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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5. 14. 09:07

긍정의 힘 그리고 간증 Opinion2011. 5. 14. 09:07

어느 간증집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로 시작해 보겠다.

중국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준비를 시작했지요. 그러나 당장 비행기표를 살 돈도 없었습니다. 표를 사야하는 전날까지도 어떻게 그 돈을 구할 지 막막했습니다. 그래서 무릎꿇고 매달렸습니다.
"주여, 제게 중국을 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비행기표도 살 수가 없으니 어이해야 합니까. 주여 부르셨사오니 보내 주시옵소서."
그런데 갑자기 제가 LA방문때에 잠깐 같이 식사하며 인사 정도나 나누었던 사업가 분이 기도 중에 저에게 헌금하라는 음성을 들었다며 봉투를 건내주지 않겠습니까? 열어 보니 정확히 비행기표를 구하는 데에 필요한 그 액수만큼의 돈이 들어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필자가 지어낸 어딘가에 있을 법한 이야기)

그냥 여기 저기 읽어 본 간증집에 들어있는 내용을 떠올리며 만들어 본 이야기이다. 분명 어딘가에 아주 비슷한 이야기가 있을텐데 찾지도 못하겠고, 찾는다 해도 비슷한 이야기는 수도 없기 때문에 특별히 찾아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기대되는 반응이 무었일까? 기대되는 반응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살펴보기로 하고 적절한, 건강한 반응이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해 보자. 간단하다.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고, 사랑으로 우리의 삶의 순간 순간을 보살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정도가 적당하겠다. 이 이야기의 요점은 (비록 내가 지어낸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감사이다. 그런데 보통은 약간 희한한 시각으로 이 이야기를 본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이리 저리 양념치고 치장해서 언듯 위에서 말한 것과 비슷한 적용처럼 보이나 본질상 전혀 다른 적용을 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그걸 에누리 없이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기도를 하면 돈도 생깁니다."
"저 돈을 준 사업가를 보십시오. 열심히 믿음생활을 하면 저렇게 돈을 많이 벌어서 선교사를 돕는 귀한 일에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은 역사하시는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고 기도의 효용성을 향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은 기도를 수단으로 이용한다. 또는 하나님께서 들어 사용하신 그 손을 본다. 사업가의 손, 부자의 손, 의사의 손, 힘 있는 자의 손... 그 손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한다.

이런 설교 누구든 한번은 들어보았으리라 생각한다.

여러분들도 부자가 되기 위해 기도하십시오. 부자가 되는 것이 죄는 아닙니다. 부자가 되어 수 많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에 크게 쓰임받으십시오.

틀린 구석은 없다. 그러나 의도가 무엇인지 그 저의가 의심스럽다. 사실상 '저의'도 없다는 것이 더 문제긴 하다. 설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문제점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의랄 것도 없다. 그런데 이 말은 애매한 부분을 내포하고 있다. 즉, 돈이 있어야 하나님의 사업이 된다는 식의 논리를 함축하고 있다. 물론 성경에 많은 부자가 나온다. 구약의 신앙의 위인들은 선지자를 제외하면 대부분 부자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엄청난 부자들도 많이 나온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부자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아리마대 요셉이나 삭개오 등등 극소수의 부자만 나온다. 야고보서에서 나타나는 부정적인 이미지의 부자에 대해서 상고해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사도행전의 주인공들 중 부자들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은 알 필요가 있다. 더 좋은 예수님이 있기 때문에 물질적인 부분에서는 자유했던 사람들이다. 그 어느 곳에서도 돈이 없어서 사역을 감당하기 힘들었다는 이야기는 찾을 수 없다. 물론 바울이 연보에 대해 말하면서 당시 이스라엘에 있던 성도들의 쓸 것 마련을 위해 권고한 부분이 있고, 바울이 로마에서 구류생활을 할 때에 빌립보교회의 원조로 생활을 하였고 그에 대한 감사의 편지가 있기는 하나, 그 말씀을 통해 역시 돈이 사역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해석일 뿐이다.

역사는 하나님이 하신다. 돈이 필요한가?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사역을 하는 데에 돈이 필요한가? 이건희 회장이 희귀한 차를 한대 필요로 한다고 하자. 그것을 사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런데 돈이 중요한 의사결정의 고려사항인가? 그 차가 한 100조원정도 하는 차라면 그럴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실재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이 경우 중요한 고려사항은 이건희의 '의지'이다. 돈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결국 돈이 수단으로 사용되기는 하겠지만, 그 돈이 중심 고려사항이 될 수는 없다. 하물며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 돈이 중요한가?

그러면 부자가 있어야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가? 서울 어느 교회에서 정계에 법조계에 의료계에 신앙인이 많아야 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독려했던 적이 있다. '복'받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와 한국인 특유의 복받은 자라면 의례 기대되는 직업군이 맞아 들어가면서 상당히 많은 사람을 '만족'시켰던 논리였었다. 이 가운데에는 바울이 준비된 사람이었기에 그렇게 크게 쓰임 받았다는 말이 논거로 사용된다. 모세가 80년간 훈련받았기에 한 민족을 구원하였다는 사실도 이야기 한다. 다 옳은 이야기이다. 그런데 '준비'가 중요한가? 아니면 하나님의 '부르심'이 중요한가? 뭔가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요즈음 처럼 말씀이 흔한 세대가 없는 듯 하다. 간증도 참으로 많다. 우리 나라가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면서 수많은 간증집이 나온다. 선교 현장에서 드라마틱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는다. 그런데 그런 간증집을 통해 받은 은혜를 나누는 사람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면서 괴리감을 느낀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그들이 경험한 기적을 보면서 그런 기적을 나도 경험 할 수 있다는 건강한 기대와 소망까지는 좋은데 그들의 낮아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좀 더 잔인하게 표현해 보겠다. 그들의 낮아짐을 통해 이루어졌던 그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 낮아짐을 수단으로 사용할 생각은 있으나, 주님을 위해 낮아지려는 사람은 없다. 선교사들의 기적적인 체험을 내 것으로 하기 위해 그들의 삶의 모습을 수단으로 사용하려고만 했지 그들처럼 살려는 생각까지 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이야기의 중심에 돈이 모습을 숨기고 도사리고 있는 경우를 수도 없이 보아 왔다.

이제서야 이 글의 제목으로 돌아온다. '긍정의 힘', 어느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요즘 처럼 '긍정'이라는 단어가 교회에서 많이 들리는 시대가 있었나 궁금하다. '말의 권세,' '입의 파수꾼,' '기도의 힘'등등과 결합되면서 내가 말로 선언하고 기도로 나아갈 때에 그 대로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로 교회가 떠들썩 하다. 그런데 한 20년 전만 해도 내 기억으로는 '순종'이란 말을 지긋지긋하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요즘은 이 순종이란 말을 하기가 목회자나 신도나 민망하다. 순종은 하나님께 하는 것인데 우리나라는 목사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보니 목사 입장에서도 말하기가 껄끄럽고, 신도 입장에서도 그런 굴욕적인 관계를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서 '순종'이라는 말이 사라진 지 오래다. (시끄러운 교회들이 좀 많은가. 여자문제 돈문제... 목사들 입장에서 그런 자기에게 순종하라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성경에 긍정(positive, affirmative)라는 단어는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보통 긍정의 힘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이 열거하는 성경상의 사건들에는 '충성,' '순종'등의 단어가 사용된다. 심지어 선교현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기적들까지도 선교사들의 긍정적인 마인드가 이루어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모두가 고개를 내 저을 때에 고난의 현장에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나아갔을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는 것이다. 분명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앞의 문장에서 '긍정'의 자리에 '순종'을 집어 넣어야 올바른 문장이 된다. 때로는 목숨까지 도외시하면서 일하고 있는 선교사들의 삶을 긍정적인 마인드에 의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을 모독하는 것이고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그저 나를 따라 다니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대신 해 주시는 하인 정도로 끌어내리는 일이다.

그러면 긍정과 순종 충성과는 무엇이 다른가? 순종과 충성은 대상이 정해져 있다.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충성이다. 그런데 긍정은 나에게 하는 것이다. 나에게 안심하라고 다 잘될 거라고 말하는 나의 속삭임이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낮은 곳으로 가라 명하신다. 고난을 즐거이 받으라고 명하신다. 심지어 아들을 바치라고도 하신다. 우리의 죽음을 필요로 하실 때도 있다. 거기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 진다. 그러나 긍정적인 사람은 '에이 아냐. 다 잘 될거야.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고난을 허락하실 리가 없어. 주여 믿사오니 이 고난을 내게서 치워 주시옵소서. 믿습니다.'라고 한다. 긍정적인 사람에게 있어 고난도 겸하여 받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마가복음 10:30)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 둘은 비슷한 듯 하면서도 너무 다른 말이고, 궁극적으로 봤을 때에 긍정의 힘을 믿는 믿음은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긍정의 힘을 믿는 것은 교인이 점치러 다니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고 생각한다.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마가복음 10:30)
다시 간증으로 돌아가 보자. 바울의 아주 조심스런 앞뒤 다 떼어버린 소심한 간증이나 (고린도후서 12:1-5) 진리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말하지 않겠다는 바울의 선언을 다시 상고해 보지 않는다고 해도 (고린도전서 2:1-2) 간증은 위험하다. 물론 때로 간증이 활력을 주는 경우가 있다. 특히나 그 말씀이 내게 필요한 경우에는 더더욱 도움이 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간증의 전면적인 거부가 아니다. 간증의 위험성도 알아 조심하라는 것이다. 내가 길의 동편에 있다가 서쪽을 향해 걸어서 길을 찾았다. 그 기쁜 마음을 길의 서편에 있는 사람에게 전하였더니 그 사람이 서쪽으로 힘차게 달려갔다. 그 사람은 어찌 되겠는가? 아주 잘 맞는 예는 아닐 지 모르겠으나, 의미는 어느 정도 통하리라고 본다. 나에게는 진리로 가는 통로가 되었던 그 깨달음이 다른 사람에게는 망하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고린도후서 12:1-5)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린도전서 2:1-2)
간증과 같이 일차 가공된 것은 이해하기 쉽기는 하나 진리와 멀어져 있을 가능성이 있고, 또는 진리의 반대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간증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 간증자의 삶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선에서 끝난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으나, 보통은 그 간증자의 삶을 따라감으로써 같은 경험을 하기를 기대하는 엉뚱한 적용이 훨씬 많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긍정의 힘이라는 책이 나오고 그에 따라 여러 아류들이 출판되면서 한국 교회는 긍정의 힘에 취해 휘청거리고 있다. 한낱 명상 정도로 신앙생활이 폄하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되기도 한다. 예라 하시고 아니라 하지 않으신 예수님이 마치 긍정적이어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비추어 지는 것이 안타깝고 어처구니 없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고린도후서 1:19)
마지막으로, 진리는 예수님 그 분 자체임을 말하고 이 글을 끝내야겠다. 어렵게 진리를 찾을 필요가 없다. 오직 예수님 그 분이 진리이시며, 오직 한 길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순종과 충성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알아야 한다. 겨우 마인드 콘트롤 정도를 하나님께서 기대하신다고 한다면 예수님을 그저 신기루로 생각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예수님의 실존을 믿는다면 그 분을 신뢰하고 순종함으로 충성된 종이 되어 그 분의 삶을 실천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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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4. 21. 04:05

관상기도 Opinion2011. 4. 21. 04:05

먼저 서두에 밝혀두고 싶은 것은 나는 관상기도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단지 과거 내가 속한 소그룹에서 관상기도에 대한 소개와 간략한 훈련을 경험해 보았었고, 지금 내가 맡고 있는 소그룹에 천주교에서 온 분이 계셔서 그 분에게 큐티에 대해 설명하려고 준비하던 중에 과거 생각이 나서 관상기도를 살펴 보았을 뿐임을 먼저 밝히고 싶다. 따라서 전문적인 글 또는 책임감있는 글은 기대하지 말아주시기를 부탁드린다. 거의 남의 글을 인용하는 수준에서 구성하려고 한다.

나는 관상기도를 옹호하는 사람과 대화를 해 본 일이 없다. 따라서 그들이 진정으로 그 기도를 통해 얻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공정하지 못한 글이 될 수 밖에 없다. 나는 관상기도가 옳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도의 방법은 없다. 오직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이 있을 뿐이다. 관상기도를 말하는 사람들은 기도를 구송기도, 묵상기도 그리고 관상기도로 분류한다. 그리고 최상의 단계를 관상기도라고 하는 듯 하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기도는 성령의 도움으로 하는 거 아닌가? 성령의 도움을 받기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도움을 구하면 도와주실 터인데 우리가 굳이 어떤 훈련을 해야 한다면... 그거 좀 이상하지 않나?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그 많은 말을 신뢰 할 만하게 구사 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냥 의문을 제기하는 데에서 일단 맺겠다. 내가 아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자격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드리신 예수님께서 이제와서 어떤 훈련을 통한 '독특한' 당신으로 다가가기 위한 방법을 옹호하실 것 같지는 않다.

다시 돌아와서 그들이 말하는 관상의 정의를 살펴보자.
관상이라는 말은 원천적으로 플라톤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진·선·미의 궁극적인 이데아 혹은 지고의 실제에 대한 인식과 만남의 목표를 뜻한다. (감신대 안석모 교수, 관상기도, 무조건 이단이라 비판하진 말자)
영지주의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었던 사람이라면 이 정의를 보면서 '어? 영지주의'라고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위에서 말한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이유에 이 정의까지 덧 붙이면 굳이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이상하다. 면벽수행하는 불자들이나 요가를 통해 영적세계를 경험하려고 하는 사람들 등등이 하는 방법과 다른 점을 찾을 수 없다. 방법이 악하다고 목적도 악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예수님은 방법(길)을 오직 예수님 한 분으로 한정 시키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방법들이 궁극적으로 말하는 것은 '내가 신에게 내 힘으로 갈 수 있다'이다. 여기에 성령의 도우심은 찾을 수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관상기도는 불교나 힌두교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심지어 한 선승이 수사들을 상대로 1주일간 수련회를 이끌기까지 했다고 한다. (관상기도 – 진짜 기도인가?)

이 정도 되면 더 이상 논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들이 말하는 '침묵의 영성' (이동원, 박은조 목사가 말하는 관상기도(뉴스앤조이))에는 동의 한다. 그리고 수동적 관상과 능동적 관상으로 분류하여 수동적 관상은 가치가 있다는 말에도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러나 여하간 기도에 특별한 방법이란 없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아는 것이 별로 없으므로 이 정도에서 글은 끝을 내려고 한다. 아래의 링크 중에 '관상(觀想)기도'는 개혁주의 전통에 충실한가에 아주 깔끔하게 문제점이 정리되어 있으니 한 번 살펴봐 주기를 부탁한다.

참고
지지자: 관상기도, 관상기도, 무조건 이단이라 비판하진 말자
반대자: 관상기도 – 진짜 기도인가?, '관상(觀想)기도'는 개혁주의 전통에 충실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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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4. 17. 08:14

솔로몬 성전의 위치 Bible Stories2011. 4. 17. 08:14

솔로몬 성전은 출애굽 이후 480년,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지 4년에 모세가 만들었던 성막의 2배의 크기로 건설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약 7년만에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지 11년에 완공된다. 솔로몬 성전은 오르난의, Ornan, (또는 아라우나, Araunah) 타작마당에 건설되는데 이 오르난의 타작마당이 있었던 그곳의 성경상의 사건들을 살펴 보려고 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 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 (열왕기상 6:1)
다윗의 말년에 인구조사를 한다. 물론 인구조사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겠으나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았다. 자세히 나오지 않으니 이런 저런 해석이 가능하겠다. 개인적으로 '자신의' 업적을 객관적으로 평가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들을 자신의 성취로 보려는 그 매우 인간적인 그러나 패망의 선봉인 '교만'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고 본다. 여하간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게 되고 하나님이 천사를 명하여 재앙을 멈추게 하신 곳이 바로 오르난의 타작마당이다. 이후 다윗이 갓 선지자의 명에 따라 그 타작마당을 사서 거기에서 제사를 올려 드림으로 사건이 일단락되게 된다.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윗이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 (사무엘하 24:24)
여호와께서 천사를 명령하시매 그가 칼을 칼집에 꽂았더라. 이 때에 다윗이 여호와께서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서 응답하심을 보고 거기서 제사를 드렸으니, 옛적에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여호와의 성막과 번제단이 그 때에 기브온 산당에 있었으나, 다윗이 여호와의 천사의 칼을 두려워하여 감히 그 앞에 가서 하나님께 묻지 못하더라. 다윗이 이르되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이요 이는 이스라엘의 번제단이라 하였더라 (역대상 21:27-22:1)
바로 이 위치에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게 되는데, 이렇게 하라고 다윗이 명령을 했는지, 선지자가 그렇게 하라고 했는지 또는 솔로몬이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말씀을 받았는 지는 모르겠다. 다만 역대상 22:1의 말씀을 보아 다윗이 그 곳을 특별하게 여겼고 그에 대한 언질을 솔로몬에게 하지 않았나 싶다. 더군다나 역대상 22장에 보면 다윗이 생전에 성전에 대한 제반 준비를 상당히 해 놨었고, 성전 공사에 대해 방백들과 솔로몬에게 신신당부를 한다. 그리고 23장에서 여호와께서 성전의 설계도를 주셨다고 한다. 이로 볼 때에 성전의 위치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지정하여 주셨든지, 적어도 다윗이 솔로몬에게 지정해 주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하다.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이 모든 일의 설계를 그려 나에게 알려 주셨느니라 (역대상 23:19)
그런데 그 오르난의 타작 마당이 있던 곳이 바로 모리아 산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 산은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렸던 그 모리아 땅의 산이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역대하 3: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세기 22:2)
물론 어떤 사람은 두 곳이 다른 곳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내가 확인한 주석들에서는 전부 두 곳이 같은 곳을 뜻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현재는 거기에 이슬람 건축물 'the Dome of the Rock'이 있다. 사족을 달자면 이슬람 교도들은 마호메트가 거기에서 승천했다고 믿는다.

어떤 사람은 이 모리아 산이 바로 아람어로는 골고다 히브리어로는 갈보리인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고 하나, 내가 가지고 있는 사전에는 '그런 의견이 있다'라는 식으로도 언급이 되어있지 않다. 어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인지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으며 최근까지도 새로운 주장이 (a British general, Charles Gordon, in 1885) 계속 제기되고 있다.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를 사실인 양 이야기 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이다. 골고다가 모리아 산이라고 하는 주장은 정말 매력적이기 때문에 나도 정말 그러길 바라는 마음으로 여기 저기 찾아 봤으나 아무래도 확실한 근거는 없는 듯 하다.

이렇게 정리를 해 두고 보니 별 것 없다. 그래도 내가 쓴 글들은 전부 긴데 이건 짧으니 짧은 글도 있다는 의미를 주고 이만 끝내야겠다. 더 쓰려고 해도 더 쓸 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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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더 정확한 제목은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우월한 이유' 정도가 되겠다. 이 제목 자체가 상당히 많은 함정을 지니고 있다. 우선 이에 대해 먼저 논해 보자.
  • 우리는 종교인이 아니다. 마음의 위안을 얻자고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종교'에 대해 논할 필요가 없다. 이런 부분이 중요하다면 당신은 종교인이라는 이야기이고, 아직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위치에 대한 자각은 덜 된 셈이다.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의 아들됨을 믿고 있고, 그것이 우리에게는 사실이며 실제이며 진리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들어 낸 교리의 틀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그 교리라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대해서 논하다 보면 글이 산으로 가기 때문에 이 정도에서 멈추도록 하겠다.)
  • 같은 맥락에서 '이유'가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않다. 이유가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나는 이 정도의 말은 알아 들을 수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이 글을 쓰고 있음을 여기에서 밝힌다. 내 글 중에는 믿음안에 없는 사람도 읽을 만한 글도 있지만 지금 쓰는 이 글은 믿음 안에 있으면서 좀 더 확실하기를 바라는 모호한 부분을 알고자 하는 사람을 위해 쓰는 글이다.
  • 그리고 결코 '우월'정도의 약한 이유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절대'이기 때문에 이 믿음 안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환상속에 존재하는 알라딘램프의 지니가 아니다. 실재하시는 나의 구주이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 불필요한 이야기를 한 번 진행해 보고자 한다. 나름대로의 어려움과 이유가 논의 자체의 불필요함 만큼이나 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우월한 이유'라는 제목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미 앞의 글들에서 성경의 무오성은 문자에 있지 않음을 이야기 했다. (2011/02/18 - [Bible Stories] - 야곱의 후손: 성경은 무오한가, 2011/02/18 - [Opinion] - 믿음 그리고 성경) 정확하게 내 생각을 전달하자면 '성경' 자체는 우리 신앙의 도구일 뿐이지 어떤 '신성'시 되는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무오하든 오하든 별 상관 없다. 다만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에는 한 점 실패의 가능성이 없다라는 사실을 믿을 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성경이 그렇게 결함이 많다면 어떻게 읽으며, 그런 불완전한 성경을 가지고 어떻게 다른 종교에 있는 사람들을 전도 할 수 있겠느냐고 질문을 한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상당히 답답한 마음에 질문을 던졌으리라, 그런데 대답을 해야 하는 내 입장도 상당히 답답한 것은 마찬가지다.

먼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깊이 나누다 보면 결국 알게 되는 사실이 있는데 바로 이 들은 내가 더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증명하기 원하고, 그것을 통해 우월성이 증명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것'이 더 좋은 '것'임을 증명하기 원하고 그것을 공격당할 때에 매우 당황스러워 하며, 심지어 분개한다. 마치 성경의 많은 기자들이 악인의 흥함을 보고 분개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하박국 1:13)

먼저 성경의 권위부터 이야기 해 보자. 이 '성경'에 교회 또는 목사 등등을 집어 넣어 '목사의 권위, '교회의 권위'라고 바꿔도 거의 대등하게 이 글에서 논해 보고자 하는 말이 된다. 이 권위라는 말은 원래 권력과 위세를 줄인 말로서 인격을 가진 사람에게나 사용되야 마땅한 용어이다. 그런데 '권위있는 작품'이란 식으로 물건에도 종종 사용이 된다. 이 둘을 잘 구분해서 사용하면 좋은데 종종 왕왕 이 둘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성경이 가장 대표적인데 성경에 권위가 있다는 말을 '권위있는 작품'에서 사용된 뜻으로 사용한다면 아주 적절한 사용이라고 하겠으나, 성경 자체가 어떤 인격체 처럼 존중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식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사람 손으로 쓰여서 사람 손으로 유지 보수 되다가 사람 손으로 편집되어 사람 손으로 번역된 성경에 보기만 해도 죽어야만 하는 (사무엘상 6:19) 하나님이 직접 주신 돌판만큼 성스러운 '권위'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성경을 소중히 여기는 그 조심성 자체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만일 그것을 하나님처럼 여긴다면 좀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더 나아가 성경이 옳기 때문에, 성경이 완벽하기 때문에, 성경이 성스럽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다라고 한다면 진지하게 고민을 해 봐야 하겠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당신의 종교보다 내 좋교가 낫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여기에서 사용된 권위는 뒤에 연결된 말과의 관계속에서 해석해 볼 때에 내가 우려하는 그런 방식의 권위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말하는 다른 종교는 직접적으로는 몰몬교나 여호와의 증인처럼 같은 성경을 보고 있으나 부가 경전 또는 주 경전이 따로 있다든지 아니면 해석상의 아주 큰 차이를 보이는 종교를 이야기 한다. 더더욱이 이후의 대화에서 어차피 완벽하지 않은 성경이라면 몰몬경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데에까지 갔었다. 쉽게 판단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시점에서 '에이 너무 많이 갔네'라고 쉽게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적어도 내 경험상 이 사람은 솔직해서 이렇게 말한 거고, 이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함정에 스스로 빠지는 경우를 많이 보아 왔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한, 이 문단의 첫 질문에서 별 문제점을 못 느끼는 사람들이 대다수 이며,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 중의 대다수도 앞 부분의 질문에 대해서는 타당한 질문으로 생각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면 당신도 이 사람의 후반부의 말을 솔직하기만 하다면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너무 쉽게 판단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질문을 돕기 위해 다음과 같은 말을 덧 붙였다. 성경이 그 완벽성에 대해서 권위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의 등대처럼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마치 왕이 앉는 보좌가 목욕탕 의자보다 화려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왕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누가 왕인 지 확실하게 알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 자체가 너무 많은 허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당사자도 인정했다. 다만 더 좋은 예가 떠오르지 않아서 이런 말을 했을 뿐이다. 어쨌든 이 말은 언듯 그럴 듯 하다. 이 밑에서 이 이야기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다.

말을 너무 길게 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렇게 복잡하게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의 신앙은 성경 위에 서 있지 않다. 우리의 신앙은 반석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서 있다. 우리는 성경이 그럴 듯 해서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믿기 때문에 성경을 보는 것이다. 믿음이 먼저요 그 다음에 실천이며, 그 실천에 필요한 도구들이 있을 따름이다. 그 중 하나가 성경이다. 목사? 교회?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고 싶은가? 믿음이 먼저고 그 다음이 성경, 목사, 교회 등등의 것들이 있을 따름이다. 요즘 교회가 시끄럽다. 성추행 사건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믿을 수 없는가? 그렇다면 믿지 않도록 하라. 내가 여호수아의 말을 여기에서 하고 싶다. 예수님이 믿을만 하지 않게 보이거든 믿지 말라. 그러나 나는 믿을 것이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여호수아 24:15)
이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히브리서 기자는 자그만치 23번이나 '믿음으로'를 강조하고 강조한다. 믿음이 먼저 있었고 그 이후에 여러가지 방법을 통한 실천이 있었다. 믿음으로부터 시작하여 믿음으로 끝나는 것이 우리 신앙이다. 믿을만 해서 믿게 되는 것이 아니다. 나도 정말 간절히 말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믿을만한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 믿으니 영광을 보게 되는 것이다. 보좌 이야기가 나왔었다. 하나님이 이 부분에 있어서 얼마나 불친절 하신 지 여기에서 이야기 해 보자. 예수님이 왕가에서 태어났는가? 유명한 집안에서? 전통있는 마을에서? 예수님은 말 구유에서 태어나셨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는 겨우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누가복음 2:12)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마가복음 11:7)
심지어 이사야에 보면 예수님은 흠모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었다. 심지어 그의 고난을 보며 넌 당해도 싸다고 했다. 믿을만해서 믿는가?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너무 안타깝게도 이 함정에서 사람들이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사야 53:2-4)
이 글의 제목이 다른 종교 (이단 또는 사이비)와의 비교라도 했다. 믿을만 한 것은 다른 종교에 더 많다. 그러니 믿을만 한 것을 찾는 것이 당신의 목표라면 다른 종교로 가 보라. 우리는 멋있지 않더라도 나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어 주신 그 실존하시는 예수님을 믿을 것이다.

그러면 다시 그러면 왜 믿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그 실존 때문에 믿는다고 아무리 피를 토하며 외쳐도 '그런데 그럼 왜 믿어?'라고 묻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이 멸망 할 때 까지 있을 것이다. 나도 계속 한 말 만을 할 것이다. 믿기 때문에 믿는 거고 나에게는 예수님이 실존이기 때문에 사실을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 없으니 믿을 수 밖에 없다고 말 할 것이다. 바울이 감옥에서 찬송을 했다. 그랬더니 지진이 일어나서 감옥문이 열렸다. 스스로 질문해 보라. 바울은 왜 찬송을 했을까? 찬송을 하면 감옥에서 나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어서? 찬송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바울과 실라는 많이 맞은 후에 결박당하여 감옥에 앉아 있으면서 찬송을 했다. 이들의 믿음이 이해가 가는가? 나는 이해는 되는데 납득도 안되고 동일한 신앙의 표현을 할 자신이 전혀 없다. 다만 이해에 근거해서 이야기 해 보겠다. 이들의 신앙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그 신앙이다. 이들은 좋지 않은 현실에서 더 나아질 기미도 없지만 찬송을 했다. 왜? 기쁘니까, 즐거우니까, 그리고 하나님을 예수님을 사랑하니까, 나를 감옥에 가두신 예수님께 감사하니까 찬양한 것이다.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사도행전 16:23-26)
일찍이 다니엘의 세 친구도 같은 신앙을 보여줬다. 풀무불에 던져질 상황에서 능히 건져내실 하나님을 증거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그리 당당했나?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상관없었다. 그들은 정말 상관 없었다. 하나님이 금신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실재였기 때문에 이러나 저러나 상관 없었다. 그저 믿음을 지킬 뿐이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다니엘 3:16-18)
여기까지 말했는 데도 믿을 만한 것을 구하는가? 내가 하나 더 이야기 하고 이 글을 맺겠다. '믿을 만한 것'을 구하는 당신은 당신이 '구원받을 만 하여' 구원받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거부감이 느껴 질 지도 모르겠다. 그러며 문장을 조금 바꾸겠다.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살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어'라고 생각 할 것이다. 아직도 거부감이 느껴지나? 그러면 조금 더 바꾸어 보겠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지 않으면 잘리게 될거야. 그래서 불에 태워 지겠지.' 물론 이 방향으로 글을 써도 한참을 써야 한다. 그 글은 다음으로 미루고, 간단하게 이야기 하자. 내가 뭔가 해야 또는 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마음 깊은 곳의 사탄의 속삭임이 당신에게 다른 식으로 표현 된 것이 믿을 만 하여 믿는다는 마음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정돈된 생활 몰몬교도의 친절함에 대비되는 기독교도의 더러움을 본 당신이 느끼는 좌절 나도 안다. 깊이 공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실재를 버리고 허상을 잡을 수는 없다. 믿음외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도 그들보다 더 우월하길 원하는 맘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그런 시도는 절대 성공할 리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 아빠가 더 힘쎄'라고 하는 유치한 어린 아이 싸움에 동참하여 싸워 주시는 분은 아니다. 물론 그러실 때도 있으시긴 하겠지만 (필요한 경우가 있긴 있으니까) 항상 그러시리라고 기대하지 말라. 더구나 당신이 신앙생활 오래 했다면 절대 기대하지 말라. 30먹은 아들이 60먹은 울 아빠가 너네 아빠보다 더 쎄라고 싸우고 있으면 거참... 뭐라 해야 할 지...

예수님은 목욕탕 의자에 앉아 계셔도 예수님이며, 그 분은 목욕탕 의자에 앉아서 '요놈이 날 알아보나 보자'라고 쪼잔하게 우리를 시험하시지도 않으신다. 내가 믿는 그리고 내가 아는 예수님은 가장 높은 보좌에서 필요 할 때엔 가장 낮은 곳 까지 오시기도 하시며, 내가 원할 때에 그리고 필요 할 때에는 언제든지 당신을 내게 드러내신다. '내가 여기있다 내 아들아 내가 너를 잘 안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분이 내가 알고 믿는 예수님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있어서 다른 종교와의 비교는 너무 너무 무의미하다. 처음부터 질문부터 잘 못 됐다. 제목부터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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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3. 1. 16:11

참고서적: 주석성경과 그 외 서적들 Opinion2011. 3. 1. 16:11

나는 개인적으로 원전 이외의 것을 싫어하는 편이다. 물론 성경에 관해서 어떤 것을 원전으로 삼을 것이냐는 민감하기도 하고 쉽게 다루기도 어렵기 때문에 나는 여기에서 간단히 '성경'을 원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겠다. 어떤 역본이든 어떤 언어로 적혀 있든 간에 성경을 원전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외의 모든 강해서는 원전은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그런 서적들은 대체 몇 단계를 거친 저작물인지 알 방법이 없다. 참고서적을 참고한 책을 참고한 서적을 가지고 연구하고 싶지는 않다.

이런 이유로 나는 원전인 성경을 보는 데에 주력한다. 그리고 여러 가지 주석들을 본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는 주석성경(Study Bible)은 당연하겠지만 성경이 병기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거의 모든 종류의 주석성경은 관주를 제공한다. 사실상 이것이 내가 참고하는 거의 전부라고 볼 수 있다.
간단하게 현재 참고하고 있는 성경들과 참고서적들을 열거해 보겠다.

1. NKJV Study Bible
2011/12/08 - [분류 전체보기] - NKJV Study Bible 참고


2. NIV Study Bible
이 성경의 주석은 딱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고고학적 발견과 학계의 여러 가지 의견을 알려주는 측면에서는 점수를 줄 수 있으나, 딱히 주석에서의 철학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충실하지도 않다. 번역 자체는 NIV와 이후에 언급할 NASB가 가장 차분하고 중도적인 것 같다.
한국에서 나오는 홀리원 주석성경이 바로 이 성경을 번역한 것인데, 내가 보면서 실망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의견이 별로 없고 다들 톰슨성경의 대항마로서 충분 또는 뛰어나다는 칭찬 일색인 것이 좀 의아하긴 하다.

3. Life Application Study BIble NIV
이 주석은 QT하는 데에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그래서 전문적인 깊이는 부족한 편이고, 어떤 때는 은혜롭게 만들기 위해 너무 억지를 부린 듯한 인상도 받는다. 그러나 큰 장점은 풍부한 지도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성경들은 중요한 지도 하나 그려 넣고 계속 앞뒤로 살펴가면서 확인해야 하는데 이 주석성경에서는 필요한 곳 마다 지도를 계속 반복해서 넣어 주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 지리상의 위치를 확인하는 데에 상당한 도움을 준다. 이 부분 만으로도 높은 점수를 줄 만 하다.

4. The MacArthur Study Bible NASB
번역도 주석도 무난하다. 아주 차분하다. 특징이 별로 없어서 쓸 말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추천 할 만한 성경이다.

참고: 2013/09/06 - [Opinion] - NASB MacArthur Study Bible

5. ESV Study Bible
2011/12/08 - [Opinion] - ESV Study Bible 참고


6. Life Application Study Bible NLT
현재는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주어서 가지고 있지 않다. 주석은 'Life Application Study BIble NIV' 와 같다. 다만 번역만 NLT인 성경인데, 이 NLT는 참으로 특징적인 성경이다. 먼저 매우 쉬운 번역본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민수기의 지루한 사람숫자 나열을 그냥 표로 만들어서 전달해 준다. 이런 식으로 파격적인 번역을 했기 때문에 읽기에 아주 편하다. 특히 사해사본에 부가적으로 더 나오는 부분도 따로 병기를 해 주기 때문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너무 쉽다는 것이 양날의 검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얕은 깊이가 그것이다. NKJV의 경우에는 직역을 기본 정책으로 하고 있다. 어떤 경우 번역이 힘든 경우도 있고 의미가 모호 할 수도 있는데 그런 경우 해석을 독자에게 맡기고 있다. 따라서 읽는 사람이 노력을 기울여 읽어야 한다. 그런데 NLT는 그런 경우 역자가 해석을 해서 역자가 선택한 해석 방법을 따라 쉽게 풀어 기록했다. 따라서 독자가 생각할 여지가 그 만큼 적다. 나는 이것도 저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굳이 선택하라면 난 NKJV의 번역 철학에 동의한다.

7. New Illustrated Bible Dictionary
재미있고 충분히 소장하고 있을 만한 가치가 있는 도서이다.

특히 이 책의 저자가 Ronald F. Youngblood라는 사람인데,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사람이 바로 NIV, NIrV, TNIV의 번역 팀에 있었던 사람이며, 위의 NIV Study Bible의 Associate Editor이기도 하다. 정확히 확인한 바는 아니지만, 다행히 2011년에 새로 번역된 NIV의 번역에는 관여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새로 번역된 NIV에 대해서는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여하간, 나는 책의 저자를 상당히 신경쓰는 편인데, 그 면에서는 안심하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내가2011/02/25 - [Opinion] - 성경연구에서도 언급했던 것과 같이, 성경연구에 관한 한 전문가라 주장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조심하지 않으면 말도 안된는 글을 읽고 영향받기 쉽기 때문이다.

8. Bible Chars, Maps & Time Lines
차트가 필요하면 차트만 정리된 책을 사고 지도가 필요하면 지도만 정리된 책을 권한다. 이 책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용이 많긴 한데 필요한 내용은 별로 없는 책이다.

9. Josephus: The Complete Works
10. Eusebius: The Church History
이 두권의 책은 역사적인 사료로서 상당한 가치를 지닌 책이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한 책인데 불행히도 한국어로 번역된 책은 없는 것 같다. 있다 해도 분량에 비해 턱없이 비싼 책 밖에 없으며, 번역이 잘 되어 있는 지 확인 할 방법도 없다. 영어로 읽는 데에 부담이 없는 사람이라면 읽어보기를 권한다.

11. 톰슨성경
이 책은 이미 절판 되었다. 여전히 톰슨2 성경주석이라는 이름으로 성경 본문 없는 성경주석이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상한 형태로 유지되고 있을 뿐, 절판된 책이다. 이 주석은 아마 The Thompson Chain-Reference Study Bible을 번역하고 다른 내용을 추가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톰슨2로 넘어가면서 대대적으로 개정되어 The Thompson Chain-Reference Study Bible의 흔적이 거의 사라져 버린다. The Thompson Chain-Reference Study Bible자체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매우 초기 형태의 주석성경이었고, 그 자체가 매우 뛰어난 시스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톰슨 성경 또한 매우 좋은 성경연구의 도구 역할을 한다. 톰슨2는 개인적으로 살펴보지 못해서 의견을 말하기 힘드나, 보지 않은 상태에서 무책임하게 말하자면 난 톰슨성경이 톰슨2보다 좋다.

12. 일년일독 통독성경
아버지가 읽고 있던 것을 거의 강탈해서 가지고 있는 성경이다. 내용을 떠나 성경이 참 이쁘다. 글자체도 좋고 간결한 설명도 좋다. 물론 설명이 깊이가 깊은 것도 아니고 풍부한 것도 아니다. 제한되어 있는 공간 내에서 쓰인 것의 한계는 너무 명확하다. 더구나 이 성경도 일종의 연대기 성경인데, 별로 그 순서가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어쨌든 시간 순서로 읽는 방법의 의의에는 동의하며, 들고 다니면서 읽기에 딱 좋은 크기와 디자인을 가지고 있으므로 구입을 권하고 싶다. 보기 좋아야 더 많이 읽는 법이다.

13. The Thompson Chain-Reference Study Bible
생일선물로 들어온 성경인데, 현제 나오는 버젼을 아니고 1934년 판이다. 이 이전에 1908, 1917, 1929년판이 있었으니, 대충 4판 정도 되는 성경이다. 보관 상태는 아주 깨끗하며 그저 오래된 책 특유의 냄새가 날 뿐이다. KJV인데, 과연 내가 이 성경을 읽게 될 지 모르겠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아까워서도 못 읽을 것 같다.

현재 이 정도의 자료들을 참고해 가면서 성경을 보고 있다. 더 정확하게는 역본들을 돌려가면서 보고 있다. 이거 끝나면 저거 보는 식으로 보고 있는데, 중간 중간에 한글 성경을 보고 있다. 아무래도 다른 역본으로 보다 보니 입에 잘 붙지를 않아서 어느 순간 아주 간단한 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미국에 살고 있고 또 영어로 성경을 읽는 데에 딱히 큰 어려움이 없는 것에 감사할 때가 종종 있다. 나는 시장의 차이라고 보는데 아무래도 한국은 시장이 작다 보니 독자적인 주석 성경이 나오지 않고 있다. 톰슨, 레노바레, 홀리원등 모든 주석성경이 일종의 번역본이다. 물론 톰슨은 원본에 많은 변화를 주어서 이제 정말 그것을 참고했었는 지도 애매할 만큼 변하긴 했지만 그래도 시작은 번역이었다. 여하간 앞에서도 말을 했었지만 여러 역본 여러 주석을 참고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 너무 한 번역에만 그리고 한 주석에만 얽매이지 않았으면 하고 더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깨달음이다. 어차피 다 사람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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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2. 26. 14:00

성경연구 Novels or Essays2011. 2. 26. 14:00

이 글에서는 내가 성경을 보면서 생각해 오던 성경 연구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이 문제에 대해 그렇게 깊이 있게 생각하고 정리한 것은 아니므로 전문적이지도 않고 내 생각이 내일 바뀌지 않으리라는 확신도 없다는 것을 서두에 미리 밝혀 둔다.

나는 먼저 성경을 반복적으로 읽는 것이 성경 연구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몇 번 읽었냐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성경을 한 두번 읽었다고 성경의 줄거리가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옳지 않다. 성경은 상당히 긴 편이고, 어려운 편이며,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부분만 가지고 어떤 진리를 찾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강해서나 참고서적등을 통해서 내가 직접 읽지 않고도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많다. 나 또한 그 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권하고 싶은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직접 읽으면서 얻는 깨달음의 깊이는 결코 참고서적을 통해 얻을 수 없다. 또한 참고 서적이 틀릴 수도 있다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가 유독 성경에 관해서는 상당히 중요하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른 분야는 전문가 집단이 있고, 그 전문가 집단의 전문성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방편이 상당히 많다. 예를 들어 전자공학의 경우 저자가 IEEE Fellow라고 하면 어느 정도 보장되는 전문성이 있을 것이다. 분야가 생물학이라면 세부 분야에 따라 Nature/Science 또는 PNAS, Genome Research 같은 논문집에 실린 논문들로 어느 정도 평가가 가능하다. 그리고 가장 쉬운 방법으로 어디에서 Ph.D.를 받았는지만 가지고도 어느 정도의 전문성은 보장된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 않다. 전문가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다. 내 전문 분야는 성경이 아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관한 이야기를 여기에 많이 쓰고 있고, 교회에서도 양육 프로그램을 인도하고 있다. 이런 특수성으로 인해서 성경 분야에는 전문가가 너무 넘쳐나며, 그들은 거의 모든 경우 자신의 이야기만 한다. 달리 말해 전문적인 글이 따라야 하는 일반적인 규칙을 (인용, 참고문헌 따위를 명시하는 것) 전혀 따르지 않는다. 따라서 참고서적을 그냥 믿기에는 위험성이 너무 많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도 당신에게는 위험한 글이 될 수도 있다. 더구나 우리는 '믿음'에 관한 문제의 일환으로서 성경 연구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는 '사실' 보다 믿음이 더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성경에 대해서는 '변하지 않는 주장'을 할 수 없다. 모든 연구에서 '나'는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나는 내일이라도 여기에 올렸던 모든 글이 죄다 틀렸다고 부끄러움 없이 이야기 할 수 있다.)
모두가 알다 시피, 성경은 한 부분만 꼬아도 이단이 될 수 있는 미묘한 부분이 상당히 많다. 따라서 나는 참고서적을 이용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스스로 읽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읽어 가면서 자신만의 성경을 보는 방법도 개발하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성경 연구는 매우 어렵고 권하기 힘든 일이 되어 버린다. 말이 좋아서 반복해서 읽으라고 쉽게 말하지, 사실상 일년일독도 쉽지 않다. 특히 일이 있는 사람인 경우 일년일독은 상당한 노력과 결심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그것을 10년을 해야 겨우 10독이 된다. 그냥 내 경험상 10독 정도 되니까 대충 윤곽정도 잡히는 느낌을 받았었다. 더구나 나처럼 주석서를 보면서 앞뒤로 확인해 가면서 읽으면, 하루에 1시간씩 읽어도 일년일독이 힘들 정도가 되니, 정말 성경 연구는 결코 쉽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읽기를 권하는 이유는 말씀으로 닦인 기반은 잘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을 많이 읽으면 진리를 더 잘 보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더 수준 높은 믿음을 가지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구원을 더 확실히 붙들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즉, 짧게 만난 예수님이 나의 인생 전부를 바꾸고 하나님을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일은 수도 없이 일어나며 부인 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꾸준한 성경 연구를 통한 깨달음과 앎은 그 깊이가 깊다고 말하고 싶다. 겉으로 드러나는 믿음의 행위는 비슷한 수준일 지라도 그 깊이가 얕은 경우 쉽게 넘어지거나 시험에 빠질 수 있지만 오랜 기간 성경 연구를 통해 내려진 깊은 뿌리는 그런 어려움 속에서 쉽게 넘어지지 않는 안정성을 보장해 준다.

어떤 경우 바울의 서신들을 보며 이 글을 쓰는 바울의 심정을 뼈저리게 느껴서 그것을 나누기 위해 이야기를 해 보면 이야기가 상당히 헛도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런 경우 대부분 상대방은 그것을 그냥 가르침으로, 사실로, 진리로 받아들이는 데 반해 나는 '인간 바울'이 당시 처한 환경에서 그런 내용을 글로 남기는 그 심정을 이야기 하는 데에서 오는 괴리가 그 원인이었다. 그러면 꼭 그런 것을 다 알아야 하느냐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절대 그렇지 않다. 그거 모른다고 구원 못 받는 것도 아니고 성경을 모르는 것도 아니며, 이해가 낮다고 할 수도 없다. 다만 누구는 아는데 나는 모르는 그룹에 속해 있을 따름이다. 그런 것을 조금씩 이해해 가면서 느껴지는 희열이 있으며, 성경 인물들의 나와 다를 바 없는 인간으로서의 고뇌 한계 등을 앎으로 인해 이해의 폭, 관용의 폭이 넓어지기도 한다.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나는 요즘 들어 더더욱 성경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더 힘들어 지는 것을 느낀다. 권하고 싶으나, 권하는 순간 너무도 높은 진입장벽을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는 문제 때문에 꺼려진다. 나 역시 요 근래 들어서야 성막에 관한 길고 지루한 출애굽기의 설명이 흥미로워지기 시작했으며, 이제 와서야 지루하게 반복되는 레위기의 제사 제도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고, 이 역시 나를 약간 좌절스럽게 만들었다. 대체 얼마나 읽었는데 이제서야 거기에서 작은 하나를 발견하는 것인지 안타깝고, 이런 지루하면서도 힘든 과정을 누구에게 권하기는 더욱 힘들 것 같아서 더 좌절스럽다. 나야 원래 두꺼운 책을 좋아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권하기가 애매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내가 더 읽으면 읽을 수록 더 그런 괴리가 커 지리라는 데에서 오는 허탈감 같은 것도 있다. (내가 결코 많이 읽었다는 것이 아니다. 난 꾸준히 읽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글을 시작 할 때에는 뭔가 더 그럴 듯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그냥 이 정도에서 그만 둬야겠다. 앞으로 내 생각이 더 건설적으로 정리되면 다시 고쳐 봐야겠다. 마지막으로 2011/02/28 - [분류 전체보기] - 참고서적: 주석성경과 그 외 서적들에 내가 참고하는 성경들을 정리해 두었으므로 참고해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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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2. 19. 08:43

야곱의 후손: 성경은 무오한가 Bible Stories2011. 2. 19. 08:43

이것 저것 찾아 보다가 적어도 내가 보기에 참으로 쓸데 없는 논쟁을 하나 보게 되었다. 애굽에 내려 갈 때의 야곱의 후손에 관한 이야기이다. 논쟁은 몇 개의 성경 구절로부터 시작된다.
야곱과 함께 애굽에 들어간 자는 야곱의 며느리들 외에 육십육 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태어난 자이며, 애굽에서 요셉이 낳은 아들은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 명이었더라. (창세기 46:26-27)
요셉이 사람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사도행전 7:14)
여기에서 숫자 차이가 벌어진다. 그래서 어느 것이 맞냐는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를 통해 두가지를 이 글을 통해 하고 싶다. 일단 성경의 무오성에 관한 논쟁에 관해 짧게 내 생각을 말하고 싶고, 그 숫자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하고 싶다.

성경의 무오성에 관해
얼마전 기독일보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애굽 이주했던 야곱의 가족 수는 70명인가 75명인가? 이 글 중간에 이런 말이 있다.
그러면 성경 기록이 잘못이라는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성경은 거짓이 없고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다만 사도행전 7장에서 말하는 75명의 숫자는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니, 스데반 집사의 개인 설교 내용 중 잘못된 부분이 있을 뿐이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죄송하지만 좀 웃었다. 성경은 거짓이 없고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인데 거기에 적혀있는 스데반의 내용은 스데반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틀릴 수 있다니? 그게 틀렸다는 말이 아니면 뭐지? 성경이 죄다 사람 손으로 쓰였고, 바울 서신등은 설교에 가까운 내용인데 그러면 그것들은 다 틀릴 수 있다? 그래도 성경은 틀리지 않았다? 대체 뭔 소린 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결론은 창세기의 내용은 맞고 사도행전의 말은 틀리단다. 창세기도 모세가 적은 글인데 모세는 그래도 좀 더 믿을만 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단다.
더구나 그는 창세기의 기록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상당히 길게 적혀 있는 스데반의 설교 전반을 다 틀렸다고 주장하며 나름 증명까지 하는 노력을 보였다. 왜 그러지? 정말 나는 왜 그러는 지 이해가 안된다. 대체 왜 그러지? 물론 그 논증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난 정말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틀림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한 구절 살리려고 여러 구절 죽이는 것이 정말 이해가 안 될 뿐이다.
나는 왜 이렇게 성경의 무오성에 집착하는 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아니 물론 이유는 안다. 내가 밟고 있는 땅이 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두려워서 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기독교가 성경 위에 서 있다고 할 때 성경의 오류는 기독교 자체를 흔들 수 있다. 나는 왜 기독교를 반석(예수님)이 아닌 모래(성경)위에다가 세우려 노력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모래위에 지은 집을 가진 사람의 고충은 충분히 이해된다.

나는 성경이 무오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믿음에 문제가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나의 생각은 수고스럽더라도 2011/02/18 - [Opinion] - 믿음 그리고 성경를 참고해 주기를 부탁한다.

야곱의 후손 숫자에 대하여
자 본격적으로 숫자 이야기를 해 보자.
여러 글들을 살펴 보았다. 어떤 사람은 Gleason Archer라는 사람의 말까지 인용하면서 이야기 하고 전혀 관계 없는 맛소라사본 사해사본 칠십인역까지 언급하면서 이야기 하기도 한다. 내가 사본들에 대해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지 모르겠으나, 이 논의하고 사본은 별 관계가 없다는 것만 여기에서 밝혀 두기로 하자. 창세기는 몰라도 사도행전과는 관계없는 사본 들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글들은 목사들에 의해 적혀 있다. 하긴 목사 정도 되야 성경을 읽고 이런 내용을 파해치는 데 시간을 사용해도 아깝지 않을 것이긴 하다. 목사도 아닌데 이런 거나 적고 있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기는 하다. 다음 2가지 의견을 보자.

의견1 - 이집트로 내려간 사람은 야곱을 포함 67명, 요셉과 그의 두 아들 포함 70명, 야곱의 손자 53명
의견2 - 아들 12명, 딸 1명, 손자 51명, 손녀 1명, 증손자 4명 총 69명+야곱 = 70명 (여기에 '이는 착오가 없는 숫자입니다'라고 덧붙였다.)
많은 의견들이 있으나 어차피 사용할 수 있는 재료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거의 이 두 가지 의견과 대동소이하다. 두 의견 모두 70인이 되게 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가상하다.

나는 '이 사람들 덧셈이 안되나?'라는 생각을 했다. 정리해 보자.

야곱의 자식

손자

손녀

증손자

르우벤

4

 

 

시므온

7

 

 

레위

3

 

 

유다

3

 

2

잇사갈

4

 

 

스불론

3

 

 

디나

 

 

 

레아의 자손

7(1)+24(2)+2(3)=33

7

 

 

아셀

4

1

2

실바의 자손

2(1)+12(2)+2(3)=16

요셉

2

 

 

므낫세

10

 

 

라헬의 자손

2(1)+12(2)+0(3)=14

1

 

 

납달리

4

 

 

빌하의 자손

2(1)+5(2)+0(3)=7

총계

33+16+14+7=70 (야곱 포함 71)

손자: 24+11+12+5=52, 손녀: 1, 증손자: 4

따라서 70-3(요셉가족)=67


따라서 다음의 성경 구절은 틀렸다.
야곱과 함께 애굽에 들어간 자는 야곱의 며느리들 외에 육십육 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태어난 자이며 (창세기 46:26)
성경 구절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불경한 것이 아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틀린 것은 틀린 것이다. 아니면 이 중에 애굽에 함께 들어가지 않은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이 있으면 된다. 뭐 이 해석도 틀린 것은 아니라고 본다. 다만 성경을 통해 증명이 되지 않을 뿐이다. 아니면 이 중의 하나는 양자로 들였기 때문에 야곱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든지.

의견1의 손자(손녀포함) 53은 맞다. 거기에 야곱의 자식 13명을 합하면 이미 66이고 증손자 4명을 합하면 70명이다. 의견2는 덧셈을 못하는 것인지 손자가 51명이라고 한다. 여하간 이상하다. 왜 그러지? 정말 덧셈이 안되나? 덧셈이 안되면 계산기라도 좀 이용하지 대체 이런 엉뚱한 계산들은 왜 하는 지 모르겠다. 그런데 난 이 숫자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2011/02/16 - [Bible Stories] - 나이를 통해 본 야곱의 일생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말 저 사람들이 야곱이 애굽에 내려가는 시점에 있었느냐 하는 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이를 언급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으나 정확히 짚어 보지는 않은 것 같다. 좀 짚어 보면 70명이냐 71명이냐 75명이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오히려 추정 나이에 자식이 열명이나 있었던 베냐민은 아주 이상하며, 손자까지 있던 유다와 아셀이 정말 이상한 경우다. 심지어 유다는 손자를 며느리와 사이에서 보았으므로 보아스의 아들은 사실상 증손뻘이다. 이게 더 이상하지 않나?

여기에서 조금 성경 좀 읽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몇 마디만 하겠다. 어려운 말좀 하지 말았으면 한다. 맛소라사본 이야기는 왜 하나? 맛소라 사본이 뭘 뜻하는 지는 알고 하는 건가? 그런 이야기 하면 히브리어를 모르는 대부분의 신자들의 공격은 애초에 차단 가능하기 때문에 하는 건가? 성경에 나온 숫자들의 덧셈도 잘 못하면서 무슨 히브리어 사본까지 언급하나?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오히려 말도 안되는 설들이 진실이 되어 교회에 판치게 되는 것이다. 말은 쉽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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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2. 19. 08:42

믿음 그리고 성경 Novels or Essays2011. 2. 19. 08:42

성경을 왜 읽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직접적으로는 그 질문 때문에 쓰게 되었는데, 다른 이야기를 위해서도 일단 이 글이 필요 할 것 같아서 적는 이유도 있다.

나는 성경이 무오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오하다. 그러나 성경은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의 손으로 전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무오성을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다면 원본이 남아 있어야 한다. 물론 원본이 남아 있었다면 그것이 우상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오류 투성이인 성경을 가지고도 전쟁이 나기도 하는 세상인데 원본이 남아있다는 상상은 하기 조차도 무섭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본을 다 없애 버리고 사본만 남아 전해 지도록 했으며, 그 사본 들에는 어쩔 수 없는 오류가 개입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을 이야기 하자면 할 이야기가 참으로 많으나 너무 민감한 이야기이고 이 부분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강요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이 정도만 하도록 하겠다.

이 이외에도 입이 근질 거리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을 하면 정말 문제가 많을 것 같아서 꾹 참도록 하겠다.

그러면 오류가 있는 성경을 왜 읽느냐라고 정확히는 내 아내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목회자도 아니고 교회 관련 일을 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하루에 대충 1시간 가까이 성경을 보고 연구한다. 웃긴 이야기 일 지 모르겠는데, 난 두꺼운 책을 좋아한다. 읽어도 읽어도 끝이 나지 않는 책을 참 좋아한다. 물론 내가 그 내용의 가치를 인정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정말 재미있는 소설을 읽는데 금방 끝나면 안타깝지 않겠는가. 그런 심정이다. 그리고 난 성경이 참 재미있다. 재미있으니 되도록 길었으면 좋겠는데 성경은 충분히 길다. 그래서 좋아한다.
집에 여러 버젼의 성경이 있다. 그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보는 나에게 아내가 왜 읽냐고 묻는다. 더구나 성경에 나타난 오류들을 내가 설명해 주니 더더욱이 그렇게 틀린 글을 왜 읽냐고 묻는다. 물론 아내도 기독교인인데 성경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고 싶어하는 지극히 평범한 기독교인이다.

대답해 보겠다.
일단 성경은 믿어져서 보는 것이 아니고 믿기 때문에 보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을 성경을 통해서 알려 주시겠다고 직간접적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취를 찾기 위해서 읽는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어떤 이유로인해 성경이 다 소실되고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하... 사... 이니라'밖에 남지 않았다 치자. 난 그렇다면 겨우 그 5글자 만으로도 하나님께서 인류에서 하시고 싶은 말씀을 다 하실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게 나의 믿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 성경에 오류가 있건 없건 신경쓰지 않는다. 그리고 오류가 없기를 바라지도 않고 오류가 없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볼 뿐이다.

그리고 난 되도록 내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성경의 문자에 집중하지 않기를 권하고 가르치고 싶다.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에 집중해야지 맥 빠지게 문자에 얽매이고, 틀리지 않았을 거라고 믿고, 성경을 우상화 하다가 뭐 하나 걸리면 넘어져 버리는 약한 신앙을 갖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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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통계적으로 무의미한 데이터를 가지고 통계적인 의미를 뽑아내는 경우

뉴스자료를 보면 통계자료에 근거한 많은 정보가 들어있다. 그런데 그 내용을 해석함에 있어서 전문적인 지식이 없다 보니 엉뚱하게 해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즉, 거의 의미 없는 내용을 (쓰는 사람도 모르고 썼을 가능성이 있다) 굳게 맹신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중요한 내용을 무시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내용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먼저 통계수치가 의미가 있으려면 그 결과과 랜덤 테스트(Random Test)에 의한 결과여야 한다. 그러나 랜덤 테스트라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오차를 줄이기 위한 기술이 연구되어 왔고 그런 기술이 사용된다. 자 일단 아주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서울 대학병원의 폐암 환자를 조사한 결과 70%의 환자가 흡연자로 드러났다. 그러므로 담배는 폐암의 원인이다.

이 말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아무 정보도 담고 있지 않다. 이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서울 대학병원에 입원한 폐암 환자의 70%가 흡연자'이다라는 것, 그것 뿐이다. 예를 들어 서울이라는 도시에 사는 인구의 평균 흡연율이 70%라면 폐암 환자의 70%가 흡연자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아~ 이사람들도 일반적인 서울 인구와 같은 통계적 특성을 가지고 있구나'라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연구를 의미있기 만들기 위해서는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테스트를 해야 한다. 서울에 사는 비흡연가 중에 '무작위'로 1,000명을 선택해서 그 중에 '무작위'로 500명은 흡연을 시키고 나머지는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한 다음에 폐암 발생율을 조사해야 한다. 물론 이런 실험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불가능하다. 더구나 위와 같이 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서울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통계자료가 된다. 전 세계적으로 통하게 만들려면 그 1,000명을 전 세계에서 택해야 한다. 물론 사람이 많으면 많을 수록 '신뢰도'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자 아주 피부에 와 닿는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운동을 하는 사람이 건강하다.

이거 정말 민감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운동을 하는 사람이 건강한가? 아무도 모른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역시 랜덤 테스트가 필요한다. 전 세계에서 무작위로 몇명을 선택해서 그 중 무작위로 다시 몇 명을 추려 규칙적인 운동을 시키고 나머지는 운동을 못 하게 한 다음에 그 이후 인생을 조사해야 대답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건강한 사람이 운동하길 좋아한다'라는 결론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경우 조금 다른 방식의 테스트가 가능한데, 건강한 사람과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운동 상태를 조사해서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는 차이가 발견된다면 어쨌든 '운동이 건강과 관계가 있다는 증거가 있다'라는 정도는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관계라는 것이 운동해서 건강해진다는 관계인지 건강해서 운동한다는 관계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사람이 운동을 한다면 억지로 운동을 해서 건강한 척이라도 하고 싶을 수도 있고, 아무래도 상식적으로 생각 할 때에 운동하면 건강해 질 것 같고 (슬프게도 운동해서 건강을 해친다는 연구도 생각보다 많다), 더구나 운동과 건강 사이에 관계가 있다는 증거도 있으니, 나는 운동하면 건강해 진다고 믿겠다라고 한다면 그것도 감히 '과학적이지 않다'라고 말 할 수는 없다. 모두가 인정 또는 인정 가능한 가설이 있는 경우 완벽하지 않은 증거를 통해 특별한 결과를 도출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런 것을 관찰연구(Observational Study)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교육열에 일조한 다음 문장을 보자.

강남 8학군에서 서울대를 많이 들어갑니다.

이 사실 때문에 한 때 (지금도 그럴 지도 모르지만) 그 동네 땅 값이 오르고 거기로 전학만 가면 서울대 가는 줄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전교생의 1/3이 서울대에 들어가는 고등학교로 내 자식을 전학 시키면 서울대 갈 확률이 1/3이 되는 줄 아는 비범한 부모들이 상당히 많다. 심지어 그 중에는 공부를 많이 한 부모들도 있는데, 참 웃기는 것이 통계적인 데이터는 배운 사람들도 쉽게 속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강남 8학군에 서울대를 갈 만큼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 많았기 때문에 결과가 그렇게 났었던 것 뿐이다.

통계 데이터의 해석을 엉뚱하게 하는 경우

여기까지는 통계적으로 의미 없는 사실에서 잘못된 추론을 하는 예를 들어 보았다. 예를 들자면 끝이 없고 '과학'면의 기사들을 지금 당장 검색해도 어처구니 없는 자료와 그에 대한 해석은 수도 없이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섣불리 그런 것들을 건드렸다가 어떤 일을 당할 지 몰라 실제 기사를 이용한 글을 쓰지 않으려 한다.

다음으로 통계수치에는 문제가 없는데 그것의 해석과 적용에 문제가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겠다. 일단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알고 있기로 자동차의 타이밍 벨트를 교체하면 6~8만 마일을 간다고 알고 있다. 그러면 그 권장 마일리지를 넘어가면 타이밍 벨트가 끊어질까? 나는 실험을 해 보지는 않았지만 두배 이상은 갈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두 배 정도를 탔던 적은 있다. 그러면 여기에서 분명히 음모론을 끄집어 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또는 그런 경향을 띤 사람을 적어도 한 둘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죄송하지만 무식해서 하는 소리다.
만약 일정 수준의 퀄리티 콘드롤을 합격한 타이밍 벨트들의 수명을 도표로 그리면 가우시안 곡선을 그릴 것이다. 그 가우시안의 가장 높은 위치의 마일리지가 타이밍 벨트들의 평균 수명이 될 것이다. 그러면 타이밍 벨트의 교체시기를 정할 때에 그 평균값을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절대로 그러면 안된다. 만약 그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당신의 타이밍 벨트가 교체시기가 되기 전에 끊어질 확률이 50%인데 그래도 타겠냐라고 질문을 하고 싶다. 즉, 다시 말해, 교체시기를 정할 때에는 나름의 판단 기준이 필요하다. 내가 장담하는데 타이밍 벨트들의 평균 수명은 6~8만 마일보다 훨씬 길 것이다.
그러면 왜 그 보다 짧게 정하는가. 여기서 부터 비용(Cost)의 문제가 붙는다. 아직 쓸만한 타이밍 벨트를 교체하는 데에 들어가는 비용은 대충 수백불에서 일천불이 넘어가기도 한다. 쓸만하다고 믿고 타다가 끊어졌을 때의 비용은 아마 폐차일 것이다. 엔진을 교체한다고 하면 수천불은 그냥 날아갈 것이다. 더구나 돈 만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사고로 연결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즉, 이 경우에 비용의 차이가 너무 크다. 즉, 문제 없으리라고 믿고 타다가 문제가 생겼을 경우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쓸만한 타이밍 벨트를 교체 했을 경우 지불해야 하는 비용에 비해서 몇 배 또는 계산 불가능 할 정도로 높다. 이럴 경우 절대 평균 수명을 교체 시기로 정할 수는 없게 된다.
아직도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수명을 1만마일이라고 제조자가 말한다면 어떤 문제가 생기겠나? 99.99999999%의 타이밍 벨트가 1만마일만에 끊어지진 않는다고 하자. 결국 쓸데없는 낭비가 너무 심하게 된다. 이런 상황 하에서 즉, 너무 짧게 하면 낭비가 심하고 실질 평균 수명에 가깝게 하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 하에서 절충선이 6~8만마일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나만 더 보자. 美 고혈압 기준 국내 적용 '성인 50%만 혈압 정상'이라는 기사가 있었다. 이 글의 요지는 고혈압이 기존 140부터 였는데 미국 NIH에서 이 기준을 120으로 바꾸자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 글을 보면서 역시 음모론을 들고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이 역시 음모론으로 몰고 가면 안된다. 난 관계인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기준에서 정해졌는 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적어도 '온 국민의 50%를 비정상으로 만드는 기준이 정상적인 기준일까요?'라고 감정적으로 말하면 안된다. 이런 감정적인 유도에 사람들이 쉽게 넘어가고는 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말하는 사람이 어느 정도 사람들이 믿을 만한 뒷 배경을 가지고 있다면, 공부를 많이 했다든지 또는 의사라면, 그 파급 효과가 상당히 커지게 된다.
이 문제 역시 고혈압이 아닌 사람을 고혈압 환자로 판단했을 때의 비용과 고혈압인데 아니라고 판단했을 때의 비용의 차이가 기준점의 선택 이유가 된다. 참고로 개인마다 고혈압의 판단 기준은 달라 질 수 있다. 즉, 어떤 사람은 혈압이 100만 되도 고혈압의 위험에 노출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160이어도 고혈압의 위험과는 관계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만약 NIH의 연구 결과 거의 모든 질병의 원인이 고혈압이라면 좀 그 기준점을 당길 수도 있는 문제이다.
이 부분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은 혹 질문을 할 수는 있겠다. 그런데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 사람이 음모론을 제기하면 안된다. 파급효과를 생각해야 하며, 그렇게 해서 문제가 생길 시에 비용이 종종 왕왕 생명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 당신이 공부좀 한 사람이라면 특히 입조심을 하라고 말하고 싶다.

미국에서는 애들 예방접종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방접종 때문에 죽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란다. 더구나 그에 대한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의사들도 상당수 끼어 있다. 역시 난 이쪽 분야에 있지 않기 때문에 사실 관계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거의 확실히 (앞에서는 장담한다는 표현을 했음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즉, 그 보다는 자신이 없다.) 말하건데 예방 주사를 맞히지 않아서 아이에게 문제가 생길 확률이 맞혀서 생길 확률보다 훨씬 클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배경 지식을 근거로 제발 허위 과학(Pseudo Science)를 믿지 말기를 권한다. 누군가 말한다. 난 웃기만 했더니 암이 낳았어요. 난 쓴 뿌리만 골라서 갈아 마셨더니 암이 다 나았어요. 그런데 항암치료 받던 내 친구는 얼마전에 죽었어요. 특히 대체의학 쪽에 이런 이야기가 상당히 많다. 항상 예외라는 것이 존재한다. 선전되는 것은 그 예외들이다. 그 예외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조용하다. 실망했든가 죽었든가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주변에 보면 정말 간단하게 엄청난 질병을 고친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다. 심지어 마치 독립투사인 양 그것의 전파를 위해 '운동' 비스무리한 것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만약 그들의 방법이 정말 성공적이라면 그들은 분명히 노벨의학상을 받을 것이고 큰 병원들은 전부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그런 허위 과학에 속아 치료시기를 놓지는 우는 절대 범하지 말아야 한다.

통계는 생각보다 배우기 어렵다. 그런데 통계적인 사고방식은 생각보다 쉽게 배울 수 있다. 모든 일은 확률 놀음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 통계적인 사고 방식을 가질 필요가 있으며, 통계적으로 의미 없는 유혹에서 자유로워 질 필요가 있다. 이 글이 거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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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2. 17. 08:45

나이를 통해 본 야곱의 일생 Bible Stories2011. 2. 17. 08:45

성경은 역사적인 순서대로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의 나열에 대해서만 모호한 것이 아니고 어떤 때는 아무리 봐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그 부분에 대해 덮고 넘어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믿기 때문에 성경을 보는 것이지 성경이 믿어져서 성경을 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확실하지 않다면 당신은 성경을 보기 보다는 믿음을 재확인 해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성경을 통해 믿음을 재정립하는 것도 가능하며, 가장 좋은 그리고 이상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야곱은 창세기에서 가장 자세히 다루어진 인물 중 하나이다. 그런데 나이를 역산하다 보면 참으로 재미있는 사실들을 몇 군데에서 발견 할 수 있다. 먼저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간 나이가 70세가 넘어서 이다. 즉, 라헬, 레아와의 애증의 러브 스토리가 완전 할아버지가 다 된 이후에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더구나 장자권을 에서에게 살 때가 40세가 되기 전이었으므로 (창세기 26:34에 나온 에서의 결혼 전에 장자권을 팔았다) 그 이후 약 30여년간 어머니 품 속에 있었다는 말도 된다. 알다시피 에서는 40세에 결혼을 해서 일종의 독립을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 (창세기 27:13)
리브가가 집 안 자기에게 있는 그의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가져다가 그의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창세기 27:15)
이 내용을 역으로 생각하면 리브가가 가지고 있지 않은 애서의 의복도 있는 것을 뜻하므로 에서는 독립을 해서 살았던 듯 하다. 그런데 이삭은 여전히 결혼도 하지 않고 그냥 집에 있었다. 더구나 리브가가 말하기를 '내 말만 따르고',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라고 하였던 것으로 봐서 별로 줏대도 없고 과단성도 책임감도 없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물론 너무 과한 해석이기는 하다. 그냥 이 부분은 재미로 봐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삭이 180세에 죽는데 그 때가 바로 애굽에 팔려갔던 요셉이 바로를 만나기 1년 전이다. 이삭이 죽고 나서 겨우 27년이 지나 야곱은 147세에 인생을 마감한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성경을 통해 알아 보도록 하자. 난 이런 식의 역산이 매우 흥미롭다. 읽는 사람도 같이 흥미를 느끼길 바랄 뿐이다.

먼저 명백한 것들을 정리해 보자.
사실-1. 이삭 - 40세에 리브가를 만남. (창세기 25:20)
사실-2. 이삭 - 60세에 에서와 야곱을 낳음 (둘은 쌍둥이였음.) → 이삭과 야곱의 나이차는 60년이고 이삭은 리브가를 만난 후 20년이 지나서야 자식을 봄. (창세기 25:26)
사실-3. 야곱 - 밧단 아람에 20년을 있었음 (레아를 위해 7년 라헬을 위해 7년 그리고 라반의 양들을 위해 6년) (창세기 31:41)
사실-4. 요셉 - 17세에 꿈을 꿈. (창세기 37:2)
사실-5. 이삭 - 180세에 사망 → 당시 야곱의 나이는 120세 (창세기 35:28-29)
사실-6. 요셉 - 30세에 바로를 만남. (창세기 41:46)
사실-7. 요셉 - 39세에 형제들을 다시 만남 ← 7년 풍년과 2년 흉년이 지난 후에 만났으므로 바로를 만났던 30세에 9년을 더하면 형제들을 다시 만난 나이가 된다. (창세기 45:6)
사실-8. 야곱 - 130세에 바로를 만남. (창세기 47:9) 따라서 요셉과 야곱은 91세 차이가 난다.
사실-9. 야곱 - 147세에 사망함. (창세기 47:28)
사실-10. 디나는 레아가 낳은 7자식 중에 7번째로 태어났다. (창세기 30:21)

다음으로 추론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사실들을 정리해 보겠다.
추론-1. 사실-4와 사실-6을 통해 요셉이 바로를 만나기 전까지 애굽에서 보낸 시간이 최대 13년임을 알 수 있다.
추론-2. 밧단 아람으로 간 지 7년이 지나고서야 레아, 라헬과 결혼하고 그 이후 자식을 낳기 시작함. (창세기 29:20,27)
추론-3. 요셉은 디나보다도 더 늦게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창 30:21-24) 따라서 레아가 연년생으로 자식 7을 낳았다고 가정 할 때에, 적어도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간 지 15년이 지나서야 요셉이 태어났다. 그런데 창31:25에서 요셉을 낳자 마자 야곱이 라반에게 떠나겠다고 통보하는 장면을 보며, 아마 이 시점이 레아와 라헬을 위한 의무기간인 14년이 끝나는 시점이 아니었겠느냐고 생각하여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간 지 14년이 지나면서 요셈이 태어났다고 보기도 한다. 31:27-28을 보면 직후라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럽기는 하나 그렇다고 의무가 끝나고 나서 일을 계속 했다고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이지도 않는다.
추론-4. 요셉을 낳은 후에 라반에게 고향 땅으로 돌아가기를 구함. (창 30:25) 요셉을 낳은 후 한 동안 양떼를 불려야 했으므로, 요셉은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간 지 늦어도 19년 이전에 태어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 할 듯 하다. 양들도 새끼를 베고 낳고 키우고 하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추론-3의 요셉의 태어난 시기하고도 물리는 문제인데, 즉, 요셉은 야곱이 밧단 아랍으로 간 지 14-19년 사이에 태어났다고 봐야 한다.
추론-5. 밧단 아람에서 돌아오는 도중 세겜에서 디나가 그 땅 추장 세겜에게 강간을 당한다. (창세기 34:1-2) 즉, 이 당시 디나는 강간을 당할 정도의 나이였다. 더구나 레위와 시므온이 복수를 한 것으로 보아 그들 역시 적어도 건장한 청년 정도의 나이는 됐었다고 봐야 한다. (창세기 34:25-26)
추론-6. 디나의 강간사건이 있은 후에 베냐민이 태어난다. (창세기 35:16-20) 베냐민은 야곱의 나이 92세에서 108세 사이에 태어난 것이 확실한데 (사실-4,8),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디나가 강간 당할 만한 나이를 14세로 보고 요셉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고 본다면 베냐민은 야곱의 나이 106세에서 108세 사이에 태어났을 것이라고 추정 할 수 있다.
추론-7. 추론-4에서 야곱이 말한 6년간 라반의 양떼를 지켰다는 것이 (사실-6) 요셉의 출생 이후인지 이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추론-3을 보면 레아가 7명의 자식을 낳은 후에 요셉이 태어났으므로 레아와 결혼 후 적어도 8년이 지난 시점에 요셉이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라반의 양떼를 위한 6년이 시작되기 전에 요셉을 낳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대로, 요셉이 라반의 양떼를 맡은 후에 점박이로 이루어진 양떼가 큰 떼를 이루기까지의 시간이 필요하므로 6년이 지난 다음 요셉을 낳은 것도 아니다. 결국 요셉은 그 6년의 중간 어느 시점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즉, 그 6년중 어느 기간은 품삯 없이 일하였고 남은 기간은 점박이를 갖기로 하고 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추론-8. 추론-3,4,7을 통해 볼 때에 르우벤은 요셉보다 최소 7살, 최대 12살이 많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밧단 아람에 간 지 8년만에 르우벤이 태어난 것은 거의 확실시 되기 때문이다.

위의 추론들을 통해서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야곱의 나이

 

비고

 

요셉의 나이

 

147

56

야곱 사망.

130

39

야곱이 바로를 만남. 때에 르우벤의 나이는 최소 46 최대 51세였다.

121

30

요셉이 바로를 만남.

120

29

이삭이 180세로 사망함.

108

17

요셉이 꿈을 .

106-108

15-17

베냐민이 태어남.

91

0

요셉이 태어남, 야곱이 밧단 아람에 적어도 15 최대 19년째이다.

 

이삭의 나이

 

72-76

132-136

야곱이 밧단 아람에 도착.

40

100

에서가 나이 40 결혼 .

<40

<100

에서에게 장자권을 취득함.


이제 문제되는 것들을 하나씩 살펴 보자. 먼저 야곱이 애굽으로 이주 할 때에 유다와 아셀은 손자가 있었다. 창세기 40:12절에 보면 베레스의 아들로 헤스론과 하물이 나오는데 이 베레스는 유다와 다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창세기 38:29) 즉, 베레스 자체가 이미 손자같은 아들이었으므로, 그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증손자뻘이라고 할 수 있다. 이삭도 60세에 야곱을 낳았고 야곱도 80세 정도에 르우벤을 낳은 것을 상기에 볼 때에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나이라고 하겠다. 당시 르우벤의 나이를 아무리 많게 잡아도 51세였다고 한다면 유다는 4째 아들이므로 아무리 많아도 48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셀의 레아의 네아들과 빌하의 두아들 다음 실바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니 나이를 아무리 많게 보아도 45세가 넘지 않았을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베냐민에서 나타난다. 유다가 요셉에게 베냐민에 대하여 말하며 사용한 단어가 '아이'이다. 어떤 성경에는 'lad'로 어떤 성경에는 'boy'로 번역되어 있는데 말 그대로 아이라는 뜻이다. (창 37:2에 근거하여 boy라면 late teen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For how shall I go up to my father, and the lad be not with me? lest peradventure I see the evil that shall come on my father. (창세기 44:34)
그런데 이주 당시 자손의 이름을 열거한 것을 보면 베냐민에게 이미 아들이 10명이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창세기 46:21) 위의 표를 근거로 야곱이 바로를 만날 당시의 베냐민의 나이를 추론하면 22세에서 24세 사이이다. 물론 많은 처가 있었다면 가능하긴 하겠으나, 별로 현실적이지 않다. 더구나 조상들의 결혼 형태와 비교하면 너무 빠르다.

불행히도 어거지로 숫자를 맞춰보려 해도 쉽지 않다. 이를테면 르우벤이 밧단 아람으로 간 지 8년째에 태어나지 않고 첫 해에 태어났다고 가정해 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7년이 지난 후 정식으로 결혼하고 애들을 낳기 시작한 것이 아니고 바로 결혼 생활을 시작하고 그에 대한 보상을 7년간 했다고 가정 할 수도 있다. 물론 성경에 드러난 내용은 그렇지 않다고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억지로 맞추려고 해 봐도 겨우 24세가 31세가 될 뿐이다. 그리고 유다는 겨우 55세에 증손자까지 봐야 한다.

애굽 종살이 430년(출애굽기 12:41) 광야생활 40년(신명기 8:4) 그리고 애굽에 들어 갈 때의 레위의 추정 나이 50세를 합한 약 520년 간 5대밖에 흐르지 않고 (레위-그핫-아므람-아론-엘르아살-비느하스, 출애굽기 6:16-25, 더구나 창 15:16에 사대만에 돌아오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 예언하고 있다), 애굽 종살이와 사사기 약 350년, 즉, 합해서 780년 기간 동안 겨우 10대밖에 흐르지 않은 것을 볼 때에 위의 계산은 물음표만 남기고 있다. (유다-베레스-헤스론-람-아미나답-나손-살몬-보아스-오벳-이새-다윗, 마태복음 1:1-6).

누구든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면 알려주기를 바란다. 물론 아주 속편하게 성경에 언급되는 사람들은 상징적인 사람들 뿐이므로, 거기에서 5대만 나와 있다고 해서 실제로 5대만 흐른 것은 아니라고 말 할 수도 있다. 즉, 그 사이 사이 더 있었을 거라는 말이다. (그렇게 해설하는 사람들도 많고, 나 또한 그리 틀렸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단 마태복음에서 딱 잘라 14대씩 맞춘 것을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기가 나는 불편하며, 누락된 것만 문제가 아니라 기간에 비해 너무 많은 것도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런 식의 속편한 해석은 타당하게 보이지 않는다.

다만 여기에서 몇 가지 가능한 (그러나 성경적으로는 틀리거나 또는 증명 불가능한) 가설을 몇 가지 이야기 해 보겠다.
  1.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갈 때의 르우벤의 나이가 50세 정도라는 것을 그대로 받아 들인다면, 유다나 아셀의 손자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으며, 베냐민도 10명이나 되는 아들을 두기는 힘들었다고 본다. 물론 아내가 10명이었다면 1년만에 10명의 아들을 낳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에 그렇다는 말이다.
    뭐 어차피 성경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받아들일 수도 있는 문제이나 아무래도 성경에 딱 잘라서 창세기 46:27에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 명이었더라"라고 나온 마당에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기는 쉽지 않은 문제이다.
    더구나 베레스가 태어난 과정을 보면 그 이야기는 애굽에 내려가서의 이야기라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에 분명 그 전에 있었던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유다가 적어도 손자 볼 나이는 되었었다고 보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나도 잘 모르겠다.
  2. 르우벤의 나이가 사실 많았다고 이야기 하자면, 야곱이 밧단 아람에 있었던 기간이 20년 보다 길어야 한다. 즉, 야곱이 밧단 아람에 들어간 시기가 70여세가 되어서가 아니고 한 50세 정도였다고 보고 들어가서 7년이 지난 후에 결혼 한 것이 아니고 결혼은 미리 했는데 그에 대한 의무를 뒤에 했다고 보면 르우벤의 나이를 한 70세 정도로 조정 가능해 지고 그러면 어거지로 약간이나마 맞출 수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너무 오류가 많아서 나 스스로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당장 뚜렷하게 나오는 요셉의 나이부터 문제가 되고 여하간 너무 말이 안된다.
  3. 야곱의 나이는 맞고 요셉의 나이는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편할 것 같다. 야곱이 바로를 만났을 때에 130세는 맞다고 하고 요셉이 39세가 아니었다고 본다면 조금 편해 진다. 즉, 요셉이 바로에서 7년 풍년 7년 흉년을 이야기 하는데 그 7년 풍년이 이야기 한 직후에 시작한 것이 아니고 한참 지나서 시작됐다고 보면 된다. 이를테면 20년 후에 시작했다고 보자. 그러면 요셉이 야곱을 만난 당시의 나이가 59세가 된다.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러브스토리를 만들 당시의 나이가 50대로 떨어지고 르우벤은 대충 70세 정도로 맞출 수 있다. 이야기가 부드러워지고 있다.
    그럼에도 남는 문제는 베냐민은? 아들이 10명이나 있는데 '아이'라고 한 부분은?
어차피 야곱이 애굽에 내려갈 당시의 후손 숫자는 성경에서 대표적인 논란 거리중의 하나이다. (2011/02/18 - [Bible Stories] - 야곱의 후손: 성경은 무오한가) 그 논란을 가만히 살펴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을 맞는 것으로 맞추기 위해 정말 눈물겨운 노력들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덧셈이 다들 안되는 것인지 아니면 성경을 안 읽고 남들이 하는 말을 가지고 재해석을 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어쨌든 그 숫자에는 문제가 있고 누가 틀렸건 틀렸다. 그러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성경의 저자가 하지 않고 넘어갔으나 이면에 자세히 이야기 하기에는 분량상 또는 어떤 이유상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고 인정 할 필요가 있다.

나중에 천국가면 하나님께 물어봐야겠다. 물론 그 옆에 모세 할아버지도 동석시킬 생각이다. 난 그냥 모세 할아버지가 떳떳하게 '뭐 그런 걸 그렇게 오래 생각했어?'라고 말하고 하나님이 '별거 아니잖아?'라고 말씀해 주실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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