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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2. 19. 08:42

믿음 그리고 성경 Novels or Essays2011. 2. 19. 08:42

성경을 왜 읽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직접적으로는 그 질문 때문에 쓰게 되었는데, 다른 이야기를 위해서도 일단 이 글이 필요 할 것 같아서 적는 이유도 있다.

나는 성경이 무오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오하다. 그러나 성경은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의 손으로 전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무오성을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다면 원본이 남아 있어야 한다. 물론 원본이 남아 있었다면 그것이 우상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오류 투성이인 성경을 가지고도 전쟁이 나기도 하는 세상인데 원본이 남아있다는 상상은 하기 조차도 무섭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본을 다 없애 버리고 사본만 남아 전해 지도록 했으며, 그 사본 들에는 어쩔 수 없는 오류가 개입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을 이야기 하자면 할 이야기가 참으로 많으나 너무 민감한 이야기이고 이 부분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강요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이 정도만 하도록 하겠다.

이 이외에도 입이 근질 거리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을 하면 정말 문제가 많을 것 같아서 꾹 참도록 하겠다.

그러면 오류가 있는 성경을 왜 읽느냐라고 정확히는 내 아내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목회자도 아니고 교회 관련 일을 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하루에 대충 1시간 가까이 성경을 보고 연구한다. 웃긴 이야기 일 지 모르겠는데, 난 두꺼운 책을 좋아한다. 읽어도 읽어도 끝이 나지 않는 책을 참 좋아한다. 물론 내가 그 내용의 가치를 인정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정말 재미있는 소설을 읽는데 금방 끝나면 안타깝지 않겠는가. 그런 심정이다. 그리고 난 성경이 참 재미있다. 재미있으니 되도록 길었으면 좋겠는데 성경은 충분히 길다. 그래서 좋아한다.
집에 여러 버젼의 성경이 있다. 그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보는 나에게 아내가 왜 읽냐고 묻는다. 더구나 성경에 나타난 오류들을 내가 설명해 주니 더더욱이 그렇게 틀린 글을 왜 읽냐고 묻는다. 물론 아내도 기독교인인데 성경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고 싶어하는 지극히 평범한 기독교인이다.

대답해 보겠다.
일단 성경은 믿어져서 보는 것이 아니고 믿기 때문에 보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을 성경을 통해서 알려 주시겠다고 직간접적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취를 찾기 위해서 읽는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어떤 이유로인해 성경이 다 소실되고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하... 사... 이니라'밖에 남지 않았다 치자. 난 그렇다면 겨우 그 5글자 만으로도 하나님께서 인류에서 하시고 싶은 말씀을 다 하실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게 나의 믿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 성경에 오류가 있건 없건 신경쓰지 않는다. 그리고 오류가 없기를 바라지도 않고 오류가 없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볼 뿐이다.

그리고 난 되도록 내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성경의 문자에 집중하지 않기를 권하고 가르치고 싶다.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에 집중해야지 맥 빠지게 문자에 얽매이고, 틀리지 않았을 거라고 믿고, 성경을 우상화 하다가 뭐 하나 걸리면 넘어져 버리는 약한 신앙을 갖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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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통계적으로 무의미한 데이터를 가지고 통계적인 의미를 뽑아내는 경우

뉴스자료를 보면 통계자료에 근거한 많은 정보가 들어있다. 그런데 그 내용을 해석함에 있어서 전문적인 지식이 없다 보니 엉뚱하게 해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즉, 거의 의미 없는 내용을 (쓰는 사람도 모르고 썼을 가능성이 있다) 굳게 맹신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중요한 내용을 무시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내용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먼저 통계수치가 의미가 있으려면 그 결과과 랜덤 테스트(Random Test)에 의한 결과여야 한다. 그러나 랜덤 테스트라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오차를 줄이기 위한 기술이 연구되어 왔고 그런 기술이 사용된다. 자 일단 아주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서울 대학병원의 폐암 환자를 조사한 결과 70%의 환자가 흡연자로 드러났다. 그러므로 담배는 폐암의 원인이다.

이 말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아무 정보도 담고 있지 않다. 이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서울 대학병원에 입원한 폐암 환자의 70%가 흡연자'이다라는 것, 그것 뿐이다. 예를 들어 서울이라는 도시에 사는 인구의 평균 흡연율이 70%라면 폐암 환자의 70%가 흡연자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아~ 이사람들도 일반적인 서울 인구와 같은 통계적 특성을 가지고 있구나'라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연구를 의미있기 만들기 위해서는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테스트를 해야 한다. 서울에 사는 비흡연가 중에 '무작위'로 1,000명을 선택해서 그 중에 '무작위'로 500명은 흡연을 시키고 나머지는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한 다음에 폐암 발생율을 조사해야 한다. 물론 이런 실험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불가능하다. 더구나 위와 같이 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서울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통계자료가 된다. 전 세계적으로 통하게 만들려면 그 1,000명을 전 세계에서 택해야 한다. 물론 사람이 많으면 많을 수록 '신뢰도'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자 아주 피부에 와 닿는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운동을 하는 사람이 건강하다.

이거 정말 민감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운동을 하는 사람이 건강한가? 아무도 모른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역시 랜덤 테스트가 필요한다. 전 세계에서 무작위로 몇명을 선택해서 그 중 무작위로 다시 몇 명을 추려 규칙적인 운동을 시키고 나머지는 운동을 못 하게 한 다음에 그 이후 인생을 조사해야 대답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건강한 사람이 운동하길 좋아한다'라는 결론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경우 조금 다른 방식의 테스트가 가능한데, 건강한 사람과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운동 상태를 조사해서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는 차이가 발견된다면 어쨌든 '운동이 건강과 관계가 있다는 증거가 있다'라는 정도는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관계라는 것이 운동해서 건강해진다는 관계인지 건강해서 운동한다는 관계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사람이 운동을 한다면 억지로 운동을 해서 건강한 척이라도 하고 싶을 수도 있고, 아무래도 상식적으로 생각 할 때에 운동하면 건강해 질 것 같고 (슬프게도 운동해서 건강을 해친다는 연구도 생각보다 많다), 더구나 운동과 건강 사이에 관계가 있다는 증거도 있으니, 나는 운동하면 건강해 진다고 믿겠다라고 한다면 그것도 감히 '과학적이지 않다'라고 말 할 수는 없다. 모두가 인정 또는 인정 가능한 가설이 있는 경우 완벽하지 않은 증거를 통해 특별한 결과를 도출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런 것을 관찰연구(Observational Study)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교육열에 일조한 다음 문장을 보자.

강남 8학군에서 서울대를 많이 들어갑니다.

이 사실 때문에 한 때 (지금도 그럴 지도 모르지만) 그 동네 땅 값이 오르고 거기로 전학만 가면 서울대 가는 줄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전교생의 1/3이 서울대에 들어가는 고등학교로 내 자식을 전학 시키면 서울대 갈 확률이 1/3이 되는 줄 아는 비범한 부모들이 상당히 많다. 심지어 그 중에는 공부를 많이 한 부모들도 있는데, 참 웃기는 것이 통계적인 데이터는 배운 사람들도 쉽게 속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강남 8학군에 서울대를 갈 만큼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 많았기 때문에 결과가 그렇게 났었던 것 뿐이다.

통계 데이터의 해석을 엉뚱하게 하는 경우

여기까지는 통계적으로 의미 없는 사실에서 잘못된 추론을 하는 예를 들어 보았다. 예를 들자면 끝이 없고 '과학'면의 기사들을 지금 당장 검색해도 어처구니 없는 자료와 그에 대한 해석은 수도 없이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섣불리 그런 것들을 건드렸다가 어떤 일을 당할 지 몰라 실제 기사를 이용한 글을 쓰지 않으려 한다.

다음으로 통계수치에는 문제가 없는데 그것의 해석과 적용에 문제가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겠다. 일단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알고 있기로 자동차의 타이밍 벨트를 교체하면 6~8만 마일을 간다고 알고 있다. 그러면 그 권장 마일리지를 넘어가면 타이밍 벨트가 끊어질까? 나는 실험을 해 보지는 않았지만 두배 이상은 갈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두 배 정도를 탔던 적은 있다. 그러면 여기에서 분명히 음모론을 끄집어 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또는 그런 경향을 띤 사람을 적어도 한 둘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죄송하지만 무식해서 하는 소리다.
만약 일정 수준의 퀄리티 콘드롤을 합격한 타이밍 벨트들의 수명을 도표로 그리면 가우시안 곡선을 그릴 것이다. 그 가우시안의 가장 높은 위치의 마일리지가 타이밍 벨트들의 평균 수명이 될 것이다. 그러면 타이밍 벨트의 교체시기를 정할 때에 그 평균값을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절대로 그러면 안된다. 만약 그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당신의 타이밍 벨트가 교체시기가 되기 전에 끊어질 확률이 50%인데 그래도 타겠냐라고 질문을 하고 싶다. 즉, 다시 말해, 교체시기를 정할 때에는 나름의 판단 기준이 필요하다. 내가 장담하는데 타이밍 벨트들의 평균 수명은 6~8만 마일보다 훨씬 길 것이다.
그러면 왜 그 보다 짧게 정하는가. 여기서 부터 비용(Cost)의 문제가 붙는다. 아직 쓸만한 타이밍 벨트를 교체하는 데에 들어가는 비용은 대충 수백불에서 일천불이 넘어가기도 한다. 쓸만하다고 믿고 타다가 끊어졌을 때의 비용은 아마 폐차일 것이다. 엔진을 교체한다고 하면 수천불은 그냥 날아갈 것이다. 더구나 돈 만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사고로 연결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즉, 이 경우에 비용의 차이가 너무 크다. 즉, 문제 없으리라고 믿고 타다가 문제가 생겼을 경우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쓸만한 타이밍 벨트를 교체 했을 경우 지불해야 하는 비용에 비해서 몇 배 또는 계산 불가능 할 정도로 높다. 이럴 경우 절대 평균 수명을 교체 시기로 정할 수는 없게 된다.
아직도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수명을 1만마일이라고 제조자가 말한다면 어떤 문제가 생기겠나? 99.99999999%의 타이밍 벨트가 1만마일만에 끊어지진 않는다고 하자. 결국 쓸데없는 낭비가 너무 심하게 된다. 이런 상황 하에서 즉, 너무 짧게 하면 낭비가 심하고 실질 평균 수명에 가깝게 하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 하에서 절충선이 6~8만마일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나만 더 보자. 美 고혈압 기준 국내 적용 '성인 50%만 혈압 정상'이라는 기사가 있었다. 이 글의 요지는 고혈압이 기존 140부터 였는데 미국 NIH에서 이 기준을 120으로 바꾸자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 글을 보면서 역시 음모론을 들고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이 역시 음모론으로 몰고 가면 안된다. 난 관계인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기준에서 정해졌는 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적어도 '온 국민의 50%를 비정상으로 만드는 기준이 정상적인 기준일까요?'라고 감정적으로 말하면 안된다. 이런 감정적인 유도에 사람들이 쉽게 넘어가고는 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말하는 사람이 어느 정도 사람들이 믿을 만한 뒷 배경을 가지고 있다면, 공부를 많이 했다든지 또는 의사라면, 그 파급 효과가 상당히 커지게 된다.
이 문제 역시 고혈압이 아닌 사람을 고혈압 환자로 판단했을 때의 비용과 고혈압인데 아니라고 판단했을 때의 비용의 차이가 기준점의 선택 이유가 된다. 참고로 개인마다 고혈압의 판단 기준은 달라 질 수 있다. 즉, 어떤 사람은 혈압이 100만 되도 고혈압의 위험에 노출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160이어도 고혈압의 위험과는 관계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만약 NIH의 연구 결과 거의 모든 질병의 원인이 고혈압이라면 좀 그 기준점을 당길 수도 있는 문제이다.
이 부분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은 혹 질문을 할 수는 있겠다. 그런데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 사람이 음모론을 제기하면 안된다. 파급효과를 생각해야 하며, 그렇게 해서 문제가 생길 시에 비용이 종종 왕왕 생명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 당신이 공부좀 한 사람이라면 특히 입조심을 하라고 말하고 싶다.

미국에서는 애들 예방접종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방접종 때문에 죽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란다. 더구나 그에 대한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의사들도 상당수 끼어 있다. 역시 난 이쪽 분야에 있지 않기 때문에 사실 관계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거의 확실히 (앞에서는 장담한다는 표현을 했음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즉, 그 보다는 자신이 없다.) 말하건데 예방 주사를 맞히지 않아서 아이에게 문제가 생길 확률이 맞혀서 생길 확률보다 훨씬 클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배경 지식을 근거로 제발 허위 과학(Pseudo Science)를 믿지 말기를 권한다. 누군가 말한다. 난 웃기만 했더니 암이 낳았어요. 난 쓴 뿌리만 골라서 갈아 마셨더니 암이 다 나았어요. 그런데 항암치료 받던 내 친구는 얼마전에 죽었어요. 특히 대체의학 쪽에 이런 이야기가 상당히 많다. 항상 예외라는 것이 존재한다. 선전되는 것은 그 예외들이다. 그 예외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조용하다. 실망했든가 죽었든가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주변에 보면 정말 간단하게 엄청난 질병을 고친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다. 심지어 마치 독립투사인 양 그것의 전파를 위해 '운동' 비스무리한 것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만약 그들의 방법이 정말 성공적이라면 그들은 분명히 노벨의학상을 받을 것이고 큰 병원들은 전부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그런 허위 과학에 속아 치료시기를 놓지는 우는 절대 범하지 말아야 한다.

통계는 생각보다 배우기 어렵다. 그런데 통계적인 사고방식은 생각보다 쉽게 배울 수 있다. 모든 일은 확률 놀음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 통계적인 사고 방식을 가질 필요가 있으며, 통계적으로 의미 없는 유혹에서 자유로워 질 필요가 있다. 이 글이 거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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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
2011. 2. 17. 08:45

나이를 통해 본 야곱의 일생 Bible Stories2011. 2. 17. 08:45

성경은 역사적인 순서대로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의 나열에 대해서만 모호한 것이 아니고 어떤 때는 아무리 봐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그 부분에 대해 덮고 넘어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믿기 때문에 성경을 보는 것이지 성경이 믿어져서 성경을 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확실하지 않다면 당신은 성경을 보기 보다는 믿음을 재확인 해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성경을 통해 믿음을 재정립하는 것도 가능하며, 가장 좋은 그리고 이상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야곱은 창세기에서 가장 자세히 다루어진 인물 중 하나이다. 그런데 나이를 역산하다 보면 참으로 재미있는 사실들을 몇 군데에서 발견 할 수 있다. 먼저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간 나이가 70세가 넘어서 이다. 즉, 라헬, 레아와의 애증의 러브 스토리가 완전 할아버지가 다 된 이후에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더구나 장자권을 에서에게 살 때가 40세가 되기 전이었으므로 (창세기 26:34에 나온 에서의 결혼 전에 장자권을 팔았다) 그 이후 약 30여년간 어머니 품 속에 있었다는 말도 된다. 알다시피 에서는 40세에 결혼을 해서 일종의 독립을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 (창세기 27:13)
리브가가 집 안 자기에게 있는 그의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가져다가 그의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창세기 27:15)
이 내용을 역으로 생각하면 리브가가 가지고 있지 않은 애서의 의복도 있는 것을 뜻하므로 에서는 독립을 해서 살았던 듯 하다. 그런데 이삭은 여전히 결혼도 하지 않고 그냥 집에 있었다. 더구나 리브가가 말하기를 '내 말만 따르고',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라고 하였던 것으로 봐서 별로 줏대도 없고 과단성도 책임감도 없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물론 너무 과한 해석이기는 하다. 그냥 이 부분은 재미로 봐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삭이 180세에 죽는데 그 때가 바로 애굽에 팔려갔던 요셉이 바로를 만나기 1년 전이다. 이삭이 죽고 나서 겨우 27년이 지나 야곱은 147세에 인생을 마감한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성경을 통해 알아 보도록 하자. 난 이런 식의 역산이 매우 흥미롭다. 읽는 사람도 같이 흥미를 느끼길 바랄 뿐이다.

먼저 명백한 것들을 정리해 보자.
사실-1. 이삭 - 40세에 리브가를 만남. (창세기 25:20)
사실-2. 이삭 - 60세에 에서와 야곱을 낳음 (둘은 쌍둥이였음.) → 이삭과 야곱의 나이차는 60년이고 이삭은 리브가를 만난 후 20년이 지나서야 자식을 봄. (창세기 25:26)
사실-3. 야곱 - 밧단 아람에 20년을 있었음 (레아를 위해 7년 라헬을 위해 7년 그리고 라반의 양들을 위해 6년) (창세기 31:41)
사실-4. 요셉 - 17세에 꿈을 꿈. (창세기 37:2)
사실-5. 이삭 - 180세에 사망 → 당시 야곱의 나이는 120세 (창세기 35:28-29)
사실-6. 요셉 - 30세에 바로를 만남. (창세기 41:46)
사실-7. 요셉 - 39세에 형제들을 다시 만남 ← 7년 풍년과 2년 흉년이 지난 후에 만났으므로 바로를 만났던 30세에 9년을 더하면 형제들을 다시 만난 나이가 된다. (창세기 45:6)
사실-8. 야곱 - 130세에 바로를 만남. (창세기 47:9) 따라서 요셉과 야곱은 91세 차이가 난다.
사실-9. 야곱 - 147세에 사망함. (창세기 47:28)
사실-10. 디나는 레아가 낳은 7자식 중에 7번째로 태어났다. (창세기 30:21)

다음으로 추론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사실들을 정리해 보겠다.
추론-1. 사실-4와 사실-6을 통해 요셉이 바로를 만나기 전까지 애굽에서 보낸 시간이 최대 13년임을 알 수 있다.
추론-2. 밧단 아람으로 간 지 7년이 지나고서야 레아, 라헬과 결혼하고 그 이후 자식을 낳기 시작함. (창세기 29:20,27)
추론-3. 요셉은 디나보다도 더 늦게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창 30:21-24) 따라서 레아가 연년생으로 자식 7을 낳았다고 가정 할 때에, 적어도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간 지 15년이 지나서야 요셉이 태어났다. 그런데 창31:25에서 요셉을 낳자 마자 야곱이 라반에게 떠나겠다고 통보하는 장면을 보며, 아마 이 시점이 레아와 라헬을 위한 의무기간인 14년이 끝나는 시점이 아니었겠느냐고 생각하여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간 지 14년이 지나면서 요셈이 태어났다고 보기도 한다. 31:27-28을 보면 직후라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럽기는 하나 그렇다고 의무가 끝나고 나서 일을 계속 했다고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이지도 않는다.
추론-4. 요셉을 낳은 후에 라반에게 고향 땅으로 돌아가기를 구함. (창 30:25) 요셉을 낳은 후 한 동안 양떼를 불려야 했으므로, 요셉은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간 지 늦어도 19년 이전에 태어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 할 듯 하다. 양들도 새끼를 베고 낳고 키우고 하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추론-3의 요셉의 태어난 시기하고도 물리는 문제인데, 즉, 요셉은 야곱이 밧단 아랍으로 간 지 14-19년 사이에 태어났다고 봐야 한다.
추론-5. 밧단 아람에서 돌아오는 도중 세겜에서 디나가 그 땅 추장 세겜에게 강간을 당한다. (창세기 34:1-2) 즉, 이 당시 디나는 강간을 당할 정도의 나이였다. 더구나 레위와 시므온이 복수를 한 것으로 보아 그들 역시 적어도 건장한 청년 정도의 나이는 됐었다고 봐야 한다. (창세기 34:25-26)
추론-6. 디나의 강간사건이 있은 후에 베냐민이 태어난다. (창세기 35:16-20) 베냐민은 야곱의 나이 92세에서 108세 사이에 태어난 것이 확실한데 (사실-4,8),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디나가 강간 당할 만한 나이를 14세로 보고 요셉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고 본다면 베냐민은 야곱의 나이 106세에서 108세 사이에 태어났을 것이라고 추정 할 수 있다.
추론-7. 추론-4에서 야곱이 말한 6년간 라반의 양떼를 지켰다는 것이 (사실-6) 요셉의 출생 이후인지 이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추론-3을 보면 레아가 7명의 자식을 낳은 후에 요셉이 태어났으므로 레아와 결혼 후 적어도 8년이 지난 시점에 요셉이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라반의 양떼를 위한 6년이 시작되기 전에 요셉을 낳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대로, 요셉이 라반의 양떼를 맡은 후에 점박이로 이루어진 양떼가 큰 떼를 이루기까지의 시간이 필요하므로 6년이 지난 다음 요셉을 낳은 것도 아니다. 결국 요셉은 그 6년의 중간 어느 시점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즉, 그 6년중 어느 기간은 품삯 없이 일하였고 남은 기간은 점박이를 갖기로 하고 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추론-8. 추론-3,4,7을 통해 볼 때에 르우벤은 요셉보다 최소 7살, 최대 12살이 많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밧단 아람에 간 지 8년만에 르우벤이 태어난 것은 거의 확실시 되기 때문이다.

위의 추론들을 통해서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야곱의 나이

 

비고

 

요셉의 나이

 

147

56

야곱 사망.

130

39

야곱이 바로를 만남. 때에 르우벤의 나이는 최소 46 최대 51세였다.

121

30

요셉이 바로를 만남.

120

29

이삭이 180세로 사망함.

108

17

요셉이 꿈을 .

106-108

15-17

베냐민이 태어남.

91

0

요셉이 태어남, 야곱이 밧단 아람에 적어도 15 최대 19년째이다.

 

이삭의 나이

 

72-76

132-136

야곱이 밧단 아람에 도착.

40

100

에서가 나이 40 결혼 .

<40

<100

에서에게 장자권을 취득함.


이제 문제되는 것들을 하나씩 살펴 보자. 먼저 야곱이 애굽으로 이주 할 때에 유다와 아셀은 손자가 있었다. 창세기 40:12절에 보면 베레스의 아들로 헤스론과 하물이 나오는데 이 베레스는 유다와 다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창세기 38:29) 즉, 베레스 자체가 이미 손자같은 아들이었으므로, 그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증손자뻘이라고 할 수 있다. 이삭도 60세에 야곱을 낳았고 야곱도 80세 정도에 르우벤을 낳은 것을 상기에 볼 때에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나이라고 하겠다. 당시 르우벤의 나이를 아무리 많게 잡아도 51세였다고 한다면 유다는 4째 아들이므로 아무리 많아도 48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셀의 레아의 네아들과 빌하의 두아들 다음 실바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니 나이를 아무리 많게 보아도 45세가 넘지 않았을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베냐민에서 나타난다. 유다가 요셉에게 베냐민에 대하여 말하며 사용한 단어가 '아이'이다. 어떤 성경에는 'lad'로 어떤 성경에는 'boy'로 번역되어 있는데 말 그대로 아이라는 뜻이다. (창 37:2에 근거하여 boy라면 late teen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For how shall I go up to my father, and the lad be not with me? lest peradventure I see the evil that shall come on my father. (창세기 44:34)
그런데 이주 당시 자손의 이름을 열거한 것을 보면 베냐민에게 이미 아들이 10명이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창세기 46:21) 위의 표를 근거로 야곱이 바로를 만날 당시의 베냐민의 나이를 추론하면 22세에서 24세 사이이다. 물론 많은 처가 있었다면 가능하긴 하겠으나, 별로 현실적이지 않다. 더구나 조상들의 결혼 형태와 비교하면 너무 빠르다.

불행히도 어거지로 숫자를 맞춰보려 해도 쉽지 않다. 이를테면 르우벤이 밧단 아람으로 간 지 8년째에 태어나지 않고 첫 해에 태어났다고 가정해 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7년이 지난 후 정식으로 결혼하고 애들을 낳기 시작한 것이 아니고 바로 결혼 생활을 시작하고 그에 대한 보상을 7년간 했다고 가정 할 수도 있다. 물론 성경에 드러난 내용은 그렇지 않다고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억지로 맞추려고 해 봐도 겨우 24세가 31세가 될 뿐이다. 그리고 유다는 겨우 55세에 증손자까지 봐야 한다.

애굽 종살이 430년(출애굽기 12:41) 광야생활 40년(신명기 8:4) 그리고 애굽에 들어 갈 때의 레위의 추정 나이 50세를 합한 약 520년 간 5대밖에 흐르지 않고 (레위-그핫-아므람-아론-엘르아살-비느하스, 출애굽기 6:16-25, 더구나 창 15:16에 사대만에 돌아오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 예언하고 있다), 애굽 종살이와 사사기 약 350년, 즉, 합해서 780년 기간 동안 겨우 10대밖에 흐르지 않은 것을 볼 때에 위의 계산은 물음표만 남기고 있다. (유다-베레스-헤스론-람-아미나답-나손-살몬-보아스-오벳-이새-다윗, 마태복음 1:1-6).

누구든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면 알려주기를 바란다. 물론 아주 속편하게 성경에 언급되는 사람들은 상징적인 사람들 뿐이므로, 거기에서 5대만 나와 있다고 해서 실제로 5대만 흐른 것은 아니라고 말 할 수도 있다. 즉, 그 사이 사이 더 있었을 거라는 말이다. (그렇게 해설하는 사람들도 많고, 나 또한 그리 틀렸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단 마태복음에서 딱 잘라 14대씩 맞춘 것을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기가 나는 불편하며, 누락된 것만 문제가 아니라 기간에 비해 너무 많은 것도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런 식의 속편한 해석은 타당하게 보이지 않는다.

다만 여기에서 몇 가지 가능한 (그러나 성경적으로는 틀리거나 또는 증명 불가능한) 가설을 몇 가지 이야기 해 보겠다.
  1.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갈 때의 르우벤의 나이가 50세 정도라는 것을 그대로 받아 들인다면, 유다나 아셀의 손자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으며, 베냐민도 10명이나 되는 아들을 두기는 힘들었다고 본다. 물론 아내가 10명이었다면 1년만에 10명의 아들을 낳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에 그렇다는 말이다.
    뭐 어차피 성경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받아들일 수도 있는 문제이나 아무래도 성경에 딱 잘라서 창세기 46:27에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 명이었더라"라고 나온 마당에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기는 쉽지 않은 문제이다.
    더구나 베레스가 태어난 과정을 보면 그 이야기는 애굽에 내려가서의 이야기라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에 분명 그 전에 있었던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유다가 적어도 손자 볼 나이는 되었었다고 보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나도 잘 모르겠다.
  2. 르우벤의 나이가 사실 많았다고 이야기 하자면, 야곱이 밧단 아람에 있었던 기간이 20년 보다 길어야 한다. 즉, 야곱이 밧단 아람에 들어간 시기가 70여세가 되어서가 아니고 한 50세 정도였다고 보고 들어가서 7년이 지난 후에 결혼 한 것이 아니고 결혼은 미리 했는데 그에 대한 의무를 뒤에 했다고 보면 르우벤의 나이를 한 70세 정도로 조정 가능해 지고 그러면 어거지로 약간이나마 맞출 수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너무 오류가 많아서 나 스스로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당장 뚜렷하게 나오는 요셉의 나이부터 문제가 되고 여하간 너무 말이 안된다.
  3. 야곱의 나이는 맞고 요셉의 나이는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편할 것 같다. 야곱이 바로를 만났을 때에 130세는 맞다고 하고 요셉이 39세가 아니었다고 본다면 조금 편해 진다. 즉, 요셉이 바로에서 7년 풍년 7년 흉년을 이야기 하는데 그 7년 풍년이 이야기 한 직후에 시작한 것이 아니고 한참 지나서 시작됐다고 보면 된다. 이를테면 20년 후에 시작했다고 보자. 그러면 요셉이 야곱을 만난 당시의 나이가 59세가 된다.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러브스토리를 만들 당시의 나이가 50대로 떨어지고 르우벤은 대충 70세 정도로 맞출 수 있다. 이야기가 부드러워지고 있다.
    그럼에도 남는 문제는 베냐민은? 아들이 10명이나 있는데 '아이'라고 한 부분은?
어차피 야곱이 애굽에 내려갈 당시의 후손 숫자는 성경에서 대표적인 논란 거리중의 하나이다. (2011/02/18 - [Bible Stories] - 야곱의 후손: 성경은 무오한가) 그 논란을 가만히 살펴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을 맞는 것으로 맞추기 위해 정말 눈물겨운 노력들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덧셈이 다들 안되는 것인지 아니면 성경을 안 읽고 남들이 하는 말을 가지고 재해석을 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어쨌든 그 숫자에는 문제가 있고 누가 틀렸건 틀렸다. 그러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성경의 저자가 하지 않고 넘어갔으나 이면에 자세히 이야기 하기에는 분량상 또는 어떤 이유상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고 인정 할 필요가 있다.

나중에 천국가면 하나님께 물어봐야겠다. 물론 그 옆에 모세 할아버지도 동석시킬 생각이다. 난 그냥 모세 할아버지가 떳떳하게 '뭐 그런 걸 그렇게 오래 생각했어?'라고 말하고 하나님이 '별거 아니잖아?'라고 말씀해 주실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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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BeStable