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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1. 14:23

행복에 대하여 Opinion2012. 12. 1. 14:23

우리는 자주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직접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말이 내포하는 성경적 또는 신앙적 의미와 다르게 사용되거나 이해되는 경우를 종종 보아 왔다. 더구나 근래에 들어서 이 말 때문에 힘들어하거나 반대로 이 말을 사용하여 남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여럿 보게 되어 이에 대해 글을 써 보려고 한다.


먼저 질문으로 시작해 보자.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신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대답은 당연히 '그렇다'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원하지 않는다.'라 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대대적인 수정이 불가피하다. 사랑의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 나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 정도만 열거해도 이런 성품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원하신다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고난을 겪는 사람이 적지 않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삶에서 전혀 하나님의 향기는 나지 않은 채 외적으로 너무 풍족한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원한다는 논리 아래 전혀 정돈되지 않는 삶을 버젓이 사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는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다르게 말한다면 그들은 풍족한 자신들의 삶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증거라고 생각하며, 따라서 그들은 경건 생활을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논리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이 옳지 못하게 살아서 그렇게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기도 한다. 자기의로 똘똘 뭉쳐있는 그들을 우리는 '악인'이라 부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리고 그들을 보면서 악인의 형통함에 대해 개탄했던 성경의 인물들이 생각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원한다는 논리에 동의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가당착에 빠지기 일쑤다. 더구나 우리 마음 안에는 그들이 악하게 보여도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솔직한 속내가 자리하고 있다.


나는 이 글에서 그들이 '악인'임을 증명하려는 생각은 없다. 그건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문제이니까. 나는 이 글에서 이 문제에 대해 혹시라도 갈등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어느 정도 정돈된 의견을 들려주고 싶다. 또는 이런 문제로 고민을 겪는 사람을 보면서 위로를 해주고 싶어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이 글을 쓰려고 한다. (말을 점잖게 하려다 보니 뭔가 모호한 문제 제기가 되어 버렸다.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해 보겠다. 요즘 큰 교회는 부자를 우대한다. 이건 너무 명확해서 아니라 하기 민망하다. 그리고 그 부자들을 단순히 우대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부자들이 의로워서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는 논리를 은연중 인정해준다.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설교도 상당히 많다. 더군다나 그 부자들 자신도 자신들이 의로움의 결과로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께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사랑을 받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다 보니 그런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쉽게 던지는 말로 상처를 주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교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복음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관해 혼란스러워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논리, 즉, 의로워서 부자가 되었다는 논리를 깨부수지도 못하고, 실상 깨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소외된 그들조차 부자들의 '부자가 되는 방법'을 따라 해서 그들 역시 부자가 되고 싶은 소망이 마음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이 문제에 관해 명확한 설명을 찾기도 어렵고 찾으려는 노력도 현대교회 안에는 별로 없다.)


질문을 하나만 더 해보자. 그러면 행복이란 무엇인가? 아니 어떤 상태일 때에 그리고 어떻게 되면 우리는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기게 될까?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이라면 이에 대한 세련된 대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계획, 방법대로 살 때에 우리는 행복해 질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의 원하는 바와 하나님의 원하는 바가 상치가 된다면 어떻게 되는가? 과연 당신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관해 관심이 있기는 한가? 삶이 전혀 정돈되지 않고 아름답지 못하게 살면서 하나님이 자기의 행복을 원하신다고 하는 그 사람은 아마 자기가 원하는 바를 하나님도 원하신다고 굳게 믿고 살지도 모른다.


어렵게 돌아가지 말고 직접 이야기를 해 보자. 우리는 '내가 원하는 상태,' '편안한 상태,' '내가 즐거운 상태' 등등에 해당하는 상태에 있을 때 행복하다고 이야기한다. 행복에 대한 이런 접근법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이 접근법은 내가 내 삶을 계획하고 내가 내 삶의 주인임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경우 하나님은 그저 조력자일 뿐, 우리가 하나님을 그리고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은 그저 공허한 거짓 외침이 될 뿐이다. 내가 주 (Lord)라고 부른다면 그분이 내 삶의 주인이 됨이 너무 당연한데도 앞의 접근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경우 전적으로 그가 삶의 주인이 되어 버린다. 그들이 즐겨 인용하는 성경 구절들을 열거하며 하나하나 그렇게 적용하면 안 된다 말하고 싶으나,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고 믿겠다. (내가 왜 이렇게 이야기했는지에 관하여 부연설명을 해야겠다. 내 주변에 빨리 삶이 여유로워진 사람이 있다. 물론 오랜 시간 동안 고생을 했던 사람인데, 최근에 들어서 다방면에서 여유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어려웠을 때의 버릇을 여전히 고치지 못했다는 데에 있는데, 예를 들어 탈세를 절세라 우기기, 속여서 싼값에 호텔 이용하기를 똑똑하게 돈 아끼기라 우기기 등을 아직도 즐기고 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야 나는 하나님께서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신다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해 보고 싶은 거 다 해 볼 거야. 늙으면 못하지 않겠냐? 그러니까 너도 젊을 때에 해 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봐. 하나님이 이 좋은 세상에서 좋은 것을 누리라고 주셨는데 즐기지 않으면 되겠냐?" 뭐 즐기고 싶어도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논의는 이 사람 앞에서 사치일 뿐이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을 배우듯이 천국 소망을 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경기에 최선을 다하는 경주자로서 삶이 돼야 하는 이 세상을 '좋은 것을 즐기라고 주신 좋은 세상'이라 생각하는 것도 애교다. 어쨌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고,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그렇지 않다고 장담하겠느냐고 나는 질문하고 싶다.)


더구나 내가 원하는 삶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과 정반대이다. 다음의 말씀을 살펴보자.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7:21-25)

내 속사람이 원하는 대로 사는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상태이고, 그 상태가 바로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있는 상태이다. 즉, 내 육신이 원하는 상태는 내 마음이 원하는 상태와 싸워야만 하는 정 반대의 삶이다. 나를 잘 정돈하여, 즉, 경건 훈련을 통하여 내가 원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되도록 만들어보자? 이런 식의 논의는 교회 안에서 흔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아마 많은 사람이 그 진위에 대해 고민해 본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도 전혀 맞지 않는 헛소리이다. 성경은 우리가 그럴 수 없다고 강력하게 이야기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5:17)

내 육체의 소욕은 아무리 노력해도 성령의 소욕을 거스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 세상에 육신으로 선한 사람은 없다. 따라서 육신을 경건 훈련을 통하여 성령의 소욕을 따르게, 즉, 선하게 만들 방법은 애초에 없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로마서 3:10)

오죽하면 사도바울은 날마다 죽어야 했겠는가? 이 문제에 관하여 생각해 보았는가? 한번 죽었으면 되었지 왜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어야 했을까? 내 삶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바꾸는 작업은 경험이 쌓인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훈련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며 많이 배운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날마다 죽는 방법 외에는 없다. 이 정도로 어려운 작업이 바로 삶의 주인을 내려놓는 일이다. 따라서 행복의 의미를 내가 기준이 되어 정한다면 그 행복은 절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과 같을 수 없고 비슷할 수조차 없다. 오히려 완전 정 반대의 삶이 될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렇게도 날마다 죽고, 자신을 쳐 복종케 한다고 이야기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31)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린도전서 9:27)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변화되기 전의 육신은 절대 훈련되거나 길들여 지지 않는다. 아무리 모세여도,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어도 바울과 같이 매일같이 육신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일을 반복하지 않는다면 다시금 개가 그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이 반복되는 죄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해도 아직도 '그래도 노력하면 점점 변화되지 않나? 그걸 위해 경건 훈련을 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질문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어차피 문제될 것이 없다면 나도 그 말을 인정해 주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든 저렇게 생각하든 경건 훈련은 필요하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강력하게 말하는 이유는 그런 접근이 '자기의'에 빠지기 쉽게 하며, 결과적으로 완전 다른 길로 가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건 훈련은 영의 유익을 위한 것이지 육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행복의 정의를 내가 하는 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복을 원하신다는 명제는 거짓이 되어버린다. 행복의 정의를 내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맡긴다면 물론 그 명제는 참이 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반대말 격인 고난에 관하여도 한번 생각해보자. 역시 고난의 정의를 인간이 하면 인간이 정의한 행복과 반대말이 된다. 그러나 고난의 정의를 하나님께서 하신다면 하나님께서 정의한 행복과 동의어가 될 수도 있다. (항상 그렇다고는 못하겠다.)

고난에 관한 논의는 다양한 면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따라서 간단하게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과 '내가 원하는 삶'의 측면에서만 보자. 조금은 유치하지만, 효과적인 예가 하나 있어서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이 이야기는 아내가 내게 해 준 것인데, 아내는 또 그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그러니까 누가 최초 언급자인지는 모르겠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종종 다 낡은 딱지를 양손에 쥔 아들에게 멋진 로봇 장난감을 선물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같다. 아버지는 로봇 장난감이 훨씬 더 재미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아들은 낡은 딱지를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을 놓아야 받을 수 있는데 놓지 않으니 받을 수 없다." 약간 맞지 않는 부분도 있겠으나, 내가 말하고 싶은 의도는 다들 눈치챘으리라 믿는다. 하나님께서 내게 요구하시는 고난은 그 낡은 딱지를 내려놓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 고난의 뒤에는 로봇 장난감이 기다리고 있다. 유치하고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고난을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예라고 생각한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인 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진정한 행복에는 이를 수가 없다. 그래서 종종 하나님께서는 내 삶의 주인을 나에서 하나님께로 바꾸는 작업을 하신다. 그리고 정말 사랑하시는 사람이라면 '종종'이라는 단어를 '필요할 때마다 항상'이라고 바꿔야 한다. 그런 경우를 우리는 주위에서 보기도 하고 우리 삶에서 직접 경험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고난'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고난이 복'이라는 말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하였고, 그들이 말하는 '고난이 복'이라는 말이 바로 이 뜻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고난을 주께서 주시는 평안으로 이겨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주위에 누가 봐도 고난 중에 있는데 평안한 사람을 한둘 알고 있는 재수 좋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당신이 그 행운의 주인공이라면 그들에게 가서 행복하냐고 물어보라. 그들은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어려운 삶의 모습과 전혀 관계없이 행복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그들은 바로 다음날 무너질 가능성도 함께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사람이지만.


행복은 간단하게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행복이란 내 삶의 주인이 예수님인 상태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시기를 바라심에도 불구하고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정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일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난도 행복이다.


이렇게 보자면, 현대 교회 내에서 기득권층이 이야기하는 행복론과 고난론은 전부 틀렸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행복한 이유가 '하나님께서 (그들의 의로운 행동에 대한 보답으로) 그들이 행복하도록 도와주셨기 때문이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은 철저히 예수님은 조력자일 뿐이고, 삶의 주인은 그들 자신이다. 그러므로 틀렸고, 그런 인생은 행복할 수 없다. 모두 알다시피 우리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존재들이다. 그런 미약한 존재가 주인인 삶인데 어찌 행복할 수 있단 말인가? 일장춘몽처럼 찰나에 지나갈 행복'감'은 가능할지 모르나, 지속 가능한 궁극의 행복에는 절대 이를 수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하겠다.

  • 예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되셨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행복해 질 수 있다.
  • 육신으로는 절대 구원에 이를 수 없다.
  • 육신은 절대 선해지지 않는다.
  • 육신의 소욕은 항상 영의 소욕을 거스른다.
  • 내 육신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내가 원하는 것은 절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같을 수가 없다. 따라서 바울처럼 나를 죽이는 삶을 반복해야 한다.
  • 하나님은 도구나 조력자가 아니다.
  • 내가 사랑받을만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므로 사랑받는 것이다.
  • 복 받을 만한 의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고난은 삶의 주인을 바꾸는 과정을 말한다.

종종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기도했더니 어제까지 맛있던 술이 이제 맛이 없어요.' '담배가 저절로 끊겼어요.' '기도했더니 점점 내가 변해가고 예수님과 닮아가는 것 같아요. 이런 것이 바로 성화의 과정이고 신앙생활인가 봐요.' 이런 말은 가슴 아프지만 틀린 말이다. 나도 이렇게 믿고 싶다. 나도 변화되고 싶고, 어제 나를 괴롭혔던 주제가 내일은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반복되는 말이지만, 우리가 어떤 과정을 통해 육신을 길들일 수 있다면 (물론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셨다고 주장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와 당신의 목숨을 우리를 위해 주실 필요가 없었다. 그냥 우리 수명을 아주 길게 해 주시면 될 일이다. 또는 윤회하면 된다.[각주:1] 더군다나 나이 들어서 오히려 하나님께 책망받을 일을 많이 했던 다윗이나 노아 그리고 매일 죽지 않으면 신앙을 유지할 수 없었던 바울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것인가?


이런 말을 마치 경건 훈련의 목표인 양, 그리고 자신은 이미 그 정도 수준은 이룬 양 말하는 교회의 많은 멍청이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라. 우리 삶에서는 오직 예수만 드러나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 해 주신 일'을 간증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것만을 말하려고 하든지, 그것 외엔 할 말이 없다면 예수님을 '내 삶에 무언가 해 주시는 분'정도로만 생각하는 셈이 된다. 예수님은 내 삶의 주인이다. 조력자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나누어야 할 주제는 '하나님께서 내 삶에 해 주신 일'이 아니고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 더 나아가 '예수님의 우리를 위한 사랑'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무언가를 해 주셨다면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지 사랑받을만한 무언가가 있어서가 아님을 잊지 마라. 마지막으로 성경을 한군데만 더 인용하고 글을 맺겠다. 당신은 절대 여기에서 말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하며, 동시에 이런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도 마라.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디모데후서 3:1-5)


사족: 이 글의 초고는 12.11.30에 만들어졌었으나 완성은 13.09.12에 와서야 하였다. 그 사이에 내 생각이 많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생각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한 면이 있다. 사실 지금의 나로서는 행복에 대하여 옳지 못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다.

  1. 당신은 우연히 윤회라는 개념이 나왔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온 인류가 공유하고 있다. 정확히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구원방법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특별하지 않다. 지금 내가 이야기한 것과 같이, '내가 노력하여' 선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자연스레 도달하는 방식이 윤회일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들도 선해지려는 자신의 노력에 비해 느린 그들의 성장에 절망했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느낄 것인데, 심지어 자기들이 생각해 봐도 주어진 수명 내에서는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다면 자연스레 윤회를 상상하지 않을까? 그래서 불교가 생겨났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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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2. 9. 1. 13:39

동성애 문제에 관하여 Opinion2012. 9. 1. 13:39

먼저 한 가지를 밝혀 두고자 한다. 이 글은 '동성애에 관해 성경이 지지하는가? 반대하는가? 또는 중립적인 입장인가?'에 대해 다루는 글이 아니다. 성경은 명백히 동성애에 대하여 죄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그들에 대해 반대하는 데에 열심을 내는 것이 과연 옳은가?'의 문제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하나 더 노파심에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비교적' 동성애는 약한 죄다. 또는 세상에 더 흉악한 죄가 얼마나 많은데 동성애 이야기를 하느냐? 또는 기독교인들 너희는 얼마나 깨끗하길래 동성애에 대하여 그렇게 거품 물고 반대하느냐? 이런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다. 상대성의 논리를 이 글에서 다루고 싶은 마음은 없다. 물론 그에 대해서도 할 수 있는,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이 글에서는 그 문제를 다루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 나와 있는가?'에 따른 절대적인 명령을 이야기하려는 생각도 없고 죄의 상대성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생각도 없음을 먼저 확실히 짚고 넘어가겠다. 동성애 문제는 그렇게 다루지 않아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다.

미국에서는 동성애에 관련한 법안이 상정되면 그에 대해 찬반투표를 하는데 그것을 상당히 자주 한다. 그러니까 '동성애 합법 vs. 동성애 반대' 이런 식의 큰 법안에 대한 투표도 있겠지만 제3의 가족관계로서 남남 또는 여여 부부를 초등학교에서부터 가르칠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로도 투표한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어디에서 그렇게 꾸물꾸물 기어나오는지 기독교인들이 기어나와서 팻말들고 시위를 시작한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그 문제에 대해 사명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뜻밖에 많다. 개인의 신앙 문제나, 기도가 없고 말씀이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잘 되어 있어서인지 사명감에 고취된 사람 보기가 참으로 어려운데,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참 많다. 때때마다 투표 site를 여기저기 forwarding 하는 사람들부터 해서 Twitter나 Facebook에 그에 관해 성토하는 사람, 그리고 소그룹 모임에서 국민 걱정 위원회를 열어서 걱정하는 사람 등등 참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은 활동한다.

자! 당신이 동성애에 빠진 또는 자신을 동성애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만났다. 어떻게 할 것인가? 대부분은 그냥 지나가겠지만 적극 무엇을 해야 한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10초만 생각해 보고 대답해 보자. 아마 당신이 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이면 지지하는 말을 건넬 것이고,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면 용감한 경우 그건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고 할 것이다. 물론 이 글은 기독교인이 읽고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그럼 질문 하나 던지겠다. 당신의 이 세상에서의 사명은 무엇인가? 답을 여기에서 하고 싶지만, 꾹 참고 몇마디 더 해보자.

당신이 한국 사람이라 가정하겠다. 어떤 미국 사람이 와서 당신이 미국 법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 힐난한다고 하자. 그러면 당신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분명 당신은 그를 미친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세상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가? 아니면 세상의 법을 따르는가? 그 사람이 천국 시민이 되면 당연히 하나님의 법을 따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죄가 있을 것이고. 그러나 세상 사람이 세상의 법을 따르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 정도 되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눈치챘을 것이다. 당신이 동성애자를 만나서 해야 할 일은 그를 정죄하고 또는 '의로운 척하면서' 그의 죄를 일깨우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아니고 그를 전도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죄를 조명해 주실 것이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 대신 그를 정죄하고 심판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대체 그것을 마다하고 팻말들고 비난하는 것은 성경의 어디에서 배운 행동인가? 정신 차려야 한다. 아직도 '나는 보수적인 기독교인 = 보수적인 기독교인은 진정한 기독교인 = 진정한 기독교인은 세상에 대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사람 = 빛과 소금의 역할은 정죄하기'라고 생각하는 이상한 사람이 있다면 정신 좀 차리기를 간곡히 부탁한다.

내 소그룹 모임에서 한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다. 그에게는 동성애 친구가 하나 있는데 이번에 멀리에서 놀러 온다고 한다. 물론 그는 과거 같은 교회에 다니던 사람이고 지금은 다니고 있지 않는다고 한다. 무슨 이야기를 그에게 해 주어야 겠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의 대답은 이러했다. “정말 어쩔 수 없이 동성애자가 되었냐고 물어보십시오. 만약 그렇다면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고 하십시오. 만약 나아갈 수 없다면 다시 한번 '정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냐고 물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를 그렇게 만드셨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 그 모습 그대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중 누구도 깨끗해서, 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만해서 나가는 사람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정말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다면 그 모습 그대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은 그를 그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실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만약 도저히 나갈 수 없다면 그가 그 모습이 된 이유가 그렇게 태어나서가 아니고 죄성으로 인해 그렇게 되기를 스스로 선택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죄를 선포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선포 즉, 당신의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며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선포를 먼저 해야 합니다. 죄에 대한 선포는 그다음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성경이 명백하게 죄라고 하는 것을 죄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첫 번째 의무는 복음의 선포이지 죄의 선포가 아닙니다.” 나는 실로 이렇게 생각한다.

이 정도 되면 성경을 좀 아는 사람들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동성애에 관한 신랄한 경고에 대해서 의문을 표할 것이다. 그리고 죄에 대한 선포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해 나도 지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이 많지만, 다시 한번 말한다. 당신의 이 세상에서의 첫 번째 의무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계명을 무엇이라 말씀하셨으며,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당신에게 내리신 명령은 무엇인가? 우리 제발 헛짓은 그만두고 기본으로 돌아가자. 왜 세상이 악해졌으며, 왜 세상에 동성애자가 흘러넘치게 되었는가? 동성애자들의 주장을 100% 받아들여, 왜 현대에 와서 동성애자들이 자신 있게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할 수 있게 되었는가? 세상이 타락해서? 착각하지 마라. 세상이 타락할 때에 신자들은 거꾸로 성스러워진 예가 없다. 기독교인의 세상에서의 역할이 작아지고 있는가? 세상이 악해서? 바로 당신들이 악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선하고 당신도 선한데 세상만 악해진다고 생각하는가? 제발 제발 정신 차리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 반성해야 하고 회개해야 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해야 한다. 물론 당신도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돼야 하고.

마지막으로 몇 마디만 더 하겠다.

  • 교회 안에서 자행되는 죄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우리에 대해서 먼저 회개해야 한다. 내부적인 반성에는 약하고 외부적인 고발에만 능하다면 볼썽사납지 않겠는가? 나는 요즘 교회는 전혀 반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교회 돈을 횡령하는 장로는 버젓이 목에 힘주고 교회에 다닌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은 죄가 없는데도 죄인처럼 교회에서 고개를 들지 못한다. 당신의 교회가 그렇지 않다면 참으로 다행이다. 그러나 많은 교회가 횡령 거짓 모함 위선 음란 등등의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나님의 법까지 갈 것도 없이 세상의 법으로도 범법의 온상인 교회가 세상에 널려있다. 우리 그 똥이나 먼저 치우자.
  • 죄는 죄다. 죄를 사랑으로 감싸지 못하는 것도 죄지만 죄를 죄라 선포하지 못하는 것도 죄다. 글을 잘못 읽은 사람은 내가 동성애를 죄라고 선포하지 말라고 했다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 뜻이 아니다. 동성애자를 보면서 '괜찮아. 어쩔 수 있느냐? 좋아하는 것은 네 자유지.'라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엄청난 죄임을 알아야 한다. 단언컨대 그렇진 않다. 성경은 분명 그것을 죄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당신도 나도 죄에 파묻혀 살기는 마찬가지이고, 그럼에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뿐임을 잊지 마라. 당신의 물욕 나의 음란이 모두 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절망하고 하나님 앞에서 도망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무뎌져서 '너도 죄 없고 나도 죄 없어'라고 하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에 대한 회개와 너에 대한 죄의 선포가 끊겨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리 죄성과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나는 동성애도 그 정도 선상에 두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가지고 있는 '위선'의 죄에 비하면 내 개인적으로 동성애는 귀여운 죄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겉으로 확실히 드러나는 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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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나를 오랫동안 괴롭혀온 주제가 있다. 나는 성경을 읽고 있고, 어떤 경우 남보다 성경에 대해 더 자세히 아는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성경을 읽는 이유는 성경 읽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깨달음이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더라는 사실이다. 솔직히 말해 나의 삶도 별로 변화시키지 못하였다. 왜 나의 깨달음에는 능력이 없을까... 이에 대해 정말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해 왔다. "네가 네 형제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야." "넌 진정으로 하나님을 주로 모시지 않고 있어. 그게 바로 이유야."라는 정답들은 나에게 별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에 내가 맡은 소그룹 멤버들이 반기를 드는 사건이 터졌다. 모임에서 성경공부만 하는 데에 대한 반감과 함께, 너무 강압적으로 가르치는 나의 태도가 어우러져 복잡한 그러나 어찌 보면 간단한 이유로 터진 사건이었다. 나는 속이 좁아서 상당히 짜증이 났었다. 그러면서도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부족한 부분과 문제점에 대해서 알려주시리라 믿고 계속 성경을 읽어 나갔다. 역시 약 2주 만에 해답을 얻게 되었다. 그 과정이 약간은 지루할 수 있으나, 여기에 그 전체 이야기를 적어볼까 한다. 원래 이 블로그가 누가 읽어주길 바란다기보다 내가 내 생각을 기록하는 목적을 하고 있으므로 블로그 본래의 목적에 합하는 글이긴 하다.


사건이 터진 그 주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겠다. 다음 말씀해석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누가복음 9:5)

나는 복음을 구걸하듯이 전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가진 귀한 것을 제발 받아달라고 사정하며 베풀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비단 비신자들에게만 적용되지 않고 신자들 사이에서도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실 위의 말씀은 제자들을 이스라엘 내에서 파송하시면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성도 간의 문제에 대한 문제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맞다.) 어떤 모임이든 모임에 부담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모임에 잘 참석도 하지 않고 그러면서 자기에게 관심을 두기를 바라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보통은 이런 사람들을 '약하다'라고 하며 어떻게든 모임에 참석시키려고 노력한다. 물론 그 노력하는 사람들은 형제애를 실천 중이다. 그러므로 옳으며 칭찬받아야 한다. 그러나 같은 '형제'로 불리면서 모임에 부담을 주는 그 행동을 하는 그 사람은 분명 죄성을 발휘하는 중이다. 그러므로 그 스스로는 자신에 대해 반성할 줄 알아야 하며, 어떤 경우에 단호한 조치가 필요할 수 있다. '약하여 돌봐야 하는 사람'에 해당하는 그 사람이 만약 '나는 지금 힘드니까 너희는 나를 돌봐야 해. 나에게 관심을 둬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난 상처받아버릴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런 과정을 통해 그 사람에게 회복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복음에 대해 '내가 교회에 다녀 주마. 내가 모임에 참석해 주마. 내가 말씀을 들어 주마'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오히려 모임에서 내치는 것이 그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14-15)

이 말씀에서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을 '왕따' 시키라고 바울이 말하고 있다. 이 역시 교회 안에서 벌어졌던 일이므로 위의 예수님의 말씀과 연관 지어서 생각하는 데에 큰 무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동시에 '형제같이 권면'하라고 한다. 무슨 뜻이겠는가? 바로 그 '제외함'이 그의 회복을 위함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복음을 복음으로 받지 않고 마치 크게 선심 써서 들어주는 양 대하는 사람은 사실 떨어버리는 것이 그를 위한 조치일 수 있다. 물론 방법상의 어려움과 지혜로운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넘어가자. 너무 어려운 문제이다.


이런 의도로 말을 했었는데, 모임 중에 한 사람이 그에 대해 발끈했다. 그 사람을 지목하여 말한 것도 아니고 내가 위에서 말한 내용과 그 사람이 밀접히 관계된 경우도 아니었는데 그 사람이 한동안 모임에 나오지 않다 보니 그 말씀해석이 마음에 걸렸나 보다. 더구나 나 외에 다른 사람들도 그 사람을 나오게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는데 내가 그렇게 말해 버리니 좀 민망했었나 보다. 그러다 보니 일대 다로 다소간 언쟁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그 말을 할 때에 그런 소란이 일어날 수 있으리라고 미리 알았다는 사실이고, 그냥 예상대로 그런 결과가 나왔을 뿐이다. 그러면 내가 지혜롭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야 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말씀이 그렇게 적혀있고, 내가 그렇게 깨달았다면 내 신앙 양심상 다르게 전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이 생각은 어느 정도 강력한 근거가 있다.


우리 소그룹 모임에서는 한 가정씩 돌아가며 QT 나눔을 하는 시간을 가진다. 마침 그날이 내 차례여서 준비했던 말씀이 예레미야서의 6~8장이었다. 물론 소란때문에 나누지 못하였다.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6:13-15)

당시 유다의 부패상이 1~6장에 걸쳐서 나오고 있다. 그리고 그 부패의 결과로 그들은 멸망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평강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럼 당신 주변은 어떤가? 그리고 당신은 어떤가? 멸망에 대해 선포하는 목회자를 좋아하는가? 더구나 당신은 잘못에 대해 넘어가지 않고 지적하는 편인가? 나는 감히 말하건대, 현대 교회에서는 회복의 말씀만 흘러나온다고 생각한다. 눈을 들어 주변을 돌아보면 불합리한 것 투성이인데, 회복과 평안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당시와 오늘은 비슷한 부분이 참으로 많다. 그다음으로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을 할지라도 그들이 너에게 순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네가 그들을 불러도 그들이 네게 대답하지 아니하리니,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는 민족이라 진실이 없어져 너희 입에서 끊어졌다 할지니라. (예레미야 7:27-28)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길, 네가 선포해봐야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도 말하라고 하신다. 나는 이 부분을 나에게 적용하고 싶었다. 듣든 듣지 않든 현재 내가 깨달은 말씀은 말씀 그대로 전해야 하는 것이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였다. 말씀이 또 이어진다.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즉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악을 뉘우쳐서 내가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 전쟁터로 향하여 달리는 말 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느냐 참으로 서기관의 거짓의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며 두려워 떨다가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 (예레미야 8:6-9)

가르치는 자는 정직을 말하지 않고,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모른다. 더구나 그 백성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지혜가 있고"라고 한다. 나는 이 말을 실제로 우리 교회 집사에게서 들은 일이 있다. 그 분이 말씀하시기를 "저는 구원받을만큼의 지식은 이미 알고 있는데 성경을 굳이 읽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라고 하였다. 실제로 많은 교인들이 자신들이 성경을 모르는 데에는 동의하나 구원받을 만큼은 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다 그렇지 않다를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현상 자체로 봐서는 이 구절에서 말하는 문제점이 현대교회의 문제점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정직을 말하기로 정직히 말하기로 작정하였고, 멤버들에게 여호와의 규례를 가르치기로 작정하고 모임에 참석했었다.


따라서 당연히 예상되는 반발을 무시하고 말을 하게 되었고, 반발이 일어났다. 물론 그 반발의 중심에는 나의 조심 없는 언행과 너무 힘든 성경공부 그리고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하는 데에 대한 불만 등이 복합되어 있으나, 표면적으로는 위의 이유로 반발이 일어났고, 그에 대해 상당히 오랜 시간 이야기를 하였다. 여하간 당일은 잘 마무리가 되는 듯싶었다. 나는 말을 좀 줄이기로 하였고, 멤버들의 상태를 조금 더 이해해주기로 하였으며, 멤버들은 성경공부 내용을 미리 조금이라도 생각해보고 오기로 하였다. 그래서, 바로 다음날 정도에 그 주에 할 성경공부 교재를 미리 편집하고 문제마다 약간씩 생각할 문제를 달아서 전해 주었다. 당시 생각할 문제를 달면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대부분이 예습해 오지 않을 것이며, 혹시 예습한다 하더라도 오기 직전 1분 또는 5분 전에 한번 읽어만 볼 것이다. 또는 차 안에서 잠깐 훑어보기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생각을 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그냥 읽기만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생각할 거리를 생각할 수 있도록 가이드를 해 주어야겠다. 이런 생각으로 적었던 생각할 문제들이 다시 멤버들에게 부담으로 비쳤었나 보다. 특히나 혹시 더 깊은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을 위해 팁을 몇 개 적었었는데 그것들을 죄다 공부해 오라는 것으로 오해하여 더 큰 소동이 내부적으로 있었던 것 같다. 급기야 그들이 내 아내를 불러서 그런 불만을 이야기하였고, 아내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그런 의도가 아니라고 변명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부분에서 내가 폭발하게 되었다. 나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 상관 없다. 그런데 아내를 불러서 했다. 더구나 아내가 사과와 변명을 하게 되었다. 이 부분이 나를 폭발하게 하였다. 정말 분노하였고 다 관두자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나의 분노는 분노고 나는 한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나의 분노의 중심에는 어떤 진리나 하나님의 명령 또는 성경이론이 있지 않고 나의 속 좁음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내 심정은 "내 속좁음이던 뭐던 간에 내가 이 사람들과 다시는 성경공부를 하지 않겠다."였다. 그러면서 계속 성경을 읽어 나갔다. 이런 때 항상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게 무언가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기대하고 성경을 읽게 되었다.


그런데 말씀을 통해서 나의 문제점을 보여주시지 않는 듯이 보였다. 다음의 말씀은 아내 사건이 터졌던 그날 아침에 읽었던 말씀이다.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에스겔 3:5-7)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불신자는 네 말을 들을지 몰라도 네 주변에 있는 성도들은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선포하라고 하신다.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에스겔 3:11)

그러면서 최종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이다.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니라. (에스겔 3:27하반)

내가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심지어 언급하지 않은 중간에는 그 유명한 파수꾼 비유와 겔3:26~27에는 징계의 방법으로 선지자의 입을 봉하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즉,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재앙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선포하지 않은 파수꾼에게 그 피 값을 찾을 것이라 말씀하신다. 나는 성경에 상대방이 듣기 쉽게 말하면 하나님 말씀이 더 잘 전해진다는 말씀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듣든지 아니 듣든지" 또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리라" 등등의 말씀이 많다는 것은 안다. 그리고 그 말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듣지 않고의 책임이 전하는 자에게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전하는 자는 전하는 방식이 어떻든 간에 전하는 책임만 하면 되고 그 말씀을 듣고 듣지 않고는 전적으로 듣는 사람 책임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내가 말씀을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면 나는 모두 잘했고 멤버들은 죄다 잘못했나? 그들은 들을 귀가 없었던 것이고, 나는 파수꾼의 역할을 잘해낸 것인가?


이즈음에서 나는 약간 헷갈리기 시작했다. 결코, 내가 잘한 부분이 없는데 말씀으로는 내가 잘못했다는 응답이 없다는 사실이 약간 곤혹스러웠다. 나는 하나님의 방법이 사람의 방법과 다르므로, 내 상식으로 잘잘못을 가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번의 사건에서 나의 속 좁음과 거만함 그리고 남을 배려치 않는 그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내 상식으로는 내가 잘못한 것이 분명하나, 성경이 그것이 잘못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나는 적어도 교회 내에서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좀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세상적으로는 잘못을 인정할 수 있으나, 교회에서는 할 수 없다는 말이 거꾸로 돼야 하는 것 아니냐고 도전하는 것이 가능해 보인다. 오히려 세상적으로는 떳떳하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해 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도전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에 대해 확고하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죄를 통해 잃었기 때문에 나의 본성의 소리는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세상의 기준으로 잘잘못을 결정할 수 있는 일도 교회에서는 그 기준을 사용하지 않으려 하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물론 가능한 한 세상일에 대해서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려고 노력하며,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과정이 바로 우리 삶 즉, 세상에서의 천국 백성이 되기 위한 훈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던 차에 아내가 또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돌아오더니 자기 마음이 편해졌다고 하면서 가장인 내 뜻을 따르기로 했다고 했다. 즉, 내가 다 관두겠다면 그 뜻에 따르겠다는 선언을 하였다. 그 말에서 사실 더 큰 불편함을 느꼈다. 물론 나는 우리 가정의 가장이기 때문에 어떤 결정에 관한 최우선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신앙의 결정에 관한 한 내가 결정하고, 나의 결정에 따르기로 이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나의 신앙결단에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고 나의 속 좁음에 해당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에게도 "이 문제는 가장 운운할 문제가 아니다. 당신은 이런 때 나에게 계속 잘못을 지적함으로써 나를 고치려고 노력해야지 당신의 결정에 따르겠어라고 말할 그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하였다. 여하간 고민이 깊어져만 갔었다.


그러다가 다니엘서 9장에서 해답을 얻었다. 먼저 다니엘서를 이야기하기 전에 근래 신선하게 다가왔던 말씀을 먼저 보자. 에스겔서 36:36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너희 사방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폐한 자리에 심은 줄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에스겔 36:36)

하나님의 의지를 상당히 강력하게 표현한 말씀이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말씀의 대미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그 회복을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겠다는 선언이다. 이 말씀의 후반부를 ESV로 읽으면 조금 더 생동감 있게 느낄 수 있다.

Then the nations that are left all around you shall know that I am the Lord; I have rebuilt the ruined places and replanted that which was desolate. I am the Lord; I have spoken, and I will do it. (ESV)

'I'로 시작하는 3개의 문장이 병렬되어 있다. "나는 여호와다. 내가 말하였다. 그리고 내가 이룰 것이다." 이 정도면 사실 우리가 끼어들 구석이 전혀 없다. 하나님께서 모두 알아서 하시겠다는 선언이다. 그런데 다음 장도 아니고 바로 다음 절에서 아주 의외의 말씀을 하신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Thus says the Lord God: This also I will let the house of Israel ask me to do for them: to increase their people like a flock. (에스겔 36:37)

당신이 이루실 것임을 그렇게 강력하게 말씀하시고 바로 이어서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필요하고 또 기도하게 하실 것임을 선포하신다. 물론 이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존재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역사에 우리의 참여를 기다리시며, 같이 영광 받기를 원하신다."라고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아주 신선했었다. 그리고 이 말씀이 뇌리에 남아 있었다.


이런 기억을 가지고 다니엘서 9장을 읽는데 정말 충격적이었다. 말씀은 이렇게 시작한다.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 해,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다니엘 9:1-2)

자 당신에게 이런 깨달음이 왔다.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이 조만간 해결될 것이며, 그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당시 다니엘은 대충 70년 중의 67년 정도가 지난 것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70년을 언제부터 언제까지로 볼 것인가는 이 글의 범위를 넘어간다. 다만 다니엘은 자신이 이주당한 때로부터 계산하여 다리오 왕 첫해까지 계산했을 때에 대충 67년 정도가 지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하간 70년이 거의 다 되어 간다고 믿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질문을 던지고 싶다. 당신은 이런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 무엇을 먼저 하겠는가?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주위 사람들에게 알릴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무엇을 알리겠느냐고 묻자 회복에 관해 이야기하고 위로하겠다고 대답하였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는 분명 주위 사람에게 알리는 일을 먼저 했을 것이다. 그리고 형제들을 위로하며 형제 사랑을 실천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니엘은 기도하였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다니엘 9:3)

심지어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기도하였다. 민감한 사람이라면 이후의 기도 내용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다니엘은 기도했는데 당신 같으면 어떤 기도를 하겠냐고 아내에게 또 물었다. 먼저 감사기도를 드리겠다고 한다. 그 이후에는 어떤 기도를 하겠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속히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어떤 근거로 속히 이루어 달라고 하겠느냐고 다시 물었다. 대답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 이루어 달라고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적어도 내 상식으로는 아내의 대답은 매우 상식적이며, 어떤 면에서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다니엘의 기도를 보자. 다니엘은 9:4~19까지 총 16절에 걸쳐서 기도하는데 4~15절 즉, 12절을 회개하는 데에 사용한다. 철저한 회개를 한다. 그리고 16~19절 즉, 4절을 사용하여 회복을 간구하는데 그 근거로 하나님의 약속을 인용하지 않는다.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다니엘 9:18-19)

다니엘은 철저히 자신은 낮추고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긍휼 그리고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이루어 달라고 그야말로 "간구"하고 있다.


나의 성향으로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일을 다니엘은 하고 있다. 나는 깨달음 이후에 기도를 하지 않을 것이고, 한다 해도 이루어 달라는 기도를 할 것이며, 그 기도의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이 될 것이다. 그런데 다니엘은 깨달음 이후 기도했으며, 그 기도를 회개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 이후 정말 겸손히 하나님께 간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나의 문제가 여기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시 ESV를 한번 인용해 보겠다.

Then I turned my face to the Lord God, seeking him by prayer and pleas for mercy with fasting and sackcloth and ashes. (다니엘 9:3)

우리말 성경에는 그 뜻이 약화하여 있는 "turned my face to the Lord God"이 나온다. 즉, 다니엘은 깨달음 이후에 그의 얼굴을 하나님께로 돌리고 기도를 시작한다. 그에 반해 나는 나의 얼굴을 내 소그룹 멤버에게 그리고 아내에게 돌린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다시 에스겔서의 내용으로 돌아가 보자.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하셨나? 당신께서 회복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자 다니엘이 나처럼 깨달음 이후에 주변 사람에게 회복을 선포하고 위로했다고 생각해 보자. 회복이 일어날 수 있을까? 아니다. 회복이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하나님께서 일하셔야 회복이 일어나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려면 나의 기도가 필요하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고 주변 사람에게 이야기만 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시지 않으시고 결국 진정한 회복은 일어날 수가 없다. 아내와 이야기하는 도중 불현듯 또 하나를 깨달았었다. 나는 그 순간까지도 기도하지 않고 그 내용을 아내에게 떠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런 인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내가 깨닫고 남들에게 알리는 것이 사명이고, 그것이 형제 사랑이라 생각하였지만 결국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는 통로를 막는 격밖에 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으므로 나와 관계된 사람들에게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불평불만이 나오게 된 것이다. 나는 방향도 틀렸고 회개가 없었으니 내용도 틀렸었다.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바랬으니 역사가 일어날 리가 없다. 나에게 필요한 기도는 "주여 나의 교만으로 주께서 주신 말씀으로 기도하기보다 주위 사람들에게 나의 깨달음을 알리는 데에만 주력하였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고,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감사함으로 기도하게 하옵시고, 애통함으로 겸손하게 하옵시고, 회개로 거듭나게 하여 주옵소서."였다. 그런데 나는 깨달음을 나를 변호하는 데에, 그리고 나를 정당화 하는 데에, 무엇보다 나를 자랑하는 데에 사용하여 왔다.


성경을 읽는다 하면서도 이런 간단한 진리조차 모르고 살아왔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떠들어도 전혀 변화하지 않는 소그룹멤버들을 보면서 무엇이 문제인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이유를 알았다. 물론 여전히 여러 가지 문제가 남아있다. 일단 나의 본성상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만 드러나고 하나님의 역사가 드러나도록 기도해야 하는데, 나는 여전히 내가 드러나기를 바란다. 그러다 보니 기도해야 하는 순간에 떠들고 있는 나를 자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이 사실을 이번에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셨으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앞으로는 같은 상황에서 나도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해 본다.


추가1: 내가 위에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기도를 약간 부정적으로 그렸는데 그에 대해 부연하고 싶다. 일단 그런 기도가 틀린 기도는 아니다. 철저히 자신을 죽이고 "저는 무익하나 주께서 약속하셨으므로 그 약속에 의지해 간구합니다."라는 기도는 좋은 기도의 본이다. 그런데 문제를 그런 기도의 본을 귀로 들어서 실천하는 사람이다. "약속에 근거해서 기도해봐. 그러면 이루어 주셔." 이런 말을 듣고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제가 먼저 나라와 의를 구했으니까 이제 돈 주세요."라고 기도한다면 이 기도는 무슨 기도가 되겠는가? 빚쟁이의 빚 독촉에 해당하는 기도가 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개인적인 깨달음과 낮아짐의 결과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기도는 옳다 하겠으나, 그냥 들어서 방법론으로서 그런 기도 형태를 택한 것이라면 그런 기도는 틀린 기도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신앙생활에서 방법론에 대한 모든 경험적인 내용은 틀린 내용이다. 우리는 어떤 목적을 향해 일을 해 나가는 과정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통한 천국 백성으로의 훈련을 쌓아가는 과정에 있다. 특별한 방법을 논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과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특히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그리고 그런 것은 사실 신앙도 아니다. 하나님으로 예수님으로 사는 것이 신앙이지 어떤 '방법'으로 사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추가2: 다니엘서 9:3에 보면 다니엘이 머리를 여호와께 향하고 간구를 시작하는데 그 마지막에 보면 "결심하고"라고 나와 있다. 즉, 다니엘의 회개는 저절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는 바로 그 때가 회개해야 할 때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과연 우리는 회개의 때의 회개를 하고 있는 지 돌아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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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