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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에 해당되는 글 1

  1. 2012.07.29 예수님의 인성에 대하여
2012. 7. 29. 15:13

예수님의 인성에 대하여 Bible Stories2012. 7. 29. 15:13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단이 아닌 한 배우는 기본 교리 중의 하나가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100% 인간이심이다. 종종 예수님이 왜 100% 하나님이셔야 하는지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으며, 거기에 대한 답을 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왜 100% 사람이셔야 했는가에 대한 질문이 더 어려운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기회가 있을 때에 100% 신성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이 글은 내가 맡은 소그룹 모임을 위해 작성했던 글인데 그것을 약간만 손을 봐서 여기에 올려 본다. 당시 모임 중에 “예수님의 100% 인성이 부정된다면 그것이 나의 신앙에 일으킬 수 있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라고 질문을 던졌었다. 이 질문에 대해 생각을 해 본다면 공부를 많이 하지 않은 한 (심지어 많이 했다 해도) 아마 많은 사람이 개인의 신앙과 별 관계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또는 뭐 "모르겠는데?" 정도의 답을 얻었을 수도 있다. 그런 답도 틀렸다고 하기는 어렵다. 이 부분을 파고들어오는 이단에 대해 취약성을 보이기는 하겠지만 원래 이단은 싸울 존재가 아니고 피할 존재이기도 하고, 복잡한 내용을 물어보는 이단과 오래 이야기를 할 정도로 자신의 성격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별 필요없는 고민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생각을 해 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몇 가지 힌트 정도만 나눠볼까 한다. 이 글은 많이 축약한 내용이고, 아주 신중하게 적은 글도 아니다. 따라서 이 글로 신학적인 논쟁을 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그럴 정도로 잘 정돈된 글도 아니다.

부활
먼저 기본부터 살펴보자.


1. 우리는 죄인이다.


2. 그러므로 죽어야 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로마서 6:23)


3. 죽음은 영원 형벌을 뜻한다. 즉, 세상에서의 존재가 사라지는 일회적인 사건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반복되는 하나님 부재의 삶을 죽음이라 한다.


4. 그런데 우리 믿는 자 또는 선택받은 자 또는 구원받은 자는 예수님을 힘입어 부활할 수 있다.
Note: 부활에 대해 흔히 “우리는 죽지 않는다.”라고 오해한다. 결국에는 부활할 거니까 죽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도 무리는 없겠지만, 어쨌든 죽음의 과정은 거쳐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17)

그런데 다음의 말씀과 같이 우리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으로, 즉, '나'는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과정이 부활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 참고로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crucified → died → was buried → descended to the dead → rose again의 순서로 고백함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descended to the dead”를 해석하는 문제가 너무 논란거리가 되어서 생략했을 뿐, 교리적으로는 이 부분을 인정하고 있다. 세부적으로 조금씩 다른 목소리가 있을 뿐이다. 어쨌든 해석에 따라 예수님께서 지옥까지 내려갔다가 오셨다고 해도 별 무리가 없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더 맞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죽음의 상태에서 예수님의 신성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것이다.


5. 예수님을 힘입어 부활한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자. 예수님의 육신은 죽음과 부활을 과정을 전부 겪으셨다. 신학자들 간에 약간의 논란거리가 있지만, 부활은 예수님의 신성에 의지하여 일어났다. 즉, 예수님은 육체를 가지고 신성의 도움으로 죽음과 부활을 거치셨고, 그 '본'을 따라 예수님을 힘입어 우리도 부활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다.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디모데전서 1:16)

여기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모든 부활하는 사람의 첫 열매가 되셨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린도전서 15:20)

즉, 우리도 그와 비슷한 열매를 맺어야 하며, 열매를 맺는 과정은 예수님께서 겪은 과정과 유사 또는 같을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육체는 죄의 삯으로 죽게 되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도와 우리를 살리신다. 조금 더 세련되게 말하려 한다면, 바울의 갈2:20을 다시 인용해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즉, 나는 분명 죽게 되고 죽음의 고통도 겪게 된다. 물론 이 과정은 현세에 죄에 대한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면, 즉, 예수님을 나의 주로 믿는다면 나의 삶의 주인이 나에서 예수님으로 바뀐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힘으로 부활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의 상태가 된다.


6. 자 여기에서 예수님의 육체 부활을 부정해 보자. 즉, 100% 인간을 부정해 보자.


A.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한다면, 우리에게 죽음은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따라야 할 본이 없어지므로 부활과 그에 따른 영생이 불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죄로 인해 죽은 이후 힘입어 부활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B.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즉, 죄의 값이 사망이지 않다고 한다면, 공의의 하나님에 대한 증언인 구약 전체가 부정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구약 전체를 부정해 버리는 경우 예수님의 인성은 부정되나, 신으로서의 예수님을 믿는 데에는 별다른 무리가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에 구약을 더 복음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의 본질을 부정할 때에 가장 먼저 상처입는 부분이 신약이 아니고 구약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100% 인성에 대한 부정은 부활신앙에 대한 부정 또는 구약성경 전체에 대한 부정이 된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는 이단은 예수님을 “영체”라 말하기도 하면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을 부정한다. 그리고 구약의 하나님에 대해 공격하거나, 우리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구약을 해석한다.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에 더해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으신 이유를 성경적으로 하나 더 들 수 있는데 다음의 성경 구절과 관련된다.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히브리서 5:1-2)

대제사장은 성경에 나오는 기름 부음 받은 자 중 대표적인 경우인데 (기름 부음 받은 자 = 그리스도, 제사장, 왕, 선지자가 기름 부음을 받음), 바로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예표한다. 자, 대제사장은 인간이어야 한다고 이 구절이 주장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간이셔야 한다. 이는 다음에서 한 번 더 강조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브리서 4:15)

이 구절에서 강조하는 것은 우리와 같이 모든 죄의 유혹을 참고 이겨내신 예수님이시므로 우리의 죄 또한 동정하시며, 따라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고 계시되 죄는 없으셨다. 사실상 이 구절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성에 의지한 예수님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생각해 볼 때에는 불필요한 구절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예수님의 죄 없으심에 대해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은 인간 예수에 대해 묵상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머릿속에 있는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이신 예수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강력한 증언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이단은 '죄가 없는 존재'가 어떻게 사람일 수 있느냐고 하면서 이 구절을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는 데에 사용한다. 그러나 '죄가 없는 예수님'에 대한 증언은 신성 예수님의 측면에서 보면 불필요한 증언이고, 따라서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강한 증언이 된다. 인성이 없으시다면 죄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면 역시 우리의 구원이 불가능하다. 십자가의 도인 “사죄-칭의-새 생명”에서 '사죄'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바로 우리를 동정하시는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인성이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를 동정하지 않으실 것이고, 죄인 된 우리를 위해 죽어주실 이유도 없고, 우리를 복잡하게 다시 살리실 이유도 없다. 이처럼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의 구원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자, 위에서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 짧게 다루어 보았다. 이것을 하나하나 깊게 들어가자고 하면 너무 길어져서 이 정도로 짧게 끝내려 한다. 노파심에 한마디 하자면, 이 글은 누구를 가르치기 위해 쓴 글은 아니다. 맨 처음 왜 블로그를 시작했는지에 대한 글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내 개인적인 기록을 남긴다는 의미가 더 강하다. 그런데 이 글의 작성 방식은 내가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작성한 형태로 드러나기 때문에 부담스럽기도 하다. 가르칠 자격이 없는 사람이 가르칠 경우, 가르치면서도 가르치는 자가 되지 않을 방법이 있다면 좋겠는데, 나는 그 방법을 모르겠다. 사실 나는 내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 존재인지 아주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쓰레기가 되지 않게 발버둥치는 모습이 좀 강한 성격으로 드러나기도 하는데 기본적으로 선생될 자격은 커녕 인간 될 자격도 의심되는 사람이다. 누구도 인간인 한 성경을 '안다'라고 할 수 없다. 나는 내가 얼마나 병신같은 존재인지 알고 있다. 이 글도 '아는 사람'으로서 아는 지식을 적은 것이 아니고 '내 주제에 조금 깨달은 내용'을 나누는 수준이다. 그래서 내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으리라 보장할 수 없고, 틀린 부분이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냥 말한 인간의 수준을 고려해 가면서 걸러 읽어주기를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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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