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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5. 02:24

왜 믿음은 대물림되지 않을까? Bible Stories2013. 9. 5. 02:24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일 중의 하나가 '왜 신앙은 대물림되지 않는가?'였다. 물론 신앙은 개인적이므로, 아버지가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를 한다고 해서 그 교제관계를 아들에게 물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고, 따라서 신앙이 무슨 유산 물려주듯이 대물림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신앙적으로 본받을 부분이 많은 사람의 자식이 오히려 그렇지 않은 자식보다 더 개차반인 경우가 많기에 이런 질문을 해 보게 되었다.


일단 이 정도 시점에서 용어정리를 하고 가자.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믿음은 물건이 아니므로 원래 대물림되지 않는다. 따라서 아예 말을 바꿔야 한다. 왜 하나님 자녀의 삶을 또는 예수님 제자의 삶을 대대로 영위하지 못하는가? 왜 부모의 신앙인으로 사는 삶의 모습에서 자식들은 배우지 못할까? 간단하게 그 부모가 신앙인의 모습으로 제대로 살지 않아서라고 답하지 마라.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성경에서 부모와 자식이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산 예를 찾기는 매우 힘들다. 그래서 나는 아무리 대단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조차 (이 말도 사실 틀린 말이다. 대단한 믿음이라니... 그러나 뭐 다르게 표현해도 그 나름대로 틀린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냥 사용하도록 하자.) 그 신앙인의 모습을 노년까지 길게 지켜나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예를 들어, 노아는 신앙인으로서 충분히 잘 살았는데 노년에 가서 술 마시고 추태를 부리기 (창세기 9:21) 시작했으며, 아브라함도 노년에 가서 그두라를 (창세기 25:1) 첩으로 맞아 사는 등 별로 아름답지 못했고 등등. (그두라가 하갈이라는 전승은 접어두자.) 이런 식으로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런 모습 속에서 일찍 죽는 것이 복이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사사기에서 기드온에 대해 읽다가 어느 정도 그 이유에 대한 다른 방향에서의 힌트를 얻게 되었다. 먼저 본문을 보자.

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하는지라.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 기드온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요청할 일이 있으니 너희는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내게 줄지니라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마엘 사람들이므로 금 귀고리가 있었음이라.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가 즐거이 드리리이다 하고 겉옷을 펴고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그 가운데에 던지니, 기드온이 요청한 금 귀고리의 무게가 금 천칠백 세겔이요 그 외에 또 초승달 장식들과 패물과 미디안 왕들이 입었던 자색 의복과 또 그 외에 그들의 낙타 목에 둘렀던 사슬이 있었더라.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니라. (사사기 8:22-27)

기드온은 이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금을 달라고 하여 그것으로 에봇을 만들고, 온 이스라엘이 그 에봇을 음란하게 사용하여 결국 기드온 집의 올무가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먼저 하나의 가설을 제외하는 작업을 해보자. 기드온이 잘못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을까? 우선 기드온은 믿음의 가정에서 자란 듯하다. 기드온이 '여룹바알'로 불리게 된 과정에서 바알의 제단을 헐고 아세라 나무를 파괴하게 되는데, 이 문제 때문에 성읍 사람들이 몰려온다. 그리고 그들에게 기드온이 아닌 그의 아버지 요아스가 앞장서서 한마디를 하는데 다음과 같다.

요아스가 자기를 둘러선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 하니라. (사사기 6:31)

이로 보아, 요아스도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이었고, 바알과 아세라를 우상으로 인식하던 사람이었다. 따라서 기드온은 믿음의 가정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물론 당시의 상황상 말씀을 가까이 접하고 진리를 접할 기회는 많지 않았겠지만, 적어도 올바른 방향성은 가지고 있었으리라 보이며, 최선을 다해 진리를 찾으려 노력하던 사람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요아스와 기드온은 믿음의 모습을 공유했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특히 백성의 왕이되어 달라는 요청에 대하여 (물론 명확히 그렇게 나오지는 않았지만, 22절에서 대대로 다스려 달라는 요청은 바로 왕이 되어 달라는 요청과 다름이 없다.) 기드온은 그럴 수 없다고 답하면서 하나님께서 다스려야 한다는 뜻을 전달한다. 따라서 기드온은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기드온이 믿음이 없어서 에봇을 만들고 그것이 올무가 되었다는 식의 해석은 옳지 못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왜 그렇게 하였을까? 먼저 에봇이 무엇인지 짚고 넘어가자. 에봇은 제사장이 제사의식에서 입도록 고안된 옷으로서 모세가 하나님께 그 식양을 받아서 제작한 옷이다 (출애굽기 28장). 그런데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 에봇에 우림과 둠밈이 들어가 있는 판결 흉패를 착용하게 되어 있다. (출애굽기 28:30). 지금에 와서는 이 우림과 둠밈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방법이 없다. 그러나 느헤미야 7:65에서 족보에 이름이 기록되어있지 않은 레위인들에게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나타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고 한 것으로 보아, 우림과 둠밈이 어떤 사안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도구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림과 둠밈이 점괘를 알아보는 도구였을 거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 여기에서부터는 나의 상상력이 약간 들어간다. 나는 기드온이 에봇을 만들었다고 할 때에는 당연히 우림과 둠밈까지 만들었다고 본다. 겨우 옷이나 만들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더구나 금을 모아서 에봇을 만들었다면 당연히 판결흉패와 우림과 둠밈까지 만들었다고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기드온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도구를 만들고자 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그렇다고 확신한다.


그러면 기드온은 왜 하나님의 뜻을 아는 도구가 필요했을까? 그는 이미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경험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굳이 도구가 필요했을까? 나는 여기에서 왜 믿음의 삶이 대대로 이어지지 않는지에 대한 힌트를 발견했다.


기드온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경험했다. 그리고 그 교제를 통해 참 평안을 경험하고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이어질 생각은 무엇일까? 나는 그가 자식들에게도 같은 경험을 물려주고 싶어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개인적인 경험을 전달하면서, 그 모호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을 테고, 그것을 구체화하는 방법으로 에봇을 택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자녀들은 그 에봇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고 '음란하게 위했다.'라고 나온다. 즉,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면 그 에봇을 우상으로 섬겼다는 뜻이다.


이제 내 생각을 일반화시켜 보겠다. 어차피 의견이므로 동의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흔히 나의 신앙을 남에게 전달할 때 범하는 실수는 '신앙의 구체화'이다. 하나님은 광대하신데, 내가 경험한 하나님은 구체화한 하나님으로서 그 광대한 하나님의 부분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말하는 것이 틀린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가 경험한 수준에서는 옳다. 그런데 그것을 전달하면서 그리고 받아들이면서 오류가 발생할 여지가 크다. 우선 전달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마치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이 하나님의 전부인 양 전달할 수 있다. 많은 간증자에게서 발견되는 태도인데,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분입니다.'라고 딱 잘라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참 많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는 진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필요할 때에 기도하면 기가 막히게 들어주시는 분입니다.'라고 하면 그것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 하나님의 본질적인 특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결정에 의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철수는 사람입니다.'는 사실일 수 있으나, '철수는 햄을 좋아합니다.'는 틀릴 가능성이 아주 크다. 그냥 철수가 햄을 먹는 것을 보고 한 말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달하는 자의 하나님에 관한 규정이 그 자신에게 적용하기에는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라는 태도로 전달한다면 틀린 전달이다.

반대로 듣는 사람에게 있어서 전달되는 내용이 하나님에 대한 완벽한 정의라고 믿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많은 선교사의 간증 책을 보면, 어떤 돈이 필요한데 아슬아슬한 시간에 정확히 그 금액을 생기는 이야기가 생각외로 많다. 그러면서 '맞아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정확히 아시고 그것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절대 하나님의 방법이 내가 원하는 방법과 다를지도 모른다는 믿음 없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채워주셔.'라고 받아들이고 그렇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경우가 많다. 그 선교사가 처한 상황 고난 기다림 등등은 전부 무시하고 '필요한 돈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마음대로 일반화시켜 버리고 그렇게 해 주시기를 기대한다면, 그것 역시 틀린 접근이다.


이런 일이 부모와 자식 간에도 일어난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자녀에게 전달하는데, 부모 자녀의 특성상 위의 전달자가 범할 수 있는 실수를 범치 않더라도 받아들이는 자녀 입장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부모가 전달한 그대로 그려버릴 가능성이 크다. 그러다 보니 부모는 광대한 하나님을 통해 부분을 경험하는 복을 누렸는데, 자녀는 아예 출발을 부분으로부터 하다 보니 제약사항이 너무 크고, 그러다 보니 오히려 신앙 좋은 부모 밑의 자녀가 방황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발견하기가 너무 어렵다. 하늘을 자유로이 쳐다봐야 어느 정도 가능성이라도 있을 텐데, 우물 바닥에 앉아서 보이는 작은 하늘에서 무언가를 찾으려고 하니까 훨씬 어려운 길을 가게 된다. 그 자녀가 올바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하나님에 대한 구체화 된 이미지를 깨는 작업을 먼저 해야 하므로 오히려 아무 사전 지식 없이 전도 받아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에 비해 신앙성장이 더딘 경우가 많다. 모태 신자를 '못된 신자', '못해 신자'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한국교회에서 광범위한 문제가 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과거 엄청난 부흥을 경험했다. 전후 우리 부모들은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서 시작하여 일어났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신앙의 힘은 엄청났다. 그런데 현대 기독교는 내적으로 외적으로 그리고 신앙적으로 침체기에 빠져있다.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라는 말이 이처럼 잘 들어맞는 교회가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우리 부모가 죄다 잘못 믿어서? 기복신앙이어서? 가짜라서? 전부 맞는 말일 수도 있고 전부 틀린 말일 수도 있다. 하긴 우리 부모 세대와 이야기를 해 보면 기복적인 면이 상당히 강하고, 내가 여차저차 하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해 주셨다는 말을 많이 하긴 한다. 말로는 하나님이 해 주셨다고 하나, 듣다 보면 자기가 잘했다고 자랑하는 수준에서 머무는 경우를 참으로 많이 보아왔다. 그래서? 그럼 그들이 틀린 것인가?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나는 그 세대에 필요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나는 바르다고 이야기할 자신도 없고 틀렸다고 말할 자신도 없지만, 그 세대는 그냥 그랬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문제는 그 부흥기의 세대가 그 자녀 세대에게 '하나님은 이런 분이야.'라는 그림을 너무 많이 너무 구체적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은 특정 시대에 필요한 하나님의 부분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에 하나님의 아주 아주 작은 부분만 경험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그림을 자녀들에게 전달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응답받는 기도법', '이렇게 기도하니까 들어주셨어요.' 등등의 책이 엄청나게 많은 시대이다. (물론 나는 이런 책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검색도 해보지 않았으나, 장담한다. 이런 책 분명히 있다. 그리고 종류도 다양할 것이다.) 쓰는 사람들은 그들의 책이 신앙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결국 그것은 기드온의 에봇이 되어 올무가 될 뿐이다.


그리고 나는 이 부분을 다윗과 솔로몬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부모와 자식 간의 믿음의 모습이 이처럼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경우도 성경에 그렇게 많지 않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으나, 솔로몬은 왕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죄다 저지르고 (신명기 17:16-17, 열왕기상 10:26-27, 11:1) 급기야 하나님께서 '다윗의 얼굴을 봐서 참는다.'라는 말씀까지 하신다. (열왕기상 11:9-13) 솔로몬이 잘못한 부분을 전부 다루기는 분량상 불가능하고, 한 가지만 다루어보자.


솔로몬은 후궁이 700명이고 첩이 300명이었다. (열왕기상 11:3) 세금 문제, 우상숭배문제, 제판권 등등 잘못한 부분을 말하자면 끝이 없으나, 어떤 면에서 솔로몬의 잘못 중 많은 부분이 1,000명에 달하는 여자들과 연결되어있고, 적어도 죄의 원인상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 모든 것을 그의 아비인 다윗에게 배웠다고 생각한다. 솔로몬이 이렇게 많은 부인을 둔 이유는 당연히 주변국과의 혼인을 통해 왕국의 안정을 꾀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을 제일 처음 시도한 사람은 다윗이다. 다윗 역시 여러 여자와 결혼을 했는데, 그중에는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라는 이방 여인도 있다. 일견하여 보기에 이방 여인은 하나밖에 없는 듯이 보인다. 어쨌든 한명이든 100명이든 이방 나라 왕의 딸과 결혼하여 왕국의 안정을 꾀한 예를 만든 것은 확실하다.


자 그런데 문제는 솔로몬에게 인식되는 다윗에게 있다. 다윗이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께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불렸던 사람이다. 돌멩이 하나로 이름난 전사인 골리앗을 죽인 영웅이었다. 주변의 다윗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을지 보지 않고도 알만하다. 다윗이 솔로몬을 개인적으로 교육했었는지는 불명확하다. 물론 역대상 28장에 기록된 바를 통해 적어도 몇 번은 다윗이 솔로몬에게 성전 건축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하여 충고를 하긴 했었던 것 같지만, 아도니아가 칭왕을 감히 감행했던 것으로 보아, 다윗이 솔로몬의 입지를 확고히 다져주지 않았던 것은 확실하다. (열왕기상 1장) 다시 말해, 다윗이 솔로몬을 더 자주 보고 가르치고 하는 등의 개인적 교제를 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솔로몬은 어렸을 때부터 아비 다윗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었을 것이고, 대부분 좋은 이야기들이었을 것이다. "네 아버지 다윗은 대단한 사람이야. 하나님의 사람이지. 여호와께 사랑받는 사람이야." 이런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들었겠는가? 그렇다고 하면, 솔로몬 입장에서 다윗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했겠는가? 나는 추측하기를 모든 다윗의 행동이 하나님께 인정받은 행동이었다고 해석했을 가능성이 있다. 마치 현대 교인들이 '착한' 사람의 모든 행동이 '착하리라'고 생각하듯이 말이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했으니까, 다윗이 그렇게 했으니까 그것은 옳은 거야."라고 말하는 경우를 우리는 심심치 않게 만나며,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판단의 기준이 소위 그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사람들이 '비슷한 경우 어떻게 하였는가?'가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이미 앞의 글에서 말한 바와 같이 (2013/09/03 - [Opinion] - 착각하고 있는 많은 기독교인에게 고하여),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경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어떻게 사랑하셨는가가 중요하다.) 따라서 솔로몬은 아마 다윗의 행동에서 하나님을 규정하고 행동강령을 만들었으며, 그대로 따라 하려고, 또한 발전시키려고 노력하였을 수 있다. 그 결과 중의 하나가 1,000명에 달하는 여인들이었고, 나라의 안정을 위한 성읍건설이었으며, 화려한 성전과 그에 걸맞는 왕궁 건설 등등이었다고 생각한다.

즉, 이 경우 다윗이 솔로몬에게 구체화한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전달하지는 않았으나, 솔로몬이 알아서 '다윗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을 구체화 시켰다.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 '성경을 통해' 인간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을 통해 하나님을 또는 성경을 이해해서는 안된다.)

솔로몬의 통치는 성전건축으로부터 시작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을 찾으면서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정말 중요하고도 이 글을 통해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일이 일어난다.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으나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열왕기상 3:3-4)

본문은 솔로몬의 문제점에 대해서 분명하게 지적하기를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고 한다. 열왕기에서 산당을 훼파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왕이 반드시 거쳐 가는 행사였다. 즉, 하나님은 산당제사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솔로몬이 산당에서 제사하는 이유를 '여호와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더군다나 뒤에 기브온에서 일천 번제를 드리는데 그 이유로 기브온의 산당이 크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눈에 보이는 성스러워 보이고 웅장하고 대단한 어떤 것이 그에게 필요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 듯하다. 그러면 기브온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기브온 산당에는 모세가 만들었던 성막과 번제단이 있었다. (역대상 21:29) 그리고 다윗도 절대 이 성막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역대상 16:39에 보면 사독에게 기브온 산당을 맡기고 거기에서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그런데 솔로몬이 거기에서 제사를 드린 이유는 조금 세속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거기에서 제사를 드린 이유를 열왕기 기자가 규정하기를 '커서'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미 하나님의 법궤는 다윗이 다윗성에 가져다 놓은 상태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은 법궤 위 두 그룹의 날개 사이인 속죄소에 임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사실 법궤가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이라고 해석해도 무관하다 (구약의 입장에서, 우리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특정 장소에만 임한다고 믿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휘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아무 때나 들어오지 말라 그리하여 죽지 않도록 하라 이는 내가 구름 가운데에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레위기 16:2)

그런데도 솔로몬이 기브온으로 간 이유는 바로 그곳에 아버지 다윗보다 더 위대한 모세가 만든 성막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도 대단하지만 모세는 더 대단하므로 거기에서 제사를 드려야 제사빨이 더 좋을 거로 생각했을 수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솔로몬은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고, 여호와를 사랑하였으나, 다윗이 만들어 놓은, 모세가 만들어 놓은 구체화한 하나님의 틀 안에 갇혀 있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유형화된 것들에 기대어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시도하였다. 물론 초반에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찾아와 주셨지만, 솔로몬은 점점 더 하나님을 만나기 힘든 모양새로 변해갔을 거고, 그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는 점점 더 소원해 졌다고 생각된다.


결론을 말하자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확인하는 것 이상을 누군가의 고백 속에서 찾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구체화 시켜서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억지로 전달하려고 하는데, 오히려 그렇게 하지 말아야 전달이 된다. 하나님을 구체화 시켜 버리면 그걸 듣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험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괜히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때에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베드로전서 3:15)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듣는 사람의 태도가 더 중요하다. 말하는 사람의 태도를 먼저 말한 이유는 그들이 더 성숙한 사람이라는 가정 때문일 뿐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구체화 시키는 것이 옳지 못하다손 치더라도 우리가 인간인 한, 우리 입에서 나오는 모든 하나님에 대한 묘사는 구체화의 한 과정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이 하나도 필요 없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타인이 경험한 하나님을 공유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많은 위로를 받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글이든 말이든 심지어 성경도 하나님의 일부분만을 묘사할 뿐이다. 모든 부분을 입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변화되기 전의 인간은 갖고 있지 않다. 모든 정보는 부분적이다. 그렇다고 그 모든 부분을 없앨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음을 우린 모두 알고 있다. 우리는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 하나님 앞으로 오기 때문이다. (전도를 '미련한 것'이라고 규정하는 그 의미도 생각해볼 만 하며, 시사하는 바가 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린도전서 1:21)

따라서 듣는 사람의 태도가 사실은 더 중요하다. 불완전한 틀 속에 자신을 가두지 말아야 한다. 그 틀의 도움은 받되 그 틀 속에 갇히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안에서 하나님을 예수님을 발견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에게 위로는 하나님의 사랑, 그것 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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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먼저 한가지 짚고 넘어가자. 당신이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그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아니 대부분 기독교인이 종교인으로 머물 뿐, 진정으로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삶을 살고 있지도 않으며, 그런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시도하지도 않는다. 누구나 아는 내용인 듯하지만 동시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내용이기도 하다. 나는 교회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을 보아왔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또는 제자로 살기 위해 진지한 고민을 거듭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물론 입으로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말을 많이 한다. 왜냐하면, 많은 교회가 예수님의 제자를 표방하며, 많은 교육을 통해 그 '용어'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까 그들의 말 속에 예수님의 제자라는 표현이 많이 사용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의 삶에서 일반 교회 교인들의 그것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가르치는 사람들조차도 과연 예수님 제자의 의미를 알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경우가 많았다.


우리 삶의 목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됨이어야 한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방편 중의 하나일 뿐이다. 또 하나, '예수님의 제자'는 '되는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되는 것'인가? 나는 그렇게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나에게 남은 문제는 '제자다운 삶'을 사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노력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를 짧게 설명할 자신이 없다. 다만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을 해 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이 글에서 제자가 된다고 표현되는 부분은 그런 표현이 간단하여서 사용할 뿐이고 사실상 그렇게 됨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고 읽어주기를 부탁한다.


우선 문제를 제기해 보자.


근래 미국의 한 교회를 방문했다. 그 지역에서 가장 큰 교세를 가진 교회로 약 3천 명 가량이 출석하는 교회이다. 그런데 그날 설교가 정말 압권이었다. 철저하게 인간중심의 설교였다. 물론 그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대부분의 설교가 인간 중심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교세가 커졌다고 생각된다. 안타까운 이야기이지만 인간중심의 설교를 해야 현대 기독교인들은 편안해하고 좋아한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관한 이야기를 하면 지루해하고 딱딱하다고 느끼며, 심지어 어느 정도 믿음이 있다 하는 사람들조차도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런 설교를 꺼리기 일쑤다. 내가 잘 아는 한 목사는 그런 식으로 설교하면 교인들이 지루해하고 직접 와서 그렇게 설교하지 말라고 하는 교인들도 있다고 하였다. 하여간 어떻게 저렇게 한결같이 인간중심의 설교를 하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그 중 finale가 있었으니 다음의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로마서 8:37)

목사: 그렇습니다. (전형적인 설교용 관용어… 대체 뭐가 그렇다는 말인지 원) 우리는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청중: 아멘~


솔직히 이 부분에서 나는 예배 중에 손뼉까지 치며 감탄했다. 혹시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예측되는지 모르겠다. 나는 모든 사람이 여기까지 읽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한 번에 알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성경 구절에서 중요한 부분은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는 부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 즉, '예수님으로 말마암아'이다. 극단적으로 그리고 성경적 사실로 말해 우리가 이기고 지고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즉, '이긴다'에 대한 정의를 예수님께서 직접 하시지 않는 한, 당신이 생각하는 '이긴다'는 측면에서는 많은 경우에 성공적이지 않을 소지가 다분하다. 모든 (당신 입장에서의) 실패를 기도부족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아니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겠는가? 우리 측면에서 보자면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실패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그 실패가 고난의 형태로 나타나며, 이런 고난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훈련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시기 때문에 예수님 입장에서는 성공이다. 따라서 '넉넉히 이기느니라'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에 비하면 없어도 되는 구절이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라는 부분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교인들은 감격했고, 나는 놀라웠고. 참으로 놀랍다. 이 한 구절만으로 그 교회의 전반적인 설교스타일을 규정해도 아마 무리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설교스타일을 규정하는 데에도 큰 무리가 없다고 본다. 또한 이것이 한국교회 교인들의 수준을 말해준다. 성경의 인물에는 큰 관심을 보이나, 그 인물들을 조율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는 사실 별 관심이 없다. 아마 당신은 ’나는 아닌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우리는 대부분 ’성경 속 그 사람은 왜 그 순간 그렇게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데에 많은 열정을 쏟는다. 글을 쓰는 나 자신조차도 최근에 와서야 성경에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깨달았다. 항상 내게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가 ’왜 개떡 같은 다윗을 하나님은 사랑하셨는가?’ 이었다. 보면 볼수록 부족한 것 투성이의 다윗인데 말이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내가 그 다윗의 행동 패턴에서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는 패턴이 존재하리라고 나도 모르는 새에 가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알았다고 해도 그렇게 가정하지 않았다고 부정했을 거다.) 우린 모두 죄인인데 말이다. 죄의 경중이 어디 있나? 어차피 우리는 모두 사형수였는데…… 어쨌든 내가 다윗을 싫어하고 그의 행동에서 잘잘못을 따지는 모든 과정의 저변에 깔린 가정은 ’나는 나 스스로 의로워져 하나님이 칭찬하실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겠다'였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나의 시선은 그런 다윗을 참으신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지 않고 다윗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당신도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를 권한다. 당신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사랑의 하나님인지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의 ’알 수 없는 자격 기준'인지.


자 이 글을 통해 당신에게 도전하려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당신은 예수님을 당신의 주인으로, 왕으로, 구주로 믿는가? 아니면, 능력 많으신 분으로서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 드리면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램프의 요정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가?

다르게 표현하자면, 당신은 예수님의 은혜로 자녀가 되었으며 의롭다 칭하심을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이 경우 복의 유무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아니면 당신이 충분히 의로운 일을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을 칭찬하시며 복을 주신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이 두 질문은 서로 같은 선상에 있는 질문조차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 부분을 명확히 모르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이런 식으로 질문하게 되었다.


우리의 생각 속에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인가? '분'이기는 하는가? 혹시 그냥 '여의봉' 정도 아닌가? 어떤 특정 주문을 틀리지 않고 외우면 무엇이든 해 주는 여의봉 아닌가? 그래서 주문을 틀림없이 외우고 외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은 아닌가? 달리 말해 성경 속의 인물들을 통해 그들의 삶을 ’정확하게' 모사함으로써 그들이 받았던 ’복'을 나도 받기 위해 노력하는 중은 아닌가?


문제 제기는 이 정도로 하고, 기드온의 이야기를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해보겠다. 기드온의 인생은 어떻게 보면 밋밋하나, 이야깃거리는 많다. 그러나 다른 면으로 이야깃거리도 생각할 거리도 특별하게 있지 않음을 보이고자 한다.  기드온의 이야기는 사사기 6-8장에 걸쳐서 나온다. 성경의 인물 중에서는 상당히 자세히 기록된 편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그만큼 다룰 주제도 많다. 이 중 몇 가지만 추리면 다음과 같다.

  • 양털로 하나님을 시험함 (사 6:36-40)

  • 하나님께서 32,000명의 군인 중 31,700을 돌려보내고 300명만으로 전쟁을 치르게 하심 (사 7:1-9)
  • 하나님의 뜻을 재확인함 (사 7:10-15)
  • 에브라임과의 갈등 (사 8:1-3)
  • 주변 부족에게 인정받지 못하였고, 그것 때문에 그들에게 복수함 (사 8:4-21)
  • 에봇을 만듦 (사 8:27)

이 주제들을 전부 다 다룰 수는 없고 몇 가지만 다뤄 보도록 하자.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얼핏 극적인 기드온의 삶을 연구하고 그 연구를 통해 우리의 신앙을 발전시키기를 원했던 당신에게 그런 시도 자체가 비신앙적이며, 오히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그 간단한 진리가 무엇인지 전달하고자 한다.


먼저 나는 기드온이 양털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부분에 대하여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한 것이 아니라는 설교를 들은 일이 있다. 역시 상당히 유명한 교회의 유명 목사였다. 여러 권의 저서까지 있는 목사인데 인터넷서점에서 조엘 오스틴의 책과 묶여서 팔리는 책의 저자이다. 물론 대단하다는 뜻이 아니고 그런 목사란 뜻이다. 나와 성향이 비슷한 사람이라면 무슨 소리인지 알 것이다. 분명 본문은 기드온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왜 그런데 굳이 그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싶었을까? 왜냐하면, 기드온은 좋은 사람인데 좋은 사람이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4:12) 참으로 놀랍게도 많은 어른이 어린애들의 흑백논리를 인생의 사명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좋은 사람은 좋은 일만 한다는 유치한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성경을 보는 사람을 나는 거의 보지 못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해 보면, 나도 기드온처럼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시험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 주실 작정이면 이렇게 보여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이루어지나 이루어지지 않나 확인하고 싶은 사람의 마음을 배려(?)한 설교다. '죄의식 갖지 말고 자유롭게 하나님을 시험하세요. 보세요. 착한 기드온도 하나님을 시험했잖아요. 에이~ 기드온이 했으니까 하나님이 허락한 방법이고,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으니까 기드온이 한 시험은 시험이 아니에요. (엥?)' 뭐 이런 내용 아니겠는가?

자 정리하자. 나는 기드온이 하나님을 시험했는지에 대한 진위를 가리고 싶지 않다. 내가 짚고 넘어가고 싶은 사실은 기드온의 행동은 단순히 '사람'의 행동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착한 기드온이 했으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신 방법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래서도 안 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흔히 나오는 반론은 ’그럼 왜 적혀있나?’ 이다. 정말 모르는가? 나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드온을 통하여, 무엇이 됐든 간에 '당신은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수용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약한 사람에게 확신을 주시고자 참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려주고자 하셨다. 즉, 본문은 나에게 나의 하나님은 나의 약함을 외면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보듬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려주고 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기드온의 약점을 아셨다. 약하니 버리시는 하나님이 당신이 믿는 하나님인가? 그렇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부드럽게 관용과 수용으로 참으셨고 결국 기드온이 확신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심지어 하나님을 시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것을 통해 확신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 시험에 응해주셨다. 왜? 기드온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사건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사실이다.


그런데 기드온은 또 한 번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지 못한다. 아마 안절부절못했던 듯하다. 바로 300명만 가지고 전쟁을 해야 하는 그 날 저녁의 일이다. 사사기 7:10-15의 내용인데, 이번에는 하나님이 먼저 기드온의 상태를 아시고 도움을 주신다. 바로 적 진지에 가서 그들이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직접 들을 수 있게 해 주셨다. 자 그러면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 일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두렵고 때로는 불안합니다. 그럴 때에 기드온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께 확신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주십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조금 방향이 빗나가 있다. '나의 불안'을 종식하기 위해 '내가' 구하면 '하나님이' 마술 램프의 지니처럼 평안하게 해준다고 생각한다면 많이 잘못된 접근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녀에게 은혜로 평안을 주신다. 때로는 하나님 입장에서 괘씸하고 또는 틀린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에 비하면 그런 부분은 아무것도 아닐뿐더러 하나님은 그 사랑으로 우리를 도와주신다. 약간 미묘한 부분이 있음을 인정한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하나님을 생각하라'이다. 내가 주체가 되어 문제를 파악하고 구하고 등등을 할 때에 반응하는 마술 램프가 아니고 하나님은 미리 다 아시고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시는 분임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유치한 이야기를 하자면, 하나님은 로봇이 아니고 주체적으로 활동하시는 분이며, 심지어 그분은 전지전능하시다. 따라서 우리의 행동이 input이 되어 output을 내놓는 존재가 아니다. 제발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신다.


300명을 선택하는 과정을 보자. 하나님께서 혀로 핥는 사람과 무릎을 꿇고 마시는 사람 중에 혀로 핥는 사람 300만 가지고 전쟁하라고 하셨다. 이 부분을 가지고 ‘왜 그들을 택했는가?' 즉, 그 300명이 선택된 이유를 찾고 그러함으로 우리도 그 300명에 속하기 원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았고 이에 대한 설교도 상당히 많다. 당장 '기드온의 용사 300'으로 검색만 해 봐도 많은 설교를 찾을 수 있다. 대부분 '그들의 순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대승을 이끌었다.' 또는 '혀로 핥는 자가 무릎을 꿇는 자에 비해 하나님 앞에 옳은 이유'에 관한 설교들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당신은 그렇게 당신이 복 받을 만한 이유가 있기를 바라고 복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가? 나중에 이것만 가지고 글을 하나 더 쓸 생각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당신은 복을 받는 어떤 공식을 원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복을 받고 저렇게 하면 저주를 받고 하는 식의 깔끔한 공식을 원하는 당신을 당신 스스로 깨닫고 인정해야 한다. 그런 공식을 원하는 이유는 바로 그래야 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의를 자랑해야 한다. 흔히 자기 의를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데, 만약 당신이 복 받을 만해서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는다면 나의 의를 자랑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여하간 그냥 기술적으로 말해도 만약 혀로 핥는 자가 무릎을 꿇는 자에 비하여 장점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애초에 혀로 핥는 자를 데리고 전쟁을 하라고 하셨어야 하고 심지어 그들을 선택한 이유도 말씀해 주셨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나누라고 한 다음에야 이유도 말씀하시지 않은 채 한쪽을 택하셨다. 사람들이 흔히 성경이 어렵다고 하고 왜 하나님께서 깔끔하게 이유를 말씀해 주시지 않나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잘못된 질문을 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어떤 면에서 쉽고 모든 이유가 적혀 있다. 하나님은 우리하고 수수께끼 놀이를 하지 않으신다. '왜 물을 핥는 사람들만 데리고 가셨지?'라고 질문을 하니까 대답을 찾지 못하고 헛소리를 하게 된다. '왜 300명만 데리고 가셨지?'라고 질문하면 대답이 7:2절에 '스스로 자랑'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나온다. 이것으로 끝이다. 더 좋지 않은 질문은 ’선택된 300명은 하나님이 데려가실만한 어떤 조건을 충족했을까?’라는 질문이다. 당신은 어떻게든 그들이 나머지 31,700명보다 그들이 더 나은 이유를 찾고 싶을 것이다. 그래야 당신이 노력해서 300명 안에 들 수 있을 테니까. 이유가 없다면 당신은 갈 길을 잃은 나그네처럼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 빠질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하나님을 요구조건을 충족시켜드리면 그에 대한 반대급부를 제공해 주는 자판기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세하고도 정확한 사용 설명서를 원하고, 그 사용설명서가 바로 성경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유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 얼핏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그런 부분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당신이 잘못된 질문을 이용하여 성경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 다 같은 사람이다. 우리가 잘나서 사용하시고 못나서 사용하시지 않는 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 아니신 셈이 된다. 돌들로도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 수않 있는 분이 하나님이다. (마태복음 3:9) 당신이 특별히 잘나서 특별히 사용되기를 바라지 마라. 정말 지긋지긋한 기도문구 중의 하나가 ’특별한 종 누구누구를 특별하게 사용하시어’로 시작되는 기도이다. 누가 대체 하나님앞에 특별한 조건을 갖추어서 특별히 사용될 수 있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어떤 일을 맡길 지는 하나님이 결정하실 일이다.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우리가 아무 능력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작정하시면 특별하게 사용하실 수 있다. 어쨌든 하나님이 없어도 되는 의인이 요즘 세상에는 너무 많다. 또는 하나님을 한낱 램프의 지니 정도로 격하시키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다시 말해, 300명만 선택하신 이유는 전쟁은 하나님께서 하시고 우리는 지켜볼 뿐이라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그 300명이 전부 일당백이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에 적합한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다. 더구나 자세히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후 나머지 병력도 어떤 형태로는 사용된다. 자꾸 당신 입장에서 당신의 복 받을 수 있는 행동강령을 만들기 위해 성경을 보고 질문하지 마라. 그냥 하나님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보기를 권한다. 사람들의 행동과 모습에 관심을 가져봐야 그건 헛짓이다.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에 대한 관심과 사랑만 보면 되고 그래야만 한다. 성경의 주인공은 철저히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시다.


에봇에 대한 것은 다른 글로 넘기도록 하자. (2013/09/04 - [Bible Stories] - 왜 믿음은 대물림되지 않을까?)



의 예를 통해 내가 하고자 했던 말은 이것이다. 성경을 인간입장에서 보지 마라. 하나님을, 예수님을 여의봉으로, 부적으로 만들지 마라. 내가 이렇게 하면 저렇게 반응하시고 내가 저렇게 하면 이렇게 반응하시는 자판기 속의 하나님으로 만들지 말라는 말이다. 자꾸 복 받은 사람의 행동에서 복 받을만한 행동패턴을 찾으려고 하는데, 그런 접근은 완전히 잘못된 방식이다. 물론 그래야 속이 편해지는 당신에 대해 나는 이해한다. 나도 그런 인간이니까. 뭔가 확실하면 편하겠지, 불확실은 불안을 부르니까.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보며 ‘간음하면 저주받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간음한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당혹해하는 당신을 나는 이해한다. 그리고 ‘그건 아마 간음이 아닐 거야 그리고 그런 증거가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싶은 당신의 마음도 이해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거 뭐야 이상하잖아.'라는 생각이 절로 들면서 불안해지는 당신의 마음을 이해한다. 우리는 단단한 땅을 원하니까. 이리저리 모양을 바꾸는 땅은 원치 않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 맘이나 편하자고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믿는 것이다. 당신 발밑의 땅을 단단하게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 있으면 가장 단단한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을 받혀 줄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그리고 그 복은 하나님이 정하신다. 복 받을 만해서 복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로 하셨기 때문에 복을 받는 것이다. 이 관계를 이상하게 꼬지 말자. 당신은 하나님을 그리고 예수님을 당신의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가? 그럼 됐다. 그럼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고, 모든 복에 복으로 넘치게 주실 것이다.


앞 에서 말했다시피 기드온의 삶은 일면 극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야깃거리도 많아 보인다. 그러나 사실상 간단한 메시지가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사랑하셨고 모든 면에서 기드온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보이셨다. 이것으로 끝이다.


여기에서 글을 끝맺어야 하는 줄 알고 있지만, 노파심에서 한마디만 더 해 보도록 하겠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다윗이 바로 이런 관계를 정확히 알고 그에 대해 고백하는 부분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무엘하 7:2-3에서 다윗은 자신은 백향목 궁에 사는데 하나님은 장막에 사는 것이 마음이 쓰여서 나단 선지자에서 성전건축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이 부분이 참 재미있는데 아주 전형적인 열심 있는 집사 또는 장로와 목회자 간의 대화와 같다. 예를 들어 집사가 와서 ”제가 이번에 교회에 주차장을 봉헌했으면 합니다.” 목사가 화답하길 ”집사님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하나님께서 복에 복으로 갚으실 겁니다. 그 마음의 원함도 하나님께서 주셨을 거에요.” 이런 식의 대화인 셈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고 느닷없이 약속하기 시작하신다. 물론 역대상 22:8절에서는 그 이유를 말씀하신다. 따라서 다윗은 이유를 듣긴 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갑자기 약속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부분을 보면 재미있는 대구가 있다. 하나님의 집을 지어드리겠다는 다윗의 말에 대구를 이뤄서 하나님께서 사무엘하 7:11에서 당신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어 주시겠다고 하신다. 즉, 내가 이전에도 한 번 정도 언급했다시피 공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지 우리가 아니다. 가끔 크나큰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의 존재 이유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기 위함이라는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 않다. 여하간 이에 대한 다윗의 다음 고백을 보자.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주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있을 먼 장래의 일까지도 말씀하셨나이다 주 여호와여 이것이 사람의 법이니이다. 주 여호와는 주의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 그런즉 주 여호와여 이러므로 주는 위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신이 없음이니이다. (사무엘하 7:18-22)

다윗은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그 약속이 자기가 잘해서 또는 ”집 지어 드릴게요"라는 말이 기특해서가 아님을 알고 있다. 다윗은 철저하게 자기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있다. 다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시사 이 모든 것을 해 주심을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해 여러 번 ”사람이 무엇인관대"로 시작하는 고백을 하게 된다. (시 8:4, 144:3) 나는 종종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나?’ 하는, 마치 다윗이 복 받을 이유를 가지고 있어서 복을 받았다는 식의, 이제까지 내가 했던 말에 따르면 헛생각을 할 때가 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였고, 하나님의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으며 (베드로전서 4:8) 하나님의 사랑은 다함이 없다. (예레미야 애가 3:22)


물론 신앙의 선배들에게 배울 것이 있다면 배우자. 그것을 틀렸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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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3. 8. 6. 15:41

글을 못 쓰겠다. 카테고리 없음2013. 8. 6. 15:41

나는 계속 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변화하기를 바란다. 내가 여기에 적어놓은 글들에 붙어있는 이상한 댓글 만큼이나, 나의 글도 이상한 부분이 많다. 틀린 것도 있고, 동의할 수 없는 글들도 있다. 내가 적은 글에 내가 동의하지 못하다니... 그런데 그게 내 글이고 나의 삶의 목표이다. 그리고 고치지도 않을거다. 왜냐하면 이 블로그의 목적 자체가 나의 생각의 자취를 적기 위함이었으니까...


그런데 요즘은 정말 글이 써지지 않는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 생각을 정리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다 보니 한참 적고 마무리 짓지 못한 글도 많이 생겨 버렸다. 언젠가 그 글들이 정리되도 좋고 정리가 되지 않으면 안되도 좋다. 지금의 나는 그런 부분에서 헤깔리는 중이니까.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요 기간도 내게 의미가 있겠지라고 생각한다.


혹시 너무 오랬동안 쓰지 않아 혹시 블로그가 폐쇠가 되면 어쩌나 하고 짧은 글을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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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