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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한가지 짚고 넘어가자. 당신이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그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아니 대부분 기독교인이 종교인으로 머물 뿐, 진정으로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삶을 살고 있지도 않으며, 그런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시도하지도 않는다. 누구나 아는 내용인 듯하지만 동시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내용이기도 하다. 나는 교회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을 보아왔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또는 제자로 살기 위해 진지한 고민을 거듭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물론 입으로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말을 많이 한다. 왜냐하면, 많은 교회가 예수님의 제자를 표방하며, 많은 교육을 통해 그 '용어'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까 그들의 말 속에 예수님의 제자라는 표현이 많이 사용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의 삶에서 일반 교회 교인들의 그것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가르치는 사람들조차도 과연 예수님 제자의 의미를 알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경우가 많았다.


우리 삶의 목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됨이어야 한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방편 중의 하나일 뿐이다. 또 하나, '예수님의 제자'는 '되는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되는 것'인가? 나는 그렇게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나에게 남은 문제는 '제자다운 삶'을 사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노력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를 짧게 설명할 자신이 없다. 다만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을 해 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이 글에서 제자가 된다고 표현되는 부분은 그런 표현이 간단하여서 사용할 뿐이고 사실상 그렇게 됨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고 읽어주기를 부탁한다.


우선 문제를 제기해 보자.


근래 미국의 한 교회를 방문했다. 그 지역에서 가장 큰 교세를 가진 교회로 약 3천 명 가량이 출석하는 교회이다. 그런데 그날 설교가 정말 압권이었다. 철저하게 인간중심의 설교였다. 물론 그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대부분의 설교가 인간 중심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교세가 커졌다고 생각된다. 안타까운 이야기이지만 인간중심의 설교를 해야 현대 기독교인들은 편안해하고 좋아한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관한 이야기를 하면 지루해하고 딱딱하다고 느끼며, 심지어 어느 정도 믿음이 있다 하는 사람들조차도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런 설교를 꺼리기 일쑤다. 내가 잘 아는 한 목사는 그런 식으로 설교하면 교인들이 지루해하고 직접 와서 그렇게 설교하지 말라고 하는 교인들도 있다고 하였다. 하여간 어떻게 저렇게 한결같이 인간중심의 설교를 하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그 중 finale가 있었으니 다음의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로마서 8:37)

목사: 그렇습니다. (전형적인 설교용 관용어… 대체 뭐가 그렇다는 말인지 원) 우리는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청중: 아멘~


솔직히 이 부분에서 나는 예배 중에 손뼉까지 치며 감탄했다. 혹시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예측되는지 모르겠다. 나는 모든 사람이 여기까지 읽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한 번에 알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성경 구절에서 중요한 부분은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는 부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 즉, '예수님으로 말마암아'이다. 극단적으로 그리고 성경적 사실로 말해 우리가 이기고 지고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즉, '이긴다'에 대한 정의를 예수님께서 직접 하시지 않는 한, 당신이 생각하는 '이긴다'는 측면에서는 많은 경우에 성공적이지 않을 소지가 다분하다. 모든 (당신 입장에서의) 실패를 기도부족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아니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겠는가? 우리 측면에서 보자면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실패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그 실패가 고난의 형태로 나타나며, 이런 고난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훈련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시기 때문에 예수님 입장에서는 성공이다. 따라서 '넉넉히 이기느니라'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에 비하면 없어도 되는 구절이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라는 부분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교인들은 감격했고, 나는 놀라웠고. 참으로 놀랍다. 이 한 구절만으로 그 교회의 전반적인 설교스타일을 규정해도 아마 무리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설교스타일을 규정하는 데에도 큰 무리가 없다고 본다. 또한 이것이 한국교회 교인들의 수준을 말해준다. 성경의 인물에는 큰 관심을 보이나, 그 인물들을 조율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는 사실 별 관심이 없다. 아마 당신은 ’나는 아닌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우리는 대부분 ’성경 속 그 사람은 왜 그 순간 그렇게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데에 많은 열정을 쏟는다. 글을 쓰는 나 자신조차도 최근에 와서야 성경에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깨달았다. 항상 내게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가 ’왜 개떡 같은 다윗을 하나님은 사랑하셨는가?’ 이었다. 보면 볼수록 부족한 것 투성이의 다윗인데 말이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내가 그 다윗의 행동 패턴에서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는 패턴이 존재하리라고 나도 모르는 새에 가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알았다고 해도 그렇게 가정하지 않았다고 부정했을 거다.) 우린 모두 죄인인데 말이다. 죄의 경중이 어디 있나? 어차피 우리는 모두 사형수였는데…… 어쨌든 내가 다윗을 싫어하고 그의 행동에서 잘잘못을 따지는 모든 과정의 저변에 깔린 가정은 ’나는 나 스스로 의로워져 하나님이 칭찬하실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겠다'였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나의 시선은 그런 다윗을 참으신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지 않고 다윗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당신도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를 권한다. 당신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사랑의 하나님인지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의 ’알 수 없는 자격 기준'인지.


자 이 글을 통해 당신에게 도전하려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당신은 예수님을 당신의 주인으로, 왕으로, 구주로 믿는가? 아니면, 능력 많으신 분으로서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 드리면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램프의 요정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가?

다르게 표현하자면, 당신은 예수님의 은혜로 자녀가 되었으며 의롭다 칭하심을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이 경우 복의 유무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아니면 당신이 충분히 의로운 일을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을 칭찬하시며 복을 주신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이 두 질문은 서로 같은 선상에 있는 질문조차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 부분을 명확히 모르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이런 식으로 질문하게 되었다.


우리의 생각 속에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인가? '분'이기는 하는가? 혹시 그냥 '여의봉' 정도 아닌가? 어떤 특정 주문을 틀리지 않고 외우면 무엇이든 해 주는 여의봉 아닌가? 그래서 주문을 틀림없이 외우고 외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은 아닌가? 달리 말해 성경 속의 인물들을 통해 그들의 삶을 ’정확하게' 모사함으로써 그들이 받았던 ’복'을 나도 받기 위해 노력하는 중은 아닌가?


문제 제기는 이 정도로 하고, 기드온의 이야기를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해보겠다. 기드온의 인생은 어떻게 보면 밋밋하나, 이야깃거리는 많다. 그러나 다른 면으로 이야깃거리도 생각할 거리도 특별하게 있지 않음을 보이고자 한다.  기드온의 이야기는 사사기 6-8장에 걸쳐서 나온다. 성경의 인물 중에서는 상당히 자세히 기록된 편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그만큼 다룰 주제도 많다. 이 중 몇 가지만 추리면 다음과 같다.

  • 양털로 하나님을 시험함 (사 6:36-40)

  • 하나님께서 32,000명의 군인 중 31,700을 돌려보내고 300명만으로 전쟁을 치르게 하심 (사 7:1-9)
  • 하나님의 뜻을 재확인함 (사 7:10-15)
  • 에브라임과의 갈등 (사 8:1-3)
  • 주변 부족에게 인정받지 못하였고, 그것 때문에 그들에게 복수함 (사 8:4-21)
  • 에봇을 만듦 (사 8:27)

이 주제들을 전부 다 다룰 수는 없고 몇 가지만 다뤄 보도록 하자.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얼핏 극적인 기드온의 삶을 연구하고 그 연구를 통해 우리의 신앙을 발전시키기를 원했던 당신에게 그런 시도 자체가 비신앙적이며, 오히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그 간단한 진리가 무엇인지 전달하고자 한다.


먼저 나는 기드온이 양털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부분에 대하여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한 것이 아니라는 설교를 들은 일이 있다. 역시 상당히 유명한 교회의 유명 목사였다. 여러 권의 저서까지 있는 목사인데 인터넷서점에서 조엘 오스틴의 책과 묶여서 팔리는 책의 저자이다. 물론 대단하다는 뜻이 아니고 그런 목사란 뜻이다. 나와 성향이 비슷한 사람이라면 무슨 소리인지 알 것이다. 분명 본문은 기드온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왜 그런데 굳이 그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싶었을까? 왜냐하면, 기드온은 좋은 사람인데 좋은 사람이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4:12) 참으로 놀랍게도 많은 어른이 어린애들의 흑백논리를 인생의 사명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좋은 사람은 좋은 일만 한다는 유치한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성경을 보는 사람을 나는 거의 보지 못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해 보면, 나도 기드온처럼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시험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 주실 작정이면 이렇게 보여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이루어지나 이루어지지 않나 확인하고 싶은 사람의 마음을 배려(?)한 설교다. '죄의식 갖지 말고 자유롭게 하나님을 시험하세요. 보세요. 착한 기드온도 하나님을 시험했잖아요. 에이~ 기드온이 했으니까 하나님이 허락한 방법이고,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으니까 기드온이 한 시험은 시험이 아니에요. (엥?)' 뭐 이런 내용 아니겠는가?

자 정리하자. 나는 기드온이 하나님을 시험했는지에 대한 진위를 가리고 싶지 않다. 내가 짚고 넘어가고 싶은 사실은 기드온의 행동은 단순히 '사람'의 행동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착한 기드온이 했으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신 방법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래서도 안 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흔히 나오는 반론은 ’그럼 왜 적혀있나?’ 이다. 정말 모르는가? 나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드온을 통하여, 무엇이 됐든 간에 '당신은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수용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약한 사람에게 확신을 주시고자 참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려주고자 하셨다. 즉, 본문은 나에게 나의 하나님은 나의 약함을 외면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보듬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려주고 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기드온의 약점을 아셨다. 약하니 버리시는 하나님이 당신이 믿는 하나님인가? 그렇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부드럽게 관용과 수용으로 참으셨고 결국 기드온이 확신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심지어 하나님을 시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것을 통해 확신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 시험에 응해주셨다. 왜? 기드온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사건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사실이다.


그런데 기드온은 또 한 번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지 못한다. 아마 안절부절못했던 듯하다. 바로 300명만 가지고 전쟁을 해야 하는 그 날 저녁의 일이다. 사사기 7:10-15의 내용인데, 이번에는 하나님이 먼저 기드온의 상태를 아시고 도움을 주신다. 바로 적 진지에 가서 그들이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직접 들을 수 있게 해 주셨다. 자 그러면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 일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두렵고 때로는 불안합니다. 그럴 때에 기드온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께 확신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주십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조금 방향이 빗나가 있다. '나의 불안'을 종식하기 위해 '내가' 구하면 '하나님이' 마술 램프의 지니처럼 평안하게 해준다고 생각한다면 많이 잘못된 접근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녀에게 은혜로 평안을 주신다. 때로는 하나님 입장에서 괘씸하고 또는 틀린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에 비하면 그런 부분은 아무것도 아닐뿐더러 하나님은 그 사랑으로 우리를 도와주신다. 약간 미묘한 부분이 있음을 인정한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하나님을 생각하라'이다. 내가 주체가 되어 문제를 파악하고 구하고 등등을 할 때에 반응하는 마술 램프가 아니고 하나님은 미리 다 아시고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시는 분임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유치한 이야기를 하자면, 하나님은 로봇이 아니고 주체적으로 활동하시는 분이며, 심지어 그분은 전지전능하시다. 따라서 우리의 행동이 input이 되어 output을 내놓는 존재가 아니다. 제발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신다.


300명을 선택하는 과정을 보자. 하나님께서 혀로 핥는 사람과 무릎을 꿇고 마시는 사람 중에 혀로 핥는 사람 300만 가지고 전쟁하라고 하셨다. 이 부분을 가지고 ‘왜 그들을 택했는가?' 즉, 그 300명이 선택된 이유를 찾고 그러함으로 우리도 그 300명에 속하기 원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았고 이에 대한 설교도 상당히 많다. 당장 '기드온의 용사 300'으로 검색만 해 봐도 많은 설교를 찾을 수 있다. 대부분 '그들의 순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대승을 이끌었다.' 또는 '혀로 핥는 자가 무릎을 꿇는 자에 비해 하나님 앞에 옳은 이유'에 관한 설교들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당신은 그렇게 당신이 복 받을 만한 이유가 있기를 바라고 복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가? 나중에 이것만 가지고 글을 하나 더 쓸 생각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당신은 복을 받는 어떤 공식을 원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복을 받고 저렇게 하면 저주를 받고 하는 식의 깔끔한 공식을 원하는 당신을 당신 스스로 깨닫고 인정해야 한다. 그런 공식을 원하는 이유는 바로 그래야 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의를 자랑해야 한다. 흔히 자기 의를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데, 만약 당신이 복 받을 만해서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는다면 나의 의를 자랑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여하간 그냥 기술적으로 말해도 만약 혀로 핥는 자가 무릎을 꿇는 자에 비하여 장점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애초에 혀로 핥는 자를 데리고 전쟁을 하라고 하셨어야 하고 심지어 그들을 선택한 이유도 말씀해 주셨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나누라고 한 다음에야 이유도 말씀하시지 않은 채 한쪽을 택하셨다. 사람들이 흔히 성경이 어렵다고 하고 왜 하나님께서 깔끔하게 이유를 말씀해 주시지 않나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잘못된 질문을 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어떤 면에서 쉽고 모든 이유가 적혀 있다. 하나님은 우리하고 수수께끼 놀이를 하지 않으신다. '왜 물을 핥는 사람들만 데리고 가셨지?'라고 질문을 하니까 대답을 찾지 못하고 헛소리를 하게 된다. '왜 300명만 데리고 가셨지?'라고 질문하면 대답이 7:2절에 '스스로 자랑'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나온다. 이것으로 끝이다. 더 좋지 않은 질문은 ’선택된 300명은 하나님이 데려가실만한 어떤 조건을 충족했을까?’라는 질문이다. 당신은 어떻게든 그들이 나머지 31,700명보다 그들이 더 나은 이유를 찾고 싶을 것이다. 그래야 당신이 노력해서 300명 안에 들 수 있을 테니까. 이유가 없다면 당신은 갈 길을 잃은 나그네처럼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 빠질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하나님을 요구조건을 충족시켜드리면 그에 대한 반대급부를 제공해 주는 자판기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세하고도 정확한 사용 설명서를 원하고, 그 사용설명서가 바로 성경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유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 얼핏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그런 부분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당신이 잘못된 질문을 이용하여 성경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 다 같은 사람이다. 우리가 잘나서 사용하시고 못나서 사용하시지 않는 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 아니신 셈이 된다. 돌들로도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 수않 있는 분이 하나님이다. (마태복음 3:9) 당신이 특별히 잘나서 특별히 사용되기를 바라지 마라. 정말 지긋지긋한 기도문구 중의 하나가 ’특별한 종 누구누구를 특별하게 사용하시어’로 시작되는 기도이다. 누가 대체 하나님앞에 특별한 조건을 갖추어서 특별히 사용될 수 있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어떤 일을 맡길 지는 하나님이 결정하실 일이다.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우리가 아무 능력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작정하시면 특별하게 사용하실 수 있다. 어쨌든 하나님이 없어도 되는 의인이 요즘 세상에는 너무 많다. 또는 하나님을 한낱 램프의 지니 정도로 격하시키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다시 말해, 300명만 선택하신 이유는 전쟁은 하나님께서 하시고 우리는 지켜볼 뿐이라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그 300명이 전부 일당백이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에 적합한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다. 더구나 자세히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후 나머지 병력도 어떤 형태로는 사용된다. 자꾸 당신 입장에서 당신의 복 받을 수 있는 행동강령을 만들기 위해 성경을 보고 질문하지 마라. 그냥 하나님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보기를 권한다. 사람들의 행동과 모습에 관심을 가져봐야 그건 헛짓이다.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에 대한 관심과 사랑만 보면 되고 그래야만 한다. 성경의 주인공은 철저히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시다.


에봇에 대한 것은 다른 글로 넘기도록 하자. (2013/09/04 - [Bible Stories] - 왜 믿음은 대물림되지 않을까?)



의 예를 통해 내가 하고자 했던 말은 이것이다. 성경을 인간입장에서 보지 마라. 하나님을, 예수님을 여의봉으로, 부적으로 만들지 마라. 내가 이렇게 하면 저렇게 반응하시고 내가 저렇게 하면 이렇게 반응하시는 자판기 속의 하나님으로 만들지 말라는 말이다. 자꾸 복 받은 사람의 행동에서 복 받을만한 행동패턴을 찾으려고 하는데, 그런 접근은 완전히 잘못된 방식이다. 물론 그래야 속이 편해지는 당신에 대해 나는 이해한다. 나도 그런 인간이니까. 뭔가 확실하면 편하겠지, 불확실은 불안을 부르니까.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보며 ‘간음하면 저주받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간음한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당혹해하는 당신을 나는 이해한다. 그리고 ‘그건 아마 간음이 아닐 거야 그리고 그런 증거가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싶은 당신의 마음도 이해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거 뭐야 이상하잖아.'라는 생각이 절로 들면서 불안해지는 당신의 마음을 이해한다. 우리는 단단한 땅을 원하니까. 이리저리 모양을 바꾸는 땅은 원치 않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 맘이나 편하자고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믿는 것이다. 당신 발밑의 땅을 단단하게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 있으면 가장 단단한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을 받혀 줄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그리고 그 복은 하나님이 정하신다. 복 받을 만해서 복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로 하셨기 때문에 복을 받는 것이다. 이 관계를 이상하게 꼬지 말자. 당신은 하나님을 그리고 예수님을 당신의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가? 그럼 됐다. 그럼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고, 모든 복에 복으로 넘치게 주실 것이다.


앞 에서 말했다시피 기드온의 삶은 일면 극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야깃거리도 많아 보인다. 그러나 사실상 간단한 메시지가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사랑하셨고 모든 면에서 기드온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보이셨다. 이것으로 끝이다.


여기에서 글을 끝맺어야 하는 줄 알고 있지만, 노파심에서 한마디만 더 해 보도록 하겠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다윗이 바로 이런 관계를 정확히 알고 그에 대해 고백하는 부분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무엘하 7:2-3에서 다윗은 자신은 백향목 궁에 사는데 하나님은 장막에 사는 것이 마음이 쓰여서 나단 선지자에서 성전건축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이 부분이 참 재미있는데 아주 전형적인 열심 있는 집사 또는 장로와 목회자 간의 대화와 같다. 예를 들어 집사가 와서 ”제가 이번에 교회에 주차장을 봉헌했으면 합니다.” 목사가 화답하길 ”집사님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하나님께서 복에 복으로 갚으실 겁니다. 그 마음의 원함도 하나님께서 주셨을 거에요.” 이런 식의 대화인 셈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고 느닷없이 약속하기 시작하신다. 물론 역대상 22:8절에서는 그 이유를 말씀하신다. 따라서 다윗은 이유를 듣긴 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갑자기 약속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부분을 보면 재미있는 대구가 있다. 하나님의 집을 지어드리겠다는 다윗의 말에 대구를 이뤄서 하나님께서 사무엘하 7:11에서 당신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어 주시겠다고 하신다. 즉, 내가 이전에도 한 번 정도 언급했다시피 공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지 우리가 아니다. 가끔 크나큰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의 존재 이유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기 위함이라는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 않다. 여하간 이에 대한 다윗의 다음 고백을 보자.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주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있을 먼 장래의 일까지도 말씀하셨나이다 주 여호와여 이것이 사람의 법이니이다. 주 여호와는 주의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 그런즉 주 여호와여 이러므로 주는 위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신이 없음이니이다. (사무엘하 7:18-22)

다윗은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그 약속이 자기가 잘해서 또는 ”집 지어 드릴게요"라는 말이 기특해서가 아님을 알고 있다. 다윗은 철저하게 자기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있다. 다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시사 이 모든 것을 해 주심을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해 여러 번 ”사람이 무엇인관대"로 시작하는 고백을 하게 된다. (시 8:4, 144:3) 나는 종종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나?’ 하는, 마치 다윗이 복 받을 이유를 가지고 있어서 복을 받았다는 식의, 이제까지 내가 했던 말에 따르면 헛생각을 할 때가 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였고, 하나님의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으며 (베드로전서 4:8) 하나님의 사랑은 다함이 없다. (예레미야 애가 3:22)


물론 신앙의 선배들에게 배울 것이 있다면 배우자. 그것을 틀렸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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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10. 19. 10:32

믿음이란...... Novels or Essays2011. 10. 19. 10:32

믿음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오랜 동안 하게 된다. 매년 나름의 테마를 가지게 되는데 (테마를 내가 만드는 경우보다 생기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올해는 '믿음'이다. 무엇이 믿음일까......
이 블로그를 시작 할 때만 해도 하고 싶은 말이 상당히 많았었다. 그런데 글을 쓰기가 너무 힘들다. 머리가 너무 복잡하다. 2011/10/18 - [분류 전체보기] - 구원에 대하여 2의 경우도 시작은 상당히 오래전에 하였으나, 결국 마감은 이제서야 했고, 그 나마도 그냥 지우고 싶은 것을 아까워서 올렸을 뿐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이다.

얼마전에 고낼료의 이야기를 읽으며 조금 울었다. 원래 질질 짜는 캐릭터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사람인데 고낼료의 이야기를 보면서 조금 짰다. 백부장이 피장이 시몬의 집에 거하는 어부 베드로를 초청하면서 다음날까지 기다리는데 집에 친척들과 친구들까지 다 모아놓고 기다린다. 그들이 과연 불만없이 기다렸을까?
'대체 누구 기다리는 겁니까?'
'베드로라고 하는 하나님의 메신저야.'
'뭐 하는 사람인데요 그리고 어디에서 온 대요?'
'어부인데 피장이 시몬의 집에 있대.'
'왜 그런 천한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 대충 상상이 가능한 대화이다. 이런 상황을 모두 견디며, 그러면서도 그 복된 자리에 친척들과 친구들을 동참 시키기 위해 사정도 많이 했으리라. 그런데 베드로가 들어오자 남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 이 부분에서 나는 눈물을 흘렸었고,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지만 지금 쓰면서도 뭉클함이 올라온다. 결국 그 집에 있는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했고, 베드로는 유대교로 개종하지 않은 이방인에게 세례를 베풀기에 이른다.

왜 눈물이 났을까... 바로 그 순수성이다. 말씀을 사모했고, 하나님을 사모했고...... 주위 상황을 고려하기에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베드로를 보면서 받은 그 감동을 주체하지 못했으리라. 어떤 사람은 이 부분을 보면서 고넬료가 잘 못 배워서 사람에게 절을 했다고 하기도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도 순수하여 감동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믿음이다.

이 고넬료의 이야기를 읽으면, 마치 하나님게서 '너는 언제 쯤 저런 순수한 신앙을 보일래?,' '얼마나 더 기다리면 모든 조건과 관계 없이 믿을래?'라고 물으시는 것 같다. 그리고 정말 몸서리치게 부럽다. 그 고넬료가 너무 부럽다. 수 십년 신앙생활을 했지만 난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성경을 읽느라고 읽었지만 이제서야 고넬료의 신앙이 이해되니 그냥 부끄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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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더 정확한 제목은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우월한 이유' 정도가 되겠다. 이 제목 자체가 상당히 많은 함정을 지니고 있다. 우선 이에 대해 먼저 논해 보자.
  • 우리는 종교인이 아니다. 마음의 위안을 얻자고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종교'에 대해 논할 필요가 없다. 이런 부분이 중요하다면 당신은 종교인이라는 이야기이고, 아직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위치에 대한 자각은 덜 된 셈이다.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의 아들됨을 믿고 있고, 그것이 우리에게는 사실이며 실제이며 진리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들어 낸 교리의 틀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그 교리라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대해서 논하다 보면 글이 산으로 가기 때문에 이 정도에서 멈추도록 하겠다.)
  • 같은 맥락에서 '이유'가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않다. 이유가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나는 이 정도의 말은 알아 들을 수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이 글을 쓰고 있음을 여기에서 밝힌다. 내 글 중에는 믿음안에 없는 사람도 읽을 만한 글도 있지만 지금 쓰는 이 글은 믿음 안에 있으면서 좀 더 확실하기를 바라는 모호한 부분을 알고자 하는 사람을 위해 쓰는 글이다.
  • 그리고 결코 '우월'정도의 약한 이유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절대'이기 때문에 이 믿음 안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환상속에 존재하는 알라딘램프의 지니가 아니다. 실재하시는 나의 구주이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 불필요한 이야기를 한 번 진행해 보고자 한다. 나름대로의 어려움과 이유가 논의 자체의 불필요함 만큼이나 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우월한 이유'라는 제목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미 앞의 글들에서 성경의 무오성은 문자에 있지 않음을 이야기 했다. (2011/02/18 - [Bible Stories] - 야곱의 후손: 성경은 무오한가, 2011/02/18 - [Opinion] - 믿음 그리고 성경) 정확하게 내 생각을 전달하자면 '성경' 자체는 우리 신앙의 도구일 뿐이지 어떤 '신성'시 되는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무오하든 오하든 별 상관 없다. 다만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에는 한 점 실패의 가능성이 없다라는 사실을 믿을 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성경이 그렇게 결함이 많다면 어떻게 읽으며, 그런 불완전한 성경을 가지고 어떻게 다른 종교에 있는 사람들을 전도 할 수 있겠느냐고 질문을 한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상당히 답답한 마음에 질문을 던졌으리라, 그런데 대답을 해야 하는 내 입장도 상당히 답답한 것은 마찬가지다.

먼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깊이 나누다 보면 결국 알게 되는 사실이 있는데 바로 이 들은 내가 더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증명하기 원하고, 그것을 통해 우월성이 증명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것'이 더 좋은 '것'임을 증명하기 원하고 그것을 공격당할 때에 매우 당황스러워 하며, 심지어 분개한다. 마치 성경의 많은 기자들이 악인의 흥함을 보고 분개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하박국 1:13)

먼저 성경의 권위부터 이야기 해 보자. 이 '성경'에 교회 또는 목사 등등을 집어 넣어 '목사의 권위, '교회의 권위'라고 바꿔도 거의 대등하게 이 글에서 논해 보고자 하는 말이 된다. 이 권위라는 말은 원래 권력과 위세를 줄인 말로서 인격을 가진 사람에게나 사용되야 마땅한 용어이다. 그런데 '권위있는 작품'이란 식으로 물건에도 종종 사용이 된다. 이 둘을 잘 구분해서 사용하면 좋은데 종종 왕왕 이 둘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성경이 가장 대표적인데 성경에 권위가 있다는 말을 '권위있는 작품'에서 사용된 뜻으로 사용한다면 아주 적절한 사용이라고 하겠으나, 성경 자체가 어떤 인격체 처럼 존중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식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사람 손으로 쓰여서 사람 손으로 유지 보수 되다가 사람 손으로 편집되어 사람 손으로 번역된 성경에 보기만 해도 죽어야만 하는 (사무엘상 6:19) 하나님이 직접 주신 돌판만큼 성스러운 '권위'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성경을 소중히 여기는 그 조심성 자체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만일 그것을 하나님처럼 여긴다면 좀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더 나아가 성경이 옳기 때문에, 성경이 완벽하기 때문에, 성경이 성스럽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다라고 한다면 진지하게 고민을 해 봐야 하겠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당신의 종교보다 내 좋교가 낫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여기에서 사용된 권위는 뒤에 연결된 말과의 관계속에서 해석해 볼 때에 내가 우려하는 그런 방식의 권위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말하는 다른 종교는 직접적으로는 몰몬교나 여호와의 증인처럼 같은 성경을 보고 있으나 부가 경전 또는 주 경전이 따로 있다든지 아니면 해석상의 아주 큰 차이를 보이는 종교를 이야기 한다. 더더욱이 이후의 대화에서 어차피 완벽하지 않은 성경이라면 몰몬경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데에까지 갔었다. 쉽게 판단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시점에서 '에이 너무 많이 갔네'라고 쉽게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적어도 내 경험상 이 사람은 솔직해서 이렇게 말한 거고, 이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함정에 스스로 빠지는 경우를 많이 보아 왔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한, 이 문단의 첫 질문에서 별 문제점을 못 느끼는 사람들이 대다수 이며,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 중의 대다수도 앞 부분의 질문에 대해서는 타당한 질문으로 생각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면 당신도 이 사람의 후반부의 말을 솔직하기만 하다면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너무 쉽게 판단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질문을 돕기 위해 다음과 같은 말을 덧 붙였다. 성경이 그 완벽성에 대해서 권위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의 등대처럼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마치 왕이 앉는 보좌가 목욕탕 의자보다 화려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왕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누가 왕인 지 확실하게 알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 자체가 너무 많은 허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당사자도 인정했다. 다만 더 좋은 예가 떠오르지 않아서 이런 말을 했을 뿐이다. 어쨌든 이 말은 언듯 그럴 듯 하다. 이 밑에서 이 이야기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다.

말을 너무 길게 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렇게 복잡하게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의 신앙은 성경 위에 서 있지 않다. 우리의 신앙은 반석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서 있다. 우리는 성경이 그럴 듯 해서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믿기 때문에 성경을 보는 것이다. 믿음이 먼저요 그 다음에 실천이며, 그 실천에 필요한 도구들이 있을 따름이다. 그 중 하나가 성경이다. 목사? 교회?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고 싶은가? 믿음이 먼저고 그 다음이 성경, 목사, 교회 등등의 것들이 있을 따름이다. 요즘 교회가 시끄럽다. 성추행 사건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믿을 수 없는가? 그렇다면 믿지 않도록 하라. 내가 여호수아의 말을 여기에서 하고 싶다. 예수님이 믿을만 하지 않게 보이거든 믿지 말라. 그러나 나는 믿을 것이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여호수아 24:15)
이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히브리서 기자는 자그만치 23번이나 '믿음으로'를 강조하고 강조한다. 믿음이 먼저 있었고 그 이후에 여러가지 방법을 통한 실천이 있었다. 믿음으로부터 시작하여 믿음으로 끝나는 것이 우리 신앙이다. 믿을만 해서 믿게 되는 것이 아니다. 나도 정말 간절히 말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믿을만한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 믿으니 영광을 보게 되는 것이다. 보좌 이야기가 나왔었다. 하나님이 이 부분에 있어서 얼마나 불친절 하신 지 여기에서 이야기 해 보자. 예수님이 왕가에서 태어났는가? 유명한 집안에서? 전통있는 마을에서? 예수님은 말 구유에서 태어나셨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는 겨우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누가복음 2:12)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마가복음 11:7)
심지어 이사야에 보면 예수님은 흠모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었다. 심지어 그의 고난을 보며 넌 당해도 싸다고 했다. 믿을만해서 믿는가?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너무 안타깝게도 이 함정에서 사람들이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사야 53:2-4)
이 글의 제목이 다른 종교 (이단 또는 사이비)와의 비교라도 했다. 믿을만 한 것은 다른 종교에 더 많다. 그러니 믿을만 한 것을 찾는 것이 당신의 목표라면 다른 종교로 가 보라. 우리는 멋있지 않더라도 나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어 주신 그 실존하시는 예수님을 믿을 것이다.

그러면 다시 그러면 왜 믿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그 실존 때문에 믿는다고 아무리 피를 토하며 외쳐도 '그런데 그럼 왜 믿어?'라고 묻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이 멸망 할 때 까지 있을 것이다. 나도 계속 한 말 만을 할 것이다. 믿기 때문에 믿는 거고 나에게는 예수님이 실존이기 때문에 사실을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 없으니 믿을 수 밖에 없다고 말 할 것이다. 바울이 감옥에서 찬송을 했다. 그랬더니 지진이 일어나서 감옥문이 열렸다. 스스로 질문해 보라. 바울은 왜 찬송을 했을까? 찬송을 하면 감옥에서 나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어서? 찬송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바울과 실라는 많이 맞은 후에 결박당하여 감옥에 앉아 있으면서 찬송을 했다. 이들의 믿음이 이해가 가는가? 나는 이해는 되는데 납득도 안되고 동일한 신앙의 표현을 할 자신이 전혀 없다. 다만 이해에 근거해서 이야기 해 보겠다. 이들의 신앙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그 신앙이다. 이들은 좋지 않은 현실에서 더 나아질 기미도 없지만 찬송을 했다. 왜? 기쁘니까, 즐거우니까, 그리고 하나님을 예수님을 사랑하니까, 나를 감옥에 가두신 예수님께 감사하니까 찬양한 것이다.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사도행전 16:23-26)
일찍이 다니엘의 세 친구도 같은 신앙을 보여줬다. 풀무불에 던져질 상황에서 능히 건져내실 하나님을 증거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그리 당당했나?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상관없었다. 그들은 정말 상관 없었다. 하나님이 금신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실재였기 때문에 이러나 저러나 상관 없었다. 그저 믿음을 지킬 뿐이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다니엘 3:16-18)
여기까지 말했는 데도 믿을 만한 것을 구하는가? 내가 하나 더 이야기 하고 이 글을 맺겠다. '믿을 만한 것'을 구하는 당신은 당신이 '구원받을 만 하여' 구원받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거부감이 느껴 질 지도 모르겠다. 그러며 문장을 조금 바꾸겠다.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살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어'라고 생각 할 것이다. 아직도 거부감이 느껴지나? 그러면 조금 더 바꾸어 보겠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지 않으면 잘리게 될거야. 그래서 불에 태워 지겠지.' 물론 이 방향으로 글을 써도 한참을 써야 한다. 그 글은 다음으로 미루고, 간단하게 이야기 하자. 내가 뭔가 해야 또는 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마음 깊은 곳의 사탄의 속삭임이 당신에게 다른 식으로 표현 된 것이 믿을 만 하여 믿는다는 마음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정돈된 생활 몰몬교도의 친절함에 대비되는 기독교도의 더러움을 본 당신이 느끼는 좌절 나도 안다. 깊이 공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실재를 버리고 허상을 잡을 수는 없다. 믿음외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도 그들보다 더 우월하길 원하는 맘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그런 시도는 절대 성공할 리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 아빠가 더 힘쎄'라고 하는 유치한 어린 아이 싸움에 동참하여 싸워 주시는 분은 아니다. 물론 그러실 때도 있으시긴 하겠지만 (필요한 경우가 있긴 있으니까) 항상 그러시리라고 기대하지 말라. 더구나 당신이 신앙생활 오래 했다면 절대 기대하지 말라. 30먹은 아들이 60먹은 울 아빠가 너네 아빠보다 더 쎄라고 싸우고 있으면 거참... 뭐라 해야 할 지...

예수님은 목욕탕 의자에 앉아 계셔도 예수님이며, 그 분은 목욕탕 의자에 앉아서 '요놈이 날 알아보나 보자'라고 쪼잔하게 우리를 시험하시지도 않으신다. 내가 믿는 그리고 내가 아는 예수님은 가장 높은 보좌에서 필요 할 때엔 가장 낮은 곳 까지 오시기도 하시며, 내가 원할 때에 그리고 필요 할 때에는 언제든지 당신을 내게 드러내신다. '내가 여기있다 내 아들아 내가 너를 잘 안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분이 내가 알고 믿는 예수님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있어서 다른 종교와의 비교는 너무 너무 무의미하다. 처음부터 질문부터 잘 못 됐다. 제목부터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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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2. 19. 08:42

믿음 그리고 성경 Novels or Essays2011. 2. 19. 08:42

성경을 왜 읽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직접적으로는 그 질문 때문에 쓰게 되었는데, 다른 이야기를 위해서도 일단 이 글이 필요 할 것 같아서 적는 이유도 있다.

나는 성경이 무오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오하다. 그러나 성경은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의 손으로 전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무오성을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다면 원본이 남아 있어야 한다. 물론 원본이 남아 있었다면 그것이 우상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오류 투성이인 성경을 가지고도 전쟁이 나기도 하는 세상인데 원본이 남아있다는 상상은 하기 조차도 무섭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본을 다 없애 버리고 사본만 남아 전해 지도록 했으며, 그 사본 들에는 어쩔 수 없는 오류가 개입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을 이야기 하자면 할 이야기가 참으로 많으나 너무 민감한 이야기이고 이 부분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강요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이 정도만 하도록 하겠다.

이 이외에도 입이 근질 거리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을 하면 정말 문제가 많을 것 같아서 꾹 참도록 하겠다.

그러면 오류가 있는 성경을 왜 읽느냐라고 정확히는 내 아내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목회자도 아니고 교회 관련 일을 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하루에 대충 1시간 가까이 성경을 보고 연구한다. 웃긴 이야기 일 지 모르겠는데, 난 두꺼운 책을 좋아한다. 읽어도 읽어도 끝이 나지 않는 책을 참 좋아한다. 물론 내가 그 내용의 가치를 인정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정말 재미있는 소설을 읽는데 금방 끝나면 안타깝지 않겠는가. 그런 심정이다. 그리고 난 성경이 참 재미있다. 재미있으니 되도록 길었으면 좋겠는데 성경은 충분히 길다. 그래서 좋아한다.
집에 여러 버젼의 성경이 있다. 그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보는 나에게 아내가 왜 읽냐고 묻는다. 더구나 성경에 나타난 오류들을 내가 설명해 주니 더더욱이 그렇게 틀린 글을 왜 읽냐고 묻는다. 물론 아내도 기독교인인데 성경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고 싶어하는 지극히 평범한 기독교인이다.

대답해 보겠다.
일단 성경은 믿어져서 보는 것이 아니고 믿기 때문에 보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을 성경을 통해서 알려 주시겠다고 직간접적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취를 찾기 위해서 읽는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어떤 이유로인해 성경이 다 소실되고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하... 사... 이니라'밖에 남지 않았다 치자. 난 그렇다면 겨우 그 5글자 만으로도 하나님께서 인류에서 하시고 싶은 말씀을 다 하실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게 나의 믿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 성경에 오류가 있건 없건 신경쓰지 않는다. 그리고 오류가 없기를 바라지도 않고 오류가 없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볼 뿐이다.

그리고 난 되도록 내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성경의 문자에 집중하지 않기를 권하고 가르치고 싶다.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에 집중해야지 맥 빠지게 문자에 얽매이고, 틀리지 않았을 거라고 믿고, 성경을 우상화 하다가 뭐 하나 걸리면 넘어져 버리는 약한 신앙을 갖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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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