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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5. 1. 11:04

나의 주 예수님 Bible Stories2012. 5. 1. 11:04

예수님은 나에게 있어서 누구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성경은 ‘나의 주가 되어야 한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나의 주’로 인정하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며 올바른 신앙고백이다. 그런데 현대 기독교인 중에 이 말의 참뜻을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잦다. (물론 나도 발버둥만 치고 있다.) 도마는 예수님을 주로 그리고 하나님으로 고백하였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한복음 20:28 )


그러면 예수님을 나의 주로 삼는 것을 성경은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요한은 포도나무와 그의 가지로 표현하고 있고, 바울은 머리와 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 요한복음 15:5)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에베소서 1:20-23)


따라서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겠다는 뜻은 그분의 뜻대로 살겠다는 뜻이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이 뜻이 과연 무엇일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바울의 고백과 성경의 묘사를 통해 볼 때에 나의 삶에 대한 주권을 예수님께 이양하고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삶이 바로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는 삶이라 생각된다. 당신은 과연 그렇게 살고 있나.


관점을 조금 바꿔서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는 삶은 어떻게 실현 가능한가에 대해 생각해보자. 궁극적으로 주를 사랑함으로 주와 하나가 되면 그것이 바로 주를 나의 주로 인정하는 삶이다. 그러나 나 같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비현실적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체가 머리의 뜻을 따르는 것은 머리를 사랑해서라기보다 머리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예수님을 나의 머리로 생각할 때에 예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머리로 삼는 삶이 아닐까 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함에 대해서 많은 곳에서 진술하고 있다. 개역개정판에 171번이나 반복되는 단어가 바로 경외함이다. 이는 ‘경외’라는 단어로 찾았을 때의 이야기이고 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yare’로 찾으면 훨씬 많은 곳에서 그 단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신약까지 더한다면 그 숫자는 또 훨씬 늘어나게 된다.


주의 깊게 성경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경외함은 성경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영역판에서 사용되는 경외의 해당하는 단어인 fear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함의에 비추어 볼 때 놀랍다. 심지어 하나님을 경외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동의어로 사용될 때도 있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 (신명기 5:29)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신명기 30:16)


위의 두 성경 구절을 보면 같은 내용에 대해서 한 곳에서는 경외를 (5:29) 다른 한 곳에서는 사랑을 (30:16)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볼 때에 하나님을 사랑함이 하나님을 경외함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발이 잘릴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하자. 그리고 오른손이 새끼 손가락 하나만 희생하면 발을 살릴 수 있다고 하자. 그러면 손의 입장에서 발을 사랑해서 새끼손가락을 희생하지는 않을지언정 머리의 명령을 순종함으로 발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가능하다. , 머리를 경외함으로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결국 발에 대한 손의 사랑 표현일 수 있다. 이렇게 보자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결국 하나님을 사랑함과 같다고 하겠다.


따라서 나는 예수님을 나의 주로 인정하는 삶은 예수님을 머리로 인정하는 삶이요, 그 삶은 예수님의 명령을 경외함으로 따르는 삶이라고 하고 싶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에, 당신은 예수님을 주로 삼고 살고 있는가. 나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점점 하나님을 무시하고 나의 도구 정도로 하나님을 끌어내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강대상에서 흘러나오는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를 향해 선포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들을 향해 그들의 마음을 만져주는 정도의 설교밖에 되지 않는 경우를 자주 본다. 차라리 성도들의 처지를 대변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는 설교라면 그나마 낫겠다 하겠으나, 그 안에 하나님은 화자로도 청자로도 존재하지 않고 그저 성도를 청자로 삼아 목사가 그들의 기분을 좋게 해 주는 정도의 설교만 있다는 생각을 금하지 못하겠다.


근래 십계명에 관한 설교를 들었다. 그 중 제4계명인 안식일에 관한 설교였는데, 목사님은 그 설교를 하기 싫었다는 말로 설교를 시작했었다. 이유는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이어서였는데, , 주일날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 성도가 많은 상태에서 그 설교를 하기가 껄끄러웠다는 말이었고, 심지어 어쩔 수 없이 주일날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로하여 주시고 자유로울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로 설교가 끝났다. 물론 나는 그 목사님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심정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러면 안 된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심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믿음으로 하여 다시 순종하는 삶이 반복되는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경건 훈련이요 신앙 훈련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핑계를 대면 안 된다. 물론 성경에서는 믿음이 약한 자 (경제적 약자로 상징된)에 대한 배려가 곳곳에 묻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명령을 변개할 수는 없다. 나는 말씀을 말씀 그대로 진정으로 선포한다면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위로가 필요한 자들을 직접 위로하시리라 믿는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말씀에 대한 선포일 뿐이다. 말씀에 내 의도가 들어갈 때에 말씀에서 능력이 사라지고 칼날이 무뎌져서 혼과 영과 육을 쪼개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말씀을 그대로 진정으로 전달한다면 말씀 그 자체가 스스로 일하기 시작하시리라 믿는다. (모두 알다시피 성경에서 말씀은 대체로 예수님을 뜻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브리서 4:12)


우리는 십자가 군병으로서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그리고 그렇게 명령에 순종할 때에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책임져 주신다. 아무리 내 상황이 그렇지 않더라도 명령에 의지하여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 나머지를 다 책임져 주시는 그 감격스러운 경험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되어야 한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후서 2:3-4)


주를 나의 주로 나의 머리로 삼는 삶이 절대 쉽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게 살 때에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이 해결됨을 또한 믿는다. 많은 경우 우리가 어렵다 힘들다 하는 문제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명령에 우선하여 내 자아를 인정해 달라고 하는 데에 그 핵심이 있는 경우가 많음을 본다. 미움 시기 질투 게으름 등등의 모든 문제는 그저 순종함으로 예외 없이 해결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아주 재미있는 성경 구절 하나만 살펴보고 이 글을 끝내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16-18)


적어도 내 입장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명령에 의지해서 할 수 있다. 하고 하지 않고는 차후 문제이고, 가능성의 관점에서만 말하자면 명령으로 가능할 법한 것들이다. 그런데 기뻐하라는 명령은 이상하다. 명령으로 기뻐하는 것이 가능하긴 한가? 그런데 성경은 가능하다고 하며, 그것을 명령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명령 범위는 우리의 상상보다 더 넓다. 좁게는 우리의 수족을 움직이는 문제로 시작하여 넓게는 감정의 문제까지 명령하신다. 명령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니 얼마나 다행인가. 당신이 순종하기만 하면 절대 될 것 같지 않던 문제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고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 그것이 주를 주로 삼는 사람이 누리는 복이며 기적이다. 그리고 그것을 명령으로 하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는 단순히 순종만 하면, 절대 될 것 같지 않은 감정의 문제 즉, 우울증 분노 시기 등등의 문제를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여 직접 해결해 주신다. 위의 딤후 2:3-4를 다시 한번 상고해 보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립보서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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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2. 4. 28. 12:11

은사주의의 문제점과 대처방법 Opinion2012. 4. 28. 12:11

은사주의의 장단점에 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우선 은사주의 자체를 틀렸다고 할 수 없다. 은사주의도 분명 신앙의 한 형태이다. 크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단 하나로 규정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다른 종교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같은 신앙고백 아래에서 다양한 형태가 존재함은 인정해야 한다. 그러함에도  나는 은사주의가 불편하고 심지어는 감정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감정적이라고 한 이유는 지적으로 그것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하나님을 알라'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의 주된 주제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따로 관련 구절들을 언급하지 않겠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알 것인가. 그 방법은 수도 없이 많다. 모든 경건훈련이 결국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으며, 우리의 신앙생활 자체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그런 입장에서 은사주의는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한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가 없어야 하겠는데, 인간이라는 연약함과 은사주의가 만날 때에 부정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경우를 자주 보아 왔다.


은사주의란 무엇인가. 신학적인 논의는 이 글에서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간단히 말해 은사주의란 '성령의 은사를 추구함'이라 하겠다. 물론 우리가 은사주의라고 할 때엔 '심하게 추구함'이라는 의미를 함축하지만, 이 글에서는 단순하게 '성령의 은사를 추구함' 정도로 생각하자. 사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은사주의는 '지적'으로도 틀렸다. 왜냐하면, 은사란 Gift 즉, 선물이다. 이것은 추구해야 할 대상도 요구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다. 선물이란 주고 싶은 사람이 주고 싶은 때에, 주고 싶은 것을 주는 것이다. 내가 달라고 징징거려서 받는 것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선물이라고 하겠나. 그러나 우선 가능하다고 하자. 은사주의의 방법론을 통해서도 좋은 열매가 맺혀지기도 하고, 그들의 뜨거움이 부럽기도 하므로 틀렸다는 말은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 문제점만 살펴보고 문제를 완화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자. (고전 12:31의 사모하는 것과 달라고 떼쓰는 것은 분명 다르지만 그냥 비슷하다고 넘어가자. 이것을 제외하더라도 은사주의는 많은 문제점을 내포한다.)


은사주의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감각되는 경험에 치중한다. 그 자체로 문제가 있다. 그런 경험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고 사탄을 통해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각을 통한 경험은 많은 경우에 이성을 속이며, 진리와 관계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아주 올바른 집회에서조차도 감정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사탄도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감정의 움직임을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사탄의 간섭에 농락당하기 쉬워지므로 긴장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은사주의자들은 오히려 감정의 움직임을 하나님에 대한 체험으로 생각하여 거기에 목표를 두는 경우가 많고, 따라서 사탄에 농락당할 높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그러한 감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한낱 부적 정도로 치부해 버린다는 사실이다. 은사주의자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해 봐 하나님께서 만나주셔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이뤄주셔 (능력 있는 기도하는 방법).' 물론 그럴 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방법으로 만나 주실 때에만, 그 방법으로 말씀하실 때에만, 그 방법으로 이뤄 주시기로 작정하신 때에만 그렇게 될 수 있다. 즉, 우리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로 작정하셔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인격 없는 어떤 부적처럼 생각하여 그 부적이 효험있게 만드는 방법을 추구하는 경향을 나는 수도 없이 보아왔다. 그들은 입버릇처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하나님을 진정 인격체로 대우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만나는 데에 특별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틀렸다. 하나님을 만나는 특별한 방법은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며, 그 길을 걷는 것은 보혜사 성령의 도움으로 가능하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그 어떤 방법으로도 만날 수 있다. 다만 하나님께서 만나시고자 하실 때에 그것이 가능하다. 즉, 만남의 주체는 하나님이시지 결코 '내'가 될 수 없다. 이 부분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앞에서 그 길은 예수님이시며 성령님의 도움으로 걸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분명 그 길은 은사로도 걸을 수 있다. 은사란 바로 성령의 선물이고, 그 선물을 주는 이유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 공동체/개인의 신앙성장 등등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이유가 바로 은사주의를 틀렸다고 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성령께서 은사를 통해 나를 견인하기로 작정하셨을 때에 그 은사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될 뿐, '나는 이번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기로 작정했어. 같이 기도해줘. 나는 방언을 기필코 받아서 주의 살아 역사 하심을 체험할 거야.'라는 식의 접근은 주객이 전도된 이야기일 뿐이다.


다른 문제로, 어쩌면 이것이 더 큰 문제일 수도 있는데,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좋으신 하나님'으로만 본다. 물론 하나님은 선하시고 좋으신 분이다. 그런데 그분은 우리에게 징계하시기도 하시는 분이다. 선물만 주시는 산타클로스가 아니다. 회초리를 들고 훈련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이런 부분을 철저히 외면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죄책에 빠지게 하는 모든 것들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복되게 하십니다.' 틀린 부분이 조금도 없다. 그러나 이렇다손 치더라도 회개가 우리 삶에 빠질 수는 없다. 애통하는 마음과 죄책에 빠진 마음이 명백하고 쉽게 구분된다고 생각하는가? 적어도 나는 그것을 쉽게 구분하지 못한다. 다만 결국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통해 죄책까지도 회개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뿐이다. 그 죄책이 나를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시키고 가룟 유다처럼 자살로 이끈다면 그제야 그것이 사탄의 역사였다고 확신할 뿐이다. 우리의 제한된 식견으로 죄책과 애통하는 마음을 정확히 구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짧게 말해서 은사주의자들에게 회개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은 항상 더 받고 더 감동하기 위해 준비된 자세로 어떤 '방법'들을 시행한다. 모든 어려움을 불신앙의 문제로 치부하는 경향 또한 이 문제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실상은 감각적 체험에 불과한)이 있다면 우리 삶에 어려움이란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그리고 신앙생활의 어려움을 격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들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오히려 죄책에 빠지게 하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수준 낮은 신앙을 가진 자로 매도한다.


그리고 은사주의자들은 흔히 이 땅에서의 복된 삶을 추구한다. 그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에 '믿음 없는 자'로 간주하여 더 열심히 하라고 한다. 다른 글에서 이 문제를 별개로 다루고 싶은데, 나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어떤 사람을 이 땅에서도 복되게 쓰실 수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훈련장이 편하고 좋기만 할 것이라는 상상은 뭔가 이상하다. 훈련은 힘든 것이 당연하다. 어차피 우리는 천국에서 어마어마한 복을 누릴 텐데, 한순간에 불과한 우리 인생 중에 (시 90:4) 약간의 물질적 축복의 있고 없음이 그리 중요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이 어떤 것을 충족시키기만 하면 흔들어 넘치도록 복을 받을 것으로 생각한다. (눅 6:38) 어쨌든 그들은 눈에 보이는 삶을 믿음의 척도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딱 잘라서 말씀이다. 결국, 나를 변화시키는 통로는 말씀이다. 그리고 말씀은 가장 객관적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한 하나님을 알아나가는 방법이다. 우리는 보통 감각적인 체험을 체험으로 인지하는데, 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감각적인 체험보다 말씀을 통한 체험이 더 많았다. 이 부분은 표현하기가 참 어렵다. 그냥 깨달음이라고 할 수는 없다. 깨달음과 더불어 즉각적인 변화를 동반한다. 나는 내가 양육하는 사람들을 말씀을 보도록 강권하는 편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든 말씀을 읽기로 작정하고 읽기 시작한 사람에게는 예외 없이 변화가 있었다. 그 말씀이 은혜로웠던 것도 아니고 이해를 하면서 읽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말씀을 보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사람은 변화를 시작한다.


따라서 은사주의를 추구한다손 치더라도 그 체험을 말씀으로 재조명하는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 즉, 그러한 체험을 내 마음에 쌓을 때에 체험할 당시의 그 감각을 쌓지 말고 그 감각적인 체험을 말씀으로 재조명하여 말씀으로 쌓아 두어야 한다. 어려운 말이 될 수도 있는데, 우리의 경건 훈련은 결국 모두 말씀으로 재조명해야 한다. 말씀으로 재조명하는 과정이야말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는 과정이다. 감각적인 체험은 만난 그 존재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며, 그분의 의지에 의해 만났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 그런데 그 만남이 말씀으로 재조명되면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 허락된 만남이 되며, '그 체험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성경에 적혀있는 말씀을 통해 만나주시리라고 하셨던 약속의 확증'이 된다. 그것은 확실하며 또한 인격적인 만남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해서 살고 있다. 따라서 모든 경건 훈련은 하나님의 약속 속에서 재해석되어야 하며,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다시 한번 찬양하고 그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체험은 극적일 수도 있고, 지적일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떤 경우이든 간에 그것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으로서 흔들림 없이 나의 신앙의 바탕이 되려면 결국 그 체험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됨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확신이 그냥 자기확신에 불과하다면 앞에서 언급했던 은사주의의 문제점들을 내포하게 된다. 사탄의 인도함을 따라가기도 하며, 특별한 체험을 추구하게 되기도 하고, 신앙생활 중 겪을 수 있는 문제를 믿음이 없어서 생기는 문제로 매도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몰인격적인 부적정도로 치부하기도 하며, 눈에 보이는 복만 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확신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면 그때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은 물론 공동체에 유익이 되는 객관적인 신앙고백에 되며, 이런 고백은 말씀으로 재조명했을 때에 가능해진다. 나의 하나님과의 만남을 하나님이 증명해 주실 때에, 그 체험은 진정한 체험이 되고 능력 있는 체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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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2. 3. 29. 09:49

성경연구에 있어서 교리의 득과 실 Opinion2012. 3. 29. 09:49

교리는 분명히 중요하다. 신앙고백의 근간이 되기도 하며, 이단을 구분하기 위한 표지가 되기도 한다. 과거 성경이 귀하고 대다수 성도가 문맹이었을 당시에는 신앙의 기본이 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옳바른 교리를 세우고 배우며, 올바른 신조를 통해 신앙고백을 하는 일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교리에 너무 심취하는 것, 또는 성경보다 교리를 우선하는 경향은 경계해야 한다. 굳이 교의신학에서 성경신학으로 그리고 선교신학으로 변해가는 신학의 흐름을 언급하며 어려운 소리를 늘어놓지 않아도 그 이유는 분명하다.

성경이 더 중요하다라고 하면 일면 유치해 보인다. 너무 당연한 소리로 논리를 증명하려고 하는 행위는 일면 우물물에 독치기의 오류에 빠진 듯이 보인다. 그러나 나는 그 세련되지 못한 주장을 여기에서 할 수 밖에 없다.

교리만 확실히 알고 있으면 성경은 필요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만난 적이 없다. 왜냐하면 너무 극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교리가 도움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교리를 통해 성경을 이해 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미묘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둘다 맞는 이야기이긴 하다. 그러나 나는 후자, 즉, 교리를 통해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라는 주장에 오류가 있음을 이야기 하고 싶다. 교리로 시작한 사람이 성경으로 항상 가지는 않더라는 데에 그 오류가 있다. 성경으로 시작하여 교리의 도움을 받는 것은 상대적으로 그 교리가 그를 성경에서 멀어지게 하지 않는 반면, 교리로 시작하여 성경으로 확증하려는 시도는 종종 교리로 시작하여 교리로 끝나게 하기도 한다.

그러면 교리만 가지고는 신앙생활이 되지 않는가? 우리는 현대를 사니까 과거 성경이 귀했던,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은 무시하도록 하자. 그렇다면, 원전인 성경을 제쳐두고 그에 대한 해석본인 교리를 통해서'만' 신앙생활이 가능한 지에 대한 논의는 적어도 내 상식으로는 의미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한 하나님의 자취를 찾는 방법의 1차 매뉴얼에 집중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나는 사람의 가공이 한번이라도 더 들어간 매뉴얼은 믿지 못하겠다. 참고는 하겠지만, 그것을 이용해 길을 떠날 자신은 없다. 더구나 평생에 걸친 여정인데 말이다.

늦게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직분을 받고, 더구나 진지하게 신앙에 대해 접근하는 사람들 중에 지난한 성경을 통한 길찾기를 포기하고 교리를 통한 길찾기에 집중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아왔다. 물론 그들는 적어도 길을 찾기 원하는 진지한 신자였다. 성경을 통한 길고 긴 여정에 질려 지름길을 찾고자 하는 그들의 그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며, 나는 그 노력을 응원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시도의 위험성을 여기에서 짚지 않을 수 없다. 먼저 교리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논리'에 바탕을 둔다. 나의 신앙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를 틀렸다 할 수 없다. 그러나 논리는 기본적으로 인본주의적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논리로 당신을 계시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계시는 그 자체로 '진리'이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 당신은 인과율에서 벗어나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논리 위에 계신다.

그리고 그 어떤 교리도 성경 전체를 무리없이 설명하지는 못한다. 이 부분은 중요하면서도 미묘한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모순 없는 교리는 없다는 말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개혁교회의 전통을 따르는 사람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사상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래야 할 필요도 못 느끼겠다. 그저 전적타락과 무조건적 선택에 동의하고 예정론에 동의 할 뿐이다. 그렇다고 예지론에 반대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다만 성경이 주장하는 하나님을 예정론이 예지론보다 더 잘 설명한다고 생각 할 뿐이다. 다시 말해, 내가 보는 교리의 역사는 오류를 줄이기 위한 역사였을 뿐이지 오류를 없애기 위한 역사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논리로 설명되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를 말하면 너무 현학적인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나, 어쨌든 어떤 논리 체계도 완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수학적으로도 증명된 일이다. 즉, 겨우 인간도 논리로 설명이 되지 않는데 하물며 크신 하나님임에야 그것이 가능 할 리 없다.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에게서는 '나'가 드러나기 쉽고, '나'가 드러나는 사람은 무익하며 무력한 나를위해 값없이 당신을 드린 예수님의 은혜와 그로 인한 전적인 구원에 동의하기 쉽지 않다. 나에게 '구원받을 만한 것'이 있어서 구원받았다고 주장하는 솔직한 사람부터, 은혜로 구원받기는 했지만 그 이후로는 '구원받을 만한 상태'를 유지해야 다시 버림받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절대사랑을 폄하하는 사람까지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를 드러내기를 원한다. 내가 구원에 어떤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런 논리의 함정, 다시 말해 '나'의 존재의의가 드러나는 그 달콤한 유혹에 쉽게 빠지고 헤어나오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 왔다. 이런 경우들을 2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수백년 묵은 논쟁에 매몰되는 경우를 봤다. 매주 인터넷을 통해 논쟁거리를 준비해서 만날 때 마다 질문하는 부류에 해당하는데, 그들의 주장을 듣고 있노라면 대체 그런 논쟁이 우리 신앙에 뭔 소용이 있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이런 사람은 조금 나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수년째 같은 논쟁을 반복하기도 하는데, 이런 사람은 계속 공부하지도 않는다. 그냥 한 번 들은 논쟁거리를 자신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데에 반복적으로 사용 할 뿐이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당신 생각 다 맞으니 하나님의 아들답게 사는 데에나 집중하세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그들은 그런 논리로 나를 고민에 빠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나는 논리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믿는 것이기 때문에 논리상 문제가 있는 신앙고백이 그렇게 낯설지도 불편하지도 않다. 그리고 솔직히 아직까지는 그런 논리에 논리로도 밀려 본 일이 없다. 설령 불완전한 이해일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 즉, 하나님으로 시작한 '신앙고백'은 논리를 위한 논리에 밀릴 수 없다.

그리고 수백년묵은 논쟁은 그 자체가 '나는 믿음의 문제에요'라고 강변하는 것과 다름 없다. 결단이 필요한 문제일 뿐이다. 그런 문제에 답변하려고 정력을 소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만 논지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어떤 것을 선택할 지 결정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마저도 최소한으로 하기를 권한다.

다음 부류로, 앞에서 "교리만 확실히 알고 있으면 성경은 필요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만난 적이 없다"라고 했었는데 사실 그런 부류를 본 일이 있고, 내용을 "예수님과 구원(에 관한 교리)만 알고 있으면 성경은 필요없다"라고 바꾼다면, 이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은 상상외로 많다. 내 양육의 목표는 '성경 읽는 교인 만들기'이다. 그런데 나의 양육 역사는 참담한 실패의 연속이었다. 일시적으로 신약통독/성경통독에 성공하는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것이 습관화 되어 계속 읽기까지 성공한 예는 부끄럽게도 하나도 없다. 나는 왜 그게 안되는 지가 궁금했었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성경 읽는 것도 은사'라는 말도 한다. 거기에 동의한 적도 있다. 참담한 심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의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어떻게 아버지의 말씀을 읽어 듣는 것이 은사가 될 수 있나? 자기들의 읽지 않음에 대한 핑계로 '은사가 있는 사람만 읽는다'라 주장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이에 대한 해답을 그 다음 부류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서 찾았다. 그들은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부분과 논리적으로 설명 할 필요가 없는 부분으로 성경을 구분한다. (물론 이런 구분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 할 것이다. 그런데 역시 내용을 약간 바꾸면 '자기의 논리대로' 성경을 중요한 부분과 중요하지 않은 부분으로 나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런 사람은 많다. 그리고 그 중요한 부분은 예수와 그 분을 통한 구원 정도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외의 부분은 '중요하지 않다'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나면 그들 생각에 '나는 예수님은 아는데? 그러면 성경은 읽을 필요 없겠군 어차피 부차적인 문제들이니까'로 결론지어진다. 논쟁거리에 함몰되는 부류는 열심히 하려는데 열심이 잘못된 방향으로 발휘된 사람들이라면 이들은 아예 필요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이다. 즉, 이제껏 읽기 힘들어서 성경을 읽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던 사람들, 그래서 날 고민하게 만들었던 사람들, 심지어 내가 은사가 있어서 읽는다고 착각하게 했던 그 사람들이 실상은 읽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읽지 않는 부류였다.

이들은 어처구니 없게도 구원론 만큼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 질문하면 곧잘 대답도 한다. 그리고 심지어 겸손하기까지 하다. (반면 논쟁에 집중하는 부류들은 그렇게 겸손하지는 않다.) 그런데 성경은 읽지 않는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성경을 읽고 있나? 읽지 않는다면 왜 읽지 않는가? 읽을 필요가 절실한데도 읽지 않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바보다. 절실한 필요를 무시하고 있으니 바보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에겐 성경이 아직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은 거다.

두 부류 모두 하나님보다 내가, 성경보다 내 머리가 더 우선인 경우이다. 그리고 나는 교리 중심의 성경연구가 이런 함정을 어느 정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교리를 정립했던 사람들은 누구 하나 예외없이 성경을 줄줄이 꿰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성경을 통한 깨달음이 없이 올바른 교리를 만들거나 이해 할 수 있다고 꿈꾸지 않기를 바란다.

이 즈음해서 교리의 필요성도 짚어볼 필요가 있겠다. 교리는 앞에서도 말했다 시피 우리에게 있어서 일종의 경계석 역할을 한다. 우리가 모든 문제를 다 스스로 답해야 한다면 그건 너무 가혹하고 힘든 일이다. 중요한 것들 이외에는 남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그런 경우 내가 속한 교단에서 인정하는 교리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물론 그 교리의 진의를 파악하는 데에는 성경을 통한 도움이 필요하긴 하나 어쨌든 비교적 손쉽게 그리고 안전하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아주 미묘하게 사람을 괴롭히는 문제들이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있기 마련인데 그런 경우 교리가 많은 도움이 된다.

그리고 성경만을 이용해서 신앙훈련을 한 사람들은 어떤 개념을 간결하게 표현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도 그 경우에 해당하는데 뭔가 이야기 하려면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너무 많다. 그래서 말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교리의 도움을 받으면 간결하면서도 위험성이 적은 대답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너무 불성실하게 필요성을 짚었는데, 어쨌든 당신이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성경을 중심에 두고 교리도 무시하지 않기를 권한다. 가능하다면 교리 공부에 너무 집중하지 말기를 바란다. 교리 공부도 경건 훈련에 해당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거기에 그렇다고 답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성경을 통한 경건 훈련의 보조 수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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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