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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외'에 해당되는 글 1

  1. 2012.05.01 나의 주 예수님 1
2012. 5. 1. 11:04

나의 주 예수님 Bible Stories2012. 5. 1. 11:04

예수님은 나에게 있어서 누구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성경은 ‘나의 주가 되어야 한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나의 주’로 인정하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며 올바른 신앙고백이다. 그런데 현대 기독교인 중에 이 말의 참뜻을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잦다. (물론 나도 발버둥만 치고 있다.) 도마는 예수님을 주로 그리고 하나님으로 고백하였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한복음 20:28 )


그러면 예수님을 나의 주로 삼는 것을 성경은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요한은 포도나무와 그의 가지로 표현하고 있고, 바울은 머리와 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 요한복음 15:5)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에베소서 1:20-23)


따라서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겠다는 뜻은 그분의 뜻대로 살겠다는 뜻이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이 뜻이 과연 무엇일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바울의 고백과 성경의 묘사를 통해 볼 때에 나의 삶에 대한 주권을 예수님께 이양하고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삶이 바로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는 삶이라 생각된다. 당신은 과연 그렇게 살고 있나.


관점을 조금 바꿔서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는 삶은 어떻게 실현 가능한가에 대해 생각해보자. 궁극적으로 주를 사랑함으로 주와 하나가 되면 그것이 바로 주를 나의 주로 인정하는 삶이다. 그러나 나 같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비현실적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체가 머리의 뜻을 따르는 것은 머리를 사랑해서라기보다 머리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예수님을 나의 머리로 생각할 때에 예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머리로 삼는 삶이 아닐까 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함에 대해서 많은 곳에서 진술하고 있다. 개역개정판에 171번이나 반복되는 단어가 바로 경외함이다. 이는 ‘경외’라는 단어로 찾았을 때의 이야기이고 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yare’로 찾으면 훨씬 많은 곳에서 그 단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신약까지 더한다면 그 숫자는 또 훨씬 늘어나게 된다.


주의 깊게 성경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경외함은 성경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영역판에서 사용되는 경외의 해당하는 단어인 fear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함의에 비추어 볼 때 놀랍다. 심지어 하나님을 경외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동의어로 사용될 때도 있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 (신명기 5:29)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신명기 30:16)


위의 두 성경 구절을 보면 같은 내용에 대해서 한 곳에서는 경외를 (5:29) 다른 한 곳에서는 사랑을 (30:16)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볼 때에 하나님을 사랑함이 하나님을 경외함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발이 잘릴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하자. 그리고 오른손이 새끼 손가락 하나만 희생하면 발을 살릴 수 있다고 하자. 그러면 손의 입장에서 발을 사랑해서 새끼손가락을 희생하지는 않을지언정 머리의 명령을 순종함으로 발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가능하다. , 머리를 경외함으로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결국 발에 대한 손의 사랑 표현일 수 있다. 이렇게 보자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결국 하나님을 사랑함과 같다고 하겠다.


따라서 나는 예수님을 나의 주로 인정하는 삶은 예수님을 머리로 인정하는 삶이요, 그 삶은 예수님의 명령을 경외함으로 따르는 삶이라고 하고 싶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에, 당신은 예수님을 주로 삼고 살고 있는가. 나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점점 하나님을 무시하고 나의 도구 정도로 하나님을 끌어내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강대상에서 흘러나오는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를 향해 선포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들을 향해 그들의 마음을 만져주는 정도의 설교밖에 되지 않는 경우를 자주 본다. 차라리 성도들의 처지를 대변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는 설교라면 그나마 낫겠다 하겠으나, 그 안에 하나님은 화자로도 청자로도 존재하지 않고 그저 성도를 청자로 삼아 목사가 그들의 기분을 좋게 해 주는 정도의 설교만 있다는 생각을 금하지 못하겠다.


근래 십계명에 관한 설교를 들었다. 그 중 제4계명인 안식일에 관한 설교였는데, 목사님은 그 설교를 하기 싫었다는 말로 설교를 시작했었다. 이유는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이어서였는데, , 주일날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 성도가 많은 상태에서 그 설교를 하기가 껄끄러웠다는 말이었고, 심지어 어쩔 수 없이 주일날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로하여 주시고 자유로울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로 설교가 끝났다. 물론 나는 그 목사님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심정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러면 안 된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심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믿음으로 하여 다시 순종하는 삶이 반복되는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경건 훈련이요 신앙 훈련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핑계를 대면 안 된다. 물론 성경에서는 믿음이 약한 자 (경제적 약자로 상징된)에 대한 배려가 곳곳에 묻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명령을 변개할 수는 없다. 나는 말씀을 말씀 그대로 진정으로 선포한다면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위로가 필요한 자들을 직접 위로하시리라 믿는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말씀에 대한 선포일 뿐이다. 말씀에 내 의도가 들어갈 때에 말씀에서 능력이 사라지고 칼날이 무뎌져서 혼과 영과 육을 쪼개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말씀을 그대로 진정으로 전달한다면 말씀 그 자체가 스스로 일하기 시작하시리라 믿는다. (모두 알다시피 성경에서 말씀은 대체로 예수님을 뜻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브리서 4:12)


우리는 십자가 군병으로서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그리고 그렇게 명령에 순종할 때에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책임져 주신다. 아무리 내 상황이 그렇지 않더라도 명령에 의지하여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 나머지를 다 책임져 주시는 그 감격스러운 경험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되어야 한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후서 2:3-4)


주를 나의 주로 나의 머리로 삼는 삶이 절대 쉽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게 살 때에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이 해결됨을 또한 믿는다. 많은 경우 우리가 어렵다 힘들다 하는 문제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명령에 우선하여 내 자아를 인정해 달라고 하는 데에 그 핵심이 있는 경우가 많음을 본다. 미움 시기 질투 게으름 등등의 모든 문제는 그저 순종함으로 예외 없이 해결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아주 재미있는 성경 구절 하나만 살펴보고 이 글을 끝내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16-18)


적어도 내 입장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명령에 의지해서 할 수 있다. 하고 하지 않고는 차후 문제이고, 가능성의 관점에서만 말하자면 명령으로 가능할 법한 것들이다. 그런데 기뻐하라는 명령은 이상하다. 명령으로 기뻐하는 것이 가능하긴 한가? 그런데 성경은 가능하다고 하며, 그것을 명령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명령 범위는 우리의 상상보다 더 넓다. 좁게는 우리의 수족을 움직이는 문제로 시작하여 넓게는 감정의 문제까지 명령하신다. 명령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니 얼마나 다행인가. 당신이 순종하기만 하면 절대 될 것 같지 않던 문제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고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 그것이 주를 주로 삼는 사람이 누리는 복이며 기적이다. 그리고 그것을 명령으로 하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는 단순히 순종만 하면, 절대 될 것 같지 않은 감정의 문제 즉, 우울증 분노 시기 등등의 문제를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여 직접 해결해 주신다. 위의 딤후 2:3-4를 다시 한번 상고해 보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립보서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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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