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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에 해당되는 글 3

  1. 2011.12.10 요셉과 애굽이주 1
  2. 2011.02.17 나이를 통해 본 야곱의 일생 10
  3. 2011.02.15 이스마엘
2011. 12. 10. 13:41

요셉과 애굽이주 Bible Stories2011. 12. 10. 13:41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자주 마주하게 되는 문제 중의 하나가 성경을 인물 중심으로 해석하는 문제이다. 물론, 인물 중심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고 인물을 벗어나서 해석하는 것이 쉬운 일도 아니긴 하다. 그러나 인물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 할 때에 나타날 수 있는 문제는 되도록 피해야 하는데,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즉, 인물 중심의 해석은 어떤 개인의 역할에만 집중하게 되고, 그의 전반적인 성취를 근거로 그의 삶 한 순간 한 순간을 전부 평가하는 문제가 있다. 심지어 주인공의 변방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주인공보다 못하게, 심지어 악하게 그려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라는 '믿음의 조상'을 부각시키기 위해 종종 롯은 악인으로 그려진다. (어떤 유명한 성경 강해서에서 직접 확인했던 내용이다.) 그런데 성경 상의 어떤 사람도 '사람'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였다고 생각한다. 즉, 그들의 삶에서 칭찬 받을 부분이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잘못한 부분도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런 면에서 모든 성경상의 인물들을 공정하게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 한 것은 잘 한 것으로 본받으려 노력하고 잘못 한 것은 잘못 한 것으로 경계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요셉과 애굽이주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다음의 말씀을 보면, 요셉은 애굽이주에 대해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창세기 45:9-11)
특히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애굽으로 보냈다고까지 말한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창세기 45:5-8)
보통은 이 성경 구절은 근거로 요셉을 높게 평가한다. 즉, 자신의 억울한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에 집중하여 고난을 감사로 승화시켰다는 논리이다. 크게 틀렸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요셉이 이에 대한 사명감이 있었느냐 하는 부분을 생각하면 재미 있는 부분을 발견 할 수 있다. 만약 그가 애굽이주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생각하였었다면 총독이 된 지 9년이 지나도록 가족들을 부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특히나 초반 7년은 풍년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여유도 있었고 창45:9-11에서 말 한 것과 같이 그럴 만한 지위와 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족들을 부르지 않았다. 형들에 대해서는 미워서 그랬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버지 야곱조차 외면 한 것은 으아한 부분이다. 이후 형제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을 괴롭히는데 (물론 당한 것에 비해 애교 수준의 괴롭힘이긴 하지만) 그것을 통해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다음의 성경구절을 보자.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창세기 41:51-52)
위의 성경 기록에서도 확인 할 수 있듯이 요셉은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으려고 노력하였다는 점에서 팔려온 사건은 그에게 큰 상처였다. 따라서 요셉이 애굽에 있었던 약 22년의[각주:1] 시간동안 요셉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애굽에 내려와 있는 상태라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 생각은 형제들을 만나고 나서야 갑자기 들었던 또는 깨달아졌던 생각일 뿐이다. 다음의 성경 구절을 보면 그가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애굽이주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었다는 사실이 조금 더 명확해 진다.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창세기 42:9)
형제들을 보고 나서야, 더 정확하게는 그들이 요셉에게 머리숙이는 것을 보고 나서야 요셉이 과거에 꿨던 꿈을 기억하게 된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창세기 37:6-7)
다시말해, 요셉은 애굽이주를 하나님의 명령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요셉이 알고 있던 것은 과거에 꾸웠던 꿈이 기근과 요셉의 애굽으로의 팔려가는 사건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 밖에 없다. 애굽이주는 그 꿈과도 별개의 문제이다. 여기에 더하여, 애굽이주에 대한 야곱의 반응은 사뭇 흥미로운데, 당시 야곱은 젊을 때 보다는 하나님과 더 가까이 교통하던 때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다음의 성경구절을 읽어 보자.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창세기 46:1-4)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간 것으로 보아 야곱은 분명 이주를 선택했다. 그런데 그에 대해 일말의 거리낌은 있었던 듯 하다. 하나님께서 이상 중에 나타나셔서 내려가도 된다는 허락과 동시에 안심시켜 주시는 장면이 그 증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려움을 피해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은 옳바른 선택이 분명 아니다. 이에 대한 증거는 너무 많아서 하나 하나 다 열거하는 것은 의미없고, 그 중 시점상 중요한 것들 몇 개만 살펴 보도록 하겠다. 일단 애굽 이주는 하나님의 축복에 기인한 사건은 아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중략)...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중략)...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중략)...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창세기 15:9-17)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자손과 영토에 대한 언약을 하시는데, 이 사건은 그 중 자손에 대한 언약 중간에 벌어지는 내용이다. 흐름을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그 새' 즉,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쪼개지 않고 둔다. 그리고 명백히 이 새들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고, 그것은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제물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시점과 아브라함이 제물을 드린 후에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신 시점간의 시간차도 흥미롭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제물을 준비하고 그것을 들짐승이 먹을까봐 전전 긍긍하는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긴 시간차로 인해 솔개를 쫓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중간에 잠까지 잔다 (하나님께서 재우신 것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아무리 봐도 그냥 잠든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해가 져서 어두울 때'가 되어서야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으신다. 물론 제물을 언제 준비 했는 지는 나오지 않지만 내용상 한참이 지나서야 받으신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쪼개지 않은 새는 피가 그 대로 들어 있는 셈이다. 제사를 드리고 난 음식은 보통 사람이 먹었다는 사실을 생각 할 때, 피 째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위배된다 (창 9:4). 물론 완전히 태워서 드리는 제사도 있었지만 이후 레위기를 봐도 제사 음식을 사람이 (제사장)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아직 제사 제도가 확립되기 전이기는 하지만, 피를 쏟지 않고 드린 제물은 그 자체로 제사 예법에 어긋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언한 사건이기는 하나 애굽이주는 어떻게 보더라도 축복 속의 사건은 아니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아브라함의 제사가 합당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형벌로서 내린 것이 애굽이주였다고 생각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어서 세상에 나옴으로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구원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기적같은 영광을 얻게 되었지만, 선악과를 먹고 세상으로 쫒겨 나오고 하는 일련의 과정이 결코 축복이라 부르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이다. 만약 그것이 축복이라면 하와는 최초의 축복의 통로이자 영웅이다.

더군다나 기근으로 인한 '애굽이주' 또는 '애굽이주계획'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합하는 생각이 아니라는 경험은 아브라함, 이삭 둘 모두 한다. 아브라함은 창 12:10-20에서 기근을 피해 애굽에 내려가고 그 과정에서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속임으로 '속이는 집안 내력'의 첫 문을 연다. 아마 하나님께 칭찬은 절대 받지 않았으리라. 이삭 때에도 동일한 사건이 일어난다.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창세기 26:1-2)
그랄 땅은 가나안 땅의 최남단 경계선 정도에 해당하는 땅으로, 이삭은 애굽을 향해 가고 있던 중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막으셨다.

'따라서 기근이 있으니 애굽으로 피신해서 목숨을 연명해 보자'라는 생각을 '믿음의 행위'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여기에 요셉의 행위에 대한 판단 기준이 있다 여겨진다. 아무리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라도 그것이 저주에 가까운 것이었다면 그것을 실행한 요셉의 그 행위를 옳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요셉이 하나님께 직접 명령을 받았다고 보기 어려운 상태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 애굽과 요셉의 지위가 주는 '세상의 안락함' 속에서 '고난'을 견디어 보자라는 생각은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 결코 하지 않아야 하는 행동 중의 하나임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고난을 감내하며 훈련 받아야 할 제자이다.

사실상 성경 속에서 요셉 삶을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라고 평가 할 만한 부분을 나는 찾지 못하겠다. 기껏해야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견딘 것과 바로의 꿈의 해석을 하나님께 의지해서 했다는 것 정도 밖에 없는 듯 하다. 어렸을 때엔 아버지의 과잉 보호 속에 건방지게 형들을, 심지어 부모까지도 무시하는 아들이었다. 형들이 그리고 요셉의 부모가 요셉에게 절하는 꿈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행위를 예언가적 행동으로 생각하여, 그러므로 선하다라고 덮어놓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가 듣더라도 기분 나쁜 말은 지혜롭게 해야 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입을 단속하는 것의 중요함에 대해 성경이 얼마나 자주,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는 지는 따로 설명 할 필요조차 없다. 다음의 성경구절을 통해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창세기 37:2-5)
17세면 클 만큼 컸는데도 고자질이나 하는 철부지 아들이었을 뿐이다. 물론 여기에는 야곱의 잘못이 더 크다고 할 수 있긴 하다. 뭐 그렇다고 요셉의 찌질함이 가려지지는 않을 것 같다. 결국 이런 갈등이 표면화 되어 애굽으로 팔려가게 된다. 그 이후 요셉은 '온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고 그들의 이름에 자신의 억울함과 상처를 투영시킨다. 하나님의 뜻은 므낫세보다 에브라임에게 있었는데 그것을 구분할 능력도 없었다 (야곱은 알았고, 이를 근거로 나는 야곱이 말년에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에 비해 이삭은 말년에 야곱과 에서 사이에서 에서를 선택한다.)
열매를 통하여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고, 성경은 많은 경우 열매를 기록하였다. 따라서 나는 그의 자손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역시 주의 깊게 살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분명 요셉은 곱절의 분깃을 받았으나, 그 두 지파의 이스라엘 내에서의 역할은 결코 덩치만큼 긍정적이지 않았다. 성경 전체를 통해 가장 불만이 많은 민족이 에브라임이다. 그 지파에서 배출 한 인물이라고 해 봐야 여호수아 하나 외에 또 누가 있는가. 항상 불평 불만이 많고 문제를 일으키는 지파가 바로 에브라임이었다. 받은 것에 비해 너무 보잘 것 없었던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한 번 짚어보고 싶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요셉을 평균 이상가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보는 데에도 나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애굽 이주 사건 하나만 떼어 내어 생각한다면 분명 옳은 행동은 아니었다고 본다. 우리는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에 요셉과 같이 행동해서는 안된다. 적어도 아브라함-이삭-야곱으로 내려오면서 반복적으로 확인했던 아주 명확했던 사실, 즉, 가나안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라는 그 명확한 사실 앞에서 고난 때문에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생각 그 자체가 불신앙이다.



물론 이후 요셉역시 하나님의 뜻을 더 정확히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방식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직접적인 계시였는 지 야곱으로부터의 교육이었는 지는 모르겠다. 요셉이 죽기 직전 형제들에게 자신을 가나안에 장사지내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에서 보였던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려 보내시리라는 확신을 볼 때에 애초 요셉이 가족들을 애굽으로 이주시킨 이유와 목적에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 가나안이었고 그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리라는 믿음을 확실히 보이고 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창세기 50:24-25)
그리고야곱이 죽고 난 이후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하던 형들을 위로하고 안심시키는 장면에서 요셉의 행동을 보면 그가 과거 겪었던 배신과 아픔에서 확실히 벗어났다는 사실도 확인 할 수 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창세기 50:19-21)


  1. 17세에 애굽으로 팔려서 30세에 바로를 만나 꿈을 해석하고 (창 41:46), 7년 풍년 2년 흉년 후에 형제들을 만났으므로 (30-17)+9=22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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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ToBeStable
2011. 2. 17. 08:45

나이를 통해 본 야곱의 일생 Bible Stories2011. 2. 17. 08:45

성경은 역사적인 순서대로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의 나열에 대해서만 모호한 것이 아니고 어떤 때는 아무리 봐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그 부분에 대해 덮고 넘어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믿기 때문에 성경을 보는 것이지 성경이 믿어져서 성경을 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확실하지 않다면 당신은 성경을 보기 보다는 믿음을 재확인 해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성경을 통해 믿음을 재정립하는 것도 가능하며, 가장 좋은 그리고 이상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야곱은 창세기에서 가장 자세히 다루어진 인물 중 하나이다. 그런데 나이를 역산하다 보면 참으로 재미있는 사실들을 몇 군데에서 발견 할 수 있다. 먼저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간 나이가 70세가 넘어서 이다. 즉, 라헬, 레아와의 애증의 러브 스토리가 완전 할아버지가 다 된 이후에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더구나 장자권을 에서에게 살 때가 40세가 되기 전이었으므로 (창세기 26:34에 나온 에서의 결혼 전에 장자권을 팔았다) 그 이후 약 30여년간 어머니 품 속에 있었다는 말도 된다. 알다시피 에서는 40세에 결혼을 해서 일종의 독립을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 (창세기 27:13)
리브가가 집 안 자기에게 있는 그의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가져다가 그의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창세기 27:15)
이 내용을 역으로 생각하면 리브가가 가지고 있지 않은 애서의 의복도 있는 것을 뜻하므로 에서는 독립을 해서 살았던 듯 하다. 그런데 이삭은 여전히 결혼도 하지 않고 그냥 집에 있었다. 더구나 리브가가 말하기를 '내 말만 따르고',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라고 하였던 것으로 봐서 별로 줏대도 없고 과단성도 책임감도 없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물론 너무 과한 해석이기는 하다. 그냥 이 부분은 재미로 봐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삭이 180세에 죽는데 그 때가 바로 애굽에 팔려갔던 요셉이 바로를 만나기 1년 전이다. 이삭이 죽고 나서 겨우 27년이 지나 야곱은 147세에 인생을 마감한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성경을 통해 알아 보도록 하자. 난 이런 식의 역산이 매우 흥미롭다. 읽는 사람도 같이 흥미를 느끼길 바랄 뿐이다.

먼저 명백한 것들을 정리해 보자.
사실-1. 이삭 - 40세에 리브가를 만남. (창세기 25:20)
사실-2. 이삭 - 60세에 에서와 야곱을 낳음 (둘은 쌍둥이였음.) → 이삭과 야곱의 나이차는 60년이고 이삭은 리브가를 만난 후 20년이 지나서야 자식을 봄. (창세기 25:26)
사실-3. 야곱 - 밧단 아람에 20년을 있었음 (레아를 위해 7년 라헬을 위해 7년 그리고 라반의 양들을 위해 6년) (창세기 31:41)
사실-4. 요셉 - 17세에 꿈을 꿈. (창세기 37:2)
사실-5. 이삭 - 180세에 사망 → 당시 야곱의 나이는 120세 (창세기 35:28-29)
사실-6. 요셉 - 30세에 바로를 만남. (창세기 41:46)
사실-7. 요셉 - 39세에 형제들을 다시 만남 ← 7년 풍년과 2년 흉년이 지난 후에 만났으므로 바로를 만났던 30세에 9년을 더하면 형제들을 다시 만난 나이가 된다. (창세기 45:6)
사실-8. 야곱 - 130세에 바로를 만남. (창세기 47:9) 따라서 요셉과 야곱은 91세 차이가 난다.
사실-9. 야곱 - 147세에 사망함. (창세기 47:28)
사실-10. 디나는 레아가 낳은 7자식 중에 7번째로 태어났다. (창세기 30:21)

다음으로 추론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사실들을 정리해 보겠다.
추론-1. 사실-4와 사실-6을 통해 요셉이 바로를 만나기 전까지 애굽에서 보낸 시간이 최대 13년임을 알 수 있다.
추론-2. 밧단 아람으로 간 지 7년이 지나고서야 레아, 라헬과 결혼하고 그 이후 자식을 낳기 시작함. (창세기 29:20,27)
추론-3. 요셉은 디나보다도 더 늦게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창 30:21-24) 따라서 레아가 연년생으로 자식 7을 낳았다고 가정 할 때에, 적어도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간 지 15년이 지나서야 요셉이 태어났다. 그런데 창31:25에서 요셉을 낳자 마자 야곱이 라반에게 떠나겠다고 통보하는 장면을 보며, 아마 이 시점이 레아와 라헬을 위한 의무기간인 14년이 끝나는 시점이 아니었겠느냐고 생각하여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간 지 14년이 지나면서 요셈이 태어났다고 보기도 한다. 31:27-28을 보면 직후라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럽기는 하나 그렇다고 의무가 끝나고 나서 일을 계속 했다고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이지도 않는다.
추론-4. 요셉을 낳은 후에 라반에게 고향 땅으로 돌아가기를 구함. (창 30:25) 요셉을 낳은 후 한 동안 양떼를 불려야 했으므로, 요셉은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간 지 늦어도 19년 이전에 태어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 할 듯 하다. 양들도 새끼를 베고 낳고 키우고 하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추론-3의 요셉의 태어난 시기하고도 물리는 문제인데, 즉, 요셉은 야곱이 밧단 아랍으로 간 지 14-19년 사이에 태어났다고 봐야 한다.
추론-5. 밧단 아람에서 돌아오는 도중 세겜에서 디나가 그 땅 추장 세겜에게 강간을 당한다. (창세기 34:1-2) 즉, 이 당시 디나는 강간을 당할 정도의 나이였다. 더구나 레위와 시므온이 복수를 한 것으로 보아 그들 역시 적어도 건장한 청년 정도의 나이는 됐었다고 봐야 한다. (창세기 34:25-26)
추론-6. 디나의 강간사건이 있은 후에 베냐민이 태어난다. (창세기 35:16-20) 베냐민은 야곱의 나이 92세에서 108세 사이에 태어난 것이 확실한데 (사실-4,8),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디나가 강간 당할 만한 나이를 14세로 보고 요셉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고 본다면 베냐민은 야곱의 나이 106세에서 108세 사이에 태어났을 것이라고 추정 할 수 있다.
추론-7. 추론-4에서 야곱이 말한 6년간 라반의 양떼를 지켰다는 것이 (사실-6) 요셉의 출생 이후인지 이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추론-3을 보면 레아가 7명의 자식을 낳은 후에 요셉이 태어났으므로 레아와 결혼 후 적어도 8년이 지난 시점에 요셉이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라반의 양떼를 위한 6년이 시작되기 전에 요셉을 낳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대로, 요셉이 라반의 양떼를 맡은 후에 점박이로 이루어진 양떼가 큰 떼를 이루기까지의 시간이 필요하므로 6년이 지난 다음 요셉을 낳은 것도 아니다. 결국 요셉은 그 6년의 중간 어느 시점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즉, 그 6년중 어느 기간은 품삯 없이 일하였고 남은 기간은 점박이를 갖기로 하고 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추론-8. 추론-3,4,7을 통해 볼 때에 르우벤은 요셉보다 최소 7살, 최대 12살이 많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밧단 아람에 간 지 8년만에 르우벤이 태어난 것은 거의 확실시 되기 때문이다.

위의 추론들을 통해서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야곱의 나이

 

비고

 

요셉의 나이

 

147

56

야곱 사망.

130

39

야곱이 바로를 만남. 때에 르우벤의 나이는 최소 46 최대 51세였다.

121

30

요셉이 바로를 만남.

120

29

이삭이 180세로 사망함.

108

17

요셉이 꿈을 .

106-108

15-17

베냐민이 태어남.

91

0

요셉이 태어남, 야곱이 밧단 아람에 적어도 15 최대 19년째이다.

 

이삭의 나이

 

72-76

132-136

야곱이 밧단 아람에 도착.

40

100

에서가 나이 40 결혼 .

<40

<100

에서에게 장자권을 취득함.


이제 문제되는 것들을 하나씩 살펴 보자. 먼저 야곱이 애굽으로 이주 할 때에 유다와 아셀은 손자가 있었다. 창세기 40:12절에 보면 베레스의 아들로 헤스론과 하물이 나오는데 이 베레스는 유다와 다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창세기 38:29) 즉, 베레스 자체가 이미 손자같은 아들이었으므로, 그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증손자뻘이라고 할 수 있다. 이삭도 60세에 야곱을 낳았고 야곱도 80세 정도에 르우벤을 낳은 것을 상기에 볼 때에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나이라고 하겠다. 당시 르우벤의 나이를 아무리 많게 잡아도 51세였다고 한다면 유다는 4째 아들이므로 아무리 많아도 48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셀의 레아의 네아들과 빌하의 두아들 다음 실바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니 나이를 아무리 많게 보아도 45세가 넘지 않았을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베냐민에서 나타난다. 유다가 요셉에게 베냐민에 대하여 말하며 사용한 단어가 '아이'이다. 어떤 성경에는 'lad'로 어떤 성경에는 'boy'로 번역되어 있는데 말 그대로 아이라는 뜻이다. (창 37:2에 근거하여 boy라면 late teen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For how shall I go up to my father, and the lad be not with me? lest peradventure I see the evil that shall come on my father. (창세기 44:34)
그런데 이주 당시 자손의 이름을 열거한 것을 보면 베냐민에게 이미 아들이 10명이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창세기 46:21) 위의 표를 근거로 야곱이 바로를 만날 당시의 베냐민의 나이를 추론하면 22세에서 24세 사이이다. 물론 많은 처가 있었다면 가능하긴 하겠으나, 별로 현실적이지 않다. 더구나 조상들의 결혼 형태와 비교하면 너무 빠르다.

불행히도 어거지로 숫자를 맞춰보려 해도 쉽지 않다. 이를테면 르우벤이 밧단 아람으로 간 지 8년째에 태어나지 않고 첫 해에 태어났다고 가정해 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7년이 지난 후 정식으로 결혼하고 애들을 낳기 시작한 것이 아니고 바로 결혼 생활을 시작하고 그에 대한 보상을 7년간 했다고 가정 할 수도 있다. 물론 성경에 드러난 내용은 그렇지 않다고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억지로 맞추려고 해 봐도 겨우 24세가 31세가 될 뿐이다. 그리고 유다는 겨우 55세에 증손자까지 봐야 한다.

애굽 종살이 430년(출애굽기 12:41) 광야생활 40년(신명기 8:4) 그리고 애굽에 들어 갈 때의 레위의 추정 나이 50세를 합한 약 520년 간 5대밖에 흐르지 않고 (레위-그핫-아므람-아론-엘르아살-비느하스, 출애굽기 6:16-25, 더구나 창 15:16에 사대만에 돌아오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 예언하고 있다), 애굽 종살이와 사사기 약 350년, 즉, 합해서 780년 기간 동안 겨우 10대밖에 흐르지 않은 것을 볼 때에 위의 계산은 물음표만 남기고 있다. (유다-베레스-헤스론-람-아미나답-나손-살몬-보아스-오벳-이새-다윗, 마태복음 1:1-6).

누구든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면 알려주기를 바란다. 물론 아주 속편하게 성경에 언급되는 사람들은 상징적인 사람들 뿐이므로, 거기에서 5대만 나와 있다고 해서 실제로 5대만 흐른 것은 아니라고 말 할 수도 있다. 즉, 그 사이 사이 더 있었을 거라는 말이다. (그렇게 해설하는 사람들도 많고, 나 또한 그리 틀렸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단 마태복음에서 딱 잘라 14대씩 맞춘 것을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기가 나는 불편하며, 누락된 것만 문제가 아니라 기간에 비해 너무 많은 것도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런 식의 속편한 해석은 타당하게 보이지 않는다.

다만 여기에서 몇 가지 가능한 (그러나 성경적으로는 틀리거나 또는 증명 불가능한) 가설을 몇 가지 이야기 해 보겠다.
  1.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갈 때의 르우벤의 나이가 50세 정도라는 것을 그대로 받아 들인다면, 유다나 아셀의 손자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으며, 베냐민도 10명이나 되는 아들을 두기는 힘들었다고 본다. 물론 아내가 10명이었다면 1년만에 10명의 아들을 낳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에 그렇다는 말이다.
    뭐 어차피 성경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받아들일 수도 있는 문제이나 아무래도 성경에 딱 잘라서 창세기 46:27에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 명이었더라"라고 나온 마당에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기는 쉽지 않은 문제이다.
    더구나 베레스가 태어난 과정을 보면 그 이야기는 애굽에 내려가서의 이야기라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에 분명 그 전에 있었던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유다가 적어도 손자 볼 나이는 되었었다고 보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나도 잘 모르겠다.
  2. 르우벤의 나이가 사실 많았다고 이야기 하자면, 야곱이 밧단 아람에 있었던 기간이 20년 보다 길어야 한다. 즉, 야곱이 밧단 아람에 들어간 시기가 70여세가 되어서가 아니고 한 50세 정도였다고 보고 들어가서 7년이 지난 후에 결혼 한 것이 아니고 결혼은 미리 했는데 그에 대한 의무를 뒤에 했다고 보면 르우벤의 나이를 한 70세 정도로 조정 가능해 지고 그러면 어거지로 약간이나마 맞출 수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너무 오류가 많아서 나 스스로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당장 뚜렷하게 나오는 요셉의 나이부터 문제가 되고 여하간 너무 말이 안된다.
  3. 야곱의 나이는 맞고 요셉의 나이는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편할 것 같다. 야곱이 바로를 만났을 때에 130세는 맞다고 하고 요셉이 39세가 아니었다고 본다면 조금 편해 진다. 즉, 요셉이 바로에서 7년 풍년 7년 흉년을 이야기 하는데 그 7년 풍년이 이야기 한 직후에 시작한 것이 아니고 한참 지나서 시작됐다고 보면 된다. 이를테면 20년 후에 시작했다고 보자. 그러면 요셉이 야곱을 만난 당시의 나이가 59세가 된다.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러브스토리를 만들 당시의 나이가 50대로 떨어지고 르우벤은 대충 70세 정도로 맞출 수 있다. 이야기가 부드러워지고 있다.
    그럼에도 남는 문제는 베냐민은? 아들이 10명이나 있는데 '아이'라고 한 부분은?
어차피 야곱이 애굽에 내려갈 당시의 후손 숫자는 성경에서 대표적인 논란 거리중의 하나이다. (2011/02/18 - [Bible Stories] - 야곱의 후손: 성경은 무오한가) 그 논란을 가만히 살펴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을 맞는 것으로 맞추기 위해 정말 눈물겨운 노력들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덧셈이 다들 안되는 것인지 아니면 성경을 안 읽고 남들이 하는 말을 가지고 재해석을 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어쨌든 그 숫자에는 문제가 있고 누가 틀렸건 틀렸다. 그러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성경의 저자가 하지 않고 넘어갔으나 이면에 자세히 이야기 하기에는 분량상 또는 어떤 이유상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고 인정 할 필요가 있다.

나중에 천국가면 하나님께 물어봐야겠다. 물론 그 옆에 모세 할아버지도 동석시킬 생각이다. 난 그냥 모세 할아버지가 떳떳하게 '뭐 그런 걸 그렇게 오래 생각했어?'라고 말하고 하나님이 '별거 아니잖아?'라고 말씀해 주실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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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2. 15. 06:22

이스마엘 Bible Stories2011. 2. 15. 06:22

이스마엘은 '이스마엘 족속'이란 표현까지 다 해서 52번 성경에 등장한다. 다른 성경에는 44번이 나오는 등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봐서 번역상, 발음상의 차이가 약간은 있는 듯 하다.

이 글에서는 이스마엘의 생애에 대해 잠깐 살펴 보고자 한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실수에 의해 태어난 이삭의 경쟁자로서 하나님의 섭리에서 벗어난 사람으로 보통 생각되어 지고 있다. 그리고 사실이 그런 면도 있다. 그런데 이스마엘의 자손 중에서 성경에 자주 등장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힌 족속은 별로 없는 듯 하다. 예를 들어 롯의 자손인 모압 암몬 족속이나 에서의 자손인 에돔 그리고 아말렉 족속의 출현 빈도에 비하면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거의 나오지 않는다. 약간 나오는 내용이라고 해 봐야 상인집단으로 나오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자 그러면 이제 이스마엘의 생애에 대해 한번 살펴 보자. (물론 미디안 족속으로 표현되면서 이스라엘과의 다툼도 나오기는 하나, 여하간 이스라엘의 주적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두라를 통해 낳은 아들 중 하나인 미디안과는 어떻게 구별되는 지 또는 구별하지 않고 그냥 대충 이스마엘 족속이라고 불렀는 지는 모르겠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86세 되던 해에 태어났다. (창세기 16:16) 그리고 13세 되던 해에 (아브라함 99세) 할례를 받았다. 창세기 17:23-25에 묘사되는 최초의 할례에서 명시된 피 할례자 2명중의 한 명이 이스마엘이다. 내가 여기에서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스마엘이 그저 그렇게 조연 중의 한 명으로 성경에 나오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이스마엘은 중요 조연 중의 한 명이었고 성경 저자도 그의 비중을 결코 작게 축소시키지 않았다.

비록 이삭과 같이 하나님의 큰 언약의 줄기 속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이스마엘 역시 하나님의 언약 속에서 태어났다.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창세기 16:7-15)
그런데 이 배경에는 약간 안타까운 뒷 이야기가 있다. 바로 사라와 관계된 이야기 이다. 사라는 아이가 없었고,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그녀의 여종이었던 이집트인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첩으로 내어준다. 그리고 아기가 생기자 하갈이 사라를 무시하기 시작했고, 이에 격분한 사라가 아브라함의 묵인 하에 하갈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이에 견디지 못한 하갈이 도망을 치게 되는데 그 도망친 장소에서 이 언약을 받는다. 그리고 이 언약은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께서 알려주신다.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창세기 16:20)
즉, 하갈만 비밀리에 알고 있던 언약이 아니고 아브라함도 알고 있던 언약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마엘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이 다시 반복된다. 하갈이 언약을 다시 재 확인 받게 되는 과정이 매우 좋지 못했다. 아브라함이 100세 되던 해에, 그러니까 이스마엘의 14세 때에 드디어 사라가 약속의 아들 이삭을 낳게 된다. 그런데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린다는 이유로 사라가 이스마엘을 내어 쫓으라고 말한다.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창세기 21:8-10)
젖 뗀 직후의 이야기 이므로 이삭은 1~2세 정도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스마엘은 15~16세 정도의 청소년 정도의 나이이다. 적어도 내가 성경을 읽으면서 파악한 사라의 성격은 편협함이다. 이런 인간까지 들어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놀라울 뿐이다. 어쨌든 그래도 15~16년을 보아 온 정도 있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에게 내쫓기를 구한다. 이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은 여느 아버지와 다르지 않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The matter distressed Abraham greatly because it concerned his son. (창세기 21:11)
그도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런 식의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해 분명히 마음이 아팠을 것이고, 아브라함은 이스마엘과의 관계를 어느 정도 계속 유지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증거는 창세기의 다른 부분에 어느 정도 암시가 되고 있다. 그것을 글의 말미에 다루기로 하고, 다시 돌아오면,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사라의 말대로 하라고 하신다. (창세기 21:12) 이에 바로 다음 날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 보내게 되는데 이상하게도 아브라함이 별다른 뒤를 봐 주지 않고 거의 빈 몸으로 내쫓아 버린다. 그래서 길 중에 갈증과 주림으로 거의 죽게 되는데 그 과정은 실로 안타깝기 그지 없다. 하갈이 이렇게 절규한다. "내 도저히 내 아들의 죽음을 보지 못하겠다"라고, 그리고 화살 거리 정도로 떨어져서 망연자실 죽어가는 아들을 쳐다보고 있다.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창세기 21:16-20)
이에 하나님께서 다시 역사하시어 살려주심과 동시에 약속을 다시 재확인 해 주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마엘과 함께 하시었다고 성경기자는 적고 있다.

이 이후 잠깐 동안 이스마엘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라가 127세에 죽게 되는데 당시 이스마엘의 나이는 51세 정도 그리고 아브라함은 137세, 이삭은 37세 정도 되었을 것이다. 이후 아브라함은 그두라라는 첩을 맞이해서 6명의 아들을 더 두게 되는데 아브라함이 이들에게 재산을 약간 나누어 주고 이삭에게서 멀리 떠나 살도록 한다.

여기에서 부터 이스마엘이 재 등장 하게 되는데, 아브라함이 죽을 때에 이삭과 이스마엘이 같이 장례를 치루었다. 아브라함이 175세, 이삭 75세, 그리고 이스마엘 89세에 아브라함이 죽게 되는데, 이 장례를 이스마엘이 같이 치루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상당히 새로웠었다.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에게 버림받을 때가 15~16세, 즉 한창 사춘기 때였다. 그리고 사라의 행태로 보아 아마 쫓겨나기 전의 삶도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도 자신의 아비 아브라함이 죽자 장례를 함께 치루었다고 나온다. 이로 볼 때에 이스마엘과 아브라함의 관계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을 거라고 예측되며, 심지어 이삭과도 그리 나쁜 관계를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후 이삭의 아들 에서가 이스마엘의 딸 중 하나와 결혼한 것을 봐도 교류는 계속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또한 관계도 그리 나쁘지 않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어쨌든 이제 이스마엘의 이야기는 그가 137세에 죽음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그 이야기를 잠깐 보자.
이스마엘은 향년이 백삼십칠 세에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갔고
Altogether, Ishmael lived a hundred and thirty-seven years. He breathed his last and died, and he was gathered to his people. (창세기 25:17)
성경에 죽은 나이가 명시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으며, 더구나 죽어서 자기 백성에게도 돌아갔다는 표현이 사용되는 인물은 더 적다. 왕들과 초기 조상들 등등 의미있는 사람들에게만 사용된 표현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든 아니든 간에 적어도 창세기 기자에게 있어서 또한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스마엘은 민족의 조상으로 인정받고 있었을 거라고 감히 예측해 본다.

이로써 이스마엘에 대한 글을 마치려 한다. 이스마엘과 떼어 놓고 생각 할 수 없는 이삭의 유년시절도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것은 다음 글로 기로 하자. 나는 개인적으로 이삭과 이스마엘 모두 상처많은 유년 시절을 보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스마엘은 너무 안타까운 유소년기를 보내었다. 다만 아브라함은 정말 복 받은 사람이다. 이삭도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에게만큼은 효자였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상처많은 세월을 보내었음에도 아버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악감정이 없었나 보다. 그리고 이 글을 통해 이스마엘에 대한 근거없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생각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사람의 인생이란 것이 흑백으로 간단히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지는 않다. 약속안에 있으면서도 비열하고 그 바깥에 있으면서도 인간적인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으며, 성경은 그런 사람들을 기록함에 있어서 편향된 관점을 가지고 적지 않고 있다. 다만 그것을 읽는 우리가 마음대로 선입견을 가지고 읽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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