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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7장 27절'에 해당되는 글 1

  1. 2012.08.21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 (부제: 깨달음과 영향력)

나를 오랫동안 괴롭혀온 주제가 있다. 나는 성경을 읽고 있고, 어떤 경우 남보다 성경에 대해 더 자세히 아는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성경을 읽는 이유는 성경 읽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깨달음이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더라는 사실이다. 솔직히 말해 나의 삶도 별로 변화시키지 못하였다. 왜 나의 깨달음에는 능력이 없을까... 이에 대해 정말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해 왔다. "네가 네 형제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야." "넌 진정으로 하나님을 주로 모시지 않고 있어. 그게 바로 이유야."라는 정답들은 나에게 별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에 내가 맡은 소그룹 멤버들이 반기를 드는 사건이 터졌다. 모임에서 성경공부만 하는 데에 대한 반감과 함께, 너무 강압적으로 가르치는 나의 태도가 어우러져 복잡한 그러나 어찌 보면 간단한 이유로 터진 사건이었다. 나는 속이 좁아서 상당히 짜증이 났었다. 그러면서도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부족한 부분과 문제점에 대해서 알려주시리라 믿고 계속 성경을 읽어 나갔다. 역시 약 2주 만에 해답을 얻게 되었다. 그 과정이 약간은 지루할 수 있으나, 여기에 그 전체 이야기를 적어볼까 한다. 원래 이 블로그가 누가 읽어주길 바란다기보다 내가 내 생각을 기록하는 목적을 하고 있으므로 블로그 본래의 목적에 합하는 글이긴 하다.


사건이 터진 그 주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겠다. 다음 말씀해석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누가복음 9:5)

나는 복음을 구걸하듯이 전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가진 귀한 것을 제발 받아달라고 사정하며 베풀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비단 비신자들에게만 적용되지 않고 신자들 사이에서도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실 위의 말씀은 제자들을 이스라엘 내에서 파송하시면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성도 간의 문제에 대한 문제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맞다.) 어떤 모임이든 모임에 부담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모임에 잘 참석도 하지 않고 그러면서 자기에게 관심을 두기를 바라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보통은 이런 사람들을 '약하다'라고 하며 어떻게든 모임에 참석시키려고 노력한다. 물론 그 노력하는 사람들은 형제애를 실천 중이다. 그러므로 옳으며 칭찬받아야 한다. 그러나 같은 '형제'로 불리면서 모임에 부담을 주는 그 행동을 하는 그 사람은 분명 죄성을 발휘하는 중이다. 그러므로 그 스스로는 자신에 대해 반성할 줄 알아야 하며, 어떤 경우에 단호한 조치가 필요할 수 있다. '약하여 돌봐야 하는 사람'에 해당하는 그 사람이 만약 '나는 지금 힘드니까 너희는 나를 돌봐야 해. 나에게 관심을 둬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난 상처받아버릴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런 과정을 통해 그 사람에게 회복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복음에 대해 '내가 교회에 다녀 주마. 내가 모임에 참석해 주마. 내가 말씀을 들어 주마'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오히려 모임에서 내치는 것이 그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14-15)

이 말씀에서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을 '왕따' 시키라고 바울이 말하고 있다. 이 역시 교회 안에서 벌어졌던 일이므로 위의 예수님의 말씀과 연관 지어서 생각하는 데에 큰 무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동시에 '형제같이 권면'하라고 한다. 무슨 뜻이겠는가? 바로 그 '제외함'이 그의 회복을 위함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복음을 복음으로 받지 않고 마치 크게 선심 써서 들어주는 양 대하는 사람은 사실 떨어버리는 것이 그를 위한 조치일 수 있다. 물론 방법상의 어려움과 지혜로운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넘어가자. 너무 어려운 문제이다.


이런 의도로 말을 했었는데, 모임 중에 한 사람이 그에 대해 발끈했다. 그 사람을 지목하여 말한 것도 아니고 내가 위에서 말한 내용과 그 사람이 밀접히 관계된 경우도 아니었는데 그 사람이 한동안 모임에 나오지 않다 보니 그 말씀해석이 마음에 걸렸나 보다. 더구나 나 외에 다른 사람들도 그 사람을 나오게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는데 내가 그렇게 말해 버리니 좀 민망했었나 보다. 그러다 보니 일대 다로 다소간 언쟁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그 말을 할 때에 그런 소란이 일어날 수 있으리라고 미리 알았다는 사실이고, 그냥 예상대로 그런 결과가 나왔을 뿐이다. 그러면 내가 지혜롭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야 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말씀이 그렇게 적혀있고, 내가 그렇게 깨달았다면 내 신앙 양심상 다르게 전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이 생각은 어느 정도 강력한 근거가 있다.


우리 소그룹 모임에서는 한 가정씩 돌아가며 QT 나눔을 하는 시간을 가진다. 마침 그날이 내 차례여서 준비했던 말씀이 예레미야서의 6~8장이었다. 물론 소란때문에 나누지 못하였다.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6:13-15)

당시 유다의 부패상이 1~6장에 걸쳐서 나오고 있다. 그리고 그 부패의 결과로 그들은 멸망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평강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럼 당신 주변은 어떤가? 그리고 당신은 어떤가? 멸망에 대해 선포하는 목회자를 좋아하는가? 더구나 당신은 잘못에 대해 넘어가지 않고 지적하는 편인가? 나는 감히 말하건대, 현대 교회에서는 회복의 말씀만 흘러나온다고 생각한다. 눈을 들어 주변을 돌아보면 불합리한 것 투성이인데, 회복과 평안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당시와 오늘은 비슷한 부분이 참으로 많다. 그다음으로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을 할지라도 그들이 너에게 순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네가 그들을 불러도 그들이 네게 대답하지 아니하리니,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는 민족이라 진실이 없어져 너희 입에서 끊어졌다 할지니라. (예레미야 7:27-28)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길, 네가 선포해봐야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도 말하라고 하신다. 나는 이 부분을 나에게 적용하고 싶었다. 듣든 듣지 않든 현재 내가 깨달은 말씀은 말씀 그대로 전해야 하는 것이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였다. 말씀이 또 이어진다.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즉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악을 뉘우쳐서 내가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 전쟁터로 향하여 달리는 말 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느냐 참으로 서기관의 거짓의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며 두려워 떨다가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 (예레미야 8:6-9)

가르치는 자는 정직을 말하지 않고,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모른다. 더구나 그 백성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지혜가 있고"라고 한다. 나는 이 말을 실제로 우리 교회 집사에게서 들은 일이 있다. 그 분이 말씀하시기를 "저는 구원받을만큼의 지식은 이미 알고 있는데 성경을 굳이 읽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라고 하였다. 실제로 많은 교인들이 자신들이 성경을 모르는 데에는 동의하나 구원받을 만큼은 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다 그렇지 않다를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현상 자체로 봐서는 이 구절에서 말하는 문제점이 현대교회의 문제점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정직을 말하기로 정직히 말하기로 작정하였고, 멤버들에게 여호와의 규례를 가르치기로 작정하고 모임에 참석했었다.


따라서 당연히 예상되는 반발을 무시하고 말을 하게 되었고, 반발이 일어났다. 물론 그 반발의 중심에는 나의 조심 없는 언행과 너무 힘든 성경공부 그리고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하는 데에 대한 불만 등이 복합되어 있으나, 표면적으로는 위의 이유로 반발이 일어났고, 그에 대해 상당히 오랜 시간 이야기를 하였다. 여하간 당일은 잘 마무리가 되는 듯싶었다. 나는 말을 좀 줄이기로 하였고, 멤버들의 상태를 조금 더 이해해주기로 하였으며, 멤버들은 성경공부 내용을 미리 조금이라도 생각해보고 오기로 하였다. 그래서, 바로 다음날 정도에 그 주에 할 성경공부 교재를 미리 편집하고 문제마다 약간씩 생각할 문제를 달아서 전해 주었다. 당시 생각할 문제를 달면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대부분이 예습해 오지 않을 것이며, 혹시 예습한다 하더라도 오기 직전 1분 또는 5분 전에 한번 읽어만 볼 것이다. 또는 차 안에서 잠깐 훑어보기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생각을 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그냥 읽기만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생각할 거리를 생각할 수 있도록 가이드를 해 주어야겠다. 이런 생각으로 적었던 생각할 문제들이 다시 멤버들에게 부담으로 비쳤었나 보다. 특히나 혹시 더 깊은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을 위해 팁을 몇 개 적었었는데 그것들을 죄다 공부해 오라는 것으로 오해하여 더 큰 소동이 내부적으로 있었던 것 같다. 급기야 그들이 내 아내를 불러서 그런 불만을 이야기하였고, 아내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그런 의도가 아니라고 변명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부분에서 내가 폭발하게 되었다. 나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 상관 없다. 그런데 아내를 불러서 했다. 더구나 아내가 사과와 변명을 하게 되었다. 이 부분이 나를 폭발하게 하였다. 정말 분노하였고 다 관두자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나의 분노는 분노고 나는 한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나의 분노의 중심에는 어떤 진리나 하나님의 명령 또는 성경이론이 있지 않고 나의 속 좁음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내 심정은 "내 속좁음이던 뭐던 간에 내가 이 사람들과 다시는 성경공부를 하지 않겠다."였다. 그러면서 계속 성경을 읽어 나갔다. 이런 때 항상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게 무언가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기대하고 성경을 읽게 되었다.


그런데 말씀을 통해서 나의 문제점을 보여주시지 않는 듯이 보였다. 다음의 말씀은 아내 사건이 터졌던 그날 아침에 읽었던 말씀이다.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에스겔 3:5-7)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불신자는 네 말을 들을지 몰라도 네 주변에 있는 성도들은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선포하라고 하신다.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에스겔 3:11)

그러면서 최종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이다.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니라. (에스겔 3:27하반)

내가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심지어 언급하지 않은 중간에는 그 유명한 파수꾼 비유와 겔3:26~27에는 징계의 방법으로 선지자의 입을 봉하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즉,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재앙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선포하지 않은 파수꾼에게 그 피 값을 찾을 것이라 말씀하신다. 나는 성경에 상대방이 듣기 쉽게 말하면 하나님 말씀이 더 잘 전해진다는 말씀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듣든지 아니 듣든지" 또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리라" 등등의 말씀이 많다는 것은 안다. 그리고 그 말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듣지 않고의 책임이 전하는 자에게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전하는 자는 전하는 방식이 어떻든 간에 전하는 책임만 하면 되고 그 말씀을 듣고 듣지 않고는 전적으로 듣는 사람 책임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내가 말씀을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면 나는 모두 잘했고 멤버들은 죄다 잘못했나? 그들은 들을 귀가 없었던 것이고, 나는 파수꾼의 역할을 잘해낸 것인가?


이즈음에서 나는 약간 헷갈리기 시작했다. 결코, 내가 잘한 부분이 없는데 말씀으로는 내가 잘못했다는 응답이 없다는 사실이 약간 곤혹스러웠다. 나는 하나님의 방법이 사람의 방법과 다르므로, 내 상식으로 잘잘못을 가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번의 사건에서 나의 속 좁음과 거만함 그리고 남을 배려치 않는 그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내 상식으로는 내가 잘못한 것이 분명하나, 성경이 그것이 잘못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나는 적어도 교회 내에서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좀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세상적으로는 잘못을 인정할 수 있으나, 교회에서는 할 수 없다는 말이 거꾸로 돼야 하는 것 아니냐고 도전하는 것이 가능해 보인다. 오히려 세상적으로는 떳떳하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해 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도전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에 대해 확고하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죄를 통해 잃었기 때문에 나의 본성의 소리는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세상의 기준으로 잘잘못을 결정할 수 있는 일도 교회에서는 그 기준을 사용하지 않으려 하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물론 가능한 한 세상일에 대해서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려고 노력하며,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과정이 바로 우리 삶 즉, 세상에서의 천국 백성이 되기 위한 훈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던 차에 아내가 또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돌아오더니 자기 마음이 편해졌다고 하면서 가장인 내 뜻을 따르기로 했다고 했다. 즉, 내가 다 관두겠다면 그 뜻에 따르겠다는 선언을 하였다. 그 말에서 사실 더 큰 불편함을 느꼈다. 물론 나는 우리 가정의 가장이기 때문에 어떤 결정에 관한 최우선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신앙의 결정에 관한 한 내가 결정하고, 나의 결정에 따르기로 이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나의 신앙결단에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고 나의 속 좁음에 해당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에게도 "이 문제는 가장 운운할 문제가 아니다. 당신은 이런 때 나에게 계속 잘못을 지적함으로써 나를 고치려고 노력해야지 당신의 결정에 따르겠어라고 말할 그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하였다. 여하간 고민이 깊어져만 갔었다.


그러다가 다니엘서 9장에서 해답을 얻었다. 먼저 다니엘서를 이야기하기 전에 근래 신선하게 다가왔던 말씀을 먼저 보자. 에스겔서 36:36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너희 사방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폐한 자리에 심은 줄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에스겔 36:36)

하나님의 의지를 상당히 강력하게 표현한 말씀이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말씀의 대미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그 회복을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겠다는 선언이다. 이 말씀의 후반부를 ESV로 읽으면 조금 더 생동감 있게 느낄 수 있다.

Then the nations that are left all around you shall know that I am the Lord; I have rebuilt the ruined places and replanted that which was desolate. I am the Lord; I have spoken, and I will do it. (ESV)

'I'로 시작하는 3개의 문장이 병렬되어 있다. "나는 여호와다. 내가 말하였다. 그리고 내가 이룰 것이다." 이 정도면 사실 우리가 끼어들 구석이 전혀 없다. 하나님께서 모두 알아서 하시겠다는 선언이다. 그런데 다음 장도 아니고 바로 다음 절에서 아주 의외의 말씀을 하신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Thus says the Lord God: This also I will let the house of Israel ask me to do for them: to increase their people like a flock. (에스겔 36:37)

당신이 이루실 것임을 그렇게 강력하게 말씀하시고 바로 이어서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필요하고 또 기도하게 하실 것임을 선포하신다. 물론 이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존재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역사에 우리의 참여를 기다리시며, 같이 영광 받기를 원하신다."라고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아주 신선했었다. 그리고 이 말씀이 뇌리에 남아 있었다.


이런 기억을 가지고 다니엘서 9장을 읽는데 정말 충격적이었다. 말씀은 이렇게 시작한다.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 해,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다니엘 9:1-2)

자 당신에게 이런 깨달음이 왔다.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이 조만간 해결될 것이며, 그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당시 다니엘은 대충 70년 중의 67년 정도가 지난 것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70년을 언제부터 언제까지로 볼 것인가는 이 글의 범위를 넘어간다. 다만 다니엘은 자신이 이주당한 때로부터 계산하여 다리오 왕 첫해까지 계산했을 때에 대충 67년 정도가 지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하간 70년이 거의 다 되어 간다고 믿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질문을 던지고 싶다. 당신은 이런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 무엇을 먼저 하겠는가?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주위 사람들에게 알릴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무엇을 알리겠느냐고 묻자 회복에 관해 이야기하고 위로하겠다고 대답하였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는 분명 주위 사람에게 알리는 일을 먼저 했을 것이다. 그리고 형제들을 위로하며 형제 사랑을 실천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니엘은 기도하였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다니엘 9:3)

심지어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기도하였다. 민감한 사람이라면 이후의 기도 내용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다니엘은 기도했는데 당신 같으면 어떤 기도를 하겠냐고 아내에게 또 물었다. 먼저 감사기도를 드리겠다고 한다. 그 이후에는 어떤 기도를 하겠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속히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어떤 근거로 속히 이루어 달라고 하겠느냐고 다시 물었다. 대답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 이루어 달라고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적어도 내 상식으로는 아내의 대답은 매우 상식적이며, 어떤 면에서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다니엘의 기도를 보자. 다니엘은 9:4~19까지 총 16절에 걸쳐서 기도하는데 4~15절 즉, 12절을 회개하는 데에 사용한다. 철저한 회개를 한다. 그리고 16~19절 즉, 4절을 사용하여 회복을 간구하는데 그 근거로 하나님의 약속을 인용하지 않는다.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다니엘 9:18-19)

다니엘은 철저히 자신은 낮추고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긍휼 그리고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이루어 달라고 그야말로 "간구"하고 있다.


나의 성향으로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일을 다니엘은 하고 있다. 나는 깨달음 이후에 기도를 하지 않을 것이고, 한다 해도 이루어 달라는 기도를 할 것이며, 그 기도의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이 될 것이다. 그런데 다니엘은 깨달음 이후 기도했으며, 그 기도를 회개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 이후 정말 겸손히 하나님께 간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나의 문제가 여기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시 ESV를 한번 인용해 보겠다.

Then I turned my face to the Lord God, seeking him by prayer and pleas for mercy with fasting and sackcloth and ashes. (다니엘 9:3)

우리말 성경에는 그 뜻이 약화하여 있는 "turned my face to the Lord God"이 나온다. 즉, 다니엘은 깨달음 이후에 그의 얼굴을 하나님께로 돌리고 기도를 시작한다. 그에 반해 나는 나의 얼굴을 내 소그룹 멤버에게 그리고 아내에게 돌린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다시 에스겔서의 내용으로 돌아가 보자.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하셨나? 당신께서 회복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자 다니엘이 나처럼 깨달음 이후에 주변 사람에게 회복을 선포하고 위로했다고 생각해 보자. 회복이 일어날 수 있을까? 아니다. 회복이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하나님께서 일하셔야 회복이 일어나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려면 나의 기도가 필요하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고 주변 사람에게 이야기만 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시지 않으시고 결국 진정한 회복은 일어날 수가 없다. 아내와 이야기하는 도중 불현듯 또 하나를 깨달았었다. 나는 그 순간까지도 기도하지 않고 그 내용을 아내에게 떠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런 인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내가 깨닫고 남들에게 알리는 것이 사명이고, 그것이 형제 사랑이라 생각하였지만 결국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는 통로를 막는 격밖에 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으므로 나와 관계된 사람들에게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불평불만이 나오게 된 것이다. 나는 방향도 틀렸고 회개가 없었으니 내용도 틀렸었다.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바랬으니 역사가 일어날 리가 없다. 나에게 필요한 기도는 "주여 나의 교만으로 주께서 주신 말씀으로 기도하기보다 주위 사람들에게 나의 깨달음을 알리는 데에만 주력하였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고,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감사함으로 기도하게 하옵시고, 애통함으로 겸손하게 하옵시고, 회개로 거듭나게 하여 주옵소서."였다. 그런데 나는 깨달음을 나를 변호하는 데에, 그리고 나를 정당화 하는 데에, 무엇보다 나를 자랑하는 데에 사용하여 왔다.


성경을 읽는다 하면서도 이런 간단한 진리조차 모르고 살아왔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떠들어도 전혀 변화하지 않는 소그룹멤버들을 보면서 무엇이 문제인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이유를 알았다. 물론 여전히 여러 가지 문제가 남아있다. 일단 나의 본성상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만 드러나고 하나님의 역사가 드러나도록 기도해야 하는데, 나는 여전히 내가 드러나기를 바란다. 그러다 보니 기도해야 하는 순간에 떠들고 있는 나를 자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이 사실을 이번에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셨으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앞으로는 같은 상황에서 나도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해 본다.


추가1: 내가 위에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기도를 약간 부정적으로 그렸는데 그에 대해 부연하고 싶다. 일단 그런 기도가 틀린 기도는 아니다. 철저히 자신을 죽이고 "저는 무익하나 주께서 약속하셨으므로 그 약속에 의지해 간구합니다."라는 기도는 좋은 기도의 본이다. 그런데 문제를 그런 기도의 본을 귀로 들어서 실천하는 사람이다. "약속에 근거해서 기도해봐. 그러면 이루어 주셔." 이런 말을 듣고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제가 먼저 나라와 의를 구했으니까 이제 돈 주세요."라고 기도한다면 이 기도는 무슨 기도가 되겠는가? 빚쟁이의 빚 독촉에 해당하는 기도가 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개인적인 깨달음과 낮아짐의 결과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기도는 옳다 하겠으나, 그냥 들어서 방법론으로서 그런 기도 형태를 택한 것이라면 그런 기도는 틀린 기도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신앙생활에서 방법론에 대한 모든 경험적인 내용은 틀린 내용이다. 우리는 어떤 목적을 향해 일을 해 나가는 과정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통한 천국 백성으로의 훈련을 쌓아가는 과정에 있다. 특별한 방법을 논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과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특히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그리고 그런 것은 사실 신앙도 아니다. 하나님으로 예수님으로 사는 것이 신앙이지 어떤 '방법'으로 사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추가2: 다니엘서 9:3에 보면 다니엘이 머리를 여호와께 향하고 간구를 시작하는데 그 마지막에 보면 "결심하고"라고 나와 있다. 즉, 다니엘의 회개는 저절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는 바로 그 때가 회개해야 할 때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과연 우리는 회개의 때의 회개를 하고 있는 지 돌아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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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