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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땅'에 해당되는 글 1

  1. 2011.12.10 요셉과 애굽이주 1
2011. 12. 10. 13:41

요셉과 애굽이주 Bible Stories2011. 12. 10. 13:41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자주 마주하게 되는 문제 중의 하나가 성경을 인물 중심으로 해석하는 문제이다. 물론, 인물 중심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고 인물을 벗어나서 해석하는 것이 쉬운 일도 아니긴 하다. 그러나 인물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 할 때에 나타날 수 있는 문제는 되도록 피해야 하는데,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즉, 인물 중심의 해석은 어떤 개인의 역할에만 집중하게 되고, 그의 전반적인 성취를 근거로 그의 삶 한 순간 한 순간을 전부 평가하는 문제가 있다. 심지어 주인공의 변방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주인공보다 못하게, 심지어 악하게 그려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라는 '믿음의 조상'을 부각시키기 위해 종종 롯은 악인으로 그려진다. (어떤 유명한 성경 강해서에서 직접 확인했던 내용이다.) 그런데 성경 상의 어떤 사람도 '사람'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였다고 생각한다. 즉, 그들의 삶에서 칭찬 받을 부분이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잘못한 부분도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런 면에서 모든 성경상의 인물들을 공정하게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 한 것은 잘 한 것으로 본받으려 노력하고 잘못 한 것은 잘못 한 것으로 경계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요셉과 애굽이주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다음의 말씀을 보면, 요셉은 애굽이주에 대해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창세기 45:9-11)
특히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애굽으로 보냈다고까지 말한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창세기 45:5-8)
보통은 이 성경 구절은 근거로 요셉을 높게 평가한다. 즉, 자신의 억울한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에 집중하여 고난을 감사로 승화시켰다는 논리이다. 크게 틀렸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요셉이 이에 대한 사명감이 있었느냐 하는 부분을 생각하면 재미 있는 부분을 발견 할 수 있다. 만약 그가 애굽이주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생각하였었다면 총독이 된 지 9년이 지나도록 가족들을 부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특히나 초반 7년은 풍년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여유도 있었고 창45:9-11에서 말 한 것과 같이 그럴 만한 지위와 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족들을 부르지 않았다. 형들에 대해서는 미워서 그랬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버지 야곱조차 외면 한 것은 으아한 부분이다. 이후 형제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을 괴롭히는데 (물론 당한 것에 비해 애교 수준의 괴롭힘이긴 하지만) 그것을 통해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다음의 성경구절을 보자.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창세기 41:51-52)
위의 성경 기록에서도 확인 할 수 있듯이 요셉은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으려고 노력하였다는 점에서 팔려온 사건은 그에게 큰 상처였다. 따라서 요셉이 애굽에 있었던 약 22년의[각주:1] 시간동안 요셉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애굽에 내려와 있는 상태라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 생각은 형제들을 만나고 나서야 갑자기 들었던 또는 깨달아졌던 생각일 뿐이다. 다음의 성경 구절을 보면 그가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애굽이주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었다는 사실이 조금 더 명확해 진다.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창세기 42:9)
형제들을 보고 나서야, 더 정확하게는 그들이 요셉에게 머리숙이는 것을 보고 나서야 요셉이 과거에 꿨던 꿈을 기억하게 된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창세기 37:6-7)
다시말해, 요셉은 애굽이주를 하나님의 명령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요셉이 알고 있던 것은 과거에 꾸웠던 꿈이 기근과 요셉의 애굽으로의 팔려가는 사건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 밖에 없다. 애굽이주는 그 꿈과도 별개의 문제이다. 여기에 더하여, 애굽이주에 대한 야곱의 반응은 사뭇 흥미로운데, 당시 야곱은 젊을 때 보다는 하나님과 더 가까이 교통하던 때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다음의 성경구절을 읽어 보자.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창세기 46:1-4)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간 것으로 보아 야곱은 분명 이주를 선택했다. 그런데 그에 대해 일말의 거리낌은 있었던 듯 하다. 하나님께서 이상 중에 나타나셔서 내려가도 된다는 허락과 동시에 안심시켜 주시는 장면이 그 증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려움을 피해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은 옳바른 선택이 분명 아니다. 이에 대한 증거는 너무 많아서 하나 하나 다 열거하는 것은 의미없고, 그 중 시점상 중요한 것들 몇 개만 살펴 보도록 하겠다. 일단 애굽 이주는 하나님의 축복에 기인한 사건은 아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중략)...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중략)...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중략)...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창세기 15:9-17)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자손과 영토에 대한 언약을 하시는데, 이 사건은 그 중 자손에 대한 언약 중간에 벌어지는 내용이다. 흐름을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그 새' 즉,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쪼개지 않고 둔다. 그리고 명백히 이 새들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고, 그것은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제물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시점과 아브라함이 제물을 드린 후에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신 시점간의 시간차도 흥미롭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제물을 준비하고 그것을 들짐승이 먹을까봐 전전 긍긍하는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긴 시간차로 인해 솔개를 쫓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중간에 잠까지 잔다 (하나님께서 재우신 것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아무리 봐도 그냥 잠든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해가 져서 어두울 때'가 되어서야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으신다. 물론 제물을 언제 준비 했는 지는 나오지 않지만 내용상 한참이 지나서야 받으신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쪼개지 않은 새는 피가 그 대로 들어 있는 셈이다. 제사를 드리고 난 음식은 보통 사람이 먹었다는 사실을 생각 할 때, 피 째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위배된다 (창 9:4). 물론 완전히 태워서 드리는 제사도 있었지만 이후 레위기를 봐도 제사 음식을 사람이 (제사장)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아직 제사 제도가 확립되기 전이기는 하지만, 피를 쏟지 않고 드린 제물은 그 자체로 제사 예법에 어긋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언한 사건이기는 하나 애굽이주는 어떻게 보더라도 축복 속의 사건은 아니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아브라함의 제사가 합당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형벌로서 내린 것이 애굽이주였다고 생각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어서 세상에 나옴으로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구원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기적같은 영광을 얻게 되었지만, 선악과를 먹고 세상으로 쫒겨 나오고 하는 일련의 과정이 결코 축복이라 부르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이다. 만약 그것이 축복이라면 하와는 최초의 축복의 통로이자 영웅이다.

더군다나 기근으로 인한 '애굽이주' 또는 '애굽이주계획'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합하는 생각이 아니라는 경험은 아브라함, 이삭 둘 모두 한다. 아브라함은 창 12:10-20에서 기근을 피해 애굽에 내려가고 그 과정에서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속임으로 '속이는 집안 내력'의 첫 문을 연다. 아마 하나님께 칭찬은 절대 받지 않았으리라. 이삭 때에도 동일한 사건이 일어난다.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창세기 26:1-2)
그랄 땅은 가나안 땅의 최남단 경계선 정도에 해당하는 땅으로, 이삭은 애굽을 향해 가고 있던 중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막으셨다.

'따라서 기근이 있으니 애굽으로 피신해서 목숨을 연명해 보자'라는 생각을 '믿음의 행위'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여기에 요셉의 행위에 대한 판단 기준이 있다 여겨진다. 아무리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라도 그것이 저주에 가까운 것이었다면 그것을 실행한 요셉의 그 행위를 옳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요셉이 하나님께 직접 명령을 받았다고 보기 어려운 상태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 애굽과 요셉의 지위가 주는 '세상의 안락함' 속에서 '고난'을 견디어 보자라는 생각은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 결코 하지 않아야 하는 행동 중의 하나임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고난을 감내하며 훈련 받아야 할 제자이다.

사실상 성경 속에서 요셉 삶을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라고 평가 할 만한 부분을 나는 찾지 못하겠다. 기껏해야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견딘 것과 바로의 꿈의 해석을 하나님께 의지해서 했다는 것 정도 밖에 없는 듯 하다. 어렸을 때엔 아버지의 과잉 보호 속에 건방지게 형들을, 심지어 부모까지도 무시하는 아들이었다. 형들이 그리고 요셉의 부모가 요셉에게 절하는 꿈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행위를 예언가적 행동으로 생각하여, 그러므로 선하다라고 덮어놓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가 듣더라도 기분 나쁜 말은 지혜롭게 해야 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입을 단속하는 것의 중요함에 대해 성경이 얼마나 자주,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는 지는 따로 설명 할 필요조차 없다. 다음의 성경구절을 통해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창세기 37:2-5)
17세면 클 만큼 컸는데도 고자질이나 하는 철부지 아들이었을 뿐이다. 물론 여기에는 야곱의 잘못이 더 크다고 할 수 있긴 하다. 뭐 그렇다고 요셉의 찌질함이 가려지지는 않을 것 같다. 결국 이런 갈등이 표면화 되어 애굽으로 팔려가게 된다. 그 이후 요셉은 '온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고 그들의 이름에 자신의 억울함과 상처를 투영시킨다. 하나님의 뜻은 므낫세보다 에브라임에게 있었는데 그것을 구분할 능력도 없었다 (야곱은 알았고, 이를 근거로 나는 야곱이 말년에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에 비해 이삭은 말년에 야곱과 에서 사이에서 에서를 선택한다.)
열매를 통하여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고, 성경은 많은 경우 열매를 기록하였다. 따라서 나는 그의 자손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역시 주의 깊게 살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분명 요셉은 곱절의 분깃을 받았으나, 그 두 지파의 이스라엘 내에서의 역할은 결코 덩치만큼 긍정적이지 않았다. 성경 전체를 통해 가장 불만이 많은 민족이 에브라임이다. 그 지파에서 배출 한 인물이라고 해 봐야 여호수아 하나 외에 또 누가 있는가. 항상 불평 불만이 많고 문제를 일으키는 지파가 바로 에브라임이었다. 받은 것에 비해 너무 보잘 것 없었던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한 번 짚어보고 싶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요셉을 평균 이상가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보는 데에도 나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애굽 이주 사건 하나만 떼어 내어 생각한다면 분명 옳은 행동은 아니었다고 본다. 우리는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에 요셉과 같이 행동해서는 안된다. 적어도 아브라함-이삭-야곱으로 내려오면서 반복적으로 확인했던 아주 명확했던 사실, 즉, 가나안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라는 그 명확한 사실 앞에서 고난 때문에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생각 그 자체가 불신앙이다.



물론 이후 요셉역시 하나님의 뜻을 더 정확히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방식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직접적인 계시였는 지 야곱으로부터의 교육이었는 지는 모르겠다. 요셉이 죽기 직전 형제들에게 자신을 가나안에 장사지내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에서 보였던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려 보내시리라는 확신을 볼 때에 애초 요셉이 가족들을 애굽으로 이주시킨 이유와 목적에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 가나안이었고 그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리라는 믿음을 확실히 보이고 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창세기 50:24-25)
그리고야곱이 죽고 난 이후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하던 형들을 위로하고 안심시키는 장면에서 요셉의 행동을 보면 그가 과거 겪었던 배신과 아픔에서 확실히 벗어났다는 사실도 확인 할 수 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창세기 50:19-21)


  1. 17세에 애굽으로 팔려서 30세에 바로를 만나 꿈을 해석하고 (창 41:46), 7년 풍년 2년 흉년 후에 형제들을 만났으므로 (30-17)+9=22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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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