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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에 해당되는 글 1

  1. 2012.04.28 은사주의의 문제점과 대처방법
2012. 4. 28. 12:11

은사주의의 문제점과 대처방법 Opinion2012. 4. 28. 12:11

은사주의의 장단점에 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우선 은사주의 자체를 틀렸다고 할 수 없다. 은사주의도 분명 신앙의 한 형태이다. 크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단 하나로 규정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다른 종교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같은 신앙고백 아래에서 다양한 형태가 존재함은 인정해야 한다. 그러함에도  나는 은사주의가 불편하고 심지어는 감정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감정적이라고 한 이유는 지적으로 그것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하나님을 알라'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의 주된 주제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따로 관련 구절들을 언급하지 않겠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알 것인가. 그 방법은 수도 없이 많다. 모든 경건훈련이 결국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으며, 우리의 신앙생활 자체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그런 입장에서 은사주의는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한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가 없어야 하겠는데, 인간이라는 연약함과 은사주의가 만날 때에 부정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경우를 자주 보아 왔다.


은사주의란 무엇인가. 신학적인 논의는 이 글에서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간단히 말해 은사주의란 '성령의 은사를 추구함'이라 하겠다. 물론 우리가 은사주의라고 할 때엔 '심하게 추구함'이라는 의미를 함축하지만, 이 글에서는 단순하게 '성령의 은사를 추구함' 정도로 생각하자. 사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은사주의는 '지적'으로도 틀렸다. 왜냐하면, 은사란 Gift 즉, 선물이다. 이것은 추구해야 할 대상도 요구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다. 선물이란 주고 싶은 사람이 주고 싶은 때에, 주고 싶은 것을 주는 것이다. 내가 달라고 징징거려서 받는 것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선물이라고 하겠나. 그러나 우선 가능하다고 하자. 은사주의의 방법론을 통해서도 좋은 열매가 맺혀지기도 하고, 그들의 뜨거움이 부럽기도 하므로 틀렸다는 말은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 문제점만 살펴보고 문제를 완화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자. (고전 12:31의 사모하는 것과 달라고 떼쓰는 것은 분명 다르지만 그냥 비슷하다고 넘어가자. 이것을 제외하더라도 은사주의는 많은 문제점을 내포한다.)


은사주의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감각되는 경험에 치중한다. 그 자체로 문제가 있다. 그런 경험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고 사탄을 통해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각을 통한 경험은 많은 경우에 이성을 속이며, 진리와 관계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아주 올바른 집회에서조차도 감정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사탄도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감정의 움직임을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사탄의 간섭에 농락당하기 쉬워지므로 긴장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은사주의자들은 오히려 감정의 움직임을 하나님에 대한 체험으로 생각하여 거기에 목표를 두는 경우가 많고, 따라서 사탄에 농락당할 높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그러한 감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한낱 부적 정도로 치부해 버린다는 사실이다. 은사주의자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해 봐 하나님께서 만나주셔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이뤄주셔 (능력 있는 기도하는 방법).' 물론 그럴 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방법으로 만나 주실 때에만, 그 방법으로 말씀하실 때에만, 그 방법으로 이뤄 주시기로 작정하신 때에만 그렇게 될 수 있다. 즉, 우리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로 작정하셔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인격 없는 어떤 부적처럼 생각하여 그 부적이 효험있게 만드는 방법을 추구하는 경향을 나는 수도 없이 보아왔다. 그들은 입버릇처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하나님을 진정 인격체로 대우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만나는 데에 특별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틀렸다. 하나님을 만나는 특별한 방법은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며, 그 길을 걷는 것은 보혜사 성령의 도움으로 가능하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그 어떤 방법으로도 만날 수 있다. 다만 하나님께서 만나시고자 하실 때에 그것이 가능하다. 즉, 만남의 주체는 하나님이시지 결코 '내'가 될 수 없다. 이 부분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앞에서 그 길은 예수님이시며 성령님의 도움으로 걸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분명 그 길은 은사로도 걸을 수 있다. 은사란 바로 성령의 선물이고, 그 선물을 주는 이유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 공동체/개인의 신앙성장 등등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이유가 바로 은사주의를 틀렸다고 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성령께서 은사를 통해 나를 견인하기로 작정하셨을 때에 그 은사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될 뿐, '나는 이번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기로 작정했어. 같이 기도해줘. 나는 방언을 기필코 받아서 주의 살아 역사 하심을 체험할 거야.'라는 식의 접근은 주객이 전도된 이야기일 뿐이다.


다른 문제로, 어쩌면 이것이 더 큰 문제일 수도 있는데,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좋으신 하나님'으로만 본다. 물론 하나님은 선하시고 좋으신 분이다. 그런데 그분은 우리에게 징계하시기도 하시는 분이다. 선물만 주시는 산타클로스가 아니다. 회초리를 들고 훈련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이런 부분을 철저히 외면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죄책에 빠지게 하는 모든 것들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복되게 하십니다.' 틀린 부분이 조금도 없다. 그러나 이렇다손 치더라도 회개가 우리 삶에 빠질 수는 없다. 애통하는 마음과 죄책에 빠진 마음이 명백하고 쉽게 구분된다고 생각하는가? 적어도 나는 그것을 쉽게 구분하지 못한다. 다만 결국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통해 죄책까지도 회개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뿐이다. 그 죄책이 나를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시키고 가룟 유다처럼 자살로 이끈다면 그제야 그것이 사탄의 역사였다고 확신할 뿐이다. 우리의 제한된 식견으로 죄책과 애통하는 마음을 정확히 구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짧게 말해서 은사주의자들에게 회개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은 항상 더 받고 더 감동하기 위해 준비된 자세로 어떤 '방법'들을 시행한다. 모든 어려움을 불신앙의 문제로 치부하는 경향 또한 이 문제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실상은 감각적 체험에 불과한)이 있다면 우리 삶에 어려움이란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그리고 신앙생활의 어려움을 격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들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오히려 죄책에 빠지게 하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수준 낮은 신앙을 가진 자로 매도한다.


그리고 은사주의자들은 흔히 이 땅에서의 복된 삶을 추구한다. 그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에 '믿음 없는 자'로 간주하여 더 열심히 하라고 한다. 다른 글에서 이 문제를 별개로 다루고 싶은데, 나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어떤 사람을 이 땅에서도 복되게 쓰실 수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훈련장이 편하고 좋기만 할 것이라는 상상은 뭔가 이상하다. 훈련은 힘든 것이 당연하다. 어차피 우리는 천국에서 어마어마한 복을 누릴 텐데, 한순간에 불과한 우리 인생 중에 (시 90:4) 약간의 물질적 축복의 있고 없음이 그리 중요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이 어떤 것을 충족시키기만 하면 흔들어 넘치도록 복을 받을 것으로 생각한다. (눅 6:38) 어쨌든 그들은 눈에 보이는 삶을 믿음의 척도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딱 잘라서 말씀이다. 결국, 나를 변화시키는 통로는 말씀이다. 그리고 말씀은 가장 객관적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한 하나님을 알아나가는 방법이다. 우리는 보통 감각적인 체험을 체험으로 인지하는데, 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감각적인 체험보다 말씀을 통한 체험이 더 많았다. 이 부분은 표현하기가 참 어렵다. 그냥 깨달음이라고 할 수는 없다. 깨달음과 더불어 즉각적인 변화를 동반한다. 나는 내가 양육하는 사람들을 말씀을 보도록 강권하는 편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든 말씀을 읽기로 작정하고 읽기 시작한 사람에게는 예외 없이 변화가 있었다. 그 말씀이 은혜로웠던 것도 아니고 이해를 하면서 읽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말씀을 보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사람은 변화를 시작한다.


따라서 은사주의를 추구한다손 치더라도 그 체험을 말씀으로 재조명하는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 즉, 그러한 체험을 내 마음에 쌓을 때에 체험할 당시의 그 감각을 쌓지 말고 그 감각적인 체험을 말씀으로 재조명하여 말씀으로 쌓아 두어야 한다. 어려운 말이 될 수도 있는데, 우리의 경건 훈련은 결국 모두 말씀으로 재조명해야 한다. 말씀으로 재조명하는 과정이야말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는 과정이다. 감각적인 체험은 만난 그 존재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며, 그분의 의지에 의해 만났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 그런데 그 만남이 말씀으로 재조명되면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 허락된 만남이 되며, '그 체험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성경에 적혀있는 말씀을 통해 만나주시리라고 하셨던 약속의 확증'이 된다. 그것은 확실하며 또한 인격적인 만남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해서 살고 있다. 따라서 모든 경건 훈련은 하나님의 약속 속에서 재해석되어야 하며,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다시 한번 찬양하고 그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체험은 극적일 수도 있고, 지적일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떤 경우이든 간에 그것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으로서 흔들림 없이 나의 신앙의 바탕이 되려면 결국 그 체험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됨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확신이 그냥 자기확신에 불과하다면 앞에서 언급했던 은사주의의 문제점들을 내포하게 된다. 사탄의 인도함을 따라가기도 하며, 특별한 체험을 추구하게 되기도 하고, 신앙생활 중 겪을 수 있는 문제를 믿음이 없어서 생기는 문제로 매도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몰인격적인 부적정도로 치부하기도 하며, 눈에 보이는 복만 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확신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면 그때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은 물론 공동체에 유익이 되는 객관적인 신앙고백에 되며, 이런 고백은 말씀으로 재조명했을 때에 가능해진다. 나의 하나님과의 만남을 하나님이 증명해 주실 때에, 그 체험은 진정한 체험이 되고 능력 있는 체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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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