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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6. 13. 13:21

구약은 어려워 Novels or Essays2012. 6. 13. 13:21

보통 구약은 어렵다고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구약의 하나님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기독교인이 많다. 이에 대해서 오늘 살펴보았으면 한다.


어렵다는 그 말이 그저 말 그대로 어렵다는 뜻이기만 하다면 별로 할 말이 없다. 어렵다고 하는 사람에게 쉽다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 없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신약이 훨씬 더 어렵다고 말하겠지만, 누구나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은 다를 수 있으니 할 수 있는 말도 한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어렵다는 말을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작게는 구약의 위인을 (기독교인으로서 믿음의 선진을 위인으로 부를 수 없다고 공격할 수 있겠지만, 그냥 넘어가자.) 이해할 수 없다는 불평으로부터 크게는 구약의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위험한 발상까지 다양하다. 어찌 됐든 단순히 어렵다는 이야기이기보다는 '이해할 수 없다.' 또는 '이해 못 하겠다.'라는 이야기인 경우가 많고, 이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이 글에서는 구약이 어려운지 쉬운지에 대해서가 아니고, 구약의 필요성에 대해서 논해보되, '비 신학적'으로 논해보자. 신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구약의 필요성'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수 있다. 그냥 내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한 소회 정도로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


먼저 나는 구약이 정말 인간적이며, 그러므로 우리의 실생활에 쉽게 적용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에 반해 신약은 우리 인간 개인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와 닿지 않게' 다룬다. 이렇게 어렵게 꼬아서 이야기하는 이유는 분명 신약도 인간의 실질적인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정말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우리가 결혼해야 할 이유를 성욕에서 찾기도 하고 (고전 7:9) 음식에 관해 논하기도 하며 (고전 8), 더구나 예수님은 히브리서 기자가 표현하기를 우리 인간을 잘 이해하는 분이라고 하기도 했다. (4:15) , 신약 기자들은 인간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별로 와 닿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일까? 구약의 기자들과 달리 신약의 기자들은 대부분 순교했다. 그들은 목숨 걸고 신앙생활을 했으며, 흐트러짐이 없었다. 물론 베드로는 여전히 성격이 급했고, 남의 눈치를 살폈으며, 바울 역시 그 성격 어디 가지 않은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어쨌든 따라가기 어려운 신앙의 모습을 보였다. 더구나 정말 힘든 상황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자연스럽게 삶 중에 실천하고 살았다. 이런 면에서 나는 신약에 나타나는 개개인의 삶이 쉽사리 와 닿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그들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너무 높은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그에 반해 구약에 나타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노아의 술 문제, 아브라함과 이삭의 거짓말하는 문제, 겁쟁이 엘리야, 참으로 말 안 듣는 요나, 비겁하고 교활했던 야곱, 시기심에 불타올랐던 미리암의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정말 엄청나게 많은 성(sex) 관련 이야기들이 있다. 특히 성에 관해서는 그 범위가 실로 만만치 않다. 롯은 자기의 두 딸과의 사이에서 아들 둘을 두었고, 소돔 성은 동성애자들의 소굴이었으며, 유다는 창녀를 샀는데 알고 보니 며느리였고, 심지어 그 사이에서 아들까지 낳았고, 베냐민 땅에서 문제가 생기니까 바람나서 자신을 떠났던 첩을 그냥 내주는 레위 찌질이의 이야기, 그리고 그 베냐민 사람들은 그 여자를 밤새도록 윤간하여 결국은 죽게 만들고, 그 찌질이는 그 죽은 첩을 토막 내 이스라엘 사방에 보내었다 (19). 그 인물의 중요도로 볼 때에 이런 부정적인 이야기의 정점을 찍은 사람이 바로 다윗인데,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팽개치고 왕궁에서 퍼질러 자다가 저녁 즈음에 일어나 최측근의 아내인 밧세바를 취한다. 참고로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와 아비 엘리암 모두 다윗의 30인의 용사에 속하였고, 그의 조부 아히도벨은 다윗의 친우였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아비의 첩들과 벌건 대낮에 공개적으로 관계했으며 (삼하 16:22), 그의 또 다른 아들 솔로몬은 드디어 후궁 700에 첩 300을 둠으로써 모든 남자의 선망 대상이 되었다.

합법적이면서도 뭔가 개운치 않은 성도 많이 나온다. 아브라함은 모두의 기대와 달리 첩이 두 명이었고, 야곱도 두 명, 그리고 모세도 첩이 있었다 (12:1), 이스라엘 사사들과 왕들은 정말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첩이 많았고 자식도 많았다.


그런데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인간을 이해하는 데에는 구약이 도움된다. 신약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이상을 보여 준다고 하면, 구약은 정말 어쩔 수 없는 비참한 인간의 모습을 꾸밈없이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오늘의 못난 ''와 나를 짜증 나게 하는 ''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데에는 구약이 훨씬 효과적이며, 실질적으로도 나는 구약의 예를 들어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러함에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할 때에는 신약을 주로 인용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에, 온전하기 위해 그리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위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노력하는 우리로서 일면 이해하기 어려운 구약의 인물들이지만, 반대로 우리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추악함과 어쩔 수 없는 본성 등을 설명하는 데에는 구약만 한 것이 없다. 구약이 없었다면 아마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이중적이고 위선적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믿음으로 이런 인간이 겪고 있는 불완전성에서 자유로워지게 되는 이야기를 더 기대한다. 그런 면에서, 너무 약하고 너무 인간적인 구약의 인물들이 어떤 때에는 나를 너무 실망하게 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도 계속 미래에도 지금과 같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면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조금 더 무거운 주제이면서도 약간 신학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공의의 하나님에 대해 야속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더구나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대목에서는 거의 모든 기독교인이 고개를 내젓는다. 당신이 당신 자신을 스스로 그렇게 표현하셨으므로, 그분을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우리는 우리의 이성과 관계없이 그렇게 받아들여야 함에도, 실제로 그렇게 인정하기보다 의문시하고 심지어 외면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직간접적으로 거의 모든 이단이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멀리 가면 영지주의가 바로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름의 해석을 하다가 나온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이야기는 너무 신학적인 이야기라 일단 넘어가고 간단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당신이 믿는 것이 사상인지 도덕률인지 위안을 주는 덕담인지 아니며 절대자이신 하나님인지 알아야 하고 결단해야 하고 결정해야 한다. 당신이 믿는 대상이 하나님이고 그를 주로 섬기기로 했다면 사실 이런 고민은 애초에 말이 안 된다. 그분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구약을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불평하라. 그러나 성경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해하지 못하는 당신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 불평하고 회피할 문제가 아니다.


이단들에 대해 연구하다 보면 다음과 같은 조금은 역설적인 깨달음을 얻을 때가 있다. 이단들이 힘들어하는 것은 신약이 아니라 오히려 구약이며, 이단들이 부정하는 것이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래서 이단들의 주장이 바르다고 인정할 때 가장 먼저 부정되는 대상이 예수님과 신약이 아니고 성부 하나님과 구약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구약이 더 복음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의 믿음과 보다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너무 많이 말하는 것은 오히려 논지를 흐릴 가능성이 있으므로, 위의 두 가지 이유로 나는 구약이 우리에게 필요하며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어렵다고 말하고 있는 당신이 차마 하지 못한 말이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라면 다시 한번 구약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이 성경을 스스로 아직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설교에 노출되는 빈도로 볼 때에 (이해와는 별도로) 신약에 훨씬 더 익숙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감히 주장하고 싶다. 당신의 신앙에 직접 도움을 주고, 또 직접 연관된 말씀은 오히려 구약이다. 경중을 따질 수는 없으나, 약간 무책임하게 이야기하자면 구약은 더욱 실제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고, 신약은 땅의 실재가 아닌 하늘의 실재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둘 다 중요한데, 구약이 소외되고 있으므로 나는 구약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에서 주장함으로써 무게추를 구약 쪽으로 조금 밀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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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더 정확한 제목은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우월한 이유' 정도가 되겠다. 이 제목 자체가 상당히 많은 함정을 지니고 있다. 우선 이에 대해 먼저 논해 보자.
  • 우리는 종교인이 아니다. 마음의 위안을 얻자고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종교'에 대해 논할 필요가 없다. 이런 부분이 중요하다면 당신은 종교인이라는 이야기이고, 아직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위치에 대한 자각은 덜 된 셈이다.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의 아들됨을 믿고 있고, 그것이 우리에게는 사실이며 실제이며 진리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들어 낸 교리의 틀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그 교리라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대해서 논하다 보면 글이 산으로 가기 때문에 이 정도에서 멈추도록 하겠다.)
  • 같은 맥락에서 '이유'가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않다. 이유가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나는 이 정도의 말은 알아 들을 수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이 글을 쓰고 있음을 여기에서 밝힌다. 내 글 중에는 믿음안에 없는 사람도 읽을 만한 글도 있지만 지금 쓰는 이 글은 믿음 안에 있으면서 좀 더 확실하기를 바라는 모호한 부분을 알고자 하는 사람을 위해 쓰는 글이다.
  • 그리고 결코 '우월'정도의 약한 이유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절대'이기 때문에 이 믿음 안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환상속에 존재하는 알라딘램프의 지니가 아니다. 실재하시는 나의 구주이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 불필요한 이야기를 한 번 진행해 보고자 한다. 나름대로의 어려움과 이유가 논의 자체의 불필요함 만큼이나 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우월한 이유'라는 제목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미 앞의 글들에서 성경의 무오성은 문자에 있지 않음을 이야기 했다. (2011/02/18 - [Bible Stories] - 야곱의 후손: 성경은 무오한가, 2011/02/18 - [Opinion] - 믿음 그리고 성경) 정확하게 내 생각을 전달하자면 '성경' 자체는 우리 신앙의 도구일 뿐이지 어떤 '신성'시 되는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무오하든 오하든 별 상관 없다. 다만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에는 한 점 실패의 가능성이 없다라는 사실을 믿을 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성경이 그렇게 결함이 많다면 어떻게 읽으며, 그런 불완전한 성경을 가지고 어떻게 다른 종교에 있는 사람들을 전도 할 수 있겠느냐고 질문을 한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상당히 답답한 마음에 질문을 던졌으리라, 그런데 대답을 해야 하는 내 입장도 상당히 답답한 것은 마찬가지다.

먼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깊이 나누다 보면 결국 알게 되는 사실이 있는데 바로 이 들은 내가 더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증명하기 원하고, 그것을 통해 우월성이 증명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것'이 더 좋은 '것'임을 증명하기 원하고 그것을 공격당할 때에 매우 당황스러워 하며, 심지어 분개한다. 마치 성경의 많은 기자들이 악인의 흥함을 보고 분개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하박국 1:13)

먼저 성경의 권위부터 이야기 해 보자. 이 '성경'에 교회 또는 목사 등등을 집어 넣어 '목사의 권위, '교회의 권위'라고 바꿔도 거의 대등하게 이 글에서 논해 보고자 하는 말이 된다. 이 권위라는 말은 원래 권력과 위세를 줄인 말로서 인격을 가진 사람에게나 사용되야 마땅한 용어이다. 그런데 '권위있는 작품'이란 식으로 물건에도 종종 사용이 된다. 이 둘을 잘 구분해서 사용하면 좋은데 종종 왕왕 이 둘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성경이 가장 대표적인데 성경에 권위가 있다는 말을 '권위있는 작품'에서 사용된 뜻으로 사용한다면 아주 적절한 사용이라고 하겠으나, 성경 자체가 어떤 인격체 처럼 존중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식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사람 손으로 쓰여서 사람 손으로 유지 보수 되다가 사람 손으로 편집되어 사람 손으로 번역된 성경에 보기만 해도 죽어야만 하는 (사무엘상 6:19) 하나님이 직접 주신 돌판만큼 성스러운 '권위'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성경을 소중히 여기는 그 조심성 자체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만일 그것을 하나님처럼 여긴다면 좀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더 나아가 성경이 옳기 때문에, 성경이 완벽하기 때문에, 성경이 성스럽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다라고 한다면 진지하게 고민을 해 봐야 하겠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당신의 종교보다 내 좋교가 낫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여기에서 사용된 권위는 뒤에 연결된 말과의 관계속에서 해석해 볼 때에 내가 우려하는 그런 방식의 권위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말하는 다른 종교는 직접적으로는 몰몬교나 여호와의 증인처럼 같은 성경을 보고 있으나 부가 경전 또는 주 경전이 따로 있다든지 아니면 해석상의 아주 큰 차이를 보이는 종교를 이야기 한다. 더더욱이 이후의 대화에서 어차피 완벽하지 않은 성경이라면 몰몬경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데에까지 갔었다. 쉽게 판단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시점에서 '에이 너무 많이 갔네'라고 쉽게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적어도 내 경험상 이 사람은 솔직해서 이렇게 말한 거고, 이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함정에 스스로 빠지는 경우를 많이 보아 왔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한, 이 문단의 첫 질문에서 별 문제점을 못 느끼는 사람들이 대다수 이며,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 중의 대다수도 앞 부분의 질문에 대해서는 타당한 질문으로 생각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면 당신도 이 사람의 후반부의 말을 솔직하기만 하다면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너무 쉽게 판단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질문을 돕기 위해 다음과 같은 말을 덧 붙였다. 성경이 그 완벽성에 대해서 권위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의 등대처럼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마치 왕이 앉는 보좌가 목욕탕 의자보다 화려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왕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누가 왕인 지 확실하게 알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 자체가 너무 많은 허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당사자도 인정했다. 다만 더 좋은 예가 떠오르지 않아서 이런 말을 했을 뿐이다. 어쨌든 이 말은 언듯 그럴 듯 하다. 이 밑에서 이 이야기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다.

말을 너무 길게 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렇게 복잡하게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의 신앙은 성경 위에 서 있지 않다. 우리의 신앙은 반석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서 있다. 우리는 성경이 그럴 듯 해서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믿기 때문에 성경을 보는 것이다. 믿음이 먼저요 그 다음에 실천이며, 그 실천에 필요한 도구들이 있을 따름이다. 그 중 하나가 성경이다. 목사? 교회?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고 싶은가? 믿음이 먼저고 그 다음이 성경, 목사, 교회 등등의 것들이 있을 따름이다. 요즘 교회가 시끄럽다. 성추행 사건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믿을 수 없는가? 그렇다면 믿지 않도록 하라. 내가 여호수아의 말을 여기에서 하고 싶다. 예수님이 믿을만 하지 않게 보이거든 믿지 말라. 그러나 나는 믿을 것이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여호수아 24:15)
이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히브리서 기자는 자그만치 23번이나 '믿음으로'를 강조하고 강조한다. 믿음이 먼저 있었고 그 이후에 여러가지 방법을 통한 실천이 있었다. 믿음으로부터 시작하여 믿음으로 끝나는 것이 우리 신앙이다. 믿을만 해서 믿게 되는 것이 아니다. 나도 정말 간절히 말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믿을만한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 믿으니 영광을 보게 되는 것이다. 보좌 이야기가 나왔었다. 하나님이 이 부분에 있어서 얼마나 불친절 하신 지 여기에서 이야기 해 보자. 예수님이 왕가에서 태어났는가? 유명한 집안에서? 전통있는 마을에서? 예수님은 말 구유에서 태어나셨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는 겨우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누가복음 2:12)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마가복음 11:7)
심지어 이사야에 보면 예수님은 흠모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었다. 심지어 그의 고난을 보며 넌 당해도 싸다고 했다. 믿을만해서 믿는가?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너무 안타깝게도 이 함정에서 사람들이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사야 53:2-4)
이 글의 제목이 다른 종교 (이단 또는 사이비)와의 비교라도 했다. 믿을만 한 것은 다른 종교에 더 많다. 그러니 믿을만 한 것을 찾는 것이 당신의 목표라면 다른 종교로 가 보라. 우리는 멋있지 않더라도 나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어 주신 그 실존하시는 예수님을 믿을 것이다.

그러면 다시 그러면 왜 믿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그 실존 때문에 믿는다고 아무리 피를 토하며 외쳐도 '그런데 그럼 왜 믿어?'라고 묻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이 멸망 할 때 까지 있을 것이다. 나도 계속 한 말 만을 할 것이다. 믿기 때문에 믿는 거고 나에게는 예수님이 실존이기 때문에 사실을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 없으니 믿을 수 밖에 없다고 말 할 것이다. 바울이 감옥에서 찬송을 했다. 그랬더니 지진이 일어나서 감옥문이 열렸다. 스스로 질문해 보라. 바울은 왜 찬송을 했을까? 찬송을 하면 감옥에서 나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어서? 찬송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바울과 실라는 많이 맞은 후에 결박당하여 감옥에 앉아 있으면서 찬송을 했다. 이들의 믿음이 이해가 가는가? 나는 이해는 되는데 납득도 안되고 동일한 신앙의 표현을 할 자신이 전혀 없다. 다만 이해에 근거해서 이야기 해 보겠다. 이들의 신앙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그 신앙이다. 이들은 좋지 않은 현실에서 더 나아질 기미도 없지만 찬송을 했다. 왜? 기쁘니까, 즐거우니까, 그리고 하나님을 예수님을 사랑하니까, 나를 감옥에 가두신 예수님께 감사하니까 찬양한 것이다.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사도행전 16:23-26)
일찍이 다니엘의 세 친구도 같은 신앙을 보여줬다. 풀무불에 던져질 상황에서 능히 건져내실 하나님을 증거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그리 당당했나?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상관없었다. 그들은 정말 상관 없었다. 하나님이 금신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실재였기 때문에 이러나 저러나 상관 없었다. 그저 믿음을 지킬 뿐이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다니엘 3:16-18)
여기까지 말했는 데도 믿을 만한 것을 구하는가? 내가 하나 더 이야기 하고 이 글을 맺겠다. '믿을 만한 것'을 구하는 당신은 당신이 '구원받을 만 하여' 구원받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거부감이 느껴 질 지도 모르겠다. 그러며 문장을 조금 바꾸겠다.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살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어'라고 생각 할 것이다. 아직도 거부감이 느껴지나? 그러면 조금 더 바꾸어 보겠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지 않으면 잘리게 될거야. 그래서 불에 태워 지겠지.' 물론 이 방향으로 글을 써도 한참을 써야 한다. 그 글은 다음으로 미루고, 간단하게 이야기 하자. 내가 뭔가 해야 또는 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마음 깊은 곳의 사탄의 속삭임이 당신에게 다른 식으로 표현 된 것이 믿을 만 하여 믿는다는 마음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정돈된 생활 몰몬교도의 친절함에 대비되는 기독교도의 더러움을 본 당신이 느끼는 좌절 나도 안다. 깊이 공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실재를 버리고 허상을 잡을 수는 없다. 믿음외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도 그들보다 더 우월하길 원하는 맘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그런 시도는 절대 성공할 리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 아빠가 더 힘쎄'라고 하는 유치한 어린 아이 싸움에 동참하여 싸워 주시는 분은 아니다. 물론 그러실 때도 있으시긴 하겠지만 (필요한 경우가 있긴 있으니까) 항상 그러시리라고 기대하지 말라. 더구나 당신이 신앙생활 오래 했다면 절대 기대하지 말라. 30먹은 아들이 60먹은 울 아빠가 너네 아빠보다 더 쎄라고 싸우고 있으면 거참... 뭐라 해야 할 지...

예수님은 목욕탕 의자에 앉아 계셔도 예수님이며, 그 분은 목욕탕 의자에 앉아서 '요놈이 날 알아보나 보자'라고 쪼잔하게 우리를 시험하시지도 않으신다. 내가 믿는 그리고 내가 아는 예수님은 가장 높은 보좌에서 필요 할 때엔 가장 낮은 곳 까지 오시기도 하시며, 내가 원할 때에 그리고 필요 할 때에는 언제든지 당신을 내게 드러내신다. '내가 여기있다 내 아들아 내가 너를 잘 안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분이 내가 알고 믿는 예수님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있어서 다른 종교와의 비교는 너무 너무 무의미하다. 처음부터 질문부터 잘 못 됐다. 제목부터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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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