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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2. 9. 15:32

ESV Study Bible Opinion2011. 12. 9. 15:32

이 성경을 폈을 때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특징이 Life Application Study Bible과 마찬가지로 풍부한 지도이다. 특히 그 지도가 컬러여서 일단 눈길을 끄는 데에는 성공적이다. 물론 이 부분은 '성경'을 봄에 있어서 피상적일 뿐이긴 하다. 그러나 풍부한 테이블과 지도는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상당한 도움이 되기 때문에 만약 어떤 성경을 골라야 할 지 고민 중이라면 한 번 정도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ESV의 머릿말을 읽어보면 이들의 번역 철학 및 자세 등을 알 수 있는데, 그 머릿말을 통해 그들의 철학이 NKJV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단 번역을 계속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그들은 영어가 변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법이 계속 바뀌어 가고 있고, 바뀌어 왔기 때문에 새로운 번역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현재를 사는 세대는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매우 합당한 설명이라 여겨진다. 참고로 ESV는 1526년의 William Tyndale's New Testament, 1611년의 KJV, 1885년의 RV (the English Revised Version), 1901년의 ASV (the American Standard Version) 그리고 1952, 1971년의 RSV (the Revised Standard Version)로 이어지는 전통을 따른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essentially literal" translation을 지향하는데, 그 이유는 의역을 통해 야기될 수 있는 위험성 즉, 번역자의 개인적인 생각 성향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동시에 직역은 처음에는 의미를 모르더라도 묵상의 반복을 통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주장한다. 그리고 어차피 "thought-to-thought (의역)"을 하고 싶어도 수천년 전의 시대상을 알 수 없는 지금 의역은 불가능 함을 주장 또는 인정하고, 그러므로 "word-to-word" translation이 최선임을 주장한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 할 지 몰라도 적어도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더구나 머릿말을 통해 역자들의 성경 번역에서 인간의 역할의 미약함과 오류성을 진지하고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태도에 나는 상당히 감동 받았다.
머릿말의 맺음말 부분을 옳겨 보겠다.
We know that no Bible translation is perfect or final; but we also know that God uses imperfect and inadequate things to his honor and praise. So to our triune God and to his people we offer what we have done, with our prayers that it may prove useful, with gratitude for much help given, and with ongoing wonder that our God should ever have entrusted to us so momentous a task.
나는 이 부분을 감동스럽게 읽었다. 번역이 얼마나 잘 되었는 지도 중요하겠지만 적어도 역자들의 마음 자세는 상당히 훌륭하다고 할 수 있겠다.

주석은 범위 주석이 특징적이다. 보통의 주석들은 절 주석이 많은데 이 성경은 범위주석이 상당히 많다. 그리고 그 범위 주석도 광범위에서 협범위로 단계적으로 줄어드는 방식을 취한다 예를 들어 제일 처음 "Overview of the Bible: A Survey of the History of Salvation"으로 성경 전체 개관이 나오고 "The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로 구약개관, "Introduction to the Pentateuch"로 모세오경 개관, "Introduction to Genesis"로 창세기 개관, "1:1-11:26 Primeval History"로 아브라함 이전세대에 대한 개관, "1:1-2:3 God's Creation and Ordering of Heaven and Earth"로 창조 개관, 그리고 "1:1 In the beginning"으로 마침내 절개관이 시작된다. 물론 어느 주석 성경이나 이런 형식을 취하기는 하나, ESV는 범위 주석이 특히나 많고 잘 되어 있다. 그리고 내용도 아주 전문적인 것들부터 설교 본문을 읽고 있는 착각을 들게 할 만큼 이해하기 쉬운 내용까지 다양하다. 주석이 너무 많아서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는 문제를 단점이라면 단점으로 꼽을 수 있겠다.
권 말에는 Theology에 대한 결코 짧지만은 않은 내용까지 담겨 있다.

마지막으로 번역은 상당히 쉬운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흐름을 위주로 읽는 편인데 흐름을 쫓아가기 쉬운 형태로 번역이 되어 있다. 내가 영어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뭐라 특징을 언급하기는 힘들지만, 다른 역본을 읽을 때 보다 접속사나 접속구들이 눈에 더 빠르게 들어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물론 정말 모든 번역이 일장 일단이 있고, 나는 모든 번역이 다 좋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성경이어서 좋은 건지 잘 된 번역이어서 좋은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워낙 성경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에 어떤 '비교우위'를 이야기하기는 상당히 망설여 진다. 항상 현재 읽고 있는 성경이 제일 좋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여하간 독자들도 기회가 닿는다면 이 책도 한 권 구비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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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5. 14. 09:07

긍정의 힘 그리고 간증 Opinion2011. 5. 14. 09:07

어느 간증집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로 시작해 보겠다.

중국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준비를 시작했지요. 그러나 당장 비행기표를 살 돈도 없었습니다. 표를 사야하는 전날까지도 어떻게 그 돈을 구할 지 막막했습니다. 그래서 무릎꿇고 매달렸습니다.
"주여, 제게 중국을 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비행기표도 살 수가 없으니 어이해야 합니까. 주여 부르셨사오니 보내 주시옵소서."
그런데 갑자기 제가 LA방문때에 잠깐 같이 식사하며 인사 정도나 나누었던 사업가 분이 기도 중에 저에게 헌금하라는 음성을 들었다며 봉투를 건내주지 않겠습니까? 열어 보니 정확히 비행기표를 구하는 데에 필요한 그 액수만큼의 돈이 들어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필자가 지어낸 어딘가에 있을 법한 이야기)

그냥 여기 저기 읽어 본 간증집에 들어있는 내용을 떠올리며 만들어 본 이야기이다. 분명 어딘가에 아주 비슷한 이야기가 있을텐데 찾지도 못하겠고, 찾는다 해도 비슷한 이야기는 수도 없기 때문에 특별히 찾아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기대되는 반응이 무었일까? 기대되는 반응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살펴보기로 하고 적절한, 건강한 반응이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해 보자. 간단하다.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고, 사랑으로 우리의 삶의 순간 순간을 보살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정도가 적당하겠다. 이 이야기의 요점은 (비록 내가 지어낸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감사이다. 그런데 보통은 약간 희한한 시각으로 이 이야기를 본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이리 저리 양념치고 치장해서 언듯 위에서 말한 것과 비슷한 적용처럼 보이나 본질상 전혀 다른 적용을 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그걸 에누리 없이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기도를 하면 돈도 생깁니다."
"저 돈을 준 사업가를 보십시오. 열심히 믿음생활을 하면 저렇게 돈을 많이 벌어서 선교사를 돕는 귀한 일에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은 역사하시는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고 기도의 효용성을 향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은 기도를 수단으로 이용한다. 또는 하나님께서 들어 사용하신 그 손을 본다. 사업가의 손, 부자의 손, 의사의 손, 힘 있는 자의 손... 그 손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한다.

이런 설교 누구든 한번은 들어보았으리라 생각한다.

여러분들도 부자가 되기 위해 기도하십시오. 부자가 되는 것이 죄는 아닙니다. 부자가 되어 수 많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에 크게 쓰임받으십시오.

틀린 구석은 없다. 그러나 의도가 무엇인지 그 저의가 의심스럽다. 사실상 '저의'도 없다는 것이 더 문제긴 하다. 설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문제점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의랄 것도 없다. 그런데 이 말은 애매한 부분을 내포하고 있다. 즉, 돈이 있어야 하나님의 사업이 된다는 식의 논리를 함축하고 있다. 물론 성경에 많은 부자가 나온다. 구약의 신앙의 위인들은 선지자를 제외하면 대부분 부자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엄청난 부자들도 많이 나온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부자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아리마대 요셉이나 삭개오 등등 극소수의 부자만 나온다. 야고보서에서 나타나는 부정적인 이미지의 부자에 대해서 상고해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사도행전의 주인공들 중 부자들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은 알 필요가 있다. 더 좋은 예수님이 있기 때문에 물질적인 부분에서는 자유했던 사람들이다. 그 어느 곳에서도 돈이 없어서 사역을 감당하기 힘들었다는 이야기는 찾을 수 없다. 물론 바울이 연보에 대해 말하면서 당시 이스라엘에 있던 성도들의 쓸 것 마련을 위해 권고한 부분이 있고, 바울이 로마에서 구류생활을 할 때에 빌립보교회의 원조로 생활을 하였고 그에 대한 감사의 편지가 있기는 하나, 그 말씀을 통해 역시 돈이 사역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해석일 뿐이다.

역사는 하나님이 하신다. 돈이 필요한가?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사역을 하는 데에 돈이 필요한가? 이건희 회장이 희귀한 차를 한대 필요로 한다고 하자. 그것을 사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런데 돈이 중요한 의사결정의 고려사항인가? 그 차가 한 100조원정도 하는 차라면 그럴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실재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이 경우 중요한 고려사항은 이건희의 '의지'이다. 돈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결국 돈이 수단으로 사용되기는 하겠지만, 그 돈이 중심 고려사항이 될 수는 없다. 하물며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 돈이 중요한가?

그러면 부자가 있어야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가? 서울 어느 교회에서 정계에 법조계에 의료계에 신앙인이 많아야 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독려했던 적이 있다. '복'받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와 한국인 특유의 복받은 자라면 의례 기대되는 직업군이 맞아 들어가면서 상당히 많은 사람을 '만족'시켰던 논리였었다. 이 가운데에는 바울이 준비된 사람이었기에 그렇게 크게 쓰임 받았다는 말이 논거로 사용된다. 모세가 80년간 훈련받았기에 한 민족을 구원하였다는 사실도 이야기 한다. 다 옳은 이야기이다. 그런데 '준비'가 중요한가? 아니면 하나님의 '부르심'이 중요한가? 뭔가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요즈음 처럼 말씀이 흔한 세대가 없는 듯 하다. 간증도 참으로 많다. 우리 나라가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면서 수많은 간증집이 나온다. 선교 현장에서 드라마틱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는다. 그런데 그런 간증집을 통해 받은 은혜를 나누는 사람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면서 괴리감을 느낀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그들이 경험한 기적을 보면서 그런 기적을 나도 경험 할 수 있다는 건강한 기대와 소망까지는 좋은데 그들의 낮아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좀 더 잔인하게 표현해 보겠다. 그들의 낮아짐을 통해 이루어졌던 그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 낮아짐을 수단으로 사용할 생각은 있으나, 주님을 위해 낮아지려는 사람은 없다. 선교사들의 기적적인 체험을 내 것으로 하기 위해 그들의 삶의 모습을 수단으로 사용하려고만 했지 그들처럼 살려는 생각까지 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이야기의 중심에 돈이 모습을 숨기고 도사리고 있는 경우를 수도 없이 보아 왔다.

이제서야 이 글의 제목으로 돌아온다. '긍정의 힘', 어느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요즘 처럼 '긍정'이라는 단어가 교회에서 많이 들리는 시대가 있었나 궁금하다. '말의 권세,' '입의 파수꾼,' '기도의 힘'등등과 결합되면서 내가 말로 선언하고 기도로 나아갈 때에 그 대로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로 교회가 떠들썩 하다. 그런데 한 20년 전만 해도 내 기억으로는 '순종'이란 말을 지긋지긋하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요즘은 이 순종이란 말을 하기가 목회자나 신도나 민망하다. 순종은 하나님께 하는 것인데 우리나라는 목사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보니 목사 입장에서도 말하기가 껄끄럽고, 신도 입장에서도 그런 굴욕적인 관계를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서 '순종'이라는 말이 사라진 지 오래다. (시끄러운 교회들이 좀 많은가. 여자문제 돈문제... 목사들 입장에서 그런 자기에게 순종하라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성경에 긍정(positive, affirmative)라는 단어는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보통 긍정의 힘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이 열거하는 성경상의 사건들에는 '충성,' '순종'등의 단어가 사용된다. 심지어 선교현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기적들까지도 선교사들의 긍정적인 마인드가 이루어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모두가 고개를 내 저을 때에 고난의 현장에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나아갔을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는 것이다. 분명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앞의 문장에서 '긍정'의 자리에 '순종'을 집어 넣어야 올바른 문장이 된다. 때로는 목숨까지 도외시하면서 일하고 있는 선교사들의 삶을 긍정적인 마인드에 의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을 모독하는 것이고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그저 나를 따라 다니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대신 해 주시는 하인 정도로 끌어내리는 일이다.

그러면 긍정과 순종 충성과는 무엇이 다른가? 순종과 충성은 대상이 정해져 있다.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충성이다. 그런데 긍정은 나에게 하는 것이다. 나에게 안심하라고 다 잘될 거라고 말하는 나의 속삭임이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낮은 곳으로 가라 명하신다. 고난을 즐거이 받으라고 명하신다. 심지어 아들을 바치라고도 하신다. 우리의 죽음을 필요로 하실 때도 있다. 거기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 진다. 그러나 긍정적인 사람은 '에이 아냐. 다 잘 될거야.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고난을 허락하실 리가 없어. 주여 믿사오니 이 고난을 내게서 치워 주시옵소서. 믿습니다.'라고 한다. 긍정적인 사람에게 있어 고난도 겸하여 받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마가복음 10:30)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 둘은 비슷한 듯 하면서도 너무 다른 말이고, 궁극적으로 봤을 때에 긍정의 힘을 믿는 믿음은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긍정의 힘을 믿는 것은 교인이 점치러 다니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고 생각한다.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마가복음 10:30)
다시 간증으로 돌아가 보자. 바울의 아주 조심스런 앞뒤 다 떼어버린 소심한 간증이나 (고린도후서 12:1-5) 진리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말하지 않겠다는 바울의 선언을 다시 상고해 보지 않는다고 해도 (고린도전서 2:1-2) 간증은 위험하다. 물론 때로 간증이 활력을 주는 경우가 있다. 특히나 그 말씀이 내게 필요한 경우에는 더더욱 도움이 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간증의 전면적인 거부가 아니다. 간증의 위험성도 알아 조심하라는 것이다. 내가 길의 동편에 있다가 서쪽을 향해 걸어서 길을 찾았다. 그 기쁜 마음을 길의 서편에 있는 사람에게 전하였더니 그 사람이 서쪽으로 힘차게 달려갔다. 그 사람은 어찌 되겠는가? 아주 잘 맞는 예는 아닐 지 모르겠으나, 의미는 어느 정도 통하리라고 본다. 나에게는 진리로 가는 통로가 되었던 그 깨달음이 다른 사람에게는 망하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고린도후서 12:1-5)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린도전서 2:1-2)
간증과 같이 일차 가공된 것은 이해하기 쉽기는 하나 진리와 멀어져 있을 가능성이 있고, 또는 진리의 반대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간증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 간증자의 삶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선에서 끝난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으나, 보통은 그 간증자의 삶을 따라감으로써 같은 경험을 하기를 기대하는 엉뚱한 적용이 훨씬 많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긍정의 힘이라는 책이 나오고 그에 따라 여러 아류들이 출판되면서 한국 교회는 긍정의 힘에 취해 휘청거리고 있다. 한낱 명상 정도로 신앙생활이 폄하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되기도 한다. 예라 하시고 아니라 하지 않으신 예수님이 마치 긍정적이어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비추어 지는 것이 안타깝고 어처구니 없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고린도후서 1:19)
마지막으로, 진리는 예수님 그 분 자체임을 말하고 이 글을 끝내야겠다. 어렵게 진리를 찾을 필요가 없다. 오직 예수님 그 분이 진리이시며, 오직 한 길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순종과 충성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알아야 한다. 겨우 마인드 콘트롤 정도를 하나님께서 기대하신다고 한다면 예수님을 그저 신기루로 생각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예수님의 실존을 믿는다면 그 분을 신뢰하고 순종함으로 충성된 종이 되어 그 분의 삶을 실천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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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4. 21. 04:05

관상기도 Opinion2011. 4. 21. 04:05

먼저 서두에 밝혀두고 싶은 것은 나는 관상기도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단지 과거 내가 속한 소그룹에서 관상기도에 대한 소개와 간략한 훈련을 경험해 보았었고, 지금 내가 맡고 있는 소그룹에 천주교에서 온 분이 계셔서 그 분에게 큐티에 대해 설명하려고 준비하던 중에 과거 생각이 나서 관상기도를 살펴 보았을 뿐임을 먼저 밝히고 싶다. 따라서 전문적인 글 또는 책임감있는 글은 기대하지 말아주시기를 부탁드린다. 거의 남의 글을 인용하는 수준에서 구성하려고 한다.

나는 관상기도를 옹호하는 사람과 대화를 해 본 일이 없다. 따라서 그들이 진정으로 그 기도를 통해 얻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공정하지 못한 글이 될 수 밖에 없다. 나는 관상기도가 옳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도의 방법은 없다. 오직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이 있을 뿐이다. 관상기도를 말하는 사람들은 기도를 구송기도, 묵상기도 그리고 관상기도로 분류한다. 그리고 최상의 단계를 관상기도라고 하는 듯 하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기도는 성령의 도움으로 하는 거 아닌가? 성령의 도움을 받기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도움을 구하면 도와주실 터인데 우리가 굳이 어떤 훈련을 해야 한다면... 그거 좀 이상하지 않나?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그 많은 말을 신뢰 할 만하게 구사 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냥 의문을 제기하는 데에서 일단 맺겠다. 내가 아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자격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드리신 예수님께서 이제와서 어떤 훈련을 통한 '독특한' 당신으로 다가가기 위한 방법을 옹호하실 것 같지는 않다.

다시 돌아와서 그들이 말하는 관상의 정의를 살펴보자.
관상이라는 말은 원천적으로 플라톤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진·선·미의 궁극적인 이데아 혹은 지고의 실제에 대한 인식과 만남의 목표를 뜻한다. (감신대 안석모 교수, 관상기도, 무조건 이단이라 비판하진 말자)
영지주의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었던 사람이라면 이 정의를 보면서 '어? 영지주의'라고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위에서 말한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이유에 이 정의까지 덧 붙이면 굳이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이상하다. 면벽수행하는 불자들이나 요가를 통해 영적세계를 경험하려고 하는 사람들 등등이 하는 방법과 다른 점을 찾을 수 없다. 방법이 악하다고 목적도 악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예수님은 방법(길)을 오직 예수님 한 분으로 한정 시키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방법들이 궁극적으로 말하는 것은 '내가 신에게 내 힘으로 갈 수 있다'이다. 여기에 성령의 도우심은 찾을 수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관상기도는 불교나 힌두교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심지어 한 선승이 수사들을 상대로 1주일간 수련회를 이끌기까지 했다고 한다. (관상기도 – 진짜 기도인가?)

이 정도 되면 더 이상 논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들이 말하는 '침묵의 영성' (이동원, 박은조 목사가 말하는 관상기도(뉴스앤조이))에는 동의 한다. 그리고 수동적 관상과 능동적 관상으로 분류하여 수동적 관상은 가치가 있다는 말에도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러나 여하간 기도에 특별한 방법이란 없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아는 것이 별로 없으므로 이 정도에서 글은 끝을 내려고 한다. 아래의 링크 중에 '관상(觀想)기도'는 개혁주의 전통에 충실한가에 아주 깔끔하게 문제점이 정리되어 있으니 한 번 살펴봐 주기를 부탁한다.

참고
지지자: 관상기도, 관상기도, 무조건 이단이라 비판하진 말자
반대자: 관상기도 – 진짜 기도인가?, '관상(觀想)기도'는 개혁주의 전통에 충실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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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더 정확한 제목은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우월한 이유' 정도가 되겠다. 이 제목 자체가 상당히 많은 함정을 지니고 있다. 우선 이에 대해 먼저 논해 보자.
  • 우리는 종교인이 아니다. 마음의 위안을 얻자고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종교'에 대해 논할 필요가 없다. 이런 부분이 중요하다면 당신은 종교인이라는 이야기이고, 아직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위치에 대한 자각은 덜 된 셈이다.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의 아들됨을 믿고 있고, 그것이 우리에게는 사실이며 실제이며 진리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들어 낸 교리의 틀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그 교리라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대해서 논하다 보면 글이 산으로 가기 때문에 이 정도에서 멈추도록 하겠다.)
  • 같은 맥락에서 '이유'가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않다. 이유가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나는 이 정도의 말은 알아 들을 수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이 글을 쓰고 있음을 여기에서 밝힌다. 내 글 중에는 믿음안에 없는 사람도 읽을 만한 글도 있지만 지금 쓰는 이 글은 믿음 안에 있으면서 좀 더 확실하기를 바라는 모호한 부분을 알고자 하는 사람을 위해 쓰는 글이다.
  • 그리고 결코 '우월'정도의 약한 이유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절대'이기 때문에 이 믿음 안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환상속에 존재하는 알라딘램프의 지니가 아니다. 실재하시는 나의 구주이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 불필요한 이야기를 한 번 진행해 보고자 한다. 나름대로의 어려움과 이유가 논의 자체의 불필요함 만큼이나 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우월한 이유'라는 제목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미 앞의 글들에서 성경의 무오성은 문자에 있지 않음을 이야기 했다. (2011/02/18 - [Bible Stories] - 야곱의 후손: 성경은 무오한가, 2011/02/18 - [Opinion] - 믿음 그리고 성경) 정확하게 내 생각을 전달하자면 '성경' 자체는 우리 신앙의 도구일 뿐이지 어떤 '신성'시 되는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무오하든 오하든 별 상관 없다. 다만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에는 한 점 실패의 가능성이 없다라는 사실을 믿을 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성경이 그렇게 결함이 많다면 어떻게 읽으며, 그런 불완전한 성경을 가지고 어떻게 다른 종교에 있는 사람들을 전도 할 수 있겠느냐고 질문을 한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상당히 답답한 마음에 질문을 던졌으리라, 그런데 대답을 해야 하는 내 입장도 상당히 답답한 것은 마찬가지다.

먼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깊이 나누다 보면 결국 알게 되는 사실이 있는데 바로 이 들은 내가 더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증명하기 원하고, 그것을 통해 우월성이 증명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것'이 더 좋은 '것'임을 증명하기 원하고 그것을 공격당할 때에 매우 당황스러워 하며, 심지어 분개한다. 마치 성경의 많은 기자들이 악인의 흥함을 보고 분개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하박국 1:13)

먼저 성경의 권위부터 이야기 해 보자. 이 '성경'에 교회 또는 목사 등등을 집어 넣어 '목사의 권위, '교회의 권위'라고 바꿔도 거의 대등하게 이 글에서 논해 보고자 하는 말이 된다. 이 권위라는 말은 원래 권력과 위세를 줄인 말로서 인격을 가진 사람에게나 사용되야 마땅한 용어이다. 그런데 '권위있는 작품'이란 식으로 물건에도 종종 사용이 된다. 이 둘을 잘 구분해서 사용하면 좋은데 종종 왕왕 이 둘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성경이 가장 대표적인데 성경에 권위가 있다는 말을 '권위있는 작품'에서 사용된 뜻으로 사용한다면 아주 적절한 사용이라고 하겠으나, 성경 자체가 어떤 인격체 처럼 존중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식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사람 손으로 쓰여서 사람 손으로 유지 보수 되다가 사람 손으로 편집되어 사람 손으로 번역된 성경에 보기만 해도 죽어야만 하는 (사무엘상 6:19) 하나님이 직접 주신 돌판만큼 성스러운 '권위'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성경을 소중히 여기는 그 조심성 자체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만일 그것을 하나님처럼 여긴다면 좀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더 나아가 성경이 옳기 때문에, 성경이 완벽하기 때문에, 성경이 성스럽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다라고 한다면 진지하게 고민을 해 봐야 하겠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당신의 종교보다 내 좋교가 낫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여기에서 사용된 권위는 뒤에 연결된 말과의 관계속에서 해석해 볼 때에 내가 우려하는 그런 방식의 권위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말하는 다른 종교는 직접적으로는 몰몬교나 여호와의 증인처럼 같은 성경을 보고 있으나 부가 경전 또는 주 경전이 따로 있다든지 아니면 해석상의 아주 큰 차이를 보이는 종교를 이야기 한다. 더더욱이 이후의 대화에서 어차피 완벽하지 않은 성경이라면 몰몬경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데에까지 갔었다. 쉽게 판단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시점에서 '에이 너무 많이 갔네'라고 쉽게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적어도 내 경험상 이 사람은 솔직해서 이렇게 말한 거고, 이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함정에 스스로 빠지는 경우를 많이 보아 왔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한, 이 문단의 첫 질문에서 별 문제점을 못 느끼는 사람들이 대다수 이며,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 중의 대다수도 앞 부분의 질문에 대해서는 타당한 질문으로 생각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면 당신도 이 사람의 후반부의 말을 솔직하기만 하다면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너무 쉽게 판단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질문을 돕기 위해 다음과 같은 말을 덧 붙였다. 성경이 그 완벽성에 대해서 권위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의 등대처럼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마치 왕이 앉는 보좌가 목욕탕 의자보다 화려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왕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누가 왕인 지 확실하게 알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 자체가 너무 많은 허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당사자도 인정했다. 다만 더 좋은 예가 떠오르지 않아서 이런 말을 했을 뿐이다. 어쨌든 이 말은 언듯 그럴 듯 하다. 이 밑에서 이 이야기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다.

말을 너무 길게 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렇게 복잡하게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의 신앙은 성경 위에 서 있지 않다. 우리의 신앙은 반석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서 있다. 우리는 성경이 그럴 듯 해서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믿기 때문에 성경을 보는 것이다. 믿음이 먼저요 그 다음에 실천이며, 그 실천에 필요한 도구들이 있을 따름이다. 그 중 하나가 성경이다. 목사? 교회?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고 싶은가? 믿음이 먼저고 그 다음이 성경, 목사, 교회 등등의 것들이 있을 따름이다. 요즘 교회가 시끄럽다. 성추행 사건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믿을 수 없는가? 그렇다면 믿지 않도록 하라. 내가 여호수아의 말을 여기에서 하고 싶다. 예수님이 믿을만 하지 않게 보이거든 믿지 말라. 그러나 나는 믿을 것이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여호수아 24:15)
이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히브리서 기자는 자그만치 23번이나 '믿음으로'를 강조하고 강조한다. 믿음이 먼저 있었고 그 이후에 여러가지 방법을 통한 실천이 있었다. 믿음으로부터 시작하여 믿음으로 끝나는 것이 우리 신앙이다. 믿을만 해서 믿게 되는 것이 아니다. 나도 정말 간절히 말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믿을만한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 믿으니 영광을 보게 되는 것이다. 보좌 이야기가 나왔었다. 하나님이 이 부분에 있어서 얼마나 불친절 하신 지 여기에서 이야기 해 보자. 예수님이 왕가에서 태어났는가? 유명한 집안에서? 전통있는 마을에서? 예수님은 말 구유에서 태어나셨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는 겨우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누가복음 2:12)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마가복음 11:7)
심지어 이사야에 보면 예수님은 흠모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었다. 심지어 그의 고난을 보며 넌 당해도 싸다고 했다. 믿을만해서 믿는가?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너무 안타깝게도 이 함정에서 사람들이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사야 53:2-4)
이 글의 제목이 다른 종교 (이단 또는 사이비)와의 비교라도 했다. 믿을만 한 것은 다른 종교에 더 많다. 그러니 믿을만 한 것을 찾는 것이 당신의 목표라면 다른 종교로 가 보라. 우리는 멋있지 않더라도 나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어 주신 그 실존하시는 예수님을 믿을 것이다.

그러면 다시 그러면 왜 믿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그 실존 때문에 믿는다고 아무리 피를 토하며 외쳐도 '그런데 그럼 왜 믿어?'라고 묻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이 멸망 할 때 까지 있을 것이다. 나도 계속 한 말 만을 할 것이다. 믿기 때문에 믿는 거고 나에게는 예수님이 실존이기 때문에 사실을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 없으니 믿을 수 밖에 없다고 말 할 것이다. 바울이 감옥에서 찬송을 했다. 그랬더니 지진이 일어나서 감옥문이 열렸다. 스스로 질문해 보라. 바울은 왜 찬송을 했을까? 찬송을 하면 감옥에서 나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어서? 찬송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바울과 실라는 많이 맞은 후에 결박당하여 감옥에 앉아 있으면서 찬송을 했다. 이들의 믿음이 이해가 가는가? 나는 이해는 되는데 납득도 안되고 동일한 신앙의 표현을 할 자신이 전혀 없다. 다만 이해에 근거해서 이야기 해 보겠다. 이들의 신앙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그 신앙이다. 이들은 좋지 않은 현실에서 더 나아질 기미도 없지만 찬송을 했다. 왜? 기쁘니까, 즐거우니까, 그리고 하나님을 예수님을 사랑하니까, 나를 감옥에 가두신 예수님께 감사하니까 찬양한 것이다.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사도행전 16:23-26)
일찍이 다니엘의 세 친구도 같은 신앙을 보여줬다. 풀무불에 던져질 상황에서 능히 건져내실 하나님을 증거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그리 당당했나?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상관없었다. 그들은 정말 상관 없었다. 하나님이 금신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실재였기 때문에 이러나 저러나 상관 없었다. 그저 믿음을 지킬 뿐이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다니엘 3:16-18)
여기까지 말했는 데도 믿을 만한 것을 구하는가? 내가 하나 더 이야기 하고 이 글을 맺겠다. '믿을 만한 것'을 구하는 당신은 당신이 '구원받을 만 하여' 구원받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거부감이 느껴 질 지도 모르겠다. 그러며 문장을 조금 바꾸겠다.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살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어'라고 생각 할 것이다. 아직도 거부감이 느껴지나? 그러면 조금 더 바꾸어 보겠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지 않으면 잘리게 될거야. 그래서 불에 태워 지겠지.' 물론 이 방향으로 글을 써도 한참을 써야 한다. 그 글은 다음으로 미루고, 간단하게 이야기 하자. 내가 뭔가 해야 또는 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마음 깊은 곳의 사탄의 속삭임이 당신에게 다른 식으로 표현 된 것이 믿을 만 하여 믿는다는 마음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정돈된 생활 몰몬교도의 친절함에 대비되는 기독교도의 더러움을 본 당신이 느끼는 좌절 나도 안다. 깊이 공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실재를 버리고 허상을 잡을 수는 없다. 믿음외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도 그들보다 더 우월하길 원하는 맘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그런 시도는 절대 성공할 리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 아빠가 더 힘쎄'라고 하는 유치한 어린 아이 싸움에 동참하여 싸워 주시는 분은 아니다. 물론 그러실 때도 있으시긴 하겠지만 (필요한 경우가 있긴 있으니까) 항상 그러시리라고 기대하지 말라. 더구나 당신이 신앙생활 오래 했다면 절대 기대하지 말라. 30먹은 아들이 60먹은 울 아빠가 너네 아빠보다 더 쎄라고 싸우고 있으면 거참... 뭐라 해야 할 지...

예수님은 목욕탕 의자에 앉아 계셔도 예수님이며, 그 분은 목욕탕 의자에 앉아서 '요놈이 날 알아보나 보자'라고 쪼잔하게 우리를 시험하시지도 않으신다. 내가 믿는 그리고 내가 아는 예수님은 가장 높은 보좌에서 필요 할 때엔 가장 낮은 곳 까지 오시기도 하시며, 내가 원할 때에 그리고 필요 할 때에는 언제든지 당신을 내게 드러내신다. '내가 여기있다 내 아들아 내가 너를 잘 안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분이 내가 알고 믿는 예수님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있어서 다른 종교와의 비교는 너무 너무 무의미하다. 처음부터 질문부터 잘 못 됐다. 제목부터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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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3. 1. 16:11

참고서적: 주석성경과 그 외 서적들 Opinion2011. 3. 1. 16:11

나는 개인적으로 원전 이외의 것을 싫어하는 편이다. 물론 성경에 관해서 어떤 것을 원전으로 삼을 것이냐는 민감하기도 하고 쉽게 다루기도 어렵기 때문에 나는 여기에서 간단히 '성경'을 원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겠다. 어떤 역본이든 어떤 언어로 적혀 있든 간에 성경을 원전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외의 모든 강해서는 원전은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그런 서적들은 대체 몇 단계를 거친 저작물인지 알 방법이 없다. 참고서적을 참고한 책을 참고한 서적을 가지고 연구하고 싶지는 않다.

이런 이유로 나는 원전인 성경을 보는 데에 주력한다. 그리고 여러 가지 주석들을 본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는 주석성경(Study Bible)은 당연하겠지만 성경이 병기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거의 모든 종류의 주석성경은 관주를 제공한다. 사실상 이것이 내가 참고하는 거의 전부라고 볼 수 있다.
간단하게 현재 참고하고 있는 성경들과 참고서적들을 열거해 보겠다.

1. NKJV Study Bible
2011/12/08 - [분류 전체보기] - NKJV Study Bible 참고


2. NIV Study Bible
이 성경의 주석은 딱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고고학적 발견과 학계의 여러 가지 의견을 알려주는 측면에서는 점수를 줄 수 있으나, 딱히 주석에서의 철학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충실하지도 않다. 번역 자체는 NIV와 이후에 언급할 NASB가 가장 차분하고 중도적인 것 같다.
한국에서 나오는 홀리원 주석성경이 바로 이 성경을 번역한 것인데, 내가 보면서 실망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의견이 별로 없고 다들 톰슨성경의 대항마로서 충분 또는 뛰어나다는 칭찬 일색인 것이 좀 의아하긴 하다.

3. Life Application Study BIble NIV
이 주석은 QT하는 데에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그래서 전문적인 깊이는 부족한 편이고, 어떤 때는 은혜롭게 만들기 위해 너무 억지를 부린 듯한 인상도 받는다. 그러나 큰 장점은 풍부한 지도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성경들은 중요한 지도 하나 그려 넣고 계속 앞뒤로 살펴가면서 확인해야 하는데 이 주석성경에서는 필요한 곳 마다 지도를 계속 반복해서 넣어 주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 지리상의 위치를 확인하는 데에 상당한 도움을 준다. 이 부분 만으로도 높은 점수를 줄 만 하다.

4. The MacArthur Study Bible NASB
번역도 주석도 무난하다. 아주 차분하다. 특징이 별로 없어서 쓸 말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추천 할 만한 성경이다.

참고: 2013/09/06 - [Opinion] - NASB MacArthur Study Bible

5. ESV Study Bible
2011/12/08 - [Opinion] - ESV Study Bible 참고


6. Life Application Study Bible NLT
현재는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주어서 가지고 있지 않다. 주석은 'Life Application Study BIble NIV' 와 같다. 다만 번역만 NLT인 성경인데, 이 NLT는 참으로 특징적인 성경이다. 먼저 매우 쉬운 번역본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민수기의 지루한 사람숫자 나열을 그냥 표로 만들어서 전달해 준다. 이런 식으로 파격적인 번역을 했기 때문에 읽기에 아주 편하다. 특히 사해사본에 부가적으로 더 나오는 부분도 따로 병기를 해 주기 때문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너무 쉽다는 것이 양날의 검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얕은 깊이가 그것이다. NKJV의 경우에는 직역을 기본 정책으로 하고 있다. 어떤 경우 번역이 힘든 경우도 있고 의미가 모호 할 수도 있는데 그런 경우 해석을 독자에게 맡기고 있다. 따라서 읽는 사람이 노력을 기울여 읽어야 한다. 그런데 NLT는 그런 경우 역자가 해석을 해서 역자가 선택한 해석 방법을 따라 쉽게 풀어 기록했다. 따라서 독자가 생각할 여지가 그 만큼 적다. 나는 이것도 저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굳이 선택하라면 난 NKJV의 번역 철학에 동의한다.

7. New Illustrated Bible Dictionary
재미있고 충분히 소장하고 있을 만한 가치가 있는 도서이다.

특히 이 책의 저자가 Ronald F. Youngblood라는 사람인데,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사람이 바로 NIV, NIrV, TNIV의 번역 팀에 있었던 사람이며, 위의 NIV Study Bible의 Associate Editor이기도 하다. 정확히 확인한 바는 아니지만, 다행히 2011년에 새로 번역된 NIV의 번역에는 관여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새로 번역된 NIV에 대해서는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여하간, 나는 책의 저자를 상당히 신경쓰는 편인데, 그 면에서는 안심하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내가2011/02/25 - [Opinion] - 성경연구에서도 언급했던 것과 같이, 성경연구에 관한 한 전문가라 주장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조심하지 않으면 말도 안된는 글을 읽고 영향받기 쉽기 때문이다.

8. Bible Chars, Maps & Time Lines
차트가 필요하면 차트만 정리된 책을 사고 지도가 필요하면 지도만 정리된 책을 권한다. 이 책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용이 많긴 한데 필요한 내용은 별로 없는 책이다.

9. Josephus: The Complete Works
10. Eusebius: The Church History
이 두권의 책은 역사적인 사료로서 상당한 가치를 지닌 책이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한 책인데 불행히도 한국어로 번역된 책은 없는 것 같다. 있다 해도 분량에 비해 턱없이 비싼 책 밖에 없으며, 번역이 잘 되어 있는 지 확인 할 방법도 없다. 영어로 읽는 데에 부담이 없는 사람이라면 읽어보기를 권한다.

11. 톰슨성경
이 책은 이미 절판 되었다. 여전히 톰슨2 성경주석이라는 이름으로 성경 본문 없는 성경주석이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상한 형태로 유지되고 있을 뿐, 절판된 책이다. 이 주석은 아마 The Thompson Chain-Reference Study Bible을 번역하고 다른 내용을 추가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톰슨2로 넘어가면서 대대적으로 개정되어 The Thompson Chain-Reference Study Bible의 흔적이 거의 사라져 버린다. The Thompson Chain-Reference Study Bible자체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매우 초기 형태의 주석성경이었고, 그 자체가 매우 뛰어난 시스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톰슨 성경 또한 매우 좋은 성경연구의 도구 역할을 한다. 톰슨2는 개인적으로 살펴보지 못해서 의견을 말하기 힘드나, 보지 않은 상태에서 무책임하게 말하자면 난 톰슨성경이 톰슨2보다 좋다.

12. 일년일독 통독성경
아버지가 읽고 있던 것을 거의 강탈해서 가지고 있는 성경이다. 내용을 떠나 성경이 참 이쁘다. 글자체도 좋고 간결한 설명도 좋다. 물론 설명이 깊이가 깊은 것도 아니고 풍부한 것도 아니다. 제한되어 있는 공간 내에서 쓰인 것의 한계는 너무 명확하다. 더구나 이 성경도 일종의 연대기 성경인데, 별로 그 순서가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어쨌든 시간 순서로 읽는 방법의 의의에는 동의하며, 들고 다니면서 읽기에 딱 좋은 크기와 디자인을 가지고 있으므로 구입을 권하고 싶다. 보기 좋아야 더 많이 읽는 법이다.

13. The Thompson Chain-Reference Study Bible
생일선물로 들어온 성경인데, 현제 나오는 버젼을 아니고 1934년 판이다. 이 이전에 1908, 1917, 1929년판이 있었으니, 대충 4판 정도 되는 성경이다. 보관 상태는 아주 깨끗하며 그저 오래된 책 특유의 냄새가 날 뿐이다. KJV인데, 과연 내가 이 성경을 읽게 될 지 모르겠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아까워서도 못 읽을 것 같다.

현재 이 정도의 자료들을 참고해 가면서 성경을 보고 있다. 더 정확하게는 역본들을 돌려가면서 보고 있다. 이거 끝나면 저거 보는 식으로 보고 있는데, 중간 중간에 한글 성경을 보고 있다. 아무래도 다른 역본으로 보다 보니 입에 잘 붙지를 않아서 어느 순간 아주 간단한 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미국에 살고 있고 또 영어로 성경을 읽는 데에 딱히 큰 어려움이 없는 것에 감사할 때가 종종 있다. 나는 시장의 차이라고 보는데 아무래도 한국은 시장이 작다 보니 독자적인 주석 성경이 나오지 않고 있다. 톰슨, 레노바레, 홀리원등 모든 주석성경이 일종의 번역본이다. 물론 톰슨은 원본에 많은 변화를 주어서 이제 정말 그것을 참고했었는 지도 애매할 만큼 변하긴 했지만 그래도 시작은 번역이었다. 여하간 앞에서도 말을 했었지만 여러 역본 여러 주석을 참고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 너무 한 번역에만 그리고 한 주석에만 얽매이지 않았으면 하고 더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깨달음이다. 어차피 다 사람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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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통계적으로 무의미한 데이터를 가지고 통계적인 의미를 뽑아내는 경우

뉴스자료를 보면 통계자료에 근거한 많은 정보가 들어있다. 그런데 그 내용을 해석함에 있어서 전문적인 지식이 없다 보니 엉뚱하게 해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즉, 거의 의미 없는 내용을 (쓰는 사람도 모르고 썼을 가능성이 있다) 굳게 맹신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중요한 내용을 무시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내용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먼저 통계수치가 의미가 있으려면 그 결과과 랜덤 테스트(Random Test)에 의한 결과여야 한다. 그러나 랜덤 테스트라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오차를 줄이기 위한 기술이 연구되어 왔고 그런 기술이 사용된다. 자 일단 아주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서울 대학병원의 폐암 환자를 조사한 결과 70%의 환자가 흡연자로 드러났다. 그러므로 담배는 폐암의 원인이다.

이 말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아무 정보도 담고 있지 않다. 이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서울 대학병원에 입원한 폐암 환자의 70%가 흡연자'이다라는 것, 그것 뿐이다. 예를 들어 서울이라는 도시에 사는 인구의 평균 흡연율이 70%라면 폐암 환자의 70%가 흡연자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아~ 이사람들도 일반적인 서울 인구와 같은 통계적 특성을 가지고 있구나'라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연구를 의미있기 만들기 위해서는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테스트를 해야 한다. 서울에 사는 비흡연가 중에 '무작위'로 1,000명을 선택해서 그 중에 '무작위'로 500명은 흡연을 시키고 나머지는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한 다음에 폐암 발생율을 조사해야 한다. 물론 이런 실험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불가능하다. 더구나 위와 같이 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서울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통계자료가 된다. 전 세계적으로 통하게 만들려면 그 1,000명을 전 세계에서 택해야 한다. 물론 사람이 많으면 많을 수록 '신뢰도'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자 아주 피부에 와 닿는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운동을 하는 사람이 건강하다.

이거 정말 민감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운동을 하는 사람이 건강한가? 아무도 모른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역시 랜덤 테스트가 필요한다. 전 세계에서 무작위로 몇명을 선택해서 그 중 무작위로 다시 몇 명을 추려 규칙적인 운동을 시키고 나머지는 운동을 못 하게 한 다음에 그 이후 인생을 조사해야 대답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건강한 사람이 운동하길 좋아한다'라는 결론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경우 조금 다른 방식의 테스트가 가능한데, 건강한 사람과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운동 상태를 조사해서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는 차이가 발견된다면 어쨌든 '운동이 건강과 관계가 있다는 증거가 있다'라는 정도는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관계라는 것이 운동해서 건강해진다는 관계인지 건강해서 운동한다는 관계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사람이 운동을 한다면 억지로 운동을 해서 건강한 척이라도 하고 싶을 수도 있고, 아무래도 상식적으로 생각 할 때에 운동하면 건강해 질 것 같고 (슬프게도 운동해서 건강을 해친다는 연구도 생각보다 많다), 더구나 운동과 건강 사이에 관계가 있다는 증거도 있으니, 나는 운동하면 건강해 진다고 믿겠다라고 한다면 그것도 감히 '과학적이지 않다'라고 말 할 수는 없다. 모두가 인정 또는 인정 가능한 가설이 있는 경우 완벽하지 않은 증거를 통해 특별한 결과를 도출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런 것을 관찰연구(Observational Study)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교육열에 일조한 다음 문장을 보자.

강남 8학군에서 서울대를 많이 들어갑니다.

이 사실 때문에 한 때 (지금도 그럴 지도 모르지만) 그 동네 땅 값이 오르고 거기로 전학만 가면 서울대 가는 줄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전교생의 1/3이 서울대에 들어가는 고등학교로 내 자식을 전학 시키면 서울대 갈 확률이 1/3이 되는 줄 아는 비범한 부모들이 상당히 많다. 심지어 그 중에는 공부를 많이 한 부모들도 있는데, 참 웃기는 것이 통계적인 데이터는 배운 사람들도 쉽게 속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강남 8학군에 서울대를 갈 만큼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 많았기 때문에 결과가 그렇게 났었던 것 뿐이다.

통계 데이터의 해석을 엉뚱하게 하는 경우

여기까지는 통계적으로 의미 없는 사실에서 잘못된 추론을 하는 예를 들어 보았다. 예를 들자면 끝이 없고 '과학'면의 기사들을 지금 당장 검색해도 어처구니 없는 자료와 그에 대한 해석은 수도 없이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섣불리 그런 것들을 건드렸다가 어떤 일을 당할 지 몰라 실제 기사를 이용한 글을 쓰지 않으려 한다.

다음으로 통계수치에는 문제가 없는데 그것의 해석과 적용에 문제가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겠다. 일단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알고 있기로 자동차의 타이밍 벨트를 교체하면 6~8만 마일을 간다고 알고 있다. 그러면 그 권장 마일리지를 넘어가면 타이밍 벨트가 끊어질까? 나는 실험을 해 보지는 않았지만 두배 이상은 갈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두 배 정도를 탔던 적은 있다. 그러면 여기에서 분명히 음모론을 끄집어 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또는 그런 경향을 띤 사람을 적어도 한 둘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죄송하지만 무식해서 하는 소리다.
만약 일정 수준의 퀄리티 콘드롤을 합격한 타이밍 벨트들의 수명을 도표로 그리면 가우시안 곡선을 그릴 것이다. 그 가우시안의 가장 높은 위치의 마일리지가 타이밍 벨트들의 평균 수명이 될 것이다. 그러면 타이밍 벨트의 교체시기를 정할 때에 그 평균값을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절대로 그러면 안된다. 만약 그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당신의 타이밍 벨트가 교체시기가 되기 전에 끊어질 확률이 50%인데 그래도 타겠냐라고 질문을 하고 싶다. 즉, 다시 말해, 교체시기를 정할 때에는 나름의 판단 기준이 필요하다. 내가 장담하는데 타이밍 벨트들의 평균 수명은 6~8만 마일보다 훨씬 길 것이다.
그러면 왜 그 보다 짧게 정하는가. 여기서 부터 비용(Cost)의 문제가 붙는다. 아직 쓸만한 타이밍 벨트를 교체하는 데에 들어가는 비용은 대충 수백불에서 일천불이 넘어가기도 한다. 쓸만하다고 믿고 타다가 끊어졌을 때의 비용은 아마 폐차일 것이다. 엔진을 교체한다고 하면 수천불은 그냥 날아갈 것이다. 더구나 돈 만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사고로 연결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즉, 이 경우에 비용의 차이가 너무 크다. 즉, 문제 없으리라고 믿고 타다가 문제가 생겼을 경우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쓸만한 타이밍 벨트를 교체 했을 경우 지불해야 하는 비용에 비해서 몇 배 또는 계산 불가능 할 정도로 높다. 이럴 경우 절대 평균 수명을 교체 시기로 정할 수는 없게 된다.
아직도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수명을 1만마일이라고 제조자가 말한다면 어떤 문제가 생기겠나? 99.99999999%의 타이밍 벨트가 1만마일만에 끊어지진 않는다고 하자. 결국 쓸데없는 낭비가 너무 심하게 된다. 이런 상황 하에서 즉, 너무 짧게 하면 낭비가 심하고 실질 평균 수명에 가깝게 하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 하에서 절충선이 6~8만마일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나만 더 보자. 美 고혈압 기준 국내 적용 '성인 50%만 혈압 정상'이라는 기사가 있었다. 이 글의 요지는 고혈압이 기존 140부터 였는데 미국 NIH에서 이 기준을 120으로 바꾸자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 글을 보면서 역시 음모론을 들고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이 역시 음모론으로 몰고 가면 안된다. 난 관계인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기준에서 정해졌는 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적어도 '온 국민의 50%를 비정상으로 만드는 기준이 정상적인 기준일까요?'라고 감정적으로 말하면 안된다. 이런 감정적인 유도에 사람들이 쉽게 넘어가고는 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말하는 사람이 어느 정도 사람들이 믿을 만한 뒷 배경을 가지고 있다면, 공부를 많이 했다든지 또는 의사라면, 그 파급 효과가 상당히 커지게 된다.
이 문제 역시 고혈압이 아닌 사람을 고혈압 환자로 판단했을 때의 비용과 고혈압인데 아니라고 판단했을 때의 비용의 차이가 기준점의 선택 이유가 된다. 참고로 개인마다 고혈압의 판단 기준은 달라 질 수 있다. 즉, 어떤 사람은 혈압이 100만 되도 고혈압의 위험에 노출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160이어도 고혈압의 위험과는 관계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만약 NIH의 연구 결과 거의 모든 질병의 원인이 고혈압이라면 좀 그 기준점을 당길 수도 있는 문제이다.
이 부분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은 혹 질문을 할 수는 있겠다. 그런데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 사람이 음모론을 제기하면 안된다. 파급효과를 생각해야 하며, 그렇게 해서 문제가 생길 시에 비용이 종종 왕왕 생명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 당신이 공부좀 한 사람이라면 특히 입조심을 하라고 말하고 싶다.

미국에서는 애들 예방접종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방접종 때문에 죽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란다. 더구나 그에 대한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의사들도 상당수 끼어 있다. 역시 난 이쪽 분야에 있지 않기 때문에 사실 관계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거의 확실히 (앞에서는 장담한다는 표현을 했음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즉, 그 보다는 자신이 없다.) 말하건데 예방 주사를 맞히지 않아서 아이에게 문제가 생길 확률이 맞혀서 생길 확률보다 훨씬 클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배경 지식을 근거로 제발 허위 과학(Pseudo Science)를 믿지 말기를 권한다. 누군가 말한다. 난 웃기만 했더니 암이 낳았어요. 난 쓴 뿌리만 골라서 갈아 마셨더니 암이 다 나았어요. 그런데 항암치료 받던 내 친구는 얼마전에 죽었어요. 특히 대체의학 쪽에 이런 이야기가 상당히 많다. 항상 예외라는 것이 존재한다. 선전되는 것은 그 예외들이다. 그 예외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조용하다. 실망했든가 죽었든가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주변에 보면 정말 간단하게 엄청난 질병을 고친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다. 심지어 마치 독립투사인 양 그것의 전파를 위해 '운동' 비스무리한 것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만약 그들의 방법이 정말 성공적이라면 그들은 분명히 노벨의학상을 받을 것이고 큰 병원들은 전부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그런 허위 과학에 속아 치료시기를 놓지는 우는 절대 범하지 말아야 한다.

통계는 생각보다 배우기 어렵다. 그런데 통계적인 사고방식은 생각보다 쉽게 배울 수 있다. 모든 일은 확률 놀음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 통계적인 사고 방식을 가질 필요가 있으며, 통계적으로 의미 없는 유혹에서 자유로워 질 필요가 있다. 이 글이 거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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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