로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과 만나고 싶을 때에 항상 기도만 하면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의 이야기에서 결정적인 단서를 얻는다. 알다 시피 사도 바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개심하여 생애를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바쳤던 위대한 인물이다. 바울이 아시아로 가고자 하는 마음을 접고 마게도냐로 가는 과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사도행전에 묘사된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사도행전 16:9-10)
바울 역시 하나님의 음성을 뚜렷하게 듣지는 못하였다. 즉, 어떤 뜻은 알게 되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일 지 그냥 환상 일 지 확신하지는 못했다. 다만 그는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하고' 나아갔을 뿐이다. 역시 여기에서 진정한 믿음에 대해 논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바울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하나님에 대해 상고하고 이해하려 애쓴다. 그리고 그 방향을 향해 최선을 노력을 다하여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한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 내게 찾아와도 그렇게 직접적으로 찾아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다만 확실한 것은 내가 인정하고 나아갔을 때에 하나님께서 큰 은혜로써 증거를 우리에게 주시며 큰 기쁨과 평안을 주신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만약 내 귀에 대고 '아무개야 오늘 네게 갈 길을 알려 주겠다'라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경우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것은 아주 드문 현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더구나 어떤 형식이든 간에 하나님은 우리와 다르시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역시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믿기로 작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내 앞에 직접 나타나 멱살을 잡고 이야기 해도 그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긴장하고 하나님이 계신 곳을 향해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방향이 조금만 달라지면 시간이 지날 수록 하나님과 멀어져서 결국 하나님과 전혀 상관 없는 곳 까지 갈 수도 있고, 그런 경우 돌아오는 과정은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고린도 성도를 향하여 왜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했을 지를 상고해 보라.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31)
그 역시도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께 민감하기 위해 날마다 죽을 정도의 고통을 감내하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역시 이와 같은 노력을 하여야 하나님과 대화하는 삶을 살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하나님과 만나고 나면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듯이 단번에 사람이 변하는가? 나 역시 교회에서 양육을 하는 입장에도 있어 보았고 양육을 받기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그리고 여러 책들을 통하여서도 믿음안에 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런데 그 중에는 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짝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악한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대체 그들은 왜 변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런 그들도 하나님을 만난 적이 있긴 할 것인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누가복음 5:31)
예수님의 이 말씀은 죄송하지만 그런 악한 사람들을 만나 보았을 때에 별로 위로가 되지 않는다. 어떨 때에는 왜 우리가 믿는 이 믿음은 이렇게도 능력이 없을 까라는 생각까지 들기도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왜 변하지 않는가가 아니다. 실로 중요한 것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사 죽기까지 하였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모습과 관계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누구를 악하다고 생각하는 당신 역시 악한 사람이며, 사람 사이에서 조차 공개하기 어려운 추한 부분이 있음을 인정한다면 그런 당신을 사랑하시는 예수님 한 분으로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6-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8)
내 짧은 경험으로 비추어 보아, 사람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사람이어서 죽도록 나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지 않는 한 사람의 악한 본성은 나올 수 밖에 없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남을 심하게 정죄하지는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차피 나도 그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로마서 2:1)
다윗은 하나님으로 부터 기적과 같은 사랑을 받았고 또한 능력있는 삶을 살았었지만 잠깐 게을러 졌을 때에 밧세바를 취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인간적으로 판단해 보자. 정말 기막힌 일이다.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는 다윗의 30인의 용사중의 한 사람이다. 밧세바의 아버지 엘리암 또한 30인의 용사에 들어가 있다. 그의 할아버지 아히도벨은 다윗과 절친한 사람으로 후에 이 일로 인해 상심하여 압살롬의 모사가 되었었고 그에 대해 다윗은 시편에서 친구도 나를 대적하였다고 한탄하기도 한다. 즉, 최고 충신 가문의 사람이다. 다윗이 밧세바를 보면서 그 사실을 몰랐을까? 당연히 알았을 것이다.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 인간만도 못한 사람이다. 사람이 적어도 신의 또는 의리라도 있어야 하는데 다윗은 그러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다윗도 버리지 않으셨고 사랑하셨다.
그리고 나는 확신한다. 나도 다윗보다 더 낫지는 못하다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다만 나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라 하며 그런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 할 뿐이다.

이 외에도 다메섹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으나, 자신에게 일종의 은인과 같은 바나바의 조카 마가 때문에 목소리 높여 바나바와 언쟁했던 바울이나, 교회의 지도자가 된 이후에도 남들의 시선 때문에 소심하게 올바른 것을 올바르다 말하지 못하였던 베드로의 이야기 (갈라디아서 2:11-13), 아브라함과 이삭의 대를 이은 거짓말 등등을 전부 훑지 않아도 인간은 어차피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안에서 바로 서 있을 때에 산을 명하여 옮기라 명하면 옮겨지기도 하며, 예레미야가 달리는 마차보다 더 빨리 달리기도 하고 빌립이 이 곳 저 곳으로 순간이동을 하기도 하는 등의 초 자연적인 일을 행하는 것도 가능한 것이 바로 우리 믿음 안에 사는 사람이다. 이 두 가지 사이에서 희망을 잃지 않되 너무 잔인하게 스스로와 형제 자매를 몰아붙이는 우를 범치도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해 본다.

이로써 이 긴 글을 마치려 한다. 좀 쪼개야 하려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뭐 별로 읽을 사람도 없을 거니까 그냥 이대로 두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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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2. 5. 09:58

하루 Novels or Essays2011. 2. 5. 09:58

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나의 느즈막한 아침은 그리 상쾌하지 않게 시작했다. 언제부터 인지 또는 인지 모를 나의 늦은 아침은 이미 일상이 되어 버린 오래다. 어렸을 적에는 아침에 일어나면 기쁜 마음으로 일어나고 싶어서 기분 좋을 만한 상상을 하면서 일어나곤 했었으나, 이제는 마저도 시들하다.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늦은 아침을 즐기는 것도 아닌데 항상 늦는 것도 우습다면 우스운 일이다.

그저 무의미 하기만 어제와 비슷 거라고 거의 확신하는 새로울 없는 새로운 하루가 시작됐다. 가지 내가 확신하는 것은 분명 오늘 하루도 바쁘지 않게 그러나 매우 빠르게 지나가리라는 것과 밤에는 오늘을 곱씹으며 도대체 무엇을 했는지 머리를 쥐어짜 고민 하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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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2. 4. 13:58

국민학교 시절 My Stories2011. 2. 4. 13:58

물론 지금은 초등학교라고 부르고 또한 국민학교라는 말에 일제의 잔재가 묻어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왜인지 나는 초등학교라는 말이 불편하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중에는 이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당시 우리 집은 상당히 가난했었다. 4평 정도 되는 집에 할머니까지 5식구가 살았었는데 부엌에는 곤로와 아궁이 작은 찬장이 전부였으며, 두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기도 힘든 크기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집 바깥에 나무 판자로 얼기설기 만든 간이 창고가 있었는데 대략 1평 정도 되었던 것 같다. 거기에는 연탄과 잡다한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당연히 화장실은 없었고 화장실을 가려면 주인집에 가서 벨을 누르고 문을 열어 주면 그 집 마당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했었다. 나는 그런 과정이 귀찮았었다. 내 어렵풋한 기억과 나의 성격을 고려 했을 때에 창피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냥 귀찮았다. 그래서 어렸을 적 나는 변 참기의 달인이었다. 심심찮게 일변/일주 또는 일변/이주를 시행하고는 했었다.

내가 살던 집에서 나가서 대략 10~20 미터만 걸어 내려가면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 담장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대략 50~60미터만 가면 다니던 초등학교에 도착 할 수 있었다. 내가 살던 곳은 말이 서울이지 집이 산 자락에 붙어 있었다. 나가면 바로 산이었고 학교 반대방향으로 5미터만 가면 개울이 있었다. 머리 속에 그려보면 알겠지만 그냥 간단히 말해서 개울과 산에 붙어 있는 집이었다. 그렇다고 완전 산골 시골 집을 상상하면 안된다. 서울에서 충분히 기대 할 수 있을 만한 볼품 없는 민둥산에 소나무 몇 그루 박혀 있는 몹시도 '당시 서울 스러운' 산에 붙어 있는 집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충분히 낭만적이었다.


여름이면 집 앞에는 호박 넝쿨이 가득했고 깨밭 향내가 그윽 했으며 (이걸 이해 할 수 있으면 십중 팔구 깡촌 사람이다. 깨 밭에 흐르는 그 향기는 아는 사람만 안다.) 그 옆으로는 아주까리가 빼곡히 자라고 있었다. 여름, 비가 오는 때면 종종 그 아주까리 잎을 우산 삼아서 다니기도 했었다. 집 옆에 있었던 큰 아카시 나무는 때가 되면 꽃 송이를 주렁 주렁 매달고 벌들을 유혹 했었는데 엉뚱하게도 난 거기에 자주 유혹되곤 했었다. 나무 타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나로서는 몇 미터나 되는 나무를 한 번에 올라가서 그 꽃들을 따 먹었었다. 그러면서 벌레도 많이 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산에는 큰 나무는 적었던 대신 산딸기 나무가 참 많았다. 그리고 그 때 그 산에서 먹었던 산딸기 만큼 크고 실한 산딸기는 그 이후 깡촌에서도 구경 해보지 못했다.

집 앞 민둥산을 넘어가면 옹주묘가 하나 있었다. 그냥 나는 옹주묘라고만 알고 있다. 정확히 누구의 묘인지 들어 본 일이 없는 것 같다. 대략 내 걸음으로 한시간 정도 거리였는데 거기에 가면 약수터가 있었고 그 약수물이 모인 작은 물 웅덩이가 있었다. 그 웅덩이에는 물방개가 있어서 잡아서 놀았던 기억이 있다.

나의 일과 중의 하나가 개울 물을 막는 것이었는데, 당시 나는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 없이 튼튼한 댐을 만들었다. 물론 나만 만든 것이 아니고 아이들 모두의 기본 일과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만들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물을 완전히 막는 것은 쉽지 않다. 나는 그것을 완전히 그리고 나 정도의 아이가 밟고 건널 수 있을 만큼 튼튼하게 만들었는데, 큰 돌 작은 돌들을 이용해서 일단 골조를 만들고 삽으로 근처 야산의 흙을 퍼다가 물에 약간 적신 후 안쪽에 발라서 새는 물이 없게 만들었다. 하여간에 내가 제일 위에서 댐을 만들면 거의 물이 밑으로 흘러 내려가지 않았었다. 결국 댐은 아주머니 들에 의해서 무너졌는데, 우리 동네에서는 아주머니 들이 개울에서 빨래를 했었기 때문이다. 여기 까지 읽은 사람은 내가 아무리 사정해도 사극에서나 나오는 깡촌을 상상하겠지만, 정말 서울 스러운 그런 곳이었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해 본다.

놀랍게도 그 개울에는 가재가 살았다. 더 놀라운 것은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아무도 거기에 가재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었다.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 처럼 돌을 뒤집으니 나오는 그런 가재가 아니었다. 돌을 뒤집으니 나왔다라는 것이 성립할 만큼 큰 개울도 그렇게 수량이 많은 개울도 아니었다. 그냥 내가 어느 날 아무 생각없이 개울의 가장 자리를 깊이 파 본 일이 있었다. 그냥 파다 보니 찬 물이 흐르는 곳이 있었고, '여기 뭐가 있지? 가재 같은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심정으로 거의 당시 내 팔이 다 들어 갈 만큼 파니 어떤 놈이 내 손가락을 물었고, 당겨 보니 가재가 나왔을 뿐이다. 내가 그것을 발견한 이후, 하교 시간이 되면 애들이 가방은 산 자락에 던져 두고 빼곡히 개울 가에 앉아서 땅을 파는 진풍경이 펼쳐지곤 했었다.

잠자리
메뚜기, 따다다다 날아가는 따닥개비 소리
호박
빗물
개울
아주까리
산 기슭의 밭들
아카시나무
산딸기
개울 가의 아주머니들
겨울 처마 밑의 고드름

이런 모든 것들도 결국 세월 속에 하나씩 하나씩 없어져 갔다. 불행하게도 나는 이런 추억들을 안고 이사갔다가 나중에 돌아와서 차갑게 변한 것을 본 것이 아니고, 하나씩 없어져 가는 것을 내 눈으로 다 봤다. 우리 집이 가장 가난해서 그랬었는 지 모르겠지만 없어져 가는 자연과 함께 하나씩 모든 친구들이 떠나 가도록 우린 계속 거기 살았고, 그 과정을 나는 전부 기억한다.

내가 좋아했던 것이 없어진 자리에는 여지 없이 거대한 콘크리트가 들어 섰고, 그 콘크리트 안에는 부자가 살았다. 어느 순간 보니 우리 동네에서 제일 잘 살던 부자가 그냥 옛 동네 부자로 전락해 있었다. 아직도 굴삭기가 호박밭을 뒤엎을 때에 유난히 호박밭에 많았던 갈 곳 잃은 방아개비들의 날개짓이 머리 속에 강렬한 잔상으로 남아 있다. 맑은 물이 흐르던 개울에 검은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앞에는 산 옆에는 개울이었는데, 앞에도 수미터는 됨직한 콘크리트 벽, 그리고 옆에도 그런 콘크리트 벽이 있었다. 여전히 물은 흘렀는데, 그 콘크리트 벽에 있는 작은 구멍 들에서 물이 흘러 내렸었다. 그 구멍을 보며 그 안에는 무언가 살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왜 존재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 콘크리트 벽 안에 사는 사람은 절대 이용하지 않는 놀이터가 하나 생겼었다. 그 즈음에는 이미 내가 놀던 친구들은 다 떠난 상태였고, 나랑 내 동생만 거기에서 놀고는 했었다. 당시에는 재미 있었으니까 자주 갔었을 테지만, 이제 와서는 상당히 우울한 그림으로 기억속에 남아 있다. 글의 분위기상 추측 가능한 이유는 있겠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왜 그렇게 우울 하게만 기억 되는 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가며, 거기에 살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상대적'으로 빈민 층으로 바뀌어 갔고, 우리가 민둥산이라고 불렀던 곳에는 아파트 들이 즐비하게 늘어서며 '신 부유층'들이 살게 되었다. 밤이면 돗자리 깔고 하늘의 별을 셋던 곳에 아파트들이 가득 들어섰던 즈음 부터는 별 보는 일도 줄고, 노을도 왜인지 사라진 것 같았다. 그냥 서울 스러운 시골이 서울보다 더 서울 스러운 흉물스러운 콘크리트 덩어리로 변해 갔었다.

나는 이제 그 콘크리트에 살던 사람들도 부자는 아니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그 때 그 산을 조금만 사 놨었으면 대박 났었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나이도 먹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 동네는 나에게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상하게 가장 강렬한 기억중 하나가 비 오던 장면들이다. 그 동네에서 비만 오면 생겼던 빗물 길은 지금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친구들도 다 떠났고, 몇 몇을 제외하면 이름도 어렴풋 하기만 하지만, 나는 당시 그 동네에 살 수 있었다는 것을 감사한다. 가난 했지만 그 시절이 난 그리 나쁘지 않았다. 지금은 다 변했겠지만, 그래도 내 기억 속에는 그대로 남아 있으니 그걸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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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2. 4. 06:30

구원에 대하여 Bible Stories2011. 2. 4. 06:30

구원에 대한 문제만큼 어렵고도 민감한 문제가 없다.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이해하기도 어려웠고 설명하기도 어려웠으며, 해결됐다고 생각한 순간 돌연 다시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변하곤 했었던 문제이다. 그 때 그 때 문제로 돌변한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고자하는 노력의 결과들이 있었으나, 놀라운 것은 그것이 내일도 나에게 대답으로 내 삶에 적용되고 있지는 않더라는 사실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이 글에서 논해 보고자 한다. 먼저 우리가 염두에 둬야 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 하나님은 우리와 다른 차원의 존재이다. 즉, 우리는 그 분의 부분만을 보고 느낄 수 있다.
  • 우리가 경험 할 수 있는 부분들은 절대 하나님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그 부분들이 그릇 된 것은 아니다. 다만 전체가 아닐 뿐이다. 즉, 모든 하나님의 은혜로 하게 되는 경험은 옳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24)
먼저 이 성경구절에 대해 생각해 보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 예수님을 보내신 이 즉, 하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었다고 예수님 본인이 말씀하셨다. 즉, 하나님을 믿으면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면 구원은 주어지게 된다. 우리가 받는 구원은 이 처럼 간단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무엇을 보아 '믿는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이다. 믿음에 관해서는, 특히,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문제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일단 우리는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0:13-15)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 10:17)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말씀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물론 그러하기 때문에 진정한 말씀을 찾기는 어렵다는 모순이 존재하지만 그 문제는 다른 곳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일단은 우린 많은 말씀들에 둘러 쌓여 있다. 주위에 크리스찬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수도 없고, 누구든지 한 번 이상은 말씀을 들어 보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믿음에 이르는 것이 쉬운가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지만, 그리고 전파하는 자가 있으면 듣게 되겠지만, 그 사이에 뭔가 다른 것이 필요하다.

나는 그것이 믿기로 작정하는 '결단'과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10:9-10)
내가 내 입으로 시인하여야 한다. 나는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그리고 나의 경험을 통해 '시인'하는 과정이 절대 거짓으로 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나의 주로 시인하는 것은 은혜가 아니고서는 힘들다. 물론 믿지 않기로 결단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말은 얼토당토 않은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나는 사실 할 말이 별로 없다. 다만 믿고자 하는데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 이 글을 쓸 따름이다.

다음의 성경 구절은 아주 흥미롭다. 이렇게 흥미로운 성경 구절이 이 외에 더 있을 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흥미롭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Now faith is being sure of what we hope for and certain of what we do not see. (히브리서 11:1-2)
어떤 이유에서인지 믿음은 바라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실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라고 한다. 나는 이 말씀이 단순히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글의 서두에 내가 전제하기를 하나님은 우리와 다른 차원의 존재라고 하였다. 이제부터 약간은 유치한 예를 들어서 이에 대해 설명해 보고자 한다. 최근 이 이상의 설명법을 찾지 못하여 나 스스로 약간은 유치하다고 생각하나 계속 이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다음 이야기에서 '나'는 2차원상에 살고 있다고 가정한다. 당연하겠지만 2차원상의 존재에게는 높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것을 점과 선으로만 인식한다. 삼각형도 2차원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위에서 내려다 봐야 인식이 가능하다. 내가 같은 이차원에 살고 있다면 모든 방향에 따라 길이가 달라지는 선분일 따름이다.

오늘도 어제와 같이 동쪽에서 길게 늘어진 붉은 태양이 생겼다. 그리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느릿 느릿 뜨거운 자취를 남기며 빛을 가운데로 가운데로 모으더니 결국 강렬한 백색의 짧은 선분이 되어 남쪽에서 노려 보다가 서쪽으로 지친 듯이 늘어지며 이동하였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붉게 상기된 모습으로 내일을 기약하며 사라져 버렸다. 내일이면 다시 나타나서 오늘이야말로 강렬한 모습으로 남쪽에 머무르겠다는 듯이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겠지만 어쨌든 오늘의 태양은 어제와 같았다.

큰 변화가 없는 우리 동네에서는 내가 갈 수 없는 '그 곳'이 여전히 갈 수 없는 '그 곳'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검은 선이 '그 곳'으로부터 뻗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새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태양을 정확히 내 오른쪽에 두고 (왼쪽에 둬도 마찬가지였다) '그 곳'을 바라보니 태양의 길이하고 정비례해서 검은 선의 길이가 바뀌고 있었다. 그러니까 태양이 길 때엔 그 검은 선도 길고 짧을 때엔 그 검은 선도 짧아졌다. 그건 대체 뭘까.

자 이 친구에게 있어서 갈 수 없는 '그 곳'과 길이가 변하는 태양, 그리고 검은 선들은 그냥 자연 현상일 뿐이다. 그냥 스스로 그러할 뿐인 사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3차원에 사는 우리는 조금 더 자세한 진실 혹은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린 그가 갈 수 없던 '그 곳'에 전신주 하나가 우뚝 서 있는 것을 알고 있다.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면서 고도에 따라 그림자의 길이가 바뀌고 지구의 자전에 의해 태양의 방향이 바뀌고 태양 고도에 따른 빛의 산란으로 태양 빛이 바뀌는 것을 알고 있다.

자 그럼 이제 이 친구에게 그 사실을 알려줘 보자. 물론 완벽히 2차원의 존재가 이해 할 수 있는 방식의 설명은 아니다. 그렇게까지 민감하게 이야기를 구성하지는 않았다.
자 들어봐. 여기에 전신주가 하나 서 있어. 전신주가 뭐냐고? 그 높다란 것 있잖아, 전선을 지지하기 위해 서 있는 것들. 아... 넌 '높다'라는 것이 뭔지 모르겠구나. 글쎄... 너에게 설명하긴 아주 힘들 것 같은데, 그냥 일단 여기에 '높은' 것이 있다고 해 보자. 그림으로 보면 여기에 이렇게 긴 것이 태양 빛을 가린다고 생각해봐. 참. 태양도 동쪽에서 '떠서' '높이' '올라 갔다가' 다시 '내려 오는' 일을 반복하고 있어. 여하간, 이 전신주가 태양을 가려서 어두워진 부분이 저 선이야. 그리고 태양이 높아지면 각도가 예각으로 바뀌면서 길이가 짧아지고 낮아지면 각이 커 지면서 그림자가 길어 지는 거야.

이 친구는 2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그냥 산뜻하게 무시하고 그냥 '자연스러운' 생활을 유지하는 선택과 이해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믿고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이는 선택이 그것이다. 첫번째 선택은 그에게 그 어떤 문제도 없다. 그냥 살던 그 모습 그 대로 살면 된다. 그에게 검은 선은 그냥 현상이다. 갈 수 없는 '그 곳'도 그냥 현상이다. 우리가 하늘을 날 수 없는 것을 단순히 인정하듯이 그에게도 별로 어려울 것 없는 문제다.

그런데 두번째 선택을 한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이제부터 그 검은 선은 거기에 전신주가 있다는 '증거'가 되기 시작한다. 각도를 달리하면서 증거들을 수집하고 그 것들을 통해 추론과정을 거치면 직접 보지는 못해도 3차원상의 모양을 유추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 다시 성경 구절로 돌아가 보자. 믿으니까 사실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보이지는 않지만 항상 보아 오던 그것이 그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증거로 충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비밀이다. 우리 모두는 들었다.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세상이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에 대한 증거들로 가득차 있다고 느낀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믿는 자에게는 증거인 그것이 그저 현상이고 우연이고 다른 의미는 전혀 없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흥미로우며, 믿는 자에게 위로가 되기도 하고 도전이 되기도 하는 말씀을 보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31:31-34)
이 말씀은 히브리서에 두번 더 반복이 되고, 예레미야 서에서도 여러 번 반복되어 나와 있다. 한 마디로 중요한 말씀이다. 여기에 보면 새 언약을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우리의 마음에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기록하여 두시겠다고 하신다. 즉, 우린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다 마음에 가지고 있다. 무엇을 뜻하는가. 세상엔 3차원상에 존재하는 전신주에 대한 정보가 있다. 그런데 그걸 뻔히 보면서도 믿지 못하는 사람에겐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나 믿으면 실체가 되어 나타나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알고 있다. 믿고 인정하면 하나님이 실체가 되어 나에게 역사하신다. 그리고 그것을 경험 할 수 있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 정말 안타깝게도 방법이 없다. 우리의 인식의 한계로 인해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경험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수가 없다.

이 글이 믿고 싶으나 어떻게 무엇을 믿어야 할 지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또한 항상 이런 부분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믿음 생활을 이어나갈 때에 예기치 못한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노파심에 한 가지를 이야기 하자면, 나 아닌 다른 사람이 경험한 하나님을 100% 순수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위의 이야기에서 보자면 2차원의 존재는 3차원의 그림자만 볼 따름이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그림자의 모양이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이며, 그 하나 하나가 전부 그 3차원의 존재로 인해 만들어진 '실재' 그림자라는 사실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어떤 상태에서 경험했는가 또는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냐에 따라 각자가 경험한 하나님은 아주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두 같은 하나님이며 같은 은혜임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으로 남이 경험한 하나님을 판단해서는 절대 안된다.

한 가지 더 부언하자면, 이 글에서 다룬 문제가 '구원의 확신'과는 별개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터인데, 구원의 확신 역시 일종의 결단이기 때문이다. 한 번 구원에 대한 증거가 있다면, 혹여 그 기억이 희미해 지고 내가 나를 믿지 못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그 증거를 증거라고 믿고 의지하는 한 그것은 증거로써 가치를 잃지 않는다고 본다. 현재의 삶에서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지 않고 믿음이 약해지고 희미해져도 '나는 나의 구원을 확신합니다'라는 말을 거짓이라고 말 할 수는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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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2. 4. 04:25

ToBeStable이 블로그를 시작한 이유 My Stories2011. 2. 4. 04:25

나는 이 블로그를 통해 나와 소통하고자 한다.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 또한 기대되지만, 일단은 나와 소통하기를 원한다.

내 생각은 계속해서 변해왔다. 절대 변하지 않을 진리인 양 믿어왔고 주장해 왔던 것 조차도 어떤 경우 한 순간에 쉽게 변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한 때는 과연 나란 사람이 '의견'이란 것을 말 할 수 있을 지에 대해 의심하기 까지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 역시 자연스럽다고 말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 편, 바뀌어 가는 생각의 흐름 속에서 잊혀져 가는 내 과거와 현재의 나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내 과거가 불쌍하기도 하고 그렇게 나이먹어 가는 내가 서글퍼 지기도 했다. 그래서 글을 통해 앞으로 과거가 되어 버릴 현재의 나의 편린들을 남겨볼까 한다. 어차피 살아 숨쉬지 못 할 기억일 지라도 자취를 남겨 줌으로써 한 때 나에게 꽤나 중요했었던 것들에게 예를 표하려고 한다.

처음 시작하는 지금의 내 마음처럼 그럴 듯한 블로그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난 지금 상당히 설렌다.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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