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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2.16 십일조
2011. 2. 16. 12:36

십일조 Bible Stories2011. 2. 16. 12:36

어느 날 친구에게서 십일조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 친구는 천주교에 잠깐 다니다가 현재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있는 친구였는데, 질문의 요지는 천주교에서는 십일조를 내라고 하지 않는데 개신교에서는 십일조를 내라고 하는 이유에 관해서였다.

먼저 나에게 있어서 이에 대한 성경적 또는 논리적 대답을 떠나서 그 질문 자체에 대해 의문을 먼저 표하고 싶다. 점잖게 말해서 위와 같이 질문한 것일 뿐이고, 거칠게 말하자면 ‘천주교는 십일조를 내라고 강요를 하지 않고 쿨한데 왜 개신교는 찌질하게 돈 내라고 하느냐’ 일 것이다. 어느 교회도 십일조 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런 교회도 있겠지만 제발 어떤 논의를 함에 있어서 예외 사항은 말하지 말자. 항상 예외는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 예외는 어떤 것도 설명 해주지 않는다. 개신교에서 헌금의 종류를 주일헌금, 십일조, 건축헌금, 감사헌금 등등으로 나누어 놨을 뿐이다. 내기 싫으면 내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더욱 웃긴 것은 (나는 이 부분에서 웃긴다는 표현보다 더 나은 표현을 찾지 못하겠다) 그것을 가지고 문제 삼는 사람은 거의 다 교회 바깥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아주 이타적인 심정에서 거짓된 것을 구별 못하고 개신교의 사탕발림에 속아 넘어가서 허우적 거리고 있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함 일 수도 있으나, 그런 공격 (절대 논증 또는 비판이라고 보이지 않으므로)에서 배려 또는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불가능했었다.

이 글은 악의적으로 그냥 개신교의 모든 것이 싫은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알려준다든지 또는 그들의 공격에 대해 방어하기 위해 쓰는 글이 아니다. 성경적 근거를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쓰는 글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읽어주기를 바란다.

우선 나는 천주교인도 아니고 천주교를 공부해 본 일도 없으며, 가족 중에 천주교인이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들이 십일조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그들이 ‘십일조는 성경적이지 않으므로’ 십일조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문화도 바뀌고 생각도 바뀌고 필요도 바뀌면서 그들이 어떤 시점에 필요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따라서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되며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지만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십일조를 내지 않는다고 해서 ‘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했어’라고 말 하지는 않는다. (나도 그런 목회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으나, 제발 그런 이상한 사람의 말은 무시하자. 아무리 말라기서에 그런 내용이 나와 있다 하더라도 그 말씀을 정죄하는 데에 사용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본 뜻과는 멀어져 있다 할 수 있다.) 분명히 말해서 당신이 당신의 십일조 생활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 참고로 십일조와 삼십일조 -천주교신자들에게 고함을 읽어 보면 이 글을 쓴 천주교 신부도 십일조의 참된 의미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번 정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십일조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는 오히려 카톨릭 사전에 아주 자세하게 적혀 있다. 그 내용은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수입이나 생산물의 십분의 일을 교회의 유지와 확장을 위해 내놓는 것을 말한다. 종교적 목적을 위해 농산물 · 가축 · 전리품(戰利品), 기타 소유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은 고대에 다른 종교와 문화 속에서도 널리 행해지던 관습이었다. 구약성서 안에서의 십일조에 관한 언급은 서로 다른 때와 장소에서 행해진 다양한 관습을 반영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고(창세기 14:21), 야곱도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유의 십분의 일을 하느님께 드린다고 맹세하였다(창세기 28:22). 신명기 안에서 십일조는 땅과 그 소출의 주인인 하느님께 감사하는 헌물로(신명기 14:22-27), 레위인들을 부양하는 수단(민수기 18:21)으로 빈곤 구제를 위한 헌물(신명기 14:28-29)등으로 언급되어 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느님을 속이는 일이라 하였고 충성스럽게 십일조를 드리는 일은 축복받은 일이라 하였다(말라기 3:8-10). 결국 십일조는 인간의 모든 소유가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께 속한다는 확신의 표현이다. 십일조의 관습은 신약에서도 인용되어 있다(마태복음 23:23-24, 누가복음 18:12). 유대법과 신약의 해석을 따라 구(舊) 교회법은 신자들이 생산물과 수입의 십분의 일을 성직자들의 생활과 종교 업무를 위해 바쳐야한다고 규정하되 각 지방과 국가의 법과 관습에 따라 십일조를 결정할 것을 허용하였다. 가톨릭 교회에서 십일조는 신자 각자에게 임의로 주어져 있다. 많은 나라에서 교회의 유지는 십일조보다 자발적인 기부에 의존하고 있다. (가톨릭사전)
이 내용에서 언급 되듯이, 십일조는 상당히 긴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예수님 시대에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일조 자체에 대해 평가를 하신 일이 없다. 다만 카톨릭에서는 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십일조를 ‘관습’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난 이 부분에 대해 평가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관습으로 생각한다면 관습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십일조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었나 보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십일조는 인간의 모든 소유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속한다는 확신의 표현”이라는 데에 더 가치를 두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십일조 제도를 이어 오고 있는 것이다.

위의 사전에 나오지 않으나, 십일조에 대해 다른 곳에서도 언급 된 곳이 있는데, 바로 느헤미야서다. 바벨론 이주 후 하나님의 약속대로 70년만에 포로 귀환이 시작되어 수 차례로 나뉘어서 오랜 세월 동안 귀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느헤미야는 3차 포로귀환 시에 총독으로서 예루살렘으로 왔던 사람이다. 당시 총독으로 있었던 하나님의 사람 느헤미야로서 가장 시급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는 모세의 율법을 재정립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했었던 듯 하다. 일단 그의 목적이었던 성벽재건이 완성되고 난 후 제일 먼저 했던 것이 모세의 율법을 재정립하는 일이었으며, 그 중 하나가 십일조였다. 즉, 타락해서 심판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에서 시급하게 요구되는 것 중의 하나가 십일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필요에 의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 필요는 적어도 내 생각에는 지금도 상존하고 있다. 따라서 특별한 필요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십일조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 처음 익은 밀의 가루와 거제물과 각종 과목의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들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의 여러 방에 두고 또 우리 산물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였나니 이 레위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성읍에서 산물의 십일조를 받는 자임이며 (느헤미야 10:37)
더구나 성경에서는 삽십분의 일조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들은 일년에 한번 십일조를 드렸었는데, 신명기에 보면 3년에 한번씩 십일조를 한 번 더 내서 가난한 자들과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들) 고아 과부들을 도우라고 되어 있다.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명기 14:28-29)
따라서 십일조는 적어도 개신교에서 돈이나 벌자고 만들어 낸 제도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충분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바울의 말과 같이 즐거이 드려야 정말 하나님께 상달되는 헌물이 된다. 내 마음에 탐탁치 않고 꺼려진다면 내지 않는다고 뭐라고 할 사람은 없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린도후서 9:7)
당신 스스로 결정하여야 한다. 무엇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지 당신이 결정하여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십일조는 필요 없다라고 생각된다면 하지 않으면 된다. 그런데 내가 양육을 하면서 성경통독을 권유해 본 일이 있는데, 성경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십일조에 대한 필요를 느끼는 경우를 보았다. 나는 어렸을 때 부터 당연하다 생각하고 해 왔었기 때문에 결단을 통한 십일조의 과정을 처음 보는 셈 이었는데, 성경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십일조를 작정하는 것을 보았고, 그 작정하는 모습을 보면서 십일조 내기로 다짐하는 다른 사람도 보면서 십일조는 믿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외적 모습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의 믿음을 판단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경험으로 그렇게 말을 하고 싶을 뿐이고 반대되는 예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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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