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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29. 15:13

예수님의 인성에 대하여 Bible Stories2012. 7. 29. 15:13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단이 아닌 한 배우는 기본 교리 중의 하나가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100% 인간이심이다. 종종 예수님이 왜 100% 하나님이셔야 하는지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으며, 거기에 대한 답을 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왜 100% 사람이셔야 했는가에 대한 질문이 더 어려운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기회가 있을 때에 100% 신성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이 글은 내가 맡은 소그룹 모임을 위해 작성했던 글인데 그것을 약간만 손을 봐서 여기에 올려 본다. 당시 모임 중에 “예수님의 100% 인성이 부정된다면 그것이 나의 신앙에 일으킬 수 있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라고 질문을 던졌었다. 이 질문에 대해 생각을 해 본다면 공부를 많이 하지 않은 한 (심지어 많이 했다 해도) 아마 많은 사람이 개인의 신앙과 별 관계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또는 뭐 "모르겠는데?" 정도의 답을 얻었을 수도 있다. 그런 답도 틀렸다고 하기는 어렵다. 이 부분을 파고들어오는 이단에 대해 취약성을 보이기는 하겠지만 원래 이단은 싸울 존재가 아니고 피할 존재이기도 하고, 복잡한 내용을 물어보는 이단과 오래 이야기를 할 정도로 자신의 성격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별 필요없는 고민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생각을 해 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몇 가지 힌트 정도만 나눠볼까 한다. 이 글은 많이 축약한 내용이고, 아주 신중하게 적은 글도 아니다. 따라서 이 글로 신학적인 논쟁을 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그럴 정도로 잘 정돈된 글도 아니다.

부활
먼저 기본부터 살펴보자.


1. 우리는 죄인이다.


2. 그러므로 죽어야 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로마서 6:23)


3. 죽음은 영원 형벌을 뜻한다. 즉, 세상에서의 존재가 사라지는 일회적인 사건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반복되는 하나님 부재의 삶을 죽음이라 한다.


4. 그런데 우리 믿는 자 또는 선택받은 자 또는 구원받은 자는 예수님을 힘입어 부활할 수 있다.
Note: 부활에 대해 흔히 “우리는 죽지 않는다.”라고 오해한다. 결국에는 부활할 거니까 죽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도 무리는 없겠지만, 어쨌든 죽음의 과정은 거쳐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17)

그런데 다음의 말씀과 같이 우리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으로, 즉, '나'는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과정이 부활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 참고로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crucified → died → was buried → descended to the dead → rose again의 순서로 고백함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descended to the dead”를 해석하는 문제가 너무 논란거리가 되어서 생략했을 뿐, 교리적으로는 이 부분을 인정하고 있다. 세부적으로 조금씩 다른 목소리가 있을 뿐이다. 어쨌든 해석에 따라 예수님께서 지옥까지 내려갔다가 오셨다고 해도 별 무리가 없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더 맞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죽음의 상태에서 예수님의 신성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것이다.


5. 예수님을 힘입어 부활한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자. 예수님의 육신은 죽음과 부활을 과정을 전부 겪으셨다. 신학자들 간에 약간의 논란거리가 있지만, 부활은 예수님의 신성에 의지하여 일어났다. 즉, 예수님은 육체를 가지고 신성의 도움으로 죽음과 부활을 거치셨고, 그 '본'을 따라 예수님을 힘입어 우리도 부활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다.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디모데전서 1:16)

여기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모든 부활하는 사람의 첫 열매가 되셨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린도전서 15:20)

즉, 우리도 그와 비슷한 열매를 맺어야 하며, 열매를 맺는 과정은 예수님께서 겪은 과정과 유사 또는 같을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육체는 죄의 삯으로 죽게 되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도와 우리를 살리신다. 조금 더 세련되게 말하려 한다면, 바울의 갈2:20을 다시 인용해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즉, 나는 분명 죽게 되고 죽음의 고통도 겪게 된다. 물론 이 과정은 현세에 죄에 대한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면, 즉, 예수님을 나의 주로 믿는다면 나의 삶의 주인이 나에서 예수님으로 바뀐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힘으로 부활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의 상태가 된다.


6. 자 여기에서 예수님의 육체 부활을 부정해 보자. 즉, 100% 인간을 부정해 보자.


A.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한다면, 우리에게 죽음은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따라야 할 본이 없어지므로 부활과 그에 따른 영생이 불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죄로 인해 죽은 이후 힘입어 부활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B.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즉, 죄의 값이 사망이지 않다고 한다면, 공의의 하나님에 대한 증언인 구약 전체가 부정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구약 전체를 부정해 버리는 경우 예수님의 인성은 부정되나, 신으로서의 예수님을 믿는 데에는 별다른 무리가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에 구약을 더 복음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의 본질을 부정할 때에 가장 먼저 상처입는 부분이 신약이 아니고 구약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100% 인성에 대한 부정은 부활신앙에 대한 부정 또는 구약성경 전체에 대한 부정이 된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는 이단은 예수님을 “영체”라 말하기도 하면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을 부정한다. 그리고 구약의 하나님에 대해 공격하거나, 우리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구약을 해석한다.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에 더해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으신 이유를 성경적으로 하나 더 들 수 있는데 다음의 성경 구절과 관련된다.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히브리서 5:1-2)

대제사장은 성경에 나오는 기름 부음 받은 자 중 대표적인 경우인데 (기름 부음 받은 자 = 그리스도, 제사장, 왕, 선지자가 기름 부음을 받음), 바로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예표한다. 자, 대제사장은 인간이어야 한다고 이 구절이 주장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간이셔야 한다. 이는 다음에서 한 번 더 강조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브리서 4:15)

이 구절에서 강조하는 것은 우리와 같이 모든 죄의 유혹을 참고 이겨내신 예수님이시므로 우리의 죄 또한 동정하시며, 따라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고 계시되 죄는 없으셨다. 사실상 이 구절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성에 의지한 예수님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생각해 볼 때에는 불필요한 구절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예수님의 죄 없으심에 대해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은 인간 예수에 대해 묵상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머릿속에 있는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이신 예수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강력한 증언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이단은 '죄가 없는 존재'가 어떻게 사람일 수 있느냐고 하면서 이 구절을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는 데에 사용한다. 그러나 '죄가 없는 예수님'에 대한 증언은 신성 예수님의 측면에서 보면 불필요한 증언이고, 따라서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강한 증언이 된다. 인성이 없으시다면 죄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면 역시 우리의 구원이 불가능하다. 십자가의 도인 “사죄-칭의-새 생명”에서 '사죄'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바로 우리를 동정하시는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인성이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를 동정하지 않으실 것이고, 죄인 된 우리를 위해 죽어주실 이유도 없고, 우리를 복잡하게 다시 살리실 이유도 없다. 이처럼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의 구원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자, 위에서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 짧게 다루어 보았다. 이것을 하나하나 깊게 들어가자고 하면 너무 길어져서 이 정도로 짧게 끝내려 한다. 노파심에 한마디 하자면, 이 글은 누구를 가르치기 위해 쓴 글은 아니다. 맨 처음 왜 블로그를 시작했는지에 대한 글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내 개인적인 기록을 남긴다는 의미가 더 강하다. 그런데 이 글의 작성 방식은 내가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작성한 형태로 드러나기 때문에 부담스럽기도 하다. 가르칠 자격이 없는 사람이 가르칠 경우, 가르치면서도 가르치는 자가 되지 않을 방법이 있다면 좋겠는데, 나는 그 방법을 모르겠다. 사실 나는 내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 존재인지 아주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쓰레기가 되지 않게 발버둥치는 모습이 좀 강한 성격으로 드러나기도 하는데 기본적으로 선생될 자격은 커녕 인간 될 자격도 의심되는 사람이다. 누구도 인간인 한 성경을 '안다'라고 할 수 없다. 나는 내가 얼마나 병신같은 존재인지 알고 있다. 이 글도 '아는 사람'으로서 아는 지식을 적은 것이 아니고 '내 주제에 조금 깨달은 내용'을 나누는 수준이다. 그래서 내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으리라 보장할 수 없고, 틀린 부분이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냥 말한 인간의 수준을 고려해 가면서 걸러 읽어주기를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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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이 글은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적었던 글에 대해 어투를 수정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삭제하는 등의 소소한 수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일단 그 관계나 상황의 어려운 정도는 매우 주관적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 다루지 않는다. 그런데 한가지 이야기하자면, 당신은 정말 어려운 상황이라고 생각되는 경우라도 사실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 경우가 백중 구십구는 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정도의 시험 또는 시련만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0:13)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기본부터 점검해 보자. 보통 교회를 다닌다고 한다. 그리고 예배를 본다고 한다. 그런데 교회는 다니는 곳이 아니며, 예배 역시 보는 것이 아니다. 성도가 모이는 곳이 교회이고, 나의 삶이 예배이다. 우리는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교회 공동체에 속하고 적어도 일주일의 하루를 성도 간의 교제에 할애한다. 바로 성도 간의 교제 자체가 '믿음 생활' 그 자체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사의 설교'가 중심인 형식적인 예배가 (ritual) 결코 예배의 중심이 될 수 없다. 같이 모여 찬양하고 같은 성경 구절로 나누고(설교) 소그룹 모임을 통해 교제하는 그 모든 활동을 통틀어서 예배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외의 활동은 엄밀히 말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예배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보통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형식적인 예배에 집중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오해가 '나의 행위'를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로 오해하게 하거나,또는 그것이 그렇게 이해되기를 바라게 한다. 내가 보아온 교회 내의 모든 문제는 바로 이런 부분에서 출발한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의미를 잘못 알고 있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높여 드리며 영광을 올린다.'라는 의미에서의 섬김이 옳은 섬김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의 의미의 섬김은 틀린 접근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시는 것일 뿐이다. , 주체는 하나님이고 나는 하나님 역사의 통로가 될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언가를 해 드릴 수도 없고 해 드릴 필요도 없다. '공급'의 의미로서의 섬김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 우리는 무익한 종일 뿐이다.

자 처음으로 돌아가서 '상황의 어려움'만 떼어서 말해 보자. 성경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보낸 그 자리에서 순종으로 예배의 단을 쌓으라.'라고 하실 것이다. 상황의 어려움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던 아브라함은 사라를 잃을 뻔했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이삭은 그랄 블레셋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하셨다. 야곱과 요셉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겠으나, 길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으므로 이 정도에서 마치겠다. 그러므로 상황의 어려움은 '일반적으로 신앙생활을 함에서' 피할 문제가 아니라 순종으로 받아야 할 문제일 경우가 많다. 물론 구체적인 상황은 스스로 판단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내용이 있다면, 당신이 그 자리에서 어려운 상황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돌파하기로 하든지 그것을 피하기로 하든지 그 결정과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이다. 이세벨을 피해 멀리멀리 달아났던 엘리야를 하나님께서 아기 돌보듯이 돌보았던 것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어처구니없는 선택을 한 우리 일지라도 하나님은 절대 버리지 않으신다.

다음으로 '관계'의 문제를 이야기해 보자. 관계에 문제가 있다 함은 '예배가 제대로 드려지지 않고 있다.'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싫은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 싫은 사람이 그냥 호불호를 떠나 나를 괴롭힌다면 문제가 된다. 그냥 무시할 수도 없고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히고 교회 가는 것이 괴롭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데 '주여 except 저놈'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면 일단 '나의 예배'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보통 관계의 문제는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라는 자세에서 출발한다. 즉, 앞에서 말한 섬김에 대한 오해가 가장 근저에 깔린 문제이다. 종으로서 군사로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신앙생활을 한다고 한다면, 실제로 관계의 문제가 크게 드러나기 힘들다. 당신과 당신을 괴롭히는 그 모두가 스스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고 그리고 그 섬김에 대하여 일종에 빚쟁이로서의 마음가짐을 갖기 때문에 문제가 시작된다. 말로는 섬긴다고 하고 마음으로는 '하나님 내가 이렇게까지 해 주었으니 보답 잘해 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저 인간은 인정하지 않네? 짜증 나는군.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빚을 많이 줬는지 모르는군. 알려줘야겠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정말 많다. 나는 모든 문제는 죄다 이 문제라고까지 하고 싶다. 따라서 먼저 당신의 정체성, 다시 말해 주제 파악을 먼저 하기를 권한다.


그런데 이런 죄성에 가까운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관계의 문제는 일어날 수 있다. 성경에 관계의 문제를 겪었던 수많은 사람이 나온다. 바울이 바나바와 싸웠고, 그 바울이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기도 했다. 요셉과 형제간의 갈등은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었고, 다윗과 요압의 갈등은 유치하게 끝났다. 이 외에도 수도 없는 관계의 문제들이 성경 곳곳에 적혀있다. 그럼 그것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교훈은 무엇이며,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서 주목할 또 다른 하나는 '항상' 관계의 문제는 ''라는 자아가 부각 되었을 때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물론 위의 '섬김'에 관한 문제도 본질상 같은 문제이긴 하다.) 동시에 참 재미있게도 그 관계의 문제까지도 하나님은 들어 사용하셨고, 자녀에게 좋은 것으로 보답하셨다. 바울과 바나바의 싸움은 하나님 나라의 더욱 빠른 확장을 가져왔고, (아마도) 베드로가 회개하게 하였을 것이며, 요셉이 애굽에서 미래를 준비하게 하기도 하였다. 다윗과 요압의 갈등은 아마 다윗이 타락하는 것을 어느 정도 조절하게 하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관계의 갈등도 선하다는 말인가? 전혀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관계의 갈등이 있다면, 내가 너무 나를 내세우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야 하며, 동시에 이것 또한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실 하나님으로 위로를 얻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관계의 갈등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관계의 문제로 교회를 옮기는 것은 개인적으로 좋지 않다고 본다. 옳지 않다고 썼다가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닌 경우 또는 옳고 그른 문제로 해석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서 좋지 않다고 바꾸었다. 그런 문제로 교회를 옮기게 되면 계속 옮겨 다녀야 한다. 무시할 것은 무시하고 좋은 관계를 취해야 한다.

내 이야기를 잠깐 해본다면, 나는 사람을 싫어한다. 그리고 상당히 비판적으로 사람을 본다. 특히 나는 내가 출석하는 교회 담임목사의 설교를 상당히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편이다. 교회의 교육 프로그램, 방향, 등등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교회에 다니는 이유는 그 담임목사가 자기반성을 하는 분이라는 것과 적어도 이 교회의 목사들은 교리상으로 바로 서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런 교회 찾기도 쉽지 않다. 물론 내가 다니는 교회에 생명과 회복만 있지 죽음과 저주에 대한 경고가 없어서 회개에 약하다는 부분을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어느 교회든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그 정도는 수용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지금 다니는 교회를 다닌다. 더구나 좋은 사람들이 있다. 존경하는 부목사님이 있고, 소그룹 모임과 양육모임 등에서 만나는 신앙의 동역자가 이 교회에 많이 있다. 걸쩍지근한 사람도 같잖은 사람도 짜증 나는 사람도 수없이 많으나, 그냥 무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정도는 옮길까 하는 생각도 한다. 왜냐하면, 내 신앙 스타일이 너무 편향되어 있어서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자 하는 생각 때문이다. 너무 지적으로 흐르는 나의 신앙을 조금 행동하는 신앙 쪽으로 당기고 싶어서 '은사 주의 교회 (charismatic church)'에 다녀볼까 하는 생각이 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천국 백성으로서의 훈련을 쌓아 간다고 할 때, 나에게 필요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다른 교단을 택해 보고 싶은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어려움' 때문은 아니다.

신앙생활의 중심에 예수님을 두고 생각하기를 바란다. 보통 관계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아주 활동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경우 한 가지를 꼭 염두에 둬야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행정적인 부담을 지라고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질서''필요' '편의'를 위해 사람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교회일'로 인해 부딪히는 관계가 당신을 힘들게 한다면 다 버리길 권한다. 그런다고 하나님께서 '야 너 왜 일 안 해'라고 하지 않으신다. 사도들이 일곱 집사를 세우고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고 했던 말씀을 곱씹어 보아야 한다. 신앙생활 중에 기도와 말씀을 제외하고 '꼭 해야 하는 일'이란 없다. 사람들의 말은 사뿐히 무시해야 할 때도 있다. 성경을 발로 읽는 사람들의 이른바 '장로의 유전'에 따른 도전에 일일이 대응할 필요는 없다. 예수님과 및 제자들이 수없이 장로의 유전에 대해 비판하였으나, 여전히 교회는 장로의 유전에 매여있다. 사람의 경험을 말씀 위에 두는 일이 많다. 나는 지금 소그룹 리더와 일대일 그리고 교리 교재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중 하나를 버리라고 하면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교재 만드는 일을 관둘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 이미 관둔 상태임.) 그 일은 내가 존경하는 목사님과 하는 것이고 좋아하는 집사님이 강권해서 시작한 일이며, 약간의 지적욕구를 채울 수도 있고 지적과시도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 신앙과 관계된 일은 아니다.


정답은 없다. 결국, 당신의 선택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통해 '옮기지 말라.'라고 권하고 싶다. 상황의 어려움도 관계의 어려움도 당신에게 주어졌다면 필요하니까 주어졌다고 생각하기를 권한다.


당신은 어떤 스타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왜 하는가? 무엇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가? 무엇이 강점인가? 하나에 치우치면 다른 하나는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둘 다 잘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너무 모든 것을 잘하기 위해 자신 채찍질하지 말아야 한다. 회개는 필요하나 자책은 필요 없다. 죄책으로부터의 자유를 예수님께서 주셨고, 우린 감사할 일만 남았다. 물론 그 감사는 정당한 회개를 동반하며, 회개를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너무 원론적으로 말하지 않았나 걱정이 된다. 나는 신앙생활이 줄타기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너무 어렵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라는 하나님 말씀이 야속할 때도 잦다.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다. 믿음의 길은 좁은 길이다. 절대 쉽지 않다. 우리 모두 바울처럼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길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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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2. 6. 13. 13:21

구약은 어려워 Novels or Essays2012. 6. 13. 13:21

보통 구약은 어렵다고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구약의 하나님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기독교인이 많다. 이에 대해서 오늘 살펴보았으면 한다.


어렵다는 그 말이 그저 말 그대로 어렵다는 뜻이기만 하다면 별로 할 말이 없다. 어렵다고 하는 사람에게 쉽다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 없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신약이 훨씬 더 어렵다고 말하겠지만, 누구나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은 다를 수 있으니 할 수 있는 말도 한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어렵다는 말을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작게는 구약의 위인을 (기독교인으로서 믿음의 선진을 위인으로 부를 수 없다고 공격할 수 있겠지만, 그냥 넘어가자.) 이해할 수 없다는 불평으로부터 크게는 구약의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위험한 발상까지 다양하다. 어찌 됐든 단순히 어렵다는 이야기이기보다는 '이해할 수 없다.' 또는 '이해 못 하겠다.'라는 이야기인 경우가 많고, 이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이 글에서는 구약이 어려운지 쉬운지에 대해서가 아니고, 구약의 필요성에 대해서 논해보되, '비 신학적'으로 논해보자. 신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구약의 필요성'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수 있다. 그냥 내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한 소회 정도로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


먼저 나는 구약이 정말 인간적이며, 그러므로 우리의 실생활에 쉽게 적용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에 반해 신약은 우리 인간 개인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와 닿지 않게' 다룬다. 이렇게 어렵게 꼬아서 이야기하는 이유는 분명 신약도 인간의 실질적인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정말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우리가 결혼해야 할 이유를 성욕에서 찾기도 하고 (고전 7:9) 음식에 관해 논하기도 하며 (고전 8), 더구나 예수님은 히브리서 기자가 표현하기를 우리 인간을 잘 이해하는 분이라고 하기도 했다. (4:15) , 신약 기자들은 인간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별로 와 닿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일까? 구약의 기자들과 달리 신약의 기자들은 대부분 순교했다. 그들은 목숨 걸고 신앙생활을 했으며, 흐트러짐이 없었다. 물론 베드로는 여전히 성격이 급했고, 남의 눈치를 살폈으며, 바울 역시 그 성격 어디 가지 않은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어쨌든 따라가기 어려운 신앙의 모습을 보였다. 더구나 정말 힘든 상황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자연스럽게 삶 중에 실천하고 살았다. 이런 면에서 나는 신약에 나타나는 개개인의 삶이 쉽사리 와 닿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그들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너무 높은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그에 반해 구약에 나타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노아의 술 문제, 아브라함과 이삭의 거짓말하는 문제, 겁쟁이 엘리야, 참으로 말 안 듣는 요나, 비겁하고 교활했던 야곱, 시기심에 불타올랐던 미리암의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정말 엄청나게 많은 성(sex) 관련 이야기들이 있다. 특히 성에 관해서는 그 범위가 실로 만만치 않다. 롯은 자기의 두 딸과의 사이에서 아들 둘을 두었고, 소돔 성은 동성애자들의 소굴이었으며, 유다는 창녀를 샀는데 알고 보니 며느리였고, 심지어 그 사이에서 아들까지 낳았고, 베냐민 땅에서 문제가 생기니까 바람나서 자신을 떠났던 첩을 그냥 내주는 레위 찌질이의 이야기, 그리고 그 베냐민 사람들은 그 여자를 밤새도록 윤간하여 결국은 죽게 만들고, 그 찌질이는 그 죽은 첩을 토막 내 이스라엘 사방에 보내었다 (19). 그 인물의 중요도로 볼 때에 이런 부정적인 이야기의 정점을 찍은 사람이 바로 다윗인데,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팽개치고 왕궁에서 퍼질러 자다가 저녁 즈음에 일어나 최측근의 아내인 밧세바를 취한다. 참고로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와 아비 엘리암 모두 다윗의 30인의 용사에 속하였고, 그의 조부 아히도벨은 다윗의 친우였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아비의 첩들과 벌건 대낮에 공개적으로 관계했으며 (삼하 16:22), 그의 또 다른 아들 솔로몬은 드디어 후궁 700에 첩 300을 둠으로써 모든 남자의 선망 대상이 되었다.

합법적이면서도 뭔가 개운치 않은 성도 많이 나온다. 아브라함은 모두의 기대와 달리 첩이 두 명이었고, 야곱도 두 명, 그리고 모세도 첩이 있었다 (12:1), 이스라엘 사사들과 왕들은 정말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첩이 많았고 자식도 많았다.


그런데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인간을 이해하는 데에는 구약이 도움된다. 신약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이상을 보여 준다고 하면, 구약은 정말 어쩔 수 없는 비참한 인간의 모습을 꾸밈없이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오늘의 못난 ''와 나를 짜증 나게 하는 ''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데에는 구약이 훨씬 효과적이며, 실질적으로도 나는 구약의 예를 들어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러함에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할 때에는 신약을 주로 인용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에, 온전하기 위해 그리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위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노력하는 우리로서 일면 이해하기 어려운 구약의 인물들이지만, 반대로 우리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추악함과 어쩔 수 없는 본성 등을 설명하는 데에는 구약만 한 것이 없다. 구약이 없었다면 아마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이중적이고 위선적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믿음으로 이런 인간이 겪고 있는 불완전성에서 자유로워지게 되는 이야기를 더 기대한다. 그런 면에서, 너무 약하고 너무 인간적인 구약의 인물들이 어떤 때에는 나를 너무 실망하게 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도 계속 미래에도 지금과 같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면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조금 더 무거운 주제이면서도 약간 신학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공의의 하나님에 대해 야속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더구나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대목에서는 거의 모든 기독교인이 고개를 내젓는다. 당신이 당신 자신을 스스로 그렇게 표현하셨으므로, 그분을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우리는 우리의 이성과 관계없이 그렇게 받아들여야 함에도, 실제로 그렇게 인정하기보다 의문시하고 심지어 외면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직간접적으로 거의 모든 이단이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멀리 가면 영지주의가 바로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름의 해석을 하다가 나온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이야기는 너무 신학적인 이야기라 일단 넘어가고 간단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당신이 믿는 것이 사상인지 도덕률인지 위안을 주는 덕담인지 아니며 절대자이신 하나님인지 알아야 하고 결단해야 하고 결정해야 한다. 당신이 믿는 대상이 하나님이고 그를 주로 섬기기로 했다면 사실 이런 고민은 애초에 말이 안 된다. 그분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구약을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불평하라. 그러나 성경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해하지 못하는 당신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 불평하고 회피할 문제가 아니다.


이단들에 대해 연구하다 보면 다음과 같은 조금은 역설적인 깨달음을 얻을 때가 있다. 이단들이 힘들어하는 것은 신약이 아니라 오히려 구약이며, 이단들이 부정하는 것이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래서 이단들의 주장이 바르다고 인정할 때 가장 먼저 부정되는 대상이 예수님과 신약이 아니고 성부 하나님과 구약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구약이 더 복음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의 믿음과 보다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너무 많이 말하는 것은 오히려 논지를 흐릴 가능성이 있으므로, 위의 두 가지 이유로 나는 구약이 우리에게 필요하며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어렵다고 말하고 있는 당신이 차마 하지 못한 말이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라면 다시 한번 구약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이 성경을 스스로 아직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설교에 노출되는 빈도로 볼 때에 (이해와는 별도로) 신약에 훨씬 더 익숙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감히 주장하고 싶다. 당신의 신앙에 직접 도움을 주고, 또 직접 연관된 말씀은 오히려 구약이다. 경중을 따질 수는 없으나, 약간 무책임하게 이야기하자면 구약은 더욱 실제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고, 신약은 땅의 실재가 아닌 하늘의 실재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둘 다 중요한데, 구약이 소외되고 있으므로 나는 구약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에서 주장함으로써 무게추를 구약 쪽으로 조금 밀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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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