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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0. 19. 10:32

믿음이란...... Novels or Essays2011. 10. 19. 10:32

믿음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오랜 동안 하게 된다. 매년 나름의 테마를 가지게 되는데 (테마를 내가 만드는 경우보다 생기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올해는 '믿음'이다. 무엇이 믿음일까......
이 블로그를 시작 할 때만 해도 하고 싶은 말이 상당히 많았었다. 그런데 글을 쓰기가 너무 힘들다. 머리가 너무 복잡하다. 2011/10/18 - [분류 전체보기] - 구원에 대하여 2의 경우도 시작은 상당히 오래전에 하였으나, 결국 마감은 이제서야 했고, 그 나마도 그냥 지우고 싶은 것을 아까워서 올렸을 뿐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이다.

얼마전에 고낼료의 이야기를 읽으며 조금 울었다. 원래 질질 짜는 캐릭터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사람인데 고낼료의 이야기를 보면서 조금 짰다. 백부장이 피장이 시몬의 집에 거하는 어부 베드로를 초청하면서 다음날까지 기다리는데 집에 친척들과 친구들까지 다 모아놓고 기다린다. 그들이 과연 불만없이 기다렸을까?
'대체 누구 기다리는 겁니까?'
'베드로라고 하는 하나님의 메신저야.'
'뭐 하는 사람인데요 그리고 어디에서 온 대요?'
'어부인데 피장이 시몬의 집에 있대.'
'왜 그런 천한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 대충 상상이 가능한 대화이다. 이런 상황을 모두 견디며, 그러면서도 그 복된 자리에 친척들과 친구들을 동참 시키기 위해 사정도 많이 했으리라. 그런데 베드로가 들어오자 남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 이 부분에서 나는 눈물을 흘렸었고,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지만 지금 쓰면서도 뭉클함이 올라온다. 결국 그 집에 있는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했고, 베드로는 유대교로 개종하지 않은 이방인에게 세례를 베풀기에 이른다.

왜 눈물이 났을까... 바로 그 순수성이다. 말씀을 사모했고, 하나님을 사모했고...... 주위 상황을 고려하기에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베드로를 보면서 받은 그 감동을 주체하지 못했으리라. 어떤 사람은 이 부분을 보면서 고넬료가 잘 못 배워서 사람에게 절을 했다고 하기도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도 순수하여 감동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믿음이다.

이 고넬료의 이야기를 읽으면, 마치 하나님게서 '너는 언제 쯤 저런 순수한 신앙을 보일래?,' '얼마나 더 기다리면 모든 조건과 관계 없이 믿을래?'라고 물으시는 것 같다. 그리고 정말 몸서리치게 부럽다. 그 고넬료가 너무 부럽다. 수 십년 신앙생활을 했지만 난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성경을 읽느라고 읽었지만 이제서야 고넬료의 신앙이 이해되니 그냥 부끄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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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10. 19. 10:13

구원에 대하여 2 Bible Stories2011. 10. 19. 10:13

오늘은 구원에 관한 조금은 골치아프면서 충분히 논란거리가 될 수 있을 만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어떤 사람들은 필자가 올렸던 2011/02/03 - [Bible Stories] - 구원에 대하여와 모순된다고 생각 할 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전혀 모순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모순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강요할 능력은 되지 않는다.

보통 장로교인들은 칼빈으로부터 시작한 그러나 그 후 약간씩 변형이 가해진 예정론을 배우고 믿으며 살고 있다. 물론 이 글을 통해 진부한 예정론에 대한 논의를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간과하고 있는 것이 설혹 있지는 않은가 살펴보고 싶을 뿐이다.

일단 예정론 하면 같이 떠 오르는 것이 예지론이 되겠다. 이에 관련한 심도 있는 글을 보고 싶다면 지금 당장 검색창에 '예정론' 이라고만 해도 수도 없이 많은 글이 검색 될 것이다. 나는 그런 글들과 대동소이한 글을 쓰고 싶지도 않고 경쟁하고 싶지도 않다. 그냥 우리가 흔히 하는 질문으로 부터 시작해 보자.
  • 내가 하나님에 의해 구원이 예정되어 있다면 이제 맘대로 살아도 될까? 어떻게 산다 할 지라도 하나님께서 한 번 구원하신 사람을 버릴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이건 사실 맞는 말이다. 비록 신약의 많은 서신들이 이런 생각 때문에 방탕했던 교인들을 질타하는 데에 많은 지면을 할애 했었다손 치더라도, 하나님의 절대 사랑과 절대 구원을 생각 한다면 한 번 구원 받은 사람이 그 구원에서 떨어져 나갈 리는 없다. 물론 독자 중에 야고보서의 많은 구절들과 요한 일서의 내용들 히브리서 바울 서신의 많은 구절이 떠오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실로 신약은 예정론을 지지하는 구절과 예지론을 지지하는 구절들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그 중 어느 한 쪽을 지지하면 성경의 거의 절반의 내용으로 공격이 가능하다.
  • 구원 받은 사람은 구원 받은 증거를 보이면서 살아야 한다.
이 역시 맞는 말인데 대체 그 증거가 무엇이겠느냐란 문제가 있겠다.

일단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예정론을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가정하고 글을 써 보겠다. 즉, 구원은 한 번 구원이고, 그 구원에 대해서 번복되는 일은 없으며, 그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 선택에 의한 것이다 정도를 받아들인다고 가정하겠다. (물론 나도 이렇게 성경을 보는 사람이다. 칼빈의 TULIP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으나, 그렇게 현학적인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야고보서 2:17-20)
이와 관련된 수도 없이 많은 구절들이 떠오르지만 그것들을 모두 훑어 보다가는 성경 전체를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이 구절만 보고 이야기 하자. 이 행함에 대한 강조 때문에 일찌기 종교개혁가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까지 했었다. 'James the Just'라고 불리웠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왜 이런 말을 했었던 것일까?

단도 직입적으로 말을 해 보겠다.
당신은 구원 받았는가? 아멘이라 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배웠었으니까. 그럼 그걸 당신은 어떻게 확신하나? 밑도 끝도 없이 확신하라고 하니 확신하나? 확신하라고 한다고 또는 확신하기로 했다고 확신이 되나? 그걸 확신이라고 부를 수 있나? 아니면 그냥 세뇌인가? 조금 위험한 접근이자 질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께서 우리 이름을 생명책이 한 번 기록하면 그것을 다시는 지울 방법이 없다. 어차피 우리는 악하고, 그렇다고 과거 적어도 어느 한 순간에 선하여 구원 받은 것이 아니기에 갑자기 어느 순간 깨끗하다고 생명책에 적어 주실 리도 만무 할 뿐 아니라, 어느 순간 악하여 졌다고 해도 이미 적혀 있는 이름을 지울 리도 없다. 어차피 그게 그거인 인간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을 누구 보다 잘 알고 계신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4:15-16)
그러면 행위는 무엇인가? 이 행위를 성령의 열매라고 바꾸고 싶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특히 다음 구절에 잘 정리되어 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22-23)
우리가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에 잘 붙어 있으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해 열매를 맺으시고 그 열매가 바로 성령의 열매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5)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를 통해 열매를 맺으시려면 가장 기본이 되는 가정은 내 안에 '의심'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야고보서 1: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마가복음 11: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마태복음 21:21)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마가복음 9:23)

자 나는 여기에 야고보서의 비밀이 예정론과 상통하면서 서로 보완 관계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믿음(의심없음) → 예수님이 나를 통해 열매 맺으심 → 그 열매를 보면서 내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됨 → 그 확신으로 의심을 없애고 믿음을 더욱 강건하게 함 → 예수님이 나를 통해 열매 맺으심 → ......" 이런 믿음의 사이클이 우리 인생에 반복되야 건강한 자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 입장에서는 절대 예정이고 예정하신 사람을 다시 버리는 일이 없다. 그런데 우리 입장에서는 내가 구원을 받았는 지 확인 할 방도가 없다. 하나님이 생명책을 열람하게 해 주시는 것도 아니고 참으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다 보면 의심이 생기고 의심하는 사람을 통해 예수님이 역사 하시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난 아멘으로 신앙고백을 했었으니까 일단 구원은 받을 거야. 뭐 이유도 모르겠고 확신도 없지만, 확신하면 된다고 했어.'라는 말도 안되는 논리를 가지고 있는 기독교인은 사실 상상 이상으로 많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그런 부류에 속해 있을 지도 모른다.

요한 일서에도 나오지만, 구원 받았다고 해서 의롭게 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선한 행실 (직접적으로는 형제를 사랑함)이 나의 구원 받았음에 대한 증거는 될 수 있다. 즉, 선한 행실이 구원의 충분조건이기는 하나 선한 행실의 구원의 필요조건은 되지 않는다는 말씀이고, 이 역시 야고보서의 내용과 통하는 내용이다. 즉,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서 '아멘'하는 순간 교회 공동체가 '당신은 구원받은 백성입니다.'라고 인정한다. 그 인정을 받아 들임으로 나에게 있는 일말의 의심을 거두어 내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 의심없는 믿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일하시고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열매를 보고 나의 구원을 확인받게 된다. 이것이 또 다른 열매의 원동력이 된다 (물론 나는 예수님께 붙어 있는 일만 하면 되지만).

교회를 수십년 다니면서도 붙들고 있는 것은 '난 구원 받았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정도만 말 할 수 있다면 정말 심각하게 스스로의 믿음을 점검해 봐야 한다. 우리는 죽어 봐야 어디에 갈 지 안다. 내가 천국간다고 확신한다 해서 지옥에 갈 사람이 천국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결국 당신을 통해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열매를 볼 수 있어야 그제서야 진실로 구원에 대한 확신을 할 수 있게 되며, 그 구원의 확신은 평생을 통하여 점검하고 점검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예수님께서 일하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영적 상태를 유지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삶은 온갖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으면서 가증스럽게도 천국에 가리라는 확신해 차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굳게 붙들고 있는 것이 예정론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확신하면 안된다. 그게 가능하다고 하면 바울과 야고보 요한 등등 신약 기자들이 그렇게 힘들여서 어려운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펌프에 마중물의 역할을 하는 것이 처음 믿을 때의 '아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마중물이라는 표현이 이단 종파에서 사용하는 표현이기는 한데, 나는 그냥 마중물의 의미 그대로 여기에서 사용하고 싶다.) 그 이후로는 스스로 솟아나는 물을 이용해서 물을 끌어올리게 된다. 그런데 아무리 마중물을 넣어도 그 밑에 샘이 없다면 물은 연속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마중물로 넣었던 물만 겨우 나왔는데 그것을 보고 구원 받았다고 믿고 방탕하게 산다면 정말 불행한 사람이다. 물론 그 중 구원 받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나는 여기에서 '확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 다만 당신이 구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그 정도의 신앙에만 머무른다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해 일하실 수 없으며, 결국 당신은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고 천국에 가게 될 것이다. 그게 인생의 목표라면 우리 모두 생명책을 열람하지 않은 상황에서 '당신 구원 받은 거 확실해?'라고 나는 묻고 싶다.

믿음의 길은 결코 쉽지 않다. 나를 통해 일하시는 예수님을 민감하게 인식 할 수 있어야 하며, 그 영적 민감함으로 알게되는 열매를 통해 내 믿음을 성장시키고 더욱 예수님이 일하시기에 좋은 영적 상태를 만들기 위해 순간 순간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 왜 바울이 우리의 삶을 경주에 비유하며, 전쟁터의 병사에 비유했는 지에 대한 묵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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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5. 14. 09:07

긍정의 힘 그리고 간증 Opinion2011. 5. 14. 09:07

어느 간증집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로 시작해 보겠다.

중국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준비를 시작했지요. 그러나 당장 비행기표를 살 돈도 없었습니다. 표를 사야하는 전날까지도 어떻게 그 돈을 구할 지 막막했습니다. 그래서 무릎꿇고 매달렸습니다.
"주여, 제게 중국을 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비행기표도 살 수가 없으니 어이해야 합니까. 주여 부르셨사오니 보내 주시옵소서."
그런데 갑자기 제가 LA방문때에 잠깐 같이 식사하며 인사 정도나 나누었던 사업가 분이 기도 중에 저에게 헌금하라는 음성을 들었다며 봉투를 건내주지 않겠습니까? 열어 보니 정확히 비행기표를 구하는 데에 필요한 그 액수만큼의 돈이 들어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필자가 지어낸 어딘가에 있을 법한 이야기)

그냥 여기 저기 읽어 본 간증집에 들어있는 내용을 떠올리며 만들어 본 이야기이다. 분명 어딘가에 아주 비슷한 이야기가 있을텐데 찾지도 못하겠고, 찾는다 해도 비슷한 이야기는 수도 없기 때문에 특별히 찾아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기대되는 반응이 무었일까? 기대되는 반응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살펴보기로 하고 적절한, 건강한 반응이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해 보자. 간단하다.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고, 사랑으로 우리의 삶의 순간 순간을 보살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정도가 적당하겠다. 이 이야기의 요점은 (비록 내가 지어낸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감사이다. 그런데 보통은 약간 희한한 시각으로 이 이야기를 본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이리 저리 양념치고 치장해서 언듯 위에서 말한 것과 비슷한 적용처럼 보이나 본질상 전혀 다른 적용을 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그걸 에누리 없이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기도를 하면 돈도 생깁니다."
"저 돈을 준 사업가를 보십시오. 열심히 믿음생활을 하면 저렇게 돈을 많이 벌어서 선교사를 돕는 귀한 일에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은 역사하시는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고 기도의 효용성을 향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은 기도를 수단으로 이용한다. 또는 하나님께서 들어 사용하신 그 손을 본다. 사업가의 손, 부자의 손, 의사의 손, 힘 있는 자의 손... 그 손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한다.

이런 설교 누구든 한번은 들어보았으리라 생각한다.

여러분들도 부자가 되기 위해 기도하십시오. 부자가 되는 것이 죄는 아닙니다. 부자가 되어 수 많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에 크게 쓰임받으십시오.

틀린 구석은 없다. 그러나 의도가 무엇인지 그 저의가 의심스럽다. 사실상 '저의'도 없다는 것이 더 문제긴 하다. 설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문제점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의랄 것도 없다. 그런데 이 말은 애매한 부분을 내포하고 있다. 즉, 돈이 있어야 하나님의 사업이 된다는 식의 논리를 함축하고 있다. 물론 성경에 많은 부자가 나온다. 구약의 신앙의 위인들은 선지자를 제외하면 대부분 부자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엄청난 부자들도 많이 나온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부자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아리마대 요셉이나 삭개오 등등 극소수의 부자만 나온다. 야고보서에서 나타나는 부정적인 이미지의 부자에 대해서 상고해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사도행전의 주인공들 중 부자들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은 알 필요가 있다. 더 좋은 예수님이 있기 때문에 물질적인 부분에서는 자유했던 사람들이다. 그 어느 곳에서도 돈이 없어서 사역을 감당하기 힘들었다는 이야기는 찾을 수 없다. 물론 바울이 연보에 대해 말하면서 당시 이스라엘에 있던 성도들의 쓸 것 마련을 위해 권고한 부분이 있고, 바울이 로마에서 구류생활을 할 때에 빌립보교회의 원조로 생활을 하였고 그에 대한 감사의 편지가 있기는 하나, 그 말씀을 통해 역시 돈이 사역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해석일 뿐이다.

역사는 하나님이 하신다. 돈이 필요한가?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사역을 하는 데에 돈이 필요한가? 이건희 회장이 희귀한 차를 한대 필요로 한다고 하자. 그것을 사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런데 돈이 중요한 의사결정의 고려사항인가? 그 차가 한 100조원정도 하는 차라면 그럴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실재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이 경우 중요한 고려사항은 이건희의 '의지'이다. 돈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결국 돈이 수단으로 사용되기는 하겠지만, 그 돈이 중심 고려사항이 될 수는 없다. 하물며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 돈이 중요한가?

그러면 부자가 있어야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가? 서울 어느 교회에서 정계에 법조계에 의료계에 신앙인이 많아야 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독려했던 적이 있다. '복'받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와 한국인 특유의 복받은 자라면 의례 기대되는 직업군이 맞아 들어가면서 상당히 많은 사람을 '만족'시켰던 논리였었다. 이 가운데에는 바울이 준비된 사람이었기에 그렇게 크게 쓰임 받았다는 말이 논거로 사용된다. 모세가 80년간 훈련받았기에 한 민족을 구원하였다는 사실도 이야기 한다. 다 옳은 이야기이다. 그런데 '준비'가 중요한가? 아니면 하나님의 '부르심'이 중요한가? 뭔가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요즈음 처럼 말씀이 흔한 세대가 없는 듯 하다. 간증도 참으로 많다. 우리 나라가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면서 수많은 간증집이 나온다. 선교 현장에서 드라마틱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는다. 그런데 그런 간증집을 통해 받은 은혜를 나누는 사람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면서 괴리감을 느낀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그들이 경험한 기적을 보면서 그런 기적을 나도 경험 할 수 있다는 건강한 기대와 소망까지는 좋은데 그들의 낮아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좀 더 잔인하게 표현해 보겠다. 그들의 낮아짐을 통해 이루어졌던 그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 낮아짐을 수단으로 사용할 생각은 있으나, 주님을 위해 낮아지려는 사람은 없다. 선교사들의 기적적인 체험을 내 것으로 하기 위해 그들의 삶의 모습을 수단으로 사용하려고만 했지 그들처럼 살려는 생각까지 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이야기의 중심에 돈이 모습을 숨기고 도사리고 있는 경우를 수도 없이 보아 왔다.

이제서야 이 글의 제목으로 돌아온다. '긍정의 힘', 어느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요즘 처럼 '긍정'이라는 단어가 교회에서 많이 들리는 시대가 있었나 궁금하다. '말의 권세,' '입의 파수꾼,' '기도의 힘'등등과 결합되면서 내가 말로 선언하고 기도로 나아갈 때에 그 대로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로 교회가 떠들썩 하다. 그런데 한 20년 전만 해도 내 기억으로는 '순종'이란 말을 지긋지긋하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요즘은 이 순종이란 말을 하기가 목회자나 신도나 민망하다. 순종은 하나님께 하는 것인데 우리나라는 목사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보니 목사 입장에서도 말하기가 껄끄럽고, 신도 입장에서도 그런 굴욕적인 관계를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서 '순종'이라는 말이 사라진 지 오래다. (시끄러운 교회들이 좀 많은가. 여자문제 돈문제... 목사들 입장에서 그런 자기에게 순종하라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성경에 긍정(positive, affirmative)라는 단어는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보통 긍정의 힘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이 열거하는 성경상의 사건들에는 '충성,' '순종'등의 단어가 사용된다. 심지어 선교현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기적들까지도 선교사들의 긍정적인 마인드가 이루어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모두가 고개를 내 저을 때에 고난의 현장에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나아갔을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는 것이다. 분명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앞의 문장에서 '긍정'의 자리에 '순종'을 집어 넣어야 올바른 문장이 된다. 때로는 목숨까지 도외시하면서 일하고 있는 선교사들의 삶을 긍정적인 마인드에 의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을 모독하는 것이고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그저 나를 따라 다니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대신 해 주시는 하인 정도로 끌어내리는 일이다.

그러면 긍정과 순종 충성과는 무엇이 다른가? 순종과 충성은 대상이 정해져 있다.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충성이다. 그런데 긍정은 나에게 하는 것이다. 나에게 안심하라고 다 잘될 거라고 말하는 나의 속삭임이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낮은 곳으로 가라 명하신다. 고난을 즐거이 받으라고 명하신다. 심지어 아들을 바치라고도 하신다. 우리의 죽음을 필요로 하실 때도 있다. 거기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 진다. 그러나 긍정적인 사람은 '에이 아냐. 다 잘 될거야.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고난을 허락하실 리가 없어. 주여 믿사오니 이 고난을 내게서 치워 주시옵소서. 믿습니다.'라고 한다. 긍정적인 사람에게 있어 고난도 겸하여 받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마가복음 10:30)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 둘은 비슷한 듯 하면서도 너무 다른 말이고, 궁극적으로 봤을 때에 긍정의 힘을 믿는 믿음은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긍정의 힘을 믿는 것은 교인이 점치러 다니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고 생각한다.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마가복음 10:30)
다시 간증으로 돌아가 보자. 바울의 아주 조심스런 앞뒤 다 떼어버린 소심한 간증이나 (고린도후서 12:1-5) 진리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말하지 않겠다는 바울의 선언을 다시 상고해 보지 않는다고 해도 (고린도전서 2:1-2) 간증은 위험하다. 물론 때로 간증이 활력을 주는 경우가 있다. 특히나 그 말씀이 내게 필요한 경우에는 더더욱 도움이 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간증의 전면적인 거부가 아니다. 간증의 위험성도 알아 조심하라는 것이다. 내가 길의 동편에 있다가 서쪽을 향해 걸어서 길을 찾았다. 그 기쁜 마음을 길의 서편에 있는 사람에게 전하였더니 그 사람이 서쪽으로 힘차게 달려갔다. 그 사람은 어찌 되겠는가? 아주 잘 맞는 예는 아닐 지 모르겠으나, 의미는 어느 정도 통하리라고 본다. 나에게는 진리로 가는 통로가 되었던 그 깨달음이 다른 사람에게는 망하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고린도후서 12:1-5)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린도전서 2:1-2)
간증과 같이 일차 가공된 것은 이해하기 쉽기는 하나 진리와 멀어져 있을 가능성이 있고, 또는 진리의 반대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간증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 간증자의 삶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선에서 끝난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으나, 보통은 그 간증자의 삶을 따라감으로써 같은 경험을 하기를 기대하는 엉뚱한 적용이 훨씬 많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긍정의 힘이라는 책이 나오고 그에 따라 여러 아류들이 출판되면서 한국 교회는 긍정의 힘에 취해 휘청거리고 있다. 한낱 명상 정도로 신앙생활이 폄하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되기도 한다. 예라 하시고 아니라 하지 않으신 예수님이 마치 긍정적이어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비추어 지는 것이 안타깝고 어처구니 없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고린도후서 1:19)
마지막으로, 진리는 예수님 그 분 자체임을 말하고 이 글을 끝내야겠다. 어렵게 진리를 찾을 필요가 없다. 오직 예수님 그 분이 진리이시며, 오직 한 길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순종과 충성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알아야 한다. 겨우 마인드 콘트롤 정도를 하나님께서 기대하신다고 한다면 예수님을 그저 신기루로 생각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예수님의 실존을 믿는다면 그 분을 신뢰하고 순종함으로 충성된 종이 되어 그 분의 삶을 실천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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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