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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론'에 해당되는 글 1

  1. 2011.10.19 구원에 대하여 2
2011. 10. 19. 10:13

구원에 대하여 2 Bible Stories2011. 10. 19. 10:13

오늘은 구원에 관한 조금은 골치아프면서 충분히 논란거리가 될 수 있을 만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어떤 사람들은 필자가 올렸던 2011/02/03 - [Bible Stories] - 구원에 대하여와 모순된다고 생각 할 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전혀 모순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모순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강요할 능력은 되지 않는다.

보통 장로교인들은 칼빈으로부터 시작한 그러나 그 후 약간씩 변형이 가해진 예정론을 배우고 믿으며 살고 있다. 물론 이 글을 통해 진부한 예정론에 대한 논의를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간과하고 있는 것이 설혹 있지는 않은가 살펴보고 싶을 뿐이다.

일단 예정론 하면 같이 떠 오르는 것이 예지론이 되겠다. 이에 관련한 심도 있는 글을 보고 싶다면 지금 당장 검색창에 '예정론' 이라고만 해도 수도 없이 많은 글이 검색 될 것이다. 나는 그런 글들과 대동소이한 글을 쓰고 싶지도 않고 경쟁하고 싶지도 않다. 그냥 우리가 흔히 하는 질문으로 부터 시작해 보자.
  • 내가 하나님에 의해 구원이 예정되어 있다면 이제 맘대로 살아도 될까? 어떻게 산다 할 지라도 하나님께서 한 번 구원하신 사람을 버릴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이건 사실 맞는 말이다. 비록 신약의 많은 서신들이 이런 생각 때문에 방탕했던 교인들을 질타하는 데에 많은 지면을 할애 했었다손 치더라도, 하나님의 절대 사랑과 절대 구원을 생각 한다면 한 번 구원 받은 사람이 그 구원에서 떨어져 나갈 리는 없다. 물론 독자 중에 야고보서의 많은 구절들과 요한 일서의 내용들 히브리서 바울 서신의 많은 구절이 떠오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실로 신약은 예정론을 지지하는 구절과 예지론을 지지하는 구절들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그 중 어느 한 쪽을 지지하면 성경의 거의 절반의 내용으로 공격이 가능하다.
  • 구원 받은 사람은 구원 받은 증거를 보이면서 살아야 한다.
이 역시 맞는 말인데 대체 그 증거가 무엇이겠느냐란 문제가 있겠다.

일단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예정론을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가정하고 글을 써 보겠다. 즉, 구원은 한 번 구원이고, 그 구원에 대해서 번복되는 일은 없으며, 그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 선택에 의한 것이다 정도를 받아들인다고 가정하겠다. (물론 나도 이렇게 성경을 보는 사람이다. 칼빈의 TULIP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으나, 그렇게 현학적인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야고보서 2:17-20)
이와 관련된 수도 없이 많은 구절들이 떠오르지만 그것들을 모두 훑어 보다가는 성경 전체를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이 구절만 보고 이야기 하자. 이 행함에 대한 강조 때문에 일찌기 종교개혁가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까지 했었다. 'James the Just'라고 불리웠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왜 이런 말을 했었던 것일까?

단도 직입적으로 말을 해 보겠다.
당신은 구원 받았는가? 아멘이라 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배웠었으니까. 그럼 그걸 당신은 어떻게 확신하나? 밑도 끝도 없이 확신하라고 하니 확신하나? 확신하라고 한다고 또는 확신하기로 했다고 확신이 되나? 그걸 확신이라고 부를 수 있나? 아니면 그냥 세뇌인가? 조금 위험한 접근이자 질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께서 우리 이름을 생명책이 한 번 기록하면 그것을 다시는 지울 방법이 없다. 어차피 우리는 악하고, 그렇다고 과거 적어도 어느 한 순간에 선하여 구원 받은 것이 아니기에 갑자기 어느 순간 깨끗하다고 생명책에 적어 주실 리도 만무 할 뿐 아니라, 어느 순간 악하여 졌다고 해도 이미 적혀 있는 이름을 지울 리도 없다. 어차피 그게 그거인 인간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을 누구 보다 잘 알고 계신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4:15-16)
그러면 행위는 무엇인가? 이 행위를 성령의 열매라고 바꾸고 싶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특히 다음 구절에 잘 정리되어 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22-23)
우리가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에 잘 붙어 있으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해 열매를 맺으시고 그 열매가 바로 성령의 열매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5)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를 통해 열매를 맺으시려면 가장 기본이 되는 가정은 내 안에 '의심'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야고보서 1: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마가복음 11: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마태복음 21:21)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마가복음 9:23)

자 나는 여기에 야고보서의 비밀이 예정론과 상통하면서 서로 보완 관계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믿음(의심없음) → 예수님이 나를 통해 열매 맺으심 → 그 열매를 보면서 내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됨 → 그 확신으로 의심을 없애고 믿음을 더욱 강건하게 함 → 예수님이 나를 통해 열매 맺으심 → ......" 이런 믿음의 사이클이 우리 인생에 반복되야 건강한 자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 입장에서는 절대 예정이고 예정하신 사람을 다시 버리는 일이 없다. 그런데 우리 입장에서는 내가 구원을 받았는 지 확인 할 방도가 없다. 하나님이 생명책을 열람하게 해 주시는 것도 아니고 참으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다 보면 의심이 생기고 의심하는 사람을 통해 예수님이 역사 하시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난 아멘으로 신앙고백을 했었으니까 일단 구원은 받을 거야. 뭐 이유도 모르겠고 확신도 없지만, 확신하면 된다고 했어.'라는 말도 안되는 논리를 가지고 있는 기독교인은 사실 상상 이상으로 많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그런 부류에 속해 있을 지도 모른다.

요한 일서에도 나오지만, 구원 받았다고 해서 의롭게 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선한 행실 (직접적으로는 형제를 사랑함)이 나의 구원 받았음에 대한 증거는 될 수 있다. 즉, 선한 행실이 구원의 충분조건이기는 하나 선한 행실의 구원의 필요조건은 되지 않는다는 말씀이고, 이 역시 야고보서의 내용과 통하는 내용이다. 즉,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서 '아멘'하는 순간 교회 공동체가 '당신은 구원받은 백성입니다.'라고 인정한다. 그 인정을 받아 들임으로 나에게 있는 일말의 의심을 거두어 내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 의심없는 믿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일하시고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열매를 보고 나의 구원을 확인받게 된다. 이것이 또 다른 열매의 원동력이 된다 (물론 나는 예수님께 붙어 있는 일만 하면 되지만).

교회를 수십년 다니면서도 붙들고 있는 것은 '난 구원 받았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정도만 말 할 수 있다면 정말 심각하게 스스로의 믿음을 점검해 봐야 한다. 우리는 죽어 봐야 어디에 갈 지 안다. 내가 천국간다고 확신한다 해서 지옥에 갈 사람이 천국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결국 당신을 통해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열매를 볼 수 있어야 그제서야 진실로 구원에 대한 확신을 할 수 있게 되며, 그 구원의 확신은 평생을 통하여 점검하고 점검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예수님께서 일하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영적 상태를 유지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삶은 온갖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으면서 가증스럽게도 천국에 가리라는 확신해 차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굳게 붙들고 있는 것이 예정론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확신하면 안된다. 그게 가능하다고 하면 바울과 야고보 요한 등등 신약 기자들이 그렇게 힘들여서 어려운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펌프에 마중물의 역할을 하는 것이 처음 믿을 때의 '아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마중물이라는 표현이 이단 종파에서 사용하는 표현이기는 한데, 나는 그냥 마중물의 의미 그대로 여기에서 사용하고 싶다.) 그 이후로는 스스로 솟아나는 물을 이용해서 물을 끌어올리게 된다. 그런데 아무리 마중물을 넣어도 그 밑에 샘이 없다면 물은 연속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마중물로 넣었던 물만 겨우 나왔는데 그것을 보고 구원 받았다고 믿고 방탕하게 산다면 정말 불행한 사람이다. 물론 그 중 구원 받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나는 여기에서 '확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 다만 당신이 구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그 정도의 신앙에만 머무른다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해 일하실 수 없으며, 결국 당신은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고 천국에 가게 될 것이다. 그게 인생의 목표라면 우리 모두 생명책을 열람하지 않은 상황에서 '당신 구원 받은 거 확실해?'라고 나는 묻고 싶다.

믿음의 길은 결코 쉽지 않다. 나를 통해 일하시는 예수님을 민감하게 인식 할 수 있어야 하며, 그 영적 민감함으로 알게되는 열매를 통해 내 믿음을 성장시키고 더욱 예수님이 일하시기에 좋은 영적 상태를 만들기 위해 순간 순간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 왜 바울이 우리의 삶을 경주에 비유하며, 전쟁터의 병사에 비유했는 지에 대한 묵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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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