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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3.29 성경연구에 있어서 교리의 득과 실
2012. 3. 29. 09:49

성경연구에 있어서 교리의 득과 실 Opinion2012. 3. 29. 09:49

교리는 분명히 중요하다. 신앙고백의 근간이 되기도 하며, 이단을 구분하기 위한 표지가 되기도 한다. 과거 성경이 귀하고 대다수 성도가 문맹이었을 당시에는 신앙의 기본이 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옳바른 교리를 세우고 배우며, 올바른 신조를 통해 신앙고백을 하는 일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교리에 너무 심취하는 것, 또는 성경보다 교리를 우선하는 경향은 경계해야 한다. 굳이 교의신학에서 성경신학으로 그리고 선교신학으로 변해가는 신학의 흐름을 언급하며 어려운 소리를 늘어놓지 않아도 그 이유는 분명하다.

성경이 더 중요하다라고 하면 일면 유치해 보인다. 너무 당연한 소리로 논리를 증명하려고 하는 행위는 일면 우물물에 독치기의 오류에 빠진 듯이 보인다. 그러나 나는 그 세련되지 못한 주장을 여기에서 할 수 밖에 없다.

교리만 확실히 알고 있으면 성경은 필요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만난 적이 없다. 왜냐하면 너무 극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교리가 도움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교리를 통해 성경을 이해 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미묘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둘다 맞는 이야기이긴 하다. 그러나 나는 후자, 즉, 교리를 통해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라는 주장에 오류가 있음을 이야기 하고 싶다. 교리로 시작한 사람이 성경으로 항상 가지는 않더라는 데에 그 오류가 있다. 성경으로 시작하여 교리의 도움을 받는 것은 상대적으로 그 교리가 그를 성경에서 멀어지게 하지 않는 반면, 교리로 시작하여 성경으로 확증하려는 시도는 종종 교리로 시작하여 교리로 끝나게 하기도 한다.

그러면 교리만 가지고는 신앙생활이 되지 않는가? 우리는 현대를 사니까 과거 성경이 귀했던,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은 무시하도록 하자. 그렇다면, 원전인 성경을 제쳐두고 그에 대한 해석본인 교리를 통해서'만' 신앙생활이 가능한 지에 대한 논의는 적어도 내 상식으로는 의미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한 하나님의 자취를 찾는 방법의 1차 매뉴얼에 집중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나는 사람의 가공이 한번이라도 더 들어간 매뉴얼은 믿지 못하겠다. 참고는 하겠지만, 그것을 이용해 길을 떠날 자신은 없다. 더구나 평생에 걸친 여정인데 말이다.

늦게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직분을 받고, 더구나 진지하게 신앙에 대해 접근하는 사람들 중에 지난한 성경을 통한 길찾기를 포기하고 교리를 통한 길찾기에 집중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아왔다. 물론 그들는 적어도 길을 찾기 원하는 진지한 신자였다. 성경을 통한 길고 긴 여정에 질려 지름길을 찾고자 하는 그들의 그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며, 나는 그 노력을 응원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시도의 위험성을 여기에서 짚지 않을 수 없다. 먼저 교리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논리'에 바탕을 둔다. 나의 신앙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를 틀렸다 할 수 없다. 그러나 논리는 기본적으로 인본주의적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논리로 당신을 계시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계시는 그 자체로 '진리'이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 당신은 인과율에서 벗어나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논리 위에 계신다.

그리고 그 어떤 교리도 성경 전체를 무리없이 설명하지는 못한다. 이 부분은 중요하면서도 미묘한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모순 없는 교리는 없다는 말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개혁교회의 전통을 따르는 사람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사상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래야 할 필요도 못 느끼겠다. 그저 전적타락과 무조건적 선택에 동의하고 예정론에 동의 할 뿐이다. 그렇다고 예지론에 반대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다만 성경이 주장하는 하나님을 예정론이 예지론보다 더 잘 설명한다고 생각 할 뿐이다. 다시 말해, 내가 보는 교리의 역사는 오류를 줄이기 위한 역사였을 뿐이지 오류를 없애기 위한 역사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논리로 설명되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를 말하면 너무 현학적인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나, 어쨌든 어떤 논리 체계도 완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수학적으로도 증명된 일이다. 즉, 겨우 인간도 논리로 설명이 되지 않는데 하물며 크신 하나님임에야 그것이 가능 할 리 없다.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에게서는 '나'가 드러나기 쉽고, '나'가 드러나는 사람은 무익하며 무력한 나를위해 값없이 당신을 드린 예수님의 은혜와 그로 인한 전적인 구원에 동의하기 쉽지 않다. 나에게 '구원받을 만한 것'이 있어서 구원받았다고 주장하는 솔직한 사람부터, 은혜로 구원받기는 했지만 그 이후로는 '구원받을 만한 상태'를 유지해야 다시 버림받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절대사랑을 폄하하는 사람까지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를 드러내기를 원한다. 내가 구원에 어떤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런 논리의 함정, 다시 말해 '나'의 존재의의가 드러나는 그 달콤한 유혹에 쉽게 빠지고 헤어나오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 왔다. 이런 경우들을 2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수백년 묵은 논쟁에 매몰되는 경우를 봤다. 매주 인터넷을 통해 논쟁거리를 준비해서 만날 때 마다 질문하는 부류에 해당하는데, 그들의 주장을 듣고 있노라면 대체 그런 논쟁이 우리 신앙에 뭔 소용이 있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이런 사람은 조금 나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수년째 같은 논쟁을 반복하기도 하는데, 이런 사람은 계속 공부하지도 않는다. 그냥 한 번 들은 논쟁거리를 자신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데에 반복적으로 사용 할 뿐이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당신 생각 다 맞으니 하나님의 아들답게 사는 데에나 집중하세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그들은 그런 논리로 나를 고민에 빠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나는 논리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믿는 것이기 때문에 논리상 문제가 있는 신앙고백이 그렇게 낯설지도 불편하지도 않다. 그리고 솔직히 아직까지는 그런 논리에 논리로도 밀려 본 일이 없다. 설령 불완전한 이해일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 즉, 하나님으로 시작한 '신앙고백'은 논리를 위한 논리에 밀릴 수 없다.

그리고 수백년묵은 논쟁은 그 자체가 '나는 믿음의 문제에요'라고 강변하는 것과 다름 없다. 결단이 필요한 문제일 뿐이다. 그런 문제에 답변하려고 정력을 소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만 논지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어떤 것을 선택할 지 결정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마저도 최소한으로 하기를 권한다.

다음 부류로, 앞에서 "교리만 확실히 알고 있으면 성경은 필요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만난 적이 없다"라고 했었는데 사실 그런 부류를 본 일이 있고, 내용을 "예수님과 구원(에 관한 교리)만 알고 있으면 성경은 필요없다"라고 바꾼다면, 이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은 상상외로 많다. 내 양육의 목표는 '성경 읽는 교인 만들기'이다. 그런데 나의 양육 역사는 참담한 실패의 연속이었다. 일시적으로 신약통독/성경통독에 성공하는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것이 습관화 되어 계속 읽기까지 성공한 예는 부끄럽게도 하나도 없다. 나는 왜 그게 안되는 지가 궁금했었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성경 읽는 것도 은사'라는 말도 한다. 거기에 동의한 적도 있다. 참담한 심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의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어떻게 아버지의 말씀을 읽어 듣는 것이 은사가 될 수 있나? 자기들의 읽지 않음에 대한 핑계로 '은사가 있는 사람만 읽는다'라 주장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이에 대한 해답을 그 다음 부류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서 찾았다. 그들은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부분과 논리적으로 설명 할 필요가 없는 부분으로 성경을 구분한다. (물론 이런 구분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 할 것이다. 그런데 역시 내용을 약간 바꾸면 '자기의 논리대로' 성경을 중요한 부분과 중요하지 않은 부분으로 나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런 사람은 많다. 그리고 그 중요한 부분은 예수와 그 분을 통한 구원 정도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외의 부분은 '중요하지 않다'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나면 그들 생각에 '나는 예수님은 아는데? 그러면 성경은 읽을 필요 없겠군 어차피 부차적인 문제들이니까'로 결론지어진다. 논쟁거리에 함몰되는 부류는 열심히 하려는데 열심이 잘못된 방향으로 발휘된 사람들이라면 이들은 아예 필요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이다. 즉, 이제껏 읽기 힘들어서 성경을 읽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던 사람들, 그래서 날 고민하게 만들었던 사람들, 심지어 내가 은사가 있어서 읽는다고 착각하게 했던 그 사람들이 실상은 읽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읽지 않는 부류였다.

이들은 어처구니 없게도 구원론 만큼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 질문하면 곧잘 대답도 한다. 그리고 심지어 겸손하기까지 하다. (반면 논쟁에 집중하는 부류들은 그렇게 겸손하지는 않다.) 그런데 성경은 읽지 않는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성경을 읽고 있나? 읽지 않는다면 왜 읽지 않는가? 읽을 필요가 절실한데도 읽지 않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바보다. 절실한 필요를 무시하고 있으니 바보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에겐 성경이 아직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은 거다.

두 부류 모두 하나님보다 내가, 성경보다 내 머리가 더 우선인 경우이다. 그리고 나는 교리 중심의 성경연구가 이런 함정을 어느 정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교리를 정립했던 사람들은 누구 하나 예외없이 성경을 줄줄이 꿰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성경을 통한 깨달음이 없이 올바른 교리를 만들거나 이해 할 수 있다고 꿈꾸지 않기를 바란다.

이 즈음해서 교리의 필요성도 짚어볼 필요가 있겠다. 교리는 앞에서도 말했다 시피 우리에게 있어서 일종의 경계석 역할을 한다. 우리가 모든 문제를 다 스스로 답해야 한다면 그건 너무 가혹하고 힘든 일이다. 중요한 것들 이외에는 남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그런 경우 내가 속한 교단에서 인정하는 교리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물론 그 교리의 진의를 파악하는 데에는 성경을 통한 도움이 필요하긴 하나 어쨌든 비교적 손쉽게 그리고 안전하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아주 미묘하게 사람을 괴롭히는 문제들이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있기 마련인데 그런 경우 교리가 많은 도움이 된다.

그리고 성경만을 이용해서 신앙훈련을 한 사람들은 어떤 개념을 간결하게 표현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도 그 경우에 해당하는데 뭔가 이야기 하려면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너무 많다. 그래서 말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교리의 도움을 받으면 간결하면서도 위험성이 적은 대답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너무 불성실하게 필요성을 짚었는데, 어쨌든 당신이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성경을 중심에 두고 교리도 무시하지 않기를 권한다. 가능하다면 교리 공부에 너무 집중하지 말기를 바란다. 교리 공부도 경건 훈련에 해당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거기에 그렇다고 답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성경을 통한 경건 훈련의 보조 수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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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