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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에 해당되는 글 2

  1. 2012.05.01 나의 주 예수님 1
  2. 2011.05.14 긍정의 힘 그리고 간증
2012. 5. 1. 11:04

나의 주 예수님 Bible Stories2012. 5. 1. 11:04

예수님은 나에게 있어서 누구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성경은 ‘나의 주가 되어야 한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나의 주’로 인정하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며 올바른 신앙고백이다. 그런데 현대 기독교인 중에 이 말의 참뜻을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잦다. (물론 나도 발버둥만 치고 있다.) 도마는 예수님을 주로 그리고 하나님으로 고백하였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한복음 20:28 )


그러면 예수님을 나의 주로 삼는 것을 성경은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요한은 포도나무와 그의 가지로 표현하고 있고, 바울은 머리와 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 요한복음 15:5)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에베소서 1:20-23)


따라서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겠다는 뜻은 그분의 뜻대로 살겠다는 뜻이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이 뜻이 과연 무엇일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바울의 고백과 성경의 묘사를 통해 볼 때에 나의 삶에 대한 주권을 예수님께 이양하고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삶이 바로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는 삶이라 생각된다. 당신은 과연 그렇게 살고 있나.


관점을 조금 바꿔서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는 삶은 어떻게 실현 가능한가에 대해 생각해보자. 궁극적으로 주를 사랑함으로 주와 하나가 되면 그것이 바로 주를 나의 주로 인정하는 삶이다. 그러나 나 같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비현실적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체가 머리의 뜻을 따르는 것은 머리를 사랑해서라기보다 머리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예수님을 나의 머리로 생각할 때에 예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머리로 삼는 삶이 아닐까 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함에 대해서 많은 곳에서 진술하고 있다. 개역개정판에 171번이나 반복되는 단어가 바로 경외함이다. 이는 ‘경외’라는 단어로 찾았을 때의 이야기이고 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yare’로 찾으면 훨씬 많은 곳에서 그 단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신약까지 더한다면 그 숫자는 또 훨씬 늘어나게 된다.


주의 깊게 성경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경외함은 성경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영역판에서 사용되는 경외의 해당하는 단어인 fear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함의에 비추어 볼 때 놀랍다. 심지어 하나님을 경외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동의어로 사용될 때도 있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 (신명기 5:29)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신명기 30:16)


위의 두 성경 구절을 보면 같은 내용에 대해서 한 곳에서는 경외를 (5:29) 다른 한 곳에서는 사랑을 (30:16)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볼 때에 하나님을 사랑함이 하나님을 경외함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발이 잘릴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하자. 그리고 오른손이 새끼 손가락 하나만 희생하면 발을 살릴 수 있다고 하자. 그러면 손의 입장에서 발을 사랑해서 새끼손가락을 희생하지는 않을지언정 머리의 명령을 순종함으로 발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가능하다. , 머리를 경외함으로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결국 발에 대한 손의 사랑 표현일 수 있다. 이렇게 보자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결국 하나님을 사랑함과 같다고 하겠다.


따라서 나는 예수님을 나의 주로 인정하는 삶은 예수님을 머리로 인정하는 삶이요, 그 삶은 예수님의 명령을 경외함으로 따르는 삶이라고 하고 싶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에, 당신은 예수님을 주로 삼고 살고 있는가. 나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점점 하나님을 무시하고 나의 도구 정도로 하나님을 끌어내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강대상에서 흘러나오는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를 향해 선포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들을 향해 그들의 마음을 만져주는 정도의 설교밖에 되지 않는 경우를 자주 본다. 차라리 성도들의 처지를 대변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는 설교라면 그나마 낫겠다 하겠으나, 그 안에 하나님은 화자로도 청자로도 존재하지 않고 그저 성도를 청자로 삼아 목사가 그들의 기분을 좋게 해 주는 정도의 설교만 있다는 생각을 금하지 못하겠다.


근래 십계명에 관한 설교를 들었다. 그 중 제4계명인 안식일에 관한 설교였는데, 목사님은 그 설교를 하기 싫었다는 말로 설교를 시작했었다. 이유는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이어서였는데, , 주일날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 성도가 많은 상태에서 그 설교를 하기가 껄끄러웠다는 말이었고, 심지어 어쩔 수 없이 주일날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로하여 주시고 자유로울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로 설교가 끝났다. 물론 나는 그 목사님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심정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러면 안 된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심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믿음으로 하여 다시 순종하는 삶이 반복되는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경건 훈련이요 신앙 훈련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핑계를 대면 안 된다. 물론 성경에서는 믿음이 약한 자 (경제적 약자로 상징된)에 대한 배려가 곳곳에 묻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명령을 변개할 수는 없다. 나는 말씀을 말씀 그대로 진정으로 선포한다면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위로가 필요한 자들을 직접 위로하시리라 믿는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말씀에 대한 선포일 뿐이다. 말씀에 내 의도가 들어갈 때에 말씀에서 능력이 사라지고 칼날이 무뎌져서 혼과 영과 육을 쪼개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말씀을 그대로 진정으로 전달한다면 말씀 그 자체가 스스로 일하기 시작하시리라 믿는다. (모두 알다시피 성경에서 말씀은 대체로 예수님을 뜻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브리서 4:12)


우리는 십자가 군병으로서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그리고 그렇게 명령에 순종할 때에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책임져 주신다. 아무리 내 상황이 그렇지 않더라도 명령에 의지하여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 나머지를 다 책임져 주시는 그 감격스러운 경험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되어야 한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후서 2:3-4)


주를 나의 주로 나의 머리로 삼는 삶이 절대 쉽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게 살 때에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이 해결됨을 또한 믿는다. 많은 경우 우리가 어렵다 힘들다 하는 문제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명령에 우선하여 내 자아를 인정해 달라고 하는 데에 그 핵심이 있는 경우가 많음을 본다. 미움 시기 질투 게으름 등등의 모든 문제는 그저 순종함으로 예외 없이 해결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아주 재미있는 성경 구절 하나만 살펴보고 이 글을 끝내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16-18)


적어도 내 입장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명령에 의지해서 할 수 있다. 하고 하지 않고는 차후 문제이고, 가능성의 관점에서만 말하자면 명령으로 가능할 법한 것들이다. 그런데 기뻐하라는 명령은 이상하다. 명령으로 기뻐하는 것이 가능하긴 한가? 그런데 성경은 가능하다고 하며, 그것을 명령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명령 범위는 우리의 상상보다 더 넓다. 좁게는 우리의 수족을 움직이는 문제로 시작하여 넓게는 감정의 문제까지 명령하신다. 명령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니 얼마나 다행인가. 당신이 순종하기만 하면 절대 될 것 같지 않던 문제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고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 그것이 주를 주로 삼는 사람이 누리는 복이며 기적이다. 그리고 그것을 명령으로 하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는 단순히 순종만 하면, 절대 될 것 같지 않은 감정의 문제 즉, 우울증 분노 시기 등등의 문제를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여 직접 해결해 주신다. 위의 딤후 2:3-4를 다시 한번 상고해 보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립보서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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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ToBeStable
2011. 5. 14. 09:07

긍정의 힘 그리고 간증 Opinion2011. 5. 14. 09:07

어느 간증집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로 시작해 보겠다.

중국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준비를 시작했지요. 그러나 당장 비행기표를 살 돈도 없었습니다. 표를 사야하는 전날까지도 어떻게 그 돈을 구할 지 막막했습니다. 그래서 무릎꿇고 매달렸습니다.
"주여, 제게 중국을 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비행기표도 살 수가 없으니 어이해야 합니까. 주여 부르셨사오니 보내 주시옵소서."
그런데 갑자기 제가 LA방문때에 잠깐 같이 식사하며 인사 정도나 나누었던 사업가 분이 기도 중에 저에게 헌금하라는 음성을 들었다며 봉투를 건내주지 않겠습니까? 열어 보니 정확히 비행기표를 구하는 데에 필요한 그 액수만큼의 돈이 들어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필자가 지어낸 어딘가에 있을 법한 이야기)

그냥 여기 저기 읽어 본 간증집에 들어있는 내용을 떠올리며 만들어 본 이야기이다. 분명 어딘가에 아주 비슷한 이야기가 있을텐데 찾지도 못하겠고, 찾는다 해도 비슷한 이야기는 수도 없기 때문에 특별히 찾아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기대되는 반응이 무었일까? 기대되는 반응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살펴보기로 하고 적절한, 건강한 반응이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해 보자. 간단하다.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고, 사랑으로 우리의 삶의 순간 순간을 보살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정도가 적당하겠다. 이 이야기의 요점은 (비록 내가 지어낸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감사이다. 그런데 보통은 약간 희한한 시각으로 이 이야기를 본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이리 저리 양념치고 치장해서 언듯 위에서 말한 것과 비슷한 적용처럼 보이나 본질상 전혀 다른 적용을 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그걸 에누리 없이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기도를 하면 돈도 생깁니다."
"저 돈을 준 사업가를 보십시오. 열심히 믿음생활을 하면 저렇게 돈을 많이 벌어서 선교사를 돕는 귀한 일에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은 역사하시는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고 기도의 효용성을 향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은 기도를 수단으로 이용한다. 또는 하나님께서 들어 사용하신 그 손을 본다. 사업가의 손, 부자의 손, 의사의 손, 힘 있는 자의 손... 그 손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한다.

이런 설교 누구든 한번은 들어보았으리라 생각한다.

여러분들도 부자가 되기 위해 기도하십시오. 부자가 되는 것이 죄는 아닙니다. 부자가 되어 수 많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에 크게 쓰임받으십시오.

틀린 구석은 없다. 그러나 의도가 무엇인지 그 저의가 의심스럽다. 사실상 '저의'도 없다는 것이 더 문제긴 하다. 설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문제점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의랄 것도 없다. 그런데 이 말은 애매한 부분을 내포하고 있다. 즉, 돈이 있어야 하나님의 사업이 된다는 식의 논리를 함축하고 있다. 물론 성경에 많은 부자가 나온다. 구약의 신앙의 위인들은 선지자를 제외하면 대부분 부자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엄청난 부자들도 많이 나온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부자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아리마대 요셉이나 삭개오 등등 극소수의 부자만 나온다. 야고보서에서 나타나는 부정적인 이미지의 부자에 대해서 상고해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사도행전의 주인공들 중 부자들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은 알 필요가 있다. 더 좋은 예수님이 있기 때문에 물질적인 부분에서는 자유했던 사람들이다. 그 어느 곳에서도 돈이 없어서 사역을 감당하기 힘들었다는 이야기는 찾을 수 없다. 물론 바울이 연보에 대해 말하면서 당시 이스라엘에 있던 성도들의 쓸 것 마련을 위해 권고한 부분이 있고, 바울이 로마에서 구류생활을 할 때에 빌립보교회의 원조로 생활을 하였고 그에 대한 감사의 편지가 있기는 하나, 그 말씀을 통해 역시 돈이 사역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해석일 뿐이다.

역사는 하나님이 하신다. 돈이 필요한가?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사역을 하는 데에 돈이 필요한가? 이건희 회장이 희귀한 차를 한대 필요로 한다고 하자. 그것을 사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런데 돈이 중요한 의사결정의 고려사항인가? 그 차가 한 100조원정도 하는 차라면 그럴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실재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이 경우 중요한 고려사항은 이건희의 '의지'이다. 돈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결국 돈이 수단으로 사용되기는 하겠지만, 그 돈이 중심 고려사항이 될 수는 없다. 하물며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 돈이 중요한가?

그러면 부자가 있어야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가? 서울 어느 교회에서 정계에 법조계에 의료계에 신앙인이 많아야 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독려했던 적이 있다. '복'받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와 한국인 특유의 복받은 자라면 의례 기대되는 직업군이 맞아 들어가면서 상당히 많은 사람을 '만족'시켰던 논리였었다. 이 가운데에는 바울이 준비된 사람이었기에 그렇게 크게 쓰임 받았다는 말이 논거로 사용된다. 모세가 80년간 훈련받았기에 한 민족을 구원하였다는 사실도 이야기 한다. 다 옳은 이야기이다. 그런데 '준비'가 중요한가? 아니면 하나님의 '부르심'이 중요한가? 뭔가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요즈음 처럼 말씀이 흔한 세대가 없는 듯 하다. 간증도 참으로 많다. 우리 나라가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면서 수많은 간증집이 나온다. 선교 현장에서 드라마틱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는다. 그런데 그런 간증집을 통해 받은 은혜를 나누는 사람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면서 괴리감을 느낀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그들이 경험한 기적을 보면서 그런 기적을 나도 경험 할 수 있다는 건강한 기대와 소망까지는 좋은데 그들의 낮아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좀 더 잔인하게 표현해 보겠다. 그들의 낮아짐을 통해 이루어졌던 그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 낮아짐을 수단으로 사용할 생각은 있으나, 주님을 위해 낮아지려는 사람은 없다. 선교사들의 기적적인 체험을 내 것으로 하기 위해 그들의 삶의 모습을 수단으로 사용하려고만 했지 그들처럼 살려는 생각까지 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이야기의 중심에 돈이 모습을 숨기고 도사리고 있는 경우를 수도 없이 보아 왔다.

이제서야 이 글의 제목으로 돌아온다. '긍정의 힘', 어느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요즘 처럼 '긍정'이라는 단어가 교회에서 많이 들리는 시대가 있었나 궁금하다. '말의 권세,' '입의 파수꾼,' '기도의 힘'등등과 결합되면서 내가 말로 선언하고 기도로 나아갈 때에 그 대로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로 교회가 떠들썩 하다. 그런데 한 20년 전만 해도 내 기억으로는 '순종'이란 말을 지긋지긋하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요즘은 이 순종이란 말을 하기가 목회자나 신도나 민망하다. 순종은 하나님께 하는 것인데 우리나라는 목사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보니 목사 입장에서도 말하기가 껄끄럽고, 신도 입장에서도 그런 굴욕적인 관계를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서 '순종'이라는 말이 사라진 지 오래다. (시끄러운 교회들이 좀 많은가. 여자문제 돈문제... 목사들 입장에서 그런 자기에게 순종하라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성경에 긍정(positive, affirmative)라는 단어는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보통 긍정의 힘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이 열거하는 성경상의 사건들에는 '충성,' '순종'등의 단어가 사용된다. 심지어 선교현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기적들까지도 선교사들의 긍정적인 마인드가 이루어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모두가 고개를 내 저을 때에 고난의 현장에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나아갔을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는 것이다. 분명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앞의 문장에서 '긍정'의 자리에 '순종'을 집어 넣어야 올바른 문장이 된다. 때로는 목숨까지 도외시하면서 일하고 있는 선교사들의 삶을 긍정적인 마인드에 의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을 모독하는 것이고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그저 나를 따라 다니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대신 해 주시는 하인 정도로 끌어내리는 일이다.

그러면 긍정과 순종 충성과는 무엇이 다른가? 순종과 충성은 대상이 정해져 있다.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충성이다. 그런데 긍정은 나에게 하는 것이다. 나에게 안심하라고 다 잘될 거라고 말하는 나의 속삭임이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낮은 곳으로 가라 명하신다. 고난을 즐거이 받으라고 명하신다. 심지어 아들을 바치라고도 하신다. 우리의 죽음을 필요로 하실 때도 있다. 거기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 진다. 그러나 긍정적인 사람은 '에이 아냐. 다 잘 될거야.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고난을 허락하실 리가 없어. 주여 믿사오니 이 고난을 내게서 치워 주시옵소서. 믿습니다.'라고 한다. 긍정적인 사람에게 있어 고난도 겸하여 받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마가복음 10:30)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 둘은 비슷한 듯 하면서도 너무 다른 말이고, 궁극적으로 봤을 때에 긍정의 힘을 믿는 믿음은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긍정의 힘을 믿는 것은 교인이 점치러 다니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고 생각한다.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마가복음 10:30)
다시 간증으로 돌아가 보자. 바울의 아주 조심스런 앞뒤 다 떼어버린 소심한 간증이나 (고린도후서 12:1-5) 진리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말하지 않겠다는 바울의 선언을 다시 상고해 보지 않는다고 해도 (고린도전서 2:1-2) 간증은 위험하다. 물론 때로 간증이 활력을 주는 경우가 있다. 특히나 그 말씀이 내게 필요한 경우에는 더더욱 도움이 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간증의 전면적인 거부가 아니다. 간증의 위험성도 알아 조심하라는 것이다. 내가 길의 동편에 있다가 서쪽을 향해 걸어서 길을 찾았다. 그 기쁜 마음을 길의 서편에 있는 사람에게 전하였더니 그 사람이 서쪽으로 힘차게 달려갔다. 그 사람은 어찌 되겠는가? 아주 잘 맞는 예는 아닐 지 모르겠으나, 의미는 어느 정도 통하리라고 본다. 나에게는 진리로 가는 통로가 되었던 그 깨달음이 다른 사람에게는 망하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고린도후서 12:1-5)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린도전서 2:1-2)
간증과 같이 일차 가공된 것은 이해하기 쉽기는 하나 진리와 멀어져 있을 가능성이 있고, 또는 진리의 반대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간증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 간증자의 삶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선에서 끝난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으나, 보통은 그 간증자의 삶을 따라감으로써 같은 경험을 하기를 기대하는 엉뚱한 적용이 훨씬 많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긍정의 힘이라는 책이 나오고 그에 따라 여러 아류들이 출판되면서 한국 교회는 긍정의 힘에 취해 휘청거리고 있다. 한낱 명상 정도로 신앙생활이 폄하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되기도 한다. 예라 하시고 아니라 하지 않으신 예수님이 마치 긍정적이어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비추어 지는 것이 안타깝고 어처구니 없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고린도후서 1:19)
마지막으로, 진리는 예수님 그 분 자체임을 말하고 이 글을 끝내야겠다. 어렵게 진리를 찾을 필요가 없다. 오직 예수님 그 분이 진리이시며, 오직 한 길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순종과 충성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알아야 한다. 겨우 마인드 콘트롤 정도를 하나님께서 기대하신다고 한다면 예수님을 그저 신기루로 생각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예수님의 실존을 믿는다면 그 분을 신뢰하고 순종함으로 충성된 종이 되어 그 분의 삶을 실천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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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