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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하나님'에 해당되는 글 2

  1. 2012.12.01 행복에 대하여
  2. 2011.02.08 하나님 바라보기
2012. 12. 1. 14:23

행복에 대하여 Opinion2012. 12. 1. 14:23

우리는 자주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직접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말이 내포하는 성경적 또는 신앙적 의미와 다르게 사용되거나 이해되는 경우를 종종 보아 왔다. 더구나 근래에 들어서 이 말 때문에 힘들어하거나 반대로 이 말을 사용하여 남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여럿 보게 되어 이에 대해 글을 써 보려고 한다.


먼저 질문으로 시작해 보자.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신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대답은 당연히 '그렇다'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원하지 않는다.'라 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대대적인 수정이 불가피하다. 사랑의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 나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 정도만 열거해도 이런 성품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원하신다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고난을 겪는 사람이 적지 않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삶에서 전혀 하나님의 향기는 나지 않은 채 외적으로 너무 풍족한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원한다는 논리 아래 전혀 정돈되지 않는 삶을 버젓이 사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는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다르게 말한다면 그들은 풍족한 자신들의 삶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증거라고 생각하며, 따라서 그들은 경건 생활을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논리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이 옳지 못하게 살아서 그렇게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기도 한다. 자기의로 똘똘 뭉쳐있는 그들을 우리는 '악인'이라 부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리고 그들을 보면서 악인의 형통함에 대해 개탄했던 성경의 인물들이 생각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원한다는 논리에 동의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가당착에 빠지기 일쑤다. 더구나 우리 마음 안에는 그들이 악하게 보여도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솔직한 속내가 자리하고 있다.


나는 이 글에서 그들이 '악인'임을 증명하려는 생각은 없다. 그건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문제이니까. 나는 이 글에서 이 문제에 대해 혹시라도 갈등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어느 정도 정돈된 의견을 들려주고 싶다. 또는 이런 문제로 고민을 겪는 사람을 보면서 위로를 해주고 싶어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이 글을 쓰려고 한다. (말을 점잖게 하려다 보니 뭔가 모호한 문제 제기가 되어 버렸다.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해 보겠다. 요즘 큰 교회는 부자를 우대한다. 이건 너무 명확해서 아니라 하기 민망하다. 그리고 그 부자들을 단순히 우대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부자들이 의로워서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는 논리를 은연중 인정해준다.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설교도 상당히 많다. 더군다나 그 부자들 자신도 자신들이 의로움의 결과로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께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사랑을 받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다 보니 그런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쉽게 던지는 말로 상처를 주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교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복음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관해 혼란스러워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논리, 즉, 의로워서 부자가 되었다는 논리를 깨부수지도 못하고, 실상 깨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소외된 그들조차 부자들의 '부자가 되는 방법'을 따라 해서 그들 역시 부자가 되고 싶은 소망이 마음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이 문제에 관해 명확한 설명을 찾기도 어렵고 찾으려는 노력도 현대교회 안에는 별로 없다.)


질문을 하나만 더 해보자. 그러면 행복이란 무엇인가? 아니 어떤 상태일 때에 그리고 어떻게 되면 우리는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기게 될까?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이라면 이에 대한 세련된 대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계획, 방법대로 살 때에 우리는 행복해 질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의 원하는 바와 하나님의 원하는 바가 상치가 된다면 어떻게 되는가? 과연 당신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관해 관심이 있기는 한가? 삶이 전혀 정돈되지 않고 아름답지 못하게 살면서 하나님이 자기의 행복을 원하신다고 하는 그 사람은 아마 자기가 원하는 바를 하나님도 원하신다고 굳게 믿고 살지도 모른다.


어렵게 돌아가지 말고 직접 이야기를 해 보자. 우리는 '내가 원하는 상태,' '편안한 상태,' '내가 즐거운 상태' 등등에 해당하는 상태에 있을 때 행복하다고 이야기한다. 행복에 대한 이런 접근법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이 접근법은 내가 내 삶을 계획하고 내가 내 삶의 주인임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경우 하나님은 그저 조력자일 뿐, 우리가 하나님을 그리고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은 그저 공허한 거짓 외침이 될 뿐이다. 내가 주 (Lord)라고 부른다면 그분이 내 삶의 주인이 됨이 너무 당연한데도 앞의 접근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경우 전적으로 그가 삶의 주인이 되어 버린다. 그들이 즐겨 인용하는 성경 구절들을 열거하며 하나하나 그렇게 적용하면 안 된다 말하고 싶으나,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고 믿겠다. (내가 왜 이렇게 이야기했는지에 관하여 부연설명을 해야겠다. 내 주변에 빨리 삶이 여유로워진 사람이 있다. 물론 오랜 시간 동안 고생을 했던 사람인데, 최근에 들어서 다방면에서 여유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어려웠을 때의 버릇을 여전히 고치지 못했다는 데에 있는데, 예를 들어 탈세를 절세라 우기기, 속여서 싼값에 호텔 이용하기를 똑똑하게 돈 아끼기라 우기기 등을 아직도 즐기고 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야 나는 하나님께서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신다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해 보고 싶은 거 다 해 볼 거야. 늙으면 못하지 않겠냐? 그러니까 너도 젊을 때에 해 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봐. 하나님이 이 좋은 세상에서 좋은 것을 누리라고 주셨는데 즐기지 않으면 되겠냐?" 뭐 즐기고 싶어도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논의는 이 사람 앞에서 사치일 뿐이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을 배우듯이 천국 소망을 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경기에 최선을 다하는 경주자로서 삶이 돼야 하는 이 세상을 '좋은 것을 즐기라고 주신 좋은 세상'이라 생각하는 것도 애교다. 어쨌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고,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그렇지 않다고 장담하겠느냐고 나는 질문하고 싶다.)


더구나 내가 원하는 삶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과 정반대이다. 다음의 말씀을 살펴보자.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7:21-25)

내 속사람이 원하는 대로 사는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상태이고, 그 상태가 바로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있는 상태이다. 즉, 내 육신이 원하는 상태는 내 마음이 원하는 상태와 싸워야만 하는 정 반대의 삶이다. 나를 잘 정돈하여, 즉, 경건 훈련을 통하여 내가 원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되도록 만들어보자? 이런 식의 논의는 교회 안에서 흔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아마 많은 사람이 그 진위에 대해 고민해 본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도 전혀 맞지 않는 헛소리이다. 성경은 우리가 그럴 수 없다고 강력하게 이야기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5:17)

내 육체의 소욕은 아무리 노력해도 성령의 소욕을 거스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 세상에 육신으로 선한 사람은 없다. 따라서 육신을 경건 훈련을 통하여 성령의 소욕을 따르게, 즉, 선하게 만들 방법은 애초에 없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로마서 3:10)

오죽하면 사도바울은 날마다 죽어야 했겠는가? 이 문제에 관하여 생각해 보았는가? 한번 죽었으면 되었지 왜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어야 했을까? 내 삶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바꾸는 작업은 경험이 쌓인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훈련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며 많이 배운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날마다 죽는 방법 외에는 없다. 이 정도로 어려운 작업이 바로 삶의 주인을 내려놓는 일이다. 따라서 행복의 의미를 내가 기준이 되어 정한다면 그 행복은 절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과 같을 수 없고 비슷할 수조차 없다. 오히려 완전 정 반대의 삶이 될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렇게도 날마다 죽고, 자신을 쳐 복종케 한다고 이야기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31)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린도전서 9:27)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변화되기 전의 육신은 절대 훈련되거나 길들여 지지 않는다. 아무리 모세여도,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어도 바울과 같이 매일같이 육신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일을 반복하지 않는다면 다시금 개가 그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이 반복되는 죄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해도 아직도 '그래도 노력하면 점점 변화되지 않나? 그걸 위해 경건 훈련을 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질문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어차피 문제될 것이 없다면 나도 그 말을 인정해 주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든 저렇게 생각하든 경건 훈련은 필요하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강력하게 말하는 이유는 그런 접근이 '자기의'에 빠지기 쉽게 하며, 결과적으로 완전 다른 길로 가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건 훈련은 영의 유익을 위한 것이지 육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행복의 정의를 내가 하는 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복을 원하신다는 명제는 거짓이 되어버린다. 행복의 정의를 내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맡긴다면 물론 그 명제는 참이 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반대말 격인 고난에 관하여도 한번 생각해보자. 역시 고난의 정의를 인간이 하면 인간이 정의한 행복과 반대말이 된다. 그러나 고난의 정의를 하나님께서 하신다면 하나님께서 정의한 행복과 동의어가 될 수도 있다. (항상 그렇다고는 못하겠다.)

고난에 관한 논의는 다양한 면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따라서 간단하게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과 '내가 원하는 삶'의 측면에서만 보자. 조금은 유치하지만, 효과적인 예가 하나 있어서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이 이야기는 아내가 내게 해 준 것인데, 아내는 또 그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그러니까 누가 최초 언급자인지는 모르겠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종종 다 낡은 딱지를 양손에 쥔 아들에게 멋진 로봇 장난감을 선물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같다. 아버지는 로봇 장난감이 훨씬 더 재미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아들은 낡은 딱지를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을 놓아야 받을 수 있는데 놓지 않으니 받을 수 없다." 약간 맞지 않는 부분도 있겠으나, 내가 말하고 싶은 의도는 다들 눈치챘으리라 믿는다. 하나님께서 내게 요구하시는 고난은 그 낡은 딱지를 내려놓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 고난의 뒤에는 로봇 장난감이 기다리고 있다. 유치하고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고난을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예라고 생각한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인 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진정한 행복에는 이를 수가 없다. 그래서 종종 하나님께서는 내 삶의 주인을 나에서 하나님께로 바꾸는 작업을 하신다. 그리고 정말 사랑하시는 사람이라면 '종종'이라는 단어를 '필요할 때마다 항상'이라고 바꿔야 한다. 그런 경우를 우리는 주위에서 보기도 하고 우리 삶에서 직접 경험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고난'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고난이 복'이라는 말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하였고, 그들이 말하는 '고난이 복'이라는 말이 바로 이 뜻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고난을 주께서 주시는 평안으로 이겨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주위에 누가 봐도 고난 중에 있는데 평안한 사람을 한둘 알고 있는 재수 좋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당신이 그 행운의 주인공이라면 그들에게 가서 행복하냐고 물어보라. 그들은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어려운 삶의 모습과 전혀 관계없이 행복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그들은 바로 다음날 무너질 가능성도 함께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사람이지만.


행복은 간단하게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행복이란 내 삶의 주인이 예수님인 상태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시기를 바라심에도 불구하고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정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일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난도 행복이다.


이렇게 보자면, 현대 교회 내에서 기득권층이 이야기하는 행복론과 고난론은 전부 틀렸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행복한 이유가 '하나님께서 (그들의 의로운 행동에 대한 보답으로) 그들이 행복하도록 도와주셨기 때문이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은 철저히 예수님은 조력자일 뿐이고, 삶의 주인은 그들 자신이다. 그러므로 틀렸고, 그런 인생은 행복할 수 없다. 모두 알다시피 우리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존재들이다. 그런 미약한 존재가 주인인 삶인데 어찌 행복할 수 있단 말인가? 일장춘몽처럼 찰나에 지나갈 행복'감'은 가능할지 모르나, 지속 가능한 궁극의 행복에는 절대 이를 수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하겠다.

  • 예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되셨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행복해 질 수 있다.
  • 육신으로는 절대 구원에 이를 수 없다.
  • 육신은 절대 선해지지 않는다.
  • 육신의 소욕은 항상 영의 소욕을 거스른다.
  • 내 육신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내가 원하는 것은 절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같을 수가 없다. 따라서 바울처럼 나를 죽이는 삶을 반복해야 한다.
  • 하나님은 도구나 조력자가 아니다.
  • 내가 사랑받을만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므로 사랑받는 것이다.
  • 복 받을 만한 의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고난은 삶의 주인을 바꾸는 과정을 말한다.

종종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기도했더니 어제까지 맛있던 술이 이제 맛이 없어요.' '담배가 저절로 끊겼어요.' '기도했더니 점점 내가 변해가고 예수님과 닮아가는 것 같아요. 이런 것이 바로 성화의 과정이고 신앙생활인가 봐요.' 이런 말은 가슴 아프지만 틀린 말이다. 나도 이렇게 믿고 싶다. 나도 변화되고 싶고, 어제 나를 괴롭혔던 주제가 내일은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반복되는 말이지만, 우리가 어떤 과정을 통해 육신을 길들일 수 있다면 (물론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셨다고 주장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와 당신의 목숨을 우리를 위해 주실 필요가 없었다. 그냥 우리 수명을 아주 길게 해 주시면 될 일이다. 또는 윤회하면 된다.[각주:1] 더군다나 나이 들어서 오히려 하나님께 책망받을 일을 많이 했던 다윗이나 노아 그리고 매일 죽지 않으면 신앙을 유지할 수 없었던 바울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것인가?


이런 말을 마치 경건 훈련의 목표인 양, 그리고 자신은 이미 그 정도 수준은 이룬 양 말하는 교회의 많은 멍청이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라. 우리 삶에서는 오직 예수만 드러나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 해 주신 일'을 간증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것만을 말하려고 하든지, 그것 외엔 할 말이 없다면 예수님을 '내 삶에 무언가 해 주시는 분'정도로만 생각하는 셈이 된다. 예수님은 내 삶의 주인이다. 조력자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나누어야 할 주제는 '하나님께서 내 삶에 해 주신 일'이 아니고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 더 나아가 '예수님의 우리를 위한 사랑'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무언가를 해 주셨다면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지 사랑받을만한 무언가가 있어서가 아님을 잊지 마라. 마지막으로 성경을 한군데만 더 인용하고 글을 맺겠다. 당신은 절대 여기에서 말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하며, 동시에 이런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도 마라.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디모데후서 3:1-5)


사족: 이 글의 초고는 12.11.30에 만들어졌었으나 완성은 13.09.12에 와서야 하였다. 그 사이에 내 생각이 많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생각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한 면이 있다. 사실 지금의 나로서는 행복에 대하여 옳지 못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다.

  1. 당신은 우연히 윤회라는 개념이 나왔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온 인류가 공유하고 있다. 정확히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구원방법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특별하지 않다. 지금 내가 이야기한 것과 같이, '내가 노력하여' 선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자연스레 도달하는 방식이 윤회일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들도 선해지려는 자신의 노력에 비해 느린 그들의 성장에 절망했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느낄 것인데, 심지어 자기들이 생각해 봐도 주어진 수명 내에서는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다면 자연스레 윤회를 상상하지 않을까? 그래서 불교가 생겨났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본문으로]
:
Posted by ToBeStable
2011. 2. 8. 09:12

하나님 바라보기 Bible Stories2011. 2. 8. 09:12

더 정확한 제목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또는 주와 동행하는 삶이다. 그러나 일단은 하나님이 어디에 있는 지 볼 수 있는 것이 가장 기본으로 전제되야 하는 것 아니겠나 하는 생각에서 제목을 이렇게 정해 보았다. 믿음 생활을 제대로 해 보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제일 먼저 걸리는 문제가 바로 다음과 같을 것이다.

  •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무엇인가?
  •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이 무엇인가? 아니 정말 듣는 사람들이 있긴 있을까?
  • 그렇게 동행하는 사람은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듯이 변하는가?

정말 민감한 질문들이다. 모두가 같은 질문이면서도 아주 다른 질문이기도 하다. 더욱 묘한 것은 이 모든 질문에 대하여 부정적인 그리고 긍정적인 대답이 가능하며, 둘 중 어느 것도 완벽하게 정답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보는 시작과 상황에 따라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른 대답은 가능하겠지만 언제나 옳은 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먼저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성경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으로 처음 언급된 사람은 에녹이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세기 5:22)
에녹은 365년의 생애 중에 무려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 엘리야와 더불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성경에 언급된 유이한 사람 중의 한명이다. 그의 삶은 어떠했길래 그렇게 간단히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적힐 수 있었을까? 자세한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성경에 동행하는 삶이 무엇을 뜻하는 가에 대해서는 전반에 걸쳐서 너무 많이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다 훑을 수는 없고 다만 몇 가지 중요한 구절들을 언급해 보겠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4-5)
아주 직접적인 것 같으면서도 내 삶에 적용하려면 어려운 부분이 있다. 일단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과의 동행은 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받아 사는 것인데, 내가 지금 예수님께 붙어 있는 지는 열매로 구분이 될 것이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누가복음 6:44)
그리고 그 열매에 대하여 역시 여러 곳에 언급이 되어 있으나, 다음 구절이면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 할 것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22-23)
여기에 자신있게 저는 그런 열매를 삶 중에 맺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지 모르겠다. 그러면 나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못한 것이고, 예수님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아닌 것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나는 말하겠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 5:48)
그러나 결단과 함께 믿기로 작정한 사람에게 단번에 주어지는 구원으로 인해 (2011/02/03 - [Bible Stories] - 구원에 대하여)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또한 아버지로서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우리들이 행복하기를 바라신다는 나는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방향성이 온전한 방향, 그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지 그렇지 않을 때에 순식간에 아들에서 버려진 죄인으로 신분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사도들 역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사도행전 15:10)
물론 사안이 조금 다르긴 하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비슷한 말을 해 주고 싶다. "왜 불가능한 방식으로 당신의 신앙을 증명하려 하십니까? 당신의 평가 방식으로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사람이 세상에 과연 있겠습니까?" 우리는 조금 우리 자신에게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다시 돌아와서 그러나 어쨌든 '나는 현재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을 하려고 한다면 현재 내 삶에 성령의 열매가 맺혀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또는 맺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노력만으로도 실질적인 열매가 없어도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을 보시기 때문이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베드로전서 1:17)
자 이제 우리가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산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내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다면 당연히 포도나무에서 주는 양분으로 살아야 한다. 나의 목자가 주님이라고 고백한다면 목자가 지시하는 대로 가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목자의 목소리를 안다고 하셨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요한복음 10:3-5)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한복음 10:14-15)
즉, 우리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목소리임을 확신한다면 다른 목자의 소리에 도망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어디까지나 목소리가 들려야 이 이야기는 시작 될 수 있다. 내가 엄마의 목소리를 아무리 알면 뭐하겠나? 들려야 그 목소리를 따를 지 따르지 않을 지를 결정이라도 하게 될 것 아니겠는가? 더구나 목자가 옆에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다른 목자를 좇지 않겠지만, 목자는 어디 있는 지 모르겠는데 달콤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면 거기로 가게 되지 않겠는가? 결국 중요한 것은 목자의 음성을 듣기위해 목자가 적어도 어느 방향에 있는 지는 알아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이 문제가 나를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괴롭혀 왔었으며, 지금도 이 문제로 인해 고민하고 발버둥치고 있음을 고백한다. 나 나름대로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2011/02/03 - [Bible Stories] - 구원에 대하여에서 사용한 예에서 찾았었다. 우리와 다른 차원에 살고 계신 하나님을 보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이 있을 만한 방향을 열심히 처다보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2차원을 살고 있는 자에게 3차원의 높이라는 개념은 너무 어렵긴 하겠지만 그나마 그것이 가능해 지려면 성경을 통해 설교를 통해 상담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 볼 때에야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 나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이해를 못하고 있었다.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나 또한 하고 살았었지만 정작 나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었다. 이 역시 틀린 것은 아니나, 사랑이 하나님의 대부분이라서 공의는 하나님의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거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도 있었고 잘 못 이해하는 부분도 많았다. 이런 경우 설령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을 하려서 뚜렷하게 듣기 어려울 것이다.

과거 어떤 브라질 선교사님으로 부터 다음과 같은 설교를 들은 일이 있다. 너무 오래 된 일이고, 노트가 남아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 이야기는 어느 정도의 각색이 불가피했다. 당시는 지금으로 부터 약 10여년 전 이었기 때문에 아마 지금 보다 브라질 선교 현장은 더욱 열악했으리라 생각된다.

선교지에서 가장 힘든 일은 향수병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안테나를 설치하면 한국 방송이 잡히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장 전파사에 가서 철사를 사다가 원형 안테나를 만들어서 이리 저리 돌려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방향 어느 파장에서 한국노래가 들리지 않겠습니까? 결국 그 전파는 항상 곁에까지 도달해 있었던 것이고, 난 그저 다른 주파수 다른 방향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듣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무엇인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지도 모르고 주파수도 전혀 다른 곳에서 헤매다 보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할 뿐입니다.

이 설교를 들을 당시 나는 '설교 참 유치하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하나님에 대해 더 고민하고 하다 보니 이 말씀이 진리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들의 말 속에는 서로 형태는 다를 지언정 진리를 담고 있다는 것을 하나 깨달았고, 그 진리가 내가 이제와서 깨닫고 있는 어렴풋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세와 일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음성은 항상 우리 주위에 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
내가 그 음성을 어렵풋하게 나마 듣고 올바른 문을 열면 예수님께서 직접 내게 찾아 오시사 그로 더불어 먹게 될 것이다.

이 정도 되면 과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다는 것의 실재적인 형태가 무엇일 지 궁금해 질 수 있다. 나 역시 매우 궁금했었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이야기 하던 모세가 있었다. 심지어 그는 하나님의 뒷 모습을 보기까지 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신명기 34:1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출애굽기 33:20-23)
모세는 워낙 특별하니까 다른 사람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또는 하나님의 사자와 직접 대화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나온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항상 그러하지는 않았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렇게 직접적으로 헤깔릴 것 전혀 없이 하나님과 대화를 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 될 만한 곳이 역시 여러 군데 발견 된다. 다시 말하지만 모세는 조금 특별하다. 나중에 이에 대해서도 글을 쓸 수 있게되면 좋겠지만 모세는 하나님과 만나는 방식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출애굽기 33:11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와 친구와 이야기 하듯이 이야기 했다고 한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에게 대면하여 따지기도 하고 물어 볼 것이 있을 때에 회막에 마음대로 드나들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는 하나님을 만나러 성막에 들어가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어려운 일이었고 절차도 복잡했으나, 모세는 상당히 가볍게 하나님과 만나곤 했던 듯 하다.

다시 돌아와서 엘리야의 경우를 보자. 열왕기상 18장에서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바알 선지 450 그리고 아세라 선지 400명과 대결을 벌이고 대승을 거둔다. 그런데 이세벨이 자기를 죽이려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40일 거리에 있는 호렙산까지 도망하고 만다. 여기에서 인간의 나약함등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이 가능하겠으나, 나는 엘리야도 하나님과 그렇게 뚜렷이 소통하지는 못했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다음으로 예레미야를 보자. 바벨론이 통치자로 세운 그다랴가 이스마엘의 악한 계략에 의해 죽고 나니 남은 사람들은 그로 인해 다시 한 번 바벨론의 공격을 당할까하여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예레미야 41) 이 때문에 요하난을 중심으로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으러 온다. (예레미야 42) 그래서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질문을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은 그로 부터 10일 후에 온다.
십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 (예레미야 42:7)
어떻게 보면 기가막힌 일이다. 질문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분초가 떨리는 상황인데, 하나님은 10일이나 걸려서 말씀을 하신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은 우리와 다르다라는 주제로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과 만나고 싶을 때에 항상 기도만 하면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의 이야기에서 결정적인 단서를 얻는다. 알다 시피 사도 바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개심하여 생애를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바쳤던 위대한 인물이다. 바울이 아시아로 가고자 하는 마음을 접고 마게도냐로 가는 과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사도행전에 묘사된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사도행전 16:9-10)
바울 역시 하나님의 음성을 뚜렷하게 듣지는 못하였다. 즉, 어떤 뜻은 알게 되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일 지 그냥 환상 일 지 확신하지는 못했다. 다만 그는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하고' 나아갔을 뿐이다. 역시 여기에서 진정한 믿음에 대해 논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바울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하나님에 대해 상고하고 이해하려 애쓴다. 그리고 그 방향을 향해 최선을 노력을 다하여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한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 내게 찾아와도 그렇게 직접적으로 찾아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다만 확실한 것은 내가 인정하고 나아갔을 때에 하나님께서 큰 은혜로써 증거를 우리에게 주시며 큰 기쁨과 평안을 주신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만약 내 귀에 대고 '아무개야 오늘 네게 갈 길을 알려 주겠다'라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경우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것은 아주 드문 현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더구나 어떤 형식이든 간에 하나님은 우리와 다르시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역시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믿기로 작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내 앞에 직접 나타나 멱살을 잡고 이야기 해도 그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긴장하고 하나님이 계신 곳을 향해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방향이 조금만 달라지면 시간이 지날 수록 하나님과 멀어져서 결국 하나님과 전혀 상관 없는 곳 까지 갈 수도 있고, 그런 경우 돌아오는 과정은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고린도 성도를 향하여 왜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했을 지를 상고해 보라.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31)
그 역시도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께 민감하기 위해 날마다 죽을 정도의 고통을 감내하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역시 이와 같은 노력을 하여야 하나님과 대화하는 삶을 살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하나님과 만나고 나면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듯이 단번에 사람이 변하는가? 나 역시 교회에서 양육을 하는 입장에도 있어 보았고 양육을 받기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그리고 여러 책들을 통하여서도 믿음안에 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런데 그 중에는 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짝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악한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대체 그들은 왜 변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런 그들도 하나님을 만난 적이 있긴 할 것인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누가복음 5:31)
예수님의 이 말씀은 죄송하지만 그런 악한 사람들을 만나 보았을 때에 별로 위로가 되지 않는다. 어떨 때에는 왜 우리가 믿는 이 믿음은 이렇게도 능력이 없을 까라는 생각까지 들기도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왜 변하지 않는가가 아니다. 실로 중요한 것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사 죽기까지 하였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모습과 관계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누구를 악하다고 생각하는 당신 역시 악한 사람이며, 사람 사이에서 조차 공개하기 어려운 추한 부분이 있음을 인정한다면 그런 당신을 사랑하시는 예수님 한 분으로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6-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8)
내 짧은 경험으로 비추어 보아, 사람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사람이어서 죽도록 나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지 않는 한 사람의 악한 본성은 나올 수 밖에 없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남을 심하게 정죄하지는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차피 나도 그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로마서 2:1)
다윗은 하나님으로 부터 기적과 같은 사랑을 받았고 또한 능력있는 삶을 살았었지만 잠깐 게을러 졌을 때에 밧세바를 취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인간적으로 판단해 보자. 정말 기막힌 일이다.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는 다윗의 30인의 용사중의 한 사람이다. 밧세바의 아버지 엘리암 또한 30인의 용사에 들어가 있다. 그의 할아버지 아히도벨은 다윗과 절친한 사람으로 후에 이 일로 인해 상심하여 압살롬의 모사가 되었었고 그에 대해 다윗은 시편에서 친구도 나를 대적하였다고 한탄하기도 한다. 즉, 최고 충신 가문의 사람이다. 다윗이 밧세바를 보면서 그 사실을 몰랐을까? 당연히 알았을 것이다.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 인간만도 못한 사람이다. 사람이 적어도 신의 또는 의리라도 있어야 하는데 다윗은 그러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다윗도 버리지 않으셨고 사랑하셨다.
그리고 나는 확신한다. 나도 다윗보다 더 낫지는 못하다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다만 나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라 하며 그런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 할 뿐이다.

이 외에도 다메섹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으나, 자신에게 일종의 은인과 같은 바나바의 조카 마가 때문에 목소리 높여 바나바와 언쟁했던 바울이나, 교회의 지도자가 된 이후에도 남들의 시선 때문에 소심하게 올바른 것을 올바르다 말하지 못하였던 베드로의 이야기 (갈라디아서 2:11-13), 아브라함과 이삭의 대를 이은 거짓말 등등을 전부 훑지 않아도 인간은 어차피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안에서 바로 서 있을 때에 산을 명하여 옮기라 명하면 옮겨지기도 하며, 예레미야가 달리는 마차보다 더 빨리 달리기도 하고 빌립이 이 곳 저 곳으로 순간이동을 하기도 하는 등의 초 자연적인 일을 행하는 것도 가능한 것이 바로 우리 믿음 안에 사는 사람이다. 이 두 가지 사이에서 희망을 잃지 않되 너무 잔인하게 스스로와 형제 자매를 몰아붙이는 우를 범치도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해 본다.

이로써 이 긴 글을 마치려 한다. 좀 쪼개야 하려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뭐 별로 읽을 사람도 없을 거니까 그냥 이대로 두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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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