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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에 해당되는 글 2

  1. 2011.10.19 구원에 대하여 2
  2. 2011.02.04 구원에 대하여
2011. 10. 19. 10:13

구원에 대하여 2 Bible Stories2011. 10. 19. 10:13

오늘은 구원에 관한 조금은 골치아프면서 충분히 논란거리가 될 수 있을 만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어떤 사람들은 필자가 올렸던 2011/02/03 - [Bible Stories] - 구원에 대하여와 모순된다고 생각 할 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전혀 모순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모순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강요할 능력은 되지 않는다.

보통 장로교인들은 칼빈으로부터 시작한 그러나 그 후 약간씩 변형이 가해진 예정론을 배우고 믿으며 살고 있다. 물론 이 글을 통해 진부한 예정론에 대한 논의를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간과하고 있는 것이 설혹 있지는 않은가 살펴보고 싶을 뿐이다.

일단 예정론 하면 같이 떠 오르는 것이 예지론이 되겠다. 이에 관련한 심도 있는 글을 보고 싶다면 지금 당장 검색창에 '예정론' 이라고만 해도 수도 없이 많은 글이 검색 될 것이다. 나는 그런 글들과 대동소이한 글을 쓰고 싶지도 않고 경쟁하고 싶지도 않다. 그냥 우리가 흔히 하는 질문으로 부터 시작해 보자.
  • 내가 하나님에 의해 구원이 예정되어 있다면 이제 맘대로 살아도 될까? 어떻게 산다 할 지라도 하나님께서 한 번 구원하신 사람을 버릴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이건 사실 맞는 말이다. 비록 신약의 많은 서신들이 이런 생각 때문에 방탕했던 교인들을 질타하는 데에 많은 지면을 할애 했었다손 치더라도, 하나님의 절대 사랑과 절대 구원을 생각 한다면 한 번 구원 받은 사람이 그 구원에서 떨어져 나갈 리는 없다. 물론 독자 중에 야고보서의 많은 구절들과 요한 일서의 내용들 히브리서 바울 서신의 많은 구절이 떠오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실로 신약은 예정론을 지지하는 구절과 예지론을 지지하는 구절들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그 중 어느 한 쪽을 지지하면 성경의 거의 절반의 내용으로 공격이 가능하다.
  • 구원 받은 사람은 구원 받은 증거를 보이면서 살아야 한다.
이 역시 맞는 말인데 대체 그 증거가 무엇이겠느냐란 문제가 있겠다.

일단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예정론을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가정하고 글을 써 보겠다. 즉, 구원은 한 번 구원이고, 그 구원에 대해서 번복되는 일은 없으며, 그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 선택에 의한 것이다 정도를 받아들인다고 가정하겠다. (물론 나도 이렇게 성경을 보는 사람이다. 칼빈의 TULIP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으나, 그렇게 현학적인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야고보서 2:17-20)
이와 관련된 수도 없이 많은 구절들이 떠오르지만 그것들을 모두 훑어 보다가는 성경 전체를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이 구절만 보고 이야기 하자. 이 행함에 대한 강조 때문에 일찌기 종교개혁가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까지 했었다. 'James the Just'라고 불리웠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왜 이런 말을 했었던 것일까?

단도 직입적으로 말을 해 보겠다.
당신은 구원 받았는가? 아멘이라 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배웠었으니까. 그럼 그걸 당신은 어떻게 확신하나? 밑도 끝도 없이 확신하라고 하니 확신하나? 확신하라고 한다고 또는 확신하기로 했다고 확신이 되나? 그걸 확신이라고 부를 수 있나? 아니면 그냥 세뇌인가? 조금 위험한 접근이자 질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께서 우리 이름을 생명책이 한 번 기록하면 그것을 다시는 지울 방법이 없다. 어차피 우리는 악하고, 그렇다고 과거 적어도 어느 한 순간에 선하여 구원 받은 것이 아니기에 갑자기 어느 순간 깨끗하다고 생명책에 적어 주실 리도 만무 할 뿐 아니라, 어느 순간 악하여 졌다고 해도 이미 적혀 있는 이름을 지울 리도 없다. 어차피 그게 그거인 인간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을 누구 보다 잘 알고 계신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4:15-16)
그러면 행위는 무엇인가? 이 행위를 성령의 열매라고 바꾸고 싶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특히 다음 구절에 잘 정리되어 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22-23)
우리가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에 잘 붙어 있으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해 열매를 맺으시고 그 열매가 바로 성령의 열매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5)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를 통해 열매를 맺으시려면 가장 기본이 되는 가정은 내 안에 '의심'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야고보서 1: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마가복음 11: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마태복음 21:21)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마가복음 9:23)

자 나는 여기에 야고보서의 비밀이 예정론과 상통하면서 서로 보완 관계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믿음(의심없음) → 예수님이 나를 통해 열매 맺으심 → 그 열매를 보면서 내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됨 → 그 확신으로 의심을 없애고 믿음을 더욱 강건하게 함 → 예수님이 나를 통해 열매 맺으심 → ......" 이런 믿음의 사이클이 우리 인생에 반복되야 건강한 자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 입장에서는 절대 예정이고 예정하신 사람을 다시 버리는 일이 없다. 그런데 우리 입장에서는 내가 구원을 받았는 지 확인 할 방도가 없다. 하나님이 생명책을 열람하게 해 주시는 것도 아니고 참으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다 보면 의심이 생기고 의심하는 사람을 통해 예수님이 역사 하시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난 아멘으로 신앙고백을 했었으니까 일단 구원은 받을 거야. 뭐 이유도 모르겠고 확신도 없지만, 확신하면 된다고 했어.'라는 말도 안되는 논리를 가지고 있는 기독교인은 사실 상상 이상으로 많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그런 부류에 속해 있을 지도 모른다.

요한 일서에도 나오지만, 구원 받았다고 해서 의롭게 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선한 행실 (직접적으로는 형제를 사랑함)이 나의 구원 받았음에 대한 증거는 될 수 있다. 즉, 선한 행실이 구원의 충분조건이기는 하나 선한 행실의 구원의 필요조건은 되지 않는다는 말씀이고, 이 역시 야고보서의 내용과 통하는 내용이다. 즉,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서 '아멘'하는 순간 교회 공동체가 '당신은 구원받은 백성입니다.'라고 인정한다. 그 인정을 받아 들임으로 나에게 있는 일말의 의심을 거두어 내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 의심없는 믿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일하시고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열매를 보고 나의 구원을 확인받게 된다. 이것이 또 다른 열매의 원동력이 된다 (물론 나는 예수님께 붙어 있는 일만 하면 되지만).

교회를 수십년 다니면서도 붙들고 있는 것은 '난 구원 받았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정도만 말 할 수 있다면 정말 심각하게 스스로의 믿음을 점검해 봐야 한다. 우리는 죽어 봐야 어디에 갈 지 안다. 내가 천국간다고 확신한다 해서 지옥에 갈 사람이 천국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결국 당신을 통해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열매를 볼 수 있어야 그제서야 진실로 구원에 대한 확신을 할 수 있게 되며, 그 구원의 확신은 평생을 통하여 점검하고 점검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예수님께서 일하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영적 상태를 유지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삶은 온갖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으면서 가증스럽게도 천국에 가리라는 확신해 차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굳게 붙들고 있는 것이 예정론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확신하면 안된다. 그게 가능하다고 하면 바울과 야고보 요한 등등 신약 기자들이 그렇게 힘들여서 어려운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펌프에 마중물의 역할을 하는 것이 처음 믿을 때의 '아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마중물이라는 표현이 이단 종파에서 사용하는 표현이기는 한데, 나는 그냥 마중물의 의미 그대로 여기에서 사용하고 싶다.) 그 이후로는 스스로 솟아나는 물을 이용해서 물을 끌어올리게 된다. 그런데 아무리 마중물을 넣어도 그 밑에 샘이 없다면 물은 연속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마중물로 넣었던 물만 겨우 나왔는데 그것을 보고 구원 받았다고 믿고 방탕하게 산다면 정말 불행한 사람이다. 물론 그 중 구원 받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나는 여기에서 '확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 다만 당신이 구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그 정도의 신앙에만 머무른다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해 일하실 수 없으며, 결국 당신은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고 천국에 가게 될 것이다. 그게 인생의 목표라면 우리 모두 생명책을 열람하지 않은 상황에서 '당신 구원 받은 거 확실해?'라고 나는 묻고 싶다.

믿음의 길은 결코 쉽지 않다. 나를 통해 일하시는 예수님을 민감하게 인식 할 수 있어야 하며, 그 영적 민감함으로 알게되는 열매를 통해 내 믿음을 성장시키고 더욱 예수님이 일하시기에 좋은 영적 상태를 만들기 위해 순간 순간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 왜 바울이 우리의 삶을 경주에 비유하며, 전쟁터의 병사에 비유했는 지에 대한 묵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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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ToBeStable
2011. 2. 4. 06:30

구원에 대하여 Bible Stories2011. 2. 4. 06:30

구원에 대한 문제만큼 어렵고도 민감한 문제가 없다.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이해하기도 어려웠고 설명하기도 어려웠으며, 해결됐다고 생각한 순간 돌연 다시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변하곤 했었던 문제이다. 그 때 그 때 문제로 돌변한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고자하는 노력의 결과들이 있었으나, 놀라운 것은 그것이 내일도 나에게 대답으로 내 삶에 적용되고 있지는 않더라는 사실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이 글에서 논해 보고자 한다. 먼저 우리가 염두에 둬야 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 하나님은 우리와 다른 차원의 존재이다. 즉, 우리는 그 분의 부분만을 보고 느낄 수 있다.
  • 우리가 경험 할 수 있는 부분들은 절대 하나님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그 부분들이 그릇 된 것은 아니다. 다만 전체가 아닐 뿐이다. 즉, 모든 하나님의 은혜로 하게 되는 경험은 옳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24)
먼저 이 성경구절에 대해 생각해 보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 예수님을 보내신 이 즉, 하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었다고 예수님 본인이 말씀하셨다. 즉, 하나님을 믿으면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면 구원은 주어지게 된다. 우리가 받는 구원은 이 처럼 간단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무엇을 보아 '믿는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이다. 믿음에 관해서는, 특히,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문제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일단 우리는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0:13-15)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 10:17)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말씀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물론 그러하기 때문에 진정한 말씀을 찾기는 어렵다는 모순이 존재하지만 그 문제는 다른 곳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일단은 우린 많은 말씀들에 둘러 쌓여 있다. 주위에 크리스찬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수도 없고, 누구든지 한 번 이상은 말씀을 들어 보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믿음에 이르는 것이 쉬운가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지만, 그리고 전파하는 자가 있으면 듣게 되겠지만, 그 사이에 뭔가 다른 것이 필요하다.

나는 그것이 믿기로 작정하는 '결단'과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10:9-10)
내가 내 입으로 시인하여야 한다. 나는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그리고 나의 경험을 통해 '시인'하는 과정이 절대 거짓으로 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나의 주로 시인하는 것은 은혜가 아니고서는 힘들다. 물론 믿지 않기로 결단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말은 얼토당토 않은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나는 사실 할 말이 별로 없다. 다만 믿고자 하는데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 이 글을 쓸 따름이다.

다음의 성경 구절은 아주 흥미롭다. 이렇게 흥미로운 성경 구절이 이 외에 더 있을 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흥미롭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Now faith is being sure of what we hope for and certain of what we do not see. (히브리서 11:1-2)
어떤 이유에서인지 믿음은 바라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실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라고 한다. 나는 이 말씀이 단순히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글의 서두에 내가 전제하기를 하나님은 우리와 다른 차원의 존재라고 하였다. 이제부터 약간은 유치한 예를 들어서 이에 대해 설명해 보고자 한다. 최근 이 이상의 설명법을 찾지 못하여 나 스스로 약간은 유치하다고 생각하나 계속 이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다음 이야기에서 '나'는 2차원상에 살고 있다고 가정한다. 당연하겠지만 2차원상의 존재에게는 높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것을 점과 선으로만 인식한다. 삼각형도 2차원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위에서 내려다 봐야 인식이 가능하다. 내가 같은 이차원에 살고 있다면 모든 방향에 따라 길이가 달라지는 선분일 따름이다.

오늘도 어제와 같이 동쪽에서 길게 늘어진 붉은 태양이 생겼다. 그리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느릿 느릿 뜨거운 자취를 남기며 빛을 가운데로 가운데로 모으더니 결국 강렬한 백색의 짧은 선분이 되어 남쪽에서 노려 보다가 서쪽으로 지친 듯이 늘어지며 이동하였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붉게 상기된 모습으로 내일을 기약하며 사라져 버렸다. 내일이면 다시 나타나서 오늘이야말로 강렬한 모습으로 남쪽에 머무르겠다는 듯이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겠지만 어쨌든 오늘의 태양은 어제와 같았다.

큰 변화가 없는 우리 동네에서는 내가 갈 수 없는 '그 곳'이 여전히 갈 수 없는 '그 곳'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검은 선이 '그 곳'으로부터 뻗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새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태양을 정확히 내 오른쪽에 두고 (왼쪽에 둬도 마찬가지였다) '그 곳'을 바라보니 태양의 길이하고 정비례해서 검은 선의 길이가 바뀌고 있었다. 그러니까 태양이 길 때엔 그 검은 선도 길고 짧을 때엔 그 검은 선도 짧아졌다. 그건 대체 뭘까.

자 이 친구에게 있어서 갈 수 없는 '그 곳'과 길이가 변하는 태양, 그리고 검은 선들은 그냥 자연 현상일 뿐이다. 그냥 스스로 그러할 뿐인 사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3차원에 사는 우리는 조금 더 자세한 진실 혹은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린 그가 갈 수 없던 '그 곳'에 전신주 하나가 우뚝 서 있는 것을 알고 있다.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면서 고도에 따라 그림자의 길이가 바뀌고 지구의 자전에 의해 태양의 방향이 바뀌고 태양 고도에 따른 빛의 산란으로 태양 빛이 바뀌는 것을 알고 있다.

자 그럼 이제 이 친구에게 그 사실을 알려줘 보자. 물론 완벽히 2차원의 존재가 이해 할 수 있는 방식의 설명은 아니다. 그렇게까지 민감하게 이야기를 구성하지는 않았다.
자 들어봐. 여기에 전신주가 하나 서 있어. 전신주가 뭐냐고? 그 높다란 것 있잖아, 전선을 지지하기 위해 서 있는 것들. 아... 넌 '높다'라는 것이 뭔지 모르겠구나. 글쎄... 너에게 설명하긴 아주 힘들 것 같은데, 그냥 일단 여기에 '높은' 것이 있다고 해 보자. 그림으로 보면 여기에 이렇게 긴 것이 태양 빛을 가린다고 생각해봐. 참. 태양도 동쪽에서 '떠서' '높이' '올라 갔다가' 다시 '내려 오는' 일을 반복하고 있어. 여하간, 이 전신주가 태양을 가려서 어두워진 부분이 저 선이야. 그리고 태양이 높아지면 각도가 예각으로 바뀌면서 길이가 짧아지고 낮아지면 각이 커 지면서 그림자가 길어 지는 거야.

이 친구는 2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그냥 산뜻하게 무시하고 그냥 '자연스러운' 생활을 유지하는 선택과 이해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믿고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이는 선택이 그것이다. 첫번째 선택은 그에게 그 어떤 문제도 없다. 그냥 살던 그 모습 그 대로 살면 된다. 그에게 검은 선은 그냥 현상이다. 갈 수 없는 '그 곳'도 그냥 현상이다. 우리가 하늘을 날 수 없는 것을 단순히 인정하듯이 그에게도 별로 어려울 것 없는 문제다.

그런데 두번째 선택을 한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이제부터 그 검은 선은 거기에 전신주가 있다는 '증거'가 되기 시작한다. 각도를 달리하면서 증거들을 수집하고 그 것들을 통해 추론과정을 거치면 직접 보지는 못해도 3차원상의 모양을 유추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 다시 성경 구절로 돌아가 보자. 믿으니까 사실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보이지는 않지만 항상 보아 오던 그것이 그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증거로 충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비밀이다. 우리 모두는 들었다.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세상이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에 대한 증거들로 가득차 있다고 느낀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믿는 자에게는 증거인 그것이 그저 현상이고 우연이고 다른 의미는 전혀 없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흥미로우며, 믿는 자에게 위로가 되기도 하고 도전이 되기도 하는 말씀을 보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31:31-34)
이 말씀은 히브리서에 두번 더 반복이 되고, 예레미야 서에서도 여러 번 반복되어 나와 있다. 한 마디로 중요한 말씀이다. 여기에 보면 새 언약을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우리의 마음에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기록하여 두시겠다고 하신다. 즉, 우린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다 마음에 가지고 있다. 무엇을 뜻하는가. 세상엔 3차원상에 존재하는 전신주에 대한 정보가 있다. 그런데 그걸 뻔히 보면서도 믿지 못하는 사람에겐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나 믿으면 실체가 되어 나타나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알고 있다. 믿고 인정하면 하나님이 실체가 되어 나에게 역사하신다. 그리고 그것을 경험 할 수 있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 정말 안타깝게도 방법이 없다. 우리의 인식의 한계로 인해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경험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수가 없다.

이 글이 믿고 싶으나 어떻게 무엇을 믿어야 할 지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또한 항상 이런 부분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믿음 생활을 이어나갈 때에 예기치 못한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노파심에 한 가지를 이야기 하자면, 나 아닌 다른 사람이 경험한 하나님을 100% 순수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위의 이야기에서 보자면 2차원의 존재는 3차원의 그림자만 볼 따름이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그림자의 모양이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이며, 그 하나 하나가 전부 그 3차원의 존재로 인해 만들어진 '실재' 그림자라는 사실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어떤 상태에서 경험했는가 또는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냐에 따라 각자가 경험한 하나님은 아주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두 같은 하나님이며 같은 은혜임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으로 남이 경험한 하나님을 판단해서는 절대 안된다.

한 가지 더 부언하자면, 이 글에서 다룬 문제가 '구원의 확신'과는 별개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터인데, 구원의 확신 역시 일종의 결단이기 때문이다. 한 번 구원에 대한 증거가 있다면, 혹여 그 기억이 희미해 지고 내가 나를 믿지 못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그 증거를 증거라고 믿고 의지하는 한 그것은 증거로써 가치를 잃지 않는다고 본다. 현재의 삶에서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지 않고 믿음이 약해지고 희미해져도 '나는 나의 구원을 확신합니다'라는 말을 거짓이라고 말 할 수는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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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