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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정확한 제목은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우월한 이유' 정도가 되겠다. 이 제목 자체가 상당히 많은 함정을 지니고 있다. 우선 이에 대해 먼저 논해 보자.
  • 우리는 종교인이 아니다. 마음의 위안을 얻자고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종교'에 대해 논할 필요가 없다. 이런 부분이 중요하다면 당신은 종교인이라는 이야기이고, 아직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위치에 대한 자각은 덜 된 셈이다.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의 아들됨을 믿고 있고, 그것이 우리에게는 사실이며 실제이며 진리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들어 낸 교리의 틀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그 교리라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대해서 논하다 보면 글이 산으로 가기 때문에 이 정도에서 멈추도록 하겠다.)
  • 같은 맥락에서 '이유'가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않다. 이유가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나는 이 정도의 말은 알아 들을 수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이 글을 쓰고 있음을 여기에서 밝힌다. 내 글 중에는 믿음안에 없는 사람도 읽을 만한 글도 있지만 지금 쓰는 이 글은 믿음 안에 있으면서 좀 더 확실하기를 바라는 모호한 부분을 알고자 하는 사람을 위해 쓰는 글이다.
  • 그리고 결코 '우월'정도의 약한 이유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절대'이기 때문에 이 믿음 안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환상속에 존재하는 알라딘램프의 지니가 아니다. 실재하시는 나의 구주이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 불필요한 이야기를 한 번 진행해 보고자 한다. 나름대로의 어려움과 이유가 논의 자체의 불필요함 만큼이나 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우월한 이유'라는 제목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미 앞의 글들에서 성경의 무오성은 문자에 있지 않음을 이야기 했다. (2011/02/18 - [Bible Stories] - 야곱의 후손: 성경은 무오한가, 2011/02/18 - [Opinion] - 믿음 그리고 성경) 정확하게 내 생각을 전달하자면 '성경' 자체는 우리 신앙의 도구일 뿐이지 어떤 '신성'시 되는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무오하든 오하든 별 상관 없다. 다만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에는 한 점 실패의 가능성이 없다라는 사실을 믿을 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성경이 그렇게 결함이 많다면 어떻게 읽으며, 그런 불완전한 성경을 가지고 어떻게 다른 종교에 있는 사람들을 전도 할 수 있겠느냐고 질문을 한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상당히 답답한 마음에 질문을 던졌으리라, 그런데 대답을 해야 하는 내 입장도 상당히 답답한 것은 마찬가지다.

먼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깊이 나누다 보면 결국 알게 되는 사실이 있는데 바로 이 들은 내가 더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증명하기 원하고, 그것을 통해 우월성이 증명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것'이 더 좋은 '것'임을 증명하기 원하고 그것을 공격당할 때에 매우 당황스러워 하며, 심지어 분개한다. 마치 성경의 많은 기자들이 악인의 흥함을 보고 분개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하박국 1:13)

먼저 성경의 권위부터 이야기 해 보자. 이 '성경'에 교회 또는 목사 등등을 집어 넣어 '목사의 권위, '교회의 권위'라고 바꿔도 거의 대등하게 이 글에서 논해 보고자 하는 말이 된다. 이 권위라는 말은 원래 권력과 위세를 줄인 말로서 인격을 가진 사람에게나 사용되야 마땅한 용어이다. 그런데 '권위있는 작품'이란 식으로 물건에도 종종 사용이 된다. 이 둘을 잘 구분해서 사용하면 좋은데 종종 왕왕 이 둘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성경이 가장 대표적인데 성경에 권위가 있다는 말을 '권위있는 작품'에서 사용된 뜻으로 사용한다면 아주 적절한 사용이라고 하겠으나, 성경 자체가 어떤 인격체 처럼 존중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식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사람 손으로 쓰여서 사람 손으로 유지 보수 되다가 사람 손으로 편집되어 사람 손으로 번역된 성경에 보기만 해도 죽어야만 하는 (사무엘상 6:19) 하나님이 직접 주신 돌판만큼 성스러운 '권위'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성경을 소중히 여기는 그 조심성 자체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만일 그것을 하나님처럼 여긴다면 좀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더 나아가 성경이 옳기 때문에, 성경이 완벽하기 때문에, 성경이 성스럽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다라고 한다면 진지하게 고민을 해 봐야 하겠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당신의 종교보다 내 좋교가 낫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여기에서 사용된 권위는 뒤에 연결된 말과의 관계속에서 해석해 볼 때에 내가 우려하는 그런 방식의 권위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말하는 다른 종교는 직접적으로는 몰몬교나 여호와의 증인처럼 같은 성경을 보고 있으나 부가 경전 또는 주 경전이 따로 있다든지 아니면 해석상의 아주 큰 차이를 보이는 종교를 이야기 한다. 더더욱이 이후의 대화에서 어차피 완벽하지 않은 성경이라면 몰몬경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데에까지 갔었다. 쉽게 판단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시점에서 '에이 너무 많이 갔네'라고 쉽게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적어도 내 경험상 이 사람은 솔직해서 이렇게 말한 거고, 이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함정에 스스로 빠지는 경우를 많이 보아 왔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한, 이 문단의 첫 질문에서 별 문제점을 못 느끼는 사람들이 대다수 이며,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 중의 대다수도 앞 부분의 질문에 대해서는 타당한 질문으로 생각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면 당신도 이 사람의 후반부의 말을 솔직하기만 하다면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너무 쉽게 판단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질문을 돕기 위해 다음과 같은 말을 덧 붙였다. 성경이 그 완벽성에 대해서 권위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의 등대처럼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마치 왕이 앉는 보좌가 목욕탕 의자보다 화려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왕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누가 왕인 지 확실하게 알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 자체가 너무 많은 허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당사자도 인정했다. 다만 더 좋은 예가 떠오르지 않아서 이런 말을 했을 뿐이다. 어쨌든 이 말은 언듯 그럴 듯 하다. 이 밑에서 이 이야기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다.

말을 너무 길게 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렇게 복잡하게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의 신앙은 성경 위에 서 있지 않다. 우리의 신앙은 반석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서 있다. 우리는 성경이 그럴 듯 해서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믿기 때문에 성경을 보는 것이다. 믿음이 먼저요 그 다음에 실천이며, 그 실천에 필요한 도구들이 있을 따름이다. 그 중 하나가 성경이다. 목사? 교회?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고 싶은가? 믿음이 먼저고 그 다음이 성경, 목사, 교회 등등의 것들이 있을 따름이다. 요즘 교회가 시끄럽다. 성추행 사건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믿을 수 없는가? 그렇다면 믿지 않도록 하라. 내가 여호수아의 말을 여기에서 하고 싶다. 예수님이 믿을만 하지 않게 보이거든 믿지 말라. 그러나 나는 믿을 것이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여호수아 24:15)
이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히브리서 기자는 자그만치 23번이나 '믿음으로'를 강조하고 강조한다. 믿음이 먼저 있었고 그 이후에 여러가지 방법을 통한 실천이 있었다. 믿음으로부터 시작하여 믿음으로 끝나는 것이 우리 신앙이다. 믿을만 해서 믿게 되는 것이 아니다. 나도 정말 간절히 말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믿을만한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 믿으니 영광을 보게 되는 것이다. 보좌 이야기가 나왔었다. 하나님이 이 부분에 있어서 얼마나 불친절 하신 지 여기에서 이야기 해 보자. 예수님이 왕가에서 태어났는가? 유명한 집안에서? 전통있는 마을에서? 예수님은 말 구유에서 태어나셨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는 겨우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누가복음 2:12)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마가복음 11:7)
심지어 이사야에 보면 예수님은 흠모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었다. 심지어 그의 고난을 보며 넌 당해도 싸다고 했다. 믿을만해서 믿는가?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너무 안타깝게도 이 함정에서 사람들이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사야 53:2-4)
이 글의 제목이 다른 종교 (이단 또는 사이비)와의 비교라도 했다. 믿을만 한 것은 다른 종교에 더 많다. 그러니 믿을만 한 것을 찾는 것이 당신의 목표라면 다른 종교로 가 보라. 우리는 멋있지 않더라도 나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어 주신 그 실존하시는 예수님을 믿을 것이다.

그러면 다시 그러면 왜 믿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그 실존 때문에 믿는다고 아무리 피를 토하며 외쳐도 '그런데 그럼 왜 믿어?'라고 묻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이 멸망 할 때 까지 있을 것이다. 나도 계속 한 말 만을 할 것이다. 믿기 때문에 믿는 거고 나에게는 예수님이 실존이기 때문에 사실을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 없으니 믿을 수 밖에 없다고 말 할 것이다. 바울이 감옥에서 찬송을 했다. 그랬더니 지진이 일어나서 감옥문이 열렸다. 스스로 질문해 보라. 바울은 왜 찬송을 했을까? 찬송을 하면 감옥에서 나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어서? 찬송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바울과 실라는 많이 맞은 후에 결박당하여 감옥에 앉아 있으면서 찬송을 했다. 이들의 믿음이 이해가 가는가? 나는 이해는 되는데 납득도 안되고 동일한 신앙의 표현을 할 자신이 전혀 없다. 다만 이해에 근거해서 이야기 해 보겠다. 이들의 신앙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그 신앙이다. 이들은 좋지 않은 현실에서 더 나아질 기미도 없지만 찬송을 했다. 왜? 기쁘니까, 즐거우니까, 그리고 하나님을 예수님을 사랑하니까, 나를 감옥에 가두신 예수님께 감사하니까 찬양한 것이다.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사도행전 16:23-26)
일찍이 다니엘의 세 친구도 같은 신앙을 보여줬다. 풀무불에 던져질 상황에서 능히 건져내실 하나님을 증거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그리 당당했나?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상관없었다. 그들은 정말 상관 없었다. 하나님이 금신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실재였기 때문에 이러나 저러나 상관 없었다. 그저 믿음을 지킬 뿐이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다니엘 3:16-18)
여기까지 말했는 데도 믿을 만한 것을 구하는가? 내가 하나 더 이야기 하고 이 글을 맺겠다. '믿을 만한 것'을 구하는 당신은 당신이 '구원받을 만 하여' 구원받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거부감이 느껴 질 지도 모르겠다. 그러며 문장을 조금 바꾸겠다.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살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어'라고 생각 할 것이다. 아직도 거부감이 느껴지나? 그러면 조금 더 바꾸어 보겠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지 않으면 잘리게 될거야. 그래서 불에 태워 지겠지.' 물론 이 방향으로 글을 써도 한참을 써야 한다. 그 글은 다음으로 미루고, 간단하게 이야기 하자. 내가 뭔가 해야 또는 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마음 깊은 곳의 사탄의 속삭임이 당신에게 다른 식으로 표현 된 것이 믿을 만 하여 믿는다는 마음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정돈된 생활 몰몬교도의 친절함에 대비되는 기독교도의 더러움을 본 당신이 느끼는 좌절 나도 안다. 깊이 공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실재를 버리고 허상을 잡을 수는 없다. 믿음외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도 그들보다 더 우월하길 원하는 맘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그런 시도는 절대 성공할 리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 아빠가 더 힘쎄'라고 하는 유치한 어린 아이 싸움에 동참하여 싸워 주시는 분은 아니다. 물론 그러실 때도 있으시긴 하겠지만 (필요한 경우가 있긴 있으니까) 항상 그러시리라고 기대하지 말라. 더구나 당신이 신앙생활 오래 했다면 절대 기대하지 말라. 30먹은 아들이 60먹은 울 아빠가 너네 아빠보다 더 쎄라고 싸우고 있으면 거참... 뭐라 해야 할 지...

예수님은 목욕탕 의자에 앉아 계셔도 예수님이며, 그 분은 목욕탕 의자에 앉아서 '요놈이 날 알아보나 보자'라고 쪼잔하게 우리를 시험하시지도 않으신다. 내가 믿는 그리고 내가 아는 예수님은 가장 높은 보좌에서 필요 할 때엔 가장 낮은 곳 까지 오시기도 하시며, 내가 원할 때에 그리고 필요 할 때에는 언제든지 당신을 내게 드러내신다. '내가 여기있다 내 아들아 내가 너를 잘 안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분이 내가 알고 믿는 예수님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있어서 다른 종교와의 비교는 너무 너무 무의미하다. 처음부터 질문부터 잘 못 됐다. 제목부터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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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2. 19. 08:42

믿음 그리고 성경 Novels or Essays2011. 2. 19. 08:42

성경을 왜 읽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직접적으로는 그 질문 때문에 쓰게 되었는데, 다른 이야기를 위해서도 일단 이 글이 필요 할 것 같아서 적는 이유도 있다.

나는 성경이 무오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오하다. 그러나 성경은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의 손으로 전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무오성을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다면 원본이 남아 있어야 한다. 물론 원본이 남아 있었다면 그것이 우상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오류 투성이인 성경을 가지고도 전쟁이 나기도 하는 세상인데 원본이 남아있다는 상상은 하기 조차도 무섭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본을 다 없애 버리고 사본만 남아 전해 지도록 했으며, 그 사본 들에는 어쩔 수 없는 오류가 개입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을 이야기 하자면 할 이야기가 참으로 많으나 너무 민감한 이야기이고 이 부분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강요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이 정도만 하도록 하겠다.

이 이외에도 입이 근질 거리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을 하면 정말 문제가 많을 것 같아서 꾹 참도록 하겠다.

그러면 오류가 있는 성경을 왜 읽느냐라고 정확히는 내 아내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목회자도 아니고 교회 관련 일을 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하루에 대충 1시간 가까이 성경을 보고 연구한다. 웃긴 이야기 일 지 모르겠는데, 난 두꺼운 책을 좋아한다. 읽어도 읽어도 끝이 나지 않는 책을 참 좋아한다. 물론 내가 그 내용의 가치를 인정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정말 재미있는 소설을 읽는데 금방 끝나면 안타깝지 않겠는가. 그런 심정이다. 그리고 난 성경이 참 재미있다. 재미있으니 되도록 길었으면 좋겠는데 성경은 충분히 길다. 그래서 좋아한다.
집에 여러 버젼의 성경이 있다. 그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보는 나에게 아내가 왜 읽냐고 묻는다. 더구나 성경에 나타난 오류들을 내가 설명해 주니 더더욱이 그렇게 틀린 글을 왜 읽냐고 묻는다. 물론 아내도 기독교인인데 성경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고 싶어하는 지극히 평범한 기독교인이다.

대답해 보겠다.
일단 성경은 믿어져서 보는 것이 아니고 믿기 때문에 보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을 성경을 통해서 알려 주시겠다고 직간접적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취를 찾기 위해서 읽는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어떤 이유로인해 성경이 다 소실되고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하... 사... 이니라'밖에 남지 않았다 치자. 난 그렇다면 겨우 그 5글자 만으로도 하나님께서 인류에서 하시고 싶은 말씀을 다 하실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게 나의 믿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 성경에 오류가 있건 없건 신경쓰지 않는다. 그리고 오류가 없기를 바라지도 않고 오류가 없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볼 뿐이다.

그리고 난 되도록 내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성경의 문자에 집중하지 않기를 권하고 가르치고 싶다.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에 집중해야지 맥 빠지게 문자에 얽매이고, 틀리지 않았을 거라고 믿고, 성경을 우상화 하다가 뭐 하나 걸리면 넘어져 버리는 약한 신앙을 갖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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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