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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에 해당되는 글 2

  1. 2011.12.10 요셉과 애굽이주 1
  2. 2011.02.17 나이를 통해 본 야곱의 일생 10
2011. 12. 10. 13:41

요셉과 애굽이주 Bible Stories2011. 12. 10. 13:41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자주 마주하게 되는 문제 중의 하나가 성경을 인물 중심으로 해석하는 문제이다. 물론, 인물 중심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고 인물을 벗어나서 해석하는 것이 쉬운 일도 아니긴 하다. 그러나 인물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 할 때에 나타날 수 있는 문제는 되도록 피해야 하는데,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즉, 인물 중심의 해석은 어떤 개인의 역할에만 집중하게 되고, 그의 전반적인 성취를 근거로 그의 삶 한 순간 한 순간을 전부 평가하는 문제가 있다. 심지어 주인공의 변방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주인공보다 못하게, 심지어 악하게 그려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라는 '믿음의 조상'을 부각시키기 위해 종종 롯은 악인으로 그려진다. (어떤 유명한 성경 강해서에서 직접 확인했던 내용이다.) 그런데 성경 상의 어떤 사람도 '사람'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였다고 생각한다. 즉, 그들의 삶에서 칭찬 받을 부분이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잘못한 부분도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런 면에서 모든 성경상의 인물들을 공정하게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 한 것은 잘 한 것으로 본받으려 노력하고 잘못 한 것은 잘못 한 것으로 경계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요셉과 애굽이주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다음의 말씀을 보면, 요셉은 애굽이주에 대해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창세기 45:9-11)
특히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애굽으로 보냈다고까지 말한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창세기 45:5-8)
보통은 이 성경 구절은 근거로 요셉을 높게 평가한다. 즉, 자신의 억울한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에 집중하여 고난을 감사로 승화시켰다는 논리이다. 크게 틀렸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요셉이 이에 대한 사명감이 있었느냐 하는 부분을 생각하면 재미 있는 부분을 발견 할 수 있다. 만약 그가 애굽이주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생각하였었다면 총독이 된 지 9년이 지나도록 가족들을 부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특히나 초반 7년은 풍년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여유도 있었고 창45:9-11에서 말 한 것과 같이 그럴 만한 지위와 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족들을 부르지 않았다. 형들에 대해서는 미워서 그랬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버지 야곱조차 외면 한 것은 으아한 부분이다. 이후 형제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을 괴롭히는데 (물론 당한 것에 비해 애교 수준의 괴롭힘이긴 하지만) 그것을 통해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다음의 성경구절을 보자.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창세기 41:51-52)
위의 성경 기록에서도 확인 할 수 있듯이 요셉은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으려고 노력하였다는 점에서 팔려온 사건은 그에게 큰 상처였다. 따라서 요셉이 애굽에 있었던 약 22년의[각주:1] 시간동안 요셉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애굽에 내려와 있는 상태라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 생각은 형제들을 만나고 나서야 갑자기 들었던 또는 깨달아졌던 생각일 뿐이다. 다음의 성경 구절을 보면 그가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애굽이주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었다는 사실이 조금 더 명확해 진다.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창세기 42:9)
형제들을 보고 나서야, 더 정확하게는 그들이 요셉에게 머리숙이는 것을 보고 나서야 요셉이 과거에 꿨던 꿈을 기억하게 된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창세기 37:6-7)
다시말해, 요셉은 애굽이주를 하나님의 명령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요셉이 알고 있던 것은 과거에 꾸웠던 꿈이 기근과 요셉의 애굽으로의 팔려가는 사건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 밖에 없다. 애굽이주는 그 꿈과도 별개의 문제이다. 여기에 더하여, 애굽이주에 대한 야곱의 반응은 사뭇 흥미로운데, 당시 야곱은 젊을 때 보다는 하나님과 더 가까이 교통하던 때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다음의 성경구절을 읽어 보자.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창세기 46:1-4)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간 것으로 보아 야곱은 분명 이주를 선택했다. 그런데 그에 대해 일말의 거리낌은 있었던 듯 하다. 하나님께서 이상 중에 나타나셔서 내려가도 된다는 허락과 동시에 안심시켜 주시는 장면이 그 증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려움을 피해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은 옳바른 선택이 분명 아니다. 이에 대한 증거는 너무 많아서 하나 하나 다 열거하는 것은 의미없고, 그 중 시점상 중요한 것들 몇 개만 살펴 보도록 하겠다. 일단 애굽 이주는 하나님의 축복에 기인한 사건은 아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중략)...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중략)...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중략)...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창세기 15:9-17)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자손과 영토에 대한 언약을 하시는데, 이 사건은 그 중 자손에 대한 언약 중간에 벌어지는 내용이다. 흐름을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그 새' 즉,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쪼개지 않고 둔다. 그리고 명백히 이 새들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고, 그것은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제물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시점과 아브라함이 제물을 드린 후에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신 시점간의 시간차도 흥미롭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제물을 준비하고 그것을 들짐승이 먹을까봐 전전 긍긍하는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긴 시간차로 인해 솔개를 쫓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중간에 잠까지 잔다 (하나님께서 재우신 것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아무리 봐도 그냥 잠든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해가 져서 어두울 때'가 되어서야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으신다. 물론 제물을 언제 준비 했는 지는 나오지 않지만 내용상 한참이 지나서야 받으신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쪼개지 않은 새는 피가 그 대로 들어 있는 셈이다. 제사를 드리고 난 음식은 보통 사람이 먹었다는 사실을 생각 할 때, 피 째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위배된다 (창 9:4). 물론 완전히 태워서 드리는 제사도 있었지만 이후 레위기를 봐도 제사 음식을 사람이 (제사장)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아직 제사 제도가 확립되기 전이기는 하지만, 피를 쏟지 않고 드린 제물은 그 자체로 제사 예법에 어긋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언한 사건이기는 하나 애굽이주는 어떻게 보더라도 축복 속의 사건은 아니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아브라함의 제사가 합당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형벌로서 내린 것이 애굽이주였다고 생각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어서 세상에 나옴으로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구원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기적같은 영광을 얻게 되었지만, 선악과를 먹고 세상으로 쫒겨 나오고 하는 일련의 과정이 결코 축복이라 부르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이다. 만약 그것이 축복이라면 하와는 최초의 축복의 통로이자 영웅이다.

더군다나 기근으로 인한 '애굽이주' 또는 '애굽이주계획'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합하는 생각이 아니라는 경험은 아브라함, 이삭 둘 모두 한다. 아브라함은 창 12:10-20에서 기근을 피해 애굽에 내려가고 그 과정에서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속임으로 '속이는 집안 내력'의 첫 문을 연다. 아마 하나님께 칭찬은 절대 받지 않았으리라. 이삭 때에도 동일한 사건이 일어난다.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창세기 26:1-2)
그랄 땅은 가나안 땅의 최남단 경계선 정도에 해당하는 땅으로, 이삭은 애굽을 향해 가고 있던 중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막으셨다.

'따라서 기근이 있으니 애굽으로 피신해서 목숨을 연명해 보자'라는 생각을 '믿음의 행위'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여기에 요셉의 행위에 대한 판단 기준이 있다 여겨진다. 아무리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라도 그것이 저주에 가까운 것이었다면 그것을 실행한 요셉의 그 행위를 옳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요셉이 하나님께 직접 명령을 받았다고 보기 어려운 상태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 애굽과 요셉의 지위가 주는 '세상의 안락함' 속에서 '고난'을 견디어 보자라는 생각은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 결코 하지 않아야 하는 행동 중의 하나임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고난을 감내하며 훈련 받아야 할 제자이다.

사실상 성경 속에서 요셉 삶을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라고 평가 할 만한 부분을 나는 찾지 못하겠다. 기껏해야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견딘 것과 바로의 꿈의 해석을 하나님께 의지해서 했다는 것 정도 밖에 없는 듯 하다. 어렸을 때엔 아버지의 과잉 보호 속에 건방지게 형들을, 심지어 부모까지도 무시하는 아들이었다. 형들이 그리고 요셉의 부모가 요셉에게 절하는 꿈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행위를 예언가적 행동으로 생각하여, 그러므로 선하다라고 덮어놓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가 듣더라도 기분 나쁜 말은 지혜롭게 해야 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입을 단속하는 것의 중요함에 대해 성경이 얼마나 자주,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는 지는 따로 설명 할 필요조차 없다. 다음의 성경구절을 통해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창세기 37:2-5)
17세면 클 만큼 컸는데도 고자질이나 하는 철부지 아들이었을 뿐이다. 물론 여기에는 야곱의 잘못이 더 크다고 할 수 있긴 하다. 뭐 그렇다고 요셉의 찌질함이 가려지지는 않을 것 같다. 결국 이런 갈등이 표면화 되어 애굽으로 팔려가게 된다. 그 이후 요셉은 '온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고 그들의 이름에 자신의 억울함과 상처를 투영시킨다. 하나님의 뜻은 므낫세보다 에브라임에게 있었는데 그것을 구분할 능력도 없었다 (야곱은 알았고, 이를 근거로 나는 야곱이 말년에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에 비해 이삭은 말년에 야곱과 에서 사이에서 에서를 선택한다.)
열매를 통하여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고, 성경은 많은 경우 열매를 기록하였다. 따라서 나는 그의 자손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역시 주의 깊게 살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분명 요셉은 곱절의 분깃을 받았으나, 그 두 지파의 이스라엘 내에서의 역할은 결코 덩치만큼 긍정적이지 않았다. 성경 전체를 통해 가장 불만이 많은 민족이 에브라임이다. 그 지파에서 배출 한 인물이라고 해 봐야 여호수아 하나 외에 또 누가 있는가. 항상 불평 불만이 많고 문제를 일으키는 지파가 바로 에브라임이었다. 받은 것에 비해 너무 보잘 것 없었던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한 번 짚어보고 싶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요셉을 평균 이상가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보는 데에도 나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애굽 이주 사건 하나만 떼어 내어 생각한다면 분명 옳은 행동은 아니었다고 본다. 우리는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에 요셉과 같이 행동해서는 안된다. 적어도 아브라함-이삭-야곱으로 내려오면서 반복적으로 확인했던 아주 명확했던 사실, 즉, 가나안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라는 그 명확한 사실 앞에서 고난 때문에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생각 그 자체가 불신앙이다.



물론 이후 요셉역시 하나님의 뜻을 더 정확히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방식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직접적인 계시였는 지 야곱으로부터의 교육이었는 지는 모르겠다. 요셉이 죽기 직전 형제들에게 자신을 가나안에 장사지내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에서 보였던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려 보내시리라는 확신을 볼 때에 애초 요셉이 가족들을 애굽으로 이주시킨 이유와 목적에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 가나안이었고 그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리라는 믿음을 확실히 보이고 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창세기 50:24-25)
그리고야곱이 죽고 난 이후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하던 형들을 위로하고 안심시키는 장면에서 요셉의 행동을 보면 그가 과거 겪었던 배신과 아픔에서 확실히 벗어났다는 사실도 확인 할 수 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창세기 50:19-21)


  1. 17세에 애굽으로 팔려서 30세에 바로를 만나 꿈을 해석하고 (창 41:46), 7년 풍년 2년 흉년 후에 형제들을 만났으므로 (30-17)+9=22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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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ToBeStable
2011. 2. 17. 08:45

나이를 통해 본 야곱의 일생 Bible Stories2011. 2. 17. 08:45

성경은 역사적인 순서대로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의 나열에 대해서만 모호한 것이 아니고 어떤 때는 아무리 봐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그 부분에 대해 덮고 넘어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믿기 때문에 성경을 보는 것이지 성경이 믿어져서 성경을 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확실하지 않다면 당신은 성경을 보기 보다는 믿음을 재확인 해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성경을 통해 믿음을 재정립하는 것도 가능하며, 가장 좋은 그리고 이상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야곱은 창세기에서 가장 자세히 다루어진 인물 중 하나이다. 그런데 나이를 역산하다 보면 참으로 재미있는 사실들을 몇 군데에서 발견 할 수 있다. 먼저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간 나이가 70세가 넘어서 이다. 즉, 라헬, 레아와의 애증의 러브 스토리가 완전 할아버지가 다 된 이후에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더구나 장자권을 에서에게 살 때가 40세가 되기 전이었으므로 (창세기 26:34에 나온 에서의 결혼 전에 장자권을 팔았다) 그 이후 약 30여년간 어머니 품 속에 있었다는 말도 된다. 알다시피 에서는 40세에 결혼을 해서 일종의 독립을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 (창세기 27:13)
리브가가 집 안 자기에게 있는 그의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가져다가 그의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창세기 27:15)
이 내용을 역으로 생각하면 리브가가 가지고 있지 않은 애서의 의복도 있는 것을 뜻하므로 에서는 독립을 해서 살았던 듯 하다. 그런데 이삭은 여전히 결혼도 하지 않고 그냥 집에 있었다. 더구나 리브가가 말하기를 '내 말만 따르고',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라고 하였던 것으로 봐서 별로 줏대도 없고 과단성도 책임감도 없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물론 너무 과한 해석이기는 하다. 그냥 이 부분은 재미로 봐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삭이 180세에 죽는데 그 때가 바로 애굽에 팔려갔던 요셉이 바로를 만나기 1년 전이다. 이삭이 죽고 나서 겨우 27년이 지나 야곱은 147세에 인생을 마감한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성경을 통해 알아 보도록 하자. 난 이런 식의 역산이 매우 흥미롭다. 읽는 사람도 같이 흥미를 느끼길 바랄 뿐이다.

먼저 명백한 것들을 정리해 보자.
사실-1. 이삭 - 40세에 리브가를 만남. (창세기 25:20)
사실-2. 이삭 - 60세에 에서와 야곱을 낳음 (둘은 쌍둥이였음.) → 이삭과 야곱의 나이차는 60년이고 이삭은 리브가를 만난 후 20년이 지나서야 자식을 봄. (창세기 25:26)
사실-3. 야곱 - 밧단 아람에 20년을 있었음 (레아를 위해 7년 라헬을 위해 7년 그리고 라반의 양들을 위해 6년) (창세기 31:41)
사실-4. 요셉 - 17세에 꿈을 꿈. (창세기 37:2)
사실-5. 이삭 - 180세에 사망 → 당시 야곱의 나이는 120세 (창세기 35:28-29)
사실-6. 요셉 - 30세에 바로를 만남. (창세기 41:46)
사실-7. 요셉 - 39세에 형제들을 다시 만남 ← 7년 풍년과 2년 흉년이 지난 후에 만났으므로 바로를 만났던 30세에 9년을 더하면 형제들을 다시 만난 나이가 된다. (창세기 45:6)
사실-8. 야곱 - 130세에 바로를 만남. (창세기 47:9) 따라서 요셉과 야곱은 91세 차이가 난다.
사실-9. 야곱 - 147세에 사망함. (창세기 47:28)
사실-10. 디나는 레아가 낳은 7자식 중에 7번째로 태어났다. (창세기 30:21)

다음으로 추론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사실들을 정리해 보겠다.
추론-1. 사실-4와 사실-6을 통해 요셉이 바로를 만나기 전까지 애굽에서 보낸 시간이 최대 13년임을 알 수 있다.
추론-2. 밧단 아람으로 간 지 7년이 지나고서야 레아, 라헬과 결혼하고 그 이후 자식을 낳기 시작함. (창세기 29:20,27)
추론-3. 요셉은 디나보다도 더 늦게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창 30:21-24) 따라서 레아가 연년생으로 자식 7을 낳았다고 가정 할 때에, 적어도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간 지 15년이 지나서야 요셉이 태어났다. 그런데 창31:25에서 요셉을 낳자 마자 야곱이 라반에게 떠나겠다고 통보하는 장면을 보며, 아마 이 시점이 레아와 라헬을 위한 의무기간인 14년이 끝나는 시점이 아니었겠느냐고 생각하여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간 지 14년이 지나면서 요셈이 태어났다고 보기도 한다. 31:27-28을 보면 직후라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럽기는 하나 그렇다고 의무가 끝나고 나서 일을 계속 했다고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이지도 않는다.
추론-4. 요셉을 낳은 후에 라반에게 고향 땅으로 돌아가기를 구함. (창 30:25) 요셉을 낳은 후 한 동안 양떼를 불려야 했으므로, 요셉은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간 지 늦어도 19년 이전에 태어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 할 듯 하다. 양들도 새끼를 베고 낳고 키우고 하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추론-3의 요셉의 태어난 시기하고도 물리는 문제인데, 즉, 요셉은 야곱이 밧단 아랍으로 간 지 14-19년 사이에 태어났다고 봐야 한다.
추론-5. 밧단 아람에서 돌아오는 도중 세겜에서 디나가 그 땅 추장 세겜에게 강간을 당한다. (창세기 34:1-2) 즉, 이 당시 디나는 강간을 당할 정도의 나이였다. 더구나 레위와 시므온이 복수를 한 것으로 보아 그들 역시 적어도 건장한 청년 정도의 나이는 됐었다고 봐야 한다. (창세기 34:25-26)
추론-6. 디나의 강간사건이 있은 후에 베냐민이 태어난다. (창세기 35:16-20) 베냐민은 야곱의 나이 92세에서 108세 사이에 태어난 것이 확실한데 (사실-4,8),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디나가 강간 당할 만한 나이를 14세로 보고 요셉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고 본다면 베냐민은 야곱의 나이 106세에서 108세 사이에 태어났을 것이라고 추정 할 수 있다.
추론-7. 추론-4에서 야곱이 말한 6년간 라반의 양떼를 지켰다는 것이 (사실-6) 요셉의 출생 이후인지 이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추론-3을 보면 레아가 7명의 자식을 낳은 후에 요셉이 태어났으므로 레아와 결혼 후 적어도 8년이 지난 시점에 요셉이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라반의 양떼를 위한 6년이 시작되기 전에 요셉을 낳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대로, 요셉이 라반의 양떼를 맡은 후에 점박이로 이루어진 양떼가 큰 떼를 이루기까지의 시간이 필요하므로 6년이 지난 다음 요셉을 낳은 것도 아니다. 결국 요셉은 그 6년의 중간 어느 시점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즉, 그 6년중 어느 기간은 품삯 없이 일하였고 남은 기간은 점박이를 갖기로 하고 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추론-8. 추론-3,4,7을 통해 볼 때에 르우벤은 요셉보다 최소 7살, 최대 12살이 많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밧단 아람에 간 지 8년만에 르우벤이 태어난 것은 거의 확실시 되기 때문이다.

위의 추론들을 통해서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야곱의 나이

 

비고

 

요셉의 나이

 

147

56

야곱 사망.

130

39

야곱이 바로를 만남. 때에 르우벤의 나이는 최소 46 최대 51세였다.

121

30

요셉이 바로를 만남.

120

29

이삭이 180세로 사망함.

108

17

요셉이 꿈을 .

106-108

15-17

베냐민이 태어남.

91

0

요셉이 태어남, 야곱이 밧단 아람에 적어도 15 최대 19년째이다.

 

이삭의 나이

 

72-76

132-136

야곱이 밧단 아람에 도착.

40

100

에서가 나이 40 결혼 .

<40

<100

에서에게 장자권을 취득함.


이제 문제되는 것들을 하나씩 살펴 보자. 먼저 야곱이 애굽으로 이주 할 때에 유다와 아셀은 손자가 있었다. 창세기 40:12절에 보면 베레스의 아들로 헤스론과 하물이 나오는데 이 베레스는 유다와 다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창세기 38:29) 즉, 베레스 자체가 이미 손자같은 아들이었으므로, 그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증손자뻘이라고 할 수 있다. 이삭도 60세에 야곱을 낳았고 야곱도 80세 정도에 르우벤을 낳은 것을 상기에 볼 때에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나이라고 하겠다. 당시 르우벤의 나이를 아무리 많게 잡아도 51세였다고 한다면 유다는 4째 아들이므로 아무리 많아도 48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셀의 레아의 네아들과 빌하의 두아들 다음 실바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니 나이를 아무리 많게 보아도 45세가 넘지 않았을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베냐민에서 나타난다. 유다가 요셉에게 베냐민에 대하여 말하며 사용한 단어가 '아이'이다. 어떤 성경에는 'lad'로 어떤 성경에는 'boy'로 번역되어 있는데 말 그대로 아이라는 뜻이다. (창 37:2에 근거하여 boy라면 late teen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For how shall I go up to my father, and the lad be not with me? lest peradventure I see the evil that shall come on my father. (창세기 44:34)
그런데 이주 당시 자손의 이름을 열거한 것을 보면 베냐민에게 이미 아들이 10명이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창세기 46:21) 위의 표를 근거로 야곱이 바로를 만날 당시의 베냐민의 나이를 추론하면 22세에서 24세 사이이다. 물론 많은 처가 있었다면 가능하긴 하겠으나, 별로 현실적이지 않다. 더구나 조상들의 결혼 형태와 비교하면 너무 빠르다.

불행히도 어거지로 숫자를 맞춰보려 해도 쉽지 않다. 이를테면 르우벤이 밧단 아람으로 간 지 8년째에 태어나지 않고 첫 해에 태어났다고 가정해 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7년이 지난 후 정식으로 결혼하고 애들을 낳기 시작한 것이 아니고 바로 결혼 생활을 시작하고 그에 대한 보상을 7년간 했다고 가정 할 수도 있다. 물론 성경에 드러난 내용은 그렇지 않다고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억지로 맞추려고 해 봐도 겨우 24세가 31세가 될 뿐이다. 그리고 유다는 겨우 55세에 증손자까지 봐야 한다.

애굽 종살이 430년(출애굽기 12:41) 광야생활 40년(신명기 8:4) 그리고 애굽에 들어 갈 때의 레위의 추정 나이 50세를 합한 약 520년 간 5대밖에 흐르지 않고 (레위-그핫-아므람-아론-엘르아살-비느하스, 출애굽기 6:16-25, 더구나 창 15:16에 사대만에 돌아오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 예언하고 있다), 애굽 종살이와 사사기 약 350년, 즉, 합해서 780년 기간 동안 겨우 10대밖에 흐르지 않은 것을 볼 때에 위의 계산은 물음표만 남기고 있다. (유다-베레스-헤스론-람-아미나답-나손-살몬-보아스-오벳-이새-다윗, 마태복음 1:1-6).

누구든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면 알려주기를 바란다. 물론 아주 속편하게 성경에 언급되는 사람들은 상징적인 사람들 뿐이므로, 거기에서 5대만 나와 있다고 해서 실제로 5대만 흐른 것은 아니라고 말 할 수도 있다. 즉, 그 사이 사이 더 있었을 거라는 말이다. (그렇게 해설하는 사람들도 많고, 나 또한 그리 틀렸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단 마태복음에서 딱 잘라 14대씩 맞춘 것을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기가 나는 불편하며, 누락된 것만 문제가 아니라 기간에 비해 너무 많은 것도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런 식의 속편한 해석은 타당하게 보이지 않는다.

다만 여기에서 몇 가지 가능한 (그러나 성경적으로는 틀리거나 또는 증명 불가능한) 가설을 몇 가지 이야기 해 보겠다.
  1.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갈 때의 르우벤의 나이가 50세 정도라는 것을 그대로 받아 들인다면, 유다나 아셀의 손자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으며, 베냐민도 10명이나 되는 아들을 두기는 힘들었다고 본다. 물론 아내가 10명이었다면 1년만에 10명의 아들을 낳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에 그렇다는 말이다.
    뭐 어차피 성경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받아들일 수도 있는 문제이나 아무래도 성경에 딱 잘라서 창세기 46:27에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 명이었더라"라고 나온 마당에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기는 쉽지 않은 문제이다.
    더구나 베레스가 태어난 과정을 보면 그 이야기는 애굽에 내려가서의 이야기라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에 분명 그 전에 있었던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유다가 적어도 손자 볼 나이는 되었었다고 보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나도 잘 모르겠다.
  2. 르우벤의 나이가 사실 많았다고 이야기 하자면, 야곱이 밧단 아람에 있었던 기간이 20년 보다 길어야 한다. 즉, 야곱이 밧단 아람에 들어간 시기가 70여세가 되어서가 아니고 한 50세 정도였다고 보고 들어가서 7년이 지난 후에 결혼 한 것이 아니고 결혼은 미리 했는데 그에 대한 의무를 뒤에 했다고 보면 르우벤의 나이를 한 70세 정도로 조정 가능해 지고 그러면 어거지로 약간이나마 맞출 수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너무 오류가 많아서 나 스스로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당장 뚜렷하게 나오는 요셉의 나이부터 문제가 되고 여하간 너무 말이 안된다.
  3. 야곱의 나이는 맞고 요셉의 나이는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편할 것 같다. 야곱이 바로를 만났을 때에 130세는 맞다고 하고 요셉이 39세가 아니었다고 본다면 조금 편해 진다. 즉, 요셉이 바로에서 7년 풍년 7년 흉년을 이야기 하는데 그 7년 풍년이 이야기 한 직후에 시작한 것이 아니고 한참 지나서 시작됐다고 보면 된다. 이를테면 20년 후에 시작했다고 보자. 그러면 요셉이 야곱을 만난 당시의 나이가 59세가 된다.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러브스토리를 만들 당시의 나이가 50대로 떨어지고 르우벤은 대충 70세 정도로 맞출 수 있다. 이야기가 부드러워지고 있다.
    그럼에도 남는 문제는 베냐민은? 아들이 10명이나 있는데 '아이'라고 한 부분은?
어차피 야곱이 애굽에 내려갈 당시의 후손 숫자는 성경에서 대표적인 논란 거리중의 하나이다. (2011/02/18 - [Bible Stories] - 야곱의 후손: 성경은 무오한가) 그 논란을 가만히 살펴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을 맞는 것으로 맞추기 위해 정말 눈물겨운 노력들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덧셈이 다들 안되는 것인지 아니면 성경을 안 읽고 남들이 하는 말을 가지고 재해석을 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어쨌든 그 숫자에는 문제가 있고 누가 틀렸건 틀렸다. 그러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성경의 저자가 하지 않고 넘어갔으나 이면에 자세히 이야기 하기에는 분량상 또는 어떤 이유상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고 인정 할 필요가 있다.

나중에 천국가면 하나님께 물어봐야겠다. 물론 그 옆에 모세 할아버지도 동석시킬 생각이다. 난 그냥 모세 할아버지가 떳떳하게 '뭐 그런 걸 그렇게 오래 생각했어?'라고 말하고 하나님이 '별거 아니잖아?'라고 말씀해 주실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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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