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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4. 23. 12:48

나는 과연 선한 일을 할 수 있는가 Opinion2018. 4. 23. 12:48

내 아내는 나와 아주 다른 사람이다. 그래서 많이 힘들었고 그래서 많이 감사했으며, 여전히 갈등이 많고 여전히 감사할 거리가 많다.


우리는 둘 다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 믿음에서 도망쳐 본 일도 없다. 계속 그 '길' 위에 있었냐고 물어본다면,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적어도 둘 다 '믿는 사람처럼 보이는 상태'는 꾸준히 유지했었다. 더군다나 나름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기에 머리도 어느 정도는 차 있다 할 수 있다. 따라서 구원에 관하여, 그리고 신앙생활에 관하여 '그리 다르지 않은' 이해를 하고 있다. 그런데 차이도 있고, 그 약간의 차이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크게 두드러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사실 다른 큰 차이들을 이겨나가고 이제 그다음 차례로 떠오르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 둘의 대화에서 자주 거론되는 주제는 '신앙생활'이다. 그런데 이 주제의 이면에는 '구원'에 관한 이해의 불일치가 깔려있다. 지식과 고백의 측면에서 우리 둘은 같다. 그런데 적용에 있어서 '서로 다른 지점'이 존재한다.


그 많은 주제를 전부 다 다룰 수는 없고 오늘은 최근 아내가 한 다음의 말에 관해서 이야기해 보고 싶다.

나는 선을 행할 수 없는 존재이며, 내가하는 모든 일은 악해.

고백으로 보인다. 이런 부류의 절망 또는 고백은 아마 거의 모든 기독교인이 한 번쯤은 했었고, 지금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바울이 이 문제에 관하여 고백적인 글을 로마서 7:18에 남겼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로마서 7:18)

물론 "원함은 내게 있으나"라고 하여, 적어도 그가 선을 행하기 원한다고 함으로써 적어도 나나 내 아내와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나 결국 그도 사람이어서 결코 우리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로마서 7장 전체를 깊이 묵상해보기를 권한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나'를 서로 다른 두 부분으로 구분한다: 속사람과 겉 사람, 마음과 육신 (혼과 육신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나와, 죄의 법을 섬기는 나 등등.


그런데 위에 말한 바와 같이 바울이 이야기하기를 '나'는 선을 행하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로마서 7:19)


다른 곳에서 바울은 다시 한번 사람은 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한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로마서 3:10-12)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대상은 9절에 죄 아래에 있는 사람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로마서 7장의 표현대로 하면 '죄의 법을 섬기는 육신으로서는 의인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로마서 3:9)


여기까지 종합하면, 바울은 '나'를 두 부분, 즉, 속사람과 겉 사람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속사람은 성령의 원하는 바를 따르고 겉 사람은 육신의 원하는 바를 따르며 이 둘은 절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5:17)


그런데 천국은 거듭나야 갈 수 있다. 즉, 구원은 거듭남을 뜻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한복은 3:3-5)

그리고 우리는 거듭난 상태이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19-20)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은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이라 표현함으로는 '나'를 '육체'에서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결국 이 육체 또한 변화될 것이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고린도전서 15:53-54)

그러나 육체가 변화할 때까지 '나'는 여전히 육체 아래에 있고 그 육체는 죄에 속박되어 있다.

I am of flesh, sold into bondage to sin. (로마서 7:14, NASB)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나는 선을 행하지 못하는 존재인가? '나'를 육체로 규정한다면 그렇다. 육체인 나는 절대 선을 행할 수도 없고 선을 행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내 속사람, 즉, 성령에 속한 나는 선을 행하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내가 선한 일을 할 수 있는가.

육신을 죽여야 한다. 매일 매일 육신을 죽이고 성령이 인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육신만 죽이면 나의 속사람은 자연스럽게 성령의 원하는 바를 따라 살게 된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바울은 날마다 죽는 것을 자랑하였나 보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31)

그리고 다른 곳에서 바울은 자기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 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린도전서 9:27)

그런데 이런 모든 과정이 결코 쉬울 리가 없다. 어떻게 보자면 예수님의 도우심 없이 우리들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미션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아내의 위와 같은 고백은 사실 우리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는 것 또는 이미 해 주신 것을 의미 없게 할 수는 없고, 또한 그냥 절망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내가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내가 새 사람을 입어 하늘나라에 합당한 존재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바로 복음이다. 복음을 복음으로 믿는 한, 내 안에 선한 일을 이루실 예수님도 함께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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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이 글은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적었던 글에 대해 어투를 수정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삭제하는 등의 소소한 수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일단 그 관계나 상황의 어려운 정도는 매우 주관적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 다루지 않는다. 그런데 한가지 이야기하자면, 당신은 정말 어려운 상황이라고 생각되는 경우라도 사실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 경우가 백중 구십구는 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정도의 시험 또는 시련만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0:13)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기본부터 점검해 보자. 보통 교회를 다닌다고 한다. 그리고 예배를 본다고 한다. 그런데 교회는 다니는 곳이 아니며, 예배 역시 보는 것이 아니다. 성도가 모이는 곳이 교회이고, 나의 삶이 예배이다. 우리는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교회 공동체에 속하고 적어도 일주일의 하루를 성도 간의 교제에 할애한다. 바로 성도 간의 교제 자체가 '믿음 생활' 그 자체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사의 설교'가 중심인 형식적인 예배가 (ritual) 결코 예배의 중심이 될 수 없다. 같이 모여 찬양하고 같은 성경 구절로 나누고(설교) 소그룹 모임을 통해 교제하는 그 모든 활동을 통틀어서 예배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외의 활동은 엄밀히 말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예배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보통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형식적인 예배에 집중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오해가 '나의 행위'를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로 오해하게 하거나,또는 그것이 그렇게 이해되기를 바라게 한다. 내가 보아온 교회 내의 모든 문제는 바로 이런 부분에서 출발한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의미를 잘못 알고 있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높여 드리며 영광을 올린다.'라는 의미에서의 섬김이 옳은 섬김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의 의미의 섬김은 틀린 접근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시는 것일 뿐이다. , 주체는 하나님이고 나는 하나님 역사의 통로가 될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언가를 해 드릴 수도 없고 해 드릴 필요도 없다. '공급'의 의미로서의 섬김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 우리는 무익한 종일 뿐이다.

자 처음으로 돌아가서 '상황의 어려움'만 떼어서 말해 보자. 성경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보낸 그 자리에서 순종으로 예배의 단을 쌓으라.'라고 하실 것이다. 상황의 어려움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던 아브라함은 사라를 잃을 뻔했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이삭은 그랄 블레셋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하셨다. 야곱과 요셉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겠으나, 길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으므로 이 정도에서 마치겠다. 그러므로 상황의 어려움은 '일반적으로 신앙생활을 함에서' 피할 문제가 아니라 순종으로 받아야 할 문제일 경우가 많다. 물론 구체적인 상황은 스스로 판단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내용이 있다면, 당신이 그 자리에서 어려운 상황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돌파하기로 하든지 그것을 피하기로 하든지 그 결정과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이다. 이세벨을 피해 멀리멀리 달아났던 엘리야를 하나님께서 아기 돌보듯이 돌보았던 것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어처구니없는 선택을 한 우리 일지라도 하나님은 절대 버리지 않으신다.

다음으로 '관계'의 문제를 이야기해 보자. 관계에 문제가 있다 함은 '예배가 제대로 드려지지 않고 있다.'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싫은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 싫은 사람이 그냥 호불호를 떠나 나를 괴롭힌다면 문제가 된다. 그냥 무시할 수도 없고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히고 교회 가는 것이 괴롭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데 '주여 except 저놈'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면 일단 '나의 예배'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보통 관계의 문제는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라는 자세에서 출발한다. 즉, 앞에서 말한 섬김에 대한 오해가 가장 근저에 깔린 문제이다. 종으로서 군사로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신앙생활을 한다고 한다면, 실제로 관계의 문제가 크게 드러나기 힘들다. 당신과 당신을 괴롭히는 그 모두가 스스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고 그리고 그 섬김에 대하여 일종에 빚쟁이로서의 마음가짐을 갖기 때문에 문제가 시작된다. 말로는 섬긴다고 하고 마음으로는 '하나님 내가 이렇게까지 해 주었으니 보답 잘해 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저 인간은 인정하지 않네? 짜증 나는군.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빚을 많이 줬는지 모르는군. 알려줘야겠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정말 많다. 나는 모든 문제는 죄다 이 문제라고까지 하고 싶다. 따라서 먼저 당신의 정체성, 다시 말해 주제 파악을 먼저 하기를 권한다.


그런데 이런 죄성에 가까운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관계의 문제는 일어날 수 있다. 성경에 관계의 문제를 겪었던 수많은 사람이 나온다. 바울이 바나바와 싸웠고, 그 바울이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기도 했다. 요셉과 형제간의 갈등은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었고, 다윗과 요압의 갈등은 유치하게 끝났다. 이 외에도 수도 없는 관계의 문제들이 성경 곳곳에 적혀있다. 그럼 그것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교훈은 무엇이며,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서 주목할 또 다른 하나는 '항상' 관계의 문제는 ''라는 자아가 부각 되었을 때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물론 위의 '섬김'에 관한 문제도 본질상 같은 문제이긴 하다.) 동시에 참 재미있게도 그 관계의 문제까지도 하나님은 들어 사용하셨고, 자녀에게 좋은 것으로 보답하셨다. 바울과 바나바의 싸움은 하나님 나라의 더욱 빠른 확장을 가져왔고, (아마도) 베드로가 회개하게 하였을 것이며, 요셉이 애굽에서 미래를 준비하게 하기도 하였다. 다윗과 요압의 갈등은 아마 다윗이 타락하는 것을 어느 정도 조절하게 하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관계의 갈등도 선하다는 말인가? 전혀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관계의 갈등이 있다면, 내가 너무 나를 내세우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야 하며, 동시에 이것 또한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실 하나님으로 위로를 얻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관계의 갈등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관계의 문제로 교회를 옮기는 것은 개인적으로 좋지 않다고 본다. 옳지 않다고 썼다가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닌 경우 또는 옳고 그른 문제로 해석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서 좋지 않다고 바꾸었다. 그런 문제로 교회를 옮기게 되면 계속 옮겨 다녀야 한다. 무시할 것은 무시하고 좋은 관계를 취해야 한다.

내 이야기를 잠깐 해본다면, 나는 사람을 싫어한다. 그리고 상당히 비판적으로 사람을 본다. 특히 나는 내가 출석하는 교회 담임목사의 설교를 상당히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편이다. 교회의 교육 프로그램, 방향, 등등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교회에 다니는 이유는 그 담임목사가 자기반성을 하는 분이라는 것과 적어도 이 교회의 목사들은 교리상으로 바로 서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런 교회 찾기도 쉽지 않다. 물론 내가 다니는 교회에 생명과 회복만 있지 죽음과 저주에 대한 경고가 없어서 회개에 약하다는 부분을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어느 교회든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그 정도는 수용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지금 다니는 교회를 다닌다. 더구나 좋은 사람들이 있다. 존경하는 부목사님이 있고, 소그룹 모임과 양육모임 등에서 만나는 신앙의 동역자가 이 교회에 많이 있다. 걸쩍지근한 사람도 같잖은 사람도 짜증 나는 사람도 수없이 많으나, 그냥 무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정도는 옮길까 하는 생각도 한다. 왜냐하면, 내 신앙 스타일이 너무 편향되어 있어서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자 하는 생각 때문이다. 너무 지적으로 흐르는 나의 신앙을 조금 행동하는 신앙 쪽으로 당기고 싶어서 '은사 주의 교회 (charismatic church)'에 다녀볼까 하는 생각이 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천국 백성으로서의 훈련을 쌓아 간다고 할 때, 나에게 필요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다른 교단을 택해 보고 싶은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어려움' 때문은 아니다.

신앙생활의 중심에 예수님을 두고 생각하기를 바란다. 보통 관계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아주 활동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경우 한 가지를 꼭 염두에 둬야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행정적인 부담을 지라고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질서''필요' '편의'를 위해 사람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교회일'로 인해 부딪히는 관계가 당신을 힘들게 한다면 다 버리길 권한다. 그런다고 하나님께서 '야 너 왜 일 안 해'라고 하지 않으신다. 사도들이 일곱 집사를 세우고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고 했던 말씀을 곱씹어 보아야 한다. 신앙생활 중에 기도와 말씀을 제외하고 '꼭 해야 하는 일'이란 없다. 사람들의 말은 사뿐히 무시해야 할 때도 있다. 성경을 발로 읽는 사람들의 이른바 '장로의 유전'에 따른 도전에 일일이 대응할 필요는 없다. 예수님과 및 제자들이 수없이 장로의 유전에 대해 비판하였으나, 여전히 교회는 장로의 유전에 매여있다. 사람의 경험을 말씀 위에 두는 일이 많다. 나는 지금 소그룹 리더와 일대일 그리고 교리 교재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중 하나를 버리라고 하면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교재 만드는 일을 관둘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 이미 관둔 상태임.) 그 일은 내가 존경하는 목사님과 하는 것이고 좋아하는 집사님이 강권해서 시작한 일이며, 약간의 지적욕구를 채울 수도 있고 지적과시도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 신앙과 관계된 일은 아니다.


정답은 없다. 결국, 당신의 선택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통해 '옮기지 말라.'라고 권하고 싶다. 상황의 어려움도 관계의 어려움도 당신에게 주어졌다면 필요하니까 주어졌다고 생각하기를 권한다.


당신은 어떤 스타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왜 하는가? 무엇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가? 무엇이 강점인가? 하나에 치우치면 다른 하나는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둘 다 잘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너무 모든 것을 잘하기 위해 자신 채찍질하지 말아야 한다. 회개는 필요하나 자책은 필요 없다. 죄책으로부터의 자유를 예수님께서 주셨고, 우린 감사할 일만 남았다. 물론 그 감사는 정당한 회개를 동반하며, 회개를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너무 원론적으로 말하지 않았나 걱정이 된다. 나는 신앙생활이 줄타기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너무 어렵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라는 하나님 말씀이 야속할 때도 잦다.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다. 믿음의 길은 좁은 길이다. 절대 쉽지 않다. 우리 모두 바울처럼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길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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