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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적었던 글에 대해 어투를 수정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삭제하는 등의 소소한 수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일단 그 관계나 상황의 어려운 정도는 매우 주관적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 다루지 않는다. 그런데 한가지 이야기하자면, 당신은 정말 어려운 상황이라고 생각되는 경우라도 사실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 경우가 백중 구십구는 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정도의 시험 또는 시련만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0:13)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기본부터 점검해 보자. 보통 교회를 다닌다고 한다. 그리고 예배를 본다고 한다. 그런데 교회는 다니는 곳이 아니며, 예배 역시 보는 것이 아니다. 성도가 모이는 곳이 교회이고, 나의 삶이 예배이다. 우리는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교회 공동체에 속하고 적어도 일주일의 하루를 성도 간의 교제에 할애한다. 바로 성도 간의 교제 자체가 '믿음 생활' 그 자체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사의 설교'가 중심인 형식적인 예배가 (ritual) 결코 예배의 중심이 될 수 없다. 같이 모여 찬양하고 같은 성경 구절로 나누고(설교) 소그룹 모임을 통해 교제하는 그 모든 활동을 통틀어서 예배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외의 활동은 엄밀히 말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예배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보통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형식적인 예배에 집중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오해가 '나의 행위'를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로 오해하게 하거나,또는 그것이 그렇게 이해되기를 바라게 한다. 내가 보아온 교회 내의 모든 문제는 바로 이런 부분에서 출발한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의미를 잘못 알고 있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높여 드리며 영광을 올린다.'라는 의미에서의 섬김이 옳은 섬김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의 의미의 섬김은 틀린 접근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시는 것일 뿐이다. , 주체는 하나님이고 나는 하나님 역사의 통로가 될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언가를 해 드릴 수도 없고 해 드릴 필요도 없다. '공급'의 의미로서의 섬김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 우리는 무익한 종일 뿐이다.

자 처음으로 돌아가서 '상황의 어려움'만 떼어서 말해 보자. 성경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보낸 그 자리에서 순종으로 예배의 단을 쌓으라.'라고 하실 것이다. 상황의 어려움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던 아브라함은 사라를 잃을 뻔했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이삭은 그랄 블레셋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하셨다. 야곱과 요셉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겠으나, 길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으므로 이 정도에서 마치겠다. 그러므로 상황의 어려움은 '일반적으로 신앙생활을 함에서' 피할 문제가 아니라 순종으로 받아야 할 문제일 경우가 많다. 물론 구체적인 상황은 스스로 판단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내용이 있다면, 당신이 그 자리에서 어려운 상황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돌파하기로 하든지 그것을 피하기로 하든지 그 결정과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이다. 이세벨을 피해 멀리멀리 달아났던 엘리야를 하나님께서 아기 돌보듯이 돌보았던 것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어처구니없는 선택을 한 우리 일지라도 하나님은 절대 버리지 않으신다.

다음으로 '관계'의 문제를 이야기해 보자. 관계에 문제가 있다 함은 '예배가 제대로 드려지지 않고 있다.'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싫은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 싫은 사람이 그냥 호불호를 떠나 나를 괴롭힌다면 문제가 된다. 그냥 무시할 수도 없고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히고 교회 가는 것이 괴롭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데 '주여 except 저놈'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면 일단 '나의 예배'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보통 관계의 문제는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라는 자세에서 출발한다. 즉, 앞에서 말한 섬김에 대한 오해가 가장 근저에 깔린 문제이다. 종으로서 군사로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신앙생활을 한다고 한다면, 실제로 관계의 문제가 크게 드러나기 힘들다. 당신과 당신을 괴롭히는 그 모두가 스스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고 그리고 그 섬김에 대하여 일종에 빚쟁이로서의 마음가짐을 갖기 때문에 문제가 시작된다. 말로는 섬긴다고 하고 마음으로는 '하나님 내가 이렇게까지 해 주었으니 보답 잘해 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저 인간은 인정하지 않네? 짜증 나는군.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빚을 많이 줬는지 모르는군. 알려줘야겠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정말 많다. 나는 모든 문제는 죄다 이 문제라고까지 하고 싶다. 따라서 먼저 당신의 정체성, 다시 말해 주제 파악을 먼저 하기를 권한다.


그런데 이런 죄성에 가까운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관계의 문제는 일어날 수 있다. 성경에 관계의 문제를 겪었던 수많은 사람이 나온다. 바울이 바나바와 싸웠고, 그 바울이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기도 했다. 요셉과 형제간의 갈등은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었고, 다윗과 요압의 갈등은 유치하게 끝났다. 이 외에도 수도 없는 관계의 문제들이 성경 곳곳에 적혀있다. 그럼 그것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교훈은 무엇이며,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서 주목할 또 다른 하나는 '항상' 관계의 문제는 ''라는 자아가 부각 되었을 때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물론 위의 '섬김'에 관한 문제도 본질상 같은 문제이긴 하다.) 동시에 참 재미있게도 그 관계의 문제까지도 하나님은 들어 사용하셨고, 자녀에게 좋은 것으로 보답하셨다. 바울과 바나바의 싸움은 하나님 나라의 더욱 빠른 확장을 가져왔고, (아마도) 베드로가 회개하게 하였을 것이며, 요셉이 애굽에서 미래를 준비하게 하기도 하였다. 다윗과 요압의 갈등은 아마 다윗이 타락하는 것을 어느 정도 조절하게 하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관계의 갈등도 선하다는 말인가? 전혀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관계의 갈등이 있다면, 내가 너무 나를 내세우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야 하며, 동시에 이것 또한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실 하나님으로 위로를 얻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관계의 갈등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관계의 문제로 교회를 옮기는 것은 개인적으로 좋지 않다고 본다. 옳지 않다고 썼다가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닌 경우 또는 옳고 그른 문제로 해석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서 좋지 않다고 바꾸었다. 그런 문제로 교회를 옮기게 되면 계속 옮겨 다녀야 한다. 무시할 것은 무시하고 좋은 관계를 취해야 한다.

내 이야기를 잠깐 해본다면, 나는 사람을 싫어한다. 그리고 상당히 비판적으로 사람을 본다. 특히 나는 내가 출석하는 교회 담임목사의 설교를 상당히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편이다. 교회의 교육 프로그램, 방향, 등등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교회에 다니는 이유는 그 담임목사가 자기반성을 하는 분이라는 것과 적어도 이 교회의 목사들은 교리상으로 바로 서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런 교회 찾기도 쉽지 않다. 물론 내가 다니는 교회에 생명과 회복만 있지 죽음과 저주에 대한 경고가 없어서 회개에 약하다는 부분을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어느 교회든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그 정도는 수용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지금 다니는 교회를 다닌다. 더구나 좋은 사람들이 있다. 존경하는 부목사님이 있고, 소그룹 모임과 양육모임 등에서 만나는 신앙의 동역자가 이 교회에 많이 있다. 걸쩍지근한 사람도 같잖은 사람도 짜증 나는 사람도 수없이 많으나, 그냥 무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정도는 옮길까 하는 생각도 한다. 왜냐하면, 내 신앙 스타일이 너무 편향되어 있어서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자 하는 생각 때문이다. 너무 지적으로 흐르는 나의 신앙을 조금 행동하는 신앙 쪽으로 당기고 싶어서 '은사 주의 교회 (charismatic church)'에 다녀볼까 하는 생각이 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천국 백성으로서의 훈련을 쌓아 간다고 할 때, 나에게 필요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다른 교단을 택해 보고 싶은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어려움' 때문은 아니다.

신앙생활의 중심에 예수님을 두고 생각하기를 바란다. 보통 관계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아주 활동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경우 한 가지를 꼭 염두에 둬야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행정적인 부담을 지라고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질서''필요' '편의'를 위해 사람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교회일'로 인해 부딪히는 관계가 당신을 힘들게 한다면 다 버리길 권한다. 그런다고 하나님께서 '야 너 왜 일 안 해'라고 하지 않으신다. 사도들이 일곱 집사를 세우고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고 했던 말씀을 곱씹어 보아야 한다. 신앙생활 중에 기도와 말씀을 제외하고 '꼭 해야 하는 일'이란 없다. 사람들의 말은 사뿐히 무시해야 할 때도 있다. 성경을 발로 읽는 사람들의 이른바 '장로의 유전'에 따른 도전에 일일이 대응할 필요는 없다. 예수님과 및 제자들이 수없이 장로의 유전에 대해 비판하였으나, 여전히 교회는 장로의 유전에 매여있다. 사람의 경험을 말씀 위에 두는 일이 많다. 나는 지금 소그룹 리더와 일대일 그리고 교리 교재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중 하나를 버리라고 하면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교재 만드는 일을 관둘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 이미 관둔 상태임.) 그 일은 내가 존경하는 목사님과 하는 것이고 좋아하는 집사님이 강권해서 시작한 일이며, 약간의 지적욕구를 채울 수도 있고 지적과시도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 신앙과 관계된 일은 아니다.


정답은 없다. 결국, 당신의 선택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통해 '옮기지 말라.'라고 권하고 싶다. 상황의 어려움도 관계의 어려움도 당신에게 주어졌다면 필요하니까 주어졌다고 생각하기를 권한다.


당신은 어떤 스타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왜 하는가? 무엇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가? 무엇이 강점인가? 하나에 치우치면 다른 하나는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둘 다 잘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너무 모든 것을 잘하기 위해 자신 채찍질하지 말아야 한다. 회개는 필요하나 자책은 필요 없다. 죄책으로부터의 자유를 예수님께서 주셨고, 우린 감사할 일만 남았다. 물론 그 감사는 정당한 회개를 동반하며, 회개를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너무 원론적으로 말하지 않았나 걱정이 된다. 나는 신앙생활이 줄타기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너무 어렵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라는 하나님 말씀이 야속할 때도 잦다.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다. 믿음의 길은 좁은 길이다. 절대 쉽지 않다. 우리 모두 바울처럼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길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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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2. 6. 13. 13:21

구약은 어려워 Novels or Essays2012. 6. 13. 13:21

보통 구약은 어렵다고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구약의 하나님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기독교인이 많다. 이에 대해서 오늘 살펴보았으면 한다.


어렵다는 그 말이 그저 말 그대로 어렵다는 뜻이기만 하다면 별로 할 말이 없다. 어렵다고 하는 사람에게 쉽다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 없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신약이 훨씬 더 어렵다고 말하겠지만, 누구나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은 다를 수 있으니 할 수 있는 말도 한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어렵다는 말을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작게는 구약의 위인을 (기독교인으로서 믿음의 선진을 위인으로 부를 수 없다고 공격할 수 있겠지만, 그냥 넘어가자.) 이해할 수 없다는 불평으로부터 크게는 구약의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위험한 발상까지 다양하다. 어찌 됐든 단순히 어렵다는 이야기이기보다는 '이해할 수 없다.' 또는 '이해 못 하겠다.'라는 이야기인 경우가 많고, 이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이 글에서는 구약이 어려운지 쉬운지에 대해서가 아니고, 구약의 필요성에 대해서 논해보되, '비 신학적'으로 논해보자. 신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구약의 필요성'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수 있다. 그냥 내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한 소회 정도로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


먼저 나는 구약이 정말 인간적이며, 그러므로 우리의 실생활에 쉽게 적용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에 반해 신약은 우리 인간 개인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와 닿지 않게' 다룬다. 이렇게 어렵게 꼬아서 이야기하는 이유는 분명 신약도 인간의 실질적인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정말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우리가 결혼해야 할 이유를 성욕에서 찾기도 하고 (고전 7:9) 음식에 관해 논하기도 하며 (고전 8), 더구나 예수님은 히브리서 기자가 표현하기를 우리 인간을 잘 이해하는 분이라고 하기도 했다. (4:15) , 신약 기자들은 인간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별로 와 닿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일까? 구약의 기자들과 달리 신약의 기자들은 대부분 순교했다. 그들은 목숨 걸고 신앙생활을 했으며, 흐트러짐이 없었다. 물론 베드로는 여전히 성격이 급했고, 남의 눈치를 살폈으며, 바울 역시 그 성격 어디 가지 않은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어쨌든 따라가기 어려운 신앙의 모습을 보였다. 더구나 정말 힘든 상황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자연스럽게 삶 중에 실천하고 살았다. 이런 면에서 나는 신약에 나타나는 개개인의 삶이 쉽사리 와 닿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그들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너무 높은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그에 반해 구약에 나타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노아의 술 문제, 아브라함과 이삭의 거짓말하는 문제, 겁쟁이 엘리야, 참으로 말 안 듣는 요나, 비겁하고 교활했던 야곱, 시기심에 불타올랐던 미리암의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정말 엄청나게 많은 성(sex) 관련 이야기들이 있다. 특히 성에 관해서는 그 범위가 실로 만만치 않다. 롯은 자기의 두 딸과의 사이에서 아들 둘을 두었고, 소돔 성은 동성애자들의 소굴이었으며, 유다는 창녀를 샀는데 알고 보니 며느리였고, 심지어 그 사이에서 아들까지 낳았고, 베냐민 땅에서 문제가 생기니까 바람나서 자신을 떠났던 첩을 그냥 내주는 레위 찌질이의 이야기, 그리고 그 베냐민 사람들은 그 여자를 밤새도록 윤간하여 결국은 죽게 만들고, 그 찌질이는 그 죽은 첩을 토막 내 이스라엘 사방에 보내었다 (19). 그 인물의 중요도로 볼 때에 이런 부정적인 이야기의 정점을 찍은 사람이 바로 다윗인데,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팽개치고 왕궁에서 퍼질러 자다가 저녁 즈음에 일어나 최측근의 아내인 밧세바를 취한다. 참고로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와 아비 엘리암 모두 다윗의 30인의 용사에 속하였고, 그의 조부 아히도벨은 다윗의 친우였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아비의 첩들과 벌건 대낮에 공개적으로 관계했으며 (삼하 16:22), 그의 또 다른 아들 솔로몬은 드디어 후궁 700에 첩 300을 둠으로써 모든 남자의 선망 대상이 되었다.

합법적이면서도 뭔가 개운치 않은 성도 많이 나온다. 아브라함은 모두의 기대와 달리 첩이 두 명이었고, 야곱도 두 명, 그리고 모세도 첩이 있었다 (12:1), 이스라엘 사사들과 왕들은 정말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첩이 많았고 자식도 많았다.


그런데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인간을 이해하는 데에는 구약이 도움된다. 신약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이상을 보여 준다고 하면, 구약은 정말 어쩔 수 없는 비참한 인간의 모습을 꾸밈없이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오늘의 못난 ''와 나를 짜증 나게 하는 ''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데에는 구약이 훨씬 효과적이며, 실질적으로도 나는 구약의 예를 들어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러함에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할 때에는 신약을 주로 인용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에, 온전하기 위해 그리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위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노력하는 우리로서 일면 이해하기 어려운 구약의 인물들이지만, 반대로 우리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추악함과 어쩔 수 없는 본성 등을 설명하는 데에는 구약만 한 것이 없다. 구약이 없었다면 아마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이중적이고 위선적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믿음으로 이런 인간이 겪고 있는 불완전성에서 자유로워지게 되는 이야기를 더 기대한다. 그런 면에서, 너무 약하고 너무 인간적인 구약의 인물들이 어떤 때에는 나를 너무 실망하게 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도 계속 미래에도 지금과 같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면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조금 더 무거운 주제이면서도 약간 신학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공의의 하나님에 대해 야속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더구나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대목에서는 거의 모든 기독교인이 고개를 내젓는다. 당신이 당신 자신을 스스로 그렇게 표현하셨으므로, 그분을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우리는 우리의 이성과 관계없이 그렇게 받아들여야 함에도, 실제로 그렇게 인정하기보다 의문시하고 심지어 외면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직간접적으로 거의 모든 이단이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멀리 가면 영지주의가 바로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름의 해석을 하다가 나온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이야기는 너무 신학적인 이야기라 일단 넘어가고 간단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당신이 믿는 것이 사상인지 도덕률인지 위안을 주는 덕담인지 아니며 절대자이신 하나님인지 알아야 하고 결단해야 하고 결정해야 한다. 당신이 믿는 대상이 하나님이고 그를 주로 섬기기로 했다면 사실 이런 고민은 애초에 말이 안 된다. 그분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구약을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불평하라. 그러나 성경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해하지 못하는 당신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 불평하고 회피할 문제가 아니다.


이단들에 대해 연구하다 보면 다음과 같은 조금은 역설적인 깨달음을 얻을 때가 있다. 이단들이 힘들어하는 것은 신약이 아니라 오히려 구약이며, 이단들이 부정하는 것이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래서 이단들의 주장이 바르다고 인정할 때 가장 먼저 부정되는 대상이 예수님과 신약이 아니고 성부 하나님과 구약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구약이 더 복음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의 믿음과 보다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너무 많이 말하는 것은 오히려 논지를 흐릴 가능성이 있으므로, 위의 두 가지 이유로 나는 구약이 우리에게 필요하며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어렵다고 말하고 있는 당신이 차마 하지 못한 말이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라면 다시 한번 구약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이 성경을 스스로 아직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설교에 노출되는 빈도로 볼 때에 (이해와는 별도로) 신약에 훨씬 더 익숙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감히 주장하고 싶다. 당신의 신앙에 직접 도움을 주고, 또 직접 연관된 말씀은 오히려 구약이다. 경중을 따질 수는 없으나, 약간 무책임하게 이야기하자면 구약은 더욱 실제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고, 신약은 땅의 실재가 아닌 하늘의 실재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둘 다 중요한데, 구약이 소외되고 있으므로 나는 구약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에서 주장함으로써 무게추를 구약 쪽으로 조금 밀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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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2. 5. 1. 11:04

나의 주 예수님 Bible Stories2012. 5. 1. 11:04

예수님은 나에게 있어서 누구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성경은 ‘나의 주가 되어야 한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나의 주’로 인정하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며 올바른 신앙고백이다. 그런데 현대 기독교인 중에 이 말의 참뜻을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잦다. (물론 나도 발버둥만 치고 있다.) 도마는 예수님을 주로 그리고 하나님으로 고백하였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한복음 20:28 )


그러면 예수님을 나의 주로 삼는 것을 성경은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요한은 포도나무와 그의 가지로 표현하고 있고, 바울은 머리와 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 요한복음 15:5)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에베소서 1:20-23)


따라서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겠다는 뜻은 그분의 뜻대로 살겠다는 뜻이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이 뜻이 과연 무엇일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바울의 고백과 성경의 묘사를 통해 볼 때에 나의 삶에 대한 주권을 예수님께 이양하고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삶이 바로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는 삶이라 생각된다. 당신은 과연 그렇게 살고 있나.


관점을 조금 바꿔서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는 삶은 어떻게 실현 가능한가에 대해 생각해보자. 궁극적으로 주를 사랑함으로 주와 하나가 되면 그것이 바로 주를 나의 주로 인정하는 삶이다. 그러나 나 같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비현실적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체가 머리의 뜻을 따르는 것은 머리를 사랑해서라기보다 머리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예수님을 나의 머리로 생각할 때에 예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머리로 삼는 삶이 아닐까 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함에 대해서 많은 곳에서 진술하고 있다. 개역개정판에 171번이나 반복되는 단어가 바로 경외함이다. 이는 ‘경외’라는 단어로 찾았을 때의 이야기이고 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yare’로 찾으면 훨씬 많은 곳에서 그 단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신약까지 더한다면 그 숫자는 또 훨씬 늘어나게 된다.


주의 깊게 성경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경외함은 성경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영역판에서 사용되는 경외의 해당하는 단어인 fear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함의에 비추어 볼 때 놀랍다. 심지어 하나님을 경외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동의어로 사용될 때도 있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 (신명기 5:29)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신명기 30:16)


위의 두 성경 구절을 보면 같은 내용에 대해서 한 곳에서는 경외를 (5:29) 다른 한 곳에서는 사랑을 (30:16)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볼 때에 하나님을 사랑함이 하나님을 경외함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발이 잘릴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하자. 그리고 오른손이 새끼 손가락 하나만 희생하면 발을 살릴 수 있다고 하자. 그러면 손의 입장에서 발을 사랑해서 새끼손가락을 희생하지는 않을지언정 머리의 명령을 순종함으로 발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가능하다. , 머리를 경외함으로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결국 발에 대한 손의 사랑 표현일 수 있다. 이렇게 보자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결국 하나님을 사랑함과 같다고 하겠다.


따라서 나는 예수님을 나의 주로 인정하는 삶은 예수님을 머리로 인정하는 삶이요, 그 삶은 예수님의 명령을 경외함으로 따르는 삶이라고 하고 싶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에, 당신은 예수님을 주로 삼고 살고 있는가. 나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점점 하나님을 무시하고 나의 도구 정도로 하나님을 끌어내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강대상에서 흘러나오는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를 향해 선포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들을 향해 그들의 마음을 만져주는 정도의 설교밖에 되지 않는 경우를 자주 본다. 차라리 성도들의 처지를 대변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는 설교라면 그나마 낫겠다 하겠으나, 그 안에 하나님은 화자로도 청자로도 존재하지 않고 그저 성도를 청자로 삼아 목사가 그들의 기분을 좋게 해 주는 정도의 설교만 있다는 생각을 금하지 못하겠다.


근래 십계명에 관한 설교를 들었다. 그 중 제4계명인 안식일에 관한 설교였는데, 목사님은 그 설교를 하기 싫었다는 말로 설교를 시작했었다. 이유는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이어서였는데, , 주일날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 성도가 많은 상태에서 그 설교를 하기가 껄끄러웠다는 말이었고, 심지어 어쩔 수 없이 주일날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로하여 주시고 자유로울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로 설교가 끝났다. 물론 나는 그 목사님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심정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러면 안 된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심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믿음으로 하여 다시 순종하는 삶이 반복되는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경건 훈련이요 신앙 훈련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핑계를 대면 안 된다. 물론 성경에서는 믿음이 약한 자 (경제적 약자로 상징된)에 대한 배려가 곳곳에 묻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명령을 변개할 수는 없다. 나는 말씀을 말씀 그대로 진정으로 선포한다면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위로가 필요한 자들을 직접 위로하시리라 믿는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말씀에 대한 선포일 뿐이다. 말씀에 내 의도가 들어갈 때에 말씀에서 능력이 사라지고 칼날이 무뎌져서 혼과 영과 육을 쪼개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말씀을 그대로 진정으로 전달한다면 말씀 그 자체가 스스로 일하기 시작하시리라 믿는다. (모두 알다시피 성경에서 말씀은 대체로 예수님을 뜻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브리서 4:12)


우리는 십자가 군병으로서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그리고 그렇게 명령에 순종할 때에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책임져 주신다. 아무리 내 상황이 그렇지 않더라도 명령에 의지하여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 나머지를 다 책임져 주시는 그 감격스러운 경험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되어야 한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후서 2:3-4)


주를 나의 주로 나의 머리로 삼는 삶이 절대 쉽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게 살 때에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이 해결됨을 또한 믿는다. 많은 경우 우리가 어렵다 힘들다 하는 문제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명령에 우선하여 내 자아를 인정해 달라고 하는 데에 그 핵심이 있는 경우가 많음을 본다. 미움 시기 질투 게으름 등등의 모든 문제는 그저 순종함으로 예외 없이 해결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아주 재미있는 성경 구절 하나만 살펴보고 이 글을 끝내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16-18)


적어도 내 입장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명령에 의지해서 할 수 있다. 하고 하지 않고는 차후 문제이고, 가능성의 관점에서만 말하자면 명령으로 가능할 법한 것들이다. 그런데 기뻐하라는 명령은 이상하다. 명령으로 기뻐하는 것이 가능하긴 한가? 그런데 성경은 가능하다고 하며, 그것을 명령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명령 범위는 우리의 상상보다 더 넓다. 좁게는 우리의 수족을 움직이는 문제로 시작하여 넓게는 감정의 문제까지 명령하신다. 명령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니 얼마나 다행인가. 당신이 순종하기만 하면 절대 될 것 같지 않던 문제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고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 그것이 주를 주로 삼는 사람이 누리는 복이며 기적이다. 그리고 그것을 명령으로 하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는 단순히 순종만 하면, 절대 될 것 같지 않은 감정의 문제 즉, 우울증 분노 시기 등등의 문제를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여 직접 해결해 주신다. 위의 딤후 2:3-4를 다시 한번 상고해 보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립보서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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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2. 4. 28. 12:11

은사주의의 문제점과 대처방법 Opinion2012. 4. 28. 12:11

은사주의의 장단점에 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우선 은사주의 자체를 틀렸다고 할 수 없다. 은사주의도 분명 신앙의 한 형태이다. 크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단 하나로 규정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다른 종교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같은 신앙고백 아래에서 다양한 형태가 존재함은 인정해야 한다. 그러함에도  나는 은사주의가 불편하고 심지어는 감정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감정적이라고 한 이유는 지적으로 그것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하나님을 알라'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의 주된 주제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따로 관련 구절들을 언급하지 않겠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알 것인가. 그 방법은 수도 없이 많다. 모든 경건훈련이 결국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으며, 우리의 신앙생활 자체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그런 입장에서 은사주의는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한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가 없어야 하겠는데, 인간이라는 연약함과 은사주의가 만날 때에 부정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경우를 자주 보아 왔다.


은사주의란 무엇인가. 신학적인 논의는 이 글에서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간단히 말해 은사주의란 '성령의 은사를 추구함'이라 하겠다. 물론 우리가 은사주의라고 할 때엔 '심하게 추구함'이라는 의미를 함축하지만, 이 글에서는 단순하게 '성령의 은사를 추구함' 정도로 생각하자. 사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은사주의는 '지적'으로도 틀렸다. 왜냐하면, 은사란 Gift 즉, 선물이다. 이것은 추구해야 할 대상도 요구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다. 선물이란 주고 싶은 사람이 주고 싶은 때에, 주고 싶은 것을 주는 것이다. 내가 달라고 징징거려서 받는 것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선물이라고 하겠나. 그러나 우선 가능하다고 하자. 은사주의의 방법론을 통해서도 좋은 열매가 맺혀지기도 하고, 그들의 뜨거움이 부럽기도 하므로 틀렸다는 말은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 문제점만 살펴보고 문제를 완화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자. (고전 12:31의 사모하는 것과 달라고 떼쓰는 것은 분명 다르지만 그냥 비슷하다고 넘어가자. 이것을 제외하더라도 은사주의는 많은 문제점을 내포한다.)


은사주의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감각되는 경험에 치중한다. 그 자체로 문제가 있다. 그런 경험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고 사탄을 통해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각을 통한 경험은 많은 경우에 이성을 속이며, 진리와 관계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아주 올바른 집회에서조차도 감정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사탄도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감정의 움직임을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사탄의 간섭에 농락당하기 쉬워지므로 긴장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은사주의자들은 오히려 감정의 움직임을 하나님에 대한 체험으로 생각하여 거기에 목표를 두는 경우가 많고, 따라서 사탄에 농락당할 높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그러한 감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한낱 부적 정도로 치부해 버린다는 사실이다. 은사주의자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해 봐 하나님께서 만나주셔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이뤄주셔 (능력 있는 기도하는 방법).' 물론 그럴 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방법으로 만나 주실 때에만, 그 방법으로 말씀하실 때에만, 그 방법으로 이뤄 주시기로 작정하신 때에만 그렇게 될 수 있다. 즉, 우리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로 작정하셔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인격 없는 어떤 부적처럼 생각하여 그 부적이 효험있게 만드는 방법을 추구하는 경향을 나는 수도 없이 보아왔다. 그들은 입버릇처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하나님을 진정 인격체로 대우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만나는 데에 특별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틀렸다. 하나님을 만나는 특별한 방법은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며, 그 길을 걷는 것은 보혜사 성령의 도움으로 가능하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그 어떤 방법으로도 만날 수 있다. 다만 하나님께서 만나시고자 하실 때에 그것이 가능하다. 즉, 만남의 주체는 하나님이시지 결코 '내'가 될 수 없다. 이 부분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앞에서 그 길은 예수님이시며 성령님의 도움으로 걸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분명 그 길은 은사로도 걸을 수 있다. 은사란 바로 성령의 선물이고, 그 선물을 주는 이유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 공동체/개인의 신앙성장 등등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이유가 바로 은사주의를 틀렸다고 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성령께서 은사를 통해 나를 견인하기로 작정하셨을 때에 그 은사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될 뿐, '나는 이번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기로 작정했어. 같이 기도해줘. 나는 방언을 기필코 받아서 주의 살아 역사 하심을 체험할 거야.'라는 식의 접근은 주객이 전도된 이야기일 뿐이다.


다른 문제로, 어쩌면 이것이 더 큰 문제일 수도 있는데,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좋으신 하나님'으로만 본다. 물론 하나님은 선하시고 좋으신 분이다. 그런데 그분은 우리에게 징계하시기도 하시는 분이다. 선물만 주시는 산타클로스가 아니다. 회초리를 들고 훈련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이런 부분을 철저히 외면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죄책에 빠지게 하는 모든 것들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복되게 하십니다.' 틀린 부분이 조금도 없다. 그러나 이렇다손 치더라도 회개가 우리 삶에 빠질 수는 없다. 애통하는 마음과 죄책에 빠진 마음이 명백하고 쉽게 구분된다고 생각하는가? 적어도 나는 그것을 쉽게 구분하지 못한다. 다만 결국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통해 죄책까지도 회개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뿐이다. 그 죄책이 나를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시키고 가룟 유다처럼 자살로 이끈다면 그제야 그것이 사탄의 역사였다고 확신할 뿐이다. 우리의 제한된 식견으로 죄책과 애통하는 마음을 정확히 구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짧게 말해서 은사주의자들에게 회개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은 항상 더 받고 더 감동하기 위해 준비된 자세로 어떤 '방법'들을 시행한다. 모든 어려움을 불신앙의 문제로 치부하는 경향 또한 이 문제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실상은 감각적 체험에 불과한)이 있다면 우리 삶에 어려움이란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그리고 신앙생활의 어려움을 격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들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오히려 죄책에 빠지게 하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수준 낮은 신앙을 가진 자로 매도한다.


그리고 은사주의자들은 흔히 이 땅에서의 복된 삶을 추구한다. 그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에 '믿음 없는 자'로 간주하여 더 열심히 하라고 한다. 다른 글에서 이 문제를 별개로 다루고 싶은데, 나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어떤 사람을 이 땅에서도 복되게 쓰실 수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훈련장이 편하고 좋기만 할 것이라는 상상은 뭔가 이상하다. 훈련은 힘든 것이 당연하다. 어차피 우리는 천국에서 어마어마한 복을 누릴 텐데, 한순간에 불과한 우리 인생 중에 (시 90:4) 약간의 물질적 축복의 있고 없음이 그리 중요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이 어떤 것을 충족시키기만 하면 흔들어 넘치도록 복을 받을 것으로 생각한다. (눅 6:38) 어쨌든 그들은 눈에 보이는 삶을 믿음의 척도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딱 잘라서 말씀이다. 결국, 나를 변화시키는 통로는 말씀이다. 그리고 말씀은 가장 객관적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한 하나님을 알아나가는 방법이다. 우리는 보통 감각적인 체험을 체험으로 인지하는데, 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감각적인 체험보다 말씀을 통한 체험이 더 많았다. 이 부분은 표현하기가 참 어렵다. 그냥 깨달음이라고 할 수는 없다. 깨달음과 더불어 즉각적인 변화를 동반한다. 나는 내가 양육하는 사람들을 말씀을 보도록 강권하는 편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든 말씀을 읽기로 작정하고 읽기 시작한 사람에게는 예외 없이 변화가 있었다. 그 말씀이 은혜로웠던 것도 아니고 이해를 하면서 읽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말씀을 보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사람은 변화를 시작한다.


따라서 은사주의를 추구한다손 치더라도 그 체험을 말씀으로 재조명하는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 즉, 그러한 체험을 내 마음에 쌓을 때에 체험할 당시의 그 감각을 쌓지 말고 그 감각적인 체험을 말씀으로 재조명하여 말씀으로 쌓아 두어야 한다. 어려운 말이 될 수도 있는데, 우리의 경건 훈련은 결국 모두 말씀으로 재조명해야 한다. 말씀으로 재조명하는 과정이야말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는 과정이다. 감각적인 체험은 만난 그 존재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며, 그분의 의지에 의해 만났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 그런데 그 만남이 말씀으로 재조명되면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 허락된 만남이 되며, '그 체험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성경에 적혀있는 말씀을 통해 만나주시리라고 하셨던 약속의 확증'이 된다. 그것은 확실하며 또한 인격적인 만남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해서 살고 있다. 따라서 모든 경건 훈련은 하나님의 약속 속에서 재해석되어야 하며,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다시 한번 찬양하고 그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체험은 극적일 수도 있고, 지적일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떤 경우이든 간에 그것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으로서 흔들림 없이 나의 신앙의 바탕이 되려면 결국 그 체험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됨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확신이 그냥 자기확신에 불과하다면 앞에서 언급했던 은사주의의 문제점들을 내포하게 된다. 사탄의 인도함을 따라가기도 하며, 특별한 체험을 추구하게 되기도 하고, 신앙생활 중 겪을 수 있는 문제를 믿음이 없어서 생기는 문제로 매도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몰인격적인 부적정도로 치부하기도 하며, 눈에 보이는 복만 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확신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면 그때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은 물론 공동체에 유익이 되는 객관적인 신앙고백에 되며, 이런 고백은 말씀으로 재조명했을 때에 가능해진다. 나의 하나님과의 만남을 하나님이 증명해 주실 때에, 그 체험은 진정한 체험이 되고 능력 있는 체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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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2. 3. 29. 09:49

성경연구에 있어서 교리의 득과 실 Opinion2012. 3. 29. 09:49

교리는 분명히 중요하다. 신앙고백의 근간이 되기도 하며, 이단을 구분하기 위한 표지가 되기도 한다. 과거 성경이 귀하고 대다수 성도가 문맹이었을 당시에는 신앙의 기본이 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옳바른 교리를 세우고 배우며, 올바른 신조를 통해 신앙고백을 하는 일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교리에 너무 심취하는 것, 또는 성경보다 교리를 우선하는 경향은 경계해야 한다. 굳이 교의신학에서 성경신학으로 그리고 선교신학으로 변해가는 신학의 흐름을 언급하며 어려운 소리를 늘어놓지 않아도 그 이유는 분명하다.

성경이 더 중요하다라고 하면 일면 유치해 보인다. 너무 당연한 소리로 논리를 증명하려고 하는 행위는 일면 우물물에 독치기의 오류에 빠진 듯이 보인다. 그러나 나는 그 세련되지 못한 주장을 여기에서 할 수 밖에 없다.

교리만 확실히 알고 있으면 성경은 필요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만난 적이 없다. 왜냐하면 너무 극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교리가 도움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교리를 통해 성경을 이해 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미묘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둘다 맞는 이야기이긴 하다. 그러나 나는 후자, 즉, 교리를 통해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라는 주장에 오류가 있음을 이야기 하고 싶다. 교리로 시작한 사람이 성경으로 항상 가지는 않더라는 데에 그 오류가 있다. 성경으로 시작하여 교리의 도움을 받는 것은 상대적으로 그 교리가 그를 성경에서 멀어지게 하지 않는 반면, 교리로 시작하여 성경으로 확증하려는 시도는 종종 교리로 시작하여 교리로 끝나게 하기도 한다.

그러면 교리만 가지고는 신앙생활이 되지 않는가? 우리는 현대를 사니까 과거 성경이 귀했던,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은 무시하도록 하자. 그렇다면, 원전인 성경을 제쳐두고 그에 대한 해석본인 교리를 통해서'만' 신앙생활이 가능한 지에 대한 논의는 적어도 내 상식으로는 의미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한 하나님의 자취를 찾는 방법의 1차 매뉴얼에 집중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나는 사람의 가공이 한번이라도 더 들어간 매뉴얼은 믿지 못하겠다. 참고는 하겠지만, 그것을 이용해 길을 떠날 자신은 없다. 더구나 평생에 걸친 여정인데 말이다.

늦게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직분을 받고, 더구나 진지하게 신앙에 대해 접근하는 사람들 중에 지난한 성경을 통한 길찾기를 포기하고 교리를 통한 길찾기에 집중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아왔다. 물론 그들는 적어도 길을 찾기 원하는 진지한 신자였다. 성경을 통한 길고 긴 여정에 질려 지름길을 찾고자 하는 그들의 그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며, 나는 그 노력을 응원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시도의 위험성을 여기에서 짚지 않을 수 없다. 먼저 교리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논리'에 바탕을 둔다. 나의 신앙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를 틀렸다 할 수 없다. 그러나 논리는 기본적으로 인본주의적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논리로 당신을 계시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계시는 그 자체로 '진리'이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 당신은 인과율에서 벗어나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논리 위에 계신다.

그리고 그 어떤 교리도 성경 전체를 무리없이 설명하지는 못한다. 이 부분은 중요하면서도 미묘한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모순 없는 교리는 없다는 말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개혁교회의 전통을 따르는 사람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사상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래야 할 필요도 못 느끼겠다. 그저 전적타락과 무조건적 선택에 동의하고 예정론에 동의 할 뿐이다. 그렇다고 예지론에 반대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다만 성경이 주장하는 하나님을 예정론이 예지론보다 더 잘 설명한다고 생각 할 뿐이다. 다시 말해, 내가 보는 교리의 역사는 오류를 줄이기 위한 역사였을 뿐이지 오류를 없애기 위한 역사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논리로 설명되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를 말하면 너무 현학적인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나, 어쨌든 어떤 논리 체계도 완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수학적으로도 증명된 일이다. 즉, 겨우 인간도 논리로 설명이 되지 않는데 하물며 크신 하나님임에야 그것이 가능 할 리 없다.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에게서는 '나'가 드러나기 쉽고, '나'가 드러나는 사람은 무익하며 무력한 나를위해 값없이 당신을 드린 예수님의 은혜와 그로 인한 전적인 구원에 동의하기 쉽지 않다. 나에게 '구원받을 만한 것'이 있어서 구원받았다고 주장하는 솔직한 사람부터, 은혜로 구원받기는 했지만 그 이후로는 '구원받을 만한 상태'를 유지해야 다시 버림받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절대사랑을 폄하하는 사람까지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를 드러내기를 원한다. 내가 구원에 어떤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런 논리의 함정, 다시 말해 '나'의 존재의의가 드러나는 그 달콤한 유혹에 쉽게 빠지고 헤어나오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 왔다. 이런 경우들을 2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수백년 묵은 논쟁에 매몰되는 경우를 봤다. 매주 인터넷을 통해 논쟁거리를 준비해서 만날 때 마다 질문하는 부류에 해당하는데, 그들의 주장을 듣고 있노라면 대체 그런 논쟁이 우리 신앙에 뭔 소용이 있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이런 사람은 조금 나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수년째 같은 논쟁을 반복하기도 하는데, 이런 사람은 계속 공부하지도 않는다. 그냥 한 번 들은 논쟁거리를 자신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데에 반복적으로 사용 할 뿐이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당신 생각 다 맞으니 하나님의 아들답게 사는 데에나 집중하세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그들은 그런 논리로 나를 고민에 빠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나는 논리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믿는 것이기 때문에 논리상 문제가 있는 신앙고백이 그렇게 낯설지도 불편하지도 않다. 그리고 솔직히 아직까지는 그런 논리에 논리로도 밀려 본 일이 없다. 설령 불완전한 이해일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 즉, 하나님으로 시작한 '신앙고백'은 논리를 위한 논리에 밀릴 수 없다.

그리고 수백년묵은 논쟁은 그 자체가 '나는 믿음의 문제에요'라고 강변하는 것과 다름 없다. 결단이 필요한 문제일 뿐이다. 그런 문제에 답변하려고 정력을 소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만 논지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어떤 것을 선택할 지 결정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마저도 최소한으로 하기를 권한다.

다음 부류로, 앞에서 "교리만 확실히 알고 있으면 성경은 필요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만난 적이 없다"라고 했었는데 사실 그런 부류를 본 일이 있고, 내용을 "예수님과 구원(에 관한 교리)만 알고 있으면 성경은 필요없다"라고 바꾼다면, 이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은 상상외로 많다. 내 양육의 목표는 '성경 읽는 교인 만들기'이다. 그런데 나의 양육 역사는 참담한 실패의 연속이었다. 일시적으로 신약통독/성경통독에 성공하는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것이 습관화 되어 계속 읽기까지 성공한 예는 부끄럽게도 하나도 없다. 나는 왜 그게 안되는 지가 궁금했었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성경 읽는 것도 은사'라는 말도 한다. 거기에 동의한 적도 있다. 참담한 심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의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어떻게 아버지의 말씀을 읽어 듣는 것이 은사가 될 수 있나? 자기들의 읽지 않음에 대한 핑계로 '은사가 있는 사람만 읽는다'라 주장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이에 대한 해답을 그 다음 부류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서 찾았다. 그들은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부분과 논리적으로 설명 할 필요가 없는 부분으로 성경을 구분한다. (물론 이런 구분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 할 것이다. 그런데 역시 내용을 약간 바꾸면 '자기의 논리대로' 성경을 중요한 부분과 중요하지 않은 부분으로 나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런 사람은 많다. 그리고 그 중요한 부분은 예수와 그 분을 통한 구원 정도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외의 부분은 '중요하지 않다'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나면 그들 생각에 '나는 예수님은 아는데? 그러면 성경은 읽을 필요 없겠군 어차피 부차적인 문제들이니까'로 결론지어진다. 논쟁거리에 함몰되는 부류는 열심히 하려는데 열심이 잘못된 방향으로 발휘된 사람들이라면 이들은 아예 필요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이다. 즉, 이제껏 읽기 힘들어서 성경을 읽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던 사람들, 그래서 날 고민하게 만들었던 사람들, 심지어 내가 은사가 있어서 읽는다고 착각하게 했던 그 사람들이 실상은 읽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읽지 않는 부류였다.

이들은 어처구니 없게도 구원론 만큼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 질문하면 곧잘 대답도 한다. 그리고 심지어 겸손하기까지 하다. (반면 논쟁에 집중하는 부류들은 그렇게 겸손하지는 않다.) 그런데 성경은 읽지 않는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성경을 읽고 있나? 읽지 않는다면 왜 읽지 않는가? 읽을 필요가 절실한데도 읽지 않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바보다. 절실한 필요를 무시하고 있으니 바보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에겐 성경이 아직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은 거다.

두 부류 모두 하나님보다 내가, 성경보다 내 머리가 더 우선인 경우이다. 그리고 나는 교리 중심의 성경연구가 이런 함정을 어느 정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교리를 정립했던 사람들은 누구 하나 예외없이 성경을 줄줄이 꿰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성경을 통한 깨달음이 없이 올바른 교리를 만들거나 이해 할 수 있다고 꿈꾸지 않기를 바란다.

이 즈음해서 교리의 필요성도 짚어볼 필요가 있겠다. 교리는 앞에서도 말했다 시피 우리에게 있어서 일종의 경계석 역할을 한다. 우리가 모든 문제를 다 스스로 답해야 한다면 그건 너무 가혹하고 힘든 일이다. 중요한 것들 이외에는 남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그런 경우 내가 속한 교단에서 인정하는 교리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물론 그 교리의 진의를 파악하는 데에는 성경을 통한 도움이 필요하긴 하나 어쨌든 비교적 손쉽게 그리고 안전하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아주 미묘하게 사람을 괴롭히는 문제들이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있기 마련인데 그런 경우 교리가 많은 도움이 된다.

그리고 성경만을 이용해서 신앙훈련을 한 사람들은 어떤 개념을 간결하게 표현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도 그 경우에 해당하는데 뭔가 이야기 하려면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너무 많다. 그래서 말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교리의 도움을 받으면 간결하면서도 위험성이 적은 대답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너무 불성실하게 필요성을 짚었는데, 어쨌든 당신이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성경을 중심에 두고 교리도 무시하지 않기를 권한다. 가능하다면 교리 공부에 너무 집중하지 말기를 바란다. 교리 공부도 경건 훈련에 해당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거기에 그렇다고 답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성경을 통한 경건 훈련의 보조 수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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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12. 10. 13:41

요셉과 애굽이주 Bible Stories2011. 12. 10. 13:41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자주 마주하게 되는 문제 중의 하나가 성경을 인물 중심으로 해석하는 문제이다. 물론, 인물 중심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고 인물을 벗어나서 해석하는 것이 쉬운 일도 아니긴 하다. 그러나 인물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 할 때에 나타날 수 있는 문제는 되도록 피해야 하는데,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즉, 인물 중심의 해석은 어떤 개인의 역할에만 집중하게 되고, 그의 전반적인 성취를 근거로 그의 삶 한 순간 한 순간을 전부 평가하는 문제가 있다. 심지어 주인공의 변방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주인공보다 못하게, 심지어 악하게 그려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라는 '믿음의 조상'을 부각시키기 위해 종종 롯은 악인으로 그려진다. (어떤 유명한 성경 강해서에서 직접 확인했던 내용이다.) 그런데 성경 상의 어떤 사람도 '사람'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였다고 생각한다. 즉, 그들의 삶에서 칭찬 받을 부분이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잘못한 부분도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런 면에서 모든 성경상의 인물들을 공정하게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 한 것은 잘 한 것으로 본받으려 노력하고 잘못 한 것은 잘못 한 것으로 경계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요셉과 애굽이주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다음의 말씀을 보면, 요셉은 애굽이주에 대해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창세기 45:9-11)
특히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애굽으로 보냈다고까지 말한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창세기 45:5-8)
보통은 이 성경 구절은 근거로 요셉을 높게 평가한다. 즉, 자신의 억울한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에 집중하여 고난을 감사로 승화시켰다는 논리이다. 크게 틀렸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요셉이 이에 대한 사명감이 있었느냐 하는 부분을 생각하면 재미 있는 부분을 발견 할 수 있다. 만약 그가 애굽이주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생각하였었다면 총독이 된 지 9년이 지나도록 가족들을 부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특히나 초반 7년은 풍년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여유도 있었고 창45:9-11에서 말 한 것과 같이 그럴 만한 지위와 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족들을 부르지 않았다. 형들에 대해서는 미워서 그랬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버지 야곱조차 외면 한 것은 으아한 부분이다. 이후 형제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을 괴롭히는데 (물론 당한 것에 비해 애교 수준의 괴롭힘이긴 하지만) 그것을 통해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다음의 성경구절을 보자.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창세기 41:51-52)
위의 성경 기록에서도 확인 할 수 있듯이 요셉은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으려고 노력하였다는 점에서 팔려온 사건은 그에게 큰 상처였다. 따라서 요셉이 애굽에 있었던 약 22년의[각주:1] 시간동안 요셉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애굽에 내려와 있는 상태라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 생각은 형제들을 만나고 나서야 갑자기 들었던 또는 깨달아졌던 생각일 뿐이다. 다음의 성경 구절을 보면 그가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애굽이주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었다는 사실이 조금 더 명확해 진다.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창세기 42:9)
형제들을 보고 나서야, 더 정확하게는 그들이 요셉에게 머리숙이는 것을 보고 나서야 요셉이 과거에 꿨던 꿈을 기억하게 된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창세기 37:6-7)
다시말해, 요셉은 애굽이주를 하나님의 명령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요셉이 알고 있던 것은 과거에 꾸웠던 꿈이 기근과 요셉의 애굽으로의 팔려가는 사건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 밖에 없다. 애굽이주는 그 꿈과도 별개의 문제이다. 여기에 더하여, 애굽이주에 대한 야곱의 반응은 사뭇 흥미로운데, 당시 야곱은 젊을 때 보다는 하나님과 더 가까이 교통하던 때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다음의 성경구절을 읽어 보자.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창세기 46:1-4)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간 것으로 보아 야곱은 분명 이주를 선택했다. 그런데 그에 대해 일말의 거리낌은 있었던 듯 하다. 하나님께서 이상 중에 나타나셔서 내려가도 된다는 허락과 동시에 안심시켜 주시는 장면이 그 증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려움을 피해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은 옳바른 선택이 분명 아니다. 이에 대한 증거는 너무 많아서 하나 하나 다 열거하는 것은 의미없고, 그 중 시점상 중요한 것들 몇 개만 살펴 보도록 하겠다. 일단 애굽 이주는 하나님의 축복에 기인한 사건은 아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중략)...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중략)...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중략)...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창세기 15:9-17)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자손과 영토에 대한 언약을 하시는데, 이 사건은 그 중 자손에 대한 언약 중간에 벌어지는 내용이다. 흐름을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그 새' 즉,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쪼개지 않고 둔다. 그리고 명백히 이 새들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고, 그것은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제물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시점과 아브라함이 제물을 드린 후에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신 시점간의 시간차도 흥미롭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제물을 준비하고 그것을 들짐승이 먹을까봐 전전 긍긍하는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긴 시간차로 인해 솔개를 쫓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중간에 잠까지 잔다 (하나님께서 재우신 것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아무리 봐도 그냥 잠든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해가 져서 어두울 때'가 되어서야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으신다. 물론 제물을 언제 준비 했는 지는 나오지 않지만 내용상 한참이 지나서야 받으신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쪼개지 않은 새는 피가 그 대로 들어 있는 셈이다. 제사를 드리고 난 음식은 보통 사람이 먹었다는 사실을 생각 할 때, 피 째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위배된다 (창 9:4). 물론 완전히 태워서 드리는 제사도 있었지만 이후 레위기를 봐도 제사 음식을 사람이 (제사장)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아직 제사 제도가 확립되기 전이기는 하지만, 피를 쏟지 않고 드린 제물은 그 자체로 제사 예법에 어긋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언한 사건이기는 하나 애굽이주는 어떻게 보더라도 축복 속의 사건은 아니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아브라함의 제사가 합당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형벌로서 내린 것이 애굽이주였다고 생각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어서 세상에 나옴으로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구원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기적같은 영광을 얻게 되었지만, 선악과를 먹고 세상으로 쫒겨 나오고 하는 일련의 과정이 결코 축복이라 부르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이다. 만약 그것이 축복이라면 하와는 최초의 축복의 통로이자 영웅이다.

더군다나 기근으로 인한 '애굽이주' 또는 '애굽이주계획'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합하는 생각이 아니라는 경험은 아브라함, 이삭 둘 모두 한다. 아브라함은 창 12:10-20에서 기근을 피해 애굽에 내려가고 그 과정에서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속임으로 '속이는 집안 내력'의 첫 문을 연다. 아마 하나님께 칭찬은 절대 받지 않았으리라. 이삭 때에도 동일한 사건이 일어난다.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창세기 26:1-2)
그랄 땅은 가나안 땅의 최남단 경계선 정도에 해당하는 땅으로, 이삭은 애굽을 향해 가고 있던 중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막으셨다.

'따라서 기근이 있으니 애굽으로 피신해서 목숨을 연명해 보자'라는 생각을 '믿음의 행위'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여기에 요셉의 행위에 대한 판단 기준이 있다 여겨진다. 아무리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라도 그것이 저주에 가까운 것이었다면 그것을 실행한 요셉의 그 행위를 옳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요셉이 하나님께 직접 명령을 받았다고 보기 어려운 상태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 애굽과 요셉의 지위가 주는 '세상의 안락함' 속에서 '고난'을 견디어 보자라는 생각은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 결코 하지 않아야 하는 행동 중의 하나임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고난을 감내하며 훈련 받아야 할 제자이다.

사실상 성경 속에서 요셉 삶을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라고 평가 할 만한 부분을 나는 찾지 못하겠다. 기껏해야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견딘 것과 바로의 꿈의 해석을 하나님께 의지해서 했다는 것 정도 밖에 없는 듯 하다. 어렸을 때엔 아버지의 과잉 보호 속에 건방지게 형들을, 심지어 부모까지도 무시하는 아들이었다. 형들이 그리고 요셉의 부모가 요셉에게 절하는 꿈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행위를 예언가적 행동으로 생각하여, 그러므로 선하다라고 덮어놓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가 듣더라도 기분 나쁜 말은 지혜롭게 해야 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입을 단속하는 것의 중요함에 대해 성경이 얼마나 자주,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는 지는 따로 설명 할 필요조차 없다. 다음의 성경구절을 통해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창세기 37:2-5)
17세면 클 만큼 컸는데도 고자질이나 하는 철부지 아들이었을 뿐이다. 물론 여기에는 야곱의 잘못이 더 크다고 할 수 있긴 하다. 뭐 그렇다고 요셉의 찌질함이 가려지지는 않을 것 같다. 결국 이런 갈등이 표면화 되어 애굽으로 팔려가게 된다. 그 이후 요셉은 '온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고 그들의 이름에 자신의 억울함과 상처를 투영시킨다. 하나님의 뜻은 므낫세보다 에브라임에게 있었는데 그것을 구분할 능력도 없었다 (야곱은 알았고, 이를 근거로 나는 야곱이 말년에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에 비해 이삭은 말년에 야곱과 에서 사이에서 에서를 선택한다.)
열매를 통하여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고, 성경은 많은 경우 열매를 기록하였다. 따라서 나는 그의 자손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역시 주의 깊게 살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분명 요셉은 곱절의 분깃을 받았으나, 그 두 지파의 이스라엘 내에서의 역할은 결코 덩치만큼 긍정적이지 않았다. 성경 전체를 통해 가장 불만이 많은 민족이 에브라임이다. 그 지파에서 배출 한 인물이라고 해 봐야 여호수아 하나 외에 또 누가 있는가. 항상 불평 불만이 많고 문제를 일으키는 지파가 바로 에브라임이었다. 받은 것에 비해 너무 보잘 것 없었던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한 번 짚어보고 싶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요셉을 평균 이상가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보는 데에도 나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애굽 이주 사건 하나만 떼어 내어 생각한다면 분명 옳은 행동은 아니었다고 본다. 우리는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에 요셉과 같이 행동해서는 안된다. 적어도 아브라함-이삭-야곱으로 내려오면서 반복적으로 확인했던 아주 명확했던 사실, 즉, 가나안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라는 그 명확한 사실 앞에서 고난 때문에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생각 그 자체가 불신앙이다.



물론 이후 요셉역시 하나님의 뜻을 더 정확히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방식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직접적인 계시였는 지 야곱으로부터의 교육이었는 지는 모르겠다. 요셉이 죽기 직전 형제들에게 자신을 가나안에 장사지내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에서 보였던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려 보내시리라는 확신을 볼 때에 애초 요셉이 가족들을 애굽으로 이주시킨 이유와 목적에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 가나안이었고 그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리라는 믿음을 확실히 보이고 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창세기 50:24-25)
그리고야곱이 죽고 난 이후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하던 형들을 위로하고 안심시키는 장면에서 요셉의 행동을 보면 그가 과거 겪었던 배신과 아픔에서 확실히 벗어났다는 사실도 확인 할 수 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창세기 50:19-21)


  1. 17세에 애굽으로 팔려서 30세에 바로를 만나 꿈을 해석하고 (창 41:46), 7년 풍년 2년 흉년 후에 형제들을 만났으므로 (30-17)+9=22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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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12. 9. 15:43

NKJV Study Bible Opinion2011. 12. 9. 15:43

KJV가 너무 고어를 사용해서 읽기 쉽지 않은데 그 부분을 보완한 역본이 NKJV다. 물론 단순히 단어만 바꾼 것은 아니고 현대에 이르러 널리 이용되는 대본들을 참고해서 차이점도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KJV의 대본상의 약점이 어느 정도 해소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석은 감히 내가 가지고 있는 성경 중에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전문적이면서도 차분하고 중심을 잘 잡는 주석이다. 성경 전체를 흐르는 예수님의 흔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절대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절제미를 갖추고 있다.

※ 간단하게 성경 대본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하겠다. 모두가 알다시피 성경은 사람이 써서 사람 손에 의해 유지 보수 되어 오다가 사람 손으로 편집되어 사람 손으로 번역되었다. 원본 (원 저자가 썼던 그것)이 남아 있는 성경은 단 한 권도 없음을 주목해야 한다. 어차피 모두 사본이며, 그 정확성을 100% 보증 할 수 있는 사본은 현재 하나도 없는 상태이다. 그런 상태에서 어느 사본이, 어느 편집본이(신약의 경우) 좋다는 논쟁에 참여하고 싶은 생각도 그럴 실력도 안된다. 그런데 나는 어떤 사본이든 별 상관이 있겠나 하는 조금은 무책임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NKJV의 서문에 보면 Textus Receptus와 Alexandrian Text 그리고 Majority Text의 85%가 동일하다고 나온다.

In light of these facts, and also because the New King James Version is the fifth revision of a historic document translated from specific Greek texts, the editors decided to retain the traditional text in the body of the New Testament and to indicate major Critical and Majority Text variant readings in the footnotes. Although these variations are duly indicated in the footnotes of the present edition, it is most important to emphasize that fully eighty-five percent of the New Testament text is the same in the Textus Receptus, the Alexandrian Text, and the Majority Text. Preface of NKJV
뭐 어떤 의미에서 보면 15% 차이는 엄청난 차이이긴 하다. 그러나 또 어떻게 보면 그리 큰 차이가 아니기도 하다. 나는 구원에 필요한 정보는 충분히 전달이 되어 있다고 믿으며, 차이가 있어 봐야 중요치 않은 부분일 것이라고 믿는다. 여러 역본을 읽어봤지만 난 그들 사이에 큰 차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어떤 역본은 형이 예하고 아버지 말을 듣지 않고 동생은 아니오 하고 결국 아버지 뜻에 따랐는데 다른 역본은 그 형과 동생이 바뀌는 경우가 있었다. 그것을 큰 차이라고 볼 것인가? 크다면 큰데 난 그래서 뭐가 바뀌나 하는 생각이 들 뿐이다. 이러나 저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이 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개역개정 마태복음 21:28-31)

“But what do you think about this? A man with two sons told the older boy, ‘Son, go out and work in the vineyard today.’ The son answered, ‘No, I won’t go,’ but later he changed his mind and went anyway. Then the father told the other son, ‘You go,’ and he said, ‘Yes, sir, I will.’ But he didn’t go.
“Which of the two obeyed his father?” They replied, “The first.”Then Jesus explained his meaning: “I tell you the truth, corrupt tax collectors and prostitutes will get into the Kingdom of God before you do. (NLT)
웃기게도 이 구절을 가지고 형보다 나은 아우 없다는 속담이 틀렸다는 식으로 형(유대인)과 아우(이방인) 사이의 문제로 대입해서 푸는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하여간 단어에 집중한 성경 해석이 얼마나 위험하며 우스꽝 스러울 수 있는 지 여기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나는 이런 데에 힘을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여러 역본을 읽어 보자.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어차피 당신이 죽어라고 공부해도 (신학생 포함) 히브리어 헬라어 전문가 되기는 요원하며 불가능에 가깝다. 사전 펴 놓고 떠듬 떠듬 번역하면서 뭔가 발견했다고 흥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요즘 그런 목사들이 너무 많은데, 당신 같으면 옆에서 누가 영어사전 들고 떠듬 떠듬 번역하면서 '이거 번역 이상한데?'라고 하면 뭐라고 답하겠는가? 나 같으면 '니가 영어를 잘 못해서 그런건 아니고?'라고 되 물을 것 같다. 이 문제는 다음에 다시 다루도록 하겠다.

ESV 성경과 마찬가지로 직역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다른 역본들과 차이에 대해서는 center column에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즉, 70인 역에서는 어떻게 다르며, Majority Text에서는 어떻게 다르고, Latin Vulgate에는 어떻게 다르다 라는 식으로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가장 풍부한 성경 읽기가 가능하지 않나라는 생각도 든다. 이 이외에도 다양한 essay와 단어 해설등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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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12. 9. 15:32

ESV Study Bible Opinion2011. 12. 9. 15:32

이 성경을 폈을 때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특징이 Life Application Study Bible과 마찬가지로 풍부한 지도이다. 특히 그 지도가 컬러여서 일단 눈길을 끄는 데에는 성공적이다. 물론 이 부분은 '성경'을 봄에 있어서 피상적일 뿐이긴 하다. 그러나 풍부한 테이블과 지도는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상당한 도움이 되기 때문에 만약 어떤 성경을 골라야 할 지 고민 중이라면 한 번 정도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ESV의 머릿말을 읽어보면 이들의 번역 철학 및 자세 등을 알 수 있는데, 그 머릿말을 통해 그들의 철학이 NKJV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단 번역을 계속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그들은 영어가 변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법이 계속 바뀌어 가고 있고, 바뀌어 왔기 때문에 새로운 번역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현재를 사는 세대는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매우 합당한 설명이라 여겨진다. 참고로 ESV는 1526년의 William Tyndale's New Testament, 1611년의 KJV, 1885년의 RV (the English Revised Version), 1901년의 ASV (the American Standard Version) 그리고 1952, 1971년의 RSV (the Revised Standard Version)로 이어지는 전통을 따른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essentially literal" translation을 지향하는데, 그 이유는 의역을 통해 야기될 수 있는 위험성 즉, 번역자의 개인적인 생각 성향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동시에 직역은 처음에는 의미를 모르더라도 묵상의 반복을 통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주장한다. 그리고 어차피 "thought-to-thought (의역)"을 하고 싶어도 수천년 전의 시대상을 알 수 없는 지금 의역은 불가능 함을 주장 또는 인정하고, 그러므로 "word-to-word" translation이 최선임을 주장한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 할 지 몰라도 적어도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더구나 머릿말을 통해 역자들의 성경 번역에서 인간의 역할의 미약함과 오류성을 진지하고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태도에 나는 상당히 감동 받았다.
머릿말의 맺음말 부분을 옳겨 보겠다.
We know that no Bible translation is perfect or final; but we also know that God uses imperfect and inadequate things to his honor and praise. So to our triune God and to his people we offer what we have done, with our prayers that it may prove useful, with gratitude for much help given, and with ongoing wonder that our God should ever have entrusted to us so momentous a task.
나는 이 부분을 감동스럽게 읽었다. 번역이 얼마나 잘 되었는 지도 중요하겠지만 적어도 역자들의 마음 자세는 상당히 훌륭하다고 할 수 있겠다.

주석은 범위 주석이 특징적이다. 보통의 주석들은 절 주석이 많은데 이 성경은 범위주석이 상당히 많다. 그리고 그 범위 주석도 광범위에서 협범위로 단계적으로 줄어드는 방식을 취한다 예를 들어 제일 처음 "Overview of the Bible: A Survey of the History of Salvation"으로 성경 전체 개관이 나오고 "The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로 구약개관, "Introduction to the Pentateuch"로 모세오경 개관, "Introduction to Genesis"로 창세기 개관, "1:1-11:26 Primeval History"로 아브라함 이전세대에 대한 개관, "1:1-2:3 God's Creation and Ordering of Heaven and Earth"로 창조 개관, 그리고 "1:1 In the beginning"으로 마침내 절개관이 시작된다. 물론 어느 주석 성경이나 이런 형식을 취하기는 하나, ESV는 범위 주석이 특히나 많고 잘 되어 있다. 그리고 내용도 아주 전문적인 것들부터 설교 본문을 읽고 있는 착각을 들게 할 만큼 이해하기 쉬운 내용까지 다양하다. 주석이 너무 많아서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는 문제를 단점이라면 단점으로 꼽을 수 있겠다.
권 말에는 Theology에 대한 결코 짧지만은 않은 내용까지 담겨 있다.

마지막으로 번역은 상당히 쉬운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흐름을 위주로 읽는 편인데 흐름을 쫓아가기 쉬운 형태로 번역이 되어 있다. 내가 영어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뭐라 특징을 언급하기는 힘들지만, 다른 역본을 읽을 때 보다 접속사나 접속구들이 눈에 더 빠르게 들어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물론 정말 모든 번역이 일장 일단이 있고, 나는 모든 번역이 다 좋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성경이어서 좋은 건지 잘 된 번역이어서 좋은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워낙 성경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에 어떤 '비교우위'를 이야기하기는 상당히 망설여 진다. 항상 현재 읽고 있는 성경이 제일 좋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여하간 독자들도 기회가 닿는다면 이 책도 한 권 구비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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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10. 19. 10:32

믿음이란...... Novels or Essays2011. 10. 19. 10:32

믿음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오랜 동안 하게 된다. 매년 나름의 테마를 가지게 되는데 (테마를 내가 만드는 경우보다 생기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올해는 '믿음'이다. 무엇이 믿음일까......
이 블로그를 시작 할 때만 해도 하고 싶은 말이 상당히 많았었다. 그런데 글을 쓰기가 너무 힘들다. 머리가 너무 복잡하다. 2011/10/18 - [분류 전체보기] - 구원에 대하여 2의 경우도 시작은 상당히 오래전에 하였으나, 결국 마감은 이제서야 했고, 그 나마도 그냥 지우고 싶은 것을 아까워서 올렸을 뿐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이다.

얼마전에 고낼료의 이야기를 읽으며 조금 울었다. 원래 질질 짜는 캐릭터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사람인데 고낼료의 이야기를 보면서 조금 짰다. 백부장이 피장이 시몬의 집에 거하는 어부 베드로를 초청하면서 다음날까지 기다리는데 집에 친척들과 친구들까지 다 모아놓고 기다린다. 그들이 과연 불만없이 기다렸을까?
'대체 누구 기다리는 겁니까?'
'베드로라고 하는 하나님의 메신저야.'
'뭐 하는 사람인데요 그리고 어디에서 온 대요?'
'어부인데 피장이 시몬의 집에 있대.'
'왜 그런 천한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 대충 상상이 가능한 대화이다. 이런 상황을 모두 견디며, 그러면서도 그 복된 자리에 친척들과 친구들을 동참 시키기 위해 사정도 많이 했으리라. 그런데 베드로가 들어오자 남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 이 부분에서 나는 눈물을 흘렸었고,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지만 지금 쓰면서도 뭉클함이 올라온다. 결국 그 집에 있는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했고, 베드로는 유대교로 개종하지 않은 이방인에게 세례를 베풀기에 이른다.

왜 눈물이 났을까... 바로 그 순수성이다. 말씀을 사모했고, 하나님을 사모했고...... 주위 상황을 고려하기에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베드로를 보면서 받은 그 감동을 주체하지 못했으리라. 어떤 사람은 이 부분을 보면서 고넬료가 잘 못 배워서 사람에게 절을 했다고 하기도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도 순수하여 감동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믿음이다.

이 고넬료의 이야기를 읽으면, 마치 하나님게서 '너는 언제 쯤 저런 순수한 신앙을 보일래?,' '얼마나 더 기다리면 모든 조건과 관계 없이 믿을래?'라고 물으시는 것 같다. 그리고 정말 몸서리치게 부럽다. 그 고넬료가 너무 부럽다. 수 십년 신앙생활을 했지만 난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성경을 읽느라고 읽었지만 이제서야 고넬료의 신앙이 이해되니 그냥 부끄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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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10. 19. 10:13

구원에 대하여 2 Bible Stories2011. 10. 19. 10:13

오늘은 구원에 관한 조금은 골치아프면서 충분히 논란거리가 될 수 있을 만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어떤 사람들은 필자가 올렸던 2011/02/03 - [Bible Stories] - 구원에 대하여와 모순된다고 생각 할 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전혀 모순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모순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강요할 능력은 되지 않는다.

보통 장로교인들은 칼빈으로부터 시작한 그러나 그 후 약간씩 변형이 가해진 예정론을 배우고 믿으며 살고 있다. 물론 이 글을 통해 진부한 예정론에 대한 논의를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간과하고 있는 것이 설혹 있지는 않은가 살펴보고 싶을 뿐이다.

일단 예정론 하면 같이 떠 오르는 것이 예지론이 되겠다. 이에 관련한 심도 있는 글을 보고 싶다면 지금 당장 검색창에 '예정론' 이라고만 해도 수도 없이 많은 글이 검색 될 것이다. 나는 그런 글들과 대동소이한 글을 쓰고 싶지도 않고 경쟁하고 싶지도 않다. 그냥 우리가 흔히 하는 질문으로 부터 시작해 보자.
  • 내가 하나님에 의해 구원이 예정되어 있다면 이제 맘대로 살아도 될까? 어떻게 산다 할 지라도 하나님께서 한 번 구원하신 사람을 버릴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이건 사실 맞는 말이다. 비록 신약의 많은 서신들이 이런 생각 때문에 방탕했던 교인들을 질타하는 데에 많은 지면을 할애 했었다손 치더라도, 하나님의 절대 사랑과 절대 구원을 생각 한다면 한 번 구원 받은 사람이 그 구원에서 떨어져 나갈 리는 없다. 물론 독자 중에 야고보서의 많은 구절들과 요한 일서의 내용들 히브리서 바울 서신의 많은 구절이 떠오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실로 신약은 예정론을 지지하는 구절과 예지론을 지지하는 구절들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그 중 어느 한 쪽을 지지하면 성경의 거의 절반의 내용으로 공격이 가능하다.
  • 구원 받은 사람은 구원 받은 증거를 보이면서 살아야 한다.
이 역시 맞는 말인데 대체 그 증거가 무엇이겠느냐란 문제가 있겠다.

일단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예정론을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가정하고 글을 써 보겠다. 즉, 구원은 한 번 구원이고, 그 구원에 대해서 번복되는 일은 없으며, 그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 선택에 의한 것이다 정도를 받아들인다고 가정하겠다. (물론 나도 이렇게 성경을 보는 사람이다. 칼빈의 TULIP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으나, 그렇게 현학적인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야고보서 2:17-20)
이와 관련된 수도 없이 많은 구절들이 떠오르지만 그것들을 모두 훑어 보다가는 성경 전체를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이 구절만 보고 이야기 하자. 이 행함에 대한 강조 때문에 일찌기 종교개혁가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까지 했었다. 'James the Just'라고 불리웠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왜 이런 말을 했었던 것일까?

단도 직입적으로 말을 해 보겠다.
당신은 구원 받았는가? 아멘이라 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배웠었으니까. 그럼 그걸 당신은 어떻게 확신하나? 밑도 끝도 없이 확신하라고 하니 확신하나? 확신하라고 한다고 또는 확신하기로 했다고 확신이 되나? 그걸 확신이라고 부를 수 있나? 아니면 그냥 세뇌인가? 조금 위험한 접근이자 질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께서 우리 이름을 생명책이 한 번 기록하면 그것을 다시는 지울 방법이 없다. 어차피 우리는 악하고, 그렇다고 과거 적어도 어느 한 순간에 선하여 구원 받은 것이 아니기에 갑자기 어느 순간 깨끗하다고 생명책에 적어 주실 리도 만무 할 뿐 아니라, 어느 순간 악하여 졌다고 해도 이미 적혀 있는 이름을 지울 리도 없다. 어차피 그게 그거인 인간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을 누구 보다 잘 알고 계신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4:15-16)
그러면 행위는 무엇인가? 이 행위를 성령의 열매라고 바꾸고 싶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특히 다음 구절에 잘 정리되어 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22-23)
우리가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에 잘 붙어 있으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해 열매를 맺으시고 그 열매가 바로 성령의 열매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5)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를 통해 열매를 맺으시려면 가장 기본이 되는 가정은 내 안에 '의심'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야고보서 1: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마가복음 11: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마태복음 21:21)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마가복음 9:23)

자 나는 여기에 야고보서의 비밀이 예정론과 상통하면서 서로 보완 관계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믿음(의심없음) → 예수님이 나를 통해 열매 맺으심 → 그 열매를 보면서 내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됨 → 그 확신으로 의심을 없애고 믿음을 더욱 강건하게 함 → 예수님이 나를 통해 열매 맺으심 → ......" 이런 믿음의 사이클이 우리 인생에 반복되야 건강한 자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 입장에서는 절대 예정이고 예정하신 사람을 다시 버리는 일이 없다. 그런데 우리 입장에서는 내가 구원을 받았는 지 확인 할 방도가 없다. 하나님이 생명책을 열람하게 해 주시는 것도 아니고 참으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다 보면 의심이 생기고 의심하는 사람을 통해 예수님이 역사 하시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난 아멘으로 신앙고백을 했었으니까 일단 구원은 받을 거야. 뭐 이유도 모르겠고 확신도 없지만, 확신하면 된다고 했어.'라는 말도 안되는 논리를 가지고 있는 기독교인은 사실 상상 이상으로 많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그런 부류에 속해 있을 지도 모른다.

요한 일서에도 나오지만, 구원 받았다고 해서 의롭게 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선한 행실 (직접적으로는 형제를 사랑함)이 나의 구원 받았음에 대한 증거는 될 수 있다. 즉, 선한 행실이 구원의 충분조건이기는 하나 선한 행실의 구원의 필요조건은 되지 않는다는 말씀이고, 이 역시 야고보서의 내용과 통하는 내용이다. 즉,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서 '아멘'하는 순간 교회 공동체가 '당신은 구원받은 백성입니다.'라고 인정한다. 그 인정을 받아 들임으로 나에게 있는 일말의 의심을 거두어 내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 의심없는 믿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일하시고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열매를 보고 나의 구원을 확인받게 된다. 이것이 또 다른 열매의 원동력이 된다 (물론 나는 예수님께 붙어 있는 일만 하면 되지만).

교회를 수십년 다니면서도 붙들고 있는 것은 '난 구원 받았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정도만 말 할 수 있다면 정말 심각하게 스스로의 믿음을 점검해 봐야 한다. 우리는 죽어 봐야 어디에 갈 지 안다. 내가 천국간다고 확신한다 해서 지옥에 갈 사람이 천국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결국 당신을 통해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열매를 볼 수 있어야 그제서야 진실로 구원에 대한 확신을 할 수 있게 되며, 그 구원의 확신은 평생을 통하여 점검하고 점검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예수님께서 일하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영적 상태를 유지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삶은 온갖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으면서 가증스럽게도 천국에 가리라는 확신해 차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굳게 붙들고 있는 것이 예정론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확신하면 안된다. 그게 가능하다고 하면 바울과 야고보 요한 등등 신약 기자들이 그렇게 힘들여서 어려운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펌프에 마중물의 역할을 하는 것이 처음 믿을 때의 '아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마중물이라는 표현이 이단 종파에서 사용하는 표현이기는 한데, 나는 그냥 마중물의 의미 그대로 여기에서 사용하고 싶다.) 그 이후로는 스스로 솟아나는 물을 이용해서 물을 끌어올리게 된다. 그런데 아무리 마중물을 넣어도 그 밑에 샘이 없다면 물은 연속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마중물로 넣었던 물만 겨우 나왔는데 그것을 보고 구원 받았다고 믿고 방탕하게 산다면 정말 불행한 사람이다. 물론 그 중 구원 받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나는 여기에서 '확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 다만 당신이 구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그 정도의 신앙에만 머무른다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해 일하실 수 없으며, 결국 당신은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고 천국에 가게 될 것이다. 그게 인생의 목표라면 우리 모두 생명책을 열람하지 않은 상황에서 '당신 구원 받은 거 확실해?'라고 나는 묻고 싶다.

믿음의 길은 결코 쉽지 않다. 나를 통해 일하시는 예수님을 민감하게 인식 할 수 있어야 하며, 그 영적 민감함으로 알게되는 열매를 통해 내 믿음을 성장시키고 더욱 예수님이 일하시기에 좋은 영적 상태를 만들기 위해 순간 순간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 왜 바울이 우리의 삶을 경주에 비유하며, 전쟁터의 병사에 비유했는 지에 대한 묵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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